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마계의 최강자 (1)
드래곤.
신의 피를 이어받은 계승체이자 창조주와 가장 가까운 생명체들.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고귀한 존재이자, 하등 부류들로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는 종족이라 하였다.
“……!”
땅에 발을 붙이고 있던 모든 이의 눈들이 하늘로 향했다.
커다란 날개를 활짝 핀 채 비바람 속을 유유히 날고 있는 보랏빛의 드래곤.
뱀처럼 길에 늘어진 몸체는 막사 하나는 끌어안을 정도의 크기였으며, 양 쪽으로 뻗은 네 개의 발에는 검을 박아 넣은 듯 날카로운 발톱이 솟아있었다.
이마에 자라난 흑빛의 일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음산한 한기를 느끼게 하니, 기사들은 물론이고, 황제를 비롯해 전선에 뼈를 묻고 살았던 공작까지, 모두가 크게 벌어진 눈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게 윌리어스! 내 암만 봐도 저건 드래곤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맞습니다. 크기로 봤을 때 아직 성장형으로 보이긴 하나, 틀림없는 데빌 드래곤입니다.”
“자주 나타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 또한 이렇게 주둔지 안에서 직접 마주한 적은 처음입니다.”
레메아 협곡에 수많은 마수들이 살고 있다곤 하나, 거기에 드래곤까지 살고있진 않았다.
정말 가끔씩 마계의 먼 하늘에서 크게 날개 짓하는 형상만 아른 거렸을 뿐, 골짜기 이내로 넘어오는 경우는 정말 없다시피 한 일이었다.
데빌 드래곤은 그 크기와 생김새가 직접적으로 관찰이 될 만큼 상당히 저공에서 비행 중이었으며,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 그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키에엑!”
뭔가 고통스러워하는 신음까지 남발하는 등 일단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듯 보였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잠시 동안 발을 떼지도 못한 채, 드래곤의 동태를 지켜보던 찰나.
“저기 좀 보세요!”
잠시 주눅 들어있던 아린 황녀가 굉장히 또렷한 목소리로 한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데빌 드래곤의 발목 쪽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해당 방향으로 향하자, 곧 드래곤의 오른쪽 발목 근방에 낯익은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비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다소 제한되었긴 하나, 흡사 어린 아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드래곤의 발 한 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
초점을 잡기 위해 잠시 움츠려졌던 공작의 시선이 번뜩 뜨였다.
매달렸던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시, 시안?”
“저, 저건 자네의 아들이 아닌가?”
황제를 비롯한 나머지 기사들도 저마다 그 존재를 확인한 순간, 그들의 시선이 하나 같이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어, 어째서 저기에……?”
황녀를 대피시키고 홀로 마수를 유인시켰다던 그가, 어째서인지 드래곤과 함께 거센 밤하늘을 유유자적하게 나닐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일.
굉장히 복잡해진 상황이었지만 공작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경위 따위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어쨌거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명백한 거물급 마수.
출몰한 마족들은 전부 소탕해야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인 이상, 설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의지를 굳힌 공작의 오른손에서 방대한 양의 마나가 발현되었다.
“신념을 담은 마음의 검이 하늘로 비상하리라!”
주문과 함께 하늘을 향해 푸른빛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차례차례 소화되는 다섯 개의 광검.
그 찬란한 검의 끝은 전부 공중에서 비상하는 데빌 드래곤을 향하고 있었다.
* * *
난감하다.
난감하다 못해 굉장히 난해한 상황이다.
둥둥 떠 있는 발 밑 아래로 100개가 넘는 눈들이 하나 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전선과 황군의 기사들부터, 그 중심에 있는 황제와 공작, 구석에 쭈그려 앉은 에밀리에, 웃는지 우는지 복잡 미묘한 얼굴의 아린 황녀까지.
그냥 마주치지 말아야 할 모든 이들을 싹 다 만나버린 상황이었다.
[야! 왜 또 갑자기 석고상이 된 거야? 이 놈 안 잡아?]
“이 놈 잡다가 내가 잡혀버릴 판이다 지금!”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10분전.
