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아론은 계획을 마치고 나서 즉시 움직였다.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만큼 속도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메도우드의 남부에 위치한 대도시, 로그하임을 찾아갔다.
이번에 처리해야 할 일은 은밀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혼자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여기도 분위기가 좋지는 않네.’
아론은 로그하임에 들어서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안 그래도 부산스러운 도시였다.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피난 온 사람이며, 그 사람들을 노리고 장사를 하러 온 사람 등등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서 아론에게는 더욱 좋았다. 이 인파에 숨어서 움직이면 남의 눈을 속이기에 제격이었다.
“한 푼만 주십시오.”
아론은 길을 걷던 중 구걸을 하는 어느 거지를 보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쳤다.
아론은 거지에게 다가가 동화를 몇 개 주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몰래 거지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거지의 정체는 변장한 이웨카 길드원이었다.
아론은 거지로부터 멀어져서 쪽지 내용을 확인했다.
[17번 거리, 달빛의 이정표, 5번 테이블]
쪽지에는 가게 이름과 위치가 적혀 있었다.
아론은 그 가게를 찾아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5번 테이블이랬지.’
아론의 시야에 두 남자가 맥주를 마시고 있는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분명 한 쪽은 셀린일 텐데.’
아무래도 남장을 한 모양이었다.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감쪽같이 속을 정도의 위장이었다.
아론은 위화감 없이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합석했다.
“전혀 몰라보겠는걸.”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셀린은 웃으면서 아론을 맞이했다.
“제 요구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은 반대편에 앉은 남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뭘. 왕국의 은인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 남자의 정체는 변장을 한 쿠르트였다.
아론이 굳이 번거롭게 먼 도시에서 은밀하게 움직인 이유도 쿠르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침 쿠르트와 타이밍이 맞았다. 대륙에 전운이 감돌자,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드워프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론이 만날 것을 요구하자 쿠르트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빌려주신 마차와 조명탄은 잘 썼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일세.”
물론 일방적으로 도움 받은 건 아니었다. 곧 메도우드와 아이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려준 덕분에 그들도 대륙에 남은 드워프들을 빠르게 대피시킬 수 있었다.
“이번에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들었네만.”
“예. 염치없게 계속 요구해서 죄송스럽습니다.”
“아닐세. 우리도 아이젠에 좋은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아론의 힘을 빌려 그들을 정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드워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납치했던 사건의 배후에는 아이젠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린데란트를 뒤집어 놓았던 오크 킹 역시 그 녀석들의 짓이리라.
“비행선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대가는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비행선이라…….”
아론의 요구에 쿠르트는 잠깐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뭐를 빌려 가나 싶었는데 비행선이 나올 줄은 몰랐었다.
‘괜찮겠지.’
이내 쿠르트는 속으로 결정을 마치고는 아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겠네. 다만 지금 대륙에서 쓰고 있는 건 빌려줄 수 없다네. 그건 드워프들의 대피용으로 써야 해서 말일세. 대신 격납고에 있는 구형 비행선을 빌려주겠네.”
“어느 정도 인원이 탈 수 있습니까?”
“인간 기준으로는 100명 정도 탈 수 있겠군. 다만 지금 쓰는 것과 다르게 공격 능력은 없다네. 단순히 이동용이지.”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론은 쿠르트에게 예를 다해 감사를 표시했다.
“꽤 오랫동안 쓰지 않았으니 정비가 좀 필요할 걸세. 시간을 좀 주게.”
“얼마 정도 걸릴까요?”
“일주일이면 충분하네.”
“좋습니다.”
“한데, 비행선은 어디에 쓸 생각인가?”
쿠르트의 말에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 주점에는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정보원으로 보이는 녀석은 없었다.
아론은 혹시나 싶어서 셀린에게 시선을 보냈다.
“저희 정보원들이 외부에서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근처에 도달한 다른 정보원은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쿠르트를 바라보았다.
“제 병사들을 이끌고 비행선을 이용해 코드로바의 후방에 침투할 생각입니다.”
“으음. 그거 재밌는 발상이구만.”
아직 대륙의 인간에게는 비행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아론의 발상이 흥미롭게 들렸다.
물론 지구인인 아론에게는 아주 기초적인 생각이었다.
“무운을 비네.”
“감사합니다.”
아론은 주점을 나갔다. 셀린 역시 쿠르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
아론은 비행선이 준비되기 전까지 로그하임에 머물기로 했다. 병사야 공작가에서 준비해 줄 거고, 그가 할 일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거였다.
그는 펜던트를 꺼냈다.
거기에는 네 개의 보석이 박힌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네 번째 칸에 있는 바유 소드의 보석은 얼마 전에 획득한 것이었다.
각기 불, 물, 땅, 그리고 바람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마법의 기초적인 4원소라 불리는 속성들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은 이 네 개의 원소로 분류할 수 있었다.
이번에 얻은 바유 소드 덕분에 아론은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마법에 칠검의 힘을 빌리는 게 가능했다.
휘오오-
아론은 가볍게 바람 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펜던트에 박힌 바유의 보석이 은은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전에 썼던 바람 속성 마법보다 강해진 느낌이다.’
아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배운 융합 마법의 원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쿠구구……!
땅을 부숴서 돌을 허공에 띄웠다. 펜던트에서는 황금빛이 발하고 있었다.
이내 떠오른 돌들이 불고 있는 바람과 합쳐졌다. 바람은 돌을 날카롭게 벼리며 회전시켰다.
마치 원래 하나의 마법이었던 것처럼 힘을 내고 있었다.
‘여기에 신력을 섞고 규모를 키우면 쓸만한 마법이 되겠어.’
아론은 마법을 끝내며 미소지었다. 확실히 펜던트에 네 개의 원소가 모여 있으니 강한 힘을 발휘해 주었다.
잠시 후, 아론은 일정대로 셀린을 만났다. 그녀는 코드로바에 대해 입수한 정보를 아론에게 보고했다.
