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자르킨이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쿠우웅!
자르킨의 몸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에너지가 뻗어 나갔다.
“으아악!”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론과 크라우의 것은 아니었다.
자르킨이 뿜어낸 힘을 버티지 못한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쓰러진 것이었다.
아론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만큼 자르킨의 힘이 다시 거대해졌다는 의미였다.
아론은 현재 신력만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자르킨의 에너지를 버틸 만 했다.
‘미티움을 먹은 것뿐인데 다시 힘이 부활했다. 아니, 전보다 강해졌나.’
아론은 방금 자르킨이 방출한 에너지로 못해도 수백 명의 병사가 전투 불능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건 조금 버거운데.’
하지만 강해진 자르킨을 상대로는 이전처럼 싸우는 건지는 길이었다. 아론 역시 주변의 신력을 흡수하며 체내의 신력 농도를 높였다.
쉬익!
자르킨이 아론을 향해 재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걸 본 아론은 즉시 전방에 배리어를 펼쳤다.
콰쾅!
자르킨의 검과 배리어가 격돌하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자르킨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 압도적인 속력 앞에, 아론은 막기에 급급했다.
“크윽……!”
아론은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그저 검을 내리치는 것일 뿐인데도 아론의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슈슈슉!
그때, 크라우가 자르킨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날렸다. 그것을 피한다고 자르킨의 공격 흐름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론의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만약 크라우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르킨의 공격에 배리어가 박살 났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자르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배리어에 모종의 술수를 걸어 뒀었다.
배리어를 공격할 때마다 자르킨에게 몸을 느리게 하는 구속이 누적되도록 마법을 부여했었다.
물론 효율이 좋은 마법은 아니었기에 평소에는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신력만을 사용하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만큼 공격으로도 꽤 많이 누적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이것만 믿고 자르킨을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이 마법은 보조였다.
‘자르킨에게 큰 한 방을 먹여야 한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결과 궁리한 것이 크라우와의 협공이었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신력을 쓴다고 해도 순수하게 화력으로는 크라우를 이길 수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체내의 모든 제한을 푼 상태에선 말이다.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자르킨의 신력을 상대로는 마나의 힘이 약해졌다.
‘하지만, 내가 저 녀석의 힘을 흩뜨려버린 순간을 만들어 낸다면 크라우가 온전하게 공격할 수 있다.’
아론은 이 내용을 크라우에게 전하고 싶었다.
콰쾅!
하지만 자르킨의 공세가 거셌다. 전음을 사용할 틈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 쉬웠지, 녀석이 신력을 사용 못 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끝내 주지.”
자르킨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검을 크게 휘둘렀다.
쨍그랑!
아론의 배리어가 깨졌다. 자르킨의 검이 반동으로 허공에 튀어 올랐다.
“커헉!”
아론은 내장이 진탕함을 느끼면서 피를 토했다. 그는 방금 공격으로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신력이…… 으윽.’
아론은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게 분명했다.
콰드득!
땅에서 줄기들이 솟아올라 아론의 몸을 옭아매었다.
“봐라. 내 말대로 되었지?”
자르킨은 그렇게 말하면서 크라우를 바라봤다.
“그릇은 확보했다. 이젠 방해꾼을 처리해야겠구나.”
저벅저벅.
자르킨은 크라우에게 다가갔다.
‘제길.’
크라우는 여유롭게 걸어오는 자르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몸에 걸린 모든 제약을 풀었는데도 자르킨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기기는커녕 제대로 된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크라우는 자주 마계의 괴물과 맞붙었다. 그런데 녀석들을 상대할 때도 이렇게 격의 차이를 느끼진 않았었다.
어쩌면 자르킨은 마계의 왕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저리 강해질 수 있었던 거냐.’
크라우는 그저 놀라웠다.
그리고 녀석이 집착하는 그릇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해 가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릇이 필요한 건지…….
‘아론은 더 이상 전투를 하기 힘든 상태다. 나 혼자서라도 어떻게 해야 해.’
크라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론이 없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비록, 자신이 분투해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녀석에게 피해를 입힌 뒤에 죽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지원 온 마법사들이 상대하기 편할 터였다.
“그 꼴로 싸울 생각인가? 용기가 참 가상하군. 죽이기 아까울 정도다.”
자르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릇이 두 개나 필요하지는 않거든.”
스슥!
자르킨은 순식간에 크라우의 지근거리에 도달했다. 크라우가 채 손을 쓰기도 전에 강력한 신력의 폭풍이 그를 향해 덮쳐왔다.
타앗- 푸욱!
허공에 뜬 크라우를 향해 자르킨이 검을 찔러 넣었다.
크라우는 손으로 칼날을 잡아서라도 그것을 빼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쑤욱!
자르킨이 검을 빼내자 크라우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용기만큼의 힘이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힘없이 쓰러진 크라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크라우에겐 볼 일이 없었다. 자르킨은 녀석의 목을 친 뒤에 다시 아론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목을 베기 위해 검을 든 순간.
화아악-!
자르킨의 뒤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는 검을 휘두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진상을 확인했다.
‘……뭐지?’
어느샌가 아론을 옭아맸던 줄기들이 사라져 있었다. 아론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자르킨은 아론을 응시했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건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자르킨은 긴장을 유지한 채 아론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파앙!
그때, 아론의 손가락에서 빛이 쏘아졌다.
자르킨의 눈이 부릅떠졌다. 빛이 담고 있는 에너지가 상당했다. 게다가 캐스팅도 없는 마법이라니.
자르킨은 황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빛이 그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갑옷이 부서지고 살갗이 뜯겨나갔다.
