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33/40)
  • Chapter 3

    그 시각, 드루인의 성내.

    다크 엘프들은 아이젠에서 온 귀족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술맛은 좀 괜찮군.”

    아이젠의 귀족은 술잔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그의 주변에서는 빼어난 미모의 다크 엘프 여성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귀족을 상대하는 드루인의 족장 델피오는 심기가 불편했다. 동족들이 저딴 말라깽이한테 억지로 시중을 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6서클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되는 녀석이…….’

    델피오는 녀석을 한순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 분을 삭여야만 했다.

    녀석은 아이젠에서 보낸 사자.

    자신이 함부로 대하는 순간, 부족의 명운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머나먼 과거에 드루인 부족의 조상들이 아이젠에 붙은 이후로, 드루인의 운명은 아이젠에 저당 잡힌 거나 다름없었다.

    아이젠은 드루인을 주변에 위치한 쓸모 있는 속국 중 하나라고 여겼다.

    ‘살아남기 위해선 버텨야 한다.’

    델피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부득 갈았다.

    “하지만, 여자들의 질은 좋지 않구나. 술맛에 어울리게 준비할 수 없었나?”

    아이젠의 귀족이 델피오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그 발언에 델피오는 녀석의 목을 분질러버릴까 생각했다.

    ‘내 밑에는 수많은 다크 엘프들의 목숨이 걸려있다.’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한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그래. 내가 여기에 온 건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귀족은 거들먹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에드먼스 가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도 녀석들의 행동에 맞춰서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올 게 왔다.

    델피오는 이 자가 온 이유가 자신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는 걸 파악했다.

    “에드먼스는 몇 주 뒤에 출정할 거라는 정보를 받았다. 그런데 먼저 움직인 녀석이 있다고 하더군.”

    “그게 누굽니까?”

    “아론 에드먼스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유명한 망나니지. 녀석이 1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급히 나왔다는군.”

    “그자는 성격이 급하군요.”

    “그러니까 망나니지. 녀석의 방향을 보면 이곳 드루인 아니면 몰트, 혹은 오르세로 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내가 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령 녀석이 이곳에 온다 한들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델피오는 자신이 있었다.

    드루인은 에드먼스의 정예병이 온다 한들 낮에는 찾아낼 수 없었다.

    ‘이곳을 염탐하려고 메도우드의 정찰병들이 몇 번이나 왔었지. 하지만 녀석들은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

    그래서 델피오는 아론도 별 성과를 못 얻고 돌아갈 것이라고 봤다.

    “저희들은 밤의 지배자인 걸 잘 아시잖습니까. 고작해야 100여 명의 병사로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게다가 지휘관은 망나니 도련님이라니. 저희가 질 수가 없는 전투가 될 겁니다.”

    “흐음. 그래도 최근에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망나니가 변했다고 하더군. 아이젠에서 중요하게 벌이는 일들을 방해한 게 그 녀석이라는 소문도 있다.”

    “알겠습니다.”

    귀족은 델피오의 대답을 듣고 난 뒤 술잔을 끝까지 비웠다.

    ‘이 귀족은 믿지 못할 녀석이지만 아이젠의 왕은 다르다. 그는 매우 치밀한 사람이다.’

    오늘 귀족이 방문한 것도 그의 독단이 아니라 왕의 지시로 온 것이었다. 델피오는 왕이 보낸 거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워프 게이트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온다고 하더군. 그러면 빨리 이동해도 족히 10일은 걸릴 것이다.”

    “그 정도 기간이면 전투 준비를 마치기에 충분합니다.”

    델피오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쿠웅-

    그때였다. 외부에서 폭음이 들려오면서 건물에 잔잔한 진동이 일었다.

    “폭발음인가?”

    “무슨 일이지?”

    귀족과 델피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의 다크 엘프들은 영문을 몰라 두려워했다.

    “기습입니다!”

    이내 들어온 병사가 사태의 전말을 알려주었다.

    ***

    델피오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예상되는 곳까지 달려가면서 여러 차례의 굉음을 들었다.

    ‘어느 녀석들이지?’

    그는 자신의 부족을 노리고 굳이 야간에 쳐들어온 것이 이해 가지 않았다.

    잠시 후, 한창 전투를 하고 있는 장소에 도착한 델피오. 기습을 당한 것 치고는 다크 엘프의 전사들이 잘 막아주고 있었다.

    ‘금방 끝나겠…….’

    델피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멀리서 커다란 불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마법사가 쏘아낼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다크 엘프 전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타다닥!

    그때, 델피오가 앞으로 달려 나가 오러를 방출했다. 그러자 코앞까지 당도한 불덩어리는 오러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족장님!”

    “가, 감사합니다!”

    델피오의 등장에 다크 엘프의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재 어떤 상황인지 자세하게 설명해라.”

    “예!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들의 기습을 받고 있습니다.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방금 막 정찰대를 보냈습니다.”

    “놈들은 마법으로만 공격하고 있는 중인가?”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델피오는 누구의 소행인지 알 것 같았다.

    ‘방금 전 규모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에드먼스의 녀석들밖에 없지.’

    하지만 그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델피오는 고개를 뒤로 돌려 따라온 아이젠의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벌벌 떨고 있었다.

    ‘저 녀석이 잘못된 정보를 준 건가?’

    델피오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에드먼스의 병력이 예상을 뛰어넘어서 일찍 도착한 거였다.

    “알겠다. 전사들에게 달의 가호를 받아서 어둠에 몸을 숨기라고 전달해라.”

    “예!”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크 엘프들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둠 속에 스며드는 능력. 이것이 다크 엘프들의 특기였다.

    “비전투 인원은 대피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싸울 준비를 하라!”

    델피오의 명령에 다크 엘프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정찰을 보냈던 병사들 중 한 명이 돌아왔다.

    “족장님. 기습한 녀석들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했습니다. 대략 100여 명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상태입니다. 병종의 대부분이 마도병입니다. 실력 있는 마법사는 4명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보고를 들은 델피오는 생각했다.

