제28화. 아카데미로 (2)
죽음의 신이 지나간 듯 사방에 흩뿌려진 피의 향내.
벨리아스의 정식 기사 브라이언 켄드릭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1초도 안 되는 시간마다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선 붉은 혈우들이 잔혹하게 쏟아지고 있다.
이게 진정 11살 소년이 벌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기사들의 시체를 바라보던 소년의 시선이 곧 자신에게로 향했다.
“히이익!”
소년과 눈을 마주친 브라이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시안 베르트.
대륙의 수호자 윌리어스 베르트 공작의 막내아들.
불과 1년 전만 해도 가문의 무능아라며 멸시받던 자제였다.
허나 그는 근 1년 사이 영지 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자제로 성장했다.
공작의 인정을 받은 자제.
마수로부터 황녀를 지킨 공자.
데빌 드래곤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귀환자까지.
몰랐던 사람은 과연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시안의 명성은 급격하게 상승해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로부터 암살기술이라도 배운 건가?’
설사 그 명성 높은 상급 기사들이라 해도 저런 잔혹한 검술을 구사하진 않을 것이다.
숙녀의 머리빗만 한 저 작은 검을 쥐고서, 처음에는 무기를 쥐고 있던 양손을, 그다음엔 서 있지도 못하게 두 다리를, 마지막에는 피날레를 날리듯 머리를 절단시키니, 그 모습을 직접 보고도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 잔혹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 시안은 덤덤하게 계곡으로 다가가,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주 있었던 일인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요즘은 기사가 마부 짓도 병행하나 보지?”
시안이 무신경한 어투로 물었지만, 브라이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 말하고 싶어도 떨리는 성대에서 애먼 신음만 나왔다.
세안을 마친 시안은 터벅터벅 걸어와 무릎을 꿇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불어.”
귀신이 속삭이듯 오감을 자극하는 한 마디.
아무런 반항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는 의미였다.
더 이상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마음에 따라 언제든 지옥의 불구덩이로 보낼 수 있는, 잔혹한 죽음의 집행자일 뿐.
공포에 질린 브라이언은 무언가에 홀린 듯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 마가렛 공작부인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다! ‘로얄 아카데미로 가는 시안 도련님을 여정 도중에 암살하라.’ 저를 비롯해 총 7명의 기사들에게 내려진 비밀 지령이었습니다!”
“사유는?”
“자,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들은 이야기는 있습니다! 넷째 크란츠 도련님이 아카데미로 가시기 전, 공작부인에게 뭔가를 간곡히 부탁드렸다 합니다! 아마 그걸 수용하신 공작부인께서 이 일을 내리신 건 아닐까 하며, 저희끼리도 그저 추측만 하고 있었습니다!”
시안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었다.
“어쩐지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더니만…….”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서. 만약 날 죽이는 데 성공하면, 그 뒤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다시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한 뒤, 도적들의 습격을 받고 죽어, 사망 처리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다음엔 약속된 보수를 받고 끝내기로……”
“보수?”
이야기를 듣던 시안이 피식하고 웃었다.
“너희 죄다 말단이지? 수습에서 이제 막 정식기사 단…….”
“그, 그렇습니다만…….”
“하나 알려줄까? 니들 돌아갔으면 바로 사형이야.”
“……!”
“수호에 실패해 날 죽게 만든 너희가 ‘공자는 그만 도적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어버렸습니다’ 하면, 그쪽에서 알겠다 하고 넘어갈 줄 알았냐? 당연히 임무 실패의 죄를 묻고 값을 치르라 하겠지.”
브라이언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게다가 전문 용병들도 아니고 말단 기사들한테 보수? 설사 준다고 하더라도 감히 공작가의 자제를 죽인 네놈들을 그 여자가 가만히 놔뒀을 것 같아?”
“허, 허나 그분께선 저희에게 안전을 보장해주시겠다고……?”
시안은 급기야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긴, 말단인 너네가 공작부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겠냐? 별거 없어. 너흰 그냥 그 여자의 쓰고 버릴 소모품이었던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쓰다 버릴 소모품.”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7명의 말단 기사들에게 내려진 급작스런 암살 임무.
수상하다고 느낄 순 있을지언정, 그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영지의 기사들이었다.
정리하자면 그냥 재수가 없었던 것.
자신들은 아무런 거부권도 없이 그냥 죽음의 구렁텅이로 던져진 것이었다.
진실을 깨달은 브라이언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온몸을 떨었다.
“저도…… 죽이실 겁니까?”
조금은 체념한 듯한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전 이제 말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필요성이 없는 절 더 이상 살려 두실 이유도 없으시겠죠.”
“…….”
시안은 말없이 고개 숙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원망스럽진 않고?”
“도련님을 먼저 죽이려 했던 건 저희입니다. 원망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시안은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필요성이 없는 거랑 살려 둘 가치가 없는 건 달라.”
“예?”
“난 그런 놈이 아니거든.”
브라이언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넌 아직 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어.”
“무, 무슨 일을 말입니까?”
시안은 고개를 까딱하며, 널브러진 시체들 옆에 덩그러니 놓인 마차를 가리켰다.
피가 조금 튀긴 했어도 말과 마차는 흠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너 마차 잘 몰더라.”
* * *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긴? 내가 그 먼 곳까지 두 발로 걸어갈 수도 없잖아.”
[얼씨구, 그 잘난 신의 힘은 묵혀서 메주 쑬 거니? 마차야 비기를 써서 움직이면 될 걸, 굳이 저런 놈을 쓸 필요가 있어?]
