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Chapter 1 (31/40)
  •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7권

    Chapter 1

    대수림 초입.

    드워프들은 이곳에서 몬스터들과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길! 오크 킹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야?”

    콰득!

    드워프 전사가 도끼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이번에는 대수림이 난리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면 이렇게 전투 중에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드워프 전사들은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수림의 초입에는 종종 몬스터를 토벌하러 오지만, 이 정도 규모의 몬스터가 관측되는 일은 없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건 알 수 없지! 우리들은 대수림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으니 말이야.”

    그린데란트 산맥이면 몰라도 부디 대수림에서는 별일이 없기를 빌었다.

    들어갈 수도 없는 장소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면 그만큼 난감한 상황도 없었다.

    “대장! 대수림 안쪽에서 몬스터들이 관측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뭐? 지금도 벅찬데 더 온다고?”

    현재 전투 규모가 드워프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한계였다. 그린데란트 산맥의 몬스터도 아니고, 대수림의 몬스터가 더 가세하는 건 좋지 않았다. 이대로면 사망자도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다! 내가 퇴로를 열겠으니 따라오도록 해라!”

    대장인 티푸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지금 드워프들은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후퇴를 시도하면 대장님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티푸르는 그나마 몬스터들의 수가 적은 방향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아우우-!”

    그때였다.

    대수림 안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분 나쁜 울음소리……!”

    “실바스틴입니다!”

    “녀석들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드워프들은 이 소리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대수림의 초입에 아주 가끔씩 나타나는 녀석들 중에서도 위험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이 울음소리를 교육시키면서, 전장에서 듣게 된다면 웬만해선 전투를 피하라고 가르쳤다.

    “하필 이런 때에!”

    티푸르의 표정이 구겨졌다.

    퇴각로를 여는 것도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실바스틴 녀석들까지 추가가 된다니.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좋지 않았다.

    당황한 것은 드워프만이 아니었다. 대수림에서 나온 몬스터들도 긴장한 채 상황을 살폈다.

    콰득!

    어디선가 살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실바스틴이 몬스터와 전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나머지 몬스터들은 드워프들을 뒤로 한 채 다시 대수림 안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녀석들도 싸우다가 실바스틴에게 잡하먹히는 건 사양이었다.

    “전투를 준비하라!”

    티푸르가 외쳤다.

    이렇게 실바스틴이 가까이에 있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선택은 전멸하겠다는 거와 다름없었다.

    차라리 녀석들과 힘겨루기를 해서 쫓아내는 게 나은 판단이었다.

    ‘초장부터 녀석들을 압도해야 한다. 놈들은 영악하니까,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면 도망치기 시작할 거야.’

    티푸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들과 싸울 준비를 했다.

    “크르르……!”

    실바스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각자의 무기를 세게 쥐었다.

    “이곳에서 뭐 하십니까?”

    그때, 실바스틴 무리의 사이에서 들려온 목소리.

    “사람 목소리? …설마!”

    저 뒤에서 실바스틴의 우두머리가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등 뒤에 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론이었다.

    “아론 님 아니십니까?”

    티푸르를 비롯한 다른 드워프들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아론이 나타난 건 그렇다 쳐도, 실바스틴의 우두머리를 마치 말 다루듯이 타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몬스터들과 전투를 하고 계셨군요.”

    “설마 대수림의 깊숙한 곳까지 다녀오신 겁니까?”

    “예. 이 친구들은 길을 안내해주는 녀석들입니다.”

    아론은 우두머리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물론 녀석은 자발적으로 원해서 아론을 태우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도 벅찼었는데, 실바스틴 무리까지 나타나서 어떻게 되나 싶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할 필요는 없지요. 대신 마차를 좀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급히 제가 본가로 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격납고까지 모셔다드릴 마차를 바로 수배해드리겠습니다. 거기서 비행선을 타고 가시지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행선을 탈 수 있다면 가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아론은 드워프들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아론은 드워프들이 준비해 둔 비행선을 타고 며칠 만에 에드먼스 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만약 마차로만 이동했더라면 몇 주는 걸렸을 거리였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리움 왕국의 은인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아론의 인사에 티푸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티푸르 님도 무운을 빌겠습니다.”

    아론은 나머지 드워프들과도 작별 인사를 한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에드먼스의 영지에서 큰 도시인 에드닌에 들렀다. 무사히 자신이 대륙에 돌아왔다는 걸 이웨카 길드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도 정보원들이 활동하고 있지. 내가 조금만 돌아다니면 그들도 알 수 있을 거다.’

    아론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곳 에드닌은 대도시였기에 사람도 많고 활기가 넘쳤다. 그건 변함이 없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비장감이 존재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론은 자신의 두 귀를 쫑긋 세워 주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쪽도 바쁘구만, 카를!”

    “말도 마. 성에 납품할 갑옷들을 점검한다고 정신이 없어.”

    아론의 귀에 대장장이 두 명의 대화가 들렸다.

    ‘영지에 갑옷을 납품한다고?’

    아론은 좀 더 집중해서 들어보았다.

    “주변에 친구들도 다 바쁘더군. 뭔가 흉흉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지.”

    “자네는 바본가? 보나 마나 전쟁 준비지.”

    “전쟁?”

    “그래. 아무래도 아이젠과 한판 붙으려는 모양이야.”

    아론은 그제야 이 도시에 흐르는 이상한 분위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없던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군.’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준비를 한다는 건, 상대에게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명분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공작이 무언가 건진 게 있는 건가?’

    카이만 공작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 준비도 무언가 확신이 생겼기에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도 변화에 맞춰서 대응할 준비를 해야겠군.’

