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38/40)

Chapter 3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법사들이 아론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론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리움이 함락되었다고?’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벽은 성한 곳이 없었고 생명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성문이 부서진 페리움으로 들어갔다.

“허어.”

마법사 한 명이 침음을 흘렸다.

내부는 더욱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군요. 이렇게 폐허가 될 정도면 시체들이 나뒹굴어야 할 텐데요.”

“동의합니다. 전투가 있었다기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곳을 부순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이 주위를 보며 떠들었다.

아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누가 쳐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페리움은 호락호락 무너질 곳이 아니었다. 분명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흔적이 없었다.

“설마 커다란 공격 한 방에 무너진 것은 아닐까요?”

“설마요.”

마법사들은 페리움의 성벽을 보았다.

“여기는 드워프의 왕국입니다. 저 성벽도 인간들이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견고함을 자랑하지요.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해서 공격한다고 해도 페리움을 단번에 무너트리긴 힘듭니다.”

아론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는 페리움에서 드워프들과 같이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이곳의 견고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그러한 공격이 날아왔더라도, 말이 안 되지. 드워프들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공격이라니. 있을 수 없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격이 다른 공격은 닿는 존재 자체를 없앨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공격이 날아왔다면 페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설마. 공격하고 드워프 시체만 따로 수거해 간 것도 아닐 테고.’

녀석들이 청소부도 아니고. 핏자국도 말끔하게 지운 뒤에 떠났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드워프들이 미리 도망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론이 입을 열었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다고요?”

“그 용맹한 드워프가 말입니까?”

마법사들은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이들 말대로 드워프들이 지닌 용맹함은 대륙에서도 알아주지. 그들이라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성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았겠나?”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공작이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드워프들은 용맹했고, 대륙에서 밀려난 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여기에 정착했다.

주기적으로 몬스터 군세가 페리움을 공격했지만 악착같이 지키며 버텼다.

그런 드워프들이 성을 버린다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드워프들을 이끄는 족장 한 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합니다. 만약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상대를 맞닥뜨렸다면, 드워프들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버린다는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그린데란트 산맥에는 곳곳에 강력한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그들이 숨었을 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아론은 이전에 드워프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거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비밀 통로에 도착한 아론.

하지만 통로는 붕괴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부쉈군.’

그 사실을 확인한 아론은 쿠브를 소환했다.

“쿠브. 주변에 드워프들이 있는지 확인해 주겠어?”

“응! 알겠어.”

쿠브는 눈을 감고 집중한 상태에서 주위를 탐색했다.

아론이 성장한 덕분에 쿠브 역시 능력이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예전에는 땅과 접촉해야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찾았어!”

쿠브는 아론에게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아론은 그곳으로 가서 스태프를 꺼내 땅을 두드렸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평한 땅이었는데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런 곳이?”

“저는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마법사들은 보며 놀라워했다.

이들 역시 대륙에서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그런데 간단한 공간 은신조차 탐지하지 못한 것이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몰랐던 게 당연해. 이건 마법으로 숨긴 게 아니라 드워프들의 힘으로 빛의 굴절률을 조정한 거니 말이야.’

아론도 쿠브가 없었더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끼익.

아론은 통로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부산스런 움직임이 느껴졌다.

“누, 누구냐!”

드워프가 창을 겨누며 경계했다.

“아…… 아론 님?”

그러나 이내 방문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잠시만요! 족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드워프는 부리나케 안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쿠르트와 나머지 족장들이 모습을 보였다.

“오오, 아론!”

“오랜만이군.”

그들은 아론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안으로 들어오게. 자세한 얘기는 거기서 들려주겠네.”

아론의 물음에 쿠르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들어오는 좁은 통로와 달리 내부는 충분히 넓었다. 아론 일행은 쿠르트를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들 자리에 앉자 아론이 쿠르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 전이었네. 대수림 부근에서 이상 현상이 계속 일어났었다.”

“부근에는 종종 몬스터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확인해 보니 인간의 기운이 느껴졌었네. 대수림은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지. 그래서 곧바로 정찰대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어.”

쿠르트는 징조가 좋지 않음을 느끼고 직접 인원을 선별해서 사라진 정찰대를 찾으러 갔었다.

“거기서 보았다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안개를 말이야.”

“검은 안개요?”

“그래. 그건 뭐라고 말로 하기도 힘든 기분 나쁜 힘을 내뿜었어. 혼돈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안개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닿아버린 드워프를 집어삼켰다네. 닿는 순간 생기가 빼앗기는 걸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어.”

“그럼 정찰대가 사라진 것도 그 안개 때문이겠군요.”

“멀리서 공격해 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안개에 닿기 전에 도망치는 걸 선택했지. 하지만 그 안개는 움직이는 방향이 페리움이었다네.”

쿠르트는 긴급하게 족장 회의를 소집했다. 거기서 결정된 사항이 페리움을 떠나서 미리 만들어 둔 땅굴에 숨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드워프들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페리움이 시체 없이 폐허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 안개는 대체 뭐였는지…….”

쿠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 역시 안개의 정체를 몰랐다.

“그건 베르다트의 잔영이다. 아직 부활을 다 마치지 못한 녀석의 모습이지.”

그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안개 형태라면 내가 얼마 전에 본 것과 같은 녀석일 거다.”

“그 안개가 베르다트라고요?”

“녀석은 아직 부활하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거든. 안개의 형태로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생기를 빼앗고 부활에 필요한 힘을 모으고 있는 거다.”

