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39/40)

Chapter 4

‘쿠브의 힘이 대단하군.’

아론은 황금빛에 휩싸여 있는 쿠브를 보며 생각했다.

쿠브의 모습이 이렇게 변한 건 다름 아닌 아론 덕분이었다.

아론은 오늘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감히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차원 마법을 성공하려면 각 차원 간의 장벽을 뚫어야 하는데, 이는 신이 만들어 둔 것이었다. 단순히 차원 마법의 원리를 안다고 돌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론은 해냈다. 그 말은 즉, 아론이 중간계를 벗어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이는 아론의 몸을 가득 채운 신력 덕분이었다. 가장 신에 가깝다는 요정족에 아론도 근접한 셈이었다.

그래서 아론의 영향을 받는 쿠브도 한 층 더 성장한 것이었다. 지금 쿠브의 모습은 거의 전성기 시절을 회복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쿠브는 더 이상 마나를 쓰지 않았다. 아론에게 힘을 이어받아서 신력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신력은 마족에게 치명적이었다. 쿠브의 일격에 마왕이 쓰러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일단 한 놈은 처리했다.’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치열하게 전투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빨리 싸움을 끝낸 건 아론밖에 없었다.

‘쿠브가 없었다면 나도 고전했겠어.’

마족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마왕이었다. 이름에서 주는 위엄처럼 상대하기 쉬운 녀석은 절대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아론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원정대는 마족과 전투 중이었다. 그리고 아직 마왕이 세 마리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베르다트가 있었다.

아론은 베르다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직 부활에 완전히 다다르지 않았어. 내가 차원의 문을 열려고 할 때 무리해서 공격한다고 힘을 뺀 상태고 말이다.’

덕분에 부활하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론이 혼자 녀석에게 돌진한다 하더라도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베르다트의 주위에는 고위 마족들로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재 원정대의 구성원으로 녀석들을 이기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마왕의 존재가 문제였다.

녀석들은 규격 외의 존재.

아론은 이겼지만 공작이나 로드, 에르파가 패배하게 된다면 아론은 나머지 마왕들을 함께 상대해야 했다.

‘차라리 마왕부터 쓰러트리는 게 낫겠어.’

베르다트는 그다음에 같이 처리하는 게 전황상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심을 한 아론은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공작이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공작이 붙는 마왕이 상성상 불리했기에 녀석부터 먼저 쓰러트리기로 했다.

***

슈욱-!

공작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물체를 피했다.

투쾅!

검은 물체는 공작의 뒤편에서 갑작스럽게 터지고 말았다. 공작은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펼쳤고, 폭발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공작이 방어 마법을 펼치지 않은 곳은 파 먹힌 것처럼 깔끔하게 소멸해 있었다.

‘닿는 순간에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공작은 마왕이 쉽지 않은 상대라고 여겨졌다. 녀석들의 힘은 중간계의 법칙을 벗어나 있었다.

‘이것이 마왕인가.’

그나마 공작 정도의 실력이 되니까 마법으로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만약 다른 마법사가 마왕과 맞닥뜨렸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났을 게 분명했다.

물론 버티는 수준에서 공작이 낫다는 거였다. 상황이 불리한 것은 여전했다.

지금 공작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아론에게 시간을 벌어다 주기 위해 무리해서 마나를 사용한 탓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컨디션에서 싸웠어도 마왕과 접전을 벌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공작은 이대로 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틈을 봐서 마왕에게 반격을 할 준비를 했다.

‘지금이라면……!’

드디어 공격의 기회를 잡은 공작. 그는 마왕의 머리를 노리고 가장 빠른 빛의 마법을 사용했다.

파앗!

속도와 위력 덕분에 인간들 중에서 이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극소수였다.

하지만 마왕에게 인간의 기준은 통하지 않았다.

‘……!’

마왕은 온전하게 그 공격을 받아냈다. 정면으로 맞았건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아 보였다.

“싱거운 공격이군.”

마왕은 비아냥거리며 조소를 띄웠다.

“그게 전력인가? 그렇다면 별 볼 일 없겠어. 이제 그만 놀이는 끝내자고.”

짜악!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두 손을 합장했다. 그러자 마왕의 뒤에서 방금 전 공작이 피했던 백여 개가 넘는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정말로 가지고 놀았던 것인가?’

그 광경을 본 공작은 허탈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공작은 방어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슈슈슈슉-!

검은 구체들이 공작을 향해 날아갔다. 공작은 체내의 모든 마나를 끌어 올려서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투콰콰쾅!

공작은 힘겹게 그 공격을 버텨냈다. 검은 구체는 계속해서 배리어를 두들겼다.

모든 구체가 공작에게 향할 때까지 흐른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그러나 공작에게는 그 시간이 영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허억…….”

대륙에서 최강의 마법사라 불리는 그가 숨을 헐떡였다. 공작은 체력이며 마나며 고갈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하지만 공작은 앞을 본 순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마왕은 또다시 백여 개가 넘는 검은 구체를 뒤편에 띄우고 있었다.

‘……끝난 건가.’

공작은 더 이상 피할 힘이 없었다.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공작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적은 몇 번 없었다. 기껏해야 자신이 아직 작위를 받기 전, 후계자들과 치렀던 경쟁 때였다.

‘그래도 무력하게 죽을 순 없지.’

그렇게 생각한 공작은 다시 한번 방어 마법을 펼쳤다. 설령 죽더라도 최선을 다한 채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다.

슈슈슉-!

마왕은 공작을 향해 검은 구체를 날렸다.

투콰쾅!

검은 구체와 배리어가 격돌했다.

