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30/40)
  • Chapter 5

    아론은 수련을 거듭하면서 신력을 다루는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 이제 바깥의 신력을 체내로 끌어들이는 건 쉽게 가능했다.

    ‘하지만 들어온 신력과 마나를 섞는 건 이상하게도 진전이 없단 말이지.’

    지금 아론이 맞닥뜨린 문제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신력을 느끼고 끌어들이는 거에서 멈출 수 없었다. 신력을 몸에 정착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마나와 신력을 섞는 것이 필수였다.

    ‘으음. 어쩐다.’

    계속해서 노력하는 건 좋지만, 막혔을 경우에는 다른 방식을 써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힘으로 뭉치는 건 안 된다. 마치 물과 기름을 강제로 섞는 것과 같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잠깐만. 물과 기름?’

    지구에서 그 두 가지를 섞는 방법이 있었다. 다름 아닌 초음파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마나를 고속으로 진동시킨다면…….’

    물론 마나와 신력은 물과 기름에 똑같이 대응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도해 보는 건 그다지 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론은 마나의 제어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주위의 신력을 몸 안으로 끌어들인 뒤 흐르고 있던 마나를 고속으로 진동시켰다.

    “으음.”

    거기에는 약간의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참을 만했다.

    ‘어? 섞이는 거 같은데?’

    아론은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마나와 신력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하나처럼 융합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방법을 찾았어. 계속 이렇게 해보자.’

    그 후로 아론은 꼬박 하루 동안 마나와 신력을 섞는 과정에 집중했다.

    어느 정도 두 가지 힘을 섞는 데 감이 잡히자, 핀레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나와 신력을 융합하면 마치 마나를 다루듯 힘을 쓸 수 있다고 했었지.’

    아론은 한번 마법을 써 보고 싶었다. 과연 이전과 비교해서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궁금했다.

    ‘위력이 어떨지 알 수 없으니 약한 마법으로 시험해 봐야겠다.’

    아론은 그래서 1서클 마법인 윈드를 골랐다.

    체내의 마나를 진동 시켜 신력과 융합시킨 뒤 간단한 술식을 거쳐 윈드 마법을 발현했다.

    ‘어, 어? 잠깐만!’

    아론은 바람이 자신의 손을 떠난 순간, 힘을 제어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휘오오-!

    그 결과, 오두막이 박살 났다.

    아론은 신력의 위력을 직접 써보고 체감하니 놀라웠다.

    ‘이게 신력의 힘이구나.’

    자신이 쓴 마법은 고작 1서클 수준이었다. 그런데 보여준 파괴력은 능히 5서클 공격 마법을 상회했다.

    하지만 이를 보고 좋아할 순 없었다. 마법을 쓰자마자 체내에서 섞였던 마나와 신력이 분리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그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차차 보강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대단한데?”

    핀레르 역시 오두막이 날아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진심이 담긴 칭찬을 아론에게 해주었다.

    ‘마나와 신력을 섞는 방법을 터득했군.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론에게 올 때마다 놀라움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랬다.

    “어떻게 두 힘을 섞었지?”

    “말로는 힘들어. 직접 보여주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번 신력을 끌어들일 준비를 했다.

    “잠깐만. 겉으로 봐서는 잘 알 수 없으니 몸에 손을 대도 괜찮을까?”

    핀레르의 물음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론은 마나를 진동시켜서 체내로 흡수한 신력을 섞었다.

    ‘이런 방법이……?’

    핀레르는 아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면서 깜짝 놀랐다.

    마나를 진동시킨다. 여태껏 이런 발상으로 신력을 융합시킨 인간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론만이 할 수 있겠군.’

    행여나 다른 인간에게 신력을 가르칠 때 이 방법을 말해줘도 따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내의 회로를 타고 흐르는 마나를 저렇게 진동시키는 것은 극도로 미세한 마나 제어 능력이 필요했다.

    아론은 그 재능을 타고났기에 이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아무리 요정족의 시험을 통과한 인간이라 해도 감히 아론만큼 마나를 다룰 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아론이 신력을 완전히 다룰 수 있고,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의 분노로부터 우리들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만.’

    요정족이 신의 분노만 입지 않았어도 이렇게 다른 차원에 숨어 지낼 필요는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이렇게 숨어 있는 것도 아직까지 신의 분노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으로부터 분노를 이끌어 낸 ‘그자’가 활동을 멈추지 않는 한 계속해서 그들은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아론이 미티움과 계속 접하고 있다면, 언젠가 그자와 마주하게 되겠지.’

    핀레르도 아론이 미티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론이 그자를 물리친다면, 우리는 신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핀레르는 이번 인간에게 요정족의 염원을 걸어보기로 했다.

    ‘물론 우리들의 부탁을 들어줬을 때의 얘기겠지만.’

    하지만 아론이 거절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핀레르는 아론에게서 성장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론에게 떡밥을 던져보기로 했다.

    “대단하군. 이 정도면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도 가르칠 수 있겠는데?”

    “그런 게 있었어?”

    핀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으로 보여줄 건 요정족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사용하는 거다.”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주길래 저러는 것일까. 아론은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론. 나를 공격해 봐라.”

    핀레르는 자신을 보고 손을 까딱거렸다.

    아론은 요정족이 지닌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요청에 사양하지 않고 최대의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화르륵!

    무려 6서클의 화염 마법이었다.

    아직 고위 마법에 신력을 섞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마나만을 이용해서 마법을 발현시켰다.

    ‘위력이 달라진 거 같은데?’

    아론은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내 그는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마나가 조금 더 순수해졌군.’

    그의 몸에 저장되어 있던 마나가 신력과 한번 융합되면서 좀 더 순수한 형태의 마나로 바뀌었다.

    그걸 이용해서 마법을 썼으니 이전보다 위력이 증가했다.

    ‘괜찮겠지?’

