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콰쾅!
귀를 찢는 굉음이 일었고.
파앗!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공허에서 흘러나온 괴물들이 명을 달리했다.
아론과 헤핌, 그리고 쿠브는 전력을 다해서 녀석들을 쓰러트려 가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들은 그렇게 차츰차츰 균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투확!
괴물의 커다란 몸이 터져나갈 때마다 녀석들의 피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아론은 그 찐득하고 기분 나쁜 것들을 감내해가며 꿋꿋하게 나아갔다.
‘제길. 균열까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어째선지 괴물들의 수도 점차 늘어나는 것 같은데?’
그것은 아론의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녀석들은 이 차원의 생기에 이끌려서 점점 넘어오는 공허 괴물의 수가 늘어났다.
달리 해결책은 없었다. 늘어난 수만큼 더 많은 괴물들을 해치우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전투를 치른 아론은 드디어 균열의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아론은 균열 너머를 본 순간 저절로 몸이 굳었다.
‘멀리서 봤을 때랑은 차원이 다르네.’
균열의 내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꺼림칙한 혼돈만이 가득했다.
아론은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계속해서 내부를 보고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균열에서는 지금도 공허 괴물들이 넘어오는 중이었다. 녀석들은 이곳의 생명체가 뿜어내는 기운을 먹어 치우기 위해서 날뛰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된다.’
균열까지 거의 도달한 상태였다.
아론은 얼른 저 균열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나를 엄호해 줄 수 있겠나?”
“맡겨 주십시오.”
아론은 헤핌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헤핌은 균열의 코앞까지 간 다음에 자신의 도끼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화아악!
그러자 도끼에서 신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나온 신력은 균열로 스며들어서 틈을 메워나갔다.
‘저런 방식으로 균열을 닫으려고 하시는구나.’
그때, 좁아지는 균열을 비집고 나와 헤핌을 공격하려는 공허 괴물이 있었다.
파앙!
아론은 곧바로 녀석에게 마법을 날려 치명상을 입혔다.
헤핌의 노력 덕분에 균열은 좁아져 가고 있었다. 아론은 부디 별일 없이 균열이 닫히기를 바랐다.
쩌적!
그러나, 아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메워지고 있는 균열의 근처에서 또 다른 균열이 생성되는 것이 보였다.
‘뭐, 뭐야?’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쩍! 쩌저적!
생겨난 균열은 하나가 아니었다. 균열은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중이었다.
“이런……!”
그 광경을 본 헤핌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늦었던 것 같군.”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공허의 괴물들이 몰려오면서 차원의 틈 사이에 충격이 심하게 가해진 모양이다. 이렇게 균열이 여러 개 생기는 것도 차원 붕괴가 일어나는 현상이지.”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까?”
“본격적으로 붕괴가 시작되면 균열을 막는 것만으로는 무리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좌절감을 느꼈다. 겨우 괴물들을 물리치면서 여기까지 왔건만, 마땅한 방법이 없다니.
“더 이상 공허 괴물들이 이 차원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지금 내 힘으로는 균열 하나를 겨우 메우는 것이 전부지.”
헤핌은 새롭게 생겨나는 균열들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 균열들을 메우면서 차원의 붕괴를 막으려면 또 다른 신이 필요하다.”
“예? ……아!”
아론은 헤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쿠브에게 향했다.
서걱!
쿠브는 황금빛 물결을 뿌리면서 공허의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쿠브는 대지의 신이라고 했었지.’
아론이 신력을 터득한 이후로 쿠브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아론과 대등할 정도의 전투력을 갖췄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힘이 아직 신에 비견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신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상태군.”
헤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달리 방도가 없을까요?”
“으음.”
헤핌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잠깐이지만 저 정령을 완전한 신으로 만들 방법이 하나 있다.”
“정말입니까? 그게 뭡니까?”
“정령에게 신력을 주입하는 거지. 정령이 신의 힘을 완전히 갖출 때까지 말이야.”
“……예?”
방법을 들은 아론은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그만한 신력을 쿠브에게 어떻게 준단 말인가. 아론은 그 정도의 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펜던트에 저장되어 있던 신력도 이제는 바닥이 난 상태야.’
아론의 시선이 펜던트로 향했다. 박혀 있는 보석들은 더 이상 빛을 발하고 있지 않았다. 베르다트를 상대할 때 신력을 쥐어 짜내서 썼기 때문이었다.
“펜던트도 힘을 다했구나.”
헤핌이 아론의 펜던트를 보며 말했다.
설령 펜던트가 온전했다고 할지라도 쿠브가 신이 되는 데 필요한 신력을 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 있지 않은가?”
헤핌이 아론의 망토를 가리켰다.
‘설마 칼리 소드를 말씀하시는 건가?’
아론은 그것을 회수해서 망토 속 아공간에 넣어뒀었다.
‘하지만 칼리 소드는 힘을 잃었어.’
미티움을 분해할 수 있는 검집을 녹여서 칼리 소드에 흩뿌렸었다.
칼리 소드 내부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잠들어 있었다. 베르다트가 부활을 위해 흡수한 에너지들을 모두 그 안에 모아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거다.’
아론이 미티움의 힘을 끌어다 쓰기 위해서는 순수한 미티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검집에 칼들을 넣어 미티움을 추출하는 과정을 항상 거쳤었다.
“헤핌 님이 주신 그 검집 말입니다만, 칼리 소드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녹여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미티움으로 뽑아낼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헤핌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가 만든 물건은 형태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 기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예? 그 말은 즉…….”