“가장 최신 정보로 입수한 코드로바의 현황입니다. 지금 병사 배치는…….”
아론은 내용을 들으면서 어디로 공격해야 녀석들의 허를 찌를 수 있을지 궁리했다.
“이상입니다.”
“이전이랑 크게 달라진 거는 없구나. 특이 상황은 없고?”
“예. 거기도 분위기가 좋지 않다 보니 정보원들이 정보를 캐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만. 그래도 잘해주고 있어. 정보 고맙다.”
“이제…… 전면전이군요.”
“응. 머지않았어.”
아론의 대답을 들은 셀린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한때 아이젠 출신이었다. 지금이야 신분을 버렸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과거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
“혹시 아이젠에 일말의 감정이라도 남아 있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셀린은 고개를 흔들며 그것을 부정했다.
“단지 저는 아론 님이 걱정될 뿐입니다.”
“내가?”
“네. 아론 님의 실력이야 의심할 수 없지만, 아직 10대이시지 않습니까. 전투는 여러 번 경험하셨지만, 전쟁은 아예 다른 분야이니까요.”
아론은 전쟁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앞으로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인간으로부터 분노와 증오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론은 자기에게 살기를 내뿜는 사람을 서슴없이 죽일 것이다. 그게 몇백 명일지, 몇천 명 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는 몬스터를 잡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같은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무게 자체가 몬스터와 비교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건 그렇네.”
아론도 그 부분은 동의했다.
지난번에 드루인에서 전투를 치르며 그 점을 느꼈었다.
‘이전까지는 상대가 나에게 먼저 적대감을 표출했고, 나는 그런 녀석들을 쳐부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아론 측이 미리 상대를 공격하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은 아이젠이 아닌, 배후에 있는 트레벨이라는 단체를 부수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다.
녀석들이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니까. 살기 위해서 전쟁을 구실로 놈들을 없앨 생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전쟁을 빨리 종결하는 것뿐.’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셀린을 향해 말했다.
“너무 걱정 마. 내가 그런 거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질 녀석이었으면 진즉에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어.”
“그건 맞습니다만.”
아론의 대답을 들은 셀린은 쓰게 웃었다. 역시 아론다운 대답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
아이젠의 2왕자, 라덴 아이젠은 보고를 듣고 있었다.
“현재까지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라덴은 보고를 듣는 내내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메도우드의 군세가 코드로바로 향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메도우드가 그렇게 움직일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론 에드먼스의 동향은 어떠한가?”
라덴이 궁금한 것은 이쪽이었다.
“아론 에드먼스는 공작가로 귀환한 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병사는 에드먼스의 본대에 다시 합류했습니다.”
내용을 들은 라덴은 표정이 구겨졌다.
“우리 정보국 녀석들은 고작 에드먼스 자제 녀석의 동향도 알아내지 못하나?”
“아, 알겠습니다!”
라덴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녀석은 망나니가 아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보이도록 가장한 게 확실하다.’
라덴은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녀석은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될 거라고 여겼다.
드루인을 고작 100명의 병력만 이끌고 가서 완승을 거두었다. 보고 받은 내용에 의하면 해괴한 장비까지 동원했다고 했었다.
‘놈을 최우선으로 막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라덴의 안광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그에게 중요한 기회였다. 코드로바에서 크게 승리하면 충분히 1왕자를 제치고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받을 수 있었다.
“이만 나가봐도 좋다. 아, 그리고 그 녀석도 불러라.”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외부인은.”
“이기기 위해선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병사가 나갔고, 라덴은 코드로바의 지도를 바라봤다.
‘두 나라의 시선이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기에 반드시 앞으로 있을 전투는 자신이 이겨야 했다.
‘옥좌는 내 것이다.’
그는 상상했다.
자신이 메도우드의 군세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왕국으로 귀환하는 모습을 말이다.
* * *
메도우드의 병력은 코드로바의 성문이 점으로 보이는 곳에서 주둔지를 꾸린 상태였다.
“으음…….”
코드로바 공략대의 총지휘관인 랜튼 에드먼스는 성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지휘관을 맡은 메도우드의 귀족들은 물론, 에드먼스 소속의 고위 워 메이지들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방어가 훨씬 단단해졌다.”
“이거…… 쉽지 않겠군요.”
원래라면 1차 공격 때 성문을 부수고 코드로바에 입성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선보인 생체 골렘화된 병사들 때문에 코드로바에 발을 들이긴커녕 성문도 부수지 못했다.
결국, 1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코드로바는 소강상태를 이용해 방어를 더욱 강화했다.
더욱이 좋지 않은 점은, 아이젠의 병력이 코드로바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메도우드의 병력이 코드로바를 통과해 아이젠을 공격하는 게 정해진 이상, 그들도 방어군을 이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건 안티 매직이군요.”
“그래. 원래 코드로바에는 없었는데, 지원군이 들고 와서 설치한 모양이다.”
그걸 본 랜튼은 이마가 지끈거렸다. 안티 매직이 설치된 이상 성벽을 부수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돌파를 강행해야 하나?’
랜튼은 속으로 고민했다.
탐지 마법을 펼쳐 안티 매직이 가장 얇은 부위를 찾은 뒤, 그곳을 집중 공략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떻게든 돌파에 성공해서 내부에 설치된 안티 매직을 부수면 되었다.
‘하지만 이건 희생이 너무 많이 요구된다.’
랜튼은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차라리 병력을 선회해서 공략하는 건…….’
그러나 이 작전도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다.
안티 매직도 만능은 아니다. 계속해서 공격하다 보면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젠 녀석들은 안티 매직을 공격이 가장 집중되는 정문에 짙게 깔았을 것이다.
그 외의 방면에는 안티 매직이 상대적으로 약할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코드로바의 측면이 협곡이라는 점이다.’
기사들에게도 협곡 돌파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마법사들을 데리고 하면 더욱 안 좋은 상황이 펼쳐질 게 분명했다.
