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마검의 주인 (2)
창세력 999년 8월 12일.
벨리아스를 점령한 마계군단을 마침내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의 군세는 매우 강력했으며, 이를 경험한 연합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언제 다시 마계군단이 침공해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이에 인간들은 힘의 한계를 느낀 것과 더불어, 비로소 신의 무구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300년 전 신마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지워진 대륙이지만, 그래도 곳곳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일부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인간들은 그 미약한 정보들을 야금야금 긁어모았고, 곧 신의 힘이 깃든 구시대의 유물들이 대륙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중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단연 빛의 신 루멘델의 가호가 서린 성검 듀란다르크였다.
빛의 취약한 마족들의 특성상 루멘델의 힘은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에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문제는 그 검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확인 할 수 없다는 것.
그저 빛의 신전이 자리했을 걸로 추정 되는 대륙 서부 어딘가로 가늠할 뿐이었다.
뭐 결국 찾긴 찾았다.
그것도 내가.
진짜 우연이었다.
마왕군으로부터 탈환한 벨리아스 일대를 둘러보던 와중, 불현 듯 저택 뒷산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마족과의 전투로 지친 심신을 달래면서,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할 심산이었는데, 이게 웬걸?
정상에 올라 풀 바닥에 대 자로 뻗은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주변 마나의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다.
이것은 마치 산 아래에 있는 무언가가 일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
코흘리개 땐 몰랐던, 이 산 아래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설마 전설의 성검이 다름 아닌 여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람을 모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산 아래에 성검이 잠들어 있는 빛의 신전이 있음이 밝혀졌다.
말 그대로 기막힌 우연의 일치.
누가 찾았는지는 상관없이 검은 에쉘이 가져갔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가 소유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절차인 듯 모두가 인정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애초에 내가 사용하기 적합한 검도 아니었으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우연이나마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검 회수의 목적을 완료하고 돌아가려던 찰나, 나는 성검이 꽂혀있던 제단 뒤로 무언의 기운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는 법.
허나 그 그림자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성검의 그림자에 숨어 공존하고 있던 또 하나의 기운.
나는 그 기운에 이끌리듯 홀로 신전을 찾았고, 결국 성검과 함께 잔재했던 마검의 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마검 케이람.
성검 듀란다르크와 함께 세상의 양기를 관장하는 검으로,
끝없는 어둠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신의 무구였다.
검자루에 박힌 흑색의 보석은 어서 자신을 뽑으라는 듯 나를 유혹하였다.
나는 그 유혹에 이끌리듯 검을 뽑았고, 그 순간 내 운명은 다시 한 번 뒤바뀌게 되었다.
* * *
[너, 너? 대체 뭐야? 어떻게 내 몸에 손댈 수 있는 거냐고?]
“몰라서 묻는 거 아니잖아? 이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 밖에 없지 않겠어?”
제단에 꽂혀 있는 마검과 그 위에서 검은 안개로 이어져 있는 흑발의 여인.
그녀는 살아있는 생물체가 아닌, 영적인 존재로 맨 손으로 잡는 건 절대 불가능 하다.
하지만 내 손은 굳건하게 그녀의 목을 쥐어 잡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나에겐 그녀를 제어할 수 있는 특수한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어, 어째서 ‘아에르’의 기운이 네놈한테? 꼬마 너 설마, 그놈의 계승자인 거니?]
“계승자였었지……. 사실 지금도 맞긴 맞아.”
[그게 뭔 말 같지 않은 소리야! 그놈이 새긴 각인이 네 몸뚱이에 뻔히 다 보이는데!]
솔직히 지금의 나는 뭐라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애매한 상태.
그것을 알 리 없는 그녀가 노발대발 하며 화내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난 지금 명백히 사실을 말하는 중인데.
“쉽게 가자, 케이람. 나도 아직 확실치 못한 상황에서 이런 저런 설명하는 거 귀찮거든? 그냥 조용히 따라와 주는 게 어때?”
그녀의 눈살이 심히 찌푸려졌다.