“검집을 녹여서 칼리 소드에 뿌렸다고 했었지? 한번 확인해 보게. 미티움으로 추출이 끝난 상태일 게다.”
헤핌의 말을 들은 아론은 망토 속을 뒤적거려 아공간에서 칼리 소드를 꺼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칼리 소드는 순수한 미티움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아론은 즉시 그것을 자신의 펜던트에 꽂아 넣었다.
‘드디어 마지막 칠검의 미티움까지 채워 넣게 되었구나.’
칼리 소드의 미티움을 펜던트에 끼우자마자 보석 형태가 되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아악!
그러더니 나머지 여섯 개의 미티움으로 빛이 퍼져 나갔다. 칼리 소드의 미티움이 나머지 미티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형태가 되었다.
어느덧 펜던트에는 충만한 신력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쿠브를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새로 생겨난 균열은 계속해서 커지는 중이었다. 빨리 쿠브를 신으로 만들어야 했다.
“쿠브. 지금부터 너한테 신력을 주입할 거야. 지금까지 공급했던 힘의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양이야.”
“아론이 나한테 주는 힘은 무섭지 않아! 버텨낼게!”
쿠브의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쿠브에게 신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슈와아악!
펜던트에 박혀 있던 칼리의 미티움에서 막대한 신력이 뿜어져 나와 쿠브에게로 향했다.
[────]
그때,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아론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뭐지 이건?’
쿠브에게 신력을 주입함과 동시에 발생한 이상 현상이었다.
아론은 현기증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 소리에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현혹될 것만 같은 소리였다.
‘집중하자, 집중.’
아론은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하면서 신력을 쿠브에게 보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쿠구구!
그러자 쿠브를 중심으로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카카칵!
땅이 솟아올랐다. 부서진 대지의 파편들은 거대한 바위가 되어 쿠브를 감쌌다.
아론은 변화하는 상황에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쿠브에게 신력을 공급했다.
쩌저저적!
그러는 사이에 균열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차원의 붕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탓이었다.
콰득! 콰득!
새로 생긴 균열에서 공허의 괴물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입장에서 아론은 균열을 닫으려는 괘씸한 존재였다. 그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괴물들이 아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론을 지켜야 한다!”
그때 개입한 건 공작이었다.
쾅! 콰쾅!
공작은 아론에게 돌진하는 괴물들에게 마법을 날려 저지했다.
공작의 외침에 로드와 에르파는 물론이고 나머지 원정대원들도 아론을 지키기 시작했다.
원정대원의 대부분이 공허의 괴물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론에게 시간을 벌어다 주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괴물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괴물들이 저 세 분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로드가 요정들에게 명령했다.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아론과 헤핌, 쿠브를 지키는 것이 필수라고 판단했다.
콰직!
거구의 괴물들이 방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공격에 원정대원이 하나둘 죽어 나갔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마쳐야 해.’
아론은 신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 펜던트에 박힌 칼리의 미티움도 신력이 동나기 직전이었다.
신을 강림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아론은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신력이 요구되다니.’
동시에 베르다트가 얼마나 가소로운 꿈을 꾼 건지도 깨닫게 되었다.
빠직!
쿠브를 감싸고 있던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쿠브가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였다.
‘아…… 신력이 조금 모자랄 거 같은데?’
아론은 신력이 부족함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거의 다 되었는데 이제 와서 일을 그르치긴 싫었다.
‘……할 수 없지.’
아론은 첫째가 그랬던 것처럼 서클의 제한을 풀어버렸다. 그러자 깊게 잠들어 있던 체내의 마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마나는 펜던트의 영향으로 모조리 신력으로 바뀌었다.
아론은 망설이지 않고 신력을 쿠브에게 보내주었다.
콰아앙!
그리고 마침내, 쿠브를 감싸던 바위가 박살이 났다.
‘성공…… 했어.’
아론은 신의 형상을 한 쿠브를 볼 수 있었다.
* * *
“아론 님을 지켜라!”
“괴물이 아론 님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라!”
원정대는 아론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희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론을 호위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공허의 괴물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덕분에 제법 많은 수의 원정대원들이 희생되었다.
“저쪽으로 가요!”
“예!”
특히 로드와 에르파는 바쁘게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괴물들을 처치하는 중이었다.
“인간! 조심해!”
서걱!
에르파는 괴물에게 당할 뻔한 인간 마법사를 구했다.
“허어억!”
마법사는 괴물이 죽었지만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불안한 상태였다.
로드와 에르파는 그가 죽을 뻔했기에 당연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괴물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균열을 쳐다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로드와 에르파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겨서 마법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건……!”
에르파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균열에서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크기의 괴물이 균열을 찢으면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저런 녀석이 공허에 남아 있었다니요.”
로드 역시 당황했다.
갓 나온 녀석의 크기는 지금껏 활개 쳤던 괴물의 세 배가 넘는 덩치였다.
쿵! 쿵!
괴물이 차원을 건너오자 지축이 흔들렸다. 그에 감응하듯 나머지 균열들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후우웅! 꽈앙!
공허 괴물은 자신의 육중한 덩치를 십분 활용하여 공격을 가했다.
“으아악!”
원정대는 그 공격을 피하기 급급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원정대원은 주먹에 짓눌려 명을 달리했다.
“저, 저길 봐!”
“괴물들이 더 늘어나고 있잖아!”
원정대원들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덩치의 괴물이 등장하고 나서 균열이 확장된 결과였다. 공허 괴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에르파. 저 녀석은 우리가 없애야 합니다.”