    대륙의 정세가 바뀌고 있었다. 아론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공작가에 도착한 아론.

    갑작스러운 아론의 방문에 공작가는 발칵 뒤집혔다. 공식적으로 그는 기약 없는 출가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사용인들은 아론을 맞이한다고 정신이 없었지만, 아론은 그들을 전부 물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아론은 새삼 그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망나니로 살았던 때에는 사용인들의 시선에서 은근히 오물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들은 아론을 엄연한 공작가의 자제로 대우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방으로 공작의 비서가 찾아왔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론은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로 이동했다.

    ***

    “오랜만이구나.”

    아론을 본 공작이 인사를 건넸다.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공작은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이전처럼 그의 기운에 압도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성장했군.’

    아론을 관찰한 공작은 그의 발전에 내심 놀라워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실력이 오른 상태였다.

    “아버지의 지시대로 요정족의 유적지에 다녀왔습니다.”

    아버지의 지시.

    아론은 굳이 그것을 언급하며 입을 열었다. 공작이 직접적으로 아론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자신이 그곳으로 가는데 누구의 의지가 개입된 것인지는 조금만 유추해도 알 수 있었다.

    공작도 아론의 그 말에 굳이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지시했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그거대로 실망했을 터였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모양이군.”

    “예. 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굳이 그 무엇을 배웠는지는 주절주절 떠들지 않았다.

    자신이 거기에 가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중요한 정보였다. 그리고 공작은 무조건적인 아론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들의 유적지에서 뭘 배울 수 있었지?”

    아론은 공작의 반응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웬만한 일에서는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렇게 반응을 보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작도 요정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가 봐.’

    요정은 원한다고 해서 만날 수가 없는 존재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 역시 포드 님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정들과 접촉해서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이 정도로 말하면 공작도 무슨 뜻인지 알 터였다.

    그 말을 들은 카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차원의 이면에서 요정들을 직접 만났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지.’

    다행히 공작은 아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요정족의 힘이 필요하십니까?”

    “그들의 힘은 규격 외의 것이다. 그 힘을 가진 자가 어느 진영에 서느냐에 따라 대륙의 판도가 달라지지. 구할 수 있다면야 구하고 싶군.”

    “저도 그들의 힘을 보고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작도 요정족의 힘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론은 그 점을 협상에서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난해했습니다. 단서를 얻긴 했지만, 그걸 풀기 위해서는 포드 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흐음, 포드의 도움이라.”

    “예. 만약 요정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큰 발전이 있겠지요. 마법사가 그걸 얻게 된다면, 최소한 몇 세대에는 그를 뛰어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론의 말에 포드는 고심했다.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맹약은 맹약이다. 포드는 그것을 어겼으므로 구금되어 있다.”

    그를 풀어줄 수 없다.

    아론은 그렇게 해석했다.

    그렇다면, 포드를 보는 것 정도는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포드 님을 보고 싶다고 해도, 공작은 서열을 걸고넘어지겠지.’

    서열은 이 집안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척도였다.

    “저는 포드 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는가?”

    “서열 3위에 오르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서열 대련을 열어주십시오.”

    “그렇게 하마.”

    아론은 현 서열 3위의 일리아 에드먼스에게 서열 대련을 신청했다.

    * * *

    아론의 행보에 공작가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거 들었어? 아론 도련님이 일리아 님에게 서열 대련을 신청했다는 거 말이야.”

    “여기 일하는 사람들 중에 그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덕분에 공작가의 사람들은 아론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시끄러워졌다.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열 대련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보통 한 세대에서 한 번 일어나는 것도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세대에는 벌써 두 번째 서열 대련이 열리려고 했다. 그것도 한 사람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적은 에드먼스 가문의 역사를 들춰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비단 이번 일의 귀추에 주목하는 건 공작가 내부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아론이 서열 5위인 케빈에게 서열 대련을 신청했을 때에는 그렇게 시끄러워지진 않았다.

    어차피 하위 서열들의 대련이었다. 그들이 차기 에드먼스의 가주가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일리아 에드먼스는 서열 3위.

    실력 여하에 따라 다음 에드먼스의 우두머리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만약에 일리아가 진다면 그녀의 서열은 한 단계 떨어지게 되고, 후계자 경쟁에 있어서 많은 지각변동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었다.

    게다가 조만간 메도우드 왕국과 아이젠 왕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라에 돌고 있었다.

    왕국 간의 전쟁 같이 대륙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도 겹쳐지게 된다면, 사실상 메도우드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에드먼스 가문의 다음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세간에서는 일리아가 이길 거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아론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괴짜들밖에 없었다.

    이러한 양상이 나타난 건 그동안 두 사람이 쌓아 온 업적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어렸을 적부터 두각을 보였고 차근차근 자신의 활약상을 늘려왔었다.

    반면 아론은 망나니처럼 살았던 과거가 있었다. 최근에는 개과천선을 했다는 모양이지만, 서열 5위에 올라선 것 말고는 딱히 이렇다 할 행보를 보여주지 못했었다.

    물론 아론은 나날이 실력을 성장시켰고, 굵직한 일들도 여러 개 해결했지만 자신의 성과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는 건 공작이나 그와 함께했던 동료들뿐이었다.

    한편, 일리아 역시 이번 일을 아론이 말했던 당일에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왜?’였다.

    일리아는 종종 공작과 독대를 하면서 아론의 무용담을 몇 개 듣고는 했었다.

    아론과 교류는 거의 없었지만, 덕분에 그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리아는 아론이 자신에게 서열 대련을 신청한 이유가 궁금했다.

    ‘아무 확신도 없이 내게 서열 대련을 신청하진 않았을 거야.’