“……!”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불꽃으로 된 비가 쏟아지고, 무수한 얼음 화살이 쏘아졌으며, 강철과도 같은 모래 칼날이 자르킨에게 휘몰아쳤다.
그 모든 마법은 일말의 캐스팅도 없이 발현되고 있었다.
자르킨은 어이가 없었다. 그에게는 공격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배리어를 펼쳐서 막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방패도 계속 두들기다 보면 깨지기 마련이었다. 마법이 자르킨의 배리어를 뚫고 들어가 그에게 상처를 내었다.
쨍그랑!
결국 배리어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자르킨은 그 반동으로 크게 뒤로 날아갔다.
어느새 형세가 역전되었다.
아론은 자르킨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고작 녀석의 하수인 주제에 꽤 잘 버텼구나.”
“뭐, 뭣……?”
“아마 신들의 잔해를 억지로 몸에 집어넣었기 때문이겠지.”
자르킨은 깜짝 놀랐다.
미티움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는 사람들도 고작 희귀 광물 정도로 인지하고 있었다.
미티움이 신들의 잔해라는 사실을 아는 건 인간들 중에서는 자르킨 뿐이었다.
요정족밖에 모르는 지식인데 어떻게 이 자는 알고 있는가. 게다가 그들은 신들의 분노를 피해 다른 차원에 숨어 있는데 말이다.
스라크는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스라크…….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
아론은 크라우가 자르킨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들리나?]
그 목소리의 정체는 스라크였다.
그는 크라우와 교류하는 요정족의 사념체였다.
‘어…… 또 뵙네요.’
[크라우가 정신을 잃었다. 운이 좋아서 너와 연결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어.]
‘어, 어떻게요?’
[지금 그걸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이젠의 왕이란 녀석은 아무래도 ‘그자’의 하수인인 것 같다.]
아론은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요정들이 말하는 ‘그자’라는 것은 감히 신이 되고자 했던 요정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면 살아 있다는 말입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풀어주마. 내가 너와 연결을 한 것은 도와주기 위해서다.]
‘방법이 있습니까?’
[잠깐만 네 몸을 빌리겠다.]
‘제 몸을요?’
[그래. 지금 네 몸은 마나가 없이 순수하게 신력으로만 차 있는 상태지. 뭐, 양은 별 볼 일 없다만. 요정족의 몸과 비슷해진 거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빙의가 가능하다 이 말씀이시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네가 이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은 빙의할 수 있다. 물론 네 허락이 필요하다.]
아론은 잠깐 고민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게 썩 기분 좋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론은 어떻게 해서든 자르킨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좋습니다.’
아론은 스라크의 빙의를 허락했다.
***
아론의 몸에 완전히 깃든 스라크가 자르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르킨은 잽싸게 일어나서 검을 휘두르려 했다.
푸확!
하지만 아론의 마나가 검을 집으려는 녀석의 오른손을 날려버렸다.
자르킨은 날아간 자신의 손목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실성한 듯 입꼬리를 비틀며 아론을 바라봤다.
“흥. 이미 늦었다. 그분이 곧 부활하실 거다.”
타앗!
그러면서 자르킨은 몸을 날려 왼손을 뻗었다. 남은 손으로 아론의 목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서걱!
하지만 아론의 마법에 나머지 손도 형체를 알 수 없게 으그러졌다.
“크윽!”
푸욱!
아론이 만들어 낸 얼음 창이 자르킨의 가슴을 꿰뚫었다. 자르킨은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쓰러졌다.
“네가 말한 건 나도 알고 있다.”
아론은 부들거리는 자르킨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너희들 뜻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털썩.
아론은 그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 * *
전장의 병사들은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위압감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들도 자르킨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이젠의 병사들은 그들의 왕이 패배했음에 탄식했고, 메도우드의 병사들은 기세를 회복했다.
메도우드는 단숨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아이젠의 병력들을 밀어냈다.
이미 메도우드는 뤼튼 성을 차지한 상태였으므로 남은 아이젠 병사들을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애를 먹었던 이유도 자르킨이라는 규격 외의 존재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동시에 메도우드는 아론과 크라우가 전투를 벌인 곳에 병사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일대에 신력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평범한 마나 사용자들은 신력이 내뿜는 에너지 때문에 발을 내딛기조차 힘들었다.
실력에는 자신 있는 워 메이지들조차도 이곳에선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대부분의 병사들을 물리고 실력 있는 몇 명만을 차출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워 메이지를 비롯해 라엘과 켄트 역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으윽. 갈수록 거친 에너지가 느껴지는군요.”
“대체 이 힘은 뭡니까?”
워 메이지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빨리 아론 님을 찾아보죠.”
“아, 네.”
반면, 라엘과 켄트는 별다른 동요 없이 묵묵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론과 아론과 다니면서 성장한 바탕이 있었다. 그래서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티는 게 가능했다.
“주변에 성한 곳이 없군요.”
어느 마법사 한 명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대로 주위는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벌였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저기……!”
잠시 후. 워 메이지 하나가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저분, 아론 님 아닙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라엘과 켄트가 아론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 기분 나쁜 에너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어떻게 저리 달릴 수 있는 건지.”
워 메이지들은 황급하게 두 사람을 뒤따라갔다.
“다행입니다. 숨은 쉬고 계세요.”
“탈진한 것 같습니다.”
라엘과 켄트는 아론의 상태를 살피고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크라우 공자님도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이젠의 왕 녀석도 안 보입니다.”