로드가 거대한 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명처럼 원정대에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저 괴물에게 피해를 주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로드와 에르파는 녀석을 저지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밀려오는 공허 괴물들이 끝도 없었다. 나아가는 속도는 지지부진했다.
그들도 답답했다. 거침없이 돌파하고 싶었으나 녀석들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혹시라도 눈먼 공격에 당하기라도 한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서걱! 서걱!
로드와 에르파는 괴물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돌연 에르파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혼란한 전장에서 갑자기 멈추는 것은 위험했다. 로드는 에르파가 왜 그러나 싶었다.
그러나 에르파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춰 있었다. 로드는 그의 고개가 향한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아…….”
로드의 입에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차원이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전조 현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늦어 버렸군.”
최초의 균열을 막고 있던 헤핌도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여기저기 퍼져 있던 균열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점차 하나의 커다란 균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은 참으로 기이했다. 마치 세상의 일부분이 침식당한 것만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균열 내부에는 아직도 많은 공허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차원으로 넘어온 녀석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괴물이 득시글거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규모였다. 하지만 아론이 해낼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로드는 요정들을 격려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것을 명령하려고 했다.
화아악!
그때, 빛이 터져 나오면서 원정대의 시야를 일순 가렸다.
“으윽!”
“비, 빛이!”
원정대는 당황했다. 전투 중에 시야를 차단당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눈앞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괴물들이…… 죽었다고?”
사방에 가득했던 공허 괴물들이 모두 땅에 쓰러져 있었다.
원정대는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몰랐다.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로드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아론이 쿠브를 신으로 각성시켰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로드는 쿠브의 모습을 본 순간 절로 감탄이 나왔다. 쿠브는 황금의 광휘를 내뿜으며 신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분이 바로 대지의 신 가이안 님…….”
로드는 조심스럽게 쿠브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신을 모시는 요정족의 수장으로서 쿠브에게 예의를 다할 필요가 있었다.
“현 요정족의 로드, 세르피아가 대지의 신 가이안 님을 뵙습니다.”
로드는 쿠브의 앞에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래전, 저희 일족인 베르다트가 벌였던 불충은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자가 또다시 우를 범하려고 했기에 그를 처단하기 위해서 이 차원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정족은 베르다트가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이후, 신들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다른 차원에 숨어들었다. 원래라면 이 차원에 발을 들이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 노력이 가상하니 이번에는 눈감아 주마.”
기억을 되찾은 쿠브, 대지의 신 가이안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은 이 차원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야겠구나. 저급한 공허의 괴물들은 내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지만…….”
가이안이 균열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직 버티고 있는 녀석이 한 마리 있군.”
균열 안에는 눈동자 하나가 희번득거리며 가이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균열의 크기는 굉장히 커진 상태인데도 눈 한쪽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연 그 몸체는 얼마나 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차원의 붕괴가 빠르다 싶었더니, 저런 녀석이 존재해서 그런 거였구만.”
가이안은 안타까운 눈빛을 한 채 균열 속 눈동자를 보았다.
그는 저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한때는 신이었던 녀석이지만, 큰 잘못을 저지르고 그 대가로 공허에 유폐되면서 그만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녀석에게서 더는 신이었던 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놈은 공허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그저 에너지를 먹어 치우고 싶다는 욕구만이 존재했다.
“이봐. 내가 저 녀석을 상대할 동안 아론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가이안은 로드에게 아론을 맡긴 뒤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균열 속 괴물이 반응을 보였다.
녀석은 균열에 아가리를 들이밀었고, 균열의 입구와 충돌하면서 그 여파로 차원이 견디지 못하고 거세게 흔들렸다.
푸하아악!
괴물은 입을 벌리고 독기를 쏟아냈다. 평범한 기운이 아니었다. 차원 자체를 부식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는 독기였다.
그것을 본 가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자신의 각성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차원의 붕괴를 되돌릴 수 없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가이안은 쓰러져 있는 아론을 슬쩍 보았다.
아론은 쿠브를 각성시키기 위해 신력을 공급한다고 전력을 다했었다. 그 결과,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가이안은 아론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공급할 신력이 모자라니까 자신의 서클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력을 기울였었다.
아론 덕분에 제때 기억을 되찾고 신으로 각성할 수 있었다. 차원의 붕괴를 무사히 막아내게 된다면 아론의 공이 컸다.
스릉!
가이안은 검을 뽑아서 땅에 꽂았다. 그러자 검에서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백색 휘광은 균열에 도달하더니 그 균열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처음에 헤핌이 균열을 막으려고 했을 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규모였다. 헤핌은 균열 하나를 막는 데 불과했지만, 가이안이 만든 휘광은 저 거대한 균열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후우우욱!
괴물의 입에서 나오던 독기가 가이안이 만들어 낸 휘광에 부딪혔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휘광은 하나의 벽이 되어 독기가 퍼지는 것을 막아주는 중이었다.
“오오! 신의 기적이 독기를 막아내고 있다!”
원정대원은 환호했다. 그들의 눈에는 독기가 가이안의 힘에 막히는 것처럼 보였다.
‘으음.’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헤핌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저 괴물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공허를 떠돌아다니면서 힘을 축적했다. 반면 가이안 님은 신의 힘을 되찾으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
그나마 가이안의 격이 주신에 가까웠기에 지금 저렇게 독기에 맞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괴물의 힘도 상당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이안에게 불리한 건 자명했다.