“세간에 유령 마차 다닌다고 홍보할 일 있냐? 왜 아예 안개 신의 계승자가 돌아왔다고 떠들고 다니라 하지?”
[아주 자비로우신 암살자님 납셨네!]
케이람은 비아냥거리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자비롭다, 라…….
글쎄 이걸 자비롭다고 해야 할진 모르겠군.
같이 온 동료들은 전부 죽고 혼자 산 놈이 어찌 보면 원수가 타고 있는 마차를 몰아주는 셈인데.
솔직히 모멸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아닌가?
뭐 굳이 살릴 필요가 있었냐는 케이람의 말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만, 반대로 말해 죽일 필요도 없었다고 본다.
어차피 돌아 가봐야 개죽음 당할 게 뻔한 놈을, 나름 좀 더 이용한다면 이용하겠다는 건데, 녀석도 뭔가 살 건덕지가 늘어난다면 서로 윈윈이지 않겠는가?
나는 마부석 쪽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두구두구
사방을 주시하는 시선과 고삐를 쥐고 있는 각 잡힌 자세.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와 중간 중간 마주치는 장애물들을 능숙하게 흘리는 모습까지.
거친 광야를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덜컹거림 하나 없는 매우 만족스런 승차감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내가 도중에 잠까지 빠져들 정도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흡!”
낯선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브라이언이 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로 인해 순간 고삐가 틀어져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피, 필요하신 거라도?”
“없어. 운전에 집중해.”
“예…….”
브라이언은 다시 황급히 자세를 잡으며 정상적인 운행을 유지했다.
“너 몇 살이야?”
“오, 올해로 열아홉입니다.”
열아홉. 에밀리랑 동갑의 나이였다.
“말도 안정감 있게 잘 모는 게 그냥 이쪽 일이 더 어울려 보이는데, 넌 어쩌다 정식기사가 된 거냐?”
멋쩍게 머리를 긁던 브라이언은 이내 조심스럽게 답했다.
“사, 사실 전 말이 수습 기사였지. 그냥 영지 내에서 잡일을 하던 노역 꾼이었습니다. 최근 영지의 정식기사들이 다른 곳으로 대거 차출되는 바람에, 그냥 운 좋게 기사가 되었던 거죠.”
“영지의 기사들이 차출되었다고? 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1년 전쯤부터 황성을 비롯해 제국 곳곳에서 개인 호위병들을 구하는 귀족들이 많아졌다 합니다. 보수도 좋고 대우도 꽤 괜찮다는 터라, 능력 좀 있는 기사들은 이미 상당수 빠져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전선에 오래 있다 보니까, 이쪽 소식은 몰랐던 건가?
하기야, 전선을 지키는 기사들은 대부분 빛의 기사단 소속이니, 영지 기사단과는 별개라지만 이건 꽤 의외의 사실이었다.
설마 영지 기사들이 차출 될 정도로 호위병들을 찾는 빈도가 늘어났었다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나긴 났나 보군.
“그래서 넌 그냥 머릿수 채우기로 기사가 된 거다?”
“예…… 뭐 정식 기사라는 게 쉬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죠. 확실히 자주 올 기회는 아니었으니까요. 정식기사가 되었어도 하는 일은 똑같았지만…….”
그래, 내가 봐도 네놈이 운 하나는 좋았다고 본다.
네가 만약 마부의 옷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너도 그 자리에서 똑같이 죽었을 테니까.
정적이 이어질 때쯤, 광야 저 끝으로 도시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 사페른이 보입니다, 도련님!”
제국의 중부도시 사페른.
큰 도시는 아니어도, 제국 내에서 꽤 부유한 영지로 속하는 곳이었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 검문소에 다다르니, 무장된 경비병들이 다가와 마차 앞을 막았다.
“어느 곳에서 오셨습니까?”
“아, 저 그게 그러니까…….”
마부석에 앉은 브라이언은 무어라 말도 못 한 채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누가 보면 뒤에 시체라도 숨긴 줄 알겠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경비병에게 직접 베르트 가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벨리아스의 영주 베르트 공작의 아들 시안 베르트. 로얄 아카데미로 가기 위해 루웬으로 가는 중이야.”
문장을 확인하던 경비병들은, 이내 내 복장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차림새를 살펴보는 거라 했다.
잘 다려진 화사한 은색 제복이 그런 나의 신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혼자…… 오신 겁니까?”
“옆에 마부 겸 수호기사 한 명이랑.”
경비병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와 브라이언의 얼굴을 3초간 번갈아 보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출입은 허가해 드리죠.”
수속을 마친 경비병들은 바로 길을 내었다.
“조언이라 해드리긴 뭐하지만, 여유가 되신다면 도시에서 수호기사들을 몇 명 고용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요즘 제국의 분위기가 워낙 흉흉해서 말이죠.” “조언 고마워. 생각은 해볼게.”
나는 다시금 마차에 올라, 사페른으로 진입했다.
“…….”
도시에 들어선 순간, 뭔가 삭막한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경계심이라고나 할까?
이를 증명하듯 거리 곳곳에 칼과 창으로 무장한 다수의 호위병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분명 내가 알던 이 시기의 사페른은 이러지 않았을 터.
뭔가 이 도시를 그저 거쳐 만 가지는 않을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 어디로 가면 될까요, 도련님?”
“여관으로. 호화스러운 데 말고, 마차를 맡길 수 있는 데면 아무 곳이든 좋아.”
“알겠습니다.”
일단은 짐을 두고 천천히 살펴보기로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