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29/40)

Chapter 4

마탑주가 말했었다.

요정족의 신물을 얻기 위한 모든 행동이 자격을 시험하는 과정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 말은 틀림없는 정답이었다.

요정의 유적지로 가는 길 자체가 고난이었다. 대수림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중심부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는 마나나 오러를 발현할 수가 없었다.

전투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극한의 환경을 버티고 유적지에 도달했다는 건 어느 정도 실력을 입증받은 셈이었다.

물론 요정의 유적지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시험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전까지는 간단한 자격 심사였다. 본격적인 시험이 펼쳐지는 건 바로 광장에서부터였다.

여기에서는 수호자가 등장한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마탑주는 아론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등장하는 수호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강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시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자네는 영영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걸세.]

마탑주가 말했었다.

아론은 그 본질이 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거에 관해서는 마탑주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수호자가…….’

아론은 앞을 바라봤다.

그 누구도 아니라 포드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아니다.’

하지만 아론은 이내 속으로 부정했다. 당연히 저기에 서 있는 포드는 진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 환상이다.’

자신의 추리는 합리적이었다.

왜냐하면 진짜 포드공은 힘을 쓴 대가로 에드먼스에 의해 유폐를 당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환상이라고는 해도 포드의 얼굴을 보니 복잡한 심경이 밀려들어 왔다.

‘미안합니다.’

그에게는 미안한 마음밖에 없었다. 자신의 실력을 키워서 하루라도 빨리 포드를 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방해하는 적이 밀려 들어왔고, 결국 지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포드는 감정이 없는 눈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 때문에 아론은 회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굳이 포드의 모습을 한 수호자가 나타났다는 건, 저 환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시험인가?’

아론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전투를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곳에선 마나를 쓸 수 있어.’

아론은 자신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자유로운 마나의 감각을 느꼈다. 대수림에서는 이 마나가 억제되어서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맨몸으로 싸우라면 몰라도,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아론은 해볼 만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면서 쿠브의 상태도 체크했다. 대수림에서 쿠브는 능력을 쓸 수 있었지만 모든 힘이 사용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쿠브도 여기서는 온전히 제힘을 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기운이 넘치는 쿠브의 감정이 아론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상대가 포드공이라는 게 문제군.’

아론은 우뚝 서 있는 포드를 노려봤다. 그의 진정한 힘은 알 수 없지만, 9서클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진짜 9서클을 상대로 싸우는 건 처음인데.’

아론은 긴장했다.

여태까지 강한 녀석들과 꽤 많은 전투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진짜 9서클은 없었다. 자신의 신체를 생체 골렘화해서 인위적으로 능력을 끌어올린 녀석들뿐이었다.

‘그리고 포드공이 어떤 마법을 쓰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만났을 당시에 아론과의 실력 차이는 현저하게 났었다. 그래서 감히 서로 대련을 해본 적도 없었다.

‘딱 한 번, 포드공이 마법을 쓰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지.’

자신이 젠슨과 싸우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포드가 마법을 사용해서 젠슨을 단숨에 무력화시켰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지금 아론이 처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정보가 아니었다.

‘포드공이 매우 강하다는 것 말고는 딱히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잖아.’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포드가 먼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윽- 하고 포드는 먼저 스태프를 들어 올려 보였다.

그 순간 아론의 몸이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오는 거지?’

비록 자신이 마주하는 건 환상이었지만, 포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마나 반응이 보이는 순간 곧바로 방어나 회피를 해야 그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아론의 머리가 열이 날 정도로 팽팽 돌아갔다.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포드는 들어 올린 스태프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그 순간. 아론은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이 아니었다. 갈라진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이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비명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론의 몸은 네 방향으로 갈라져서 죽음을 맞이했다.

***

“흐억!”

아론은 정신이 들었고,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분명, 내 몸은…….’

그는 자신의 몸을 두 손으로 더듬더듬 짚었다. 갈래갈래 찢어졌던 몸은 마치 꿈이었던 것마냥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고통이 밀려들어 왔다. 정확히 몸이 찢겨져나갔던 부위에서 통증이 발생했다.

‘아니야. 꿈이 아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몸이 재생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포드는 여전히 스태프를 든 채 이곳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아론은 자신의 몸이 갈라졌던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공격의 단서라고는 스태프를 땅에 내리찍은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마법을 발현할 때에는 자연스레 마나의 흐름이 일어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그것을 느낄 수 조차 없었다.

‘이게 진정한 9서클…….’

아론은 그 힘을 깨닫고 나니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도대체 저런 괴물 같은 상대를 어떻게 이기라는 말인가?

‘아니다. 이렇게 감정이 동요하면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아론은 심호흡을 했다. 감정이 날뛰어봤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마탑주가 말했었다. 시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통과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아론은 마탑주의 말을 떠올렸다.

시험의 본질.

잘 생각해 보니 포드의 환상을 이기는 게 과연 시험의 본질일지 의문이 들었다.

‘쓰러트리는 게 본질이 아니라면, 과연 이 시험은 나에게 뭘 요구하는 걸까?’

아론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 답을 바로 내리지는 못했다. 포드가 또다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포드는 스태프를 들었다.

아론은 이번에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그가 행동을 보이자마자 빠르게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났다.

후웅-!