    핀레르의 말에 사정 봐주지 않고 마법을 쓰긴 했는데,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걱정은 기우였다.

    핀레르는 자신의 앞에 불로 된 벽을 세우며 마법 공격을 막으려 했다.

    아론이 쏘아낸 화염 마법은 핀레르가 만든 불의 벽에 채 닿기도 전에 힘을 잃었다. 이내 아론의 마법은 사라지고 말았다.

    ‘뭐지?’

    아론은 살짝 당황했다.

    핀레르가 만들어 낸 건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는 불의 벽이었다. 다만 색깔이 푸른빛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불은 온도에 따라 색상이 달라지긴 하는데…… 어?’

    아론은 깜짝 놀랐다.

    핀레르가 만든 불의 벽이 푸르렀던 이유는 온도 때문이 아니었다.

    ‘냉기?’

    아론은 순간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의 벽 내부에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말도 안 돼.’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군.”

    핀레르는 아론의 반응을 보며 웃었다.

    “이건 신력으로 마법을 사용할 때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지.”

    “대체 어떻게…….”

    “신은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 힘에 가장 가까운 것이 이 신력이야. 표현하자면, 모든 힘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는 아론을 위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마나도 그렇지. 마나로 발현하는 불이나 얼음, 바람…… 모두 신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기원이 되는 힘은 해내지 못할 것이 없지.”

    “그렇지만…….”

    아론은 그 설명을 듣고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구에서도 헌터들의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상극의 속성 마법을 융합하는 것도 있었다.

    예로 들어, 화염의 장점과 냉기의 장점만을 취해서 새로운 마법을 만들 수 있다면 헌터들이 더욱 강력해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서로 별 영향을 주지 않는 바람이나 대지 마법을 융합하는 것은 몰라도, 아예 상극의 속성을 지닌 마법은 섞는 것이 불가능했다.

    ‘신력을 쓰면 그게 된다고?’

    단순히 모든 힘의 기원이라서?

    아론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핀레르는 실제로 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게 된다면, 신력은 정말 궁극의 힘인 거잖아.’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보여준 것도 초급 수준이야.”

    “그게 초급이라고?”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이 이상으로 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거든. 나도 어설프게 섞는 게 다야.”

    핀레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로드 님 같이 강한 힘을 타고난 요정은 다르시지. 훨씬 더 자연스럽게 마법을 융합하실 수 있으시거든.”

    이보다 더 강하다니.

    아론은 핀레르의 수준만 따라 할 수 있더라도 훨씬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게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이라.”

    “여태까지 이곳을 찾아왔던 다른 인간에겐 보여주지 않은 거다.”

    핀레르는 씩 웃어 보였다.

    “그걸 아론, 너에게 알려 주지.”

    그 말을 들은 아론은 기대되면서 걱정이 되었다.

    ‘요정족 중에서도 소수만 아는 활용법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인간이 배웠던 사례는 없었고 말이야.’

    그런 능력을 굳이 자신에게 공개하고 알려주려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공짜 점심은 없다고, 분명 무언가 자신에게 원하는 대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한테 원하는 건 뭐지?”

    그래서 아론은 물어보았다.

    “……네가 성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론. 자네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소원도 이루어질 터.”

    “으음.”

    핀레르의 말은 상당히 함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가를 읽어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서로 간의 이해가 일치한다, 이 말이군.’

    거기다가 요정족은 거짓말을 하는 종족은 아니었다.

    “좋아. 그게 조건이라면 받아들이지.”

    아론은 자신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그 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론은 신력을 터득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핀레르도 아론에게 제안을 한 이후로는 제대로 각을 잡고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단순한 도우미에 불과했었다. 아론이 막히는 부분을 물어보면 알려주고, 잘못된 점만 짚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게 가르쳐주었다.

    핀레르는 단순히 실력만 좋은 게 아니었다. 가르치는 것에 소질이 있었다.

    덕분에 아론은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걸 배웠다. 이제 아론은 신력과 마나를 섞은 채로 마법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물론 고위 마법까지 신력으로 마법을 발현하는 건 아직 불가능했다.

    지금 수준으로는 3서클 정도가 한계였다. 무리하면 4서클까지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론은 이 정도 성취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신력이 섞여서 발현되는 마법은 그 파괴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핀레르가 그날 보여주었던 화염 마법과 냉기 마법의 융합. 아론은 그 원리 역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방법만 익혔을 뿐이었다. 직접 해보려고 시도하면 실패하는 확률이 훨씬 높았다. 아직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요정족에서도 소수만이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퍼엉!

    ‘이번에도 실패군.’

    화염에 냉기를 섞어버리면 순식간에 불이 꺼져버렸다.

    “고전하고 있구만.”

    핀레르가 아론의 상태를 보며 말했다.

    “요정들은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인간에겐 없으니 말이야. 그래서 배우는 게 더욱 어려울 거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론은 배우면서 확실히 그것을 체감했다. 지식을 알고 있는 거랑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마치 그거군. 꼬리가 없는 우리에게 꼬리를 흔드는 법을 가르치는 리자드맨의 심정이네.”

    “그거 괜찮은 비유군.”

    아론의 말에 핀레르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으음. 하지만 이대로 하다가는 언제 완벽하게 신력을 쓸 수 있을지 예상하기 힘들겠어.”

    핀레르는 자신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그가 아론을 가르치는 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그에게 요정족의 운명을 걸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아론이 신력의 사용법을 빨리 익히는 것이 좋았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

    “어…… 있긴 하지만.”

    아론이 질문하자 핀레르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융합의 방법에 대해 적힌 책이 있어.”

    “그런 게 있었나? 차라리 나한테 그걸 주지 그랬어?”

    “인간의 책과는 달라. 우리 요정들의 책은 지식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쓰여졌다.”

    “사람이랑 크게 다를 게 없는 거 같은데?”

