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코드로바 성 정문 부근.
메도우드와 아이젠의 병력들이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론이 안티 매직을 약화시켜준 덕분에 성벽 한 군데를 박살 내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아이젠의 병사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방패, 앞으로!”
철컹!
그들은 육중한 방패를 앞세우며 마도병들과 대치 중이었다.
방패에는 항마법 속성이 들어가 있는지라 마도병이 날린 마법은 수월하게 막을 수 있었다.
일반 병사에게 저만한 장비를 보급할 만큼 아이젠은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슈슈슉!
방패병의 뒤에서는 궁병들이 화살을 날렸다.
메도우드의 병사들은 아이젠의 저항이 참 드세다고 생각했다. 원래 성벽이나 성문이 무너지면 빠르게 진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젠이 이곳에 병력을 집중시킨 만큼, 이번 코드로바 전투에서 메도우드가 승리를 가져가게 된다면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화르륵!
워 메이지들은 쉴 새 없이 마법을 쏘아냈다. 그들이 멈추는 순간 기사들의 발이 풀리고, 마도병들이 제압당하고 만다. 그래서 워 메이지들은 마법을 중단하기 힘들었다.
한편, 총지휘관 랜튼 에드먼스는 전장의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받으면서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병력을 운용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전선을 뒤로 물릴 법도 한데, 참 질긴 녀석들이군.’
랜튼은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몰아붙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소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병력을 격전지에 몰아넣으면서 아이젠의 군세를 줄여나갔다.
‘아론은…….’
랜튼은 전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론이 큰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걸 느껴지는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마법사다. 대체 누구길래 저리 강한 거지?’
랜튼은 아론과 싸우는 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이젠이 흑마법 단체와 밀월 관계에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흑마력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상대가 흑마법사는 아니었다.
랜튼은 아론에게 지원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쪽도 총력을 기울여서 싸우고 있는 터라 불가능했다.
‘여기를 뚫어내는 게 아론을 돕는 것이다.’
랜튼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전장의 상황에 집중하려 했다.
콰아아앙-!
그때,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랜튼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허어…….”
그가 바라보는 곳에서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내 랜튼은 미소를 지었다. 아론이 이겼음을 직감했다.
‘믿기 힘들군.’
기세로 보아 둘은 호각이었다.
한데, 아론은 거대한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아론에게 지원을 가야 한다는 랜튼의 걱정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는 아론의 승리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지금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메도우드의 군세를 버티지 못한 아이젠의 병력이 슬슬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드로바에서의 전투를 종결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젠은 저렇게 후퇴한 뒤에 새로운 진을 꾸려서 저항할 게 분명했다.
‘아론 한 명으로 인해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랜튼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성벽도 뚫지 못하고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했을 터였다.
‘접전을 치른 아론은 많이 지쳐있을 것이다. 병사를 따로 꾸려서 그를 보호해야겠군.’
랜튼은 한 부대를 뽑아서 아론이 전투를 치렀던 지역으로 보내려 했다.
번쩍!
전방에서 난데없는 광휘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선두에 서 있던 수십 명의 마도병이 풀썩 쓰러졌다.
번쩍!
이내 한 번 더 빛이 일었고, 또다시 마도병들이 사지가 잘리며 나뒹굴었다.
그것은 마법도 아니었고, 순전히 기사 한 명이 발하는 일격의 오러였다.
“버, 버켄 님이 당했습니다!”
워 메이지인 버켄조차 단칼에 베어버리는 기사라니.
랜튼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
꿈틀.
아론은 구덩이 속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운이 좋았어.’
마지막 일격을 날리고 나서 아론은 마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잔여 마나로 땅을 파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녀석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정신이 제대로 박힌 마법사라면 마나가 다른 서클을 침범하게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러셀은 십중팔구 폐인이 되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마법을 썼다.
‘그렇게도 이기고 싶었나?’
몸을 버려서까지?
아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아론도 녀석의 힘을 능가할 만큼의 위력을 발휘해야 했고, 그만큼 무리를 했으니 몸에 타격을 입었다.
‘바로 전투를 하는 건 무리고, 휴식이 필요하겠군.’
그래도 이겨서 다행이었다.
러셀이 마지막 일격을 버텨냈다면 아론에게 대항할 패는 없었으니 말이다.
‘마나도 쥐꼬리만큼 남았군.’
아론은 남은 마나를 소중하게 쓰기로 했다. 치료 마법을 사용해 상처가 벌어져서 뼈가 보이는 곳을 임시로 닫고 지혈했다.
‘켄트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러셀과의 전투 도중에 켄트를 포함한 병사들을 대피시켰기 때문이었다.
켄트는 지원 마법에 특화된 만큼 그가 사용하는 회복 마법도 발군의 효과를 자랑했다.
‘나중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어.’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러셀의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허.”
아론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걸 맞고도 살아 있다고?’
신기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녀석의 상태는 만신창이였다.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대로 놔두면 알아서 죽을 목숨이었다.
“크허억!”
러셀은 쓰러진 상태에서 피를 토했다.
“실컷…… 발버둥 쳐 봐. 머지않아, 끝날 테니까.”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영문을 모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몸 상태를 보니 말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좀 알기 쉽게 말하는 게 어때?”
“……내가 아이젠에 붙은 이유.”
“명색이 에드먼스의 자제인데, 흑마법 단체를 이끌었다는 게 들통나니까 부끄러워서 도망친 거 아니었나?”
아론의 말에 러셀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그딴 수치는 견딜 만하지.”
“그럼 왜?”
“나는 봤거든. 트레벨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녀석을. 놈을 본 순간,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러셀은 퉤, 하고 입에 고인 핏물을 뱉고는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장담하지. 녀석은 첫째…… 아니, 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이길 수 없어.”
“어차피 죽을 거니까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건 아니고?”