    그녀는 아론을 상대로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이번에 공작가를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무언가 얻어온 게 있다고 생각되었다.

    ‘귀찮게 됐어.’

    일리아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러셀의 입지가 흔들리는 지금을 노려 자신이 2위로 올라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론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일정이 뒤틀려 버리고 말았다.

    ‘지금이 러셀을 끌어 내리기에 제일 좋은 시기인데 말이야.’

    할 수 없이 아론이 신청한 서열 대련부터 대비해야만 했다.

    만약 이번 서열 대련에서 지게 된다면, 자신에게 더 이상 치고 올라갈 기회는 주어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리아는 그녀의 방에 보관되어 있는 작은 상자를 하나 열었다.

    그 안에는 영롱한 녹색빛을 띠는 펜던트가 들어있었다. 일리아는 그것을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러자 그녀는 주변의 마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걸 받았을 때는 미심쩍기는 했는데…… 효과는 확실한 거 같아.’

    일리아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론. 그가 비록 동생이지만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대련이 열리기 전까지, 그를 맞이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

    아론은 공작에게 서열 대련을 하겠다고 말을 한 뒤로부터 자신의 방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공작가 내부에는 보는 눈도 많았고, 아론의 일거수일투족은 속속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고되었다.

    그렇기에 대련을 앞두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아론을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처음 서열 대련에 임할 때는 열심히 준비하더니, 한 번 이겼다고 두 번째는 설렁설렁하는 건가. 그런 소문이 주위로 퍼졌다.

    하지만 실상은 소문과 달랐다.

    아론은 방 안에서 나가지 않은 게 아니라, 나갈 수가 없었다. 굳이 새로운 힘을 익혔다는 걸 대련 전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서 신력을 다루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확실히, 대륙은 요정의 유적지와 다르게 신력의 농도가 옅다.’

    그래도 훈련을 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아론 혼자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옆에는 쿠브도 아론처럼 정자세로 앉아서 신력을 다루는 중이었다.

    자신과 다르게 쿠브는 신의 화신이라 그런지 신력을 보내주어도 수월하게 잘 받아서 운용했다.

    정령들은 계약자의 마력을 거의 먹지 않고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더 강한 힘을 발현하고자 할 때 마력을 넣어 주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주입하는 힘이 마력이 아니라 신력이라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론은 자신을 갈고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유적지에서 마지막 한 달간 요정들과 대련을 했던 것을 복기하며 수련했다.

    ‘결국 에르파의 브레이커를 습득하지 못한 게 아쉽단 말이지.’

    그것만 배울 수 있었더라면 이번 서열 대련은 쉽게 이기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에르파는 마지막 대련에서 아론에게 말했었다. 심안이 발현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때 처음으로 칼날의 주변에서 아지랑이가 보였었어.’

    아론은 그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그건 뭐였을까.’

    하지만 단순히 떠올린 것만으로 감이 잡히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 번뜩하고 원리가 이해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해서 뭐해.’

    아론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서열 대련을 준비하는 데에 심기일전했다.

    결국 이번 서열 대련도 수단이었다. 아론이 가장 원하는 건 포드를 만나 요정족의 책을 전승받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대련은 이겨야만 했다.

    그래서 아론은 일리아 에드먼스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었다.

    비단 이번에만 그런 건 아니었다. 언젠간 뛰어넘어야 할 상대였기에 꾸준히 정보를 수집해 왔었다.

    ‘일리아 에드먼스는 공간을 다루는 데 뛰어난 마법사다.’

    마법 중에서도 공간을 다루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수준이 높은 종류의 마법이었고, 그녀와 전투를 벌였던 상대는 자기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최근에 8서클의 성취를 달성했다고 들었다.

    반면 아론은 6서클.

    하지만 그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강한 상대와 계속 싸워왔고, 이번에는 신력이라는 새로운 요소도 활약할 예정이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공간 마법은 활용성이 무궁무진했다. 술자의 실력에 따라서 온갖 방식으로 마법을 응용할 수 있었다.

    지구의 헌터 중에서도 공간 마법을 쓰는 헌터가 있었다. 그 헌터는 A급이었는데, 비록 대련이었지만 S급 헌터를 이기는 일도 벌어졌었다.

    그렇기에 아론은 이번 서열 대련 역시 철저하게 준비를 하기로 했다.

    ***

    서열 대련이 열리는 날.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새벽부터 분주하게 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번 서열 대련을 보기 위해 고위 귀족들 중에서는 전날부터 공작가에 찾아와 머무는 사람도 있었다.

    한 세대에 한 번 벌어지기가 힘든 사건이 벌써 두 번째가 되었다. 게다가 서열 3위와 5위의 대련. 이를 직접 보기 위해 많은 거물들이 모였다.

    물론 에드먼스 가문 내부의 일이었기에 아무나 올 순 없었다. 메도우드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이나 직접 초대를 받은 사람만이 대련을 볼 수 있었다.

    아론과 일리아는 준비를 마치고, 대련장에 들어섰다.

    ‘내 첫 대련 때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네.’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아르무트 경. 이번에 누가 이길 것 같소?”

    “당연히 일리아 님이지요. 그분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출중하셨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이번 대련은 일리아 님이 동생의 철없는 장난을 받아주는 무대라고 생각이 되오.”

    “부디 일리아 님이 이겨 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면 난감해지거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일리아 님이 들으면 불같이 화를 내시겠구려.”

    “그렇죠? 일리아 님이 지는 건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등장하자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일리아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잠시 후, 공작이 나타나자 소란이 잦아들었다. 다들 공작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다들 바쁘신데 이 자리에 모셔주셔서 고맙소.”