[그 머저리의 정신이 기어이 출타했나? 야 꼬맹아! 너 자꾸 기어오르는데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
“암무 9식: 마검 제어.”
[흐으윽!]
손가락을 튕겨 영창을 외치니, 앙칼지게 대들던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한다.
[크, 크으윽…….]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 쉬었다.
-쑤욱
그 사이 제단에 꽂힌 검을 뽑아보니, 그와 동시에 케이람은 안개와 분리되면서 완벽한 인간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미안, 간만에 하느라 힘 조절이 안 됐다…….”
조금 심했나 싶어, 바로 사과 했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안으면서도 나를 향해 소리쳤다.
[꼬, 꼬마 너! 여자를 그렇게 아프게 했다간 오래 못산다?]
역시 이런 걸로 정신 차리면 내 애검이 아니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려는 것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참아냈다.
이 여인의 정체는 마검 케이람의 정신이 깃든 영혼.
즉 이 검의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보면 된다.
“이쯤 되면 더 증명할 필요도 없지? 아에르의 계승자를 따르는 게 네 존재 이유잖아. 그만 내 손잡고 나가지 않겠어?”
숨을 헐떡이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제단 위에 턱하니 앉아 도도한 눈빛으로 내 전신을 훑어보았다.
[너, 그거 본 모습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건 아니잖아?
[겉은 분명 10년 언저리 밖에 안 산 햇병아리인데, 어째서 속은 꽉 차 있는 거야? 이건 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네?]
사람은 원래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까.
그거 하나만큼은 전생에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다.
검을 들어 도신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쪽에는 현재의 내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열 살의 소년이,
그 반대론 죽기직전, 미련했던 전생의 내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내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무엇 하나 부정할 필요 없다.
결국 둘 다 나일뿐이다.
“짧게 설명 해줄게. 난 이미 한 번 죽었던 놈이야.”
[한 번 죽었던 놈이라고?]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쉽게 말해 회귀라고 할까? 전생에서 배신의 칼날을 맞고 요절하긴 했지만, 이유모를 현상에 휩쓸려 과거로 돌아왔어. 그 한 번의 인생에서 난 아에르의 선택을 받았고, 너와 함께 전장을 누볐지.”
[그,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몸에 털도 안 난 햇병아리가 널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말이 되고?”
케이람은 말하다 못해 머뭇거리고 말았다.
확실히 한 번 들은 걸로 쉬이 믿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허나 내 말을 진실로 가정한다면, 내가 신의 무구를 제어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 또한 분명하게 정의 할 수 있다.
잠시 고민하던 케이람이 이내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야?]
“시안, 시안 베르트…….”
[진짜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데? 네가 아에르의 선택을 받았었다고?]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너와 이런 대화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무능아였던 전생의 내가 케이람을 제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그건 어떤 신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계에서 조차 배척당한 검은 안개의 신 아에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흠, 그놈이 암만 괴짜라고 해도, 코흘리개를 선택할 만큼 바보는 아닌데…….]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가치 있는 법.
그녀도 내 말을 완전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방금 전 보여준 비기와 더불어 지금 내 몸에서 풍기는 그의 기운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을 테니…….
[근데 좀 이해가 안 된다? 나를 손가락으로 제어할 수 있을 정도면, 애초에 그놈의 힘은 전부 마스터한 모양인데, 대체 전생엔 뭘했길래 일찍 요절한 거야?]
아픈 부분을 찌르네.
뭐 이제와 말 못할 것도 아니다.
“별거 없어. 그냥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뿐이야.”
[배신? 아~ 통수 맞은 거구나? 마검의 주인치곤 꽤 볼품없는 최후네? 하긴 뭐 통수 앞에 장사 없다고 인간인 네가 별수 있었겠니~?]
손을 흔들며 비웃던 그녀가 이내 정색하며 말한다.
[하지만 명심하렴. 네가 회귀를 했건, 뭘 했건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 그저 내 눈에 조금이라도 찌질 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 널 바로 집어 삼킬 거야! 알겠니?]
케이람의 손가락이 나의 입술을 훑었다.