그 사실은 가이안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도 빨리 이 균열을 닫아버리고 싶었다. 지금은 괴물의 독기를 막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찼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원정대는 자신들의 무력함을 잘 알았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이안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독기가 점점 광휘를 밀어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아아악!
그때였다.
어디선가 빛이 번쩍이더니 신력의 기운이 균열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힘의 근원은 아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아론은 마지막 힘을 짜내서 신력에 7개의 미티움을 실어 균열이 있는 곳으로 쏘았다.
‘아, 아니?’
가이안은 깜짝 놀랐다.
분명 아론은 서클을 가동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런 행동을 보여주다니.
쏘아진 미티움은 무사히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쿠구구!
미티움은 균열 속에서 벽을 만들었다. 그 벽은 점점 커지더니 차원의 균열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슈우우…….
가이안이 펼친 방벽이 독기를 버티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균열도 완전히 닫히고 말았다.
주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다.
“……끝난 건가?”
“드, 드디어!”
“오오! 차원의 균열이 닫혔어!”
원정대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들은 모두 여기서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사히 균열이 닫힌 것이었다.
* * *
차원의 수복.
원정대의 승리.
그들이 바라 마지않던 것들이었다.
“우리가…… 이겼어.”
“베르다트를 죽이고 차원의 균열을 닫는 데 성공했어!”
인간, 드워프, 그리고 요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대지의 신 가이안이시여! 고맙습니다!”
몇몇은 가이안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칭송을 받는 가이안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아론이 그런 발상을 생각해 낼 줄이야.’
미티움은 신의 물질이었다. 따라서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에 그 어느 것보다도 가까이에 있었다.
그런데 신력을 이용해서 미티움을 녹여 차원의 균열 속으로 던질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무모한 방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정답이었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생각 방식인 건가.’
가이안은 물론이고 대장장이로서 여러 물질을 다뤘던 헤핌 역시 아론의 방식을 떠올리지 못했었다.
“아론 님!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게 다 아론 님 덕분입니다.”
원정대원들은 아론에게 몰려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아론은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아론의 몸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그가 사용했던 신력은 물론이고, 마나 조차도 거의 체내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에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쿠브를 가이안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신력이 부족했던 나머지 자신의 서클을 제물로 삼아 연소시켰었다.
마법사에게 서클이 없다는 건 생명이 끝났음을 알리는 거와 다름없었다.
아론의 주위로 모인 마법사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론!”
공작이 다가와 아론의 몸을 살폈다. 공작은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서클만이 불탄 게 아니야. 회로가 망가질 정도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고 있다.”
공작은 아론의 몸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아론의 고질병인 마나 중독 때문이었다.
아론은 옛날에 먹어두었던 약도 있고, 서클이 높아지면서 미세한 마나 제어까지 가능해졌기에 병의 진행을 억제할 수 있었다.
지금의 아론은 서클이 연소되었기에 마나 제어 능력을 상실했고, 병명처럼 주위의 마나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공작은 다급하게 주위의 마나 흐름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론을 놔두다가는 내부의 마나 회로가 터져서 죽게 될 운명이었다.
“날 좀 도와주게!”
공작은 자신의 힘으로도 역부족하다고 생각해 주위의 마법사들에게 대기의 마나를 제어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처치가 무색하게 아론이 마나를 흡수하는 힘은 더욱 거세졌다.
“어찌 방법이…… 방법이 없겠소?”
공작은 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요정들은 마나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신력의 보유자. 공작은 그들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로드는 아론의 몸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서클을 불살라버렸군요.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서클이 있어야만 하는데, 불가능해 보입니다.”
“혹시 인공적으로 서클을 만들어 심을 수는…….”
“그것도 무리입니다. 서클이 일부만 부서져서 조금의 기능이라도 남아있으면 모를까, 지금의 상태는 살아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로드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아버지.”
그때, 아론이 겨우 입을 달싹이며 공작을 불렀다.
“아시잖습니까. 서클이 없는 마법사는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을요.”
그 말을 들은 공작은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세상을 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들은 결국 구하지 못하는 게 내 운명인가…….’
차기 공작으로 예상했던 첫째는 베르다트에게 몸을 빼앗겼었다. 그것만으로도 살을 도려내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론까지 잃어야 한다니. 공작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너무 상심에 빠져있지 말게.”
그때였다.
헤핌이 공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법이…… 방법이 있는가?”
공작의 물음에 헤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있긴 하지. 인공 서클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도, 다른 인간의 서클을 이식하면 다시 몸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사람의 서클을 이식한다고?”
“쉽지 않은 일이다. 대장장이의 신인 나니까 가능한 일이지.”
헤핌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단, 조건이 있다.”
“아론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든 감수하지.”
“에드먼스 가문의 회로는 다른 마법사와 달리 특별하니까, 같은 혈족의 서클만을 이식할 수 있다. 그리고 아론이 지닌 서클의 개수와 같아야 한다.”
굉장히 가혹한 조건이었다.
에드먼스의 피를 타고난 사람만 가능하다면 그 수는 아주 제한적이게 된다.
게다가 아론은 9서클. 9개의 서클을 지닌 자는 에드먼스 가문에서 몇 명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공작이 바로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좋다. 내 서클을 내어 주지.”
공작은 파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한편, 원정대원 중에는 에드먼스 가의 원로도 있었다. 그들은 사색이 되어 공작을 만류했다.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가!”
“그건 안된다! 나중을 생각해야지!”
아직 에드먼스 가문의 공작은 카이만이었다. 그가 후계자에게 차기 공작자리를 물려줄 때까지는 건재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카이만의 서클보단 내 서클을 바치겠다.”