하지만 공작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전해지는 충격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내 자신의 배리어 앞에 또 하나의 배리어가 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공작은 아론의 배리어임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일렁이는 황금빛이 자신의 눈앞에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정체는 쿠브였다.

푸슉!

쿠브의 검이 마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왕은 갑자기 나타난 존재에 저항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공작은 이 상황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정녕 이게 아론이 한 것인가?’

두 눈으로 보았지만 믿기 어려웠다. 그가 실력이 출중함은 알고 있어도 마왕을 쉽게 죽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론은 이제 내 선에서 어쩔 수 있는 녀석이 아니게 되었구나.’

자신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만약 첫째가 신력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저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공작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아론이었기에 저 정도의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숨은 붙어 있게 됐다.”

“아직 마왕이 두 녀석 남았습니다. 움직이는 게 가능하시다면 따라와 주십시오.”

“알겠다. 뒤따라가지.”

공작의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곧장 앞으로 뛰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에르파가 있는 곳이었다.

로드 쪽의 마왕은 이미 로드가 승기를 잡은 상태였기에 지원은 필요 없어 보였다.

‘언제부터 내가 녀석의 뒤에 서게 된 건지. 아버지라 불리기도 부끄럽게 되었군.’

공작은 피식 웃으며 아론의 뒤를 따라갔다.

***

아론과 공작이 에르파가 전투하는 곳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콰쾅!

로드가 있는 방향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아론은 로드가 마왕을 쓰러트렸음을 알 수 있었다.

‘요정족의 수장 답네. 도움받지 않고 마왕을 쓰러트리다니.’

로드의 신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에르파는 요정족 최고의 검사라 하더라도 로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론과 공작은 에르파를 도와서 남은 한 마리의 마왕을 쓰러트렸다.

네 마리의 마왕이 문제였지, 요정족이 가세한 상황에서 남은 고위 마족들을 처리하기는 쉬웠다.

녀석들을 다 없애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정대는 드디어 빛의 기둥 앞에 설 수 있었다.

베르다트는 아직 부활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원래라면 진즉에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원정대의 공세가 거셌고, 베르다트는 그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힘을 쓴 결과 부활이 늦어지게 되었다.

결국, 무리한 공격이 녀석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론의 입장에선 상관없었다. 베르다트가 그렇게 선택해준 덕분에 녀석의 부활이 늦어졌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아론. 덕분에 요정들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드는 아론을 보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베르다트가 부활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요정족의 명예는 지금보다 더 떨어졌겠지요. 아론이 없었더라면 녀석을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일단 감사 인사는 녀석을 처리한 후에 받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요.”

아론의 대답에 로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빛의 기둥에 다가갔다. 다시 녀석을 봉인하기 위해서였다.

베르다트의 빛기둥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봉인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뭐하러 요란하게 소동을 피운 거야?”

스라크는 봉인되는 베르다트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아론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날 선 말과는 달리 안도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스라크가 사념체로 남아 있던 이유도 베르다트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

아론은 이번 일이 싱겁게 끝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촉이 희미하게 말하고 있어.’

여태껏 사선을 넘나들어 왔던 아론이었다. 그의 본능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물러나세요!”

그때였다.

앞에서 봉인을 진행 중이던 로드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꺼져가던 빛의 기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 *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분명 다 꺼져가던 빛의 기둥이었다. 그런데 폭발이 일어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론은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로드가 영창했던 봉인의 주문이 점점 약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쿠콰콰-!

이윽고 폭풍이 휘몰아쳤다.

빛의 기둥에서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새어 나오는 탓이었다.

“로드 님!”

에르파가 급히 달려 나갔다.

그는 로드를 도와서 봉인의 주문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스라크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론은 우선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저건……?’

빛의 기둥 사이에서 이질적인 흑점이 보였다. 그 크기는 조금씩 커지는 중이었다.

아론은 갑자기 생겨난 흑점에 의문을 품었다.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의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저 흑점이 원인이었군.’

로드와 에르파가 외우는 봉인의 주문의 힘이 저 흑점으로 흡수되는 중이었다.

흑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만간 빛의 기둥조차도 모두 빨아들일 것 같은 기세였다.

이내 그 추측은 현실이 되었다. 빛의 기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흑점만이 남아 있었다.

“앗……! 마나가!”

“모두 거리를 벌립시다!”

마법사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서 마나가 빨려 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흑점이군……!’

아론 역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력이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흑점은 이제 사람들의 힘마저 빼앗아 가려는 모양이었다.

“저 흑점에서 떨어져라!”

공작이 외쳤다. 아론을 포함한 모두는 흑점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방심하면 신력이 빨리겠어.’

아론조차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으윽……!”

“후우, 후우.”

마법사와 드워프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흑점의 영향에 저항하기 위해서 호흡이 점차 흐트러졌다.

‘이대로 가다간 약한 순서대로 원정대원들이 쓰러질 거다.’

아론은 흑점을 노려봤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흑점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공간을 차단하는 건 어떨까?’

아론은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신력을 내뿜어서 흑점이 있는 공간만을 격리시켜 보려고 했다.

‘이런……!’

그러나 아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신력이 도달한 순간 흑점은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 치워버렸다.

흑점은 조금씩 크기를 키워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마왕의 몸에서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사체에서도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거야?’

아론은 주위를 바라보았다.

이 주위에는 마왕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고위 마족의 사체가 있었다. 그것들은 마왕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모이면 충분히 큰 힘이 되었다.

‘잠깐만. 흑점 안에 사람이 있어?’