워 메이지들은 주변을 탐색하며 말했다. 아론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아론 님은 제가 부축할게요. 여러분들은 크라우 님을 찾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켄트가 아론을 업어 들었다.
워 메이지들은 주변으로 흩어져서 수색을 계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크라우와 자르킨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크윽!”
그러던 중에 워 메이지 한 명이 이곳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일대가 진정된 뒤에 수색을 재개하는 게 어떨까요?”
“맞습니다. 조사단도 정식으로 꾸린 뒤에 오는 게 낫겠습니다”
“예. 그러지요.”
라엘과 켄트는 워 메이지들의 의견에 수긍했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아론을 찾았으니 나머지 인원은 어찌 되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론만을 구한 채 이곳을 벗어났다.
***
아론의 시야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여기는?’
일어난 아론은 주위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아공간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아론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군.”
“……스라크 님?”
“여긴 네 의식 속이다.”
“아. 그래서 주위가 이상하게 보였던 거군요.”
“걱정 마라. 죽은 건 아니니까. 그래도 힘을 많이 썼으니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 정도는 감안했습니다.”
“녀석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베르다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는군.”
아론은 이번 일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스라크에게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베르다트가 요정족들이 말하는 ‘그자’입니까?”
“그렇지. 녀석이 신이 되고 싶어서 힘을 넘보던 녀석이다.”
“이름을 듣는 건 처음입니다.”
“요정족들 사이에선 쉬쉬하는 이름이니까. 녀석은 한때 로드였었거든.”
“요정족의 로드요?”
“그래. 녀석이 로드였던 시절에 나머지 요정들을 설득했었다. 자기만 따라오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 나머지 요정들이야 당연히 거절했다. 요정들은 신의 은총을 받은 종족이니까. 감히 그들에게 도전한다는 게 받아들여질 리 없지.”
대다수 요정들이 베르다트의 그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특히, 스라크가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었다.
“그렇게 일단락됐으면 좋았겠지만, 베르다트는 자기 의견을 접지 않더군. 놈은 몰래 마계와 접촉해 마족들과 함께 신들의 영역을 공격했다.”
“신들의 영역이요?”
“그래. 녀석의 행동력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놈들의 기습은 성공적이었고, 주신의 전당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녀석도 마족도 힘을 많이 썼어. 주신은 자신을 희생해서 베르다트를 봉인했다.”
“그 정도로 강했습니까?”
“로드 자리를 허투루 꿰찬 건 아니지. 녀석의 재능은 요정들 중에서도 최고였으니까.”
아론은 어째서 자르킨이 베르다트의 부활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봉인하면서 생긴 부산물이 바로 미티움이다. 주신의 파편이 중간계에 떨어진 거지.”
“미티움이 그렇게 생긴 거군요.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싶었습니다.”
“주동자인 베르다트가 봉인되었으니 전세는 역전되었다. 신들의 분노는 요정족에게 향했고, 우리들은 다른 차원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어.”
“요정족이 그렇게 된 거에는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군요.”
스라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집요한 놈이다. 패배할 것도 예상해 두고 자신의 조각을 여러 차원에 뿌려뒀지.”
“그럼 스라크 님이 사념체가 되신 이유도…….”
“베르다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려면 어쩔 수 없었지. 하필이면 놈의 부활이 가까워진 곳이 바로 이 차원이다.”
“어느 정도 남았습니까?”
“얼마 안 있으면 나타날 거다. 아이젠의 왕이 일을 아주 크게 벌여줬으니까.”
베르다트의 봉인을 풀고 부활시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했다. 자르킨은 그걸 아이젠 전역에 진을 설치하고 전쟁으로 얻은 피를 통해 해결해 버렸다.
“큰일이군요.”
아론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이번 일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작님이 나서는 것도 필요할지 모르겠네요.”
“뭐, 끌어들이는 건 상관없지만 베르다트를 없애기 위해선 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줘야 한다.”
“제가요?”
“인간들 중에서 신력을 다룰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네가 깨어나기 전까지 여기서 수련을 하자고. 내가 봐줄 테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어. 그리고 크라우가 회복되기 전까진 나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으음.”
아론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내가 대가를 요구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전에 그러셨으니까요.”
“걱정 마라. 이번에는 없으니까. 어차피 베르다트가 사라진다면 마계의 문도 저절로 닫힐 테고, 내 염원도 이루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론은 스라크의 의견을 따라 여기서 수련하기로 했다.
“흐음. 너, 이번 전투로 꽤 성장했구나.”
“저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8서클 수준에 도달했군.”
“그 정도입니까?”
“잠깐이지만 신력만으로 마법을 운용했으니 말이다. 그 수준까지는 올라와 줘야지.”
스라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랑 훈련하면 더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 정말입니까?”
“난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어. 대신, 그만큼 힘들기야 하겠다만.”
“성장할 수 있다면야 감수하지요. 그리고 제가 앞으로 싸울 상대도 신에 필적했던 녀석 아닙니까.”
“네 말도 맞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자.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까.”
스라크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아론과 훈련을 시작했다.
***
아론은 한창 수련을 하던 도중 정신이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깨어난 모양이군.’
익숙한 공작가의 천장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라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엘.”
“네.”
“예전처럼 눈을 떴다고 울거나 하진 않는구나.”
“깨어나실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제는 익숙합니다.”
라엘의 그 말에 아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라엘에겐 많은 마음고생을 시켰으니 말이다.
“내가 얼마 만에 깨어났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 정도야?”
“네.”
아론은 거기서 살짝 놀랐다.