공작은 그렇게 말한 뒤 쿠르트를 보며 물었다.

“녀석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지?”

“커다란 건물 정도였다네.”

“내가 보았을 때는 사람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꽤 커진 셈이군.”

그 말은 즉, 부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래. 예상보다 녀석의 행보가 빠르군.”

아론과 공작이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쿠르트와 나머지 족장들은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알지 못했다.

“보아하니 안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쿠르트의 물음에 아론은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허어!”

그 내용을 다 들은 쿠르트는 탄식했다.

“그게 사실인가?”

아론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신에게 도전했던 요정 하나가 다시 부활을 꿈꾸고 있다니.

그렇지만 이를 말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아론이었다. 쿠르트는 페리움의 은인인 그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수림과 그린데란트 산맥에는 많은 몬스터들이 있다. 그걸 그 녀석이 전부 집어삼킨다면 부활하는데 충분한 에너지를 모으게 될 게 분명하다.”

“예. 저희는 그걸 막기 위해서 온 겁니다.”

“녀석이 부활하면 대륙의 운명이 크게 바뀌겠군.”

쿠르트는 족장들을 바라보았다.

나머지 족장도 같은 의견이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도 자네들을 돕겠네.”

“감사합니다.”

아론은 그들의 결정이 반가웠다. 안 그래도 드워프의 힘을 빌릴 참이었는데 말이다.

“많은 수는 필요 없습니다. 몇 명만 뽑아 주셔서 도와주시면 됩니다.”

“일단 나도 가세하겠네.”

“우리도 같이 가지.”

쿠르트를 포함한 족장들이 모두 참전 의사를 밝혔다.

“자네는 남아주게. 우리가 다 나서면 나머지 드워프들이 불안하지 않겠나.”

“으음. 알겠다.”

쿠르트는 바위 부족의 족장에게 그렇게 말한 뒤 같이 갈 나머지 드워프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티푸르를 포함한 수호자들이 몇 명 차출되었다.

“잠깐. 말 좀 해도 되겠나?”

그때, 조용히 있던 드워프 대장장이 헤핌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대륙의 운명을 걸고 있다면 우리들이 가진 모든 걸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그 의견엔 쿠르트도 동의했다.

아론도 헤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었다.

“왕실 무기고에 있는 모든 무구들의 사용을 허가하세.”

드워프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구들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론이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가 가지고 있는 펜던트만 해도 헤핌의 제작품이었다.

“그걸 쓰게 된다면 전력이 크게 상승할 거다.”

헤핌은 그렇게 말한 뒤에 아론에게 다가왔다.

“자, 받아라.”

그는 아론에게 펜던트를 하나 건넸다.

“헤핌 님. 이건……?”

“신력을 사용한다면 이 펜던트에 미티움을 꽂아서 사용하는 게 더 나을 거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신력을 사용한다는 걸.”

“세상 오래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있지.”

헤핌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 펜던트는 마나를 신력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할 거다.”

헤핌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나를 신력으로 변환해 준다고?’

아론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게 있다면 베르다트를 상대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론은 원래의 펜던트에서 미티움을 꺼내 새로 받은 펜던트에 끼워 넣었다.

그런 뒤 그는 조심스럽게 그 펜던트를 착용했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몸 안의 마나가 펜던트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신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느낌……!’

아론은 이와 비슷한 기분을 이전에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자르킨과 싸울 때였다. 당시에 몸에 마나를 비우고 신력으로만 마법을 사용했었는데, 그때와 느낌이 똑같았다.

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그때는 그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펜던트만 있다면 계속해서 신력만을 운용하는 게 가능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드셨지?’

아론은 헤핌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실력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다.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니까. 그래도 이는 절대 만들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신력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이 펜던트를 만들 수 없었다.

[재밌는 표정을 짓고 있군.]

‘……스라크 님?’

그때, 놀랍게도 스라크의 목소리가 아론의 귓가에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전음을 쓰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스라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몸에 신력이 가득 차서였다.

[헤핌 님도 오랜만에 뵙는군. 저분도 대륙의 역사와 같이 흘러가는 분이시지. 세상이 창조될 때에 계셨으니까.]

‘……네?’

아론은 스라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요정족의 로드에게조차도 경의를 표하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헤핌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태도가 달라졌다.

‘설마. 헤핌 님은 신족인가요?’

[신은 맞지만 좀 특별한 신이시지.]

어쩐지 신력에 대해서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싶었다.

[헤핌 님의 신명은 다이아크라고 한다.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고 싶어서 각고의 노력으로 신이 되셨지.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특별한 신이시다. 필멸의 운명을 지니시고 계시거든.]

‘필멸이요?’

[헤핌 님은 윤회하고 계신다. 단, 이전 생의 기억은 전혀 떠올리지 못하시지. 그래고 신이었던 시절의 잔재만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어서 통찰력을 발휘하고 계신다만.]

아론은 스라크의 설명을 듣고 나서 어떻게 헤핌이 이 펜던트를 만들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신이었구나.’

드워프들의 제조 기술이 좋긴 하지만 헤핌은 그들조차도 넘보기 힘든 손재주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드워프라고 해도 미티움을 해석하고 그걸 활용하는 펜던트를 만드는 건 힘들었다. 그때도 놀라웠는데, 신이었다니 이해가 되었다.

“고맙습니다. 헤핌 님.”

아론은 헤핌에게 감사를 표했다.