그때였다. 아론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흑점 속에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크라우 에드먼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공작가의 첫째였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렇다뿐이지 도저히 크라우라고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설마.’

이윽고 아론은 크라우를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해 끌려갔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분위기가 다른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 크라우의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베르다트인 게 분명했다.

“아니, 첫째 도련님이!”

“저건 도련님이 아니야. 베르다트가 저 안에 스며들어 있다.”

다른 이들도 흑점에서 나오는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놀라워했다.

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베르다트는 아직 부활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충분한 에너지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베르다트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무리하게 크라우의 몸속으로 영혼을 옮길 줄이야. 아직 힘이 불안정했기에 필시 그릇이 된 몸이 깨질 게 분명했다.

쩌저적!

그 예상은 적중했다.

크라우의 육체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겨난 틈으로 마나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고 있군.’

동시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흑점이 꿈틀거렸다. 그 크기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크라우의 몸속으로 쏙 하고 들어갔다.

‘설마…… 흡수한 건가?’

흑점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크라우의 몸과 혼연일체가 된 상태였다.

베르다트가 아무 생각도 없이 크라우의 몸에 옮겨간 것이 아니었다. 흑점을 이용해서 부활까지 필요한 에너지를 모을 속셈이었다.

이미 저 안에는 마왕을 포함한 마족들의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나머지 부족분은 지금부터 전투를 치러서 빼앗을 계획이었다.

아론은 흑점에서 미티움의 기운을 희미하게 느꼈다. 그는 혹시나 싶어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미티움이 맞았군.’

‘칼리’라는 이름을 지닌 미티움이었다.

아론이 소유하고 있는 미티움은 각각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원소와 동일했다.

그러나 칼리는 원소에 포함되지 않았다. 칼리가 가지고 있는 특색은 혼돈과 무였다.

‘마지막 미티움은 베르다트가 가지고 있었구나.’

어느덧 크라우의 몸에 생겨난 균열은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칼리와 결합하면서 신체가 안정된 덕분이었다.

“후우. 한결 낫군.”

크라우의 몸에 들어간 베르다트가 중얼거렸다.

“네가 솔티어크의 차원 문을 열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베르다트는 아론을 보며 말했다.

“덕분에 이렇게 무리를 해버렸지. 뭐, 그래도 성공했으니까 다행이야.”

콰앙!

녀석은 자신의 두 주먹을 부딪치며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네 녀석 몸을 가지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몸으로도 만족해야겠지.”

베르다트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겉모습은 크라우였기에 그 광경을 본 공작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아론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공작이 아끼는 첫째가 저런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론.”

그때, 스라크가 아론을 불렀다.

“아직 저 녀석이 부활에 성공한 건 아니다. 지금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셈이지. 설령 여기 있는 모두를 쓰러트리고 힘을 흡수한다 하더라도 베르다트의 원형을 유지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아론에게는 희망적인 정보였다.

만약 베르다트의 저 상태가 완전하게 부활한 거라면 아론으로서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물론 그나마 다행이라는 뜻이지, 여전히 베르다트는 성가신 상대였다.

아론은 베르다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라도 해서 부활하고 싶었나? 꼴이 추하기 그지없구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베르다트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나 머리는 정반대로 복잡해진 상황이었다.

‘여기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다. 어떻게 싸워야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아론은 방법을 고심했다.

그러나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내 힘만으로는 베르다트를 이길 수 없다.’

신력만을 사용하는 상태인데도 그랬다. 공작을 포함한 다른 이들 역시 베르다트를 상대로는 가망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어.’

아론이 자신의 방법을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콰앙!

베르다트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녀석은 땅을 박차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가공할만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녀석이 선택한 공격 방식은 단순한 주먹질이었다. 크라우의 몸을 이용해서 마법을 쓸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다.

아론은 베르다트의 공격에 배리어를 펼치는 것으로 대응했다.

부웅-!

그러나 녀석의 주먹에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콰콰쾅!

열 몇 겹의 배리어가 주먹 한 방에 부서지고 말았다.

베르다트는 거침없이 아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또다시 자세를 잡고 주먹을 날리려고 할 때.

슈슈슉!

갑작스럽게 날아든 마법이 베르다트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마나가 아닌 신력이 담긴 마법이었기에 베르다트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감히 끼어들지 마라.”

베르다트는 공격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로드가 서 있었다.

“네 녀석부터 박살을 내줘야겠군.”

베르다트의 몸이 로드 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반응 속도에 로드는 미처 반응하지 못해 당할 뻔했다.

콰앙!

로드의 앞을 지킨 건 에르파였다. 그는 검을 휘둘러 녀석의 주먹을 막았다.

꽈앙!

그러나 두 번째 공격에 에르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의 몸은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에르파!”

로드가 소리쳤다.

그 역시 인간의 범주에서는 아득히 강한 존재였다. 그런 에르파 조차도 베르다트의 앞에선 무력함을 보였다.

불완전한 부활의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힘이었다. 신에게 도전했던 과거에는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베르다트는 방해꾼이 사라지자 다시 로드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퍼버버벅!

로드는 신력을 이용해 방어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쏟아지는 주먹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공작은 매섭게 날뛰는 녀석을 막기 위해 이글거리는 화염 마법을 날렸다.

화르르륵!

그러나 베르다트는 그 공격을 맞아주었다. 피해는 거의 없었다. 녀석은 공작의 마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드만을 공격했다.

‘말도 안 되게 강하군……!’

공작은 힘의 차이를 느꼈다.

어쩌면 자신들은 가망이 없는 상대를 앞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원정대원들도 베르다트를 공격했지만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피융!