    ‘확실하다. 아론 에드먼스의 병사가 여기에 온 거다.’

    아론이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온다고 아이젠의 귀족이 말했을 때는 혹시나 잘못된 정보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 규모로 공격해 왔을 줄이야.

    ‘가문에서 내다 버린 자식이라서 저 정도 병력밖에 주지 않은 건지, 아니면 저 녀석이 우리를 무시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델피오는 녀석들이 이곳에 쳐들어온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전 병력을 이끌고 나가겠다.”

    델피오는 그렇게 선언하며 놈들이 있는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

    퍼엉- 퍼엉-!

    아론은 병사들과 함께 드루인의 목책 너머로 마법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론 님. 다크 엘프 녀석들이 정말 밖으로 나올까요?”

    라프가 드루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반드시 나올 거다. 방금 전 정찰병이 온 것도 확인했다. 우리의 규모를 알았으니 녀석들은 섬멸을 목표로 할 게 분명하다.”

    아론은 녀석들이 쌓아 올린 목책이 공성전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크 엘프의 성격상 안에 틀어박혀서 수비를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었다. 다크 엘프가 자신의 특기를 쓸 수 있어서 자신감이 한층 차오른 상황이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했다.

    포옥!

    그때, 쿠브가 땅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놈들이 움직이는 걸 확인했어.”

    쿠브의 말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안으로는 다크 엘프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으니 이렇게 쿠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크 엘프가 목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 사실을 나머지 병력들에게도 알렸다.

    “정말이야?”

    병사들은 수군거리면서도 곧 있을 전투를 대비했다.

    ‘……벌써 왔군.’

    아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풀을 노려봤다. 그는 그곳을 향해 번개 마법을 날렸다.

    파지직!

    그러자 번개를 맞은 다크 엘프 병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기절했다.

    “다, 다크 엘프다!”

    병사들은 놀라서 소리쳤고, 근처에 있던 워 메이지 두 명도 아론의 대처에 놀랐다.

    ‘분명 탐지 마법에는 걸리지 않았었는데?’

    워 메이지 두 명은 동요했다.

    이게 다크 엘프의 특기였다.

    녀석들이 근처까지 도달해도 탐지 마법에는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100여 명 정도의 다크 엘프 전사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아직 다 온 건 아닌 모양이군.”

    아론은 그러면서 방금 자신이 쓰러트린 다크 엘프 병사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계속 거기에 숨어 있을 건가?”

    분명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론의 시야에는 드루인의 정찰대장이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몰라도, 은신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굳이 몸을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정찰대장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귀가 좀 밝을 뿐이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정찰대장을 노려봤다.

    “너희 족장은 어디에 있지?”

    “야간에 100명의 오합지졸을 처리하는 데에 굳이 족장님의 칼날을 더럽힐 순 없지. 우리로 충분하다.”

    “그래?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본 거 아니야?”

    아론의 그 말에 정찰대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녀석은 서슬 퍼런 눈으로 아론을 바라봤다.

    “오히려 무시한 건 너희 인간들이겠지.”

    “아마 너를 죽이면 족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오지 않을까?”

    “주제도 모르는 인간 녀석이군.”

    정찰대장은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모두 공격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크 엘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켄트!”

    “예!”

    켄트는 아론이 그려두었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이 마법진은 1분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명심해.”

    “알겠습니다.”

    아론은 그 사실을 유념시킨 뒤에 전방에 있는 정찰대장을 노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정찰대장은 깜짝 놀랐다.

    사방에서 각기 다른 마법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녀석은 그것들을 막아내느라 급급했다.

    ‘정찰대장의 실력은 잘 쳐줘야 일리아 정도의 수준이다.’

    아론은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했다.

    야간이라 녀석이 은신을 사용해도 자신에겐 다 감지가 되니 소용이 없었다.

    ‘근데 막는 건 꽤 잘하네.’

    그래도 실력은 있는 모양이라 아론의 마법을 열심히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막다간 언젠가 부러지기 마련이었다.

    아론은 몰래 준비해 둔 어스 바인드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정찰대장의 발목이 묶였고, 녀석은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 * *

    드루인의 정찰대장은 힘겹게 아론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인간 마법사의 힘인가?’

    정찰대장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처음 아론과 조우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정찰대장은 자신이 드루인족에서 족장을 제외하고 가장 발이 빠르고 은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다크 엘프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아론의 근처에 도달한 순간 1분도 채 되지 않아 녀석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찾았는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전투에서는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아론에게 밀리고 있었다.

    ‘인간들을 감싸고 있는 저 방벽들은 대체 뭐지?’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마법진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마 저 방벽도 아론이 만들었으리라.

    덕분에 나머지 다크 엘프들은 섣불리 인간들에게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원래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긴 채 암살을 하는 것이 그들의 장기였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방어 자세로 나오면 정찰대만으론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저 거대한 방벽을 오래 유지하는 건 힘들겠지.’

    정찰대장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마법진이 유지되는 건 길어야 몇 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방벽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땅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내 위치도 곧장 특정한 녀석이다. 방벽이 유지되는 동안 부하들의 탐색을 끝내겠지.’

    그렇게 된다면 다크 엘프가 자랑하는 암살은 통하지 않게 된다.

    그 뒤로는 힘과 힘이 격돌하는 전투가 될 게 뻔했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소모전은 피하고 싶었다. 드루인은 안 그래도 규모가 작은 부족 국가였다.

    ‘죄송합니다, 족장님.’

    정찰대장은 속으로 족장에게 용서를 구했다. 정찰대로 충분히 습격자들을 섬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오판이었다.

    ‘위치가 발각된 이상, 동일한 인원으로 싸우는 건 힘들다.’

    차라리 본대와 합류해서 싸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정찰대장은 족장을 믿고 있었다. 그라면 충분히 아론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들과 만난 순간 정찰병을 본대 쪽으로 보낸 게 다행이었어. 소식을 들은 본대도 만일을 대비해 출발했겠지.’