    아론의 말에 핀레르는 고개를 저은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정이 쓴 책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지식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놀랐다.

    그게 가능하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언어는 불완전해서 어떻게든 전달을 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 정보가 소실되거나 왜곡되는 건 감안해야 했다.

    하지만 100% 그대로의 지식을 전수할 수 있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게 요정들이 신에게 필적할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인가.’

    아론은 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통해 신력을 이용한 마법의 융합을 배우고 싶었다.

    “그건 나도 할 수 있어? 그냥 책을 읽기만 하면 지식이 내 것이 되는 건가?”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다. 책에 적힌 정보를 이해할 정도의 기초는 지니고 있어야 하거든. 음, 하지만 너는…….”

    핀레르는 잠깐 아론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내가 신력에 대해서 확실하게 가르쳤으니까, 충분히 지식은 갖춘 셈이다. 아마 책을 읽어도 지식을 흡수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나한테 그 책을 줘.”

    그 말에 핀레르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책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조건이 있나?”

    “로드 님을 비롯해서 요정족의 장로님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해.”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 요정들은 매우 실력을 중시하거든. 네가 그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면 된다. 그 방법은 장로님들이 지정한 상대와 겨루는 것이지.”

    대련이라.

    아론은 전투라면 도가 텄다.

    그렇기에 핀레르가 제시한 조건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걱정도 되었다.

    요정족들은 예외 없이 다들 강했다. 그런 그들과 힘을 겨루어서 실력을 증명해 보이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쿠브의 힘을 빌릴 수도 없어.’

    현재 아론의 곁에 쿠브는 없었다. 쿠브는 이곳에 온 이후로 쭉 로드의 곁에 있었다.

    로드가 쿠브와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드와 함께 지내는 게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핀레르가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쿠브를 속박한 게 아니었다. 언제든 쿠브가 원하면 아론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로드가 잘 대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민이 되나?”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 선택해야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혹시 인간들 중에서 장로들의 인정을 받은 자가 있었나?”

    “있긴 했었다. 이번처럼 신력을 이용한 마법의 융합에 대한 책을 얻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그 인간은 다른 걸 원했기에 인정이 필요했었지.”

    아론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했는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녀석도 인정을 받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때 녀석의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다.”

    반면 아론은 아직 스무 살도 채 넘기지 못한 소년이었다. 지금의 아론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핀레르는 아론이 무르익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넌 재능도 있고 집념도 충분하다. 아마 몇 년 정도 수련하다 보면 장로님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연 단위로 걸린다고?”

    그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건 곤란했다.

    물론 아론도 이것이 매우 후하게 쳐준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요정과 인간은 수명 자체가 틀리니 말이다. 그들에게 몇 년은 인간에게 몇 달 정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몇 년이면 대륙에서 굵직한 일들이 터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걱정이 된다. 만약 트레벨이 그들의 행방을 찾게 된다면 큰일이다.’

    그래서 아론은 최대한 빨리 수련을 끝내고 싶었다.

    “대련이라고 했지? 한 명만 이기면 되는 건가?”

    “명목적으론 그렇지. 그리고 지더라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인정을 해주기도 해.”

    그 이야기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몇 년은 너무 길어. 최대한 단기간에 끝내도록 하겠어.’

    아론은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위한 과정에서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했었다.

    그 과정은 허사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상대와의 전투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그 방법을 익혔었다.

    아론은 그것을 토대로 이번 대련에 임하기로 했다.

    ***

    아론이 책을 원한다는 의사를 핀레르가 대신 장로회에 전달해 주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은 대련 상대를 배정받게 되었다.

    “아론. 대련 상대가 정해졌다.”

    “누구지?”

    마침 핀레르가 그 소식을 아론에게 들고 왔다.

    “에르파라는 친구다. 요정족의 젊은 검사들 중에서 걸출한 녀석이지.”

    “검사라.”

    아론은 이왕이면 핀레르와 비슷한 마법사와 붙길 희망했다. 그러면서 요정족의 마법을 상대로 맞서보고 싶었다.

    ‘하지만 검사도 나쁘지 않지.’

    이곳을 나간다면 머지않은 시기에 아이젠 왕국의 기사들과도 붙을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검을 쓰는 요정과 대련하는 건 오히려 좋은 공부가 될지도 몰랐다.

    “대련은 이틀 뒤니까, 몸 관리 잘하고 나와라.”

    이틀 뒤, 아론은 대련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인간과 요정이 대련을 벌인다는 소식에 이미 많은 요정들이 모여 있었다.

    “저자가 이번에 시험을 통과하고 왔다는 인간이군.”

    “저번에 로드 님하고 만나는 모습을 광장에서 봤었어. 그때랑 비교하면 많이 성장한 거 같은데?”

    “인간치고는 드물게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요정들은 아론을 보며 저마다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대부분 우호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평가와는 별개로, 에르파와의 대련에서 아론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과 요정 사이에는 격차가 있었고, 에르파는 실력이 있는 검사였다.

    단지 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 궁금했다.

    잠시 후, 에르파가 대련장에 도착했다.

    아론도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강하다.’

    단순히 기운만을 놓고 본다면 자신이 승리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론은 전투가 단순히 힘의 우위로 정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아론은 수많은 전투를 겪어오면서 자신보다 우세한 상대와 여러 번 싸웠었다. 그때마다 아론은 기지를 발휘해서 상대를 꺾고 전투를 이겼었다.

    ‘이번에도 이기겠다.’

    아론은 결의를 다졌다.

    한편, 에르파는 자신이 지닌 칼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아론을 보며 입을 열었다.

    “봐주면서 상대하지는 않을 거다. 웬만한 치명상도 신력으로 치료가 가능하거든.”

    “나도 그편이 편해.”

    아론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흥. 인간은 허풍이 많은 종족이지. 과연 그 배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군.”