“……마음대로 생각해라. 녀석이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하기 전에 차라리 그쪽에 붙는 것을 택했지. 그게 유일한 살길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러셀의 말은 진실일까. 진실이더라도 굳이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론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공작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공작이 누군가에 의해 쓰러진다는 사실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잘 생각해라. 지금이라도 그쪽에 붙는다면 너를 살리는 걸 고려할지도 모르지.”
“내 목에 칼을 들이민 녀석들 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데.”
“흐, 흐흐…….”
러셀은 아론의 대답을 듣고 나서 힘없이 웃었다. 이윽고 녀석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죽었군.’
아론은 러셀을 뒤로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쿠브가 파둔 땅길로 들어갔다. 이 길은 메도우드의 본대가 있는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티 매직도 없앴으니 본대는 돌파에 성공했을 거다. 나도 그쪽으로 가서 치료를 받고 마저 전투에 합류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땅길을 걸어 나갔다.
잠시 후, 끝에 도달한 아론.
‘여기는…….’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나온 곳은 아직 코드로바의 내부였다.
‘그래도 주위에 병사는 없다.’
전투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본대와 가까이에 있는 모양이었다.
‘……?’
순간, 아론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내뿜는 기운이 러셀보다 한 차원 위의 존재였다.
동시에 수십 명의 목숨이 아스러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론은 서둘러 움직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은 전투가 한창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인가?’
아론의 시선 끝에 한 명의 기사가 우뚝 서 있었다. 보자마자 강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자였다.
쉬익-!
그가 검을 휘두르자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이 오러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오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선두에 선 메도우드의 병사를 베어버렸다.
가공할만한 실력을 뽐내는 남자.
아론은 저 기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킬리안 자하르.’
아이젠의 제일검이라는 이명으로도 알려져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아론은 의문이 들었다.
‘저자가 여기에는 왜?’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는 국왕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아이젠의 왕성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만약 메도우드에서 수도를 기습하는 전략을 꾸렸더라면 어떻게 대응하려고 킬리안을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작이나 첫째가 직접 나선다면 충분히 실행 가능한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리안이 이곳에 왔다는 건 그만큼 여기서 성과를 거두고 싶다는 의미일 터.
‘이건 좀 위험한데.’
아론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사선을 넘는 전투를 치른 직후였다. 온전한 몸으로 킬리안과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마법사 대부분의 공격은 통하지 않을 거다.’
괜히 아이젠의 제일검이 아니었다. 그에게 하위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때, 킬리안이 고개를 돌려 아론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녀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론은 섬찟함을 느꼈다.
킬리안은 빠른 몸놀림으로 검을 휘둘렀다. 섬광이 번쩍였고, 아론을 향해 오러가 쇄도했다.
‘이, 이런!’
아론은 남은 마나를 짜내서 가속 마법을 사용해 오러를 피했다.
“허어, 허억…….”
무리한 움직임에 아론의 숨이 가빠졌다. 일단 첫 공격은 피하긴 했지만, 녀석이 고작 한 번만 공격할 리는 없었다.
‘역시나!’
킬리안은 재차 검을 휘둘렀다.
쐐애액-!
오러는 공기를 찢어발기면서 아론에게 날아갔다.
‘어쩌지?’
아론은 저 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아.’
사람이 가는 건 이렇게 순간의 실수구나 싶었다.
콰앙!
굉음이 울리며 지축이 흔들렸다.
아론은 숨을 헉하고 집어삼켰다.
‘아직…… 살아있다.’
아론은 자신의 사지가 멀쩡함에 안도했다.
‘배리어?’
자신의 앞에 배리어가 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킬리안의 공격을 거뜬하게 막아낼 마법사는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누구지?’
아론이 의문을 품은 순간.
“늦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론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동생을 잃을 뻔했어.”
아론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
크라우 에드먼스.
카이만 공작의 첫 번째 자식이자, 많은 사람들이 공작가의 차기 가주가 될 거라고 예상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잘 보이지도 않았고 행적에 관한 소문도 묘연해서 강하다는 것 말고는 정보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지금 아론의 앞에 있었다.
‘공작이 첫째를 활용할 거라는 걸 듣긴 했는데,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지.’
공작도 첫째를 투입하기 전에 코드로바를 점령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여튼, 크라우는 돌연 나타나서 아이젠의 제일검인 킬리안의 일격을 배리어로 막아냈다.
배리어가 막지 않은 부분은 박살이 나 있었다.
‘저 공격이 그대로 나를 덮쳤더라면.’
아론은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죽었을 거라는 걸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배리어…….’
아론은 자신의 앞에 전개된 배리어를 살펴보았다. 유심히 보니 스무 개의 배리어가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 만큼의 배리어를 만들고 압축시키다니.’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는 웬만큼 캐스팅 속도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행위였다.
“실력은 여전하구나, 킬리안.”
“……네가 나타날 줄이야.”
크라우와 킬리안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용무로 바쁜 게 아니었나?”
“아버지가 이번 일은 잠깐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하셨었거든.”
두 사람의 대화 자체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쿠구구……!
하지만 서로 언제든 맞붙을 수 있도록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비켜라. 내 목적은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있는 녀석이다.”
“그럴 수는 없겠는데? 친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거든.”
“언제 네가 형제를 챙겼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킬리안은 크라우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킬리안의 몸이 쏘아졌다. 크라우는 그 모습을 보고도 여유롭게 마법을 시전했다.
콰콰콰쾅!
오러와 마나가 부딪치면서 굉음과 불꽃을 동반했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쫓을 수도 없는 속도로 둘은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기사를 상대로는 내가 이길 수 없다.’
두 사람의 전투를 보고 있던 아론은 생각했다.
자신의 체력이 온전했더라면 어느 정도 할만할 것이다. 아론은 녀석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은연중에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킬리안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크라우도 대단하군.’