‘결국 강행 돌파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미 최선의 전략은 1차 공략이 실패하면서 모두 어그러졌다.
랜튼은 고위 마법사들에게 코드로바 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티 매직을 정밀하게 스캔하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스캔을 마친 마법사들이 보고를 시작했다.
“정문에 설치된 안티 매직은 아주 두껍습니다. 하지만 균일하게 깔려 있는 건 아닙니다. 그중에서 약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마법사는 해당 부분의 좌표를 알려 주었다.
“알겠다. 그러면 다음 공격 때 그곳부터 공략하도록 하지.”
보고를 들은 랜튼은 즉시 지휘관을 소집했다.
“다시 코드로바를 향해 공격할 계획이다. 녀석들이 설치한 안티 매직을 스캔했고, 그나마 약한 부분을 찾았다.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부수는 게 이번 공격의 핵심인데…….”
랜튼은 지휘관을 둘러보았다.
“꽤 큰 희생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번 공격이 성공하면 놈들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문제는 누가 그곳을 선봉에 서서 공략하느냐다.”
랜튼의 말에 다들 섣불리 자기가 나서겠다고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침묵을 깬 건, 어느 지휘관의 질문이었다.
“랜튼 님. 이번에 아론 도련님도 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론의 명성은 여기서도 유명했다. 지난번에 100여 명의 마도병을 이끌고 드루인 족의 전투 부대를 궤멸시킨 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르세에서 퇴각 중이던 아군을 도와 전세를 뒤집은 것 역시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들은 그런 아론이 이번에 코드로바 공략에 합류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연 지휘관의 속내는 약간 달랐다.
“이번 작전의 공을 아론 도련님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랜튼은 그 말을 한 지휘관의 눈을 잠깐 말없이 바라봤다.
속이 뻔히 보였다. 녀석은 아론에게 가장 험한 일을 떠넘길 생각이었다.
“아론은 이번 코드로바 공략에 참여하긴 하지만, 공작의 명령으로 따로 움직일 예정이다.”
랜튼의 대답에 지휘관들의 표정은 실망이 역력했다.
그들 중에서는 순수하게 마법사로서 아론을 보고 싶어 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아론은 이번 공략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보여줄 것이다.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랜튼은 그렇게 말하며 지휘관들을 안심시켰다.
그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아론이 꾸미고자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
정보라는 것은 조심하여 다루지 않으면 쉽게 새어나가기에 굳이 지휘관들에게 설명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설명해도 아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당장 자신만 해도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공수작전이라.’
생소한 단어였기에 랜튼은 작전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아론이 계획한 대로 성공한다면 확실하게 코드로바에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
메도우드의 병력은 편제를 마치고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표식이 새겨진 곳을 노려서 마법을 발사하라!”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마도병들에게 명령했다. 안티 매직이 약한 부분을 노려 마법을 투하했다.
콰앙!
안티 매직은 메도우드의 공격을 견고하게 막아냈다.
슈슈슉-
코드로바 측은 공격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성벽에서 대기 중이던 궁병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실드 전개!”
선두에 선 마도병들이 명령에 따라 실드를 펼쳐 화살을 막았다.
하지만 실드가 모든 화살을 막지는 못했다. 틈이 생긴 곳을 뚫고 들어온 화살이 메도우드의 병사를 찌르기도 했다.
쐐액-!
그리고 기사가 오러를 실어서 날린 화살은 일반 병사의 것과 달랐다. 그들의 화살은 실드를 부수고 병사의 살갗을 찢었다.
워 메이지들은 안티 매직 너머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마법을 좀 더 예리하게 다듬었다. 이렇게 하면 성벽이나 성문에 타격은 줄 수 없어도 사람을 상대로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그들의 분전 덕분에 성벽의 병사들은 하나둘 죽어 나갔다.
“전진한다!”
코드로바의 방어가 약해진다 싶으면 메도우드의 지휘관들은 전진을 명령했다.
안티 매직이 견고하더라도 가까이에서 마법을 날리면 위력이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메도우드 측은 그렇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계속해서 전진하는 방식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코드로바의 공세도 거칠어졌다. 메도우드의 병사들은 더 큰 피해를 보았다.
정문을 두고 서로의 병력이 끊임없이 줄어드는 소모전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코드로바 서부 외곽의 협곡.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 없었다. 혹시나 적이 보인다면 경보를 울리기 위해 대기 중인 병사들만 있을 뿐이었다.
코드로바에서 배짱을 부리는 건 아니었다. 여기는 험난한 지형 때문에 공격하는 쪽이 매우 불리했다.
서부 지대를 통과하는 길은 단 두 개뿐이었으며, 그 외에는 절벽이었다.
게다가 길도 좁았기에 작은 망루로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이곳의 토양 성분도 마법사들의 탐지 마법을 방해하는 데 한몫했다. 땅에는 마정석이 곳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문에서는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곳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겐 별세계 이야기였다.
“하암…….”
“입 찢어지겠네.”
망루를 지키던 병사가 크게 하품을 했다.
이들의 큰 적은 메도우드 군이 아닌, 지루함이었다.
“정문 녀석들은 지금쯤 발등에 불 떨어졌겠지?”
“그래도 얼마 전에 안티 매직을 설치했잖아. 메도우드 놈들도 함부로 돌파하지 못할걸.”
그들은 내심 이곳에서 근무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정문에 배치되었더라면 적의 공격에 목숨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오지도 않는 적을 기다리는 것도 피곤하네. 나 한숨 잘 테니까 메도우드 녀석들 보이면 깨워라.”
“낄낄, 정신 나간 놈. 평생 자겠다는 말이냐?”
파각!
그때였다.
하품을 길게 하던 병사 녀석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털썩!
머리를 잃어버린 시체는 그대로 쓰러졌다.
“어, 어……?”
그 광경을 본 동료 병사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적습이다!
라고 외치려 했지만, 병사의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파각!