    마법으로 증폭된 공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서열 대련은 서열 5위인 아론 에드먼스와 서열 3위인 일리아 에드먼스가 참여하오.”

    공작은 대련장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규칙은 알 것이다. 한 명이 전투 불능이 될 때까지 싸우는 것. 알겠나?”

    공작의 말에 아론과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아론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경기장 곳곳에 마나의 흔적이 있었다.

    ‘일리아가 미리 수를 써 둔 건가?’

    그녀의 특기는 공간 마법.

    아마 대련이 열리기 전에 마법진 같은 것을 설치해 둔 모양이었다.

    딱히 제지될 행동은 아니었다. 서열 대련은 케빈 때처럼 불법적인 약물을 사용하는 등의 행위만 아니면 규칙이랄 게 없었다.

    마법사가 자기 마법에 필요한 걸 미리 준비하겠다는데 그걸 딴지 걸고넘어질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설치한 것들이 다 알고 있는 마법들이네.’

    아론은 그녀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었다. 그래서 각각의 마법진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대충은 눈에 보였다.

    “무운을 빌지. 대련을 시작하도록 해라.”

    공작의 말과 함께, 대련장에 흐르는 마나의 기운이 세차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그러나 두 사람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련장에는 무형의 마나만이 거칠게 날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 간에 힘을 탐색하는 시간이 잠깐 이어졌다.

    조용하던 탐색전을 깨트린 건 일리아였다.

    후웅-!

    그녀는 날카로운 바람 마법을 시전해서 날렸다.

    ‘초반엔 실력을 떠보려는 건가?’

    아론은 생각했다.

    저 마법은 그녀가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일리아가 가진 아론에 대한 전투 정보는 아마 케빈과 서열 대련을 했을 때 두 눈으로 보았던 것뿐이었다.

    아론의 업적은 공작을 통해서 간간히 듣긴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싸우는 건 처음. 그래서 그녀는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아론은 배리어를 펼쳐 일리아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쳤다.

    이어서 그는 쉬지 않고 번개 마법을 날렸다. 일리아의 후속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론은 이 행동이 이제 습고나이 되어 있었다. 최근에 요정족들과 대련을 하면서, 그들에게 연속으로 공격하게 놔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두 번째 공격따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도 아론의 공격을 쉽게 막아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간만 볼 거야? 진심으로 덤비지 않으면 질 거다.”

    아론은 일리아를 쏘아보며 말했다.

    “고작해야 6서클인 네게 지지는 않을 거야.”

    일리아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아론은 그녀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런 얼굴로 말할 수 있을지 보자구.”

    쿠구구!

    아론은 즉시 마법을 썼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돌무더기들이 우수수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리아를 중심으로 둘러싼 단단한 벽이 되었다.

    콰르릉!

    뒤이어 아론은 위에 뚫린 구멍으로 벼락을 내리쳤다.

    이렇게 도망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했다.

    “일리아 님이 갇히셨다!”

    “저 큰 번개를 맞고 버티셨을까?”

    두 사람의 대련을 보던 귀족들은 당황했다. 아론이 저렇게 강력한 공격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끝나는 거 아니야?”

    “서, 서열이 뒤집히면 어떡하지?”

    몇몇 귀족들은 일리아가 질까봐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법을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은 잠자코 대련장을 지켜보기만 했다.

    ‘공격이 먹히지 않았군.’

    아론은 굳이 안을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몸을 앞으로 던졌다. 후미에서 마나의 뒤틀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직-!

    방금까지 아론이 있던 곳의 공간이 사정없이 뒤틀렸다. 마치 걸레를 쥐어짜는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그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몸이 성치 못했을 게 분명했다.

    ‘저게 일리아의 공간 마법…….’

    아론은 그녀의 마법을 보고 놀랐다. 이렇게 공간 자체를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마법사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왜 그녀를 마주한 상대가 영문도 모르고 죽는다는 건지 알겠어.’

    어쩌면 아론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리아의 마법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론은 마나 친화력이 뛰어나서 주위의 마나에 민감했다. 그래서 미세하게 마나가 뒤틀리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느새 아론이 만든 굳건한 벽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블링크를 쓴 건가?’

    하지만 이상했다.

    블링크를 썼다면 흔적이 남는다.

    그러나 일리아에게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사전에 설치한 마법진 덕분에 그게 가능했던 거군.’

    아론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변에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대련장 곳곳에 마법진을 설치해 두고, 그곳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아론은 일리아가 자연스럽게 자신이 만든 벽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방법을 이해했다.

    ‘한 마디로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구나.’

    그는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는 한편, 자신도 저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지적 탐구욕이 불러일으킨 욕심이었다.

    “이제야 진심으로 나오는군.”

    “아직이야. 각오하는 게 좋을걸.”

    일리아는 차가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대련장의 여기저기에서 공간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일리아가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기에 몸이라도 닿는 순간 아론은 신체 부위 하나는 내어 줘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도망치기 쉽지 않아 보이는 그녀의 공격. 하지만 아론은 오히려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는 간단하지.’

    아론은 에르파와 대련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가 무수한 칼날로 공격하는 상황과 비교하면 지금 그녀의 공격을 피하는 건 쉬운 축에 속했다.

    그는 빠른 몸놀림으로 공간이 뒤틀리는 곳을 피해 움직였다.

    잠시 후, 공간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8서클인 그녀라도 무한정 공간을 휘어잡고 있을 순 없었다. 마나는 무한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론은 그 틈을 노려 가장 빠르게 번개 마법을 날렸다.