자신이 의식 속에서 훈련을 할 때 체감상 몇 달은 흘렀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지금 전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도련님께서 왕을 쓰러트려 주신 덕분에 전세는 완전히 메도우드 측으로 기울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자르킨이 사라진 아이젠은 그야말로 핵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들은 분전했지만 이전만큼의 응집력은 나오지 않았다.
총지휘관 랜튼은 그 점을 잘 노려서 쾌속으로 아이젠의 병력을 밀어버렸다.
그렇게 아론이 회복하던 동안에 메도우드는 뤼튼 성을 필두로 근처의 영토를 모두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아이젠 전역을 점령하는 것도 가능했다.
전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거에는 아론의 공이 컸다. 아론에 대한 무용담이 병사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퍼지고 있었고, 덕분에 공작가 내에서의 평판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크라우 형님은 어때. 잘 회복 중이신가?”
“그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아론 님이 전투하신 현장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하지만 크라우 님은 물론이고 자르킨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뭐?”
아론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형님이 쓰러지기 전에 자르킨을 제압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아론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녀석이 원래라면 첫째를 그릇으로 쓴다고 했었지. 그 점이 좀 걸리는데.’
아론이 걱정하고 있을 때.
공작가의 시종 하나가 아론의 방을 찾아왔다.
“아론 님. 원로회에서 아론 님의 입회를 요청했습니다.”
“원로회에서?”
아론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입회를 요청했다는 건 원로회의가 열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원로회는 현 가주인 공작이나 공작대행이 열 수 있었다.
지금 공작은 외부에 있었고, 관례상 대행이 존재해도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원로회는 열린 적이 없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아론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바로 가지.”
그는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는 방을 나섰다.
* * *
아론은 회의장에 들어섰다.
이미 도착해 있던 원로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이전과는 다르게 원로들은 아론에게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아론 님. 이쪽으로.”
낯이 익은 공작의 비서가 아론을 어느 자리로 안내했다. 그곳은 원래 공작이 앉아야 할 자리였다.
“제가 여기에 앉으라고요?”
“예.”
비서는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공작님과 대행님이 자리를 비우셨으니까요. 원래라면 제1 계승권자인 크라우 님께서 앉으셔야 하지만, 행방불명이 된 지라.”
설명을 들은 아론은 수긍했다.
원로들도 그에 반발하지 않았다.
이미 아론은 이번 전쟁에서 실력을 입증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론을 본 순간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9서클의 경지에 오르셨잖아!’
‘이번 전쟁을 통해 성장하셨나?’
‘참으로 신묘하도다.’
원로들은 감탄했다.
고위 서클은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깨달음을 얻어야 서클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9서클에 도달한 아론은 그걸 해냈다는 뜻이었다.
아론의 서클을 알아본 원로들은 술렁거렸다. 분명 출정하기 전에만 해도 단전의 고리는 6개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이번 성장의 전말을 아는 건 아론뿐이었다.
‘진짜 토 나오는 과정이었지.’
아론은 의식 속에서 스라크와 했던 훈련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살다 살다 그런 악덕 교관은 처음 봤다.
‘뭐, 성장은 했으니 할 말 없다만.’
힘들긴 했어도 스라크에겐 감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9서클에 오를 수 있었다.
아론은 원래 공작이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았다.
원로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뭘 하는 건가 싶었지만 진행은 자신이 할 필요가 없다고 했기에 가만히 듣기로 했다.
“회의를 시작하지요.”
입을 연 사람은 전쟁에서 총지휘관을 맡고 있는 랜튼 에드먼스였다.
그는 이번 전쟁에 대한 개괄을 이곳에 참석한 원로들에게 소개했다.
아론이 들어 보니, 현재 전세는 메도우드가 완전히 잡고 있었다. 자르킨을 잃은 아이젠의 사기는 지하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원로회의가 열린 이유는 단순히 전황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랜튼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을 집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게 뭡니까?”
“항복문서입니다.”
“허……?”
랜튼의 말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도 안 된다.”
“아이젠에서 항복문서가?”
“이미 진위 판별은 마쳤습니다. 아이젠 측의 항복문서가 맞습니다.”
랜튼의 그 말에도 장내는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르킨이 죽었다고 해도 아이젠의 국민성은 호전적이었다. 그들이라면 마지막까지 결사 항전을 펼칠 거라고 예상했었다.
“잠깐만요. 누가 그걸 보낸 겁니까? 항복 결정을 하려면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도대체 누가 그랬습니까?”
“킬리안입니다.”
아론의 질문에 랜튼이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킬리안이라고?”
아이젠의 제일검인 킬리안.
그 이름이 나오자 회의장의 어수선함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그 말은 즉, 이 상황에서 킬리안이 옥좌를 차지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강한 자는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다. 아이젠의 그러한 관습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젠은 최근에 들어서야 혈족을 중심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힘의 논리에 의해 왕이 정해졌다.
‘킬리안이 왕이 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
아론은 납득했다.
아이젠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현왕 자르킨이 죽었다. 그렇다면 아이젠의 제일검이 옥좌를 차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대신 항복문서를 보내면서 요구 사항을 전해왔습니다. 아이젠과 메도우드의 중간 지역에서 공작님과 대화하기를 원한다는군요.”
“그건 힘들지 않습니까? 지금 공작님은 외부에 계십니다.”
“하지만 킬리안은 급박하다면서 당장 공작님을 만나야겠다고 합니다.”
“허어…….”
일이 참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젠의 왕이 바뀌고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 그리고 공작을 만나길 바란다니.
원로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 역시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공작 카이안은 출타 중.
그리고 제1 계승권자인 크라우는 실종.
