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32/40)

Chapter 2

아론은 예상치도 못한 자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스라크라고?’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라크는 포드가 예전에 만났던 요정족의 사념체였다.

아론은 그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나이 든 목소리와는 다르게 외양은 매우 젊었다.

하지만 요정족의 신체 나이는 웬만해선 늙지 않았기에 실제로 몇 살을 살았는지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아론은 그 점이 의아했다.

스라크는 사념체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이 공작을 처음 마주했을 때에 느꼈던 기운과 비슷했다.

“한 번에 그 지식을 모두 전승받고도 멀쩡하다니. 넌 보통이 아니구나.”

스라크는 아론을 흥미로운 눈빛을 띤 채 보고 있었다.

“이 책은 당신이 쓰셨다고 하셨지요?”

“맞아.”

“혹시 책의 지식을 전승받으려면 스라크 님에게도 증명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뭐, 증명?”

아론은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도 증명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너…… 그건 어떻게 아는 거냐?”

하지만 스라크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요정족에게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격을 증명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 물어봤습니다.”

“요정족에 대해 좀 알고 있구나?”

“얼마 전에 솔티어크에 다녀왔습니다.”

“오.”

스라크의 더욱 아론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 책을 얻기 위해서 로드로부터 자격 증명을 받았을 거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필요 없지. 그리고 네가 정말 자격이 없었더라면 그 책의 지식을 흡수하지도 못했을 거다.”

스라크는 아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번 내 앞에서 융합 마법을 써봐라.”

“알겠습니다.”

아론은 군말 없이 따랐다.

스라크는 자신이 전승받은 책의 저자였다. 그 사람에게 시연을 보이고 평가받는 건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아론은 마법을 써보기 전에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들을 정리했다.

새로 받아들인 정보는 마치 원래 자기 거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서 얻은 정보를 재현하기가 수월했다. 아론은 그저 흐름에 맡기면서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됐나?’

아론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눈앞에는 거칠게 요동치는 마나 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다. 그 안에는 불의 기운, 물의 기운, 대지의 기운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이게 내가 만든 건가?’

너무 자연스럽게 발현되어서 이게 맞나 싶었다.

아론은 자신이 만들어낸 최초의 융합 마법의 결과물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아직 연습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처음 치곤 나쁘지 않다.”

스라크는 아론이 만든 결과물을 보고 한마디 거들었다.

“그나저나 너, 솔티어크에 갔다 왔다고 했지? 그러면 다른 요정 녀석들도 봤겠구나.”

그는 아론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손을 뻗었다.

“잠깐 좀 빌릴게.”

아론과 스라크 사이에는 철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사념체에게 물리적인 장벽은 의미가 없었다.

스라크의 손이 아론의 머리에 닿았다. 그러자 아론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다.’

스라크는 눈을 감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로드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군.”

가끔 음, 하고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에르파가 벌써 요정족 최고의 검사로 성장했다고? 그 꼬맹이 녀석이? 허, 참.”

아무래도 아론의 기억 속에서 요정들에 대한 기억만을 뽑아서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른 기억을 살펴보진 않는구나.’

아론은 알 수 있었다. 스라크는 자신을 배려해서 요정을 봤던 기억만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아론의 기억을 뒤져다 본 스라크는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고맙다. 덕분에 요정들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나만 일방적으로 얻어갈 순 없지. 답례로 나한테 아무거나 물어보거라. 대답할 수 있는 건 대답해 주겠다.”

아론은 뜻밖의 보상에 횡재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기억 좀 본다고 손해 보는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스라크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몇 개 있었으니 좋은 기회였다.

“스라크 님은 포드 님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아론은 먼저 그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포드가 사념체와 만났다는 건만 알았다뿐이지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전무했다.

“거래 관계다. 내가 포드에게 힘을 주는 대신에 포드는 나 대신 임무를 수행해 주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포드에게 요정족의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힘을 건네주었다.”

“그 대신에 받은 임무라는 건 뭡니까?”

“마계의 문을 막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계의 문…… 이요?”

“그래. 마계의 문이 생겨났는데 막아두지 않으면 마계에서 서식하는 괴물들이 넘어오거든. 녀석들의 강함은 대륙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미리 막아 둘 필요가 있지. 또 그걸 인공적으로 열려고 하는 녀석들도 있어서 골치가 아파.”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포드 님은 에드먼스 가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한 번 있긴 했다.

아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러 왔었고, 맹약을 어긴 대가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그건 포드가 힘과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서 그런 거다.”

“넘겨줬다고요? 누구에게요?”

“너희 첫째 형한테 양도했다.”

아론은 깜짝 놀랐다.

‘첫째에게 넘겨줬다고?’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론이 놀라고 있을 때, 스라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에드먼스의 현 가주…… 이름이 카이만이었나? 어쨌든. 그 녀석 이전부터 이 가문은 요정족의 힘을 찾아다녔다고 하더군. 우리들의 힘을 알고 싶었던 모양이지. 이해는 해. 마법이란 걸 우리가 만들었으니 말이야.”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아론은 무어라 대꾸도 못 하고 스라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전대 가주가 포드를 만나게 되었지. 당시에 포드는 많이 지쳐 있었거든. 마계의 문을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요정의 힘을 찾던 전대 가주가 포드와 협상을 했다. 그 결과로 카이만의 첫째 아들에게 힘과 임무를 양도했지.”