그의 머리 역시 마법을 맞고 터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처리했습니다.”
“확인.”
망루의 바로 아래에는 워 메이지인 라프와 켄트가 있었다. 그 둘이서 마법으로 병사를 저격해 죽인 것이었다.
켄트는 망루를 무력화시킨 뒤에 아티팩트로 신호를 전송했다.
그 정보를 받은 건 아론이었다.
이어서 두 차례의 신호가 더 전송되었다.
“모든 망루가 무력화되었다.”
아론은 마도병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100명의 마도병은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전과 달리 고목으로 만들어진 스태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장비들은 모두 드워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새로운 무기를 착용한 그들은 전투력이 더욱 올라가 있었다.
아론과 그들의 병사들은 드워프에게서 빌린 비행선을 타고 이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덕분에 험난한 코드로바 서부의 지형은 그들에게 어려운 돌파 대상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인간들에겐 비행선이 없으니 떠올릴 수 없는 파격적인 전법이었다.
퐁!
그때, 쿠브가 튀어나와 입을 열었다.
“시킨 대로 망루의 병사를 쓰러트리고 왔어!”
“잘했다.”
“그리고 이곳의 지형도 모두 파악해 뒀어. 전방에 몇 개의 망루가 더 있긴 하지만 위험한 건 딱히 없었어.”
쿠브에게서 정보를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티팩트로 망루를 무력화한 병력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이들과 중간에 합류해서 공격할 계획이었다.
목표는 코드로바의 서쪽 성문이었다.
* * *
아론의 부대를 막을 수 있는 코드로바의 병력은 없었다.
전방에 몇 개의 망루가 더 존재했지만, 아론은 그들이 연락을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
그렇게 아론은 계속해서 진격했고, 어느새 서쪽 성문에 도달했다.
‘병사들은 얼마 없군.’
하지만 성벽과 성문은 단단했다.
물론 그게 아론에게 걸리적거리는 요소는 아니었다. 예상한 대로 안티 매직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래도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돌에는 마법 내성 처리가 되어 있어.’
저 정도면 마도병의 공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론과 워 메이지급의 마법사가 마법을 써 공격한다면 소용없는 부분이었다.
아론은 성벽을 단숨에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마법을 날릴 준비를 했다.
쿠구구……!
아론의 주위로 마나가 요동쳤다.
그걸 본 마도병은 물론 워 메이지도 놀라워했다.
단순히 마법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살벌하게 만들 수 있다니. 그들은 아론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아론의 마나에 신력이 섞이자 더 이상 서클의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단순한 힘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9서클에 육박하고 있었다.
우웅-
아론의 펜던트에 박혀 있던 쿠베라의 보석이 빛을 발했다. 거기다가 아론이 쿠브의 힘까지 빌리자 협곡에서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마도병들은 허공에 뜬 거대 바위를 경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우웅-
이번에는 아그니의 보석이 빛을 발했다. 아론은 마나를 이용해 즉시 바위를 성벽에 냅다 던졌다.
꽈앙!
바위가 충돌하면서 지축이 흔들렸다. 마도병들은 중심을 잡느라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
압도적인 바위의 질량을 견디지 못한 성벽은 박살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들 실드를 전개해라.”
“……예!”
아론이 보여준 기적 같은 마법에 넋을 놓고 보던 병사들이 그의 명령을 따랐다.
콰쾅!
성벽을 부수고 안쪽으로 넘어 가 있던 바위가 붉게 변하더니 폭발했다.
아론이 아그니의 힘을 빌려서 바위 내부에서 화염 마법을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바위가 수천 갈래로 터져 나가면서 주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코드로바의 서쪽은 순식간에 뚫리고 말았다.
이곳이 만약 아이젠의 본성이었다면 아론의 마법이 먹혔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안티 매직이 없는 코드로바의 서쪽은 이 정도로도 초토화를 시킬 수 있었다.
‘코드로바 녀석들은 이게 뭔 일인가 싶겠지.’
그러나 알아차렸다고 해서 대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코드로바의 병력은 정문에서도 메도우드의 병사들을 막는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론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은 출중했지만, 아론의 병력은 소수였다. 그렇기에 속도를 올려서 내부에 진입하기로 했다.
“모두 안으로 돌격한다!”
아론의 명령에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성벽 너머에는 아직 남아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아이젠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마법에 오러를 둘렀고, 목숨을 잃는 것은 면하였다.
“……네 이놈!”
아이젠의 기사 한 명이 아론을 보자 노호성을 터트렸다. 서쪽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놀라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아론이 녀석을 상대하려는 찰나, 라엘이 등을 보이며 그 앞을 막아섰다.
“아론 님은 조금 쉬세요.”
라엘은 여태까지 아론의 곁에서 지냈기에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성벽을 부술 때 썼던 마법이 꽤 큰 마법이라서 휴식 시간이 필요함을 알아차렸다.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믿음직한 그녀의 말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터억- 꽈앙!
라엘은 아론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에게 순식간에 접근하여 가슴팍을 으스러뜨렸다. 기사는 힘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방금 움직인 기사들 외에도 아직 거동이 가능한 기사는 라엘과 켄트, 워 메이지 둘이서 차례대로 정리했다.
그 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녀석들은 마도병들이 달려들어 처리하였다.
코드로바의 서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아론을 따르는 마도병들은 이 상황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비행선을 탈 때도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런데 적에게 들키지 않고 순식간에 협곡의 중간에 내릴 수 있었다.
드루인에서도 그는 조명탄이라는 기발한 도구를 사용해 다크 엘프들을 무력화시켰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 적도 없는 수송 수단을 동원한 거였다.
물론 이번에는 같은 인간과 붙는 것이었고, 튼튼한 성이 그들을 지키고 있었기에 소모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혼자서 재앙 급 마법을 사용해 단숨에 성벽을 부수고 말았다.
‘가히 자연재해 급이다.’