그는 킬리안과 호각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그것도 근접한 거리에서 말이다.
마법사는 접근전에서 불리하다는 상식을 실시간으로 깨트려주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감히 두 사람의 전투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함부로 행동했다간 저들의 전투에 휘말려서 육신이 온전하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전투가 끝이 날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타앗!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킬리안이 한 발 물러났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메도우드의 병력이 전략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를 지나갈 수 없으니, 다른 성벽을 공략할 셈인가.’
킬리안은 그것을 눈치채고는 크라우와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는 그라지만, 사방에서 포위당한 채로 싸우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콰앙!
킬리안은 오러를 발산해 상대의 추적을 봉쇄한 상태에서 빠르게 후퇴했다.
‘아버지가 내게 부탁한 건 코드로바의 점령을 도와달라고 한 거였으니까.’
크라우는 킬리안의 의중을 파악했기에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아론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다, 아론.”
“예. 형님.”
“아직 여기를 완전히 점령한 건 아니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자.”
크라우는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이곳에서 사라졌다.
***
성벽도 무너뜨렸고, 크라우도 합류한 상황이었기에 메도우드의 군세는 쾌속으로 코드로바를 휘저었다.
결국 성을 점령하는 데까지 시간은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다.
물론 모든 지역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젠으로 가는 길은 뚫어둔 상태였기에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총지휘관인 랜튼은 전투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그 자리에는 아론도 참가했다.
“다들 이번 공략에서 고생이 많았다.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특히…….”
랜튼은 아론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기 있는 아론의 공이 컸다. 이번에 내부로 빨리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론의 작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휘관들은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아론이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례지만……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결국 지휘관 중 한 명이 그 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자세한 사항은 비밀이기에 알려줄 수 없다. 다만, 그대들도 느꼈을 것이다. 그 견고하던 안티 매직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아……!”
“그래. 그걸 해낸 게 아론이다.”
이번 작전에는 아론의 업적이 컸다는 걸 총지휘관의 입으로 공언한 셈이었다.
랜튼은 아론이 어떤 방식으로 코드로바에 진입했는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아론이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번 전투를 통해 아이젠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확보했다. 이제 아이젠 녀석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거다. 우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수도까지 치고 올라간다.”
랜튼은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그렇게 말했다.
“메도우드에는 에드먼스의 강력한 병사들이 있다. 게다가 이번 전쟁에 크라우와 아론이 합류했으니 빠르게 종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병력의 현황과 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안건으로 나왔다.
아론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굳이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크라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론은 크라우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은 그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이 몸의 옛 주인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한 마디로…… 그래. 엄친아인 녀석이지. 이 표현 말고는 안 떠오르네.’
첫째 크라우에게는 부족한 점이 없었다. 재능이야 공작도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열심히 노력도 하니 실력이 출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모도 잘생겼지, 성격도 좋고 유쾌하다.
그야말로 만인지상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이는 철저하게 크라우가 만들어 낸 모습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러셀 역시 겉으로는 착한 척을 했지만 실제 속은 능구렁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런 놈들은 대화를 몇 번 나눠보면 티가 났다. 아론은 혹시나 이 몸의 옛 주인이 첫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역시…… 없군.’
이 녀석은 첫째와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빼어난 형이었으니까, 아론은 자격지심에 그를 피해 다녔었다.
‘한심한 녀석.’
쓸만한 정보는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결국 크라우와 직접 만나서 판단해야만 했다.
잠시 후, 아론은 그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크라우의 존재감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 많이 옅어져 있었다. 그가 일부러 기척을 지운 탓도 있겠지만, 킬리안과의 대결에서 힘을 많이 썼던 것도 이유였다.
확실히, 킬리안은 강적이었다. 전투를 마친 크라우에게 휴식을 강요할 정도이니 말이다.
‘뭐, 그건 킬리안도 마찬가지인가.’
아론이 나타나자 크라우는 그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어서 와, 아론.”
크라우는 웃으면서 아론을 맞이해 주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신기해하면서 아론을 관찰했다.
“솔직히, 네가 서열 3위까지 올라올 줄은 몰랐거든.”
그게 크라우의 생각이었다.
서열 3위 자리를 막내인 라크가 차지할 거라고 그는 예상했었다.
“뭐, 철이 좀 늦게 든 거죠.”
아론은 적당히 둘러댔다.
몸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오. 너, 신력도 쓸 줄 알잖아?”
요정족의 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크라우는 아론이 지니고 있는 신력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예비 경쟁자를 관찰하는 건지.’
아론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크라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틈을 타서 그의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원래 사람이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할 때, 그것을 쉽게 얻은 사람을 시기하기 마련이었다.
과연 첫째는 어떻게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신력을 이렇게 빨리 깨우치다니. 재능이 꽤 있나 보구나. 대단한걸.”
크라우의 그 말에 숨은 뜻은 없어 보였다. 문자 그대로 동생의 성장을 축하하고 있었다.
일단 아론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거두기로 했다. 굳이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상대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형님의 일에 대해선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포드 님으로부터 요정의 힘을 양도받아서 마계의 문을 지키고 계신다던데요.”
“으음. 너, 스라크도 만난 것 같은데? 희미하지만 그 요정의 기운도 느껴지거든.”
“아…… 네. 그분한테서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론은 스라크가 그런 기운도 알아차릴 수 있나? 하고 생각했다.
“나도 당시엔 충동적으로 받아들였거든. 집안에서 형제들끼리 경쟁하는 게 신물이 나서 말이지. 그래서 기분도 전환시킬 겸 나온 건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크라우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나름 이 일도 재밌어. 대륙을 지킨다는 보람도 있고. 또, 요정족의 힘을 알아가는 것도 즐겁거든.”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럼 너, 스라크한테서 책도 받았겠구나.”
“네. 근데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어서.”
“내가 알려 줄게.”
“……네?”
