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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완결)-Chapter 1 (36/40)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8권(완결)

Chapter 1

아론은 조르바의 공격 방식을 안 이상 더는 소극적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녀석의 공격에 핵심이다. 그 사실에 주의해서 전투에 임하면 되는 일이었다.

쉬이익!

여러 개의 얼음으로 된 날카로운 창이 아론의 손을 떠나 날아갔다.

조르바는 그것을 막기 위해 그림자가 생긴 방향에 검을 들이밀어 막으려고 했다.

화악!

아론은 그 순간을 노려 마법으로 빛을 뿌렸다. 그러자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면서 칼날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왔다.

콰카칵!

조르바는 결국 아론의 공격을 몸에서 방사한 오러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음 창의 마나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에는 살갗이 터져나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카앙!

조르바는 검을 휘둘러 마지막으로 날아온 얼음 창을 쳐내고는 아론과 거리를 벌렸다.

‘녀석에게 검로를 완전하게 읽히고 있다.’

조르바는 숨을 고르며 아론을 바라봤다. 방금 공격으로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투 양상이 계속해서 이렇게 흘러간다면 자신에게 피해가 누적되는 것은 자명했다.

“방금 전까지 보여줬던 여유만만한 모습은 어디 갔지? 기사가 마법사를 상대로 거리를 벌릴 줄이야.”

아론은 조르바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금 우세해졌다고 날뛰는 모습이 우습군.”

조르바는 검을 굳게 쥐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오러를 끌어올렸다.

그는 절대 저 마법사 나부랭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특히, 한때 망나니라는 오명을 지녔던 아론에게는 말이다.

조르바는 아이젠 왕국 내에서 강하기로는 열 손가락 내였다. 찬드라 소드의 효과가 알려졌다고 해서 그 강함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림자를 활용한 공격은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조르바는 그 사실을 유념하며 기사의 기본인 검격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법사들은 본능으로 움직이기보다는 모든 행동을 계산하고 움직이는 녀석들이지.’

그렇기에 차라리 저돌적으로 공격하는 게 더 잘 먹힐 수 있었다.

조르바는 끌어모은 오러를 바탕으로 바닥을 힘차게 박차고 나갔다.

순식간에 아론과 조르바의 거리가 좁혀졌다. 조르바는 날아오던 중간에 검을 찔렀다.

슈슈슉!

그러자 아론의 그림자 밑에서 여러 개의 검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하나 빼고 나머지는 분신인가?’

아론은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내 칼날 모두가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자를 통해 검을 이동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사도 가능했던 거군.’

조르바는 아론에게 이번 공격을 처음 선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론은 간단히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쏟아지는 칼날들을 피할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을 본 조르바는 당황했다.

저게 정녕 마법사의 움직임인가.

잘 훈련된 기사의 보법을 보는 듯했다.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던 모양이군.’

아론은 조르바의 그런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쉽게도 조르바가 보여주는 오러의 흐름이 이제는 계산이 되었다.

아마 이 사실을 조르바에게 말해준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전투 도중에 학습을 마치고 검로를 인간의 머리로 계산한다니.

하지만 아론은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마나 친화력을 타고 난 존재였다.

어찌 되었든, 조르바는 아론이 자신의 공격을 저리 쉽게 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조르바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전신의 오러를 검에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찬드라 소드가 검은빛을 뿜어냈다. 조르바는 즉시 아론을 향해 몸을 날린 뒤 검을 휘둘렀다.

푸화악!

조르바의 검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쏟아져 나와 아론의 주위를 감쌌다.

만약 내부에서 아론이 어떠한 마법이라도 써서 빛을 내는 순간, 사방에 생긴 그림자가 아론의 심장을 노리는 비수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불안했다.

아론이 어둠에 감싸이는 순간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담담한 거지?’

잠시 후, 조르바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론을 감싼 어둠이 문자 그대로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어둠이 와해되면서 동시에 번개가 조르바를 향해 날아들었다.

‘……!’

번개에 담긴 기운이 남달랐다.

아론이 마나 뿐만이 아니라 신력도 섞은 결과였다.

콰르릉!

뇌전은 조르바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그는 힘을 잃고 무릎부터 풀썩 쓰러졌다.

‘내, 내가…… 졌다고?’

조르바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저벅저벅.

아론은 무심한 표정으로 조르바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을 떠난 찬드라 소드를 아론이 주워서 갈무리했다.

그것이 조르바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

새로운 구심점이었던 조르바 왕자가 사망했다. 그 결과 아이젠의 산악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말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아론이 이끄는 부대가 로즈힙 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 소식은 빠르게 대기 중이던 메도우드의 총지휘관인 랜튼에게 전달되었다. 랜튼은 즉시 전면 공격을 명령했다.

뤼튼 성에서 대기하던 아이젠의 병력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로즈힙 산을 내려간 산악병들이 메도우드 군을 치는 순간 성문을 열고 공격할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아이젠 군은 상대적으로 방어하기엔 불리한 형세를 띠고 있었는데,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메도우드는 총지휘관의 명령대로 뤼튼 성을 향해 공세를 쏟아부었고, 성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다.

공성전에서 양측의 판도를 가르는 것이 바로 성문의 유무였다. 성문이 부서진 순간, 전황이 메도우드 측으로 기운 거나 다름없었다.

“모두 돌격하라!”

각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은 마법사와 마도병들과 함께 성 내부로 진입했다.

그 후로는 메도우드 군의 압도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성내에 있던 아이젠의 병사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가 뤼튼 성마저 함락할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라면 아직 코드로바에서 힘 싸움을 하고 있었겠지요. 이게 다 아론 도련님의 활약 덕분입니다.”