아론의 실력을 본 병사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힘을 어느 정도 되찾은 아론은 휴식을 멈추고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 굳이 정문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별동대를 꾸려 서쪽을 돌파한 건 이유가 있었다.
‘안티 매직이 설치된 곳을 찾아서 부숴야 한다. 그래야 정문의 병사들이 코드로바에 입성할 수 있다.’
아론은 탐지 마법을 넓게 퍼뜨렸다.
‘녀석들이 작정하고 숨겼다면 찾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런 아론의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안티 매직이 설치된 장소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젠에서는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 급하게 설치한 모양이었다. 은폐에 신경을 썼다는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티 매직이 설치된 장소를 찾았다. 지금부터 그곳으로 이동할 테니 다들 잘 따라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아론의 뒤를 쫓아 움직였다.
***
콰쾅! 콰앙!
메도우드 측에서 날린 마법이 코드로바의 정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것들 대부분이 안티 매직에 가로막히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전투를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도저히 성문을 돌파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코드로바에서의 수성도 악착같았다. 그래서 희생된 마도병의 수도 적지 않았다.
전장의 상황을 살펴보던 메도우드의 총지휘관, 랜튼 에드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이만 병력을 물려야 하나?’
이미 병사들의 피로는 극심해진 상태였다. 명을 달리한 병사도 많았다.
어차피 공성전은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었다. 초장에 전력을 쏟아부어서 자멸할 필요는 없었다.
‘따로 움직인 아론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만약 아론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어떻게든 표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아론 쪽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아론에게 작지만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만 의존해서 전장을 망칠 수는 없었다.
‘정비 시간을 가져야겠군.’
속으로 결심한 랜튼은 퇴각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우우웅-!
그때였다.
코드로바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나 파동이 흘러나와 전장에 도달했다.
‘뭐지?’
랜튼은 당황하여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 아니?”
콰앙!
마도병이 날린 마법이 성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부 위치에서 안티 매직이 사라진 것이었다.
“바, 방금 마법이 안티 매직을 뚫고 통과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라…… 안티 매직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지휘관들은 현재 상황을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
총지휘관인 랜튼만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론이 성공한 거구나!’
물론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작전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하도 대체 뭔가 싶었는데,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었다.
‘정문에서 한창 전투를 치르면서 주의를 돌려주면, 그 틈을 타서 자기가 설치된 안티 매직을 부수겠다고는 했었는데…….’
당시에는 믿지 않았었다.
아무리 코드로바의 서쪽이 방비가 허술하다고 하더라도 그 협곡을 고작 100명의 병력으로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그래, 설령 뚫었다고 하자. 그래도 안티 매직이 설치된 주변에는 병사들이 기를 쓰고 방어를 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론의 작전은 실패할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여봐란듯이 해내고 말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랜튼은 이번 공성전이 지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종료 기간을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티 매직이 무너진 지금이라면.
‘당장에라도 부술 수 있다.’
랜튼의 속에서 투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안티 매직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 있다. 그곳을 중점적으로 공격을 퍼부어라!”
“예!”
지휘관들은 랜튼이 내린 명령을 각자의 부대에 하달했다.
그들은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콰콰쾅!
안티 매직이 없는 부분을 뚫고 메도우드의 마법이 쇄도했다.
코드로바의 병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잘 작동하던 안티 매직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순간, 성벽은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성벽이 무너졌다!”
그 광경을 본 마도병들이 소리쳤다.
“모두 돌격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돌격!”
랜튼의 명령이 순식간에 전 부대에 전달되었다.
성벽을 건너가자, 거기에는 많은 코드로바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목숨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빠르게 전선을 구축하고 메도우드와 싸울 준비를 했다.
진짜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래도 성벽을 뚫었다는 것만으로도 메도우드 측으로 승기가 기운 상태였다.
공성전의 판도는 아론 한 명으로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
아론은 안티 매직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의 급습을 마쳤다.
그들의 저항은 거셌지만 아론과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진격을 막을 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시체가 되어서 주변에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코드로바 병사의 대부분은 아론의 마법에 나가떨어졌다. 기사도 많았지만, 아론의 마법을 오러로 막을 순 없었다.
아론은 단순히 마나의 힘만 쓰는 게 아니라 펜던트는 물론이요, 신력까지 쓰는 상태였다.
“다들 수고 많았다.”
아론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당초에 정했던 목적은 달성했다. 코드로바에는 병력이 많았다. 아론이 이끄는 100명의 병사로 그들을 다 상대하는 건 어려웠다.
안티 매직을 제거해 정문에 물꼬를 터 줬으니 남은 건 그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아론은 병사들을 데리고 후퇴하려고 할 그때.
“네 녀석 혼자서 이곳을 다 쓸어버린 거냐?”
갑작스럽게 나타난 누군가가 이죽거리며 아론에게 말을 걸었다.
아론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러셀 에드먼스.”
아론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아론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러셀 에드먼스……. 여태껏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가 아이젠에 붙어먹은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다만 이를 알고 있는 건 공작과 아론의 측근뿐이었다.
공작이 일부러 정보를 통제한 탓이었다. 그렇게 하면 러셀이 안심하고 활동을 벌일 테고, 공작은 그 뒤를 캐서 정보를 야금야금 얻었었다.
그리고 둘째가 적국에 붙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가문의 명예는 물론 내부에서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감안했다.
그래서 아론의 휘하 병사들은 러셀이 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러셀 님!”
병사들은 러셀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들이 보기엔 러셀이 동생을 도우러 온 형으로 보였다.
“조심……!”
파아앙!
아론이 병사들에게 경고하려고 하기가 무섭게 러셀이 마법을 시전했다. 그가 앞으로 손을 뻗자 병사들 주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크으윽!”
“러, 러셀 님!”
“지금 무슨 짓을……!”
병사들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러셀은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계속해서 폭발을 일으켰다.
“모두 몸을 피해라! 러셀은 아군이 아닌 적이다!”