    “직접 붙어보면 알게 될 거다.”

    “……한 수 부탁하지.”

    대련이 시작되었다.

    에르파는 검을 허공에 천천히 휘둘렀다.

    동시에 아론은 섬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하다!’

    기운이 보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아론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자신이 있던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있었던 곳에 어마어마한 풍압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게 신력을 쓰는 검사의 힘……!’

    전투 방식은 오러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신력은 파괴력에서 수준이 달랐다.

    만약 아론이 신력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방금 기운도 느끼지 못하고 당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아론은 당하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아론은 회피하면서 동시에 공격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르륵!

    신력을 담은 2서클의 화염 마법이었다. 에드먼스 호흡법이나 펜던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 위력은 상당했다.

    에르파는 날아오는 마법에 맞서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검풍이 아론의 마법을 날렸다.

    ‘……벌써 신력을 이 정도로 다룰 수 있는 건가?’

    에르파는 내심 놀랐다.

    여태까지 이곳에 온 인간이 몇 없긴 했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성취가 월등하다고 여겨졌다.

    “그게 끝이 아니다.”

    아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에르파의 뒤편에서였다.

    ‘어느 틈에……!’

    화르르륵!

    처음에 쏘아냈던 화염보다 더 큰 불덩어리가 에르파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 * *

    에르파는 놀랐지만 가만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그는 검에 신력을 담아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휘둘렀다.

    퍼엉!

    아론의 화염 마법과 검이 충돌했다.

    “인간이 저런 속도를?”

    “허어…….”

    지켜보던 다른 요정족들도 놀라서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놀란 건 대련을 하고 있는 에르파였다. 아론이 보여준 의외의 공격에 그는 간신히 그것을 막아내었다.

    ‘신력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저렇게 정교하게 조정이 가능하다고?’

    아론은 단순히 몸이 빠른 게 아니었다. 에르파는 그가 움직이는 순간에 마법의 개입이 있었음을 파악했다.

    ‘가속 마법인가?’

    그래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속 마법은 몸을 움직이는 상황에서 계속 써야 했다. 거기에 신력을 섞으려면 섬세한 조정은 필수였다. 조금이라도 신력이 엇나가는 순간 몸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을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신력을 사용하는 게 수준급이다. 거의 일반 요정들이 사용하는 정도까지 도달했어.’

    에르파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여기에 도달했던 인간들 중에서 단기간에 신력을 이만큼 다루었던 자가 있던가?

    자신이 기억에는 없었다.

    단순히 재능 혹은 타고난 감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신력을 겉핥기로 배운 게 아니야. 더욱 깊은 본질을 이해해야만 저 정도 수준에 다다를 수 있다.’

    그 말은 즉.

    누군가가 아론에게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을 가르친 게 분명했다.

    ‘예로 들면, 상극 마법의 융합이라든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만한 신력 제어를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방법을 알고 있고, 가르칠만한 요정은 소수였다. 한데, 아론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은…….

    에르파는 핀레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 대련은 핀레르가 장로회에 주선했으니 당연히 그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핀레르는 에르파의 시선을 느끼자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저 녀석이 가르친 거군.’

    에르파는 핀레르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대체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을 가르쳐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하지만 핀레르가 신중한 성격이라는 걸 에르파도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에르파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는 다시 대련에 집중하려 했다.

    “그래도 신력을 배운 흉내만 내는 건 아니군. 제법 쓸 줄 아는구나.”

    “그쪽도 봐주면서 하지는 않을 거라더니, 언제쯤 전력을 보일 생각이지?”

    아론의 말에 에르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힘을 다 쓰지 않는 걸 알고 있었군.’

    상대의 진짜 실력을 간파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자신이 한 말 정도는 지켜야지. 얼른 전력을 보여줘.”

    “건방 떨기는. 그렇지 않아도 지금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에르파는 그렇게 말한 뒤 발을 한 번 굴렀다.

    쿵!

    그러자 신력이 땅을 타고 아론을 향해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맞으면 위험하다!’

    아론은 즉시 대지 마법을 이용해 날아드는 진동을 상쇄시켰다.

    이 정도 충격이면 맞았을 때 잠깐 무력화 상태에 빠졌으리라 예상되었다. 그 틈에 에르파는 공격을 했을 테고 자신은 패배했을 게 분명했다.

    ‘이걸로 일격을 먹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터. 이거는 눈속임이다.’

    아론은 전방의 에르파를 주시했다. 예상대로 그는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에르파의 검신에 희끄무레한 기운이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검날이 사라졌다.

    ‘칼날이 사라졌다고?’

    형태를 감춘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사라진 것인가.

    에르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날이 사라진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아론의 주위로 수십 개의 칼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환영인가?’

    하지만 이내 아론은 공중에 뜬 칼날들에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다. 저건 모두 진짜다.’

    어떤 요술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허공의 칼날들은 모두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저걸 맞으면 걸레짝이 되겠군.’

    아론이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떠올랐던 칼날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아론은 가속 마법을 사용해 그 칼날들을 피했다.

    감히 방어 마법을 펼쳐서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칼날 하나하나가 에르파가 휘두르는 검격에 맞먹었다.

    쾅! 콰앙!

    칼날이 떨어지면서 커다란 폭음을 내었다.

    아론은 그사이를 피하면서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틈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캐스팅 속도를 지닌 아론이 반격하기 힘들 정도였다. 새삼 얼마나 요정족의 실력이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처음 공격했을 때랑 차원이 다르다.’

    아론이 예상했던대로 에르파는 이전까진 정말 힘을 빼고 싸웠었다.

    ‘계속해서 피하기만 하면 답이 나오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칼날을 피하면서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칼날이 뿜어내는 신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기운이 향하는 방향이 칼날이 떨어지는 곳이다.’