지휘관들이 아론의 무용담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서 그가 해준 일이 컸다. 아론이 없었더라면 코드로바를 통한 길목 확보도 힘들었을 것이고, 뤼튼 성도 이렇게 무너뜨리지 못했을 터였다.

“이러다가 아이젠 본성까지 함락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너무 으스대지 말거라.”

“예, 옙!”

총지휘관인 랜튼이 지휘관들의 설레발을 제지했다. 그 말대로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린 아이젠의 성 몇 개를 쓰러트렸을 뿐이다. 아직 아이젠의 영토는 많이 남아있고, 녀석들의 병력도 건재하다.”

원래 만사가 잘 진행되고 있을 때를 조심해야 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찔릴 수 있었다.

“아직 뤼튼 성에 잔존 병력이 남아 있을 것이다. 녀석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고, 혹시나 매복은 없는지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랜튼의 명령에 지휘관들이 흩어졌다.

“흐음.”

랜튼은 그들을 다그치긴 했지만, 아론의 활약이 놀랍다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론의 존재로 인해서 전쟁 기간이 예상보다 훨씬 단축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드로바도 무너졌고, 뤼튼 성도 사실상 함락시켰다.’

메도우드의 병력과 보급은 코드로바와 뤼튼의 길목을 통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이다.

이제 이 자원을 바탕으로 아이젠의 수도를 노릴 수 있었다. 앞으로의 진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휘관들이 말했던 것처럼 수도의 함락은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들떴군.’

랜튼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메도우드의 병력 전체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랜튼이 판단을 잘못 내리는 순간, 메도우드 전체가 휘청거리고 만다.

‘전쟁은 언제나 예상외의 일이 벌어질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랜튼은 기초적인 전투 교범을 유념하면서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

아이젠 왕성.

그곳에선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급보입니다!”

그때, 급사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뤼튼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조르바 왕자님이 아론 에드먼스와의 전투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메도우드의 병력은 현재 정비 중이며, 끝나는 대로 수도 방향으로 진격할 것이 예상됩니다.”

최악의 소식에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그러나 왕만이 덤덤한 표정으로 보고를 듣고 있었다.

“1왕자님이 당하시다니……!”

“아무리 적국이라고 해도, 단칼에 죽이는 건 너무 예의 없는 처사가 아닙니까?”

“기사들을 보내서 아론을 척살해야 합니다!”

신하들이 격노를 터트렸다.

그들의 반응에 왕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하라.”

그 말에 다들 조용해졌다.

“약하니까 당한 것이다. 패배한 쪽이 꼴불견 아니겠는가?”

왕의 그 발언에 신하들은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불만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대로 가다간 왕국의 위신이…….”

“이기면 그만 아니겠는가?”

왕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은 좀 더 때를 기다려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문맥을 알 수 없는 말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왕의 의중을 알아차린 몇몇 신하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멈추려 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피가 이 땅에 필요한 모양이다.”

왕은 신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실 기사단장들을 모두 모아라.”

“예……?”

신하들은 명령의 정확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왕실 기사단 중 두 부대가 전선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기사단장도 그곳에 있는지라, 이곳으로 불러 모을 수는…….”

신하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푸확!

그의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히익!”

그 옆에 있던 신하들은 피가 튀는 모습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신하의 목을 벤 왕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내 결정에 토를 달다니, 많이도 컸구나.”

왕은 신하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내 결정에 불만이 있으면 나보다 더 강해진 뒤에 말하도록 하라.”

왕이 저렇게 나오니, 신하들은 입이 많아도 할 말이 없었다.

“아이젠은 승리한다. 이제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왕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아론은 조르바의 찬드라 소드를 회수한 다음 그것을 아공간에서 꺼낸 검집에 넣었다.

그 검집은 드워프 장인 헤핌이 만들어 준 미티움 추출기였다.

잠시 후, 아론은 추출된 미티움을 펜던트의 빈 공간에 흘려 넣었다. 미티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가더니 이내 보석의 모습을 띠었다.

‘펜던트의 보석을 하나 더 채우게 되었군.’

아론은 펜던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찬드라 소드였던 검은 보석이 빛을 내었다. 동시에 아론은 펜던트에 저장된 마나가 늘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론은 펜던트를 쥐고 마나를 움직였다. 그러자 펜던트의 마나가 아론의 몸을 한 바퀴 훑고 지나갔다. 그는 마나의 충만감을 느끼면서 미소지었다.

펜던트에 내재된 마나는 순수한 마나였다. 그렇기에 마나가 한번 훑고 지나가면 마나 친화력이 올라갔다.

특히나 이번에는 마나의 구성 요소가 더욱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이러니 아이젠이 탐낼 만 하지.’

괜히 아이젠과 트레벨이 미티움의 복제품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게 아니었다. 미티움에는 그만한 가치가 확실히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칠검을 숨겨두지 않고 이렇게 전장에서 운용을 하는 걸까.’

아론은 그러한 의문이 들었다.

아론이야 칠검을 회수할 수 있어서 상관없었지만, 아이젠에게는 손해인 게 확실했다.

얼마 전에 확인한 바로 아이젠은 미티움의 복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능은 열화될지라도 복제된 칠검을 전장에 내보내는 게 훨씬 그들에게 안전할 터였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직 수집해야 할 정보가 더 있는 건가?’

녀석들이 노리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차피 아론이 고민해봤자 알 수 없는 문제기는 했지만 말이다.

***

메도우드의 군사들은 뤼튼 성에서 승리를 만끽하고 잠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병사들은 인간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휴식 시간은 필수였다.