그때, 어마어마한 속도로 마법 하나가 날아갔다. 베르다트는 처음으로 그 공격에 반응했다.

콰쾅!

그러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베르다트가 미처 막기도 전에 공격이 녀석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 공격을 날린 것은 다름 아닌 아론이었다.

“……인간이 신력을 쓰고, 요정족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싶었지.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말이야.”

베르다트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스라크, 네놈 때문이었군. 아직도 나를 쫓고 있었나?”

지금 아론의 몸에는 스라크가 빙의되어 있었다.

* * *

순수하게 아론의 힘만으로는 베르다트와 붙어도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라크를 이용하기로 했다. 스라크를 자신의 몸에 빙의시켜서 싸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스라크의 힘은 이미 증명이 끝났었다. 일전에 아이젠의 왕인 자르킨과 싸울 때 그 힘을 확인했었다.

다만 빙의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웠다. 요정이 아니면서 체내의 힘을 신력으로만 가득 채웠을 때 빙의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조건은 더 이상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헤핌에게서 받은 마나를 신력으로 변환해주는 펜던트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론. 예전에 빙의했을 때보다 더 강해졌군.]

“그런가요?”

[이전보다 신력이 많아졌고, 그 순도가 높다. 이러면 내가 힘을 써도 의식을 잃지 않게 되겠군.]

“그건 다행이네요. 빙의하고 나서는 기억이 날아가서 좀 찝찝했거든요.”

그리고 스라크를 몸에 받아들인 결과.

피융- 콰쾅!

여태껏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던 베르다트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빙의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론은 그 점이 아쉬웠다.

빙의는 하고 싶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스라크와 동조 과정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로드와 에르파가 베르다트에게 공격을 당했다. 덕분에 둘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만약 아론이 빙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면 이 둘이 심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론. 로드와 에르파는 크게 다쳤지만 죽지는 않았다. 시간만 있으면 회복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론의 생각을 읽은 에르파는 그를 안심시키고는 베르다트를 바라보았다.

녀석에게 한 방 먹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이미 태세를 갖춘 채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스라크는 아론의 입을 빌려서 베르다트에게 말했다.

“또 잘못된 실수를 반복할 생각인가?”

그 말에 베르다트는 스라크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순수한 적의를 쏘아내는 것이 아론에게도 느껴졌다.

“다른 쓰레기 요정들은 필요 없었지. 현실에 안주해서 솔티어크에 눌러앉은 녀석들이니 말이야. 하지만 넌 달라. 너에겐 진취성이 보였고, 힘이 있었다.”

베르다트는 스라크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상황을 만든 건 너다! 너만 합류했더라도 내 계획은 성공했을 거란 말이다!”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네가 어떤 말을 했더라도 내가 합류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신이 된다는 게 그렇게 가벼운 일인 줄 아는 거냐?”

스라크는 베르다트의 말을 부인했다.

둘은 요정족 역사상 손꼽히는 강자였다. 하지만 둘의 성향은 정반대였다. 아니, 베르다트가 유난히 요정들 중에서 공격적이었다.

“분수에 맞게 살아라, 베르다트. 어차피 넌 또 실패를 할 거다.”

“흥. 이제는 사념체가 되어서 남의 몸에 빙의하지 않으면 힘도 못 쓰는 게 입만 살았군.”

스라크와 베르다트는 이제 대화가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즉시 힘을 방출했다.

쿠구구……!

둘이서 신력을 내뿜었을 뿐인데 주위에 있던 자들은 어마어마한 압박을 느꼈다.

특히, 몸이 만신창이가 된 로드와 에르파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공작은 그 둘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공작도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스라크와 베르다트가 내뿜는 기운에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는 대륙에서 대적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에드먼스 공작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평가가 돌았겠는가.

하지만 진정으로 신에 근접한 자들의 모습을 보니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감히 스라크를 지원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더불어 공작의 심정은 착잡했다. 안에는 다른 존재가 들어 있다고는 하나 겉모습은 크라우와 아론이었다.

그래도 저 둘의 싸움에서 아론 쪽이 이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쿠콰콰콰!

스라크와 베르다트가 내뿜은 신력의 격류가 충돌했다.

둘의 힘은 색상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베르다트의 검은 기운과 스라크의 백색 기운. 두 신력은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로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이었다.

“나보고 사념체라고 비아냥거렸지 않나? 정작 힘은 볼품없군.”

“도발하는 거냐? ……좋다. 그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직접 확인해주마.”

파앙!

베르다트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신력이 터져 나왔다. 검은색을 띤 신력은 녀석의 몸에 서리더니 딱 맞는 갑옷으로 변했다.

그리고 손에는 어느새 검이 한 자루 쥐어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검이었다.

‘저건…… 칼리를 검의 형태로 바꾼 거군.’

아론은 의식 속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타앗!

베르다트는 검을 굳게 쥔 채 땅을 박차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

스라크와 베르다트의 전투는 터무니가 없다고 아론은 느꼈다.

‘……장난이 아니야.’

이번에는 스라크가 빙의해서 힘을 써도 아론이 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자신의 몸으로 둘의 전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꽈앙!

둘은 수없이 충돌했다. 그때마다 빛이 번쩍거렸다. 그 빛이 신력이 충돌하는 여파로 공간이 무너지면서 다른 차원의 빛이 흘러들어온 거라는 걸 알았을 때 아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주변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스라크가 전투 공간만은 다른 차원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싸우면서 가능한 건가?’