아론은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병사들이 도망을 수월하게 칠 수 있도록 마법으로 연기를 흩뿌렸다.
펑! 퍼엉!
폭발 마법은 러셀의 장기였다. 그는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도 화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러셀이 나타난 곳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서열 둘째 자리를 허투루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군.’
아론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녀석이 보여준 마법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아론의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다.
성벽을 단숨에 뚫기 위해서 무리를 좀 했다. 그리고 안티 매직이 설치된 지역의 기사들을 처리하느라 힘을 소진했다.
그 상태에서 러셀을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녀석이 일리아보다 실력이 높은 건 확실했다.
‘왜 이 타이밍에 나타난 거야?’
이번에 코드로바의 공격에 동원되면서, 아론은 작전 중에 강적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뒀엇다. 아이젠은 어떻게든 코드로바를 지키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러셀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고작 내가 이끄는 별동대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안티 매직은 다시 가동할 수 없을 정도로 부쉈다. 그래서 아론은 코드로바가 정문 수비에 집중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론의 예측이 틀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러셀은 코드로바에서의 전투를 통해 무언가를 계획 중인 모양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아론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상관없었다. 저 녀석은 아이젠의 편이 된 지 오래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녀석을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도망갈 수는 없었다.
여기는 적지였고, 제대로 탈출하려면 비행선을 타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기엔 거리가 멀었다.
잠시 후, 아론이 깔아 두었던 연기 마법이 사라졌다. 아론은 러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직- 파지직-
러셀의 주위에서 마나가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녀석의 양손에는 언제든 폭발 마법을 발동할 수 있도록 마나가 모여 있는 상태였다.
‘까딱 잘못하면 폭발에 휘말려서 몸이 성치 못하겠군.’
아론은 이번 전투가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온전히 체력을 비축한 상태에서 싸웠더라도 호각을 다투리라고 예상이 되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아론이 순순히 나타나자 러셀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서로 마법을 쓴다면 순식간에 닿을만한 거리에 있었다.
“아론.”
먼저 입을 연 건 러셀이었다.
“일리아에게 서열 대련을 신청했고, 승리했다면서? 게다가 서열식도 무사히 마치고 말이야.”
“형님은 집안에 없으셨는데, 잘도 아시네요.”
“대륙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앞뒤도 못 가리던 망나니가 정식 후계자가 되다니. 참 감격스럽다.”
“형님도 그렇게 인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론은 태연함을 유지하며 러셀과 문답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통탄스럽습니다. 형님은, 아니 러셀 에드먼스는 이제 아이젠의 충실한 개가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아론은 러셀의 얼굴을 살폈다. 이죽거리던 그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제가 변했다고 형님도 변해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아론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역린이 된 걸까.
러셀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어떤 심정인지 알지 못할 거다.”
러셀은 스스로를 잘 알았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그게 첫째를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주의 자리는 탐이 났다. 어떻게 해서든 그가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러셀은 공작가의 서열 경쟁에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다. 후원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 세력은 공작가의 전복을 원했으니 말이다.
러셀은 그 방법을 쓰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에드먼스를 뒤엎고 자신이 가주가 되면 그만이었다.
“네가 뒤늦게 후계자 경쟁에 뛰어든 이유를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네가 아무리 발악해봐야 형님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러셀은 아론을 쏘아보았다.
그는 아론이 미웠다.
그냥 망나니로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발버둥을 쳐서 자신에게까지 흙탕물을 튀기고 있었다.
“그래도 혈육이니까 마지막으로 조언해주마. 분에 맞지 않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러셀은 아론보고 잠자코 있으라고 넌지시 말했다.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아론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분에 맞지 않는 자리를 꿈꾸고 있는 건 러셀이 아니던가.
과연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서 성공적으로 공작가를 뒤집었다고 치자. 그럼 그다음에는 정녕 자신이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러셀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자빠지겠지.’
아론은 그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형님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광오함이 도를 넘었구나.”
러셀의 그 말에 아론은 그만 웃음을 크게 터트릴 뻔했다.
‘어디 보자. 시간은 적당히 끈 것 같고.’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대피시킬 준비도 몰래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슬슬 녀석하고 붙어볼까.’
아론이 그리 생각하지 않아도 러셀 쪽에서 자신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욱-
러셀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론의 주위에 있던 마나가 급속도로 들끓기 시작했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징조였다.
‘녀석이 나타났을 때 제대로 못 봤는데, 파괴력뿐만이 아니라 속도도 빠르잖아.’
저 정도 속도면 마법을 캐스팅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
급조해서 마법을 발동한 건 아니었다. 지금 끓어오르는 마나만 봐도 절대 위력이 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론은 배리어를 펼쳤다. 가속 마법을 써서 주문의 시전 시간을 확 줄였다.
콰콰콰쾅!
순식간에 펼쳐진 배리어가 러셀이 일으킨 폭발을 막아냈다.
‘내 공격이 막혔다고?’
그 광경을 본 러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방어 마법을 쓰기도 전에 당하고 만다. 설령 급하게 방어를 했더라도 어설프게 만들어진 배리어 정도야 폭발의 화력으로 부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론이 단시간에 만들어 낸 배리어는 폭발 마법을 무사히 막아버렸다.
‘그래. 이 녀석은 일리아를 이겼었지. 재수가 없다뿐이지 실력이 헛된 녀석은 아니다.’
러셀은 전력을 다해서 단숨에 녀석을 죽여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상대는 더 이상 망나니가 아니었다. 한 명의 어엿한 에드먼스 가문의 후계자였다. 방심했다간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휙-!
러셀은 완드를 꺼냈다.
기분 나쁜 기운을 품고 있는 검은색 완드였다.
러셀은 지체없이 완드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쿠구구……!
그러자 완드가 흡수한 마나는 더욱 강력한 기운이 되어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후웅-!
러셀이 완드를 휘둘렀다.
콰쾅!