    속으로 계산을 끝낸 정찰대장은 본대까지 퇴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론이 걸어둔 속박 마법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

    서걱!

    정찰대장은 서슴지 않고 자신의 두 다리를 깔끔하게 칼로 베었다.

    “워든! 퓨리!”

    그는 자신의 옆에 있던 다크 엘프 두 명을 불렀다.

    “…… 대장!”

    그들은 정찰대장의 결단에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동요는 잠깐이었다. 그들은 정찰대장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지체 없이 그를 부축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허.”

    아론은 그 광경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자기 다리를 잘라?’

    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정찰대장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상관없어. 이러면 시간 낭비하지 않고 한 번에 녀석들을 쓸어 버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도주하고 있는 정찰 부대를 바라봤다.

    녀석들은 한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본대와 합류한 다음에 본격적인 전투를 노린다는 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녀석들을 추격한다!”

    “예!”

    아론이 명령하자 워 메이지를 비롯한 마도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엘, 켄트. 나눠준 신호기를 잘 들고 있어라. 신호가 오면 행동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론은 두 사람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낸 뒤 후퇴하는 정찰대를 뒤따라갔다.

    ***

    야심한 밤.

    인간과 엘프는 한창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빠르군.’

    아론은 전력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도망치는 다크 엘프들을 따라잡기란 힘들었다.

    추격 과정에서 녀석들의 병력을 좀 줄이려고 했는데, 속도를 맞춰 따라가는 것만 해도 힘이 벅찼다.

    게다가 이곳은 드루인의 영역이었다. 가는 길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아론은 그것들을 탐색하면서 가는 중이었기에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다크 엘프의 뒤꽁무니를 쫓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어차피 추격의 목적은 섬멸이 아니었다. 섬멸전은 본대를 마주하고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녀석들은 모르겠지. 내가 본대와 싸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잠시 후, 확 트인 평야가 나타났다. 아론은 손을 들어 추격을 중지시켰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다크 엘프 병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쿠브의 힘으로 알 수 있었다.

    ‘정찰 부대가 본대랑 합류했군.’

    아론은 녀석들의 수가 대략 천 명은 넘는다고 판단이 되었다. 에드먼스 쪽 병력 한 명당 열 명을 맡아야 하는 셈이었다. 괜히 카니안과 그 부하들이 비아냥거렸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론은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만반의 준비는 이미 마쳐 두었다.

    그는 몰래 아티팩트를 사용해 라엘과 켄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어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다크 엘프 녀석들이 공격하려는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피잉-!

    활시위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오러를 두른 화살들이 아론의 부대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아론은 곧장 커다란 배리어를 펼쳤다. 단순히 마력만으로 구동하지 않고 신력도 이용했다.

    콰쾅!

    무수한 화살과 배리어가 충돌했다. 오러가 섞여 있는 화살이라 그런지 에너지가 상당했다.

    아론은 공격을 막아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 정도면 몰라도, 이 공격이 계속되면 혼자서 막아내는 건 힘들었다.

    ‘두 사람의 준비가 빨리 끝나길 빌 수밖에.’

    아론은 라엘과 켄트가 자신이 요구한 바를 수행할 때를 기다렸다.

    저벅저벅.

    그때, 멀리서 다크 엘프의 족장 델피오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정찰대장으로부터 아론이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들었기에 굳이 몸을 숨기지 않았다.

    “건방진 에드먼스의 애송이 녀석. 여기가 어디라고 습격을 했느냐? 그것도 이 야심한 시각에?”

    델피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밤을 이용하는 것은 다크 엘프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 녀석들이 굳이 그 시간을 이용해 쳐들어온 것이 되게 거슬렸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이끌고 환대해줘서 고마운걸.”

    “환대? 정신이 나갔군. 네 녀석은 우리를 얕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지. 나도 궁금하거든. 정찰대장의 두 다리를 자른 대가가 얼마일지 말이야.”

    아론의 그 말에 델피오는 이를 부득 갈았다.

    “곱게 죽을 생각은 말아라, 애송아.”

    스릉!

    델피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론은 한껏 도발했지만, 녀석의 태세에 살짝 긴장했다.

    ‘아직은 타이밍이 아닌데.’

    아론은 지금 다크 엘프의 화살을 막아내는 거로도 벅찼다. 거기에 족장의 공격이 더해진다면 배리어가 박살 나는 건 자명했다.

    피융-

    그때, 아론이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잘해주었다.’

    아론이 두 사람에게 부탁한 일들이 이제 일어나고 있었다.

    하늘로 여러 발의 불꽃이 날아갔다. 최고 높이에 도달한 불꽃은 펑 소리를 내더니 아래를 향해 환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조명탄의 역할을 해줬다.

    빛이 비치고 있는 곳에는 숨어 있던 다크 엘프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명은 단순히 다크 엘프들의 위치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반 다크 엘프 병사들은 어둠의 힘을 빌려 약간의 오러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빛이 생기니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론은 델피오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피유웅-

    아직 수십 발의 조명이 더 남아 있었다.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자 일대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공격하라!”

    아론이 명령했다. 그러자 마도병들이 일제히 하위 공격 마법을 시전해 날렸다.

    아직 다크 엘프 전사들은 힘이 남아 있었기에 마도병의 공격쯤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아니었다. 오러의 힘을 잃어버린 순간부터 일개 인간 병사와 동등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녀석들은 마도병의 공격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아론의 마도병 뿐만이 아니었다. 워 메이지 두 명도 마법을 펼치며 다크 엘프들을 정리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델피오는 이러한 전투를 예상하지 못했다. 전장이 이렇게 환하게 될 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물론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들을 찾아내려는 녀석들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술자를 죽이면 그만이었고, 라이트 마법은 이렇게 넓게 비춰주지도 않았다.

    ‘하늘에 떠 있는 저건 마법이 아니다.’

    미약하게 마나가 느껴지긴 했지만 마법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수십 개의 빛을 제어하기엔 숫자가 부족했다.

    ‘인간들이 이런 걸 만들어냈다고?’