그렇다면 현재 공작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아론이었다.
“그럼 아론 도련님을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원래라면 감히 꺼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아론은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제법 얻을 수 있었다. 그건 원로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실력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론은 9서클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거 괜찮군요.”
랜튼이 입을 열었다.
현재 원로원 세력들 중에서 입김이 강한 그가 아론을 지지한다면 사실상 결정된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습니까?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상대는 킬리안입니다. 혹여 아론 님께 위해를 가한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킬리안이 구속구를 차고 나오겠다고 했으니까요.”
“위험…… 예, 예?”
킬리안의 위험성을 논하던 원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스스로 구속구를 차고 나오겠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킬리안은 에드먼스 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거군.’
아론은 그렇게 파악했다.
결국, 아론이 중간 지역에서 킬리안을 만나는 것이 결정되었다. 단, 아론만 보내는 것이 아닌 랜튼과 원로 한 명이 같이 가는 것이 추가 조건이었다.
***
현재 지도상 아이젠과 메도우드의 중간 지역은 오루스라는 중소 도시였다.
아론 측과 킬리안은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정말 구속구를 차고 나올 줄이야.’
킬리안은 약속대로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였다. 물론 이걸 썼다고 해서 힘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구속구를 여러 개 찼다면 아론과 원로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공작님이 출타하셔서 공작님의 대리로 오게 된 아론 에드먼스입니다. 제 의견은 공작가와 원로들을 대표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킬리안은 아론을 보고 의아해했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그렇게 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불과 그 짧은 시간에 어마어마하게 성장해 있었다.
‘자르킨을 쓰러트린 녀석이니 당연한가.’
이내 킬리안은 수긍했다.
그조차도 자르킨은 상대하지 못했었다.
“항복문서의 내용에도 적혀 있다시피, 아이젠은 메도우드에 항복할 겁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전쟁을 진행해서 피를 흘려 봤자 트레벨 녀석들을 도울 뿐이지요.”
아론은 트레벨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 귀를 쫑긋했다. 킬리안 역시 트레벨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젠에서도 결사 항전을 바라는 세력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제가 왕의 자리를 차지해 항복을 하기로 한 겁니다.”
아론은 따라온 랜튼과 원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트레벨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았다.
“자르킨과 트레벨의 계획은 막은 겁니까?”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녀석들은 본거지에서 부활 의식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하긴, 조금만 불씨가 있어도 계속할 녀석들이죠.”
“그리고 녀석들은 크라우 에드먼스를 그릇으로 확보한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자르킨이 쓰러지고 나서 그 일대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트레벨 녀석들이었습니다. 원래 아론 님을 데려가려고 한 모양입니다만, 크라우 에드먼스가 마지막 힘을 써서 그걸 막은 모양입니다.”
그 내용을 들은 아론은 물론이고 랜튼과 원로도 당황했다.
“그게 무슨……!”
“그래서 크라우 님을 찾을 수 없었던 건가!”
아론은 킬리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실입니까?”
“예.”
하긴, 여기서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 없었다.
“트레벨 녀석들의 위치와 관련된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조건의 대가로 우리 쪽에서 원하는 항복 조건이 있습니다.”
아론은 말없이 그가 말하는 조건들을 들었다.
내용은 합리적이었다.
이미 메도우드가 점령한 영토는 메도우드의 것으로 하고, 이외의 아이젠 땅은 메도우드의 관할 아래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전쟁 배상금 역시 크게 내어주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메도우드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게 받아들여진다면 아이젠은 그저 이름만 남게 되는 수준이었다.
내용을 모두 들은 아론은 잠깐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제가 공작님의 대리이긴 하지만, 이러한 사항은 결국 공작님이 결정하셔야 하는 거라서 이 자리에선 확답을 드리기 어렵겠습니다.”
“그러면 트레벨에 대한 정보의 일부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저희가 내민 조건이 받아들여진 다음에 지체 없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리고, 정보를 가지고 에드먼스 가문에서 무얼 하든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이 정보를 조건으로 내어드리는 이유도 저희들은 여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벨은 결국 아론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놈들은 언젠가 자신의 목을 졸라버릴 존재였다.
‘아이젠은 이제 퇴장이다. 하지만 베르다트가 부활하면 다시 대륙은 혼란스러워질 거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크라우는 자신을 지키려다가 대신 잡혀갔다. 의리가 있다면 그를 못 본 채 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어떤 이유에서 자리를 비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랜튼에게 들어본 결과 조만간 복귀한다는 내용뿐이었다.
공작은 아마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에게도 트레벨은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비슷한 결론이 나오겠군.’
그렇다면 아론은 녀석들과의 충돌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 * *
아론이 킬리안을 만나고 공작가로 복귀한 지 며칠 뒤, 출타했던 공작이 귀환했다.
공작도 아론이 대신해서 원로회의에 참석하고 킬리안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자마자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아론을 집무실로 불렀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전달된 내용에서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한번 자세히 말해주길 바란다.”
아론은 원로회의에서 있었던 일과 아이젠의 항복 문서, 그리고 킬리안을 만나 이야기한 것에 대해 공작에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공작은 얼굴이 점점 좋지 않아졌다. 크라우가 그릇으로 잡혀갔다는 내용을 들었을 때는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아론은 공작이 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첫째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었다.
포드의 임무를 크라우가 넘겨받은 것도 실력을 인정해서였다. 그런데 크라우가 그릇으로 잡혀갔다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녀석들이 노리는 게 베르다트의 부활이더냐?”
“예. 그렇다고 합니다.”