그 기한은 첫째가 요정족의 힘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였다.

포드도 생각 없이 넘긴 건 아니었다. 첫째가 힘을 모두 이해하고 그걸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들이 익히면 마계의 문을 수월히 막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었다.

물론 포드는 그 조건이 완수될 때까지 에드먼스 가문에 머물기로 했다. 대신, 후계자 경쟁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만약 포드가 누군가의 편을 들면 균형이 깨어질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이야기를 전부 들었음에도 한동안 벙쪄 있었다.

‘……뒤에선 이런 이야기가 있었을 줄이야.’

전혀 생각도 못 했었다.

뜻밖에 에드먼스 가문이 노리고 있었던 것과, 포드의 맹약에 대한 내용까지 알게 되었다.

왜 공작이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그저 서열을 올리라고 대답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뒷면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마계의 문을 인공적으로 열려는 녀석들이 있다고 하셨죠? 그게 누굽니까?”

“트레벨이라는 단체였다.”

트레벨. 그 이름을 여기서도 듣게 될 줄이야.

“인간 녀석들의 단체라고는 하던데, 인간들로만 가능할 리가 없지. 분명 요정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스라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 아프게 됐어. 포드가 힘을 넘겨주고 나서는 자연스레 마계의 문을 막는 일에서도 멀어졌으니까, 대륙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모르겠거든.”

“저도 그 트레벨이라는 단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녀석들은 저를 추적하고 있거든요.”

“녀석들이 너를 왜?”

“제가 가진 미티움을 뺏으려고 했습니다.”

“아. 네가 끼고 있는 펜던트를 말하는 거군.”

스라크는 아론이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트레벨 녀석들은 아이젠과 연합한 모양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정말이야?”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라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음. 아이젠이 가담했으면 첫째만으로는 힘들겠는데. 아무리 요정의 힘을 받았다고 해도, 상대와 덩치에서 차이가 나면 좀 어렵지.”

스라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인지 아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에게도 요정의 힘을 나눠주지. 그러면 포드가 사용했던 마법을 너도 쓸 수 있어.”

“예? ……잠깐만요.”

아론은 섣불리 대답하는 것을 멈추고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겼다.

요정족의 힘을 전수받을 수 있다. 상당히 끌리는 제안이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는 족쇄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평생 차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 힘을 받으면 저도 마계의 문을 막으러 다녀야 하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제가 트레벨을 박살 내도 마계의 문을 막는 역할을 계속해야겠네요?”

“그래. 마계의 문은 열고 싶다고 쉽게 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녀석이 아예 없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왜? 좋은 제안이잖아?”

“요정족의 힘을 받을 수 있다니. 탐나긴 하지만, 저는 어딘가에 계속해서 종속되긴 싫습니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으음.”

스라크는 이런 대답이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인지 당황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없었던 이야기로 하지.”

스라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포드가 들고 있는 책이 있다. 그걸 완전히 익힌다면 너도 대가 없이 요정의 힘을 쓸 수 있겠지.”

“그걸 알려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방법이라서 알려준 거다. 로드 정도는 되어야 익힐 수 있거든.”

스라크는 사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설마 해볼 생각은 아니겠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론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 * *

“아론……. 아론…….”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아론은 그제야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론.”

계속해서 자신을 부른 건 포드였다.

‘어라? 스라크는?’

아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엔 포드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꿈이었나?’

하지만 꿈은 아니라는 건 이내 알게 되었다. 아론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정체 모를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스라크가 말한 그 책인가?’

알 수 없는 요정어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솔티어크에서 받아온 책과는 또 다른 글자였다.

“깨어났구나.”

포드가 아론을 보며 말했다.

아론은 그의 인자한 얼굴을 보니 스라크가 이야기해 준 것들이 떠올랐다.

포드와 에드먼스 가문 간의 맹약. 포드는 그것을 깨고 아론을 구했기에 새삼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서 아론은 그 감정을 다시 한번 표현했다.

“스승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스라크 님을 만났습니다.”

“그랬구나.”

아론은 이미 포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느꼈다.

“맹약을 어긴 것 때문이라면 미안해할 필요 없다. 내가 내 감정을 우선시한 거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포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도 표현하는 것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스라크가 너한테 뭐라고 했느냐?”

포드는 자신의 힘을 첫째에게 양도하고 난 이후로 스라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소식이 궁금했었다.

“가문에 대해서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힘을 주겠다고 제안을 하더군요.”

“혹시 힘을 받았느냐?”

“아닙니다. 힘이 탐나긴 했지만, 평생을 종속 받긴 싫어서요. 대신에 이걸 받았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건……!”

“스승님도 보셨던 책이라고 스라크 님에게 들었습니다.”

“그렇네. 이 책을 통해서 스라크와 처음 만나게 되었지. ‘요정의 마법에 대해’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걸 보니 예전이 그립구나.”

포드는 책을 바라보며 잠깐 회상에 잠겼다.

“읽는 데 애를 먹었던 책이지. 당시에 요정족의 언어 대부분을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오랫동안 끙끙거리다가 책에 잠들어 있는 사념체를 만났다네.”

말하자면 이 책은 스라크가 자신의 혼을 담아서 쓴 것이었다.