    델피오는 아론에게 자신들을 얕봤다고 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얕본 건 자신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드워프들에게 고맙군.’

    아론은 속으로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물건들은 드워프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들은 그린데란트 산맥의 난폭한 몬스터들에 맞서 야간에도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그들에게 마법사는 없었으니 이러한 도구의 힘을 빌려 싸웠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인간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음에 당황할 뿐이었다.

    델피오는 주변을 살폈다.

    다크 엘프들의 다수가 동요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선 싸울 수 없다.’

    휘익!

    델피오는 후퇴 신호를 보냈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 다크 엘프 전사들이 나머지 병력을 엄호하며 도주했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그들이 쉽사리 도망치게 놔두지 않았다.

    피융-

    그들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조명이 쏘아졌다.

    이는 좋지 않았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전사들도 오랜 시간 빛에 노출되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분명 저 도구들은 멀리서 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들의 위치를 알고 계속 수정해서 발사하는 거지?’

    델피오는 순간 아론의 모습을 보고 알아차렸다.

    ‘저 녀석이 신호를 주고 있구나.’

    이러다간 도망치다가 병력이 크게 손실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이유를 잃게 된다.

    ‘차라리 저 에드먼스의 망나니를 치는 게 낫겠어.’

    델피오는 그렇게 생각하고 발을 멈추었다.

    “드디어 싸울 마음이 생긴 거야?”

    아론은 능글맞게 웃으며 녀석을 마주했다.

    그도 이런 상황이 반가웠다.

    드워프들이 준 조명탄 덕분에 이곳의 병력들은 대부분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여기 말고도 작은 성채가 몇 개 더 있었다.

    거기까지 밀어 버리기 위해선 족장을 처리하는 게 필수였다.

    “역겨운 인간 녀석.”

    델피오는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 네놈의 목을 가져가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오러를 한껏 끌어올렸다.

    * * *

    다크 엘프들은 아이젠 왕국에 붙어 이종족 격퇴에 앞장섰었다.

    인간에 비해 절대 수가 부족했던 이종족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의지했었지만, 다크 엘프는 그 정보들을 인간에게 모조리 넘겼다.

    그 대가로 아이젠의 비호를 받은 다크 엘프만이 대륙에서 독립 왕국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이종족들은 멸망하기 전, 자신들의 신에게 빌었다. 부디 저 배반자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그래서 다크 엘프들은 빛이 비치는 시간에는 힘이 약해지는 저주를 받았다.

    물론 족장 델피오를 비롯한 강인한 다크 엘프 전사들은 피나는 수련을 통해 빛에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 델피오가 조명탄이 비추는 이 상황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선제공격을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오러를 끌어 올리는 델피오를 보며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파지직!

    아론의 손에서 발현된 전격 마법이 쾌속으로 델피오를 향해 날아갔다.

    델피오는 전신에서 오러를 방출해 전격을 흩뜨렸다. 그러고는 검을 휘둘렀다.

    ‘……?’

    아론은 그의 공격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검로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파사삭!

    오러가 실린 검풍이 낮게 내려온 조명탄들을 부수었다. 덕분에 나머지 다크 엘프들이 어둠 속에 숨을 수 있었다.

    ‘저들의 도주를 도울 생각이군.’

    아론은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동족까지 팔아먹은 녀석들이 자기 종족은 끔찍하게 지키는구나. 제법 눈물겹네.”

    동족은 엘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론의 비아냥에 델피오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나불대지 마라.”

    “예, 예. 배신에도 이유가 있었겠지요.”

    쿠구구……!

    델피오의 전신에서 검푸른 색을 띤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마력…… 은 아니군. 그거랑은 다른 기운이다.’

    오히려 요정족의 힘과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프의 시조가 요정족이라 했었나?’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신력에 비하면 엘프의 힘은 열화판이었다.

    “내 앞에서 촐랑거린 대가, 그리고 부족을 모욕한 죄는 꽤 비싸게 치를 것이다.”

    어느새 눈동자까지 검게 물든 델피오는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아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빠르다!’

    일순 그의 움직임이 선처럼 보일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델피오는 정직했다. 아무리 빠른 속도라 할지라도 직선으로 짓쳐 들어 온다면 오히려 대응하기 편했다. 정밀하게 조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우웅-!

    아론은 순식간에 마나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 올려서 화염 마법을 방출했다.

    꽈앙!

    거대한 두 힘이 충돌했다.

    지축이 진동하고 흙먼지가 비산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내 공격이 막혔다고?’

    델피오는 속으로 당황했다.

    그의 전력을 다한 일도는 성문조차 부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고 평가가 나 있었다.

    하지만 아론의 화염 마법을 뚫지 못했다.

    물론 아론도 그의 실력에 내심 놀란 상태였다.

    ‘이 녀석은 강하지만 그래도 에르파보단 약하다. 그걸 고려해서 날린 공격이었는데.’

    하지만 델피오의 검격에 막히고 말았다.

    ‘족장의 몸을 감싸고 있는 저 검푸른 색의 힘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델피오는 아론을 노려보며 검을 다시 굳게 쥐었다.

    ‘순간적으로 큰 화력의 마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녀석에게 시간을 줘선 안 된다.’

    델피오는 그렇게 판단 내렸다.

    아론의 마법은 자신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힘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론에게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타다닥!

    델피오는 재빨리 발을 놀려 아론을 향해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검사와 마법사라는 차이가 있었기에 육체 단련에 매진한 델피오가 아론을 따라잡기는 쉬웠다.

    델피오는 즉시 오러가 실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쾌검이 아론에게 쇄도했다.

    파바바박!

    어마어마한 속도의 연격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간발의 차로 그 공격을 계속해서 피하고 있었다. 몇몇 공격은 그의 살갗을 베었지만 가벼운 생채기만을 남겼다.

    아론은 델피오에게 반격하지 않고 거리를 벌리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사의 전투에 있어서 거리 유지는 생명과도 같았다. 지금처럼 아론이 처한 상황에선 마법사의 패배였다.