“쯧. 귀찮은 일을 벌이는군.”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 내가 공작가를 잠시 떠났던 것도 녀석과 관련해서였다.”
“베르다트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알다마다. 고대 역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기록 속에서 묻혀있는 녀석을 부활시키겠다니…….”
“이미 대부분의 준비를 마친 듯합니다.”
“그런 것 같더군. 출타 중에 베르다트의 잔영과 마주쳤다.”
“베르다트의 잔영이라고요?”
공작이 이곳을 떠났던 이유는 마계의 문에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마계의 문에서 큰 반응이 일어났었는데, 하필 크라우가 전투를 치르고 회복 중이라서 공작이 대신 다녀왔었다.
가서 보았던 게 베르다트의 잔영이었다. 공작은 녀석과 전투를 치렀었다. 아직 완전하게 부활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작은 고전을 했었다.
‘베르다트가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나오지도 않았는데 공작이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라니.’
공작의 말을 들은 아론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크라우를 그릇 삼아서 완벽하게 부활하는 데 성공한다면 얼마나 강한 적이 될지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놈을 피할 수는 없다.’
트레벨이 베르다트의 부활을 성공시켜서 녀석이 세상으로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그야말로 절망적이겠지.’
인간들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놈은 마족을 포섭해서 신들의 영역에 침범한 요정이었다. 트레벨과 합심한다면 대륙에 파탄을 불러올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행인 거는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거야.’
부활에 거의 다다른 건 맞지만, 녀석들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베르다트가 완전히 부활해서 등장하게 된다면 녀석을 막기는 힘들었다. 기회가 있다면 그 전에 저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저는 킬리안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 조건들은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베르다트가 부활하기 전에 수를 쓰기 위해선 트레벨의 정보가 필수입니다.”
“그 점은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면 항복을 받아들이시는 거죠?”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트레벨과의 전투를 대비하거라. 공작가는 네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예.”
아론은 공작이 말하는 의미를 알았다. 이번에 있을 일은 아론이 주가 되어서 하라는 뜻이었다.
‘신력을 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베르다트는 요정이었다. 요정의 힘은 신력에서 나오고, 신력과 마나가 격돌하면 마나는 필연적으로 밀렸다.
‘하지만 공작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
자신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이는 전적으로 아론을 믿는다는 말이었다.
새삼 예전에 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이 몸에 빙의했을 때, 아론은 마나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 공작가의 힘을 이용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문에서 알아서 밀어주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물론 마냥 좋은 건 아니지.’
지원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의미다. 공작가가 뒤에서 든든하게 밀어준다고 해도 베르다트가 부활했을 때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베르다트의 부활을 저지할 때까지는 네게 가주에 준하는 권한을 이양해 주마.”
“감사합니다.”
아론은 책임이 막중함을 느꼈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목숨도 걸려 있지만 대륙의 존망이 달려 있었다.
아론은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런 뒤에 곧장 영지의 감옥으로 향했다.
‘포드 님을 만나야 해.’
그에게 안부 인사를 전할 겸 해서 몇 가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원래라면 아론이 감옥에 발을 들이는 건 공작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주에 준하는 권한을 받은 이상, 아론은 언제든 포드를 만나는 게 가능했다.
“아론. 오랜만이구나.”
“스승님도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이미 경지에 올랐구나.”
포드는 아론이 9서클에 도달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활짝 웃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스승님을 꼭 감옥에서 꺼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그런데 이곳에 그냥 온 것은 아닐 터.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왔느냐?”
아론은 자신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
아론은 포드를 만나서 필요했던 답변을 들은 뒤에 비전 서고로 향했다.
비전 서고에는 유수한 마법 명가의 비전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곳 역시 원래 공작을 대동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지만 지금의 아론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비전 서고에 비치된 책들 중에서는 요정족이 활동하던 시기에 있었던 가문의 책도 있었다.
그 책들은 대부분 해독을 할 수 없거나 이해는 해도 지금의 마법 이론으로는 발현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하지만 아론에게는 그 당시의 책이 꼭 필요했다.
‘최악의 경우, 베르다트가 부활했을 때도 생각해야 한다.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마법으로는 힘들어.’
그래서 가장 마법이 융성했던 시기의 책이 필요했다.
아론이 포드를 만난 것도 그때 어떤 책이 있었는지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몇 가지 도움 될 책을 들을 수 있었다.
‘베르다트는 부활하면 다시 마계하고 접촉할 거다. 그렇다면 마계의 괴물과 벌일 전투도 유념해야 한다.’
아론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이곳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빼서 봐야겠지만, 아론에게는 상태창을 열 수 있었으므로 시간이 꽤 단축되었다.
아론은 어느 책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테더르 가문의 비전서」
· 신성 마법의 대가인 테더르 가문의 비전이 담긴 마법서.
· 이 책을 이해하면 신성 마법을 배울 수 있으며 그와 관련된 마법의 숙련도가 올라간다.
· 7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원활한 습득이 가능하다.
아론은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신성 마법은 마법 중에서도 신력과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부류였다. 특히, 마계의 괴물과 싸울 때 효과가 탁월했다.
거기다가 아론은 신력을 다룰 수 있으니 신성 마법은 더욱 강력한 효율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머지 책 하나는…….’
아론은 다시 서고를 돌아다녔다.
잠시 후, 그는 원하던 책을 찾을 수 있었다.
「헤르터스 가문의 비전서」
· 방호 관련 술식의 전문가들인 헤르터스 가문의 비전서.
· 이 책을 이해하면 마계의 기운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마법을 배울 수 있다.
· 6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원활한 습득이 가능하다.