아론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크라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형제는 이런 건가? 아, 지구에서는 그렇긴 한데…….’
아론이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이자 크라우는 이상한 녀석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동생에게 뭘 가르쳐주는 게 잘못된 건가?”
“아,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너도 차기 가주 자리의 경쟁자니까 내가 도움을 주는 게 이상하다고 여기는 거구나.”
아론은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 점도 없지는 않았다.
크라우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후계자 경쟁엔 관심 없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과업은 마계의 문을 완전히 닫는 거니까. 그래야 나도 다시 내 삶을 찾을 수 있거든.”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글쎄다. 결국 마계의 문을 열고자 하는 녀석들을 없애야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트레벨 녀석들 말이군요.”
“그래. 아버지께 듣자 하니 너도 녀석들한테 쫓기는 모양이던데, 나랑 힘을 합쳐서 놈들을 처리하는 건 어떠냐?”
“저야 좋습니다만.”
크라우는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 * *
아론은 얼떨떨했다.
크라우가 같이 트레벨을 처리하자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러면 일단 너도 좀 강해져야 할 테고, 스라크한테서 받은 책을 빨리 가르쳐줘야겠구나.”
“방법이 있습니까?”
아론은 궁금했다.
스라크의 책은 요정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스승인 포드조차도 해석에 실패했다.
“그럼. 나도 힘을 양도받은 후에 놀고만 있던 거는 아니니까. 신력을 연구하면서 어느 정도 원리를 파악했어.”
아론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첫째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직접 그걸 마주하니 더 크게 다가왔다.
‘스승님을 뛰어넘기에도 까마득하다고 느꼈는데, 크라우는 한술 더 뜨는군.’
포드는 오랜 기간 요정어를 공부했는데도 책의 해석에 실패했다. 그걸 크라우는 해낸 것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니 저런 결과가 나온 셈이었다.
‘스라크가 크라우의 재능이 에르파와 견줄 만 하다고 말했었는데 말이야.’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책이 뭐에 대한 건지는 아니?”
“아뇨. 단순히 책만 받은 거라서.”
아론은 요정어를 읽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엇에 관한 책인지 몰랐다.
“마법의 캐스팅에 대한 요정족의 연구 내용이 적혀 있지.”
“그렇군요.”
“그 책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캐스팅 없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네?”
아론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캐스팅 없이 마법을 쓴다고?
“그, 그렇지만. 캐스팅은…….”
“많이 당황한 것 같네. 네가 생각한 대로 마법을 발현하는 데 있어서 필수 과정이지.”
크라우의 말대로였다.
정확한 마법의 발현을 위해서는 캐스팅을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술식을 구성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술식이 많은 고위 마법은 캐스팅 시간이 길었다.
물론 마법사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었다. 사람마다 계산 능력은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해.’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었기에 감히 시도해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마법사가 기사와의 접근전에서 불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캐스팅 시간 동안에는 기사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캐스팅이 없으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
그래서 많은 마법사들이 캐스팅 과정 자체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스라크는 해냈다고?’
크라우는 스라크가 준 책을 이해하게 되면 캐스팅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었다.
그 말은 즉, 스라크는 이미 해냈으니까 그 결과를 책에 적었다는 뜻이다.
“스라크는 어떻게 캐스팅을 없앤 겁니까?”
아론은 곧장 본론을 물어보았다.
“그는 술식을 구상하는 단계를 아예 뛰어넘어 버렸어.”
“예, 예?”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술식을 쓰지 않고 마법을 발현한다고?
아론은 크라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기에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면, 직관이야.”
“직관……?”
“그래. 마법의 구성을 계산하지 않고, 직관으로 구성해버리는 거지.”
아론은 어안이 벙벙했다.
마법에서 직관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어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계산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직관이 발동하는 거지. 원래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다룬다고 생각하면 편하려나.”
크라우의 말은 믿기 힘들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걸 말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아론은 내용 자체에 의혹을 품지는 않았다. 그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의 기사인 젠슨과 일전을 벌였을 때, 그는 포드가 주었던 신묘한 팔찌의 힘으로 캐스팅이 거의 없다시피 마법을 썼었다.
아론은 그 감각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처럼 다시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기사와의 전투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아론은 크라우가 말하는 내용이 탐이 났다.
“내가 말했던 거를 유념해서 양손에 각각 불꽃을 피워 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우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지리라고 예상했다. 말로는 쉽지만 깨우치기 어려운 게 스라크의 방식이었다.
‘나도 스라크에게 종속되어 있으니까 이걸 쓸 수 있는 거지.’
크라우도 마계의 문을 닫고 종속이 끝났을 때, 그의 도움 없이 원리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론에겐 조금 힘드려나.’
예상한 대로 아론은 잘 해내지 못했다. 불꽃을 피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의식적인 계산이 들어갔다는 걸 크라우는 알 수 있었다.
“……어렵네요.”
아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태껏 자신이 마법을 써왔던 것과 다른 방식이다. 쉬울 리가 없었다.
“나도 금방 될 거라고 생각해서 알려주는 건 아니야.”
아론은 심기일전한 뒤 계속해서 캐스팅 없이 마법을 쓰는 것을 시도했다.
“으음. 내가 계속 지켜보면서 교정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간상 무리일 것 같아.”
아론은 크라우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는 이번 전쟁의 판도를 뒤집기 위해 참가했다. 그가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신 이걸 줄게.”
크라우는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 꺼내 아론에게 주었다.
“이건 내가 스라크의 책을 읽고 나름대로 번역해 본 거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베낀 건 아니지만, 내가 이해한 내용만 번역해서 적어뒀어.”
“아…… 감사합니다.”
“너 정도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 책을 보면서 계속 연습하도록 해.”
아론은 책을 받아들고 꾸벅 인사한 뒤 크라우의 방을 나섰다.
끼익-.