    하지만 아론에겐 실력이 있었다. 그래서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버틸 수 있었다.

    ‘맥도 못 추리는 군!’

    델피오는 아론을 공격하며 생각했다. 그는 확신을 가졌다. 이렇게 쉴새 없이 공격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길어야 수십 합 안에 끝날 것이다.’

    그러나, 델피오의 생각과 다르게 아론은 자신의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아론은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녀석이 힘을 쓰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었다.

    ‘이게 다크 엘프의 힘. 확실히 신력은 물론이고 마나랑도 다르다.’

    힘에 따라서 순수함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줄기는 같았다.

    ‘이 힘의 맥은 어디에 숨겨져 있지?’

    아론은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숨겨진 줄기만 찾는다면 요정족 검사 에르파가 보여주었던 브레이커처럼 힘을 파훼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긴가!’

    이내 아론은 델피오가 방출하는 힘의 줄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아론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아론이 알고 있는 마나의 술식, 그리고 신력의 술식을 조합하고 해체하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그의 머릿속에서 델피오가 사용하는 힘의 술식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제 알겠어.’

    아론은 이제 델피오의 공격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가 아론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면 혀를 내두를 게 분명했다.

    전투를 하는 도중에 상대방의 공격을 분석하고 그 술식을 재구성해서 머릿속으로 굴린다니. 그건 고요한 상황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해도 쉽지 않았다.

    범인은 결코 시도할 수 없는 발상. 아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휙- 휙-

    아론은 델피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이제 흐름이 보인 순간부터 그의 공격은 더 이상 공격이 아니었다.

    델피오도 이상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아론이 달라짐을 체감했다.

    마치 자신의 검로를 읽은 것 마냥 아론은 계산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공격을 읽고 있는 건가?’

    델피오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쾌검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혹은 확신이 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아론은 형용 불가능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델피오는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태워 가면서 점점 공격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족장의 마지막 발악은 아론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미 분석이 끝난 공격은 그 속도가 높아져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아론은 이제 굳이 회피만 하지 않았다. 델피오가 보여준 빈틈을 노려 얼음 마법을 녀석의 가슴팍에 날렸다.

    펜던트의 마나에 신력이 곁들여진 강력한 공격이었다. 델피오가 막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푸욱-!

    하지만 델피오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녀석의 검은 아론의 왼쪽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크윽.”

    아론은 당연히 델피오가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깨가 비어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델피오가 목숨을 포기하고 공격을 해올까 싶었는데.

    ‘진짜 검을 내지를 줄이야.’

    예상외의 공격이었지만 아론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피해는 고작해야 팔 한쪽을 잠깐 쓰지 못하는 거였다.

    푸확!

    반면 델피오의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얼음 마법이 뚫고 지나간 그 공동에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델피오는 태생이 강인한 전사인지라 아직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래도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웃기는군.’

    아론은 델피오가 이런 행동을 보여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녀석은 자신과 전투를 벌일 때부터 죽음을 각오해 둔 상태였다.

    델피오는 단순히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었으니 최소한 동귀어진을 노렸다.

    아론은 이번 에드먼스 습격 부대의 대장. 그가 전투 불능에 빠진다면 공격은 중단될 거고 나머지 다크 엘프들이 무사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론은 녀석이 그렸던 희생정신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에게 다크 엘프의 명운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쿠브.’

    아론은 속으로 쿠브를 불렀다.

    [응!]

    쿠브가 반응했지만 그는 근처에 없었다. 전투를 시작하고 나서 다크 엘프의 후미에 위치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법을 발동해 줘.’

    [알겠어!]

    만약 델피오와의 전투에서 쿠브가 있었더라면 어깨를 내주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쿠브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쿠우웅-!

    다크 엘프의 도주 경로에 거대한 벽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성벽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커다란 벽이었다.

    이전에 그린데란트 산맥에서 전투를 할 때, 루테룬의 성문을 막았던 상황을 응용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큰 벽을 만들 수 있었는데, 쿠브의 실력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다크 엘프들은 당황했다.

    완전한 어둠이면 모를까, 조명탄 덕분에 대낮처럼 환한 지금은 그들의 힘이 온전하지 못했다. 도저히 저 벽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론은 델피오를 살폈다.

    녀석은 어느덧 죽음을 맞이해 있었다.

    그는 시체를 뒤로하고 에드먼스의 부대에 합류했다.

    “다, 다가오지 마!”

    잔존한 다크 엘프 병력들은 거대한 벽을 뒤로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아론의 병사들과 마주했다.

    다크 엘프 전사들도 남은 힘은 절반밖에 없었다. 조명탄에 너무 오래 노출된 덕분이었다.

    아론은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을 포로로 잡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녀석들은 족장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 아론이 그를 죽였다는 걸 아는 순간적으로 돌아설 게 분명했다.

    ‘그러면 힘을 잃은 지금이 처리하기에 적기다.’

    아론은 결국 공격을 명령했다.

    조명탄을 쏘고 돌아온 라엘과 켄트도 합류했기에 잔존 병력을 소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론은 이날, 자신이 처음으로 이끄는 부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 * *

    아론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 만족했다.

    드루인 성에서 출진한 다크 엘프 병력들은 모두 처리했다. 거기다가 족장인 델피오도 죽였으니 녀석들은 구심점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론과 병사들은 드루인 성에 들어섰다. 성은 텅텅 비어 있었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다크 엘프들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다른 성으로 피난을 간 모양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무력화만 시키면 되니까.’

    오히려 불필요한 살상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래도 잔존 병력이 있을지 몰랐다. 아론은 병사들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혹시나 숨어 있는 다크 엘프가 있거나 귀중한 물건이 있을 수도 있다. 샅샅이 수색해라.”

    “예!”

    “최대한 빨리 끝내라. 언제 아이젠에서 병력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아론은 그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망친 다크 엘프들은 대부분이 드루인 영역에 있는 나머지 성으로 갔을 거다.

    하지만 소수의 인원은 아이젠에 소식을 전하러 출발했을 게 분명했다.