아론은 그 외에 들었던 이야기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트레벨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스라크 님은 녀석들이 순수히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단체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녀석들에 대해선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 목숨을 노리고 있고, 주변 사람들도 위험에 빠트리려고 하는 녀석들입니다. 당연히 뿌리를 뽑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지만 녀석들의 규모가 커서 쉽지는 않을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혼자는 물론이고 제 동료들과 힘을 합해도 이기기는 힘들겠지요.”

“생각해둔 다른 방법은 있나?”

“저 말고도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 그들과 뭉치면 됩니다.”

아론이 말하는 그들이란 에드먼스 가문을 의미했다.

철컥.

이 부분에 대해서 더 말하려고 하는데, 아론이 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면회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아론은 아쉬웠다.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었는데 시간이 야속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하게.”

포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또 무리하지는 않을지 염려되었다.

아론도 포드의 그 마음을 알았기에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 봬도 꽤 강해졌으니까요. 스승님을 최대한 빨리 여기서 꺼내드리겠습니다.”

아론은 그 말을 남기고 지하 감옥을 떠났다.

***

아론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를 맞이해준 건 공작의 비서였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만간 좋은 일이 있으실 겁니다.”

비서는 그 말을 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론 님의 서열식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서열식이요?”

아론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갑자기?’

본디 서열식이라는 것은 서열이 올라갔다고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예로 아론이 5위로 올랐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서열식을 받는 자제들은 정해져 있었다. 가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후계자들이었다.

‘지금까지 서열식을 받은 사람은 첫째와 둘째뿐이다.’

두 사람이 있었지만 사실상 둘째는 저번에 벌어졌던 흑마법사 사태로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후계자 경쟁에는 첫째가 독주하고 있는 상황. 여기서 서열식을 하겠다는 건, 공작이 나름 결단을 내린 거라고 볼 수 있었다.

‘나에게 기대를 걸겠다 이거지.’

하지만 서열식은 동시에 자신에게 족쇄를 걸겠다는 의미로도 느껴졌다.

첫째는 포드로부터 요정족의 힘을 계승 받고 그 대가로 임무를 수행 중이었기에 공작이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셋째는 이번 서열 대련을 통해 아론에게 패배해서 서열이 내려간 상황이었다.

첫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이렇듯 입지가 흔들릴만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대륙에는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흉흉한 분위기도 감도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서열식을 한다는 건 가문이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는 행위였다.

한창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론을 내세움으로써, 에드먼스의 후계자들은 아직 뛰어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덤으로 공작은 아론을 자신의 패처럼 쓸 수 있었으니 절대로 나쁜 결정이 아니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이걸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도 가문에 너무 종속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론이 처한 상태로는 서열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포드를 구해내기 위해서.

트레벨을 박살 내기 위해서.

공작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만, 아론도 역시 에드먼스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물론 아론은 공작의 충실한 개처럼 움직여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세한 건 공작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아론은 비서에게 자신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알겠습니다.”

“서열식은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비서는 그 말을 끝으로 아론과 헤어졌다.

***

서열식은 다음날 곧바로 열렸다.

서열 대련과는 달리 외부인은 초대하지 않았다. 가문 내의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이른 아침부터 예복을 입고 서열식을 준비한다고 바빴다.

“아론 님. 준비가 끝났으니 이동하겠습니다.”

아론은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서열식이 열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서열식은 마도의 전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아론이 그곳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벽면에 걸린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였다.

‘저들이 에드먼스 가문을 이끌어 온 자들이란 말이지.’

아론에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 세계에 온 초기에 도서관에서 각종 서적들을 읽으면서, 저들의 역사를 쓴 책에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화려한 마법 도구들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호화스럽군.’

사실상 이곳은 서열식을 제외하면 사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싸게 치장된 이유는 그만큼 에드먼스 가문의 사람들이 명예롭게 여기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본당으로 들어가니 공작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아론의 눈에 들어왔다.

“이쪽으로 오거라.”

공작이 아론을 보며 말했다.

아론은 천천히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화륵!

아론이 앞으로 나아가자, 그의 양옆으로 불꽃이 켜졌다.

아론은 거기에 놀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제 서열식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들었었다. 이렇게 검증의 융단 길을 지나갈 때, 양옆으로 불꽃이 생길 거라고 했었다.

그 불꽃은 여태까지 아론이 이루어온 업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만약 공작의 앞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불꽃이 중간에 멈추게 된다면, 아직 서열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돌려보내지게 된다.

얼마 전에 서열식을 거부 받은 게 셋쩨, 일리아 에드먼스였다.

그녀는 공작에게 다다르기 직전에 불꽃이 멈췄다고 했었다.

화륵! 화륵!

아론이 발을 디딜 때마다 차례대로 불꽃이 켜지고 있었다.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외부에 공표만 하지 않았다뿐이지, 자신은 여태까지 충분히 업적을 쌓아 왔었다.

‘그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자면 몇 날 며칠을 줘도 부족할 거야.’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화륵! 화륵! 화륵!

불꽃도 아론의 생각에 화답하듯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도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생에서는 만년 C급 헌터에 머물러 있었다. 항상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근근이 생을 연명해 왔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몇 년 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이룬 업적이 많았다. 그 증거가 바로 아론의 양옆에 켜지는 불꽃들이었다.

잠시 후, 융단 길의 끝에 도달한 아론. 앞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화륵!

마지막 불꽃이 켜졌다. 이로써 서열식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건 입증이 되었다.