그리고, 아이젠으로 나아가는 길목이 뚫렸다뿐이지 아직 상대해야 할 아이젠의 병력은 많았다. 앞으로의 전략도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혼란을 주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보냈던 부대들과 합류도 해야 했다.

아론은 오늘 예정되어 있는 전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가던 길에 크라우를 만났다.

“안녕, 아론.”

“형님도 몸은 괜찮으십니까?”

“응. 거의 다 나았어.”

그는 이전에 아이젠의 제일검인 킬리안과 전투를 치르고 휴식에 들어갔었다.

그런 그가 회복이 끝났다고 하니, 상대였던 킬리안도 슬슬 전장에 나오리라고 예상되었다.

‘킬리안은 굉장히 강했다.’

앞으로 전투에 있어서 킬리안은 큰 걸림돌이 될 확률이 높았다. 만약 부대의 배치를 잘못할 경우 킬리안에게 모조리 갈려 나갈 수 있었다.

잠시 후, 회의실에 도착한 아론과 크라우. 나머지 지휘관들도 거의 다 와 있던 상태였다.

총지휘관인 랜튼은 모두 출석한 것을 확인한 후에 회의를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양동으로 갔던 부대들도 속속히 합류하고 있다. 병사들의 휴식도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아이젠 녀석들을 상대해야 할지 방향을 정해야 한다.”

랜튼이 입을 열었다.

참석한 지휘관들은 진중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휴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수도로 진격하는 방법도 있다. 보급로가 길어지긴 하겠지만, 코드로바와 뤼튼이 우리의 영향 아래에 들어왔기에 보급이 끊길 염려는 거의 없다.”

지휘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성을 먹은 순간 아이젠의 영역 내에서 보급에 대한 걱정은 덜 수 있었다.

“물론 이 방법은 무리를 좀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녀석들의 외곽부터 조금씩 먹어가면서 장기전을 노리는 것도 괜찮은 작전이지.”

아이젠은 메도우드와 쌍벽을 이루는 거대한 국가였다. 중심부를 박살 내지 않는 이상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메도우드가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아이젠을 완전히 흡수하는 것보다는 속국으로 놔둘 확률이 높았다. 그편이 통치하기에 편하니 말이다.

랜튼은 말을 하던 도중 생각에 빠졌다.

‘으음. 하지만 크라우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다. 그 아이가 다시 임무에 복귀한다면 우리는 귀중한 전력을 잃게 되는 셈이다.’

크라우는 전장에서 킬리안과의 밸런스를 맞춰줄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전략적으로 활용할 가치가 매우 높았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군.’

생각을 마친 랜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방법을 생각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최선의 전략은 곧장 진격하는 것이다.”

몇몇 지휘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랜튼의 선택을 납득하고 있었다.

“녀석들의 중요 거점들만을 노려 진격할 것이다. 작전은 이번처럼 병력을 분산 시켜 상대도 병력 나누기를 강요하고, 우리는 거점을 밀어버리는 거지.”

이 전략은 지금까지 확실한 효과를 입증했다. 특히, 아론이 상상 이상의 전력을 보여주었기에 더욱 가치 있는 전략이었다.

랜튼의 설명을 계속해서 듣던 아론은 의문점이 생겼다.

‘여태까지 들어온 정찰 정보에 의하면 상대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는 점이 걸린다.’

아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 전쟁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밀리는 쪽이라면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는데 아이젠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뤼튼 성을 밀어낸 건 우리다. 그렇다면 녀석들은 뤼튼과 가까이에 있는 성에 병력 보강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치 전쟁을 포기라도 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녀석들이 보인 허점인가. 아니면 함정일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론만이 아니었다. 랜튼 역시 이 점을 짚고 넘어갔다.

“……그렇다고 우리가 녀석들에게 시간을 줄 필요는 없다.”

“제가 본대에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젠이 파둔 함정이라고 해도, 제가 있으면 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때, 크라우가 랜튼에게 말했다. 랜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부터 너도 본대와 같이 싸우도록 해라.”

지휘관들도 환영이었다. 크라우가 합류한다면 전력에 큰 상승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눈을 돌릴 견제 부대의 운용인데…….”

랜튼은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 네가 맡아 주겠나?”

“알겠습니다.”

“이름만 견제 부대일 뿐, 편제는 충분히 공성전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예.”

그때, 지휘관 중 한 명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언했다.

“아론 도련님이 지금까지 보여주신 활약상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도련님에겐 대부대를 이끈 경험이 아직 없습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아론은 100명의 소부대를 이끌었던 경험밖에 없었다. 100명을 다루는 것과 수천 명을 다루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론이라면 충분히 해낼 겁니다.”

아론을 두둔한 건 크라우였다.

그가 지원사격에 나서자 토를 다는 지휘관은 없었다.

“그럼 견제 부대는 아론이 맡는 거로 하겠다.”

랜튼은 나머지 사항들도 빠르게 정리했다. 작전의 방향이 정해졌으니 지휘관들은 그에 맞춰 바쁘게 움직였다.

***

아론은 자신이 맡은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그는 본대가 거점을 치기 전에 다른 지역을 타격하는 교란 역할을 맡았다.

다른 지휘관이 걱정했던 것처럼 아론이 부대를 미숙하게 운용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겨를이 없었다. 상대의 병력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는 함정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별것 없었다.

덕분에 아론은 할만하다 싶어서 성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수성하는 아이젠은 제대로 된 수비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은 급기야 성을 남겨둔 채 퇴각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아론의 부대로 전령이 도착했다. 본대도 하겐 성을 뚫었다는 소식이었다.

‘그쪽도 함정이 아니었다는 건가?’