    그러나 아론의 마법은 일리아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의 전방에 공간이 일렁이더니 아론이 쏜 번개를 빨아들였다.

    파지직!

    번개는 다시 나타나 아론을 향해 쏘아졌다. 마치 아론의 아공간 망토를 이용해 공격을 반사하는 것과 동일한 매커니즘이었다.

    아론은 실드를 전개해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고 해도 결국 맞아야 통하는 법이지. 이 공간에서 내게 공격은 먹히지 않아. 그만…….”

    ‘쓸데없이 주절주절 거리네.’

    아론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곧장 마법을 준비했다. 어차피 일리아가 저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들어주는 게 바보였다.

    아론은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지도록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동시에 그녀의 뒤에서는 날카로운 바위를 솟아나게 했고, 전방을 노리는 번개 마법을 날렸다.

    아공간 망토와 비슷하게 공격을 반사하는 기술을 쓸 수 있다면, 이렇게 다양한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떻게 나올래? 설마 다 반사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아론은 그녀의 대응을 살폈다.

    일리아는 공격을 확인한 뒤에 자신이 있던 공간을 뒤틀었다. 그러자 공간에 틈이 생겼고, 이내 일리아를 집어삼켰다.

    콰쾅!

    세 가지 마법이 허공을 때렸다.

    잠시 후, 일리아가 다시 그 자리에서 나타났다.

    ‘결국 회피를 선택했군.’

    아론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하나를 알게 되었다. 사방에서 공격하면 그것들을 모두 반사시킬 수는 없다는 점을 말이다.

    일리아는 곧장 아론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날렸다. 7서클의 강력한 얼음 마법이 아론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 공격을 실드로 막고 다음 수를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이 아론의 실드에 닿기 직전, 마법과 실드의 사이에 공간이 찢어지더니 그녀가 날린 얼음의 창을 삼켜버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삼켜진 마법은 즉시 아론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론 역시 그것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가속 마법을 사용해 공격을 피했다.

    ‘큰일 날 뻔했군.’

    아론은 일리아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에드먼스의 서열 3위가 아니군.’

    확실히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일리아는 8서클 마법사였다.

    그것도 다른 마법사가 아니라, 에드먼스의 피가 흐르는 특별한 마법사였다.

    이전에 미티움을 이용해 강제로 9서클이 된 남자가 떠올랐다. 녀석과 붙었을 때도 무지막지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욱 성가셨다.

    ‘게다가 그녀의 마법은 나랑 상성이 좋지 않아.’

    일리아는 아론이 공격하는 족족 흡수해서 반사하거나,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의 마법을 이용해 변화무쌍한 공격을 보여주었다.

    서열 3위는 쉽게 차지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녀도 여러 파벌에게 공격을 받으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많이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론 역시 무수한 사선을 넘으면서 여기까지 도달했다. 실제로 수백 번 죽음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겨우 여기서 무너지면, 여태까지 해온 게 아깝잖아.’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일리아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먹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일리아는 내가 공격을 하면 피하거나 반사시키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대처한다.’

    거기에 쓰이는 것은 그녀가 미리 설치해 뒀거나 혹은 즉석 해서 펼치는 마법진이었다.

    그렇다면 그 마법진의 수용력을 뛰어넘는 마법을 써서 터트리면 그만이었다.

    ‘아직까지는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해볼 만 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전방에 화염 마법을 전개했다. 단숨에 마나를 불어 넣어 덩치를 크게 키웠다.

    ‘또 공격 마법이야? 이번에도 반사시켜 주겠어.’

    일리아는 아론의 마법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론은 거기에다가 신력도 같이 섞어 넣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염구가 완성되었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일리아를 향해 발사되었다.

    ‘아니, 잠깐만……!’

    일리아는 아론이 만들어 낸 마법의 화력에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는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던가?

    ‘……침착하자.’

    일리아는 냉정을 되찾았다.

    무식하게 큰 화염구가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저 마법을 마법진으로 받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법진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 버리면 오히려 술자인 일리야에게 피해가 생긴다.

    ‘웬만하면 보험으로 남겨두려 했었어.’

    일리야는 혹시나 싶어서 끼고 있었던 펜던트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녹색의 기운이 일리아의 전신에 퍼졌다.

    ‘뭐지?’

    아론 역시 이상 반응을 느꼈다.

    대련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들이 모두 그녀의 앞으로 모이더니 합쳐지기 시작했다.

    쑤욱-!

    하나로 된 마법진은 아론이 만들어낸 화염구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웠다.

    ‘이건 대체……?’

    아론이 놀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일리아의 몸에서 미티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아론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고 미티움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목에 걸고 있는 저 펜던트인가?’

    아론은 그녀가 착용한 녹색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창이 떠올랐다.

    「바유의 펜던트」

    · 바유 소드의 미티움을 추출해서 만들어 낸 펜던트.

    그러자 창이 떠올랐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게다가 바유 소드의 미티움이라고?’

    바유 소드는 바람의 힘을 지니고 있는 칠검이었다.

    그렇기에 아론은 궁금했다.

    왜 일리아가 저걸 가지고 있는 걸까.

    ‘설마 일리아도 아이젠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아론이 처음으로 아그니 소드를 얻게 된 것도 공작의 임무를 통해서였다.

    ‘그녀 역시 공작에게서 어떤 임무를 받고 그 보상으로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론은 자신의 화염 마법을 삼킨 마법진을 바라봤다.

    ‘마법진이 바람 속성을 띄고 있어.’

    아무래도 일리아는 바유 소드의 속성을 끌어내어서 이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아무런 속성을 가지지 않아야 할 공간 마법에 속성이 부여되면서 그녀의 마법도 전체적으로 위력이 강해졌다.