원로 중 한 명인 랜튼이 나섰다.
그는 아이젠과 전쟁을 할 때 아론의 능력을 확인하고는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었다.
“세계를 구한 영웅을 살리는 데 내 목숨 하나 내어주는 건 전혀 아깝지 않지.”
랜튼은 언제든 준비되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장하게 나섰는데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그때, 헤핌이 랜튼을 제지했다.
“제 서클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아론의 회로는 신력을 다룰 수 있다. 그렇기에 동등하게 신력을 다루었던 자의 서클이 필요하다.”
“허어…….”
헤핌의 말에 랜튼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에드먼스의 피를 타고난 자에 9서클만으로도 충분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거기에다가 신력을 다룬 적이 있는 서클이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 지금 신력을 배운다고 한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아론의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운명인 건가.’
공작은 착잡했다.
이번 원정에서도 자신들이 한 건 거의 없었다. 결국 아론을 구하는 일에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조건. 제가 딱 적임자군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불청객에게 향했다.
“어, 어떻게!”
에드먼스의 첫째인 크라우가 서 있었다. 아니, 그의 몸은 베르다트에게 빼앗겼으니 저자는 베르다트일 것이다.
“분명 죽었을 텐데!”
그들은 베르다트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아닙니다. 저는 크라우입니다.”
크라우는 두 손을 들어서 공격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크라우가 맞다. 베르다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공작이 그 사실을 확인시켰다.
“제 서클을 아론에게 주겠습니다.”
크라우는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모두들 놀란 상태였다.
그는 베르다트에게 몸을 빼앗겼기에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한데, 이렇게 살아서 볼 줄은 몰랐다.
“그 조건이면 아론에게 서클을 이식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라우의 말에 원로 중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크라우. 랜튼 님도 아론에게 서클을 줄 수가 없어. 신력을 다룰 줄 아는 서클이 필요하거든. 그건 너도…….”
원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저, 저건 신력이 아닌가!”
“네가 어떻게……!”
놀랍게도 크라우의 손끝에선 신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크라우!”
공작도 놀란 나머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베르다트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몸에 신력과 그것을 쓸 수 있는 지식이 기억에 남아 있더군요.”
베르다트는 타락하긴 했지만 그도 요정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힘은 신력을 기반으로 발휘되었다.
따라서 베르다트의 그릇이 되었던 크라우도 신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크라우. 진정 네가 원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공작이 첫째를 향해 물었다.
이는 가볍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크라우의 서클을 아론에게 이식하면, 첫째는 마법을 쓸 수 있는 힘을 잃게 되고 만다.
아론처럼 마나 중독이란 병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뒤탈은 없겠지만, 마법사로서는 사형 선고를 당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저는 가문의 모토를 따를 뿐입니다. 저보다는 아론이 더 강합니다. 제일 강한 자가 에드먼스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라우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그래도 공작은 그의 결정을 지지하기가 힘들었다.
‘나도 많이 물러졌군.’
공작은 크라우의 눈동자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번 일은 제 의지로 벌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베르다트가 몸을 빼앗을 기회를 주지 않았겠죠. 제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만회하고 싶습니다.”
“……네가 정 그렇다면.”
공작은 크라우의 의지를 존중했다.
헤핌은 크라우에게 다가가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어디 보세. ……음. 충분히 이식할 수 있겠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만 주시게.”
***
서클을 이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헤핌의 놀라운 손재주 덕분에 이식 과정은 착착 진행될 수 있었다.
헤핌은 크라우의 몸에서 9개의 서클을 뽑아낸 뒤 아론의 몸으로 집어넣었다.
시술을 담당한 헤핌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나머지도 집중한 채 이 과정을 지켜보았다.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던 아론의 표정이 점점 평온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거칠던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나의 흐름이 진정되었습니다.”
아론의 몸으로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던 마나도 이제 진정이 되었다.
“무사히 끝났군.”
헤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론은…… 어떻습니까?”
마나를 모두 잃어버린 크라우가 힘없이 물어보았다.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진정시키는 건 성공했네.”
그 대답에 크라우는 안심할 수 있었다.
* * *
원정대는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온 목적이 완수되었으니 더 이상 남을 이유가 없었다.
대지에 득시글거리던 공허의 괴물들은 쿠브가 가이안으로 각성하고 난 뒤에 죽음을 맞이했다.
거기다가 균열도 막아버렸으니 안에 있던 녀석들은 또다시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공허에서 떠돌 것이다.
“드디어 돌아가는군요.”
“그러게. 살아남은 수는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어딥니까.”
마법사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불쌍하게 됐네요. 베르다트 때문에 그린데란트 산맥이 황폐해졌으니 말입니다.”
“녀석이 부활한답시고 생명력이란 생명력은 다 빨아갔으니까.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 같군.”
그러나 그들의 걱정과 다르게 드워프들은 그다지 절망하지 않았다.
이번 전투로 수호자급의 드워프들이 다수 죽기는 했다. 하지만 대피해 있던 드워프들은 모두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드워프들은 기술력과 손재주에 있어서 다른 종족과 비교를 불허했다. 살아남은 이들이 있는 이상,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에겐 신의 기억을 되찾은 헤핌의 존재가 있었다. 그가 신위를 발휘한다면 회복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물론 최소 십몇 년은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드워프들에게는 짧은 시간이었다.
한편, 요정족은 솔티어크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다시 솔티어크로 돌아가겠다고?”
로드의 말을 듣던 헤핌이 물었다.