문이 닫히는 걸 본 크라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대단한걸.’
아론은 결국 스라크의 직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그가 하는 걸 보니 의외로 빨리 습득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중력도 놀라운 수준이야.’
크라우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론은 의기소침하고 우물쭈물해 하는 어린아이였다. 자신이 집을 떠나고 나서는 망나니가 되었다는 소식만을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아니었다.
‘의지가 상당해.’
무엇이 아론을 저렇게 채찍질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론의 미래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며칠 뒤, 아론은 회의에 소집되어서 참석했다.
‘첫째도 와 있군.’
아론은 그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묵례한 뒤 자리에 앉았다.
“회의를 시작하겠다.”
랜튼이 입을 열자 지휘관은 각 부대의 현재 상황에 대해 차례대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어차피 자신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부대라서 굳이 발언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입니다!”
마지막 부대까지 보고가 끝났다.
랜튼은 주위를 한번 슥 둘러본 뒤 말을 꺼냈다.
“코드로바에는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있다. 하지만 녀석들도 함부로 공격해 오진 못 할 것이다. 굳이 지형의 이점을 버리면서 나오진 않겠지.”
어차피 코드로바 외곽의 험준한 지형에 남아 있는 녀석들이었다. 지휘관들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북문까지 길은 확보해 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아이젠의 수도로 갈 예정이다.”
물론 코앞에 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몇 개의 성을 더 뚫고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아이젠의 병력은 강하다. 그 점은 명심해야 한다.”
“예!”
“그래도 우리가 공격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
랜튼은 그렇게 말한 뒤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동시에 몇 개의 성을 공격해 녀석들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단 성은 어떻습니까? 녀석들의 주요 물자인…….”
“자칼 성도 경로에 넣어주십시오!”
지휘관들 사이에서 몇 개의 성 이름이 나왔다. 다 공격하기에 적당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으음.”
랜튼은 잠시 고민했다.
“이곳이 좋겠군.”
탁, 탁, 탁.
그는 지도에서 세 지점을 짚었다.
“스테판, 롬바크, 그리고 뤼튼. 앞에 두 개는 병력 분산용이다. 우리의 주요 목표는 여기, 뤼튼 성이 될 것이다. 혹시 다른 의견 있나?”
랜튼의 물음에 다들 침묵했다.
총지휘관의 제안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이젠 왕국은 국토의 특성상 쭉 늘어져 있는 성들을 모두 방어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코드로바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여기만 지키면 아이젠을 지킬 수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뤼튼 역시 전략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죠. 집중 공격한다면 빠르게 뚫어낼 수 있을 겁니다.”
지휘관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아론은 말없이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산.’
뤼튼 성의 부근에 있는 산.
아론은 그 지역이 걸렸다.
만약 공성전이 시작된다면 상대 병력이 저 산을 이용할 수 있었다.
‘만약 산에서 병력이 튀어나오면, 메도우드 군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론은 꺼림칙했기에 일단 입을 열기로 했다.
“뤼튼 성이 중요하다는 건 아이젠 측도 알 겁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어떻게 공격해 올지도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아론이 발언하자 지휘관들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이름은 모르겠지만 저 산 말입니다. 만약 공방이 진행되고 있을 때 저기서 상대 병력이 튀어나온다면 허리가 끊기는 형세인데,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아…… 저기는 산세가 아주 가파릅니다. 특히 아이젠 쪽에서 등반하려면 절벽이나 다름없어서 불가능한 선택입니다.”
아론의 발언에 지휘관 중 한 명이 설명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이젠 녀석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 산을 이용할 것 같단 말이지.’
아이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산을 이용하면 메도우드의 병력을 단숨에 두 동강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제가 이끄는 부대는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코드로바 공략 때도 그는 기상천외하게 움직였지만 결국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
아이젠 측도 코드로바가 뚫려서 비상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메도우드 병력을 막기 위해 방법을 짜내야 했다.
연일 중진 회의가 열렸고, 그럴수록 아이젠의 1왕자는 초췌해져 갔다.
‘아버지가 직접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
왕실 내에서 도는 소문은 언젠가 일어날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1왕자는 불안했다.
최대한 자기 선에서 이번 전쟁을 끝내고 공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면 안전하게 차기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개입하면……!’
자신을 증명할 계획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상 메도우드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랬기에 1왕자는 귀족들의 작전 회의에 참여해서 의견을 들었다.
귀족들은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러던 중, 메도우드의 병력이 공격할 다음 지역은 어디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메도우드가 뤼튼 성에 병력을 집중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녀석들이 작정하고 온다면 못 막습니다.”
그때, 여태까지 조용히 있던 귀족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로즈힙 산을 이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저길 어떻게…….”
누군가가 반대 의사를 내려 했지만, 발언자가 누구인지 알고는 말끝을 흐렸다.
“아아, 그래! 그곳이 있구나!”
1왕자는 손뼉을 쳤다.
“세니안. 자네의 영지는 산악병들로 유명하지.”
“그렇습니다. 영지의 바깥 지형이 험하다 보니, 저희 병사들에게 로즈힙 산맥을 오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좋다. 메도우드 군세가 들이닥치는 순간, 자네가 자랑하는 산악병들을 출진시키거라.”
“알겠습니다, 왕자님.”
1왕자는 부디 세니안이 이끄는 병사들이 메도우드에게 뼈아픈 한 방을 먹여주길 바랐다.
* * *
메도우드와 아이젠의 관계는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앙숙이었다.
서로 간에 힘의 규모는 시기마다 비슷했다. 특히,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기에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해왔었다.
전쟁이 끝나면 두 국가가 어딜 점령했냐에 따라서 지도가 바뀌었다. 두 나라의 국력이 워낙 컸기에 전쟁에 휘말려 속국이 되는 나라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치렀던 전쟁이 약 100년 전이었다. 당시에 메도우드는 코드로바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아이젠의 진격에 그만 지역을 내어주고 말았다.