    아론이 도달해 드루인 성을 박살 냈다는 정보를 듣고 아이젠이 재빠르게 병력을 투입시킬지도 몰랐다.

    아론 에드먼스의 수급을 탐내는 녀석들도 적지 않았다.

    아론으로서는 지금 녀석들과 마주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다크 엘프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조명탄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기사들에게는 아무리 조명탄을 써봐야 녀석들의 눈만 밝혀줄 뿐이었다.

    한편, 병사들은 전투가 끝났지만 여전히 고양감에 휩싸여 있었다.

    천 명이 넘는 다크 엘프들을 고작 백 명밖에 안되는 자신들이 이겼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아론 도련님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걸 이제 믿기 시작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병력을 맡고 똑같이 수행하라고 명을 받는다면 감히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론이 준비한 조명탄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자신들은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처음엔 저 빛나는 거로 뭘 하나 싶었지만, 하늘에 쏴 올려서 전장을 비춘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실제 효과를 보니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나, 이번에 공을 인정받아서 진급할 수 있을지도?’

    라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분 좋게 성의 수색을 진행했다.

    잠시 후. 그는 병사들과 함께 내성을 수색하다가 예상치도 못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

    복식을 보아하니 아이젠의 귀족인 모양이었다.

    라프는 즉시 녀석을 포박하고는 아론에게 데려갔다.

    “아이젠의 귀족을 발견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라프는 보고하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자신의 공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론은 포박당한 귀족을 쓱 훑어봤다.

    ‘이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건…….’

    아무래도 아이젠에서 자신들의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대비시키기 위해 알려주려 온 녀석이라 짐작되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군.’

    아론은 다크 엘프가 자신의 출진조차 몰랐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보를 재빠르게 확보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놓친 점이 있다면 아론이 드워프들의 마차를 타고 올 거라는 건 몰랐다는 거였다.

    그게 알려졌더라면 이번 작전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아이젠의 귀족은 아론을 보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이봐! 나는 이래 봬도 아이젠의 귀족이다! 예우를 갖춰서 포로 대우를 해주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을 보며 아론은 콧방귀를 뀌었다.

    대부분의 기사는 긍지가 높았다. 전장에서 이런 상황에 봉착한다면 대부분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실력도 없을뿐더러, 지킬 명예조차 없군.’

    아론은 별 기대를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가 귀족이면 이름부터 밝히는 게 맞지 않나?”

    “나는 랑글렌 바티다.”

    아론은 녀석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곰곰이 찾아보았다.

    ‘아. 드루인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의 작위 기사군.’

    이웨카 길드로부터 아이젠의 주요 귀족들의 정보를 받았고, 녀석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이젠에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낼 정도의 인물이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 거다.’

    마른오징어도 짜면 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과연 이 녀석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

    아론은 귀족으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뒤 즉시 병력을 마차에 태우고 이동했다.

    [우리는 네가 습격할 곳을 세 곳으로 줄여서 예측했었다. 이곳과 몰트, 오르세. 드루인 말고 나머지 지역에는 직접 우리 병력을 보냈다.]

    아론은 이동하면서 녀석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몰트와 오르세 역시 에드먼스의 병력이 곧 있으면 당도할 곳이었다.

    녀석은 그러면서 이상한 말을 했었다. 오르세로 향한 병력들이 심상치 않다고 했었다.

    아론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추궁했다. 그러자 녀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정보를 술술 불었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하지만 녀석들,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 같이 보였었단 말이다. 게다가 기분 나쁜 기운도 풍기고 있었고…….]

    [혹시 기운의 형태가 검은색이었나?]

    [맞아 그랬었어. 너도 본 적이 있나?]

    아론은 그걸 들은 순간 생체 골렘이 된 병사들이 오르세로 간 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그래서 급히 병사들을 데리고 오르세로 가고 있었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오르세로 간 에드먼스 병력은 처참하게 깨질 거야.’

    생체 골렘을 정식으로 전장에 꺼내 들 정도면 트레벨에서 실험을 거의 마무리 한 모양이었다.

    ‘녀석들이 전장을 활보하게 된다면, 전세가 뒤바뀔 수 있다. 그건 막아야 해.’

    아론은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 직접 오르세로 향하고 있었다.

    “아론 님. 괜찮을까요?”

    같이 마차에 탄 켄트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녀석들은 강하기도 했지만 마법에 면역이 있었잖아요. 에드먼스 병사들의 실력을 낮게 보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마법과는 상극인 녀석이니까요.”

    “그래서 내가 가는 거다.”

    하지만 켄트의 염려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론이 당시에 얼마나 힘들게 놈들과 싸웠는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걱정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아론은 켄트를 안심시켰다.

    그건 허풍이 아니었다.

    이전에 흑마법사들을 무력화시켰던 쇼크웨이브 마법. 그걸 좀 응용해서 생체 골렘에게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

    에드먼스 공작가에서는 아론이 출정 일정을 어그러뜨렸으니, 그들도 예정했던 거보다 빠르게 병사들을 모아 출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사정이 나았다.

    아론 측과는 달리 워프 게이트를 타고 전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목표로 하는 곳은 아이젠이 아니라, 그들의 속국인 네 국가였다.

    에드먼스는 빠르게 병력을 이동시켜서 동시에 전투를 일으켰다.

    그 결과 두 곳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 두 나라는 마법사에 대한 방비가 부족했고, 에드먼스의 병력은 파죽지세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국가와의 전투에선 고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이젠의 병력이 빠르게 도착해 지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 하나가 오르세였다.

    오르세는 아이젠의 속국 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에드먼스에서도 아이젠의 지원이 늦게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력들이 오르세를 도와 에드먼스와 전투를 치루었다.

    녀석들은 아론이 추측했던 생체 골렘이 된 병사들이었다.

    생체 골렘들은 고통이 제거된 것마냥 전장에서 활개를 쳤고 파괴력 역시 출중했다. 게다가 마법도 강한 것이 아니고서는 통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아론이 마주했던 기간츠 급은 아니었다. 이 생체 골렘들은 녀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열화판이었다.