굳이 스라크에게 들은 내용을 그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가 필멸의 신이 된 것도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굳이 거기에 아론은 개입해서 훼방을 놓고 싶지 않았다.

***

헤핌의 제안대로 아론을 포함한 원정대와 차출된 수호자들은 왕실 무기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검은 안개를 만나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런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워프들의 무기고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

“저도 오랜만에 가슴이 뜁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들이 쓰는 무구들도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대장장이들이 만든 거였다. 하지만 드워프가 만든 것과 비교하기는 힘든 수준이었다.

“둘러보신 뒤에 원하는 장비들을 골라 주시오.”

쿠르트가 그렇게 말하면서 왕실 무기고의 문을 열었다.

“오오!”

마법사들은 감탄했다.

여기 있는 장비들이 모두 드워프가 만든 것. 게다가 선별해서 보관 중인 무구들이었다.

그들은 신중히 이곳을 둘러보며 자신이 사용할 장비를 고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각자의 무기를 고른 마법사들은 만족한 표정으로 그곳을 나왔다. 수호자들 역시 필요한 장비들을 모두 가지고 나왔다.

여기 있는 이들의 숫자는 소수 정예였다. 하지만 드워프의 장비로 무장한 이들의 화력은 작은 나라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불안했다.

전력은 충분히 올라간 상황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맞붙을 상대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이었다.

‘어차피 싸우는 건 예정된 미래다. 굳이 미리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귀중히 쓰기로 했다. 그는 디멘션 마법서를 읽으며 조금이라도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아론.”

그때였다. 아이젠과 전쟁할 때 총지휘관을 맡았던 랜튼이 그를 불렀다.

“공작님이 부르신다.”

“알겠습니다.”

이제 출정할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아론은 랜튼이 떠나는 것을 본 뒤 다시 마법서를 바라보았다.

‘출정하기 전까지 디멘션 마법의 이해도를 좀 더 높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베르다트가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이번에 배우고자 하는 마법은 어려움의 정도가 달랐다. 스라크가 종종 도와주기는 했다. 덕분에 차원에 대한 이해를 했고 각각의 차원에 물건을 두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차원을 연결하는 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지도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쉽지만 지금 상태로 갈 수밖에.’

아론은 스라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3일. 길게 잡아도 3일 후에 베르다트는 부활의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고 했었다.

‘그 전에 잡아야 한다고 했었지.’

만약 단계가 올라가게 되면 지금의 인원으로는 베르다트를 상대하는 게 힘들다고 했었다.

3일은 전혀 여유로운 시간이 아니었기에 아론은 자신의 장비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인원들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안개가 보이는가?”

“예.”

공작이 저 멀리에 있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안개의 끝부분이 보였다.

‘크기가 어마어마하군.’

아론은 안개를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저게 베르다트의 부활 초기 단계이다. 저 안개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명체가 안개에 닿는 순간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싸우기 전에 내용물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 한 명에게 정찰을 지시했다.

마법사는 부유 마법을 사용해서 왕성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런 뒤 천리안 마법을 사용했다.

꿀꺽.

마법사는 긴장하며 마법의 좌표를 조정했다. 그의 시야는 점점 더 안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안개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흡!”

마법사는 안을 본 순간 깜짝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이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소멸할 때까지 생기를 흡수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저 안개 속에는 생명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건 그린데란트 산맥의 몬스터나 드워프여야 할 터.

내부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괴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끄르르륵-]

[끼에에에-]

그가 쓰는 천리안 마법은 숙련도가 높아서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안에서는 이 세상의 생명체가 낸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대체…….”

마법사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녀석들은 본 적이 없었지만 마족이었다. 천리안으로 보이는 그 숫자는 못 해도 천을 넘기고 있었다.

“제길!”

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마족의 힘이 강함은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수까지 많으니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마법사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마족이 안개 속에 존재할 수 있는지 말이다.

마족은 마계의 문을 통해서 튀어나온다. 차원의 문을 통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리를 소환하기 위해서 수십이 넘는 생명체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존재가 바로 마족이었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해.”

마법사는 다시 부유 마법을 써서 지상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마족이 저렇게 많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해서 보고해야만 대처를 할 수 있었다.

[건방지게 이곳을 보다니.]

그때였다. 마법사의 머릿속에 기분 나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마법사는 소름이 쫙 돋았다.

마법사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저 안개를 만든 장본인임을 깨달았다.

[감히 내부를 보았으니, 너도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 소리를 들은 마법사는 황급히 천리안을 해제했다. 의지가 아닌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콰악!

마법사는 두 눈이 칼에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엄습했다.

“아악!”

마법사는 비명을 질렀다. 부유 마법을 쓸 겨를도 없이 땅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법사들은 놀라면서 마법으로 그를 안전하게 착지시켰다.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

“으윽! 갑자기 눈을 찔렸어!”

마법사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리안 마법은 물리적인 마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설령 안개가 있는 곳에서 마법을 감지했다고 해도 술사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이 차원을 벗어난 다른 힘이 작용해서 마법사의 눈을 찌른 거였다.

“으으……!”

마법사는 여전히 말하기 힘든 통증을 겪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마법으로 보았던 사실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안개의 내부에는 생명체가……. 놈들은 마족으로 보입니다. 그 수가 족히 천은 가볍게 넘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론. 혹시 스라크로부터 무언가 들은 건 있나?”

“그가 말하길, 베르다트의 부활이 다음 단계로 진행될 때까지는 3일 정도가 남았다고 하더군요.”