아론은 진심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아이젠이 노리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굳이 성을 내주면서까지 보여줄 작전이 있나?’

이곳에서 볼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아론은 부대를 돌려 본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잠시 후, 아론의 부대가 하겐 성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콰아앙-!

심상치 않은 폭음이 들려왔다. 아론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

“으윽!”

주위의 병사들이 신음을 흘리며 고통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내상을 입었다고?’

이들은 잘 훈련받은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충격파에 내상을 입을 정도라니.

감히 예측하기 힘든 존재들의 전투가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콰아앙-!

폭발음은 연이어서 들려왔다.

병사들이 계속해서 저 충격에 당한다면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배리어를 넓게 쳤다.

충격파를 버틸 수 있는 워 메이지들도 가세해서 배리어를 전개해 병사들을 보호했다.

다그닥다그닥-!

본대에서 보낸 전령이 아론에게 도착했다.

“아론 님!”

“무슨 일인가?”

“성 밖에서 지금 교전 중입니다. 상대는 아이젠 왕실의 문장이 달린 깃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왕실기라고?”

아론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왕실의 문장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왕실기가 대동된 병력이라는 건, 거기에 왕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아이젠의 왕이 직접 행차했다고?’

그렇다면 왕만 왔을 리 없었다. 왕실 기사단도 같이 대동했을 것이다. 분명 거기엔 아이젠 제일검인 킬리안도 있을 터였다.

“크라우 님과 다수의 워 메이지들이 그들과 맞서는 중입니다. 나머지 병사들도 밀려오는 아이젠의 병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혼전입니다.”

그만큼 전장의 상황이 아비규환이었다.

‘아이젠은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건 것일까?’

왕이 직접 나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만약 들은 바가 사실이라면 메도우드에 많이 불리했다.

저쪽은 모든 것을 건 반면, 메도우드의 병력은 전력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이드, 라프. 병력의 운용은 너희에게 맡긴다. 먼저 가 있을 테니 뒤따라오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아론은 라엘과 켄트, 그리고 나머지 워 메이지들을 이끌고 빠르게 이동했다.

* * *

아론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가는 중이었다. 혹시나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의 속도를 못 따라오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가는 길 곳곳에 치열하게 전투했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몇몇 병사들은 충격파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론은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대체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저 사람은……?’

그때, 아론의 시야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가 한 명 보였다. 분명 회의 때 봤었던 지휘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순 없었기에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지휘관들은 대부분 8서클의 마법사다. 그런 그가 당할 정도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들어보고 싶었다.

“괜찮으세요?”

켄트가 다가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으윽…….”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법사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켄트는 일단 회복 마법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잠시 후, 진정된 마법사를 향해 아론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이젠의 왕하고 녀석이 이끄는 기사단이랑 전투를 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아이젠의 왕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랜튼이 크라우와 지휘관들을 이끌고 급하게 출진했었다.

크라우와 랜튼이 왕과 맞섰고, 나머지 지휘관들이 기사단장이랑 전투했다.

“처음에는 할만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녀석이 자기편인 기사단장을 공격하더군요.”

“예?”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왕의 힘이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렸고, 혼자서 우리들을 상대할 수 있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마법사는 치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라우 도련님 덕분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습니다만, 녀석의 그 힘은 도련님 혼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마법사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콰아앙!

멀리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최소 9서클 이상의 마법이 발현된 거라고 예상되었다.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아론은 그 마법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저곳에서 이 정도 마법은 크라우 말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마나의 구성이 첫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뒤이어서 신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신력을 알고 있는 아론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있어봤자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아론은 빨리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따라온 나머지 사람들은 동행해도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라엘과 켄트도 마찬가지야. 같이 가면 오히려 위험에 빠진다.’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이들을 놔두고 가기로 했다. 그들에겐 쓰러진 지휘관의 처리를 맡기는 편이 나았다.

아론은 양해를 구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

잠시 후, 전투 현장에 도착한 아론. 그의 눈에는 대등하게 맞서고 있는 크라우와 아이젠 왕의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이 왕이구나.’

자르킨 아이젠.

아이젠 왕국의 정점.

그를 직접 마주하니, 아론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카이만 공작이 전력을 다하면 저 정도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타앗!

크라우가 자르킨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크게 뒤로 밀려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떨어진 자리는 아론이 서 있던 자리 근처였다.

“아론. 너도 왔구나.”

크라우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아론을 보았다.

‘무리해서 버텼구나.’

아론은 크라우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하게 인사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콰아아!

마법이 아론을 덮쳤다. 아론은 급하게 배리어를 쳐서 공격을 막아냈다.

‘마, 마법?’

아론은 무사히 공격을 막아냈지만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공격을 가한 녀석은 틀림없이 아이젠의 왕, 자르킨이었다. 근데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 건지 이해 가지 않았다.

아이젠은 기사의 국가였다.

검을 숭배하고, 마법을 배척하는 곳이 바로 아이젠이었다.

왕의 자리에 앉은 자르킨이 마법을 쓴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나와 오러의 기원은 같더라도 활용에 있어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기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깐만. 이 마법…… 아까 폭발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운인데.’

아론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저 녀석. 신력을 쓰는 모양이야.”

크라우가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다름이 아니라 신력이었나.’

그제야 아론은 이해가 되었다.

자르킨은 신력을 이용해 그 기운을 마법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흉내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저게 가능한 거야?’

아론은 의아해했다. 자신도 요정족에게 직접 신력을 전수 받았다. 그러나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네가 아론 에드먼스구나.”

자르킨은 아론을 보며 말했다.

아론은 긴장한 채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도 신력을 배운 모양인걸.”