    아론은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그것을 뚫고 나가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칼날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신력을 조금 더 써서 가속 마법을 쓴다면,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곧장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론은 체내에 흐르는 마나를 순간적으로 진동시켰다. 신력을 더 짜내기 위해서였다.

    타앗!

    아론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콰앙!

    칼날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것들은 아론의 잔상을 공격하는 데 그쳤다.

    “사라졌어?”

    그 광경을 본 요정들은 놀라서 외쳤다. 너무 빨리 움직인 나머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스스스……!

    그 사이에 에르파의 주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에르파가 안개를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하는 순간. 아론은 그 틈을 비집고 나타나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콰르릉!

    공중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프로스트 포그를 이용해 안개를 생성하고, 거기다가 6서클의 번개 마법을 끼얹었다.

    특별히 공격 마법에 신력을 더했으니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면 충격이 클 거다.’

    안개를 퍼뜨린 건 시야를 가리는 역할도 있었지만 번개 마법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도 있었다.

    파지지직!

    내리친 번개는 안개를 타고 그 일대를 뒤덮었다.

    ‘아무리 에르파라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번개를 막아내진 못하겠지.’

    아론이 고심 끝에 생각해 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가속 마법을 사용해 떨어지는 칼날을 피한다. 그러면서 에르파의 주위를 광속으로 이동하면서 안개 마법을 준비한다. 그 작업이 끝나면 일정 거리를 벌리고 번개를 떨어트린다.

    이 모든 과정이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성공할 수 있었다. 범인이라면 술식 계산이 복잡해서 중간에 넘어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론은 위기 상황에 처하니 오히려 머리가 팽팽 돌았고, 고도의 집중력을 활용해 해낼 수 있었다.

    물론 아론도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단시간에 여러 마법을 사용했으니 회로는 터져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그래도 마나보다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신력이었다. 무리해서 6서클 공격 마법에 신력을 섞었으니, 아론에게 다음 수는 없었다.

    ‘부디 에르파가 쓰러져야 할 텐데.’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아론은 녀석이 쓰러졌길 빌었다.

    일순, 안개가 걷혔다.

    아론은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마나가 다해서 안개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마법이 발현된 중심부를 강제로 끊어서 안개를 흩어버린 거였다.

    ‘저게 가능해?’

    마나든 마법이든 발현이 되면 중심이 되는 핵을 가지고 있다. 이론상으론 그 중심을 찔러버리면 마법을 파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이었다.

    마나는 정적인 것이 아니었고 항상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었다.

    그 중심을 정확히 찾아서 형태를 지닌 것으로 찌른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에르파는 해내어 보였다.

    “허…….”

    아론은 허탈했다.

    최후의 일격이 이렇게 막히다니.

    다음 수를 쓰기에는 이미 회로가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에르파는 아직 건재했다.

    “그래도 머리를 좀 굴렸군. 마지막 공격은 꽤나 재미있었다.”

    에르파는 웃으면서 말했다.

    악의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분했다.

    후욱-!

    에르파가 검을 휘두르자 또다시 허공에 수많은 칼날들이 떠올랐다.

    수십 개의 칼끝이 아론을 집어삼킬 듯이 노리고 있었다.

    ‘내 일격을 막았는데, 아직도 힘이 남아 있다니.’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역시, 요정은 강했다.

    저런 존재가 대륙에 한 명만 있었더라면,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신의 분노를 입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아론은 이번 기회에 에르파와 싸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검사와 싸우면 어떻게 되는가. 그 경험을 뼈저리게 할 수 있었다.

    푸욱!

    칼날의 비가 쏟아졌고, 아론의 온몸이 꿰뚫렸다.

    에르파는 그래도 칼날에 신력은 담아두지 않았었다. 아론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한 배려였다.

    만약 저 칼날에 신력이 담겨있었더라면 아론은 형체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신력으로 치료를 해준다고 했으니 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아론은 바닥에 쓰러졌고, 승부는 결정이 났다.

    “에르파가 이겼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드가 입을 열었다.

    “에르파! 에르파!”

    “역시 요정족 최고의 검사다!”

    지켜보던 요정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빨리 인간을 치료해!”

    한편, 대기 중이던 치료사들이 아론에게 달라붙어 신력을 쏟아부었다.

    아론은 기절 직전까지 갔었으나, 신력에 의해 빠른 속도로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 정도 실력이면 괜찮지 않겠나?”

    로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로드 님. 설마 그 말씀은…….”

    곁에 있던 다른 장로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자격은 증명되었다고 봐야겠지.”

    로드는 쓰러진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아론이 별실로 이동되어 치료를 받는 동안, 로드를 비롯한 장로들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주제는 아론의 자격 증명에 대한 것이었다.

    “자유롭게 의견들 말해주게.”

    로드가 발언을 허락하자 장로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인간의 실력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는 요정이 아닙니다. 실력이 입증되었다고 해서 신력의 본질이 적힌 책을 인간에게 내어주기에는 위험하다고 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배워서 마법을 융합한다고 해도 몸이 버텨줄지도 의문입니다.”

    장로들의 의견은 반대가 우세했다.

    “나도 자네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네. 오늘 대련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렇다면 로드 님도 반대하시는 걸로…….”

    로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늘 대련을 보면서 결정을 내렸다. 인간은 자신의 자격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네.”

    “예?”

    로드의 결단에 장로들은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다들 보았을 것이다. 인간의 상대는 에르파였다. 에르파가 요정족이 자랑하는 걸출한 검사임을 부정하는 요정은 없겠지.”

    “그건 맞습니다만…….”

    “그런 에르파를 상대로 저렇게 싸울 수 있는 인간이 흔히 있다고 할 수 없다. 졌더라도 나는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네.”

    로드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장로들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오늘 인간이 보여준 대련에서 나는 감탄했다. 그가 여기 온 기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신력을 저렇게까지 활용할 줄이야.”