공작의 주위로는 가문의 고위 마법사는 물론 원로들도 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음을 아론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론의 과거 때문이었다. 워낙 망나니짓을 많이 했었기에 그들에겐 그 기억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첫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아론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상관없다.’

아론은 당당하게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필요한 건 가문의 힘이었다.

“검증의 융단 길은 여태껏 아론 에드먼스가 이루었던 업적들을 인정하였다. 그렇기에 서열식을 진행함에 있어서 무리는 없다고 판단되었다.”

본격적인 서열식이 진행되었다.

서열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후계자가 되면 가문은 너를 수호할 것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 한다.”

공작은 아론을 보며 말했다.

“후계자의 길을 걷겠느냐?”

“예.”

이로써 아론은 에드먼스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 * *

에드먼스 가문에서는 단순히 후계자 경쟁에 뛰어든 것과, 공식적으로 서열식을 통해 후계자로 인정받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했다.

서열식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자제들에게는 더욱 막중한 권리와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의식을 아론이 통과했으니 공작가 내부의 분위기는 어수선한 상태였다.

아무리 개과천선해서 달라졌다지만 늦게 시작한 이상 한계가 뚜렷할 거라고 외부에서는 예측했었다.

게다가 아론은 서열 대련을 통해 두 단계나 서열이 상승한 것도 모자라, 마치 말이라도 맞춘 듯이 곧바로 서열식이 진행되었다.

제일 난처한 건 에드먼스 소속 마법사들이었다. 아론이 공식 후계자가 되었는데 어떤 입장으로 그를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아론은 갑자기 나타난 제3세력이었다. 여태껏 다른 자제들에게 줄을 선 마법사들이나 아직 거취를 정하지 못한 이들도 아론 때문에 계산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아론은 공작가의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별 상관하지 않았다.

아론은 그저 수련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가다듬었고, 이따금 이웨카 길드에 자신의 근황을 보고하고 정보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이 아론을 불렀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지?’

아론은 공작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이 이렇게 자신을 부른 이유는 아마 서열식과 관련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정답이었다.

“이번에 네가 서열 대련을 마치고 곧바로 서열식을 진행한 의미를 알고 있느냐?”

“예. 아버지께서는 저를 곧 있을 전쟁에서 유용한 말로 사용하시려고 그러신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다.”

공작은 굳이 설명할 수고를 덜게 되어 표정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저번에 러셀과 독대해서 책임을 추궁한 이후로 일부러 풀어줬었다. 그러더니 그 녀석은 곧장 아이젠과 접촉을 하더군.”

“둘째 형님이 그랬단 말이죠.”

아론에게 있어서 놀라울 것 없는 정보였다. 러셀은 물증만 잡히지 않았다뿐이지 흑마법사 단체를 이끈 녀석이었다.

아이젠과 밀월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게 지금 와서 발각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녀석의 자취를 쫓다 보니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공작은 자신이 확보한 정보를 아론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젠은 공표만 안 했다 뿐이지, 지금 활발하게 전쟁을 준비 중이다.”

“전운은 저도 여기 와서 느꼈습니다. 특히 도시의 대장간들이 납품 때문에 바쁘더군요.”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 말이다.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춰 둬야지.”

아이젠과 메도우드 간에 이어졌던 수백 년 간의 냉전 관계. 이제 그것이 깨지고 진짜 전쟁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이젠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는 건 준비를 다 끝냈다는 의미겠군요.”

아론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젠 녀석들은 여러 곳에 곁가지를 쳐 둬서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한 모양입니다. 결국 트레벨이라는 하나의 중심 단체를 찾았습니다만. 아마 녀석들이 주도하는 실험이 성공하고, 이번에야말로 두 왕국 간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군. 나도 정보를 취합해 보니 그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녀석들이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는 건 결국 우리들이 한발 늦었다는 뜻이죠.”

“그렇지.”

“아무래도 전쟁을 사전에 막기엔 아이젠 녀석들의 폭주를 늦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전쟁을 통해 놈들을 부숴야겠군.”

“동의합니다.”

공작은 아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말을 이어갔다.

“전쟁에서까지 우리가 늦을 순 없지. 이번에는 선수를 칠 생각이다. 아이젠은 러셀을 통해서 우리의 정보를 캐낼 생각이겠지만, 이미 이쪽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걸 역으로 이용하면 녀석들에게 먼저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거다.”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아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서열식을 진행한 것도 네가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게도 조건이 필요합니다.”

“조건?”

공작은 되물었다.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얼굴이었다.

“제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은 의아해했다. 차라리 정식으로 통솔권을 받고 더 많은 병력을 운용하는 게 공을 세우는 데 더 낫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아론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 부분을 물어보았다.

“이유는 뭐지?”

“병력이 많을수록 오히려 제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집니다. 독립해서 움직이는 게 전쟁에서 더 큰 효율을 보일 겁니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마.”

공작은 아론의 의견을 수용했다.

어차피 당장 전면전을 일으킬 계획은 없었다. 중요한 거점부터 국지전을 치러나갈 예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작은 아론에게 중요한 거점 지역의 공격을 맡기자고 생각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각종 물자와 병력이 몇몇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젠은 주변의 우호적인 국가들로부터 원조를 받아 전력을 모으고 있었다.

공작은 그 지역들을 추려서 아론에게 알려주었다.