자르킨의 말에 아론은 놀랐다.

이 사실은 카이만조차 먼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아론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고 말았다.

“솔티어크에서의 여정은 즐거웠나?”

아론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요정족과 연관이 깊은 녀석 같은데.’

대체 자르킨의 정체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분명 아이젠의 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에드먼스의 첫째를 그릇으로 쓰려고 했었다. 하지만 널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오히려 네가 더 그릇에 알맞은 존재인 것 같군.”

그 말을 하는 자르킨의 얼굴은 진심으로 만족한 모습이었다.

‘날 그릇으로 쓰겠다고?’

이 말은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 일어난 전쟁 덕분에 아이젠의 영토에 충분히 많은 피가 뿌려졌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가 서 있는 발밑을 한번 확인해 보거라. 너도 신력을 배웠으니 쉽게 느낄 수 있을 터다.”

자르킨의 그 말에 아론은 아래를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대지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신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있었다니.’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형태를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신력이 마치 마법진을 그리듯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놈은 이런 걸 왜 알려 주는 거지?’

아론은 자르킨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자신과 크라우를 상대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태도였다.

“느꼈나? 그러면 네가 지닌 정령으로 그 실체를 한번 확인해 보거라.”

자르킨은 아론이 계약한 정령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없구만.’

아론은 녀석을 경계하면서 쿠브에게 땅 밑에서 느껴지는 기운의 조사를 부탁했다.

‘……피?’

쿠브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대지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것들은 피였다. 그것이 신력에 이끌려 계속해서 어딘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충분히 많은 피가 뿌려졌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아론은 대지에 흐르는 피가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왜 진의 형태를 파악하기 힘들었는지 알겠어. 이건 아이젠 전체에 흐르고 있는 매우 거대한 진이야.’

아론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다. 이렇게 모은 피를 거대한 힘으로 바꾸려는 거겠지.’

아이젠은 이전부터 미티움의 복제품을 준비하는 등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은 죽은 자들의 피를 모으기에 최적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보아하니, 대충은 알아차린 것 같구나.”

자르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젠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분’의 부활을 위한 거대한 수단이다. 여태까지 있었던 아이젠의 왕들은 모두 그 대업의 수행자들이었지.”

묻지도 않았는데 자르킨은 심취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내용을 읊어댔다.

“그 과업이 이제 내 선에서 끝날 것 같구나. 드디어 완성이 되어가고 있어.”

자르킨은 흉흉한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아론. 너에게는 감사하고 싶다. 네가 칠검의 미티움을 가져와 줘서 말이야. 검의 형태였을 때보다 훨씬 높은 순도를 띠고 있어.”

“……누가 준다고 했나?”

아론은 생각했다.

저 녀석의 말은 태반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숨겨져 있던 거대한 비밀이 드러났다는 것만은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녀석이 주절주절 그 사실을 말해주는 이유 역시도 알고 있었다.

‘나랑 크라우를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휘익!

자르킨이 먼저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신력을 이용한 마법을 흉내 낸 공격이었다. 신력이 한가득 들어 있는 공격인지라, 위력이 상당했다.

‘저건…… 막을 수 없어!’

아론은 확신했다. 섣불리 배리어로 막으려고 한다면 몸이 만신창이가 될 게 뻔했다.

설령, 어찌어찌 막아낸다 하더라도 크라우까지 지키면서 싸우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형님, 조금 빨라도 버텨.”

아론은 그렇게 말한 뒤 크라우를 들쳐 업고 가속 마법을 사용했다.

타다다닥!

마법의 세밀한 제어는 포기하고 상당 부분을 속도에 투자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 만에 멀리까지 도망갈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아론은 숨을 골랐다. 뒤에서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아니?’

쏘아지는 신형이 보였다.

저건 분명 자르킨이었다.

‘이렇게 빨리 추격해 온다고?’

아론은 무리해서 가속 마법을 썼기에 곧바로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자르킨이 공격을 해온다면 아론은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다.

콰아아-!

들이닥치는 자르킨의 신력.

그 공격을 막아낸 건 크라우였다.

“도망가긴 그른 것 같아.”

크라우는 배리어를 전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할 수 없지. 아론. 둘이 있을 때 저 녀석하고 싸우자.”

“하지만 형님. 혼자서 저 녀석하고 싸운다고 힘을 거의 다 쓰셨잖아요.”

아론은 크라우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전력을 다해서 도망친 뒤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나았다.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목숨을 걸어야지.”

크라우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이제 날 챙겨줄 사람도 있으니까 사용해도 되겠어.”

그는 혼잣말처럼 그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심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해제했다.

휘오오오-!

그러자 주변의 마나가 죄다 첫째의 회로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아론의 마나도 크라우에게 흡수될 뻔했다.

잠시 후, 마나가 진정되자 크라우는 온전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이건 대체……?’

아론은 크라우가 무슨 신묘한 힘을 부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자르킨과 싸워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크라우의 변화를 알아차린 자르킨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설령 나를 이기더라도, 넌 폐인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자르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힘을 쓰고자 하면 그만큼의 충격을 반동으로 받기 마련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크라우는 한계에 도달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크라우는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서 서클에 끊임없이 마나를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하면 체내의 마나도 충만해지고 성장 역시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클은 엄연히 내구도가 존재했다. 한계 이상으로 마나를 흡수하면 서클이 붕괴될 수 있었다.

크라우는 항상 그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으면서 마나를 빨아들였었다. 혹시라도 한계를 넘을까 봐 그걸 억제하는 마법진을 심장에 새겨 뒀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마법진을 방금 해제했다. 그래서 주변의 마나가 폭발적으로 크라우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자르킨을 상대하는 건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그래서 크라우는 안일하게 뒤를 생각할 수 없었다.