새삼 아론은 스라크의 힘에 놀라워했다. 스라크가 저렇게 차원을 분리시켜 놓지 않았더라면 이곳 사람들이 휘말렸을 것은 물론이고, 중간계에도 커다란 훼손이 생겼을 게 분명했다.

‘이게 신에 가까운 자들의 싸움……!’

아론은 둘이 붙을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왜 베르다트가 신에게 도전하고자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형국은 막상막하다.’

아론은 베르다트의 상태를 살폈다. 둘은 일말의 양보 없이 합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힘 자체는 베르다트가 조금 더 우위에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건 쿠브의 도움이 컸다. 쿠브는 각성을 마치고 원래 자신의 힘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쿠브는 정령 중에서도 최상급의 존재였다. 쿠브가 제때 각성하지 못했더라면 전투의 형세는 스라크가 점점 밀리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힘들 것 같은데.’

아론은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전투의 상황이 스라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저 검이 문제다.’

아론은 베르다트가 들고 있는 검을 응시했다.

칼리 소드. 저 검이 격돌할 때마다 주위의 신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투가 계속 진행된다면 베르다트는 힘을 충전하고 스라크는 지치게 된다.

‘칼리 소드를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승산은 없어 보인다.’

아론은 머리를 굴렸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 건 스라크였지만 그가 패배하면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어떻게 하면 칼리 소드를 처리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칼리 소드도 본질은 미티움이다.’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기에 해볼 수밖에 없었다.

[스라크 님. 혹시…….]

아론은 자신이 구상한 것을 스라크에게 이야기했다.

[음. 해볼 만하겠는데?]

스라크는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겠군.]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론의 대답을 들은 스라크가 다시 한번 신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아론이 착용하고 있던 펜던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그니와 바유의 보석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슈우욱- 화르륵!

스라크는 바람 마법과 화염 마법을 융합해서 마법을 날렸다.

거대한 화염이 거친 바람을 타고 베르다트를 향해 날아갔다.

“또다시 힘 싸움을 하자는 거냐?”

베르다트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휘익-!

마법이 칼리 소드에 닿자 기세를 잃고 흡수되기 시작했다.

꽈르릉!

그때,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며 벼락이 베르다트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펜던트에서는 수리야와 바루나의 보석이 빛을 뿜어냈다.

‘스라크가 사용하니까 위력이 어마어마하네.’

공격 하나하나가 신의 일격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쓸데없는 잔꾀를!”

베르다트가 포효했다.

녀석은 검을 크게 휘둘러 날아온 불꽃을 마저 잠재우고는 떨어진 벼락마저도 방어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나오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는 아론이 노린 바였다. 아론은 베르다트가 칼리 소드를 하늘을 향해 드는 자세를 노렸었다.

‘지금이다!’

스라크 역시 아론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마법을 준비했다.

쿠베라와 찬드라의 보석이 펜던트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쿠브가 불쑥 튀어나왔다. 쿠브는 베르다트가 검을 든 손을 꼼짝하지 못하게 붙잡았다.

“감히 정령 따위가!”

베르다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멸되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베르다트는 오히려 이 기회에 성가신 정령을 없애겠다고 생각했다.

칼리 소드는 주위에 있는 에너지를 빨아들였고, 그게 정령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쿠브가 보유한 힘의 크기가 커서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고작 몇 초 더 길어졌을 뿐이었다.

베르다트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스라크를 눈으로 보았다.

‘정령이 사라지자마자 네 녀석의 목을 베어주마.’

베르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라크의 행동을 주시했다. 저렇게 알아서 거리를 좁혀 오니, 스라크를 한 방에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촤학!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스라크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검을 향해 알 수 없는 액체를 뿌렸다.

그러자 칼리 소드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베르다트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스라크가 뿌린 액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미티움의 성질을 잠재우는 광석……!’

하지만 그런 광물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제련을 할 수 있는 자는 중간계에 없었다.

‘설마.’

베르다트는 문득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트레벨을 통해서 아론에 대해 보고 받은 내용이었다.

‘분명 녀석에게 미티움을 추출할 수 있는 검집이 있다고 했지.’

베르다트는 아차 싶었다.

스라크가 초고온의 화염 마법을 날린 것도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공격인 척 위장하면서 검집을 녹인 거군!’

스라크는 녹인 검집을 방금 전에 칼리 소드에 뿌린 것이었다.

* * *

효과는 즉각적으로 발휘되었다.

칼리 소드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스라크도 이번 공격에 힘을 많이 써버린 상태였다.

미티움을 녹이는 검집은 헤핌이 만든 도구였다. 이런 것을 짧은 시간에 녹이기 위해서는 불의 신에 버금가는 화력을 낼 수 있어야 했다.

스라크는 그 정도 힘을 내기 위해 무리를 했고, 이제는 빙의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아론. 더 이상 빙의한 상태에서 싸우긴 힘들 거 같다.]

‘수고하셨습니다. 녀석은 이제 칼리 소드를 쓰지 못하니, 제가 싸울게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억지로 빙의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아론이 나서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럼…… 부탁한다.]

스라크는 그렇게 말한 뒤 아론과의 빙의를 해제했다. 그는 점점 아론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잘 할 수 있으려나.’

한편으로 스라크는 불안했다.

가장 위협적으로 판단되는 칼리 소드의 힘을 막았다. 하지만 베르다트는 존재 자체가 강한 놈이었다.

그래도 아론은 스라크가 떨어져 나오자마자 곧바로 신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천재구만.’

스라크는 속으로 놀라워했다.

아론은 지금 스라크가 사용했던 신력의 운용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 중이었다.

원래 아론의 신력 사용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아론은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용케도 해내고야 말았다.