    그래도 이런 녀석을 처음 상대하는 에드먼스의 병력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결국 오르세를 공략하기 위해 진군했던 병력들은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생체 골렘은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신체 능력이 좋았기에 추격에서도 월등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에드먼스의 병력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도주해야만 했다.

    이게 위험한 방법인 건 알고 있었다. 아마 그들 중 몇몇 부대는 전멸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최악보단 차악이 나았기에 에드먼스는 피해를 감수하고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택했다.

    ‘그게 하필 우리 부대일 줄이야!’

    지휘관 중 한 명인 네메린.

    그는 도주하면서 속으로 울부짖었다.

    분명 여러 방향으로 도망쳤는데, 생체 골렘의 다수가 자신의 부대를 추격하는 중이었다.

    ‘젠자앙……!’

    네메린은 병사들과 함께 죽어라 달렸다.

    하지만 마법사들과 달리 생체 골렘은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러면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전멸이야.’

    네메린은 차라리 부대를 돌려서 저 괴물 같은 녀석들과 전투를 치루는 게 오히려 피해를 적게 볼 거 같다고 생각했다.

    “도주 중지! 이제부터 녀석들을 요격한다!”

    네메린은 병사들에게 명령해 선두에 있는 생체 골렘을 향해 집중포화를 날렸다.

    파각-!

    달려오던 생체 골렘들은 팔이 박살 나거나 다리가 박살 났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 상태로도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제일 기괴한 놈들은 머리가 날아갔는데도 숨이 붙어서 움직이는 녀석들이었다.

    에드먼스의 병사들은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피잉-!

    게다가 생체 골렘의 뒤에 위치한 오르세의 궁병들이 활을 쏘았다.

    속사였기에 제대로 종종 같은 편인 생체 골렘을 맞추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혹시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걸까?’

    네메린은 자신의 판단을 자책했다. 오히려 이 선택이 병사들을 더 빠르게 전멸로 이끌지도 몰랐다.

    곧 있으면 선두의 생체 골렘이 병사들과 충돌할 것이다. 도미노 쓰러지듯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네메린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휘오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마나 폭풍이 불어와 생체 골렘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네메린의 눈에 생체 골렘에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 어?”

    기운이 빠져나간 생체 골렘은 작동이 정지한 기계마냥 쓰러졌다.

    대다수의 생체 골렘은 마나 폭풍을 버티지 못했다. 네메린의 부대를 추격하던 생체 골렘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원군인가?”

    네메린은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쾅! 콰앙!

    이어서 마법 폭격이 시작되었다.

    생체 골렘의 뒤에 있던 오르세의 병력들을 노리고 불덩이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은 7서클 마스터의 마법사.

    그런 그도 생체 골렘을 쓰러트리는 데 힘이 들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생체 골렘들을 초토화시켰단 말인가.

    에드먼스에서 자신보다 고위의 마법사를 데려와도 이건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아니지. 공작님은 가능할지도?’

    네메린은 이 이적을 행한 사람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는 전장의 소요가 잦아들고 나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거기에는 아론 에드먼스가 서 있었다.

    * * *

    “그쪽이 여기 지휘관이지?”

    “……예! 그렇습니다!”

    네메린은 아론이 말을 걸자 잠깐 얼을 타다가 힘차게 대답했다.

    “생체 골렘은 모두 죽었고, 남은 건 오르세의 병사들뿐이다. 저 정도면 자네 병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그런데, 저 녀석들 골렘이었습니까?”

    “응. 설명하긴 좀 기니까. 뒤처리는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아론은 네메린의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아직 다른 부대들이 생체 골렘의 추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숫자는 여기보다 적겠지만 그들에게도 도움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

    아론은 다른 곳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에드먼스의 지휘관과 병사들을 구해주었다.

    그들은 믿기 힘들었다.

    아론은 다른 곳에 먼저 출전해서 전투를 치르는 중이라 들었는데, 이곳에 지원을 오다니.

    그 말은 즉, 아론이 드루인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아론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무력은 그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아이젠의 지원군은 자신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마법을 무력화시키고 돌격을 감행하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론은 마나 폭풍을 만들어 내서 가볍게 녀석들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체 골렘에게도 이 방법이 먹혀서 다행이군.’

    아론의 발상은 간단했다.

    이전에 흑마법사들을 무효화시킬 방법을 궁리할 때 흑마법의 마탑주로부터 도움을 받았었다.

    그때 전수 받은 쇼크웨이브라는 마법. 주위의 흑마력이 응집하지 못하도록 흩뜨려버리는 기술이었다.

    생체 골렘도 인공 미티움을 이용해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래서 먹힐까 싶어서 사용해 봤는데, 정답이었다.

    기간츠 급의 생체 골렘은 힘들어도 이렇게 양산된 생체 골렘은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네, 이름은?”

    “카심 블론트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보고해라.”

    아론은 마지막으로 구해준 지휘관에게 자초지종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저희가 이겼다고 판단했었습니다. 오르세 성문을 뚫기까진 쉬웠고, 녀석들은 저항했지만 저희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죠.”

    카심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에 진입하고 나서부터 문제가 생겼었습니다. 성을 수색하던 도중, 지하에서 이상한 녀석들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게 바로 저 녀석들이었고요.”

    카심은 쓰러져 있는 생체 골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까 저희는 도망치기 급급했습니다. 제가 이끄는 병사들은 피해가 덜하지만, 아마 네메린의 부대는 꽤 병력을 잃었을 겁니다.”

    보고를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드루인에서 아이젠의 귀족을 생포하지 못했더라면, 이들을 구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했다.

    오르세로 향했던 에드먼스 병력은 전멸했을 것이다.

    ‘아이젠이 생체 골렘을 여기에만 보내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쓰고 있겠지.’

    아론은 일단 자세한 상황을 듣기 위해서 공작가로 귀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드루인에서 전투 병력을 괴멸시킨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지금이 딱 돌아가기 적기였다.