원래라면 코드로바는 여전히 메도우드의 땅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메도우드가 뤼튼 성에서 밀려나자마자 판도가 급격히 바뀌고 말았다.
그 결과 아이젠이 코드로바를 점령하고 종전을 맺었지만, 득실로 따지면 아이젠의 판정승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젠에게 있어 뤼튼 성은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코드로바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기에 그들은 뤼튼 성의 수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코드로바를 점령하기 전에 이곳을 차지했으니, 그 반대로 이용될 확률도 컸다.
그래서 아이젠은 전쟁이 끝나자 뤼튼 성의 수비를 위해 궁리했다. 일대의 지리를 샅샅이 조사한 결과, 인접한 로즈힙 산이 수비에 있어 핵심 지역임이 드러났다.
상대가 공성을 위해 밀고 들어올 때, 로즈힙 산을 타고 병력을 이동시키면 자연스럽게 공격해 온 상대를 양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뤼튼 성에서 로즈힙 산을 오르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지형은 일반적인 사람이 오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비하는 측은 저 산을 이용할 수 없다. 아이젠은 오히려 그 허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십 년 전부터 뤼튼 성에서 산악병을 양성해 훈련시켰다.
산악병들은 항상 산을 타면서 전쟁이 일어날 때를 대비했는데, 드디어 이번 기회를 빌려서 첫 실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타다닥!
산악병들은 험준한 산을 마치 평지를 이동하듯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기사들과 달리 철갑이 아닌 가죽 등으로 가볍게 무장한 덕도 있었다.
게다가 산악병 개개인의 실력은 아이젠의 기사들과 맞먹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분명 첫 실전이건만, 익숙하다는 듯이 산을 탔다. 이게 가능한 것도 실전과도 같은 훈련 덕이었다.
‘이들은 발에 바퀴라도 달고 있는 것인가? 속도를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군.’
아이젠의 1왕자는 소수의 기사를 대동한 채 산악병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아이젠에서도 꽤나 강한 축에 속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산악병들을 따라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후우, 후우.”
1왕자는 숨을 고르면서 달렸다.
몸은 힘들지만 산악병을 보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저들 덕분에 이런 작전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들 훈련이 잘되어 있어.”
“언제라도 투입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갈고 닦았습니다. 저희는 이번 기회를 빌어서 출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1왕자의 평가에 산악병을 이끄는 야콥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면 메도우드가 공격을 하기 전에 내려가서 매복도 할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저희 산악병들의 이동속도로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기대하겠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마땅한 공을 치하하겠네.”
“옙!”
산악병들은 로즈힙 산을 질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다른 불청객에 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움직이고 있다.’
그 불청객의 정체는 아론이었다.
그는 쿠브의 힘을 이용해서 산악병의 발소리와 1왕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쿠브에게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쿠브는 요정족의 로드를 만난 이후로 놀랄 만큼 성장한 상태였다.
신의 화신이라는 설명을 들었었는데, 그에 걸맞은 잠재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힙 산은 그 악랄한 지형 덕분에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지의 형태가 온전했고, 이런 곳은 쿠브의 힘을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쿠브는 땅으로 전달되는 미세한 소리나 진동을 증폭시켜서 아론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
덕분에 아론은 로즈힙 산의 초입에서 매복한 채 그들의 움직임과 소리를 엿듣는 게 가능했다.
쿠브의 힘에는 어떠한 마법의 개입도 없었으니, 아이젠 측에서 눈치를 채는 건 어려웠다.
아론은 놈들과 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뒀었다. 전투가 일어나리라고 예상되는 곳곳에 함정도 만들어 두었다.
‘아마 녀석들은 우리들의 뒤를 칠 수 있어서 좋다고 싱글벙글하는 상태겠지.’
하지만 그들은 아론의 힘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수에 당하는 건 너희들이 될 것이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
아이젠의 산악병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로즈힙 산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 속도도 놀라웠지만 발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지를 통해 전달되는 진동을 줄일 수는 없었다. 그 진동은 그대로 쿠브에게 전달되었고, 아론은 녀석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론은 매복한 병사들에게 신호했다. 병사들은 신호를 확인하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언제든 설치된 함정에 마나를 주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론은 병사들에게 신호에 집중하라고 주의를 줬었다. 마나를 너무 빨리 주입하면 아이젠에서 눈치를 챌 것이고, 너무 늦으면 함정의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함정 근처에 도착한 순간, 병사들이 동시에 마나를 주입해 함정을 발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론은 병사들의 태세를 확인한 뒤에 자신도 준비를 했다.
스스슥-!
허공에 무수히 많은 매직 애로우가 생성되었다. 상위 마법은 쉽게 탐지될 확률이 있었기에 아론은 낮은 서클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 장면을 본 워 메이지 라프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하위 마법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많은 마법을 동시에 띄우는 건 힘들었다.
게다가 마나의 흐름이 자연의 마나와 동화되어 있었다. 즉, 마법을 발현시켰다는 사실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아론은 아이젠의 산악병들이 설치된 함정 안쪽으로 들어왔다고 판단해 병사들에게 마나를 주입하라고 신호를 내렸다.
쿠구구구!
산악병들의 뒤로 거대한 돌벽이 솟아났다. 그 결과 그들이 내려왔던 길목이 아예 차단되어 버렸다. 퇴로가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치지직!
그와 동시에 바닥에 설치되어 있던 철제봉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러한 철제봉이 여러 개 심어져 있었다. 스파크는 봉끼리 연결되어 거대한 체인 라이트닝을 이루었다.
휘리릭-!
가장자리에서는 윈드 커터가 날아다니면서 산악병들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끄아악!”
“커억!”