    그리고 로드는 보았다.

    대련의 마지막에, 아론은 융합 마법을 어설프게나마 사용했었다.

    아론이 사용한 안개 마법에 미세하게나마 번개가 흐르고 있었다. 워낙 잠깐이었기에 다른 요정들은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서 로드는 아론 정도면 자격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다.

    “로드 님의 말씀은 지당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요정들 중에서도 소수만 배우는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을 인간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장로의 걱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만이 가진 고집이 아니라, 요정들의 안위를 염려해서 나온 말이었다.

    “인간의 교육 담당은 핀레르가 맡고 있다. 그가 예전에 나에게 상담을 하러 왔었지. 이번에 온 인간이 우리 요정들의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었다.”

    그러면서 핀레르는 요구했었다.

    자신이 아론에게 신력의 정수를 가르치고 싶다고.

    로드는 고심 끝에 그걸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설령 방법을 안다 하더라도 인간이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진도가 부진하면 대련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라고 핀레르에게 말도 했었다.

    “하지만 인간이 ‘그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측에서는 ‘그자’에게 개입할 수도 없다. 하지만 같은 차원을 살고 있는 인간들이라면 다르지. 그리고 이번에 온 인간은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

    요정들이 굳이 시험을 마련해 놓고 인간들을 기다리는 이유는 순전히 호의가 아니었다.

    다 이런 계산을 해두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번 저 인간에게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

    “로드 님의 의견이 그러하시다면…… 저희는 따르겠습니다.”

    결국 장로들도 로드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로드 님. 책을 주는 건 좋습니다만, 요정들만 읽을 수 있는데 어떻게 인간에게 그 책을 읽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전승자도 이곳을 떠난 지 오래라서 인간 혼자 책의 지식을 습득하기엔 무리입니다.”

    그들의 걱정에 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괜찮다. 이번에 온 인간은 에드먼스의 아이다. 어찌 보면 인간이 찾아온 것도 운명일지 모르겠군.”

    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웃었다.

    “핀레르. 아론이 깨어나면 나에게 데리고 와주겠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드는 아론이 깨어나면 그에게 책과 함께 다른 선물을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아론은 별실로 옮겨진 다음에 요정들로부터 보다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아무래도 신력에 의해 전신에 생긴 상처들은 쉽게 치료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론이 상대했던 자가 다름 아닌 요정족의 실력 있는 검사인 에르파였다. 그가 강하게 날린 신력 덕분에 요정들이 아론을 치료하는 데 애를 먹었다.

    열심히 신력이 담긴 신수를 사용하며 아론의 몸을 치료했지만 그 속도가 더뎠다. 그래서 요정들은 할 수 없이 얼마 없는 고농도의 신수를 아론에게 사용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완치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고 말았다.

    요정들에게는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정작 아론에게는 이 과정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비록 아론은 고통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몸을 타고 흐르는 신수를 느끼면서 무의식 상태에서 신력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요정들이 가져온 고농도 신수에는 그만큼 강한 신력이 들어 있었으므로, 치료가 되는 과정에서 신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몸에 각인이 되었다.

    길고 긴 치료가 끝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아론은 눈을 뜰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아론은 자신의 몸을 일으켜 상태를 확인했다. 대련을 하다 쓰러진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어렵게 전신은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분명히 나는 패배했었지.’

    그는 대련 당시를 복기했다.

    에르파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자신이 준비했던 최후의 일격도 그에게는 버틸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과연 로드를 비롯한 장로들의 인정을 받은 걸까.

    아론이 생각하던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핀레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좀 어때?”

    “좀 무겁긴 한데, 전신에 활기가 돌고 있어. 요정들이 열심히 치료해준 덕인 것 같아.”

    “신수를 거의 쏟아붓다시피 했거든.”

    “……결과는 어떻게 됐어?”

    아론은 핀레르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로님들도 너를 인정하셨어.”

    “그 말은, 통과라는 거지?”

    핀레르를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은 속으로 놀라워했다.

    ‘이렇게 한 번에 통과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핀레르조차도 몇 년이 걸릴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론은 단 한 번의 대련으로 자격을 증명받고야 말았다.

    “네가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전투가 로드 님의 마음을 끌었던 모양이야.”

    아론은 그때 당시를 떠올렸다.

    허공에선 칼날이 빗발치는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무아지경의 상태로 마지막 한 수를 준비했었다.

    그랬기에 그 장면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론이 경험했던 마법의 감각만큼은 확실히 남아 있었다.

    ‘6서클의 마법에 신력을 담았었지.’

    그리고 에르파가 자신의 마법을 단칼에 파훼했던 모습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르파가 마지막에 보여줬던 기술 말이야.”

    “아, 마법을 풀어버렸던 그거?”

    “혹시 나도 배울 수 있을까?”

    아론은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원리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다면 대비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해. 그건 에르파가 타고났기에 가능한 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로드 님이 네가 깨어나면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알겠다. 바로 가지.”

    아론은 핀레르를 뒤따라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로드의 방에 도착한 아론. 핀레르는 자신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면서 방을 나갔고, 아론은 로드를 혼자서 마주하게 되었다.

    “자네의 전투는 잘 보았다.”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은 로드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오면서 핀레르에게 들었다.

    나머지 장로들이 반대했는데 로드가 그들을 설득했다고 했었다.

    “쿠브는 잘 있습니까?”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게.”

    로드는 잠시 사라졌다가 이내 쿠브를 데리고 나타났다.

    “쿠브……?”

    아론은 자신의 앞에 있는 쿠브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게, 쿠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을 때는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어엿한 10대 중반의 소년이 된 상태였다.

    ‘이게 진짜 쿠브라고?’

    아론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는데.”

    그 반응을 본 로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자는 정령의 몸속에 씨앗이 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군.’