“그대들이 이 차원으로 돌아온 건 꽤 오랜만 아닌가? 다시 오기 쉽지 않을 텐데 괜찮은 선택인지 모르겠구만.”
요정들은 이곳으로 돌아오는 게 종족의 숙원이었다. 그런데 솔티어크로 간다는 결정은 헤핌에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저희들은 이번에도 베르다트를 막지 못했으니까요. 먼 옛날에 그자 때문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는데, 결국 다시 한번 더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까요.”
“허어, 그건 그렇다만.”
“가이안 님께서 내리신 심판입니다. 저희들은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 사실 수위가 꽤 낮은 처벌이었다.
“그래도 아론 님 덕분에 다시 이 차원을 밟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도 만족합니다.”
로드는 아직 누워 있는 아론을 보며 말했다.
“흐음.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헤핌은 공작에게 물어보았다.
“일단 대륙을 안정시킬 것이오. 아이젠과의 전쟁이 막 끝난 참이고, 이번 일도 처리해야 하다 보니.”
“여러모로 바쁘겠구만.”
“그리고 아론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소.”
“뭐, 녀석의 상태를 보아하니 금방 돌아오지 않겠는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내 손재주는 이 차원에서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네.”
헤핌의 말에 공작은 피식 웃었다.
아론의 몸에는 무사히 크라우가 준 서클이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깨어나고 나서부터가 진짜지. 다른 사람의 서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니 말일세.”
“아론은 잘 할거요.”
“나도 그 점은 이견이 없지.”
헤핌은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대단한 녀석이야. 아직 1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일을 해냈지 않는가? 이 나이에 9서클에 통달하고, 신력을 다루는 인간이라니.”
헤핌의 말에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자신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좀 더 어렸을 때 지원해주지 못한 게 후회될 따름이오.”
“자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녀석은 대륙에서 유명한 망나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녀석은 자기 실력을 일부러 숨긴 걸 수도 있소.”
그렇게 평가할 정도로 아론이 보인 실력은 놀랍기만 했다.
한편으로 공작은 걱정도 되었다. 아론의 성격이며 실력으로 보아, 가문에 잡아두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나고 나서 고민할 일이다.’
공작은 그렇게 매듭짓고는 이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베르다트를 없애기 위한 이번 원정대는 인간과 드워프, 엘프의 연합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주축이 된 건 인간, 즉 에드먼스 가문이었다. 그들이 가장 많은 인원을 투입했고, 피해도 그만큼 입게 되었다.
에드먼스 가문의 입장에선 전력 손실이 컸다. 베르다트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보니 가문에서도 실력 있는 마법사를 뽑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잃는 건 뼈아픈 타격이었다. 특히, 지금 시기에선 더욱 그랬다.
메도우드 왕국은 아이젠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직 전후 처리 과정이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아이젠의 제일검이라 불리우는 기사도 여전히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
말로는 항복하겠다 했지만, 메도우드의 주축인 에드먼스가 힘을 잃는다면 틈을 봐서 반란을 꾀할 수도 있었다.
만약 공작이 아론에게 서클을 이식해 주었다면 정말 큰 일이었을 것이다. 에드먼스 가문을 이끄는 자가 힘을 잃게 되니 말이다.
에드먼스의 원로들은 크라우에게는 안 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작이 건재하게 남아주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덕분에 공작가는 전력을 잃었어도 빠르게 안정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아론과 크라우에 관한 일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졌다. 아는 사람이 많아봤자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개인실에서 안정을 취했고, 대략 한 달이 지난 다음에야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론이 눈을 뜨자마자 본 건 반가워하는 라엘의 얼굴이었다.
“도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그녀는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론은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가 고생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만에 눈을 뜬 거지?”
“쓰러지신 지 한 달 하고도 사흘이 지났습니다.”
“……오래도 누워 있었군.”
아론은 점점 기억이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베르다트를 막기 위해 쿠브에게 신력을 몰아 준다고 자신의 서클을 연소시켜서 신력을 보충했었다.
그건 죽음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지만, 크라우가 자신에게 서클을 이식해 준 것이 기억이 났다.
‘맞아. 내가 크라우의 서클을 받았었지.’
아론은 몸속에 돌아다니는 마나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서클을 관찰했다.
자신의 서클이 아니었기에 껄끄러웠지만, 굉장히 정갈하고 단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크라우의 서클.’
아론은 어쩐지 꿈에서 첫째를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그는 약해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었다.
‘뭐, 꿈이긴 하지만.’
크라우가 선뜻 자신을 위해서 서클을 내어 준 걸 보면, 그게 크라우의 천성이라고 여겨졌다.
아론이 그렇게 아련함에 잠겨 있을 때, 라엘이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아론 님의 정식 후계자 책봉식이 있을 거라고 해요.”
“책봉식이라고?”
“네. 아론 님께서 깨어나고 회복이 되면 곧바로 하신다고 결정이 났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원로회에서 그 누구의 반대나 이견도 없었다고 들었어요. 만장일치로 아론 님을 차기 공작가의 주인으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누구라도 후계자로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할 터였다.
하지만 정작 아론의 낯빛은 좋지 못했다.
‘바로 공작님을 만나야겠군.’
아론은 차기 공작의 자리를 원치 않았다. 그는 공작을 만나서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
베르다트와 결전을 치룬 원정대의 이야기는 대륙 전역에 퍼져나갔다.
특히, 아론에 대한 이야기는 영웅담으로 변해 있었다. 한때는 망나니였던 공자가 개과천선하여 영웅이 되었다는 스토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정말 좋은 소재였다.