순식간에 100명에 가까운 산악병이 함정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것도 그들이 노련하게 대비를 해 둔 덕이었다. 마나의 미세한 진동이 감지된 순간 재빠르게 방어 태세를 갖췄었다. 그래도 피해가 생기는 걸 막을 순 없었다.
하지만 공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론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매직 애로우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슈슈슉!
허공에 멈춰있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매직 애로우는 산악병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갔다.
콰쾅!
이어서 대상에 적중한 화살이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매직 애로우가 발사되는 순간 붉게 빛난 이유가 아론이 화염 속성을 추가한 결과였다.
아론의 이러한 준비 덕분에 산악병들의 상태는 혼비백산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진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퇴로는 아론이 돌벽을 설치해서 차단되어 있었다.
결국 산악병들의 선택은 양옆으로 넓게 퍼진 뒤에 전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악병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매복해 있던 마도병들이 나타나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콰각! 콰가각!
화르르르!
사방에서 오색찬란한 마법이 쇄도하자 산악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들이 아이젠의 기사단이었다면 항마 처리가 된 두꺼운 갑옷으로 마법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산악병은 기동력을 중시하기 위해서 얇은 방어구를 입은 게 오히려 패착을 이끌었다.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던 거지?’
산악 부대의 대장인 야콥은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메도우드는 당연히 이쪽 길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떻게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 메도우드 녀석들이 미리 매복까지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기가 초입이라고 해도 지형이 다른 산에 비해 험해서 들어오기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야콥은 죽어 나가는 산악병들을 보며 전황을 어떻게 뒤집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서걱!
빠르게 날아든 돌풍 마법에 목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론의 마법에 신력이 더해지니 대장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구심점이 무너졌으니 산악병들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다.’
아론은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산악병들은 점점 사기를 되찾고 분전하기 시작했다.
아론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젠 1왕자의 통솔력이었다.
그는 대장인 야콥이 죽자마자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이끄는 기지를 보여주었다.
‘곤란한데.’
산악병들은 더 이상 밀리지 않고 전선을 유지했다. 덕분에 마도병들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근접전은 마법을 쓰는 쪽이 불리했다.
이런 전황은 아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아론은 전장을 탐색하면서, 새로운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게 아이젠의 1왕자임을 알아차렸다.
‘저 녀석을 쓰러트리면, 산악병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전장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1왕자를 향해 접근했다.
* * *
아론은 1왕자를 전장에서 배제하는 속도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거라는 걸 확신했다.
‘저깄군.’
잠시 후, 1왕자의 근처에 다다른 아론. 1왕자 역시 아론이 접근한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아론 에드먼스군.”
1왕자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아론을 바라봤다.
“조르바 아이젠.”
아이젠의 1왕자, 조르바 아이젠.
아론이 느끼기에 그의 순수 실력은 러셀과 비슷했다. 즉, 무시할 수는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지금의 나는 체력이 거의 온전한 상태니까.’
아론은 상대가 기사임을 감안해도 해볼 만한 전투라고 생각했다.
“잔챙이들과는 다르게 예우를 갖춰서 싸워줘야겠지.”
철컥.
조르바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자신이 원래 들고 있던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그러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두 번째 검을 칼집에서 꺼냈다.
‘저 검은……!’
아론은 녀석이 꺼내든 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미티움으로 만들어진 검. 조르바는 칠검 중 하나인 찬드라 소드를 들고 있었다.
‘조심해야겠어.’
칠검은 고유의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아론은 아직 그 정체를 모르니 신중히 접근하자고 생각했다.
조르바가 먼저 아론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아론은 녀석의 다음 움직임에 주의하며 막아낼 준비를 했다.
조르바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아론은 긴장한 채 뒤이어 일어날 반응을 살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아론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의 본능이 경고했다. 위험하다. 아론은 즉시 배리어를 전개했다.
콰콰쾅!
육중한 공격이 아론을 향해 쇄도했다. 급하게 친 배리어라 방어력이 낮았고, 약한 부분을 오러가 뚫고 들어왔다.
아론은 위기를 느끼고 몸을 뒤로 한 발 뺐다. 방금까지 목이 있던 자리에 오러가 훑고 지나갔다.
‘어떻게 공격한 거지?’
조르바가 펼친 신묘한 공격. 그것은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공간에 개입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아론이 느끼기에 그는 단순히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이걸 막아?’
한편, 조르바도 내심 놀라워했다. 대부분은 자신이 공격한 것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는데, 아론은 실력이 있다는 증거였다.
‘저건……?’
조르바의 시야에 얇은 마나의 실이 보였다. 그것은 아론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었다.
‘내 공격을 알아차린 게 저것 때문인가.’
그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아론은 쉽게 눈치챌 수 없는 마나의 실을 뿌려놓고 공격을 미리 감지한 거였다.
“들은 대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마나 컨트롤이군.”
조르바가 나지막이 말했다.
일전에 7왕자인 바르트한과 아론이 대련한 적이 있었다. 바르트한은 그 당시 자신이 느꼈던 것들을 조르바에게 말해주었다.
[아론의 마나는 여태껏 대련했던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르니 조심하시오.]
실제로 마주해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물론 감상을 들은 아론의 심정은 편치 못했다.
그가 미리 펼쳐 놓은 마나의 실은 짧은 범위의 공격을 모조리 감지하는 마법이었다.
‘일리아의 공간 마법도 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었는데…….’
하지만 조르바의 공격은 이걸 펼친 상태여야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즉, 일리아의 마법보다 훨씬 빠르다는 뜻이었다.
‘속도를 더 올려야겠군.’
조르바는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에 가한 일격을 힘겹게 막았지만, 동일한 속도로 공격하면 아론도 익숙해질 게 분명했다.
‘함부로 접근하긴 힘들어.’
아론은 녀석과의 거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아직 조르바의 공격이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걱!
조르바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아까랑 똑같은 공격이다.’