    로드는 그 사실을 설명했다.

    “이 정령의 몸속에 씨앗이 품어져 있더구나. 그래서 나는 정령과 놀면서 그것을 개화시켰지.”

    “씨앗이라고요?”

    “이제야 신의 화신으로서 힘을 좀 쓸 수 있을 거다. 물론 계약자인 자네의 능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금방 한계가 찾아오겠지만.”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어쨌든, 성장했다는 말이구나.’

    자신이 신력을 배우고 있을 동안 쿠브도 힘이 늘어났다는 것이 풍겨져 나오는 기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론! 보고 싶었어!”

    하지만 쿠브는 아직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말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단순히 씨앗을 개화시켰을 뿐이다. 정령도 자신의 존재가 성장했다는 걸 완전히 인식하면 그에 맞춰서 성격도 바뀔 것이다.”

    “그렇군요.”

    아직은 위화감이 들었지만, 로드가 아론을 위해서 일을 해주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별거 아니다. 그것보다 이제 책을 받아야지.”

    로드는 아론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여기에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이 적혀 있는 건가.’

    하지만 난관이 있었다.

    아론은 책의 표지에 있는 글자부터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게 요정들이 사용하는 언어인가?’

    대륙에서 생활하면서 전혀 본 적이 없는 글자였다.

    “인간은 읽기 힘들 거다. 그렇다고 우리의 언어를 배우긴 더욱 시간이 들 테지.”

    “그러면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핀레르에게 들었겠지만, 우리들은 책을 통해 온전히 지식을 전승한다네. 이걸 읽을 수 없다면 책의 내용을 추출해서 새겨줄 전승자가 필요하네.”

    “그 전승자라는 요정이 여기에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없다. 하지만 대륙에는 존재하지.”

    “예? 그렇지만 여기는 숨겨진 차원 아닌가요? 대륙의 요정족은 전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굳이 요정일 필요는 없다. 요정의 언어를 이해하는 자라면 충분하지.”

    그렇다면 그 전승자를 찾는 게 아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그게 누구입니까?”

    “너는 에드먼스 가문의 아이가 아니더냐? 너희 가문에 있을 터인데.”

    “처음 듣습니다.”

    “그래. 분명 이름은 포드라고 했었지.”

    “포드 님이요……?”

    로드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 * *

    아론은 얼떨떨했다.

    여기서 포드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포드 님은…… 요정족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습니까?”

    “뭐,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면 이곳 솔티어크에도 온 적이 있겠군요. 저처럼 신력을 배우시려고…….”

    “아니, 그건 아니다.”

    로드는 아론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것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포드 님이 전승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하지만 포드가 직접 여기로 와서 우리와 연을 이은 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론은 궁금했다.

    로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들 중에서는 요정의 흔적을 쫓다가 우리들의 사념체를 만나는 일이 간혹 있지. 포드도 그런 인간 중에서 하나였다.”

    아론은 로드의 말을 경청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 포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단지 포드가 강하다는 것뿐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포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두고 싶었다.

    “포드는 고대 마법과 사라진 요정족을 주로 연구하는 마법사였다. 특히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요정족의 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지. 그러던 중에 요정족이 쓴 책을 발견했고, 그 안에 깃든 사념체와 접촉했다.”

    “사념체요? 그런데 포드 님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자세하게 아시는 겁니까? 직접 만나신 적도 없으신데.”

    “사념체도 신력으로 구동되고, 그 힘은 세계수에 원천을 두고 있네. 그래서 사념체를 통해서 제한적이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

    “그렇군요.”

    “그저 그런 녀석이었다면 나도 정보를 받고 신경을 껐겠지만, 포드는 인간들 중에서도 뛰어난 학자였다. 요정족의 언어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걸 이용하는 경지까지 이르렀더군.”

    “그게 가능합니까?”

    인간이 요정족의 언어를 이용하다니. 아론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원래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하지만 포드가 접한 것은 사념체였다. 그 사념체는 요정족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자였네. 독특한 사념체였기에 그만큼의 성취도 가능했을 수 있지.”

    아론은 포드가 마법을 사용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보통 마법이라 함은 술식을 짜올리는 과정을 거쳐 발현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포드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없었다. 아론은 그게 이해가 잘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포드 님이 요정족의 언어를 이용했더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요정의 언어가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라도, 책으로 완전한 지식의 전승이 가능할 정도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술식 없는 마법을 운용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아론은 그게 가능한지 로드에게 물어보았다.

    “술식 없이 마법을 썼다고? 거기까지 도달했을 줄은 몰랐군. 포드는 생각보다 대단한 인간이었어.”

    로드도 예상외였던지 놀라움을 표했다.

    “하지만 포드는 인간이다. 아마 그 성취를 위해서 무언가 대가를 지불한 게 틀림없겠지.”

    ‘대가라.’

    아론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공작으로부터 들은 포드의 맹약.

    포드가 치른 대가는 아마 그것일 터였다.

    아론의 추측이었지만, 공작과 에드먼스는 실력 차가 없었다.

    하지만 포드가 자신을 위해서 힘을 썼고, 그 대가로 공작에게 순순히 구금당한 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무언가의 대가로 묶여 있었더라면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쩐다. 포드 님은 내가 만날 수 없는 상태인데.’

    신력의 제대로 된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로드로부터 받은 책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전승자가 필요한데, 포드는 지금 구금 상태였다.

    ‘신력을 배우는 걸 미룰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 계획을 수정해야겠어.’

    아론은 생각했다.

    포드는 아론에게 있어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실력을 키워서 서열을 올린 뒤에 공작으로부터 포드의 비밀을 전해 들을 예정이었다. 자신의 이후 행동은 그것을 듣고 나서 세우려고 했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론, 셋째 정도는 충분히 이길만하다.’