    ‘이런 변수는 고려해 두지 않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론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한편, 아론이 당황하는 기색을 띠자 일리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하나로 합쳤던 마법진을 다시 분리하여 대련장 곳곳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녀가 다시 공세를 펼치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곧장 일리아를 향해 전격 마법을 시전해 날렸다.

    파지지직!

    번개 속성 마법은 각종 공격 마법들 중에서도 속도가 가장 빨랐다.

    그러나 번개가 날아가는 속도보다 일리아가 이 일대를 장악해 버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뭐, 뭐지?”

    “마법이 날아가는 중간에 사라졌어?”

    대련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아론이 날린 마법이 돌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마법에 조예가 없는 귀족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자들은 지금 일어난 현상을 이해하고 깜짝 놀랐다.

    ‘흩어진 마법진들이 마나를 잘라 버리고 있잖아?’

    마나를 잘라 버린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번개로 형태를 이룬 마나가 마법진의 영향을 받아 왜곡되어서 마법이 사라진 것이었다.

    ‘꽤 재밌는 수를 쓰는군.’

    그게 아론의 감상이었다.

    만약 이런 현상을 처음 겪는 거라면 당황했을 것이고, 그 감정이 대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론은 이와 비슷한 방식의 대련을 에르파와 여러 번 겪었었다.

    에르파가 사용하는 브레이커는 모든 마법을 파훼시켰다.

    ‘물론 일리아의 방식은 에르파에 비해 조악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일리아는 아론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 태도가 계속될 수 있을까?’

    일리아는 아론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론의 주위에 있는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마법진은 아론을 집어삼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바깥에서 그 광경을 보기에는 아론이 꽤나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아한 점은 그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노리려는 거야?’

    이쯤 되니 일리아는 불안해졌다.

    아론은 반격 한번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마법진을 피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경험으로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아론은 저리 열심히 움직이는 걸까.

    ‘……대충은 알 것 같군. 어떻게 그녀가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지 말이야.’

    아론은 그저 도망만 치던 것이 아니었다. 일리아가 아무리 공간 마법의 대가라 하더라도 아예 일대의 마나를 통제하는 건 그녀의 힘만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일리아의 마법진을 피하는 내내 그녀가 발휘하는 힘의 원천을 찾고 있었다. 그는 결국 그것을 찾아내고 말았다.

    아론은 두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런 뒤 진각을 쾅 하고 밟았다.

    그 결과, 아론을 옥죄어 오던 주위의 마법진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꽈앙-!

    아론이 한 번 더 마나를 이용해 땅을 세게 밟았다. 이번에는 대련장에 가득하던 마법진들을 일소시켰다.

    일리아는 경악했다.

    ‘어…… 어떻게?’

    아론이 벌인 행위가 이해되지 않았다. 단순히 화가 나서 땅을 구른 게 아니었다. 그녀가 미리 수를 써둔 것을 알고, 그것을 깨트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일대의 마법진이 사라지자 아론은 이제 안정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정답이었군.’

    아론이 지면 아래를 노린 이유.

    거기에 일리아가 설치해 둔 아티팩트가 있었다.

    ‘이상하다 싶었어.’

    일리아의 실력은 세간에서도 알아주었다. 8서클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어떤 경로로 취득한 건진 몰라도 미티움도 이용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아론은 요정족들과 겨루면서 힘의 격차를 잘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깨우친 것이 힘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론은 판단했다. 일리아는 자신의 마법을 깨트릴 정도로 일대를 장악할 실력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힘의 원천을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말 만반의 준비를 해뒀구나.’

    아론은 처음에 대련장에 입장했을 때, 그녀가 이곳에 설치해 둔 마법진들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땅속에까지 모종의 장치를 심어두었을 줄이야.

    이걸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쿠브의 도움이 컸다. 아론은 일리아의 마법진을 피하면서 쿠브에게 지면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거기서 찾아낸 게 단단히 박혀 있는 아티팩트들이었다. 아론은 그것들을 무력화시킨다면 일리아가 이전처럼 힘을 쓸 수 없음을 발견해냈다.

    아티팩트를 멈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티브는 에르파의 브레이커였다. 마나의 근원을 찾아서 부숴 버리면 되었다.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은 마법사의 것과 다르게 마나가 고정되어 있기에 더욱 그 방법이 쉬웠다.

    ‘말도 안 돼.’

    일리아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떤 사고를 거쳤길래 저렇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티팩트를 설치하면서 탐지되지 않도록 추가적인 마법도 깔아 뒀었는데 말이다.

    “꽤나 준비하는 데 공을 들이셨구만.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이제 그녀의 비밀도 알았겠다.

    굳이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한편, 일리아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언젠가 있을 두 오빠들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비장의 수였다.

    그들은 자신보다 서열이 높았으니까. 이기기 위해서라면 아티팩트의 힘을 거리낌 없이 빌릴 생각이었다.

    이번 서열 대련은 그녀의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아론과 대련을 하면서 아티팩트의 힘을 시험해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론에게 자신의 수가 드러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아론은 아티팩트를 찾아내고 그것의 원리를 완전히 분석한 뒤 마나를 불어넣어서 해체해 버렸다.

    ‘어쩐지 도망만 다니고 공격을 안 한다 싶었어.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만약 그녀보고 똑같이 재현해 보라고 한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론과 자신의 재능 차이에 절망했다.

    아론은 일리아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파악했다.

    ‘나도 저 마음 잘 알지.’

    지구에서 헌터였을 시절.

    아론은 10년이 넘게 다른 헌터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미천한 재능을 한탄했었다.