    ‘녀석들이 이런 움직임을 보인다면, 우리도 최대한 빨리 전면전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어.’

    생각을 마친 아론은 카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돌아가겠다. 아마 오르세에는 더 이상 생체 골렘이 없을 거다. 너희들끼리 공략을 계속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심을 비롯한 그들의 병사가 아론에게 인사했다.

    ***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공작은 비서로부터 전황 보고를 듣고 있었다.

    에드먼스는 지금 다섯 개의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중 한 곳인 드루인에는 아론이 갔고, 승리를 쟁취했다.

    나머지 네 곳은 아론이 공격하고 나서 전투가 벌어졌다.

    에드먼스는 정교하게 전쟁을 준비했기에, 전투에 돌입하기까지 막히는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이번 전투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두 지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쟁은 대륙의 패권을 누가 쥘 것인가를 가르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아이젠 녀석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

    공작이 다시 집무로 돌아가려고 할 때, 비서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론 님이 방금 막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래? 녀석을 부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비서는 공작의 집무실을 나갔다.

    공작은 허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무리해서라도 아론을 서열식에 참가하도록 한 것이 정답이었어.’

    아론은 공작의 기대를 어긋나지 않았다. 첫 전투부터 승리라는 과실로 보답해 주었다.

    솔직히 아론이 맡은 드루인 공략은 실패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상대가 다크 엘프였고, 아론이 병사를 지휘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그 미숙함도 감안했었다.

    하지만 아론은 승리했다.

    가장 성가시다고 여긴 상대를 초장부터 무력화시켰다.

    ‘만약 녀석들이 남아 있었더라면, 전면전에 들어갔을 때 꽤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방해물이 사라졌으니 공작은 더욱 과감하게 전략을 짤 수 있었다.

    보고를 들은 바로는 아론이 조명탄이라는 신기한 물건을 전투에서 사용한 것 같았다.

    ‘아마 드워프의 조력이 있었겠지.’

    아직 인간들은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아론이 드워프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워프는 자녀들을 후원하는 세력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아닐까 싶었다.

    잠시 후, 아론이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보고는 들었다. 잘해주었다.”

    공작은 아론을 칭찬했다.

    아론 역시 공작이 웬만해선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원래라면 승전식을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전쟁 중이니 이해해 줬으면 한다.”

    “괜찮습니다.”

    공작은 비서에게 보고를 들었던 걸 아론에게 말해주었다.

    “그렇군요. 생체 골렘이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다니.”

    “오르세는 네 덕분에 막을 수 있었지. 하지만 아이젠으로 가는 중요한 지역인 코드로바는 뚫지 못했다.”

    “코드로바 공략을 맡은 사람은…….”

    “그래. 일리아지.”

    그녀가 이끄는 부대는 최초 전투에서 녀석들에게 크게 패배해 물러났다.

    “방치했더라면 일리아의 부대는 전멸했을 거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라크를 원군으로 투입시켰다.”

    “막내 덕분에 수습은 어찌 된 모양이군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젠이 이상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의 전력으로 삼을 줄은 몰랐다.”

    “녀석들도 꽤나 박차를 가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코드로바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지역이다. 그래야 대규모 병력이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다.”

    공작은 결심을 한 듯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략을 변경할 계획이다. 원래는 아이젠의 주요한 속국부터 무력화시키고 전면전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정을 좀 당겨야겠군.”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일단 첫째를 부를 거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론은 놀랐다. 첫째는 마계의 문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아이는 오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니,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야겠지.”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널 코드로바 공략에 투입할 생각이다. 첫째가 오기 전에 그곳을 확보해야 한다.”

    아론은 공작이 자신을 중요한 말로 여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코드로바 지역은 앞으로 전투 행방을 크게 가르는 곳이었다. 그곳을 얻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분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런 곳에 아론을 투입한다는 건,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파격적인 신분 상승이군.’

    이전의 망나니였더라면 이런 취급을 받지도 못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그렇기에 아론은 수락했다.

    그도 전쟁을 빠르게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첫째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고.’

    에드먼스의 나머지 자제들은 모두 만나 보았지만 첫째만은 아직 얼굴조차 몰랐다.

    어찌 보면 포드의 첫 번째 제자라고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일지 궁금했다.

    “이번에도 소수 병력으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너는 성과가 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까지 동원할 계획이니 아론 역시 빠르게 행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공작은 함을 하나 열어서 아론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라.”

    “……이건.”

    아론은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녹색 보석이 박힌 펜던트.

    일리아가 가지고 있던 바유 소드를 녹인 아티팩트였다.

    “예전에 일리아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녀석에게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네게 주려고 한다.”

    아론은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펜던트를 받았다.

    ‘이래도 되나?’

    그래도 일리아의 소유물이었다.

    왠지 남의 것을 빼앗는 것 같아 약간은 거부감이 들었다.

    “일리아는 부상을 당했으니 한동안 전투에 참여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네가 그걸 더 잘 쓸 것 같기에 주는 거다. 일리아도 그 부분은 동의하고 양도했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받았다.

    “그럼,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겠다.”

    ***

    아론은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칠검을 받아버렸군.’

    그는 펜던트를 챙겨서 넣었다.

    ‘그만큼 공작이 날 신뢰하고 있다는 걸까.’

    아무래도 이번에 있었던 드루인 공략전 소식을 듣고 자신의 평가를 꽤 올린 모양이었다.

    ‘기대한다라.’

    공작으로부터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는 뜻이 함유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코드로바 공략이 실패했다. 일리아를 그곳에 투입한 건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공작의 의지였다.

    그다음 타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쉽지는 않겠어.’

    한번 에드먼스의 군세를 막았으니, 녀석들은 더욱 방어를 굳건히 할 게 뻔했다.

    아이젠의 입장에서도 코드로바는 중요한 곳이었다. 거기가 뚫리면 대규모 병력이 아이젠으로 들이닥친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움직여야겠군.’

    코드로바로 가기 전까지, 아론도 나름대로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