“그중에서 우리가 요주의 해야 할 지역이 하나 있다. 드루인이라는 곳이지.”

아론도 그 이름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드루인은 일종의 부족국가였다. 다크 엘프 종족들이 모여서 이룬 작은 나라였다.

물론 규모만 작았다뿐이지, 절대 약한 곳은 아니었다.

다른 이종족들은 침략과 약탈을 당해 멸종하거나 대륙의 변방으로 쫓겨나 숨어 지내고 있지만, 다크 엘프는 달랐다.

그들은 이종족 토벌 전쟁이 한창 일어나던 시기, 초기에 아이젠과 협력해서 다른 이종족들을 몰아내는데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다크 엘프들은 그 공을 인정받아서 아이젠의 비호 아래에 독립적인 국가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국경을 닫은 채 주변과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에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에드먼스의 정보원들이 관측했다.

아무래도 아이젠이 전쟁을 준비하면서 다크 엘프들에게도 원조를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녀석들은 조심해야 한다. 다크 엘프들은 암살에 능한 종족이다.”

다크 엘프는 기척을 지우는 재주가 특별했다. 특히 야간에는 그들이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을 찾으려고 탐지 마법을 사용해도 웬만해선 추적하기 쉽지 않았다.

“너는 드루인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는요?”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다크 엘프의 동향을 파악하고, 혹여라도 위험한 낌새가 보이면 놈들의 발을 묶어 두거라.”

“그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아론의 대답에 공작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서열식을 거친 정식 후계자다. 전장에서 네가 내리는 결정은 곧 에드먼스 가문의 결정이다. 네가 판단하기에 위험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녀석들을 피하고, 그게 아니라면 공격해도 좋다.”

물론 공작은 뒷말도 잊지 않고 전했다.

“하지만 네가 내린 판단에 대한 결과도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마땅히 공을 받을 전과면 후하게 보상을, 그렇지 않다면 질책을 받을 것이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양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름 후계자인데, 정말 가차 없이 굴리는구나.’

이게 에드먼스 가문의 방식이었다. 당장 첫째만 하더라도 요정의 힘을 양도받고 마계의 문을 막는 위험한 일을 맡고 있지 않은가.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어차피 아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공작은 아론의 대답을 듣고서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아론은 공작과 독대를 마치고 나서 방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군.’

공작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전쟁은 코앞까지 와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라.’

지구에 있었던 시절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국가 간에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 잘 와 닿지 않기는 했다.

‘물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전쟁 같긴 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론은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신체적으로나 외부 환경으로나 실력을 성장시키지 못하면 위험에 처할 위기에 항상 놓여 있었다.

그래서 매번 난관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헤쳐 왔었다.

‘전쟁은 규모가 좀 커졌다뿐이지, 이전과 달라질 건 없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의 대처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콕, 콕.

그때였다.

새 한 마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지나가는 새는 아니었다. 아론은 창문을 열어 새를 맞이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새를 잡아서 날개 안쪽을 확인했다. 깃털 사이에 종이가 숨겨져 있었다.

아론은 내용을 확인했다. 셀린이 보낸 쪽지였다.

[헬브람 가문과 접촉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모두 전달했고, 현재 수행 중입니다.]

아론은 쪽지를 읽고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준비하고 있군.’

다행히도 아론이 이웨카 길드에 부탁한 것들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가 끝날 것 같았다.

‘나는 드루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야겠어.’

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아론은 곧 이웨카 길드에 찾아가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써서 보냈다.

펄럭- 펄럭-

새가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아론은 이제 누구와 함께 드루인에 갈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크 엘프들의 나라였다. 아론 혼자서 찾아가 작전을 강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 *

메도우드 왕국의 전투력의 대부분은 에드먼스 가문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명목적으로 왕이 존재한다뿐이지, 실제 권력을 휘두르는 건 에드먼스의 공작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에드먼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공작가의 병력은 일이 있을 때마다 메도우드 왕국 곳곳에 파견되어 수호자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지원을 받지 않은 곳은 왕국 내에서 보기 드물었다.

그만큼 에드먼스는 보유한 병력이 많았다. 하지만 수적 우위만큼이나 병력의 질도 우세했다.

워 메이지.

에드먼스 가문이 자랑하는 뛰어난 전투 마법사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그들의 실력은 모두가 인정했다. 워 메이지가 전장에 나타나는 순간 전투의 판도는 쉽게 뒤바꿀 수 있었다.

물론 이들만이 에드먼스의 전투력을 맡고있는 건 아니었다.

에드먼스에서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하거나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마법사들에게 적극적으로 마도병이 되도록 지원해 주었다.

마법사로서 크게 대성하진 못하겠지만 마법을 쓸 수 있는 병사로서는 큰 쓸모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마도병들은 최소 2서클 이상의 마법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기본적인 마법을 활용할 수 있기에 보통의 병사들보다 훨씬 강했다.

일부 특출난 마도병들은 하급 기사와도 충분히 겨룰 수 있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론은 이번 작전에 그들의 힘을 좀 빌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에드먼스의 병력을 총괄하고 있는 원로를 찾아갔다.

‘여기도 다들 바쁘군.’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모두 분주히 자기가 맡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전투태세를 잘 갖추고 있었기에, 한 달 정도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메도우드 전역의 병력을 충분히 통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니안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병사는 아론을 호위하며 원로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어서 오게.”