    그렇기에 잘 알았다.

    아득히 높은 재능의 벽을 마주했을 때 밀려오는 절망감은 상당했다.

    물론, 그녀의 심정을 이해 한다뿐이지 동정을 베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도 그렇겠지만, 아론도 살고자 이렇게 하는 것뿐이었다.

    ‘슬슬 끝내지.’

    바닥 아래에 있던 아티팩트는 모두 무력화되었기에 아론은 자유롭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거기다가 신력을 섞어서 더욱 마나를 날뛰게 만들었다.

    방대한 에너지가 대련장을 가득 메웠다. 그 광경을 본 귀족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끝났군.”

    공작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비서가 카이만의 얼굴을 살폈다. 공작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공작님이 자식을 상대로 여태껏 저런 웃음을 보이신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는 아론이 보여준 오늘의 대련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화아아악-!

    아론은 끌어모은 마나를 이용해 거대한 화염 마법을 토해냈다.

    일리아는 급한 대로 배리어를 펼쳐서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신력이 섞인 아론의 마법 앞에서는 배리어가 무력했다.

    결국, 일리아는 거대한 화염에 삼켜지고 말았다.

    아론은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말없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주시했다.

    잠시 후, 화염이 사라지고 연기가 걷히자 일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멀쩡한 상태였다.

    일리아의 앞에 전개되어 있는 거대한 배리어. 그걸 본 아론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최대 출력으로 발현한 공격 마법이었다. 일리아가 펼친 배리어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지금 내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공작뿐이다.’

    아론은 항의의 표시로 공작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났다. 그래서 내가 끼어든 것이다.”

    공작은 일어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승패가 변하지 않는다면 아론은 더 이상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 서열 대련은 아론 에드먼스의 승리다. 아론은 서열 3위에 오르게 되며, 일리아는 서열 4위로 강등된다.”

    털썩.

    일리아는 주저앉아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손쉬운 승리를 예측했던 대다수의 귀족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론 에드먼스가 승리했다.

    그가 서열 3위에 올라섰다.

    이건 매우 큰 사태였다.

    귀족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일의 대처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주저 없이 대련장을 떠났다.

    ‘다행히 이겼어.’

    하지만 서열이 오르는 건 수단이었다. 이제 이걸 활용해 아론은 포드와 만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 * *

    아론이 서열 대련에서 승리를 차지하고 에드먼스 공작가의 서열 3위에 올라섰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른 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전에 케빈과 치렀던 서열 대련은 꼴찌를 다투는 두 망나니의 대결이었다. 그래서 아론이 이겼더라도 그닥 화제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일리아는 대륙에서 명망이 높은 에드먼스의 여식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실력으로 업적을 쌓으면서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일리아를 아론이 쓰러트렸다. 덕분에 아론에 대한 소문은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론이 차기 에드먼스의 가주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야기가 이제 귀족들 사이에서 오가기 시작했다.

    둘째가 최근 행보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론이 손을 써서 그런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이 추세라면 아론은 언젠가 둘째 아니면 첫째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귀족들은 그 시기가 언제일지 계산하느라 골이 아팠으며, 이제는 아론에게 줄을 서야 한다며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한편, 헬브람 백작가의 로안 헬브람은 그러한 아론의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역시! 내 안목이 틀림없었어!’

    로안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히죽거렸다.

    ‘그때 아론 님에게 붙길 잘했지.’

    망나니라는 소문과는 다른 그의 비범한 모습을 보았을 때, 로안은 혹시나 싶어서 아론에게 베팅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박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덕분에 나도 가문에서 입지가 올라갔지.’

    메도우드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선 에드먼스 가문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했다. 에드먼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수록 해당 가문의 영향력은 높아졌다.

    로안 역시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의 형이 가주가 될 예정이었지만, 로안도 유력한 가주 후보로 올라서게 되었다.

    ‘아론 님도 공작가로 돌아오셨겠다, 조만간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어.’

    로안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콕, 콕콕.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로안은 그 정체를 확인해 보니, 창문가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열어 보았다.

    ‘셀린 님이 보내신 거군.’

    그렇다면 이건 아론이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하기 위해서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잘 됐다. 이번 일을 해결하고 자연스럽게 아론 님을 만나면 되겠어.’

    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쪽지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

    아론은 서열 대련에서 승리한 이후에 공작으로부터 포드를 만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영지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여기가 포드 님이 유폐되신 장소로군.’

    공작에게 듣기를, 이곳은 가문의 금기를 어긴 자들이 갇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작 역시 자신의 권한을 이곳에서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갇혀 있는 사람의 처신에 대해서는 가문 원로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엄격한 만큼 이곳의 관리 역시 철저했다. 감옥의 입구에는 7서클 마법사가 상주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아론 님을 뵙습니다.”

    아론이 방문하니 경비들은 예를 갖춰서 그를 대했다.

    새삼 아론은 공작가가 서열이 중심이 되는 사회라는 것을 느꼈다.

    “포드 님의 면회를 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경비가 앞장서서 감옥 안으로 들어갔고 아론은 그 뒤를 따라갔다.

    저벅저벅.

    꽤 깊숙이 내려가고 나서야 복도가 나왔다. 그 끝에는 굳게 닫힌 방이 하나 있었다. 아론과 경비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반대편에서 포드가 나왔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철창이 가리고 있었기에 서로 만지거나 할 순 없었다. 오로지 보는 것만 가능했다.

    아론은 포드를 바라봤다.