‘여기 있었군.’
아론은 그 책 역시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마법서. 포드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준 책들이었다.
아론은 원하는 책을 발견했지만 이곳을 바로 나가지 않았다.
‘아론. 비전 서고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나? 그곳은…….’
그는 포드가 했었던 말을 떠올리며 서고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후.
“뭐야? 누가 나를 불렀…… 아론?”
나타난 것은 스라크였다.
아론이 기절했을 때 의식 속에서 스라크와 훈련을 한 뒤로 깨어나서는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스라크와 다시 만나는 게 가능했다.
‘비전 서고는 중간계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그게 포드가 말해준 비전 서고의 비밀이었다.
“이런 곳이 정말로 있었군. 포드에게서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놀라워. 도대체 어떻게 구현한 건지…….”
스라크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뭐야? 이 많은 책들은. 허어…… 여긴 완전히 다른 차원이잖아. 인간이 무슨 수로 이걸 만든 거야?”
그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라크 님.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무슨 일이지?”
“책을 하나 찾고 싶어서요.”
“뭐? 겨우 그걸 부탁하려고 나를 불렀어? 아무리 여기에 책이 많아도, 시간이 걸릴지언정 하나하나 다 살펴보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저는 찾을 수 없는 책이라서요.”
그러면서 아론은 찾고자 하는 책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스라크는 그 이름을 듣더니 이내 진중한 표정이 되었다.
“흐음. 그게 여기에 있다고?”
“네. 포드 님이 말씀하셨으니 진실일 겁니다.”
“하긴. 인간은 그 책을 인식할 수 없지. 찾아 주긴 하겠다만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괜찮습니다. 저는 여기에 계속 있어도 상관없어서요.”
아론의 대답을 들은 스라크는 책을 찾으러 떠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라크가 모습을 다시 드러냈을 때는 그의 손에 책이 하나 들려 있었다.
겉표지에는 어떠한 장식도 없었고 제목조차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자, 여기. 디멘션 마법에 관한 책이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은 드디어 포드가 말했던 모든 책을 구할 수 있었다.
* * *
“한데, 이 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스라크가 아론을 보며 물었다.
“아뇨. 자세한 건 저도 잘.”
“포드가 말해주지 않던가?”
“스승님께서는 책의 제목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아론의 대답을 들은 스라크는 잠시 생각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짧게나마 설명해주마. 그래야 배우기도 수월할 테니.”
“감사합니다.”
“차원은 여러 개가 있다는 건 너도 알 거다.”
“예. 요정족들이 다른 차원에 머무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디멘션 마법은 차원의 틈을 조정할 수 있는 마법이다. 이 마법을 완전히 다룰 수 있으면 차원을 넘나들 수 있지. 신계든 마계든 마음대로 말이야.”
“대단한 마법이었군요.”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지. 마음만 먹으면 세계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마법이다.”
그러한 마법의 존재를 아론에게 알려주었다는 건 그만큼 포드가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론적인 이야기다. 나는 인간이 이 책을 읽고 디멘션 마법에 통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고작해야 1할이나 2할쯤 다루겠지. 뭐, 네가 어디까지 배울 수 있을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그 정도만 해낼 수 있어도 위력은 대단하지 않을까요?”
“아마 포드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게 분명하다.”
스라크는 거기까지 말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비전 서고도 디멘션 마법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공간을 다른 차원에 창조했다는 말인가요?”
“그래. 디멘션 마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라크로부터 책을 받아 앞장을 펼쳐보았다. 다행히 읽을 수는 있었다.
“이 마법. 저자가 적혀있지 않네요? 이런 마법을 만들어낸 것도 신기한데, 도대체 누가 생각한 건지…….”
“요정족이다.”
“역시.”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도 태초의 요정들 중에서 하나인 건 확실하다. 그들이 가장 신과 밀접해 있었으니까. 당시 요정들은 몰래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했던 힘의 아주 일부를 기록했는데, 그중 하나가 디멘션 마법이다.”
“기원이 신이었군요.”
“나도 이 마법을 배운 덕분에 베르다트를 추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사념체를 여러 차원으로 보낼 수 있었지.”
아론은 마법서를 다시 바라봤다.
‘이게 있으면 베르다트가 부활해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배우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 쓸 수 있는 방법만 가지고는 녀석이 부활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아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디멘션 마법을 배우리라고 마음먹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가면 다시 만나기 힘들겠군.”
“그래도 여기에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려운 게 있다면 나를 불러라.”
“알겠습니다.”
아론은 책들을 챙겨 들고 비전 서고를 나섰다.
***
아론은 아이젠의 항복과 관련된 일들이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아론은 그동안 훈련에 매진했었다. 세부적인 일들은 공작을 비롯한 가문 사람들이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대략 일주일쯤 남았다고 했지.’
킬리안은 그 뒤에 트레벨의 정보를 모조리 넘긴다고 말했었다. 아론도 시기를 맞춰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비전 서고에서 얻은 책을 최대한 숙달시키는 게 목표였다.
그래도 아론이 9서클에 도달하면서 마법을 배우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테더르 가문의 신성 마법과 헤르터스 가문의 방호 마법은 하루 만에 모두 익혔다.
덕분에 남은 시간은 디멘션 마법서를 읽는데 투자할 수 있었다.
성과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크라우에게서 배운 캐스팅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개념에도 익숙해졌다.
서클이 올라가 보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마법을 직관적으로 사용한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를 말이다.
“어…… 정말 마법을 날려도 됩니까?”