아론은 스라크가 빙의되어 있는 동안 그가 자신의 몸을 다루는 감각을 익히고자 노력했었다.

물론 그 감각을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희대의 천재였고, 스라크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스라크 님은 이런 방식으로 신력을 사용했었구나.’

아론은 신력을 사용할수록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감각을 복기할 때는 긴가민가했었는데, 더 이상은 아니었다.

‘지금이 베르다트를 쓰러트릴 적기다.’

아론은 곧장 녀석을 공격하기로 했다. 칼리 소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 베르다트가 당황한 지금, 최대한 공격을 해야만 했다.

아론은 끌어모은 신력을 공격 마법으로 전환시켰다. 그러자 허공에 각기 다른 속성의 마법들이 떠올랐다.

무려 6개의 각기 다른 속성 마법들이었다. 동시에 떠오른 마법들은 하나하나가 대마법에 가까웠다. 아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것들을 구사하고 있었다.

슈욱!

마법은 일제히 베르다트를 향해 날아갔다.

콰콰쾅!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스라크가 분리해 놓은 차원의 벽에 금이 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 정도로 녀석이 쓰러지진 않았을 거다.’

아론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의 예상대로 폭발의 여파가 가라앉자 베르다트의 실루엣이 멀쩡하게 보였다.

‘칼리 소드로 방어를 한 건가?’

베르다트의 양손으로 검을 굳게 쥔 자세를 보아하니 그런 듯했다.

칼리 소드는 더 이상 힘을 흡수하는 능력이 없었다. 지금의 칼리 소드는 그저 잘 만들어진 철검과 다를 게 없었다.

‘방금 전 내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을 텐데.’

아론의 예측은 정답이었다. 칼리 소드는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베르다트는 피해를 얼마 입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검은 그렇게 방패막이로 써도 되나? 지금은 힘을 잃었지만 나름 귀한 건데 말이다.”

“이 정도는 내가 신이 된다면 얼마든 다시 만들 수 있다.”

베르다트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미티움 정도야 다른 신들을 정리하고 녀석들의 코어를 이용하면 쉽게 얻을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아론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망상은 신이 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신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보아하니 스라크가 사라진 모양이군. 한낱 인간 주제에 감히 누굴 막겠다고 쫑알거리는 거냐?”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다시 투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베르다트는 자신의 몸에 검은 기운을 둘렀다. 이내 그 기운은 녀석의 손으로 가더니 아론을 향해 발사되었다.

‘저건 녀석이 크라우의 몸을 이용해 나한테 날렸던 첫 공격이군.’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막지 못했었다. 하지만 스라크의 전투 방식을 배우는 지금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콰쾅!

아론이 펼친 방어 마법과 베르다트의 기운이 격돌했다. 이내 날아온 기운은 주변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하! 꼴에 스라크의 기술을 흉내 내는구나.”

그걸 본 베르다트는 비웃었다.

“하지만 고작 따라 할 줄만 알아서 뭘 하겠나? 정작 내실은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원숭이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격이군.”

“웃기는 놈이군. 그럼 너는 원숭이한테 지금 대화를 시도하는 거냐? 너도 급하긴 한가 보구나.”

“……따박따박 말대꾸를. 힘도 없는 녀석이 그러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지.”

베르다트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룩불룩 솟았다.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불나방 같은 놈.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베르다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의 몸이 온통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론도 녀석이 입만 나불대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얼굴에 비웃음을 지우고 펜던트 속의 신력을 죄다 끌어모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쿠브의 힘도 빌려서 자신의 신력에 보탰다.

그렇게 서로는 전력을 다 모은 상태였다. 부딪치는 기운만으로도 주변의 생명체를 압살할 수 있었다.

콰쾅!

아론과 베르다트가 내뿜은 공격이 격돌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격은 주변의 대지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격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걸 막기 위해 스라크가 분리해 놓은 차원의 벽에도 이상이 생겼다.

덕분에 차원의 틈이 벌어졌고, 그 사이로 흘러 들어간 공격이 다른 차원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쿠우웅!

갖가지 원소와 빛이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을 제외하면 전투의 형국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이미 지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둘은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두 명 모두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무자비하게 싸워댔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스라크가 빙의해서 전투했을 때보다도 훨씬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다.

촤학!

둘이서 뿜어낸 피가 공중에 비산했다. 그러면서도 전투는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서로 한 치도 밀려나지 않았다. 완전히 막상막하의 싸움이었다.

아론도 그 여실 없이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이기기 위해서는 좀 더 색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으음…….’

아론과 베르다트의 전투를 지켜보던 스라크는 고민했다.

‘아론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군.’

스라크는 아론이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정도라면 그에게 운명을 걸고, 자신의 존재를 희생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휘리릭-!

베르다트가 검은 기운을 두르고 몸을 던져왔다. 무시무시한 투기가 그의 주위로 넘실거렸다.

[아론. 방어하지 말고, 나를 믿고 녀석의 급소를 노려서 공격해라.]

‘알겠습니다.’

아론은 스라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라크는 아론의 앞에 서서 자신의 형상을 실체화시켰다.

꽈앙-!

스라크가 베르다트의 공격을 막아냈다. 베르다트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스라크의 형태에 놀란 눈빛을 했다.

아론은 스라크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베르다트의 심장을 노리고 공격을 가했다.

슈와아악!

아론의 손에서 오색 찬란한 마법이 뻗어져 나와 베르다트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일격이었다. 그 여파로 펜던트가 가진 힘을 다하면서 보석들이 발하던 빛이 사라졌다.

콰콰칵!

아론의 공격이 베르다트의 심장에 적중했다.