    이곳은 감옥이었지만 포드가 그리 심하게 대접받지는 않는다는 걸 겉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살도 이전에 봤을 때랑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포드의 손등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표식이었다. 포드가 마나를 발현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장치인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아론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나 때문에 이렇게 자유를 잃고 깊은 지하에 갇혀 계시다니.’

    포드가 이곳에 갇힌 이유는 원인을 따지고 보면 아론에게 있었다.

    자신이 약했으니까. 실력이 있었더라면 포드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마법을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포드 역시 아론을 본 순간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를 만나서 반가움과 동시에 어떻게 이곳에 서 있는지 놀라워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크게 성장했구나.”

    포드는 아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아론은 드워프 형제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던 때에 멈춰 있었다.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아론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포드 님이 유폐되신 이후로 노력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스승님을 뵙고 싶어서요.”

    “허허, 참.”

    아론의 말에 포드는 웃어 보였다.

    이곳에 갇힌 이후로 처음 짓는 미소였다.

    “그 펜던트는…….”

    “미티움을 녹여서 보석으로 박아 넣었습니다.”

    “드워프와도 원만하게 협력한 모양이구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포드는 아론의 몸에서 희미하게나마 요정족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요정을 만난 것이냐?”

    “스승님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접할 수 있었습니다.”

    “허어…… 넌 이미 나를 뛰어넘은 것 같구나.”

    “다 스승님 덕분이지요.”

    “도서관에서 너를 보았던 그때가 떠오르는구나. 내 선택이 헛되지 않았어.”

    포드는 아련한 눈빛을 한 채 그렇게 말했다.

    “내가 갇혀 있었던 동안에 겪은 일들을 들려주겠나?”

    “물론입니다.”

    아론은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아론은 그간 있었던 사건들을 말해주었다. 포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유심히 들었다.

    그러면서 종종 속으로 감탄했다.

    ‘이 아이, 재능이 엄청나구나.’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빠른 성장세를 보였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폭풍이나 다름없었다.

    “요정족의 유적지에 갔단 말이냐?”

    포드가 아론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놀란 부분이었다.

    아론은 이 사실을 말해야 되나 고민했었지만, 털어놓기로 했다. 포드는 자신의 스승. 이 세계에서 얼마 안 되는 믿을만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믿기 힘들구나.”

    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도 대륙에서 사라진 요정을 연구하다가 사념체를 만난 게 다였다.

    그러나 아론이 사용하는 신력을 본 순간, 그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신력이란 건 요정족에게 직접 전수를 받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힘이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스승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아론은 요정족의 로드에게서 받은 책을 건네주었다.

    “이건……! 요정의 언어로 쓰인 책이구나.”

    포드는 책의 제목을 보고 놀라워했다.

    “이 책을 전승받아야 하는데, 저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요정족의 로드가 말하기를 전승자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게 스승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잠깐만. 한번 읽어 보겠네.”

    포드는 받은 책을 넘기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이 글씨체…… 스라크의 것이구나!”

    “누구입니까?”

    “내가 사념체로 만났었던 요정의 이름일세. 참 신기하구나. 그자의 책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아론은 그 사실을 몰랐다.

    자신은 요정족의 언어를 알지 못했고, 로드도 이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해주지 않았다.

    ‘설마 로드는 이것도 감안해서 나에게 책을 주고 포드 님에게 보낸 걸까?’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요정족의 언어를 다시 보는 건 오랜만이지만, 스라크가 쓴 거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 덕분에 이 내용들을 전승해주는 데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포드는 자신 있는 어투로 말했다.

    “지금 바로 전승해주겠네. 시간은 되나?”

    “충분합니다. 그럴 목적으로 왔으니까요.”

    “알겠네.”

    “꼭 서열을 올려서 원로회랑 담판을 짓고 스승님을 꺼내드리겠습니다.”

    “허허, 말이라도 기쁘구나.”

    포드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승님은 지금 마나를 쓰지 못하시는 상태 아닙니까? 그런데 전승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이거는 마나의 사용과는 상관없는 일이네.”

    “그렇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포드는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책에 적힌 글자가 천천히 빛을 발했다.

    잠시 후, 글자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포드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글자들이 아론의 이마 속으로 들어갔다.

    아론은 생소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고통이 따를걸세. 하지만 참아야 하네.”

    포드가 그 말을 하고 나서 머리에 격통이 엄습했다. 어마어마한 정보가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으윽!’

    아론의 빠릿빠릿한 뇌가 간신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정보량이었다. 아론은 꾹 참으며 그 내용을 받아들였다.

    포드 역시 아론의 상태를 살펴 가며 책을 읽어나갔다. 속도 조절을 잘못하면 전승받는 사람이 기절할 수 있었다.

    ‘아……!’

    아론은 서서히 신력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게 요정족이 말한 전승이구나.’

    마치 아론이 경험했던 것마냥 머릿속에 쏙쏙 박혀 들었다.

    어떻게 하면 상극의 원소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지. 그럴 때 신력의 조정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갖가지 지식들이 전해졌다.

    ‘지금 당장 융합 마법을 써보라고 하면 쓸 수 있을 정도다.’

    아론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희열감에 고통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약 2시간이 지난 뒤.

    포드는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전승을 마쳤다.

    아론은 의식이 몽롱했다. 전승을 받는 동안 뇌는 계속해서 한계치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봐. 이 인간은 뭐야?”

    그때였다.

    저 멀리서 정체를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한 번에 이 내용을 다 흡수할 수 있지? 요정족들도 몇 번에 걸쳐서 받아들이는 내용인데 말이야.”

    웬 노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포드의 것은 아니었다.

    “누구……?”

    아론은 나른해진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물어보았다.

    “나? 내 이름은 스라크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이 책을 쓴 요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