방금 전에 썼던 폭발 마법과는 비교하기가 힘든 규모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치 공간 자체를 터트려버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화력이었다.
화아악-!
일대가 러셀이 만들어 낸 거대한 폭발에 휘말렸다.
‘아니! 이 정도 공격이면 자기도 휘말리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아론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스스로 살아남고 봐야 했다.
콰콰쾅!
폭발로 생성된 고열과 압력이 아론의 배리어를 두들겼다. 아론은 어떻게든 그 공격을 버텨냈다.
그다음은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었다. 저들이 펼치는 실드로는 러셀의 폭발에 감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쿠브!’
[준비 다 끝냈어!]
‘장하다!’
아론은 진심으로 쿠브가 고마웠다. 그가 러셀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몰래 쿠브에게 지하를 이용해 대피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타이밍 좋게 방금 막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쑤욱-!
아론은 마법을 이용해 병사들이 서 있는 땅을 꺼트렸다.
“으아아악!”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지하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폭발에 휘말려 흔적도 남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였다.
‘배리어가 녹겠어!’
아론의 배리어가 슬슬 한계였다.
그는 정면에 있는 배리어를 해제함과 동시에 자신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펼쳤다.
화악-!
아론의 망토는 고열과 압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열기가 좁은 배리어 사이를 뚫고 들어와서 아론을 위협했지만 그가 입고 있는 로브를 태우는 것에 그쳤다.
잠시 후, 러셀의 폭발이 잦아들었다.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금도 캐스팅이 거의 없었지.’
그런데도 이런 위력이었다.
추가된 것은 완드 하나인데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괜히 폭발 마법의 대가라고 불리는 게 아니군.’
하지만 러셀이 만든 폭발을 세 번이나 경험했다. 녀석이 어떤 술식을 이용해서 마법을 쓰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잘 도망갔겠지?’
아론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구멍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제 이곳은 그와 러셀뿐이었다. 폭발에 휘말릴까 걱정되는 대상이 사라진 지금, 아론은 이제야 녀석과 전력으로 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러셀은 아론이 나머지 사람들을 대피시킨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내 공격을 맞고도 여유를 부리는 건가?’
그는 완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과연 이번 공격을 보고도 그럴 수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주마.’
러셀은 완드에 마나를 공급하며 마법을 날릴 준비를 했다.
후웅-!
완드를 휘두르자 완드의 끝에서 작은 구체가 만들어져 아론을 향해 날아갔다.
‘구슬?’
그것을 본 아론은 생각했다.
수십 개의 작은 구슬. 언뜻 보면 저 조막만 한 것에 무슨 힘이 들었겠냐며 무시하겠지만.
‘압축된 마나량이 어마어마하다!’
아론의 눈에는 보였다. 저 구슬 하나하나에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마나가 압축되어 있었다.
저것도 폭발 마법의 매개체임을 아론은 알아차렸다. 단순히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킬 때보다 훨씬 큰 화력으로 터지리라 예상되었다.
퍼퍼펑!
아론의 근처까지 날아온 구체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아론은 미리 쳐둔 배리어에 마나를 불어 넣으며 공격을 막아냈다.
예상한 대로 폭발의 화력은 이전보다 컸다.
후웅-!
러셀은 완드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아론을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퍼퍼퍼펑!
두 번째 구체 폭발은 아론의 주위에서 집중적으로 터졌다. 첫 공격 때는 아무렇게나 흩뿌리는 방식으로 날렸지만, 이번에는 아론을 향해 일점 타격하고 있었다.
아론은 러셀의 공격에서 최대한 이 전투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러셀의 염원과는 달리, 아론은 녀석의 공격을 좀 더 수월하게 막고 피할 수 있었다.
‘끝내려면 초장에 끝냈어야지.’
러셀의 공격 방식이 익숙지 않던 처음이면 몰라도 이제 그의 공격은 아론의 눈에 익기 시작했다.
러셀이 어떤 술식으로 구체를 형성해서 날리는지, 작은 구체의 폭발력이며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그렇기에 아론에게는 그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고, 이제 아론은 반격의 기회도 슬슬 엿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타이밍을 잡은 아론.
그는 곧바로 마나를 방출해 화염을 쏘아냈다.
화르르륵!
아론의 첫 공격이었다. 겁화와도 같은 불꽃은 러셀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러셀은 차마 아론이 공격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하면서도 아론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마법을 준비했다.
퍼퍼퍼펑!
러셀은 마법이 날아오는 경로를 예상하고 자신의 앞에 폭발을 일으켰다.
‘공격을 저렇게 막는다고?’
아론은 의아함을 느꼈다.
러셀의 폭발 마법과 아론의 화염이 충돌하며 힘 싸움을 했다. 그러나, 아론의 화력이 더 강했다. 화염은 폭발을 집어삼키고 러셀에게 뻗어 나갔다.
퍼퍼펑!
러셀은 몇 차례의 폭발을 더 일으키고 나서야 아론이 쏘아낸 화염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걸 본 아론은 아쉬워했다.
‘체력만 온전했어도 첫 공격에 피해를 줄 수 있었을 텐데.’
러셀과의 전투에서 화력전으로 가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력전은 결국 체력 싸움이었다. 한쪽이 지치면 지기 마련인데, 아론에겐 불리했다.
‘그래도 얻은 건 있다.’
아론은 이번 공격에서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러셀이 극단적으로 공격에 치중한 마법을 사용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방어를 할 때조차도 폭발을 이용해 아론의 공격을 막았다.
러셀이 방어 마법을 아예 모른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론의 마법을 막아내는 데는 미숙한 배리어보단 폭발이 더 효율적이기에 저런 선택을 한 것이리라.
‘저게 러셀의 발목을 잡겠지.’
러셀의 장기가 폭발 마법이라는 게 문제였다.
방어를 했다면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 공격을 막았는데 정작 자기가 만든 폭발에 휘말린다면 그건 방어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셀은 그 미묘한 화력을 조절하기 위해서 세밀한 계산을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캐스팅 속도는 느려졌다.