“3일이라.”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공작 역시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아론도 알 수 있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저희들만으로는 베르다트를 제지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녀석을 막을 방법은 사실상 사라지는 거죠.”

아론의 말을 들은 공작은 잠시 생각했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안 좋긴 하군. 지금의 베르다트도 충분히 강하고, 녀석이 품고 있는 마족들도 성가신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순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죽기 마련이다.”

공작의 말에 아론도 동의했다.

차라리 승산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천리안을 사용했던 마법사는 곧장 치료소로 옮겨졌다.

아직 싸우기도 전에 한 명의 전력이 손실되었지만, 원정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 목걸이를 확인해라.”

공작의 그 말에 마법사들은 착용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것들은 드워프가 만들어 준 목걸이였다. 급하게 만들었기에 조잡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걸이가 지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목걸이에는 마법을 저장해 놓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이대로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내부의 독기를 버티지 못하고 생기를 빨릴 수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선 방호 결계가 필수였다.

하지만 마법사들 중에서 결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특히 저 안개가 뿜어내는 독기를 막기 위해서는 상위의 방호 결계가 필요했다.

아론은 드워프가 만든 목걸이에 헤르터스 가문의 방호 마법을 저장해 두었다. 이 마법이라면 안개 속에서도 생기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준비가 끝난 원정대는 안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어.’

아론은 긴장되었다.

베르다트가 만들어 낸 안개 속은 미지의 세계였다.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론은 여기 오기까지 최선을 다했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남은 건 직접 부딪혀보는 것뿐이었다.

휘오오-!

검은 안개 앞에 서자 형용할 수 없는 꺼림칙한 기운이 피부로 느껴졌다.

“들어간다.”

공작의 말에 마법사와 드워프들은 모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로 들어오자 시야가 어두워졌다. 마법사들은 불빛을 띄워서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크윽!”

“독기가 엄청납니다!”

마법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드워프들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론의 방호 마법이 저장된 목걸이가 없었더라면 이 안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악취는……!”

안개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참기 힘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 원인은 몬스터였다.

안개에 닿아서 생기를 빨린 몬스터들이 안개 속에서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오는 길에 휘말린 모양입니다.”

원정대는 몬스터 사체를 뒤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마족입니다!”

잠시 후, 원정대의 시야에 마족이 들어왔다. 그 수가 까마득할 정도였다.

“정찰했던 내용이 사실이었군.”

“예. 천 마리…… 아니. 숨어있는 녀석들까지 생각하면 수천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정대의 긴장감은 한층 더 올라갔다.

“마계의 문 너머에 있는 마계를 볼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군.”

“동감입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걸 막아내지 못한다면 대륙은 끝장이 난다는 것을 말이다.

아론 역시 빠르게 마족을 훑어보았다.

‘다행이다. 아직 고위급 마족은 보이지 않아.’

많은 수의 마족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나은 점이었다.

‘아직 베르다트가 힘을 온전하게 회복하지는 못했다는 증거겠군.’

차원을 넘어서 고위급 마족을 소환하려면 어마어마한 제물은 물론 소환하는 술자의 힘도 상당해야 했다.

‘그렇다면 녀석들을 소환할 힘을 갖추기 전에 끝내야 한다.’

아론은 속으로 결의를 굳혔다.

[아까 나를 훔쳐보았던 녀석의 무리인가?]

그때였다.

기분 나쁜 음성이 원정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는…….”

“녀석인 것 같습니다.”

“베르다트!”

[귀한 제물들이 제 발로 찾아와 주셨군.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녀석의 음침한 웃음소리.

원정대의 긴장은 최고조가 되었다.

[특히 아론과 카이만. 너희는 귀중한 그릇이지. 내 부하들이 너희를 제압하지 못해서 아쉬운 상황이었다.]

베르다트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상기된 음성으로 떠들어 댔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왔으니 너희들에게 제안하지. 그 둘을 이쪽에 넘겨주면 너희의 목숨은 보존해서 마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크하하!]

녀석의 웃음에 마법사들은 순간 몸이 경직했다.

베르다트는 부활의 초기 단계라고는 하지만 필멸의 존재들 중에서 신에 가장 근접한 자였다. 그렇기에 음성에 힘을 싣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 위압에 버틴 건 공작과 아론뿐이었다.

“굳이 그렇게 제안하는 걸 보니 후달리나 봐? 그냥 힘으로 우리를 쓸어버리면 될 텐데 말이야.”

아론은 더 나아가서 베르다트에게 비아냥거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너는 곱게 죽이지 않겠다.]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베르다트의 대답에 아론이 이죽거렸다. 더 이상 녀석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마족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사 한 명이 외쳤다.

마족의 목표는 당연히 원정대였다. 놈들은 무서운 속도로 이쪽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었다.

그때, 공작이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원정대의 지휘는 아론에게 넘어왔다.

“모두 전투 준비!”

아론이 우렁차게 외쳤다.

전장에 마법사들만 있었더라면 공작이 지휘를 맡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번 원정대에는 드워프들도 다수가 있었다. 그들에게도 지시를 내리려면 아론이 지휘하는 게 맞았다. 드워프에게 아론은 나라를 지켜준 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마법사들은 대지 마법을 사용했다. 땅이 갈라지면서 날카로운 돌조각들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동시에 드워프가 땅의 정령의 힘을 빌려서 돌조각에 힘을 불어넣었다.

후웅-!