“으윽!”

베르다트가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더니 아래로 추락했다.

쿵!

“……하.”

떨어진 베르다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신의 자리를 넘봤는데, 내가 고작 인간 녀석에게 당하다니.”

그는 과거에 신들의 영역에 침범했던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인간에게는 절대 당하지 않겠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스라크도 아니고 인간 마법사에게 급소를 공격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물론 아론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수준을 얕봤던 것도 베르다트의 패착 중 하나였다.

“고작 인간에게, 고작 인간에게…….”

베르다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론은 그런 그의 상태를 무시하고 다음 일을 착수하려고 했다.

‘이 녀석을 크라우의 몸에서 꺼내야 한다.’

깔끔하게 급소만을 노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면 크라우의 몸이 사라지는 거였고, 아론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아론은 베르다트를 봉인시킬 생각은 없었다. 녀석을 봉인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사태이지 않는가. 그는 똑같은 미래가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지금의 베르다트는 힘을 다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녀석을 소멸시키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아론은 베르다트가 들어 있는 크라우의 몸에 손을 댔다. 그는 신력을 밀어 넣어서 녀석을 꺼낼 생각이었다.

“크아아악!”

하지만 베르다트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녀석은 마지막 발악을 하려고 했다.

그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정족의 안위를 뒤로하고 신들에게 도전할 리가 없었다.

“내가 신이 될 수 없는 세계 따위, 박살 내 주마!”

베르다트는 그렇게 외치며 절규했다.

‘일이 났군.’

아론은 크라우의 몸이 붕괴하는 것이 느껴졌다. 베르다트가 부활하기 위해 모았던 에너지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존재 자체를 유지하는 힘이 이 정도란 말인가?’

아론은 느껴지는 힘에 혀를 내둘렀다. 왜 부활하는데 많은 생명이 필요한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콰아아앙!

요동치던 에너지들이 폭발했다.

그 여파로 아론을 포함한 주변의 존재들이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폭발의 중심지에는 여태껏 본 적 없던 커다란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 * *

그 균열을 본 아론은 당황하고 말았다.

‘또 이상한 게 생겼어?’

마치 사람의 몸에 생긴 상처처럼 허공에 찢어진 공간이 존재했다.

아론은 저러한 공간의 균열을 몇 번 봤었다. 공간을 다루는 마법사들의 특기가 저렇게 공간을 찢는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 베르다트가 차원을 강제로 열어 마계의 문을 개방한 것도 목격했었다.

‘그리고 나도 솔티어크의 차원을 개방했었지.’

하지만 아론이 지금 보고 있는 균열은 느낌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개방한 공간과는 생김새부터 차이가 났다.

쿠르릉!

그리고 저 균열 속에서 천둥보다 큰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과연 베르다트는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리고 저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든 게 미지수였기에 아론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스라크 님!’

아론은 이 현상에 대해 스라크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그의 자취를 찾았다. 하지만 스라크의 사념은 생명을 다해버린 모양이었다.

잠시 후 폭발의 여파로 튕겨져 나갔던 이들은 아론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런……!”

로드는 균열을 보고 안색이 새파래졌다.

“파렴치한 자식! 기어코 중간계를 파멸시킬 생각인 건가요!”

로드는 분노에 가득 찬 어투로 외쳤다.

아론은 그녀가 균열의 정체를 아는 것 같았기에 물어보았다.

“로드 님. 혹시 저게 뭔지 아십니까?”

“베르다트는 차원을 강제로 열어서 이 차원을 붕괴시키려고 하는 중이에요.”

아론은 순간 머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차원을 붕괴시킨다니. 베르다트는 죽을 때조차도 곱게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대가 솔티어크와 차원을 연결해서 개방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그건 두 차원의 문을 열고 안전하게 통로를 이은 겁니다. 하지만 저건 이쪽의 차원만 열었을 뿐, 반대쪽은 열지 않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길 보세요.”

로드가 균열을 가리켰다. 아론은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론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균열은 점점 커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균열의 너머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괴물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 저리 커?’

멀리서 보는데도 녀석들의 덩치가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못해도 수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저 녀석들은 공허에 사는 괴물들입니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통로가 없으면 저렇게 공허로 연결됩니다.”

“공허요? 저 녀석들이 거기에 사는 괴물이라고요?”

“아마 처음 듣는 말일 겁니다. 차원과 차원의 틈에 있는 미지의 공간을 공허라고 부르고, 그곳에서 혼돈의 힘을 먹고 자라는 괴물들이 바로 저것들이지요.”

“그러면 저 괴물들이 이곳으로 넘어오려고 한다는 겁니까?”

아론의 물음에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은 혼돈만 먹어 치우다 보니 이곳의 생명체들이 내뿜는 힘이 신기할 거예요. 그래서 기를 쓰고 이곳으로 오려고 하겠지요.”

아론은 균열 너머에 있는 괴물들의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저 녀석들이 이곳에서 활개 치기 시작한다면 대륙은 황폐해질 게 분명했다.

‘신이 될 수 없는 세계 따위, 박살 내 주겠다고 베르다트가 죽기 전에 말했었지.’

아론은 치가 떨렸다. 녀석이 진짜로 그 짓거리를 하고 갈 줄은 몰랐다.

아론은 다른 원정대원들을 살펴보았다. 용맹하게 마족들을 쓰러트린 그들조차도 깊은 공포를 느끼는 중이었다.

“녀석들이 넘어온다!”

균열을 주시하고 있던 공작이 외쳤다. 균열을 넘은 괴물들이 하나둘 생명체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투쾅!