아론은 녀석이 검을 움직인 즉시 가속 마법을 사용했다. 마나 소모가 큰 마법이었지만 조르바의 공격 방식을 알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후웅!
아론의 후방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살기. 아론은 즉시 배리어를 쳤다.
콰카칵!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오러가 배리어를 두들겼다. 이번에도 조르바의 공격은 무지막지했다. 아론은 간신히 오러를 막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공격하는 거야?’
아론은 당황했다.
이번에는 가속 마법도 썼는데 정확한 공격 원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것도 피해?’
조르바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의 악독한 취향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아론을 상대로 시험해보고 싶었다.
‘계속 버티다간 부러질 거다.’
조르바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공격의 난도를 올려 보기로 했다.
타닥!
조르바는 발을 구르며 아론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런 뒤 검을 휘둘러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갑자기 들어온다고?’
아론은 찰나의 순간 녀석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했다. 배리어를 치기엔 늦었다. 그래서 아론은 즉시 바닥을 굴렀다.
휘익!
녀석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쿠콰카칵!
갈 곳을 잃은 오러가 방금까지 아론이 있던 바닥을 터트렸다.
‘어?’
아론은 자신의 뒤에서 짓쳐 들어오는 또 하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기운은 분명히 조르바의 것이었다.
‘이건…… 막을 수 없어!’
배리어는 당연히 이 자세에서 전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몸을 날려도 완전히 저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그래. 팔 하나는 내주마.’
아론은 각오를 다진 뒤에 몸을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우웅-!
그때, 아론의 눈에 보이는 배리어. 그가 펼친 것은 아니었다.
콰쾅!
조르바의 공격이 배리어와 충돌했다. 배리어는 금방 깨졌지만, 아론은 그 틈을 이용해서 온전하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누구지?’
아론은 이내 켄트가 친 배리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아론이 위기에 처한 걸 파악하고는 아론을 도와준 것이었다.
‘저 녀석이…….’
조르바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청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적의가 켄트를 향하기 시작했다.
조르바가 켄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아론은 쿠브를 이용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쿠구구!
산발적으로 돌벽이 생겨나며 조르바의 진로를 방해했다.
“눈앞에 집중하는 게 좋을걸.”
“흥. 방금까지만 해도 꼴사납게 바닥을 구른 녀석이.”
조르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론은 몸을 일으키며 그를 바라봤다.
‘나를 죽이려면 단숨에 끝냈어야 했어.’
아론은 타고 난 마나 친화력으로 전투를 통해서 상대의 공격 방식을 학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아론이 이길 확률은 계속해서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
물론 아론에게 조르바가 버거운 대상임은 자명했다. 아직 그가 어떤 술수로 저렇게 신출귀몰한 공격을 하는지 알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녀석의 검로가 조금씩은 보였다. 연속적으로 공격이 들어와도 아론이 위기에 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르바가 아론의 측면을 노리고 검을 휘둘러왔다.
아론은 배리어를 펼쳐서 공격을 막으면서 거리를 벌렸다.
‘녀석의 공격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아론은 여태까지 겪은 것을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조르바가 검을 휘두르면 중간에 검이 사라지고 아론의 근처에서 불쑥 나타난다.
얼핏 보면 공간 마법을 이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기사였기에 마법의 가능성은 배제했다.
‘뭐, 몰래 녀석을 돕는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겠다만.’
적어도 주위에서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마법을 쓰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잠깐만.’
아론이 무언가를 떠올렸을 때.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한번 조르바가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그 칼날은 아론의 사각지대에서 불쑥 나타나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조르바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칼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살갗을 꿰뚫는 느낌이 아니었다.
조르바가 칼을 빼내자 흙더미가 후두둑하고 떨어졌다. 그 정체는 아론의 몸에 칼이 닿기 직전에 쿠브가 두른 일종의 모래 갑옷이었다. 그것은 쿠브의 본체나 다름없었기에 조르바의 공격을 한두 번 정도 막을 수준은 되었다.
방금 공격 덕분에 아론과 조르바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조르바는 당장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황.
파지지직!
아론은 즉시 번개 마법을 날렸다. 총 10발의 뇌전이었다. 하나하나가 닿는다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거면 먹히겠어!’
하지만 아론의 생각과 달리, 조르바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스슥!
조르바의 뒤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거기서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번개와 격돌해 맞받아쳤다.
아론은 그 광경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기사가 충분히 강하다면 오러를 이용해 마법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조르바는 어떤 동작도 없이 검을 휘둘렀고, 속도조차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론은 이번에 조르바가 마법을 튕겨내는 걸 보고 녀석이 어떻게 공격을 할 수 있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굳이 녀석의 몸 뒤편에서 검이 나올 이유가 없지.’
조르바가 공간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면 마법이 날아오는 중간 지점에 검이 나오게 해서 마법을 방어하는 게 더 수월했다.
그리고 검을 이용해 공격을 할 때도 자신의 뒤나 옆에서 칼날이 쇄도해왔다.
‘이유 없이 이러지는 않겠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조르바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녀석의 반격도 무사히 막아냈으니, 이제는 정말로 끝장낼 생각이었다.
쉬익-!
휘둘러진 검은 조르바의 예상대로라면 아론의 아킬레스를 절단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휘두른 검은 아론의 발밑에서 나오지 않았다. 칼날은 생뚱맞게도 아론이 서 있는 옆에서 튀어나와 허공을 찔렀다.
아론은 조르바의 얼굴을 살폈다. 여태까지 여유로웠던 그가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역시.’
아론은 자신의 발밑에 라이트 마법을 켜두었다. 그 덕분에 그림자가 옆으로 비스듬히 생겨났다.
‘찬드라 소드의 능력이 이거였구나.’
검을 휘두르면 그림자를 이용할 수 있었다. 녀석의 공격 원리를 안 이상, 승기는 아론 쪽으로 넘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