아론은 지금 훈련장에서 워 메이지들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아론의 요구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수라면 고위 마법을 작정하고 날리면 수십 개를 한 번에 막아야 했다.
아론이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걱정 마. 진심으로 날려.”
아론의 그 말에 워 메이지들은 마지 못해 마법을 캐스팅해서 투하했다.
허공에 떠오른 형형색색의 수많은 공격 마법.
퍼퍼퍼펑!
아론은 그것들을 매직 미사일만으로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
그 광경을 본 워 메이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론의 뒤에서 수백 발의 매직 미사일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이다.’
워 메이지들은 아론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마법사들은 아론이 크라우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캐스팅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 익숙하다. 하지만 디멘션 마법은 어쩐다.’
아론이 유일하게 만족하지 못한 점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디멘션 마법만은 성과가 지지부진했다.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비전 서고에 가서 스라크를 불러 물어보았다. 하지만 개미 눈물만큼의 성취를 얻을 뿐이었다.
아론은 워 메이지들과의 훈련을 마치고 오늘도 비전 서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론 님.”
비전 서고에 들어서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공작의 비서가 아론을 불렀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론은 훈련을 뒤로 미루고 일단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항복과 관련된 일을 끝내고 돌아오신 건가.’
아론의 예측은 정답이었다.
“아이젠의 항복 처리를 하고 돌아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킬리안으로부터 트레벨과 관련된 정보도 얻었다.”
아론이 원하는 정보였다.
“녀석들은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그린데란트 산맥이다.”
“……예?”
아론은 속으로 놀라워했다.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놈들의 위치를 빨리 찾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아론은 이웨카 길드를 통해서 트레벨의 흔적을 쫓았다. 정확히 특정은 못 했지만 아이젠 북쪽을 유력한 본거지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린데란트 산맥이라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장소였다.
‘그래서 찾기 어려웠던 건가.’
킬리안의 정보가 없었더라면 베르다트가 부활할 때까지 찾지 못 할 뻔했다.
아마 이웨카 길드가 트레벨의 근거지를 북쪽으로 추정한 것도 녀석들이 흩뿌린 미끼 정보 때문인 게 분명했다.
“정보가 거짓일 가능성은 없겠죠?”
“감히 나를 속일 수는 없지. 녀석이 거짓말을 했더라면 내가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긴. 공작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그런 공작을 상대로 거짓 정보를 주어서 속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설령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면, 남은 아이젠 녀석들을 쓸어 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일리도 있었다.
그린데란트 산맥에서 나타났던 오크 킹. 녀석의 출현은 아직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트레벨이 근처에서 작당을 했다면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린데란트 산맥에는 요정족의 유적지가 있는 대수림이 있었다.
‘여러모로 근거가 있다.’
그렇다면 이 정보를 믿어야 했다.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론이 말했다.
위치를 알았으니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베르다트가 언제 부활할지 모르는 상황에선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지금도 많이 늦었지.’
가장 좋은 건 베르다트가 부활하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다. 하지만 항복과 관련된 일을 처리한다고 시간이 지체되었으며, 또 원정 준비를 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린데란트 산맥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그래서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동 수단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드워프들이 만든 비행 수단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포탈을 타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린데란트 산맥을 통과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비행선을 타는 게 나았다.
‘이번에 빌렸던 것도 반납해야 하니까. 잘 됐다.’
아론의 말을 들은 공작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
공작과 아론은 트레벨을 공격할 인원을 추렸다. 이번 일에 많은 수는 필요 없었다. 베르다트와 트레벨을 상대하려면 양보다는 질이 중요했다. 어차피 수가 많아봤자 실력이 없으면 개죽음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인원은 아론과 공작을 포함해 십여 명 정도의 정예로 구성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괜찮지.’
아론은 자신이 페리움 왕국의 은인이라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드워프 전사들은 강했고, 특히 수호자 등급의 드워프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예상했다.
“이런 게 있었습니까?”
“드워프들의 기술력은 참…….”
비행선에 탑승한 마법사들은 처음 겪어보는 현상에 신기해했다. 공작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하지만, 저는 아론 님이 더 놀랍군요.”
어느 마법사의 말 대로였다.
이 비행선이 마나로 돌아간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한데, 아론은 오로지 자신의 마나로 비행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최고 속력으로 말이다.
원래라면 중심에 박혀 있는 마나석이 비행선의 동력을 공급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마나석은 얼마 전 전쟁에서 모두 사용했다. 이곳에 넣을 수 있는 마나석은 드워프만이 만들 수 있어서 준비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론은 미티움의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활용해서 비행선을 움직였다.
마법사들은 그 세심한 컨트롤에 감탄했다. 이렇게 막대한 양의 마나는 자칫 잘못 다루면 폭주해서 이상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아론은 전혀 그런 위기를 보여주지 않았고, 비행선은 빠른 속도로 그린데란트 산맥을 향해 날아갔다.
이윽고 산맥에 도착한 비행선.
아론은 시간이 없으니 곧장 페리움으로 향했다. 지금 움직이는 속도라면 비행형 몬스터도 따라잡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잠시 후, 페리움에 도달한 비행선은 착륙을 시도했다. 탑승한 마법사들은 아쉬워하며 내렸다.
“여기가…… 페리움?”
“그런 것 같습니다만…….”
비행선에서 내린 마법사들은 페리움을 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아론은 비행선에 공급했던 마나를 회수하며 맨 마지막에 내렸다.
‘어?’
하지만 마법사들이 감탄했던 건 고도로 발달한 페리움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아론도 보고 말았다.
한때 찬란함을 자랑했던 페리움은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서 폐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