이어서 강력한 바람이 돌조각을 전방으로 날렸다. 목표는 이쪽을 향해 돌격하는 마족들이었다.

파바바박!

날아간 돌조각들이 마족의 몸에 박혔다.

마족은 보통의 몬스터보다 강했다. 하지만 날카롭게 벼린 돌조각에 정령의 강화가 더해지자 마족의 두꺼운 살갗도 거뜬히 뚫어냈다.

급소를 가격당한 마족 몇 마리가 풀썩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나머지 마족들은 돌조각이 박힌 채로 계속해서 돌진했다.

그러나 원정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정도 공격으로 녀석들을 저지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론과 공작이 동시에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공작의 주위로 어마어마한 마나 반응이, 아론의 주위에선 신력이 넘실거렸다.

이 둘의 힘은 원정대 나머지가 마법을 사용했을 때보다 더욱 컸다.

콰콰쾅!

그러자 돌진하던 마족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폭발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그 단단한 신체를 자랑하는 마족들의 몸이 갈래갈래 터져나갔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녀석들의 몸에 박힌 돌조각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놈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지만, 돌조각이 내부에서 터지니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마법사들이 땅을 깨트려서 돌조각을 만들 때, 아론과 공작은 거기다가 원격으로 마법을 심어두었다. 무려 8서클의 위력을 지닌 폭발 마법이었다.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돌조각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고작 두 명이서 그 많은 돌조각에 폭발 마법을 심었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론과 공작은 평범한 마법사를 아득히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다.

“대…… 대단하군.”

드워프들은 흩날리는 마족의 몸뚱아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린데란트 산맥의 몬스터들과 자주 전투를 치렀던 드워프들도 감탄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이러한 협공으로 마족들 중에서 힘이 약한 녀석들은 대부분이 명을 달리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녀석들은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족들은 잔챙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족의 절반 정도는 방금 일어난 폭발도 버텨낼 정도의 맷집을 지닌 녀석들이었다.

아론을 비롯한 원정대원들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마족은 한 마리만 풀려도 대륙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에드먼스 가문에서 가장 유망한 첫째가 마계의 문을 지키고 있었던 거였다.

그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었다. 고작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쉽게 물러날 놈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절반은 줄였다.’

아론은 마족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마족은 방해물이었다.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존재는 베르다트였다. 계속 마족에게 사로잡혀 있다가는 베르다트가 다음 부활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베르다트가 다음 단계로 가면 이기기 힘들었다. 그 전에 녀석과 마주해서 싸워야 했다.

“다음 공격!”

아론이 외치자 마법사들은 마나를 한껏 끌어 올렸다.

우우웅-!

오색찬란한 기운이 마법사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마법 속성이 겹치지 않도록 아론이 미리 그들에게 말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쏴아아!

불꽃, 얼음, 번개, 바위 등등.

갖가지 속성 마법들이 마족을 향해 쏟아졌다.

드워프들은 자신들이 계약한 정령들로 마법을 보조해 주었다.

하지만 원정대원들은 공격을 충실히 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건 마족들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처음에 공격했던 폭발 마법의 연계처럼 확실한 근거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걱정은 평범한 원정대원들이 하는 것이었다. 공작과 쿠르트는 아론이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기대를 하고 있었다.

아론은 자신이 착용한 펜던트를 꽉 쥐었다. 그러자 펜던트에 박혀 있는 모든 미티움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쿠우웅!

동시에 아론의 체내에서 신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영창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아론이었다. 하지만 이번 마법은 시간이 꽤 길게 걸렸다.

‘됐다.’

아론이 마법을 발동하자 마족들에게 쏟아져 내리던 갖가지 마법들이 한 곳으로 뭉쳐 융합되기 시작했다.

마법들은 힘을 담고 있었으므로 충돌하자 거대한 충격이 일었고, 그것은 폭발로 이어졌다.

콰아앙!

폭발의 위력은 상당했다.

검은 안개 속 전체를 잠깐 동안 새하얀 공간으로 만들 정도였다.

* * *

아론이 사용한 것은 융합 마법.

이전에 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융합 마법에 대해 배웠긴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자신의 마법에만 국한된 거였다.

상극의 마법을 융합시키는 건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결국 자기 스스로가 발현한 마법을 합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아론이 벌인 일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타인이 쓴 마법도 같이 융합한다는 건 개념의 확장이 필요했다.

게다가 지금은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드워프들이 계약한 정령이 갖가지 속성 마법에 힘을 보탠 상황이었다. 정령의 힘까지 고려하면 융합 난이도는 훨씬 높았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에서 아론이 마법을 융합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사용하는 힘이 신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힘의 기원인 신력의 특성 덕분에 서로 다른 힘을 좀 더 쉽게 합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요정족에게 이와 같은 일을 해보라고 하면 몸서리칠 것이다. 그들에게도 힘든 일을 아론은 해낸 셈이었다.

‘원래라면 나도 불가능했지.’

아론에게도 도박이었다.

아무리 신력을 다룰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 있는 모두의 마법을 융합하는 건 힘들다고 여겼다.

그래도 아론은 혼자가 아니었다. 쿠브의 힘을 믿고 있었다.

쿠브는 신의 화신인 정령. 덕분에 정령의 힘이 가미된 마법들을 신력으로 묶는 데 도움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만들어낸 게 이러한 대폭발이었다. 각기 다른 속성의 힘을 억지로 융합 시켜 버리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기적이군.”