블러드 리버에서 트롤의 사체를 처리한 나는, 지상 최고의 종족 드래곤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음엔 이놈이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아주 잠깐 동안 혼란스러웠다.
마계 깊숙한 곳에 사는 거물급 마수가 전선 지역으로 넘어온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기에, 사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황했던 것도 정말 잠시였을 뿐. 머지않아 케이람을 움켜쥐고선 바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하찮은 중하급 마수들 따위랑 비교가 안 되는 거물급 마수의 피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취하지 않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고귀한 존재?
창조주들로부터 바로 아래의 있는 종족들이라곤 하나, 그렇다고 한 명 한 명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것도 아니다.
가령 인간들도 힘 있는 강자와 나약한 약자로 분류되듯이, 이들 역시 드래곤이라 해서 모두가 강하진 않았다.
게다가 내가 붙잡고 있는 이놈은 완전체도 아닌 성장형 개체.
경험이라곤 쥐뿔도 없는 햇병아리를 상대로 고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달려드는 나를 보고 흥미를 느꼈을지언정, 녀석은 얼마 못 가 꽁무니 빠지게 달아나고 말았다.
결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기에 비기 까지 쓰면서 놈의 발목을 간신히 붙잡았건만…….
정말 어이없게도 애먼 이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뭐야? 너 지금 저 아랫놈들 눈치 보느라 가만있었던 거야?]
“그럼 대놓고 난도질 쇼라도 보여줄까?”
[아 그럼 어쩌겠다는 건데? 이렇게 계속 빙빙 돌기만 할 거냐고!]
기껏 마검 발현까지 해놓고 끝을 못 내고 있으니, 케이람은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마음은 이해할지언정, 지금 여기서 놈을 추락시키고 숨통을 끊었다간 그대로 황성까지 압송 될 일이었다.
차라리 내가 드래곤에게 납치된 걸로 보이는 것이 더 낫진 않을까 생각해보던 찰나, 저 아래에서 낯익은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우우웅
상급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고등급의 마법진.
시전자는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잠깐, 저 마법은 좀 위험한데?
“신념을 담은 마음의 검이 하늘로 비상하리라!”
주문과 동시에 공중으로 겨눈 다섯 개의 광검이 나를 향해, 정확히는 데빌 드래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8성급 빛속성 마법 ‘천공의 비검’.
분명 아들이 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위험한 마법을 날린다고?
역시 드래곤이라 해도 결국은 처리해야 할 마수란 건가?
정말 참된 대륙의 수호자님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위험을 감지한 데빌 드래곤을 재빨리 몸을 틀어 회피했다.
-푹!
허나 피할 수 없는 궤적으로 쏘인 마지막 검이 데빌 드래곤의 다리로 꽂히고 말았다.
“쿠에에엑!”
비명과 함께 크게 몸부림치는 데빌 드래곤.
“……!”
순간 여파를 이기지 못한 내 손이 붙잡고 있던 녀석의 발목과 떨어지고 말았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내 몸은 그대로 공중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슈우웅
아픔이 한창일 와중에도 내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데빌 드래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 저걸 눈앞에서 놓쳐버리네…….
허나 지금은 떠나버린 먹잇감을 아쉬워 할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넋 놓고 떨어졌다간 꼼짝없이 지옥의 사신과 인사할 판이었다.
저 아래에선 떨어지는 나를 받기 위해 기사들이 뛰어오고 있다곤 하나, 사실상 턱도 없는 거리였다.
[뭐해? 땅바닥이랑 키스 할 일 있냐? 빨리 안 날아!]
“너 같으면 지금 상황에 날 수 있겠냐?”
[그럼 멀대들 눈치 보다가 그냥 뒤질래? 너 이대로 떨어져서 뒤지면 나한테 두 번 죽을 줄 알아!]
그럼 전생까지 포함해서 세 번 죽는 건가?
우스갯소리긴 하다만, 사실 지금이 엄청 위급한 상황이란 건 알고 있다.
허나 그렇다고 저 수많은 눈들이 보는 앞에서 비기를 쓸 수도 없는 일.