“카니안 님을 뵙습니다.”

카니안은 아론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를 맞이했다.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네.’

아론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굳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여태껏 인사 한번 없더니, 서열식을 치르자마자 찾아오는군.”

다분히 적의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동안 바빠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흥. 공작가 밖에서 뭘 하고 다닌 건지…….”

카니안은 한껏 아론을 비꼬며 말했다.

‘서열식을 치른 상태에서도 이런데, 만약 후계자조차도 아니었다면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눈에 선하다.’

카니안은 아론을 아직도 망나니 자식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태도. 언제까지 이어지나 지켜보겠어.’

아론은 더 이상 인사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병력을 빌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마도병 100명과 워 메이지 2명이 필요합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마도병 100명이랑 워 메이지 2명요.”

아론은 어르신이 귀가 나가셔서 못 들으셨을까 봐 친절하게 한 번 더 요구사항을 읊어 주었다.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드루인이 부족국가라 해도 아이젠의 우방국 중에서 강한 축에 속하네. 드루인이 규모만 더 컸더라면 아이젠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카니안은 미간을 좁힌 채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 병사만 데리고 가겠다고?”

“예. 충분합니다.”

“설마, 녀석들이 약한 낮 시간을 노릴 생각인가?”

아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 생각대로 되진 않을걸세. 설마 모르나? 드루인의 국경 주변에는 낮에 강력한 결계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을 말일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냥 병사만 내어주십시오.”

아론의 말에 카니안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전장에서 어떤 소식이 들려올지 참 기대가 되는군.”

아이젠 주변의 여러 지역에서 국지전이 벌어짐과 동시에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카니안을 비롯한 에드먼스의 사령부는 이번 전쟁에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공을 들여 기습을 준비했으니 대부분의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네 녀석이 실패한다면, 그 잘난 콧대가 좀 꺾이겠지.’

카니안은 그런 생각으로 이번에 아론의 부탁을 들어줬다.

서열식을 치르고 나서 보인 첫 행보가 좋지 못하다면 그걸로 아론의 명성에 금이 갈 게 분명했다.

‘녀석에게 금이 갈 명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쾅.

카니안은 아론이 요구한 병력 차출서에 도장을 거칠게 찍었다.

“병력이 모두 모이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이것저것 고려하면 2주 정도 걸릴 거다.”

“시간이 없습니다. 좀 더 빨리 모아주실 수 없겠습니까?”

“……최대한 1주일로 줄여보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론은 카니안에게 묵례를 한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

다음날, 아론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아론이 향한 곳은 예전에 드워프의 비행선을 탔었던 숲이었다.

숲의 중심에 도착하자 넓은 공터가 보였다. 아론은 위를 바라보았다.

‘슬슬 올 때가 되었군.’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상공에 비행선이 보였다. 비행선은 이곳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잠시 후, 비행선에서 사람이 내렸다.

“아론 님!”

라엘과 켄트, 그리고 셀린이었다. 세 사람은 아론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아론 님은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지셨군요.”

셀린이 아론을 보며 말했다.

서로 못 본 기간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아론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서클만 따지면 아직 6서클 마스터였다.

하지만 아론의 실력을 서클로만 단정하는 건 이제 의미가 없다는 걸 주변인들은 잘 알았다.

아론에게는 커다란 마나 탱크나 다름없는 미티움이 박힌 펜던트, 신의 화신인 쿠브, 그리고 최근에 배운 신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너희들도 강해졌구나.”

켄트도 서클이 하나 더 올라 6서클이 되어 있었다.

‘라엘도 빨리 성장했네.’

아론은 라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도 5서클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이 정도 실력이라니. 성장 속도만큼은 아론과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부탁드린 대로 모셔 왔습니다.”

비행선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건 드워프 수호자인 티푸르였다.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대륙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티푸르는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잠깐 동안 회포를 나눈 뒤, 그들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아론 님이 요구하신 대로 헬브람 상단과 접촉해서 길을 연결해 두었습니다.”

“잘했어. 이번에도 헬브람이 도와주어서 다행이네.”

“그들은 이제 우군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어쨌든, 아론 님이 원하시는 때에 비밀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길이 확보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론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젠 내부의 일을 조사한 결과, 전쟁을 준비하는 것 말고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도 바쁘겠지.”

“예. 하지만 그들도 위장 정보를 뿌릴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소규모로 별동대를 조직해 공작을 할 지도 모르니까요.”

셀린은 그 말을 끝으로 곁에 있는 라엘과 켄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분이 이번에는 아론 님께 합류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아론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아론 님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위험해요.”

“저희도 이제는 짐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라엘과 켄트가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아론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은 큰 전력이었다. 아론이 요구한 워 메이지보다 이들이 강했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같이 호흡을 맞춰 본 경험이 중요하다. 아론은 두 사람과 여러 번 전투를 치렀기에 언제든 다시 합을 맞출 수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나 이들을 뒤에 놔둘 순 없지.’

전쟁은 위험했다.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몰랐다.

하지만 트레벨과 아이젠을 상대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도 위험해지는 건 자명했다.

‘내가 가문의 힘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때 합류시키는 게 이들에게도 안전하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었어. 셀린. 너는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해 줘.”

“맡겨만 주세요.”

“그리고 두 사람은 일주일 뒤에 정식으로 찾아와 줘. 그때 출정식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그들은 출정식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

일주일 뒤.