“마법을 한 번에 합치다니…….”

마법사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중얼거렸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론의 능력 덕분에 남은 마족의 7할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전투 불능에 빠져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론도 성한 건 아니었다.

‘잠깐 휴식이 필요하겠어.’

한 번에 큰 규모의 마법을 사용한 여파였다.

공작과 쿠르트도 아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눈치 빠르게 각자 마법사와 드워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남은 마족들을 처리한다!”

아론의 분전 덕분에 남은 마족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두 번이나 강력한 공격을 맞고 버틴 녀석들은 강했다. 그래도 놈들에게 피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원정대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정예들이었다. 이들의 화력으론 잔존한 마족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도 힘을 쓸 수 있겠군.”

드워프 수호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쥔 채 달려 나갔다. 그들은 여태까지 계약한 정령으로 마법사들의 지원만 했던지라 몸이 근질근질해 있었다.

아론은 원정대가 마족들을 상대하는 동안 충분히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있겠어.’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회복되었을 땐 원정대가 이미 마족들을 대부분 정리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베르다트 뿐인가.’

아론은 빠르게 마족을 처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베르다트가 부활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싸우는 것이 좋았다.

그는 원정대와 합류해서 베르다트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중심부로 나아갔다.

“독기가 점점 강해집니다!”

“아무래도 베르다트와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원정대원들은 점점 피부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아…… 펜던트가!”

독기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방호 마법이 담긴 펜던트가 버티지 못 하는 일이 일어났다.

“제가 다시 마법을…….”

아론이 다가가려 하자 마법사가 손사래 쳤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여기서 버텨보겠습니다. 시간을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마법사의 대답에 아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원정대가 언제 베르다트와 조우할지 모른다. 싸움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펜던트를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없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아론.”

공작이 그를 불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아론은 어쩔 수 없이 낙오된 이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원정대는 중심부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건…….”

마법사들이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한 줄기의 빛이 위로 뻗어져 있었다. 그것은 빛으로 된 기둥같이 보였다.

“베르다트는 저 안에 있는 것 같군.”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론도 확실히 녀석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부활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어.’

원정대는 긴장을 유지한 채 빛의 기둥을 향해 나아갔다.

[여기까지 왔는가.]

그때였다. 베르다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찮은 것들. 마족들 몇 마리 죽였다고 의기양양해져 있구나.]

녀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족들은 고작해야 여흥 수준이었다. 네놈들이 발버둥 치길래 놀아준 것 뿐이지.]

베르다트의 말이 끝나자 빛의 기둥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빛이 양옆으로 퍼져나갔다.

그 광경을 본 공작은 표정이 굳어졌다.

“저건…… 마계의 문을 열려는 것이다.”

“예?”

아론은 공작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기둥의 일부에서 빛이 갈라지더니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이윽고 내부가 보였다.

“아니!”

“녀석들이 또 있다고?”

원정대원들은 탄식했다.

새로 생긴 공간에서 마족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입구 너머로 보이는 마족의 수는 빽빽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죽였던 마족의 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보였다.

“저 뿔 달린 놈은 고위 마족이 아닙니까?”

“허어…….”

방금 전 마족들과 전투를 치렀을 때는 다행히도 고위 마족이 없었다. 그래서 수월하게 처리한 점도 있었다.

‘저 녀석들이 여기서 나온다면 승산이 낮다.’

아론은 차라리 저게 원정대의 사기를 꺾기 위한 환영이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마족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저 녀석들이 실체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원정대의 얼굴에는 절망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아론은 달랐다. 그는 마족이 이곳에 나타난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마계의 문이 열린다고 공작이 말했을 때, 이상하다고 느꼈었지.’

그야 마계의 문은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대륙의 끝자락에서 차원의 경계에 걸쳐 있는 물체였다.

‘하지만 실제로 여기서 문이 열렸고 마족들이 튀어나왔다.’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다트는 차원 마법을 이용한 거였다.

‘잘만하면 디멘션 마법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원정대원들은 좌절하고 있었지만 아론은 오히려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한편, 공작 역시 아론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아론. 무언가 방법이 있느냐?”

“예. 하지만 설명하기엔 상황이 급박하군요. 또, 제게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 내가 벌어다 주겠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론은 마족이 나오고 있는 공간 주위의 빛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희미하게나마 정보가 각인되어 있었다.

공작은 아론의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서 마족 몇 마리가 공작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공작은 가볍게 마법으로 마족의 머리를 터트렸다.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방법이 있다.”

방법이 있다.

공작의 그 말에 원정대원들은 다시 사기를 회복했다. 그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마족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우우웅-!

공작은 폭발적으로 마나를 방출했다. 그는 뿜어져 나온 마나를 곧바로 마법으로 변환해 마족들에게 퍼부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마나 컨트롤이었다. 규격 외의 마나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도 주위의 아군은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아론도 공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작이 전력을 내는 건 처음 보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위력이 큰 만큼 공작 역시 무리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공작은 쉼 없이 서클을 돌려가며 마나를 방출해 마법을 구현했다.

‘아론이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버텨야 한다.’

공작은 유일한 희망을 믿으며 물밀듯 밀려오는 마족들을 막아내었다.

***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원정대는 목숨 바쳐 마족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아론은 오로지 마족이 나오고 있는 마계의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아론이 무방비했으므로, 그의 곁에는 쿠르트가 굳건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아론의 머리는 쉴 새 없이 팽팽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마계의 문이 생겨나게 된 술식을 되짚어서 역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이 역산을 완료하고 나면 여태까지 지지부진했던 디멘션 마법에 대한 해법이 나타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이 과정이 끝나면, 성공적으로 디멘션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속도가 문제였다.