어쩌나 싶어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그 순간,
-콰아아
귓가에 퍼지는 세찬 물소리에 눈이 번뜩 뜨였다.
내 몸이 떨어지고 있는 정확히 밑 방향에서 흐르는 붉은 빛의 급류.
트롤의 사체를 처리했던 블러드 리버의 한 줄기였다.
강의 자태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 건가?”
[야 주인!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설마 저 아래로 빠질 생각 하는 거 아니지?]
“한 번 씻을 때도 됐잖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너 미쳤어? 지금 저 더러운 물에 날 씻기겠다는 거야?]
케이람은 들끓는 화산 마냥 머릿속에서 폭언을 퍼부었지만, 모두 깡그리 무시하였다.
지금 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방법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혹여나 잘 못 추락해 지면과 키스하지 않도록, 몸을 수차례 회전시켜 블러드 리버의 정중앙으로 이동했다.
-풍덩!
오래 걸릴 것 없이 내 작은 육신은 차디찬 피의 물결과 극적인 만남을 이루었다.
* * *
-슈우우웅
대뜸 머리 위에 성장형으로 추정되는 데빌 드래곤 한 마리가 쌩 하고 지나갔다.
땅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카리온’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빌 드래곤이 저쪽에서 날아오다니. 의외네?”
드래곤이 날아온 방향은 레메아 협곡 쪽이었다.
“보아하니 상처를 좀 입은 것 같군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드래곤 한 마리가 길을 잘 못 들었다가 크게 해를 입고 온 모양입니다.”
곁에 있던 중년의 마족이 말을 덧붙이자, 벨카리온은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흐음, 그래? 조금 건방진 놈들이긴 해도 드래곤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다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 저 너머에 꽤 강한 마수들이라도 있나보지?
“글쎄요. 만약 그랬다면 마수들 보다는 인간들이 그랬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인간? 그 나약하다 못해 헬하운드만도 못한 놈들? 로저스 너 개그가 좀 늘었구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마족은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헬하운드보다 못한 놈들이었으면, 저 너머의 땅을 아직까지 그들이 쟁취하고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시작은 제일 하찮고 보잘 것 없긴 하나, 발전 가능성만큼은 어느 종족도 따라올 수 없는게 바로 인간입니다.”
“오! 로저스 너 생각보다 잘 아는데? 인간들을 직접 보기라도 한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평생 여기서 살았는데…….”
“뭐야? 그러면서 무슨 아는 척은…….”
“과거의 역사들을 바탕으로 말씀드린 것뿐이옵니다.”
벨카리온은 기가 팍 샌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고 다시 가던 길을 가려했지만, 어째서인지 애먼 고개가 자꾸만 협곡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어떤 기운에 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경 쓰이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 이상하게 저 협곡 쪽에서 굉장히 오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치 낯선 것 같으면서도 또 익숙한 느낌이랄까?”
중년의 마족 또한 협곡 쪽을 바라보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 아무것도 안 느껴집니다만……”
“아 그런 게 있다니깐! 잠시만 기다려봐!”
벨카리온 아랑곳 않고 협곡 쪽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도 왠지 저곳에 간다면 재밌는 일이 생길 것만 생뚱맞은 기분이 들고 있었다.
“로저스, 일정은 잠깐 취소해야겠다. 나 급하게 다녀올 데가 생겼어.”
“상관은 없습니다만 부탁드리는데 얌전히만 다녀오십시오. 뭔가 화나는 일이 생겨도 다 때려 부수지 마시고요. 안 그럼 제가 굉장히 골치 아파집니다.”
어차피 말려 봐야 안들을 것을 알기에 중년의 마족은 그저 적당히 주의만 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귀를 후비적거리며 듣는 체 만 체 하는 벨카리온 이었다.
시선은 계속해서 협곡 쪽에 고정되어 있었고, 혈기가 솟구쳤는지 눈마저 붉게 변색되고 있었다.
-펄럭
등에서 활짝 펼쳐진 검은 날개와 함께 벨카리온은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습에 이미 뭔진 몰라도 제대로 꽂힌 듯 보였다.
“제발 사고만 치지 마십시오…… 마왕님.”
중년의 마족은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며 그저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