녀석들의 무력은 가공할만했다. 놈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낚아채서 그대로 입안에 넣어버렸다.

원정대원들은 그 기괴한 모습에 더욱 공포를 느꼈다.

“으아악!”

마법사 한 명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괴물을 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퍼억!

괴물이 마법사를 낚아채려고 할 때, 아론이 마법을 날려 녀석의 머리를 꿰뚫었다.

‘다행히 신력이 통하는군.’

하지만 아론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몸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베르다트와 격전을 벌인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괴물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이 차원에 미래는 없었다.

‘차라리 내 몸이 부서지는 편이 낫다.’

이미 다른 이들도 공포를 억누르고 공허의 괴물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공작은 물론이요, 로드와 에르파도 부상 당한 몸을 이끌고 괴물들과 대치했다.

아론은 저들도 열심히 싸우는데, 자신이 빠져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며 전투에 나섰다.

***

아론은 정신없이 전장을 누비며 공허의 괴물들을 상대했다.

그는 정말이지 미친 듯이 싸웠다. 서클에서는 더 이상 신력을 짜낼 수 없다며 비명을 질렀다. 마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펜던트의 신력도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소환한 쿠브의 힘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쿠브가 힘을 쓰는 데에도 계약자인 아론의 신력이 필요했기에 당연했다.

‘제길. 끝이 없어.’

공허의 괴물들은 강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균열을 통해서 넘어오고 있었다.

‘저 균열을 막아야 한다.’

아론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균열을 어찌해보기 위해서는 균열 근처로 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론에게는 그런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목숨을 노리는 공허의 괴물만 해도 수십 마리는 되었다.

블링크 같은 이동 마법을 쓰는 것도 고려해 보았다.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도착해서도 문제였지만, 가는 도중에 괴물들에게 당할 거라고 예상이 되었다.

아론은 전장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신력이 바닥나기 직전이기는 했지만, 나머지 원정대원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사들 중에선 공허의 괴물에게 팔이나 다리가 뜯긴 자도 있었다. 요정들 중에선 눈을 희생한 자도 존재했다.

신체가 성한 자들이 없었다.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결과가 바로 저 꼴이었다.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지금이야 신력 덕분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허 괴물들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신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아론은 자신의 몸도 찢길 걸 상상하니 아찔해졌다.

저 녀석들을 물리칠 방법이 없는 이상, 이 차원의 멸망은 예정된 것 같았다.

우우우웅!

그때였다.

아론은 자신의 뒤편에서 커다란 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뭐지?’

분명 후방에는 이만한 크기의 힘을 가진 자나 괴물이 없었다.

‘가히 베르다트와 동급이라고 할 만할 정도의 힘이다.’

그 충만한 기운은 점점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그 힘이 자신을 위협하려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콰쾅!

그 힘의 주인이 도착하자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아론을 향해 주먹을 뻗던 공허의 괴물 하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으윽!”

아론은 어마어마한 광채가 쏟아지자 절로 눈이 감겼다.

잠시 후, 시야가 진정되자 아론은 갑자기 나타난 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웬 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작은 키에 걸맞지 않게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휘익- 콰앙!

게다가 그 도끼를 제법 능숙하게 다루었다. 노인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공허의 괴물이 한 마리씩 죽어 나갔다.

도저히 노인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허…….”

아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그것은 마침 주위에 있던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노인의 정체는 드워프 대장장이 헤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잘 아는 자가 이렇게 등장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헤핌 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론은 헤핌을 바라보며 물었다.

드워프들은 기본적으로 힘이 셌다. 하지만 대장장이인 그가 저렇게 규격 외의 괴물들을 손쉽게 잡기란 어려웠다.

“잊고 있던 게 떠올랐거든.”

헤핌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대륙이 멸망하면 드워프들도 갈 곳을 잃게 되니, 한가하게 망치나 두드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 그건 맞습니다만…….”

투쾅!

아론이 말하는 중에도 헤핌은 도끼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궁금한 게 많다는 표정이군. 일단 이 녀석들을 쓰러트리고 난 뒤에 말해 주마.”

헤핌은 그렇게 말한 뒤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괴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

그때, 아론은 스라크가 말해 주었던 사실이 뇌리에 스쳤다.

‘신은 맞지만 좀 특별한 신이다.’

‘헤핌 님의 신명은 다이아크라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정황상 헤핌이 윤회 전의 기억을 찾은 것이 분명했다.

콰콰콰쾅!

헤핌은 신의 이름에 걸맞게 굉장한 무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대장장이라고 해도, 신의 무력은 남달랐다.

헤핌의 참전으로 전장의 상황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 덕분에 승기가 원정대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아론은 급하게 헤핌의 뒤를 따라갔다.

“헤핌 님! 저 균열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공허에서 괴물들이 넘어올 겁니다.”

“그래 보이는구나!”

헤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끼를 휘두르며 대답했다.

“균열이 점점 커지는군! 이대로 놔뒀다간 차원이 붕괴할 거다.”

“어떻게 방법이 있습니까?”

“저걸 막기 위해선 신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네. 그리고 육체가 노쇠해서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좋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헤핌은 전혀 투지가 꺾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저 균열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겠구나!”

그 대답을 들은 아론은 왠지 모르게 몸에서 힘이 솟기 시작했다.

“저 균열에 도달할 때까지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냐!”

아론의 말에 헤핌은 호쾌하게 대답하며 괴물의 몸통을 박살 냈다.

‘좋아. 그렇다면 목표는 명확하지.’

헤핌과 함께 괴물들을 헤쳐나가면서 균열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론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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