마족들은 강했고, 특히 고위 마족의 무력은 차원이 달랐다.

“크악!”

원정대원들은 철인이 아니었다. 마족의 공세에 하나둘 죽어가고 있었다.

아론은 그들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자신이 동요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빨리 마계의 문의 역산을 끝내는 게 좋았다. 그래야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됐다!’

아론은 드디어 마계의 문에 대한 역산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있었다.

술식은 알게 되었지만 차원끼리 통로를 잇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이해가 부족했다.

아론은 자신이 이해한 통로의 개념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다. 만약 통로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면 마법은 실패로 돌아간다.

‘조금만 더 계산해 보자.’

아론은 부디 원정대가 조금 더 마족들을 버텨주길 바랐다.

하지만 원정대원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고, 공작의 힘도 약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계산을 마쳤는데 다 죽어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아론은 이만 계산을 마치고 디멘션 마법을 펼쳐보려고 했다.

‘……잠깐만.’

그때. 아론은 자신이 입고 있던 망토가 눈에 들어왔다.

드워프의 전신 그렘달이 사용했던 무구. 아공간이 저장되어 있는 아티팩트였다.

아론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듯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에 아공간이 내장되어 있잖아. 그렇다면 이걸 통로로 쓴다면 어떻게 될까?’

아공간에 대한 검증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것만큼 안전한 통로가 있을까 싶었다.

아론은 망설임 없이 디멘션 마법의 술식을 구성했다.

그리고 그 구성을 완료한 뒤, 망토를 벗어서 양손으로 펼쳤다.

‘이게 안정적인 통로가 되어줄 거다.’

아론은 디멘션 마법을 사용했다.

‘좌표는…… 솔티어크!’

그가 이어버린 차원은 바로 요정족이 사는 곳, 솔티어크였다.

* * *

아론이 디멘션 마법을 배울 때 생각해 낸 활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궁리해도 인간과 드워프만으로는 베르다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요정족도 이번 원정에 참여시키자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요정들은 자신들을 다른 차원에 숨게 만든 베르다트에 대한 깊은 원한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만약 베르다트와 싸울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극적으로 맞붙어 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디멘션 마법은 차원과 연관된 마법. 따라서 이걸 배울 수 있다면 다른 차원에 있는 요정들을 불러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론이 떠올린 건 어디까지나 아이디어였다. 그걸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아론은 이제 막 디멘션 마법을 배우고 있는 초심자였다. 이 마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수록 자신이 떠올린 발상을 실행하기에는 힘들다고 여겨졌었다.

그래서 아론은 이 방법을 보류해 놓고 베르다트의 안개 속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런데 마침 베르다트가 마계의 문을 이곳에서 여는 걸 아론이 보고 말았다.

그 순간, 아론은 자신도 요정들을 불러올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마계도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아론은 마계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운을 역산해서 술식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차원을 잇는 건 어려웠다. 차원과 차원 사이를 연결할 통로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아론의 뇌리에 번득 떠오른 것이 자신이 입고 있던 망토였다. 망토에는 아공간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통로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론의 생각이 정답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솔티어크로 통하는 차원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요정의 기운……!]

베르다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녀석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인 듯했다.

그때, 빛의 기둥이 울렁거렸다.

베르다트는 아론을 저지하기 위해서 힘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부활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무리하게 힘을 사용하면 자칫 부활에 지장이 갈 수도 있었다.

화악!

베르다트는 결국 공격을 감행했다. 빛의 기둥에서 강력한 힘이 담긴 파동이 쏘아졌다. 녀석이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요정의 개입은 위협적이었다.

“막아야 한다!”

공작이 큰소리로 외쳤다.

원정대는 저 공격이 아론을 향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법사들은 공격을 잠시 멈추고 일제히 방어막을 펼쳤다.

콰앙!

파동과 방어막이 충돌하면서 굉음을 만들어냈다.

쩌적!

하지만 베르다트가 쏘아낸 힘이 한 수 위였다. 이내 방어막이 깨졌고, 파동은 무서운 기세로 아론을 향해 날아갔다.

‘할 수 없다. 내가 몸으로 막는 수밖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론을 지키던 쿠르트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아론의 앞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온몸으로 날아오는 파동과 맞설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이 이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지금 베르다트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론의 구상이 실현되는 것뿐이었다.

‘이 한 몸. 설령 죽더라도 아깝지 않다.’

쿠르트에게 있어 아론은 자신의 아들과 페리움을 지켜준 은인이었다. 그 은혜를 갚기엔 자신의 몸으로도 부족하다고 항상 생각해 왔었다.

콰쾅!

쿠르트가 방출한 투기와 베르다트의 파동이 격돌했다.

하지만, 두 힘이 부딪힌 순간 쿠르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힘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증거로 쿠르트가 쏘아낸 투기가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끝인가.’

쿠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파앗!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알 수 없는 힘의 개입으로 파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아론이 완성한 것인가!’

쿠르트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요정!’

거기에는 요정들이 있었다.

베르다트의 파동을 흩뜨린 건 다름 아닌 요정족 최고의 검사라 불리는 에르파였다.

그 뒤로 아론을 가르쳤던 핀레르를 비롯해 다른 요정족들이 서 있었다.