    지금 자신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첫째나 둘째는 예측이 힘들었다. 붙어봐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작으로부터 굳이 포드 님의 비밀을 들을 필요도 없어졌다.’

    아론은 오늘 포드가 요정족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대가를 치렀다는 정보도 얻었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포드 님과 만나는 건데…….’

    아론은 고심했다.

    포드가 어디에 유폐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탈출시키는 건 힘들었다.

    아니면 정직하게 서열을 올려서 공작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방법도 있었다.

    ‘여기서 생각할 게 아니군.’

    생각만으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일이 끝나면 공작가로 가봐야 할 듯싶었다.

    “이 책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는 자격을 증명했고, 그래서 주었을 뿐이다.”

    “혹시 지금 이곳을 나갈 수 있습니까?”

    “솔티어크를 나가겠다는 말인가? 미안하지만 당장은 힘들다. 우리가 차원의 이면에 숨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다시 자네를 원래의 곳으로 보내려면 세계수의 힘이 필요하다네. 아직 그 힘이 완전히 모이지 않았어.”

    “어느 정도 걸립니까?”

    “음. 한 달 정도로 예상한다만.”

    “혹시 강제로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이곳에 온 인간은 몇 안 되지만, 세계수의 힘이 완전히 모이기 전에 떠난 이는 한 명도 없었네.”

    한마디로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아론은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나가서 포드와 접촉할 단서를 찾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로드도 아론의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실망하진 말게. 대신 내가 지식을 좀 가르쳐 주지. 가장 배우고 싶은 건 마법의 융합 아니었나?”

    로드가 직접 가르침을 주겠다는 제안. 나쁘지 않았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지. 그게 나중에 책의 지식을 전승받을 때도 상승효과를 불러올 걸세.”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여기에 더 머물면서 다른 것들도 조금씩 배워보게.”

    로드의 그 말에 아론은 에르파가 사용했던 마법을 파훼하는 기술이 떠올랐다.

    요정들 중에서도 오직 에르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했다.

    ‘녀석과 계속 붙어 보면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가기 전 한 달 동안 무엇을 할지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

    아론은 솔티어크에서의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였다.

    실력을 성장시키고 상대를 이해하는 데에는 대련만 한 것이 없었다. 아론은 에르파를 포함해 많은 요정족들과 친선 대련을 했다.

    그러면서 느낀 건, 요정들은 역시 강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신력을 개성적으로 활용했고, 그러한 전투는 아론에게 많은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아론은 역시 에르파의 기술을 꼽고 싶었다.

    에르파는 자신의 기술을 ‘브레이커’라고 불렀다.

    아론은 그것의 원리를 이해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타고 나야만 가능한 기술인 걸까. 아론은 그것을 마주할 때마다 그 생각을 했다.

    아론에게 있어 불만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매일 요정들과 대련하고, 실력을 갈고닦으며 지식을 하나둘 습득해 갔다.

    에르파 외의 요정들도 강했고, 아론이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련을 하면서 느꼈다. 격차가 조금씩이나마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은 금방 흘러갔다.

    아론은 오늘, 에르파와의 마지막 대련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파아앗-!

    아론은 가속 마법을 시전하고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나타나 공격 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에르파는 이번에도 검을 놀려 아론의 마법을 파훼했다.

    ‘쿠브의 힘을 빌렸는데도 도달할 수 없다니.’

    아론은 절망하기보단 에르파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스스슥-

    에르파가 검을 휘두르자 수십 개의 검이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신력을 담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스쳤다간 치명상을 입었다.

    저걸 막거나 피한 다음에 에르파에게 공격을 가하라고? 아론은 과연 자신이 그것을 해낼 수 있는지 속으로 물어보았다.

    ‘불가능해.’

    여전히 자신과 에르파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했다.

    ‘잠깐만. 저건 뭐지?’

    일순이었지만 아론의 눈에 칼날의 주위로 아지랑이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슈슈슉!

    부유하던 칼날이 아론에게 쏟아졌고, 그것들은 아론의 눈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차피 대련이니, 굳이 아론의 몸에 칼을 꽂아 넣지는 않았다.

    “역시, 에르파야.”

    아론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의 의사를 전했다.

    “결국 네게는 도달할 수 없었어.”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에르파가 말했다. 비아냥은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 아론과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졌고, 이 정도의 간단한 농을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너, 방금 검의 흐름을 봤지?”

    “잘 모르겠는데. 아지랑이 비슷한 건 본 거 같아.”

    “흠. 그 정도면 발전이 없었던 건 아니네.”

    “무슨 소리야?”

    “그건 심안이 발현되는 초기 단계야. 그 감각, 잊지만 않는다면 네게 큰 도움을 줄 거다.”

    “그렇단 말이지.”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방금 전 아지랑이를 보았던 걸 떠올렸다.

    ‘잘 와닿지는 않지만, 시간 문제겠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핀레르가 그를 찾아왔다.

    “준비가 끝났어. 이제 세계수로 가면 돼.”

    “바로 갈게.”

    아론은 에르파와 인사를 나누었다.

    “잘 있어라. 덕분에 좋은 경험 하고 간다.”

    “나도 인간이랑 이렇게 대련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보자고 말을 한 뒤에 아론은 대련장을 떠났다.

    세계수가 가까워지자 요정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아론과 한번 겨루었던 요정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론이 처음 교류한 인간이었기에 이번 이별도 특별했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다.

    아론은 그들 모두와 충분히 인사를 나누었다.

    “밖에 나가서도 자네가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네.”

    마지막으로 로드가 아론에게 말을 건넸다.

    아론은 그것이 단순한 인사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로드의 말에는 영험한 효과가 있었다.

    ‘몸속의 마나가 뜨거워지고 있어.’

    아론은 이내 자신의 친화력이 올랐음을 확인했다.

    [요정족의 로드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아론은 그들과 작별하고, 솔티어크를 떠났다.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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