“네가 가진 힘이라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거다.”

“나는 장차 에드먼스의 공작이 될 사람이다. 그런 내가 가문의 사람을 버린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자르킨의 말을 들은 크라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너랑 달라. 힘을 위해서 자신을 지켜준 부하의 오러를 빨아먹는 너랑은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곁에는 내 동생이 있거든. 충분히 목숨을 걸어볼 만한 싸움이지.”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네 녀석들은 모두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의미 없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크라우는 자세를 잡은 뒤 곧바로 마법을 날렸다. 무형의 공격 마법이 자르킨을 노리고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캐스팅도 없이 이 만큼의 마법을…….’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총 세 발의 무형 마법이 자르킨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질주하고 있었다.

쉬익-!

그러나 아론이 감탄했던 것과 다르게, 왕은 오러를 휘둘러서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콰앙!

마법과 오러가 격돌하면서 굉음을 일으켰다.

‘저 녀석, 블링크를 쓰려는 모양인데?’

아론은 자르킨의 주변에서 마나의 진동을 감지했다. 블링크를 쓰기 전에 나타나는 특유의 마나 현상이었다.

아론은 그가 이동하리라고 예상되는 장소에 마법을 쏟아부을 준비를 했다.

파앗!

자르킨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아론은 즉시 마법을 날렸다. 펜던트의 영향을 받아 한층 순도가 높은 마나를 이용한 공격 마법이었다.

화아악!

자르킨은 날아오는 마법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곧장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저건…… 9서클 수준의 방어 마법이다!’

그가 펼친 배리어에 아론의 마법이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같은 등위의 마법이 아니면 전부 무로 돌려 버리는 배리어였다.

아론의 마법은 위력이 강했지만 9서클의 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쪽은 혼자가 아니거든.’

뒤이어서 크라우의 냉기 폭풍이 자르킨을 덮쳐왔다. 아론의 마법과 달리 진짜 9서클의 마법이었다.

촤학!

그러나 자르킨은 배리어로 막지 못하는 공격을 검을 휘둘러서 걷어냈다.

콰드득!

그 뒤에 즉시 크라우가 이동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낚아채는 마법을 사용했다.

파앙!

자르킨의 몸이 크라우를 향해 쏘아졌다. 그걸 본 아론은 즉시 자르킨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에 배리어를 펼쳤다.

그때, 아론은 자르킨과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블링크 마법을 감지했다.

‘이걸 노린 건가……!’

자르킨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고, 이내 아론의 뒤에서 나타났다.

아론은 기지를 발휘했다. 얼마 전에 습득한 찬드라 소드의 능력을 이용해 배리어를 그림자가 진 자신의 뒤편으로 이동시켰다.

콰카칵!

배리어는 자르킨의 검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론은 즉시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아론이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쓰는 녀석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사가 지니는 단점은 마법을 활용해서, 반대로 마법사가 지니는 단점은 검술로 해결해 버렸다.

어느 한쪽의 실력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자르킨은 검술과 마법 모두 9서클 급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론이 자르킨의 실력에 감탄하기가 무섭게, 그는 방금 전보다 더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또 힘이 솟아난 거지?’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그릇은 깨져도 다시 붙이면 그만이다.”

자르킨은 아론을 바라보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후웅!

자르킨이 검을 휘둘렀다.

전방에 거대한 오러가 폭풍을 일으키며 아론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으윽……!’

아론은 그걸 본 순간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자르킨이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자신에게 속박 마법을 걸었음을 알아차렸다.

‘꽤 고위의 속박 마법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풀 수 있어.’

아론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속박 마법을 풀고 몸을 움직여 피할 것인가. 아니면 배리어를 펼쳐서 오러 폭풍을 막아낼 것인가.

후자는 위험했다. 오러는 어찌 막더라도 움직임에 제한이 있으면 후속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아론은 구속 마법을 해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배리어를 치는 게 조금 늦어지겠지. 하지만 오러에 휘말려서 신체 일부를 잃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일단은 사는 게 중요했다.

휘오오오!

맹렬하게 다가오는 오러 폭풍. 아론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속박 마법을 푸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아론이 오러 폭풍에 삼켜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콰카카칵!

크라우가 아론의 전방에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오러 폭풍은 거칠게 방어막을 두들겼지만 뚫어내지 못했다.

그 공격을 막고 있는 크라우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오러의 위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체내에 있던 마나도 순식간에 소모되었다.

그래도 심장의 억제를 풀어 두어서 마나는 금세 다시 크라우의 서클에 흘러들어왔다.

‘됐다!’

아론은 덕분에 안전하게 구속 마법을 풀 수 있었다.

쨍그랑!

동시에 건재했던 방어막이 깨졌다. 오러 폭풍이 기세를 회복하면서 다시 두 사람을 향해 무섭게 나아갔다.

아론은 방어막을 유지한다고 힘을 써 버린 크라우의 몸을 팔로 감싼 채 같이 오러 폭풍으로부터 멀어졌다.

‘흐음. 이걸 막아 내다니.’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자르킨은 약간 흥미로워했다.

‘괴물이나 다름없는 놈.’

그게 자르킨에 대한 아론의 평가였다. 어떻게 해야 그를 이길 수 있을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크라우 없이 아론 혼자서 녀석과 마주했더라면 이미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음이 자명했다.

[녀석을 이길 방법이 있어.]

그때였다. 크라우가 아론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아직 상대에게 보이지 않은 비장의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뭡니까?]

[대신 시간이 좀 필요해.]