다행히도 아론이 요구한 병력은 소집을 마치고 연병장에 모여 있었다.

아론은 앞에 서서 그들의 기량을 확인했다.

‘병력의 질이 썩 좋은 편은 아니군.’

마도병 대부분이 2서클이었다. 대부분 최소한의 기준만 갖춘 상태였다.

어차피 자신도 기간을 줄여서 요구했으니 별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따지고 들어봤자 그쪽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테니 말이다.

병사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다른 가문의 병사들이었다면 후계자가 직접 이끄는 부대에 앞다투어 들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에드먼스 가문의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서열이 높을수록 더욱 격한 전투에 휘말리니, 그때마다 병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후계자들이야 워낙 실력이 출중하니 버틸 수 있다고 해도 딸린 병사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 사이에는 아론에 대한 불신도 있었다. 이제 갓 서열식을 마친 아론이 과연 자신들을 어떤 사지로 내몰지 병사들은 걱정이 되었다.

“워 메이지 2명, 마도병 100명! 모두 모였습니다!”

선두에 선 워 메이지 두 명이 아론을 향해 경례했다.

아론은 두 사람을 살폈다.

‘한 명은 우직하니 일을 잘하게 생겼고, 한 명은 농땡이 잘 부리게 생겼군.’

아론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우직한 녀석이 아론을 향해 질문했다.

“저희가 갈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드루인으로 간다.”

“예?”

물어본 녀석뿐만이 아니라 뒤에 서 있던 병사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100명으로?”

“아이고. 조졌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는 건 예상했다.

“준비는 다 갖췄겠지? 오늘 바로 출발할 거다.”

“네? 잠, 잠시만요!”

또 한 명의 워 메이지가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만 출정이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다른 부대와 맞출 필요가…….”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내뒀다. 허가받은 사항이다.”

아론은 그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아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아론은 후계자였다. 그의 말을 거역하면 어떤 후환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2시간 주겠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이곳에 집합하도록 해라.”

아론의 말에 병사들이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에드먼스의 병사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다. 비록 아론은 최소치를 맞춘 병력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다른 영지의 병사와 비교하면 강했다.

차출된 병사들은 아론이 2시간 내로 준비를 마치고 집합하라는 말을 어기지 않고 지켰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아론은 병사들과 함께 출정했다.

이동은 걸어서 갈 거라고 병사들에게 알려두었다.

원래라면 워프 게이트를 타고 이동했겠지만 아론이 노리는 바는 기습이었다. 혹시나 정보가 유출되면 상대에게 대비할 시간을 줘 버리게 된다.

“이 방향이 맞나……?”

우직하게 생긴 워 메이지, 제이드가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지도를 확인했다.

드루인으로 가려면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 하덴을 경유해서 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하지만 아론이 향하는 곳은 아예 서쪽이었다. 이렇게 가면 필연적으로 시간이 더 걸렸다.

“내가 한번 물어볼게.”

또 다른 워 메이지, 라프가 그렇게 말하고는 아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론 님. 최단 거리로 가려면 하덴을 향해서 가야 하는데…….”

“잠자코 따라오도록 해라.”

아론은 라프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라프는 꽁한 표정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젠의 정찰병들이 우리가 출발한 거를 벌써 보고했을 것이다. 예상보다 일찍 출정했다는 것도 알아차리겠지.”

“그럼 더 빨리 가서 녀석들이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걱정 안 해도 빨리 갈 거다. 그래서 도보로 간다는 정보도 흘린 거고.”

“예?”

“아이젠은 우리가 보름 정도 걸려서 드루인에 도착할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놈들의 예상보다 최소 5배는 빨리 도착할 거다.”

“예에?”

라프는 아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5배나 더 빠른 속도로 가겠다고? 그것도 걸어서?

“그러니까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라.”

아론의 그 말에 라프는 결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시다는데……?”

“허어.”

제이드 역시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지도에 눈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이 앞으로 가면 멜번 숲이야. 거길 통과하려면 최소한 하루는 야영을 해야 하는데…….”

멜번 숲은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헤쳐나가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몬스터들도 많아서 야영은 위험성이 컸다.

워 메이지 두 명뿐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병사들도 슬슬 동요하기 시작했다.

“도련님의 권력욕에 죽어 나가는 건 우리구나.”

병사들은 한탄했다.

대체 아론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에드먼스 가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속으로 아론을 원망하며 행군을 계속했다.

***

“어……?”

병사들은 멜번 숲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의 눈앞에 마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차의 수는 총 20대였다.

“오셨군요, 아론 님.”

마차를 준비해 둔 건 라엘과 켄트였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걸 타고 갈 거다.”

굳이 마도병을 100명만 뽑은 것도 마차의 정원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이런 마차가 있을 수 있지?”

제이드와 라프는 신기한 눈으로 마차를 살펴보았다. 일단 마차에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차가 마나의 힘을 이용해 달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5배 빨리 간다는 게 허풍이 아니었던 거야?’

라프는 혼란스러웠다.

이 마차의 정확한 힘은 모르지만, 자신들이 예상한 시간보다 빨리 갈 수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걸 준비하신 겁니까?”

라프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에드먼스 가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공작가의 워 메이지로 일하면서 이런 건 본 적이 없었다.

“공작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에드먼스의 마도학자들도 이런 마차는 만들지 못할 겁니다.”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든 것 같았다.