결국 아론이 선택할 방법은 하나였다. 러셀의 연산 속도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다만 상대가 러셀이었다. 너무 약한 공격을 했다가는 쉽게 막힐 것이 분명했다.
‘화력도 충족하면서 속도도 빨라야 한다.’
하지만 화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자연스럽게 술식이 길어지고, 시전 시간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속도를 중시하자니 화력을 담당하는 술식이 빠져버려 힘이 약해진다.
그렇기에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하는 마법은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아론은 가능했다. 그에게는 마법을 융합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속도는 번개, 화력은 화염.’
아론은 그것을 명심하며 마법을 시전했다.
파지직!
아론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화염 마법의 술식을 외웠다.
화르륵!
아론의 손 위에서 두 마법이 공존했다. 이내 본디 합쳐질 수 없는 것들이 융합하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현상에 러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러셀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아론이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저게 뭐야? 말도 안 되는…….’
러셀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여태껏 배웠던 마법의 상식으로는 아론이 방금 발현한 마법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아론이 타고 난 마나 친화력의 결과물인 걸까. 어느 정도까지 세밀한 조정이 가능해야 저렇게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건지 이해 가지 않았다.
‘저것이 재능……!’
러셀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아버지가 아론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나 혼자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러셀은 그 사실을 통렬히 깨달았다. 아이젠의 1왕자가 자신에게 혼자서 이번 일을 수행하라고 할 때, 거절해야 했었다.
[설마 동생에게 지지는 않겠지?]
그 말에 발끈해서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신중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이젠의 기사들도 대동했어야 했다.
러셀은 까놓고 말해 아론이 변했다고 해도 큰 성장은 없었을 거라 오판했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는 아론의 마법에 맞서 막을 궁리를 했다.
쐐애애액-!
번개와 화염이 하나로 융합된 마법이 아론의 손을 떠나 러셀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번개의 속도를 지니고, 화염의 파괴력을 지닌 기상천외한 마법이었다. 러셀은 그것의 속도를 눈으로 좇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막지 못하면 몸이 터질 게 분명했다.
퍼엉!
러셀은 마나를 자신의 발아래로 보내서 땅을 폭파시켰다. 그러자 바닥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번개가 섞여 있으니까 그걸 바위로 막아내려는 모양인데.’
아론은 러셀이 발휘한 순간적인 기지는 칭찬해 줄 만했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러셀은 이 마법에 화염 속성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콰르릉! 콰쾅!
우렛소리와 폭발음이 동시에 들렸다.
러셀은 아론의 마법을 막았지만, 치명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러셀의 입장에선 최선의 방법으로 막은 셈이군.’
그래도 러셀은 두 발로 서 있었다. 비록 만신창이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실룩, 하고 러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론의 눈에 보였다.
‘실성한 건가?’
아론은 러셀이 웃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아니면 아직 수가 남아있는 걸까.’
러셀은 체내에 있는 자신의 마나를 일제히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뭔가를 하려는 모양인데?’
아론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러셀의 서클에선 마나가 흘러나와 서로 넘나들기 시작했다. 저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서클이 자극받고 뜨거워지기 마련이었다.
마법사들이 보면 기겁할 상황이었다. 함부로 마나를 저렇게 다루다간 자칫 잘못하면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서클을 침범한 마나들이 동조 반응을 보였고,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러셀의 도박 수가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어차피 이대로 가면 패배할 거, 리스크를 왕창 짊어지는 도박에 나선 거였다.
러셀의 체내 마나가 점점 증폭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러셀은 완드를 굳게 잡고 마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완드의 끝에서 마나가 폭발적으로 응집하고 있었다. 이윽고 모였던 마나는 자그마한 구체를 만들어 날렸다.
‘……!’
아론은 저 구체 안에 담겨 있는 힘을 헤아리고는 놀라워했다. 못해도 9서클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폭발 마법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 발악인가?’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저런 마법을 구현해 냈으니, 필시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그런 것이다.
아론은 도망칠 수 없음을 파악했다. 설령 가속 마법을 걸더라도 폭발에 휘말릴 터.
아론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어떻게 녀석의 공격을 막을 것인가. 단순히 배리어를 치는 것으론 힘들었다.
‘그렇다면…….’
아론의 생각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결국 자신도 공격 마법을 발현해 녀석의 화력을 집어삼키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저 구체에는 9서클 급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문제였다. 아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에선 저만한 힘을 낼 수 있는 마법이 없었다.
물론, ‘단일 마법’에서는 말이다.
우우웅-!
아론은 잔여 마나를 죄다 모아 한곳에 축적시켰다.
화아악!
아론의 펜던트에 박힌 보석들이 모두 빛을 발했다. 네 가지 원소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증거였다.
수, 풍, 지, 그리고 화.
아론의 마나가 네 개의 각기 다른 속성의 마법을 꽃피워냈다. 그것은 구체가 되어 러셀이 쏘아낸 마법을 향해 날아갔다.
아론의 마법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두 가지 속성의 융합이면 몰라도, 네 속성은 안정적으로 합치기 힘들었다.
‘……바로 지금!’
아론은 자신이 만들어 낸 공격이 러셀의 구체와 충돌하기 직전, 힘겹게 유지하고 있던 네 가지 속성의 융합을 풀어버렸다.
콰카카칵!
그러자 네 가지 원소가 충돌하며 힘을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너무 가까이 있던 나머지 융합을 해제했어도 쉽게 떨어지지 못했고, 계속해서 충돌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충돌은 축적되고, 이내 형용할 수 없는 폭탄이 되어 터지고 만다.
콰아아앙!
아론과 러셀의 마법이 충돌했다.
한껏 파괴력이 증강된 아론의 마법은 러셀의 구체를 화력으로 눌러버렸다. 그럼에도 주체하지 못하고 넘치는 힘은 러셀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