[놈을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시간 정도야 제가 벌어 보겠습니다.]

[아니, 이 방법은 네가 메인이 되어야 가능한 거다.]

[…… 제가 시간을 버는 게 아니었습니까?]

아론은 당황했다.

현재 전장에서 가장 약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론이었다. 자르킨은 물론이고 크라우도 실력으로 넘어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에서 싸우고 있는 것도 무리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내 공격은 자르킨의 방어막에 속절없이 막혔었지.’

자르킨은 9서클 급의 마법이 아니고서야 뚫을 수 없는 방어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렇기에 아론은 크라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방법에서 자신이 메인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자르킨의 마법은 신력이 바탕이지. 신력이 마나보다 상위의 개념인 건 너도 잘 알 거다. 그래서 마나만 쓰는 내 공격은 자르킨에게 먹혀들어도 위력이 떨어져.]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너는 신력을 사용할 수 있지. 아론, 네가 순수하게 신력만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르킨에게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자르킨의 방어막에 제 마법이 막히는걸요.]

[녀석이 펼치는 방어 마법은 내가 없애주겠다. 너는 그 틈에 공격해라.]

크라우의 방법을 들은 아론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다.

아론은 오로지 신력만 이용해서 마법을 발현해본 적이 없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 부족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마나를 바탕으로 신력을 조금 섞어서 마법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아론은 머리가 아파졌다.

‘하지만 이걸 해내지 못하면 가망이 없어.’

크라우의 방법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하면서 신력을 쓰는 건 계속해왔으니, 그걸 응용하면 될 거 같았다.

[할 수 있겠어?]

[해내 보겠습니다. 대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다. 준비가 되는 동안 내가 자르킨을 상대하고 있을게.]

크라우는 전음을 마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기에, 자르킨은 의아함을 느꼈다.

‘진형을 바꿨나?’

하지만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엉성한 진형이었다.

마치 크라우 혼자서 자신을 상대하는 것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상관없다.’

자르킨에겐 오히려 좋았다.

먼저 크라우를 박살 낸 뒤에 아론을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뭔가 번득이는 작전이라도 떠올린 건가?”

자르킨이 입을 열었다. 크라우는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주위의 마나를 계속해서 서클로 끌어들였다. 안 그래도 심한 부하를 받고 있던 서클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이렇게 하는 게 자신을 더욱 갉아먹는다는 걸 크라우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의 머리로도 자르킨을 막아낼 방법은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론을 믿는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아론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는 것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아론이면 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역할은, 아론이 안정적으로 신력을 쓸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크라우는 각오를 다진 뒤, 자르킨을 상대하기로 했다.

* * *

자르킨의 오러와 마법이 크라우에게 쇄도했다. 그의 공격은 매서웠고 빈틈이 없었다.

크라우는 전투 초반에 이 정도면 호각으로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예측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자르킨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크라우는 곁눈질로 아론을 바라봤다.

‘……아직인 것 같군.’

아론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그가 해내 주기를 바랐다.

‘최대한 길게 버텨는 주고 싶다만…….’

크라우는 슬슬 한계가 다가옴을 느꼈다. 자신은 점점 밀리는 반면, 자르킨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하는 수 없군.’

크라우는 결국 마지막으로 걸어 두었던 제한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서클에 새겨 두었던 마나 제한을 풀어버렸다.

휘오오-!

그런 뒤에 크라우는 주변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서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크라우는 고통을 참아내며 대량의 마나를 받아들였다.

“후우.”

넘치는 마나는 크라우의 호흡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숨을 내쉬자 푸른 기운이 그에 맞춰서 넘실거렸다.

“네 몸은 한계를 알 수 없구나. 역시 내가 점 찍은 그릇다워. 아론만 없었더라면 네가 그릇으로써 적격이었는데, 아쉽구나.”

크라우는 자르킨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흡수한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신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와도 같았다.

이는 크라우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상대가 단순히 기사라면 모를까, 자르킨은 검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크라우도 그를 따라갈 만한 신체 능력이 필요했다.

물론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마나와 오러는 발현에 있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러를 이용해서 신체를 강화하는 건 몸에 무리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를 이용하는 건 효율도 떨어질뿐더러 몸에 큰 충격을 주었다.

크라우는 효율이 좋지 않은 걸 무지막지한 마나로 상쇄하고 있었다. 과연 전투가 끝나고 얼마나 큰 후유증이 찾아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신체 능력을 끌어올린 덕분에 자르킨의 속도를 얼추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녀석을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만.’

크라우의 그런 염원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자르킨은 그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크라우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벌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발악은 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한 크라우는 방대한 마나를 바탕으로 거대한 불길을 토해냈다. 이제 크라우를 제한하는 것은 없었기에 마법의 위력이 상당했다.

공격이 날아오는 것을 본 자르킨은 즉시 배리어를 쳤다.

콰아앙!

두 힘이 충돌하며 큰 폭발이 일었다. 이윽고 크라우의 불길이 자르킨의 배리어를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후웅!

자르킨이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크라우의 불길이 그의 오러에 막히고 말았다.

‘조금만 더 하면 녀석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은데?’

크라우는 방금 공격보다 더 강한 마법을 시전했다.

화아악-!

뻗어져 나간 불길이 주변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면서 자르킨을 향해 질주했다.

화르륵!

거대한 불길이 자르킨을 집어삼키며 활활 타올랐다.

잠시 후, 불이 가라앉고 매캐했던 연기도 대부분이 날아갔을 무렵. 크라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자르킨은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갑옷이 불에 그을리고 탄 자국이 있었지만, 그의 몸에 큰 타격은 없었다.