“대단해요. 차원과 차원을 잇는 데 성공하셨군요.”

요정족 로드는 아론을 보며 감탄했다. 아론이 뛰어난 인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차원 마법도 통달해 버린 건 예상외였다.

“스라크 님도 계셨군요. 오랜만이에요.”

로드는 아론의 근처에 있던 스라크를 보고 인사했다.

“이분이 어떻게 차원을 열었는지 궁금했었는데, 스라크 님이 도우신 모양이네요.”

로드의 그 말에 스라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건 거의 없다. 아론이 물어보는 것만 몇 가지 답해줬을 뿐이지. 그리고 차원을 열어버린 건 오롯이 이 녀석의 발상이다.”

스라크의 그 말에 로드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스라크가 거짓말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더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태평하게 그러고 있을 순 없지요.”

로드는 그렇게 말한 뒤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저게 베르다트죠? 우리들을 다른 차원에 숨게 만든 장본인. 녀석을 없애서 우리의 실수를 되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드의 그 말에 나머지 요정들이 동의했다.

“저게 요정들……?”

마법사와 드워프들은 차원을 타고 넘어온 그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은 대륙에서 사라졌지만, 먼 옛날 중간계 역사에서 가장 강한 종족이 바로 요정들이었다.

그들이 내뿜는 신력은 강하기 그지없었고, 원정대는 요정의 힘에 압도되었다.

그건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요정의 적의는 오로지 마족과 베르다트에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족들은 그들의 기운에 짓눌려서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요정들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들은 마치 인간 기사가 고블린을 잡는 것처럼 마족을 가볍게 쓰러트렸다.

“우…… 우리도 가세한다!”

원정대 역시 요정들의 지원에 사기가 살아났다.

그렇게 마족을 모두 정리하기까지 시간은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다.

요정도 합류한 원정대는 이제 빛의 기둥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들.]

베르다트의 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비굴하게 신을 모시면서 사는 거냐? 그 힘이 아깝지도 않나?]

“그게 우리에게 할 소리인가?”

베르다트의 말을 들은 에르파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네 모습을 보아라. 그래서 넌 결국 어떻게 됐지?”

[…….]

“추하기 그지없구나. 목숨에 미련을 버리지도 못해서 인간들 속에 숨어들어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부활을 꿈꾸려고 하다니.”

에르파는 당장이라도 녀석에게 달려들 듯한 기세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덕분에 우리 요정족은 얼마나 큰 벌을 받게 되었는지 아나? 차원을 떠돌아다니면서 숨어 지내는 우리의 슬픔을 아는가?”

[……건방지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할 말이 없나 보군.”

[내가 신이 되고 나면, 너희들의 그 썩어 빠진 것들을 모두 고쳐 주겠다.]

베르다트의 말이 끝나자 잠잠했던 마계의 문이 일렁거렸다. 그러자 거기서 고위 마족들이 튀어나와 빛의 기둥으로 가는 길을 막아섰다.

“아직도 안에 마족이 남아 있었나?”

“진절머리가 나는군요.”

원정대는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 수의 고위 마족들이라면 대륙을 박살 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로드는 원정대에게 그렇게 말한 뒤에 요정들을 이끌고 마족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들이 내뿜는 기운에 감히 끼어들어서 싸우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아론. 보이나?”

공작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특출나게 힘이 센 마족들이 있었다.

“예. 저들은 유난히 강하군요.”

“평범한 고위 마족이 아니다. 마왕이라 불리는 녀석들이지.”

4마리의 마족은 나머지 고위 마족들보다 강했다. 그들의 힘은 요정족 중에서 강하다는 에르파와 견주어도 비길 것 같았다.

‘희한하네. 저렇게 강한 녀석들이 굳이 베르다트의 말을 따라서 오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아론은 아마 베르다트와 마족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녀석에게 좋은 건 아닐 텐데.’

베르다트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니까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다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과연 마왕을 비롯한 고위 마족들이 순순히 마계로 돌아가 줄지 의문이었다.

‘상관없긴 하지. 어차피 우리가 다 쓸어버릴 거니까.’

고위 마족과 마왕을 죽이고 베르다트를 없애버리면 그만이었다.

“마왕을 한 마리씩 맡아야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두 마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미 에르파와 로드가 마왕을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럼 제가 저 창을 들고 있는 마왕을 맡겠습니다.”

“알겠다. 무운을 빌지.”

아론과 공작은 흩어져서 각자 맡은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마왕도 접근을 알아차리고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요정도 아니고 인간? 넌 뭐냐?”

마왕은 콧방귀를 끼며 아론에게 말했다.

“감히 네가 끼어들 곳이라고 생각하나? 이래서 인간은 싫다니까.”

“거, 시끄럽네. 입 터는 걸로 마왕 선출하냐? 나랑 싸우는 게 자신이 없나 봐?”

쩌적!

그러자 마왕의 발아래에 있던 땅이 갈라졌다. 아무래도 화를 돋운 모양이었다.

콰앙!

마왕은 바닥이 박살 날 정도로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녀석은 순식간에 아론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후욱!

거리를 좁힌 마왕은 곧장 창을 휘둘렀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커흑!”

그러나, 녀석의 공격은 아론에게 닿지 못했다. 마왕의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어?”

마왕은 당황했다.

녀석에게 공격을 먹인 건 다름 아닌 쿠브였다.

쿠브는 황금빛이 흘러나오는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게 쿠브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마왕은 어찌 반격도 해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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