좋게 넘어갈라 했는데 역시 성격이 나오는 건가?
조롱 아닌, 도발에 덤덤했던 내 마음이 살짝 꿈틀거렸다.
나는 티내는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지금 이 땅에서 널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간은 나밖에 없어…….”
[호?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실까? 그런 대단한 분이 왜 요절을……]
-탓!
텅텅 비어있던 나의 왼손이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손도 못 쓰고 당해버린 케이람은 어느새 나와 같은 눈높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적당히 기어올라, 케이람. 신의 무구가 주인 잘 못 만나 고기나 썰면서 살 순 없잖아?”
오해하지 마라.
나는 지금 한 없이 자비로운 미소로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결코 경고나 협박 따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 내 얼굴은 한없이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네가 과연 나를 만족시킬 만한 주인인지!]
케이람 또한 흥미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역시 내 애검답네.
[근데 말이야…….]
대뜸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
무언가 굉장히 불쾌감을 느낀 듯 보였다.
[밖에 저 멀대 자식은 아직도 있는 거야?]
“멀대?”
뒤를 돌아보니 열려진 문틈 사이로 성검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텅 빈 신전 안에서 멀대라고 지칭할만한 물건은 단연 저것 밖에 없었다.
나는 케이람을 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 막 나온 터라, 듀란다르크의 빛은 좀 전 보다 훨씬 더 밝게 느껴졌다.
[와! 설마 했더니 여직 자고 있네? 아직 주인이 안 나타난 거야?]
성검을 본 그녀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영원히 안 나타난다면 그게 더 좋을지도…….”
그냥 이 자리에서 파괴해 버릴까 싶으면서도, 그랬다간 굉장히 골치 아플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또 다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케이람.
그러다 불현듯 한 마디를 던진다.
[전생에서 네 통수 쳤다는 놈, 저 멀대의 소유자지?]
순간적으로 속이 움찔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덤덤히 돌아선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검을 그런 똥 씹은 표정으로 볼 인간은 아마 온 역사를 통틀어 너밖에 없을 거다. 딱 봐도 ‘얘가 전생의 내 원수요’ 하고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써있고만, 못 알아보는 게 바보 아니니?]
나름 포커페이스 한다고 한 건데, 설마 티 났을 줄이야.
그 만큼 이 검과 주인에 대한 나의 증오가 크다는 얘기겠지.
“역시 나이 짬밥은 허투루 있는 게 아니란 건가?”
[애써 무덤덤한 척 하긴. 그래서 이번 생은 그 성검의 주인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거야?]
“아니, 그 정도론 부족하지.”
잠시 주저했던 마음에 다시금 활기가 돋았다.
나는 케이람이 보는 앞에서 성큼성큼 성검에게로 다가갔다.
-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검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텅! 텅! 텅!
제단에 깊숙이 꽂혀있던 검은 좀처럼 쉽게 뽑히지 않았다.
몇 번의 발길질을 끝에 성검은 제단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검의 주인이 언제, 누가 가져가든 이젠 아무 상관없다.
생명의 빛을 이끌 구원자?
난 그 구원자의 낯면을 철저하게 알고 있는 자다.
그런 내가 이 검과 그 주인을 또다시 섬길 이유는 곧 죽어도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복수가 아닌 굴복이다.
[……?!]
잠자코 지켜보던 케이람의 눈도 이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돈 돼야 하지 않겠어?”
어느새 내 두 발은 성검의 영롱한 도신을 짓밟고 있었다.
검자루에 박혀 있는 금빛의 보석이 나를 원망하듯이 바라본다.
진정한 구원자라면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 법이지.
-툭
큰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보석은 쉽게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성검의 찬란한 빛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보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걸로 뭘 하려고?]
케이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당장은 뭘 할 순 없어도, 나중이 재밌지 않을까?”
이걸 찾기 위해 나에게 머리를 조아릴지, 아니면 빼앗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울지.
뭐가 됐든 나에겐 흥미로운 일이다.
하물며 후자라면 더욱 재밌는 일이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