이렇게 되리란 걸 크라우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허탈해지는 심정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모든 한계를 풀어버리고 날린 공격이었다.’

크라우가 전력을 다한 마법을 자르킨은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고 막아버렸다.

신력은 마나의 기원이었다. 두 힘이 부딪히면 마나가 약해진다는 걸 감안해도 이렇게 차이가 클 줄은 몰랐다.

“그게 네 마지막 발악인가?”

자르킨이 크라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그래도 나름 볼만했다. 하지만, 방금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 재밌는 건 앞으로 보기 힘들겠군.”

자르킨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에 배리어를 둘렀다. 동시에 그는 크라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속박 마법을 시전했다.

타앗!

자르킨은 땅을 박차고 크라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크라우는 동요하지 않고 우선 속박 마법부터 해제했다. 그런 뒤에 자르킨을 바라보며 녀석의 속도를 가늠했다.

‘이대로 피하면, 아론에게 피해가 간다.’

그렇기에 크라우는 녀석의 돌진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자르킨은 그의 생각대로 되게 두지 않았다.

콰르릉!

크라우의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자르킨이 낙뢰를 시전한 것이었다.

‘이런……!’

바로 위에는 번개가.

앞에는 자르킨이 있다.

지금 크라우의 상황에선 두 가지 공격을 모두 막는 게 불가능했다. 고작해야 하나가 최선이었다.

크라우는 피해를 입는 걸 감수하고 두 방향에 모두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파지직!

콰카칵!

위에선 번개가, 전방에는 자르킨의 검격이 짓쳐들어왔다.

크라우는 배리어가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걸 직감했다.

‘여기까진가.’

아론이 신력으로 마법을 시전할 때까진 버텨주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쨍그랑!

전방의 배리어가 깨졌다.

자르킨이 입가를 비틀며 검을 찔러 넣었다.

채앵!

하지만, 그의 검은 크라우에게 닿지 못했다. 새로 만들어진 배리어가 자르킨의 공격을 막아냈다.

콰쾅!

동시에 자르킨에게 공격 마법이 적중했다. 미처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자르킨은 몸이 멀리 튕겨 나가고 말았다.

“……아론!”

크라우는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것을 해낸 건 아론이었다.

‘설마, 해낼 줄이야.’

크라우가 제안한 도박이 성공한 것이었다.

***

아론의 주변에서 흰색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신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드디어…… 해냈다.’

아론은 새로운 충만감을 느꼈다.

크라우가 시간을 벌기 위해 자르킨과의 전투에 돌입한 이후로 아론은 어떻게든 신력만을 이용해 마법을 쓰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아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태껏 그가 사용한 마법은 모두 마나를 이용했었다.

그렇기에 마나를 빼고 오로지 신력만을 이용한다는 개념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우가 점점 밀리는 것을 보게 되자 아론은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크라우가 마지막 제한까지 풀고 전투에 나서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아론은 그럼에도 자르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최대한 빨리 자신이 신력을 쓰고자 노력했었다.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할까. 아론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자신의 펜던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 이용한다면…….’

펜던트 안에는 미티움 덕분에 거대한 양의 마나가 저장되어 있었다. 마나가 부족해지면 언제든지 여기에서 꺼내어 쓸 수 있었다.

‘펜던트는 주위의 마나를 흡수해서 저장한다. 그렇다면 내가 마나를 주입해서 보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론은 자신이 생각한 바가 묘수인지 헛수고인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마나를 모두 펜던트의 미티움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서클의 마나는 비게 되었고, 탈력감이 찾아왔다.

‘버텨야 한다.’

아론의 몸에 남아 있는 건 미량의 신력이었다. 마법을 쓰는 데 마나가 섞여들어 간다면, 그 마나를 모두 빼면 그만이었다.

‘가능할 것 같아.’

그의 몸속에 있는 신력의 양이 작아서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마법을 쓰는 것은 가능했다.

아론은 그제야 순수하게 신력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투콰앙!

마법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명 자르킨이 괴물 같은 반응 속도로 방어 마법을 펼치는 걸 아론은 보았었다. 그런데 그걸 뚫고 마법이 적중한 것이었다.

“……아론!”

게다가 크라우도 아직 버티고 있다. 그와 함께 힘을 합쳐 녀석과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역시. 방금 공격으로 죽일 순 없었어.’

아론은 자르킨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자르킨은 흉흉한 눈빛을 띤 채 아론을 응시했다.

“몇 번 더 맞았다가는 나도 정신을 잃어버리겠는걸. 이제 나도 사정 봐주지 않겠다.”

아론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상식 외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아론은 자르킨이 병 하나를 꺼내는 걸 보았다. 안에는 밝게 빛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저건……!’

아론은 정체를 알아차렸다.

빛의 검이라 불리는 수리야 소드의 미티움이 병에 담겨 있었다.

‘한데, 왜 검이 아니라 액체야?’

아론은 그 점이 이해 가지 않았다.

‘설마.’

아론은 순간, 머랭 영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기사 폴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마시고는 생체 골렘이 되어 아론과 맞서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르킨은 액체가 담긴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론은 자르킨의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한데.’

폴밴이 그랬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때 녀석은 힘을 얻는 대신에 지성을 잃어버렸었다.

하지만 자르킨에겐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복제된 미티움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자르킨의 힘이 늘어났다는 거였다.

이윽고 아론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 주변의 신력도 흡수하고 있잖아?’

아론의 두 눈에 주위의 신력이 자르킨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찔함을 느꼈다. 신력이 더욱 늘어나면 자르킨의 오러와 마법이 모두 강해짐은 자명했다.

자르킨은 힘이 늘어난 것에 만족한 듯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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