한편, 아론이 깨어나자 공작가에서는 후계자 책봉식을 서둘렀다.
공작가는 책봉식의 시기가 지금이 알맞다고 생각했다. 아론에 대한 미담이 퍼진 지금,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다면 에드먼스 가문에서 그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아론이 일어난 지 일주일 뒤에 본격적인 식이 거행되었다.
책봉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차기 에드먼스 공작이 정해지는 중요한 행사였기에 에드먼스 가문의 핏줄들은 모두 참가했다.
이 자리에 모인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의 유명한 가문들은 물론이고 국가의 수장도 여기에 와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속국이 된 아이젠의 왕도 참석한 상태였다.
“모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곧 아론 에드먼스 님께서 들어오시겠습니다.”
그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쏠렸다.
잠시 후, 아론이 앞에 나타났다.
예전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축하식을 열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 당시에는 아론을 망나니로 취급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면 지금은 모두가 아론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어떻게든 그에게 다가가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분위기는 감히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멀리서 아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그런 아론에게 겁 없이 다가가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아이젠의 왕이자 제일검이라 불리우는 킬리안이었다.
‘저자는 왜 나한테 오는 거지?’
아론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킬리안은 아론과 눈이 맞았음에도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아론 에드먼스 님을 뵙습니다.”
킬리안은 아론의 앞에 서자마자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론에게 기사의 예식을 갖추어서 인사했다. 이는 군신관계에서나 보여주는 행위였다.
갑작스러운 킬리안의 행동에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는 승전국의 실절직 수장인 카이만 공작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이번 일은 킬리안이 아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론 님께서 이번에 행하신 용기는 저희 아이젠에게도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 인사는 아이젠의 모든 기사들을 대표해서 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아론 님께서 공작이 되시면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가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미래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거로 하죠.”
아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킬리안은 다시 한번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아론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감히 아론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책봉식이 시작되었다.
아론이 앞으로 나갔고, 공작이 이번 일에 대한 치사를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론이 보여준 이번 행적은 대륙의 역사에 길히 남을 만 하다. 우리는 새로운 에드먼스의 영웅을 목도한 것이다.”
공작의 말이 끝나자 모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자리에 와 줘서 고맙군. 이제 차기 후계자 책봉식을 시작하겠소.”
그 말에 모두들 아론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아론이 차기 공작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에드먼스 가문은 정식으로 크라우 에드먼스를 차기 후계자로 선정했소.”
그러나, 공작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 * *
책봉식이 거행되기 일주일 전.
아론은 라엘에게서 책봉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공작을 만나러 집무실을 찾아갔다.
이제 아론이 이곳을 드나드는 건 자연스러웠다. 예전에는 공작의 위엄에 짓눌려서 위축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해도 담담했다. 이미 아론의 실력이 공작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공작의 옆에는 크라우가 있었다.
아론은 그를 보자마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는 공작에 비견될만할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서클이 없어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어떤 결단으로 내게 서클을 주었을까.’
아론은 우선 크라우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아니다.”
크라우는 손사래를 쳤다.
“서클을 네게 옮겨준 거는 결국 나도 살리는 일이었다.”
아론에게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의미로 말을 한 거지?’
아론의 골똘한 표정을 읽은 크라우는 덧붙여서 설명해 주었다.
“나중에 가이안 님에게 들었어. 내 서클을 들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얼마 못 가서 죽었을 거라고 하셨거든.”
“어째서죠?”
“베르다트가 내 몸을 그릇으로 쓰고 나서, 서클과 회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버렸거든. 만약 그대로 놔뒀으면 몸이 서서히 망가져 버렸을 거야.”
“예? 그렇다면 그 말은…….”
아론은 자기도 모르게 이식받은 서클이 들어선 배 주위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걸 본 크라우는 웃어 보였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염된 서클은 들어내거나 정화를 해야 하는데, 너 정도로 신력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 이미 깨끗해지고도 남았을 거다.”
“그럼…… 다행이군요.”
결국 서클을 이식하는 선택은 아론과 크라우 둘 다를 살리는 방법인 셈이었다.
물론 크라우가 이를 알게 된 건 서클을 이식하고 나서였다.
“그래도 제게 서클을 주시겠다고 결정하셨을 때는 그런 생각으로 주신 건 아니잖습니까. 단순히 절 살리려고 그러신 거죠.”
“그건 그렇지?”
“감사합니다. 이번에 받은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평생이라.”
크라우는 난처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크흠.”
그때였다. 공작이 헛기침을 했다.
‘이런. 본래 목적은 공작하고 이야기하려고 했던 건데, 주객전도가 되어버렸군.’
아론은 그제야 공작을 보며 인사했다.
“……몸 상태는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다행히도 서클이 저와 잘 맞은 모양입니다.”
아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질감만 뺀다면 마치 자신의 서클이었던 것마냥 마나 순환이 원활했다.
그 덕에 의식을 잃었던 동안에도 아론의 몸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네가 깨어나서 몸이 회복된 직후에 책봉식을 열려고 했다. 예정보다 빨리할 수 있겠어.”
“아버지. 책봉식 말입니다만.”
“뭔가 의견이 있는가?”
아론은 공작을 만나러 온 이유를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아론의 말을 들은 공작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상이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공작은 아론을 보며 생각했다.
아론이 망나니 생활을 청산하고 나서부터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고는 판단했었다.