“드워프의 장인들을 데려오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디서 구해왔는지는 비밀이다.”

아론은 굳이 대답해 줄 필요가 없었기에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프가 중얼거린 것처럼 드워프의 마차가 맞았다. 이건 그들로부터 지원받은 것이었다.

아론이 계속해서 이웨카 길드와 연락을 주고받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중간에 헬브람 상단도 넣어서 정보를 희석시키고, 눈에 띄지 않게 페리움과 연락을 해 마차들을 지원받았다.

드워프들은 고맙게도 구형 마차는 마음껏 쓰라며 흔쾌히 내주었다.

‘이게 구형이라니.’

아론은 헛웃음을 지었다.

드워프에게는 구형일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한참 앞선 기술의 마차였다.

“이 마차들, 말이 없는데 어떻게 몰고 가는 겁니까?”

제이드가 물었다.

“너희들은 타기만 하면 된다. 마차의 조종은 내가 한다.”

마나로 움직이는 마차였기에 정밀한 컨트롤이 요구되었고 이는 아무나 할 수 없었다.

답변을 들은 제이드는 이 많은 마차들을 어떻게 끌고 가나 싶었지만, 이내 마차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간이 없다. 다들 마차에 나눠서 탑승해라.”

“예!”

병사들의 외침에는 묘하게 열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론을 대책 없이 움직이는 도련님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제이드와 라프는 빠르게 병사들을 나눠서 각각 마차에 탑승시켰다. 아론 일행은 선두 마차에 올라탔다.

드르륵-

아론이 마차에 마나를 흘려보내자 움직였다. 이내 마차라고 믿기 힘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멜번 숲에는 몬스터들이 많았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론의 마차를 막을 수 없었다.

콰앙!

앞길을 막는 녀석들은 그대로 치고 나갔다.

이 마차들은 그 험한 그린데란트 산맥에서 버틴 녀석들이었다. 고작 이곳의 몬스터들에게 길이 막힐 일은 없었다.

한편, 선두 마차의 바로 뒤에 탑승한 제이드와 라프는 마차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마차들이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매끄럽게 운용하시는 거지?”

“그러게. 게다가 경로도 가장 최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어.”

아론이 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혼자서 조종하고 있는데 저 정도 마나 컨트롤을 보여준다는 건 상당한 실력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어쩌면 우리,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정말 공을 세우러 가는 걸지도 몰라.”

라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어느덧 해가 산에 걸리고 하늘은 보랏빛을 띠는 시간.

스윽-

커다란 나무 위에서 한 남자가 망을 보고 있었다.

미형의 외모에 건강하게 짙은 피부. 그리고 귀가 뾰족한 것이 특징인 남자였다.

그는 다크 엘프. 현재 드루인의 최전방에서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비록 다른 엘프들을 배신해서 엘프로서의 권능을 잃은 상태였지만 뛰어난 무예 감각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전투를 최대한 피하는 경계병조차도 실력은 5서클 급의 기사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후웅-

하지만 그런 그가 대뜸 정신을 잃고 나무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예상 낙하지점에서 땅이 꺼졌다.

쑤욱-

그는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땅밑으로 쑥 들어갔다. 이내 바닥이 닫혔다.

다크 엘프 한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실행한 것은 다름 아닌 아론이었다.

“주변에 다른 경계병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어.”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맞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병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여기가 숲의 한복판으로만 보였다.

병사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이게 드루인이 소수지만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지.’

다크 엘프는 종족의 특성상 밤에 강해지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해가 뜬 시간에는 약해지니 그들이 세운 대책이 바로 은폐였다.

물론 그들의 존재 자체는 여기에 있었으니, 작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와서 토벌하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드루인의 뒤에는 아이젠의 비호가 있었다. 아이젠을 무시하고 다크 엘프들을 공격할 머저리는 이 대륙에 없었다.

‘보아하니 워 메이지 두 명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군.’

어찌 보면 그게 당연했다.

다크 엘프들은 자신의 땅에서 나오는 마나 흐름까지 숨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지를 통해 전달되는 미세한 기운까지 숨길 수는 없지.’

다른 이들과 달리 아론에게는 쿠브가 있었다.

퐁!

쿠브가 튀어 나왔다.

“고맙다. 덕분에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저, 정령?”

제이드와 라프는 갑자기 나타난 쿠브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희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전방에 드루인의 도시가 있다.”

“정령을 통해서 알아내셨습니까?”

“그래.”

그들은 신기한 눈으로 쿠브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정령에 대해서 잘은 몰랐지만 미세한 기운도 감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들어가면 안 됩니까?”

“목책이 처져 있고,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위치는 알고 있으니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전투를 할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첫 만남 때면 몰라도 아론은 이제 그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보여준 상태였기에 군말 않고 따랐다.

그리고 오는 길에 이번에 어떤 방식으로 드루인을 공격할 건지에 대한 작전도 충분히 들어두었다.

‘아론 님의 방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전투를 앞두고 긴장은 되었다.

하지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조금의 오차가 생긴다면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워 메이지와 마도병들은 아론을 믿기로 했다.

잠시 후.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온 상황.

아론이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거대한 구조물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말이네.”

목책이 둘러진 진지였다.

그리고 저 안에 다크 엘프들이 살고 있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예!”

아론의 명령에 워 메이지와 마도병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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