아론에게는 알 수 없는 야망이 있다. 하지만 그게 가문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공작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제 목적은 강해지는 거였습니다. 제가 몸이 약했던 이유를 조사해 보았고, 그 결과 마나 중독에 걸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걸 해결하는 근본적 방법은 강해지는 것, 즉 9서클에 도달하는 거였지요.”
“그럼 목적은 달성한 것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9서클이 되어도 진행을 수십 년 뒤로 늦추는 것뿐이더군요. 완벽한 해결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찾을 때까지 혼자서 수련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물어보마. 우리 집안에서 다음 후계자는 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저는…….”
이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론은 크라우를 바라보았다.
“첫째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님이라면 장차 훌륭한 가주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잠깐만!”
크라우는 놀라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서클도 없어.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내가 공작가를 이끄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닙니다. 형님은 서클이 없더라도 가문을 잘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계시니까요. 그리고 서클이 없는 건 걱정하지 마십쇼. 힘을 쓸 일이 있으면 저를 부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그건.”
“정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제가 나서겠습니다.”
아론의 말을 들은 크라우는 결국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크라우가 마법 능력을 제외한 부분에서도 다른 형제보다 뛰어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가문은 대륙의 마법 명가다.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없는 자가 공작가를 이끌 수는 없다.”
공작은 아론의 눈을 바라봤다.
“……부디 생각을 재고해줄 순 없겠나?”
그러나 아론은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우리 가문은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곳이지요. 설령 저와 아버지 사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론은 공작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며 맞받아쳤다.
“저는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후계자는 크라우 형님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물릴 생각이 없습니다.”
아론의 말을 들은 공작은 말이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는 나를 뛰어넘었지.”
공작은 아론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론. 그러면 너는 앞으로 뭘 하면서 지낼 생각이야?”
“뭐, 공작가 사서나 할까요? 제 병을 연구하면서 공부하려면 거기만큼 좋은 곳도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론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도서관 사서 중에는 힘을 숨긴 강자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론의 그 말에 크라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우. 책봉식 때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공작은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론이 공작가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에드먼스 가문을 어떻게 해보려는 존재는 없어질 테니 말이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앞으로 공작가를 잘 부탁합니다, 형님.”
아론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
그 후로 대륙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여러 나라가 흥망을 겪고, 영웅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에드먼스 크라우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침대에 누운 채 숨을 약하게 쉬고 있었다.
병에 걸렸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몸의 노화로 인해 신체가 쇠약해졌고, 이제 한계를 맞이한 것이었다.
그래도 크라우는 서클이 없는 인간치고는 오래 산 셈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90을 넘기기란 쉽지 않은 시대였다.
아론이 예상했던 것처럼 크라우는 공작이 되고 나서 자신의 서클과 상관없이 에드먼스 가문을 잘 이끌어 나갔다.
크라우의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칭송받는 건 제국의 건설이었다.
그는 공작으로 집권하자마자 메도우드로부터 분리하여 에드먼스 공국을 세웠다.
이후 대륙의 국가를 차차 합병 시켜 나갔는데, 대부분 전쟁 없이 흡수하는 식이었다.
크라우의 말년에는 대륙을 통일했고, 에드먼스는 제국으로 거듭났다.
물론 에드먼스 가문이 몇 대에 걸쳐서 축적해온 힘이 발휘된 결과였다. 게다가 아론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후광도 있었다.
그래도 그것들을 공작가의 운영에 잘 이용한 것이 크라우의 역량이었다.
크라우는 공작자리에서 물러난 지 몇십 년은 되었다. 이제는 아들이 공작가를 이끌고 있었고, 손자들이 치열하게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다고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론이 보고 싶구나…….”
크라우가 천장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에드먼스가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는 아론도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힘을 쓸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항간에는 아론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크라우는 확신했다.
아론은 한참 전에 현자가 되었다. 그 결과 마나를 완전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론은 자신의 몸을 나아가 새로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 연구가 끝날 때까지는 누구도 찾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제가 말씀을 전하러 가겠습니다!”
크라우의 임종을 지켜보던 아들이 울먹거리며 외쳤다.
“아……!”
그때였다.
크라우의 방에 아론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젊었을 시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론…… 아론이냐?”
“예, 형님. 접니다.”
아론의 모습을 확인한 크라우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너는 하나도 늙지 않았구나.”
“현자가 되고 나서부터는 아예 늙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참 부럽구만. 그래도 마지막에 얼굴을 봐서 좋네. 하고 있는 연구는 다 되었나?”
아론이 지금 연구 중인 것은 자신의 고향인 원래 지구로 되돌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는 마법의 극한을 직접 경험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쪽에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게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 이후로 아론은 지구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해 있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다 끝냈었습니다. 안정화까지 마친 상태지요.”
“그럼 왜 아직 여기에 있는 건가?”
아론이 이런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건 아론의 최측근과 크라우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형님의 마지막을 보고 가려고 그랬습니다. 그게 형제로서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아…….”
크라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마지막 한을 다 풀었던 모양인지,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 아버지!”
크라우의 아들이 오열하며 그를 불렀다.
아론은 이미 떠나버린 그에게 마지막으로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바깥에서는 라엘과 켄트가 아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현자가 되어서 아론과 같이 다니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
라엘과 켄트는 들뜬 표정이 되었다.
“이제 저희가 갈 곳이 지구죠?”
“아론 님이 전생에 사셨던 차원이라. 어떤 곳일까요?”
“별다를 건 없어. 거기도 사람이 살고,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들이 있고 그래.”
아론은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건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면 될 일이었다.
“여태껏 따라와 줘서 고맙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물론이죠.”
“저야말로요!”
아론의 말에 두 사람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