방금까지 아론이 있던 곳에 미지의 힘이 지나가는 걸 느꼈다.

‘나를 갈라지게 만들었던 것의 정체가 저것이었구나.’

아직도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피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당해주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론은 포드를 향해 속박 마법인 어스 바인드를 시전했다.

그러면서 아론은 정보를 하나 얻게 되었다. 이곳이 다름 아닌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걸 잘만 활용한다면…….’

쿠브가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범위를 늘릴 수 있었다. 원래는 대지에 국한해서 힘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간 전체에 힘이 미친다는 걸 깨달았다.

촤라라락!

포드의 주위에서 마나 줄기들이 튀어나와 그를 속박했다.

‘이 정도면 쉽게 벗어나긴 힘들 거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마법으로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호흡법을 최대로 돌리고, 펜던트까지 이용해서 힘을 실은 화염 마법을 방출했다.

화르르륵!

그는 이 공격이 포드를 죽일 수는 없어도 치명상은 입힐 거라고 생각했다.

쿵!

그때, 포드의 손이 움직이면서 스태프가 가볍게 땅을 찍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포드를 속박하던 마법도, 그에게 날아가고 있던 마법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

아론은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진 것은 마법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아론에게 닿은 순간 그의 몸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게 아론이 맞이한 두 번째 죽음이었다.

“으윽!”

다시 정신이 돌아왔고 몸이 재생되었다.

통증은 악랄했지만,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아론은 계속해서 포드의 환영과 싸웠다.

아론의 머리가 터지고, 전신이 얼어붙고, 재가 되고, 수십 갈래로 찢겨나가고…….

아론은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열 번째가 넘어가고서는 자신이 죽은 횟수조차 세지도 않았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지 서른 번째가 넘었을 즈음이었다.

아론은 아직도 포드의 공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시험의 본질을 깨닫기 이전에 자신의 정신이 붕괴하게 생겼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상태도 멀쩡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통증은 그대로였으니 피로도는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두 자릿수를 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악착같이 버티는 중이었다.

파사삭!

또다시 아론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고, 몸이 재생되었다.

“커헉!”

아론은 엄습하는 통증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또르륵-

품에서 결계석이 튀어나왔다.

‘…그만둘까?’

아론은 고민했다.

이 결계석을 깨트리면 모든 시험이 종료되고 유적지 바깥으로 튕겨난다고 설명을 들었다.

물론 결계석이 없어져 버렸으니 다시는 유적지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답도 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쓰고 나가…….’

짜악!

아론은 나약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기 전에 자신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비록 지구의 나는 죽었지만 재능 넘치는 새 몸을 받았어.’

그는 지구에서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노력하는 이상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이 시험만 통과하면 요정족의 신물을 얻을 수 있다고!’

고작 서른 몇 번 죽었다고 정신이 나약해지다니.

아론은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결국 강해져야 해.’

아론은 오래전에 9서클이 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건 포드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지금 여기서 시험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영영 실력의 벽을 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보자. 내가 정신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론이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 * *

그 분위기 변화를 포드의 환영도 읽은 것일까. 포드 역시 아론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쿵-!

포드가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이제 이건 익숙하다.’

아론은 이미 스태프가 바닥에 닿기 전에 이동한 상태였다.

그러자 방금까지 아론이 있었던 자리의 공간이 갈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물론 공격을 피했다고 좋아하기는 일렀다. 포드에게는 정해진 몇 개의 공격 방식이 있었다. 이어서 다음 마법이 날아들 게 분명했다.

‘기척이 느껴진다!’

아론은 무형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이 공격 방식은 잘 알고 있었다. 저 기운에 걸려든다면 모든 마나를 빨아 먹히고 몸은 재로 변해버린다.

몇 번 몸으로 맞아보니까 이제는 어렴풋한 공격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답도 없다.’

아론은 그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그는 방법을 바꾸었다.

포드의 마법을 수십 번 맞았으니 패턴도 어느 정도 체득이 되었겠다, 자신도 포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아무리 죽어도 목숨이 날아가지 않았다.

아론은 가속 마법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포드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동시에 아론은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포드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타앗!

그의 생각대로 포드의 앞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아론은 미리 준비했던 마법을 날렸다.

이렇게 하면 마법이 날아가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지근거리에서 마법을 날리면 상대도 대응하기 힘들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랬다. 가속 마법을 사용한 상태에서 또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려면 그만큼 빠르게 술식을 전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마법은 준비도 안 되었는데 상대의 앞에 도착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지금의 아론은 집중력이 최고로 도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꽈앙!

마법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아론은 얼른 거리를 벌렸다. 포드가 어떤 반격을 가해올지 몰랐다.

“크윽.”

아론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확인해 보니 통증의 근원은 오른팔이었다. 이미 쓸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아론은 깜짝 놀랐다. 포드는 자신이 공격하는 그사이에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번 시도는 실패군.’

아쉬웠다.

나름 목숨을 건 한 방이었는데 큰 효과는 없었다.

실제로 포드는 저렇게 멀쩡히 서 있고 말이다.

콰득!

아론은 몸이 두 동강이 나서 죽음을 맞이했다.

***

그 후로도 아론은 포드에게 저돌적으로 맞섰다.

한번 방식을 정하고 나니 그 이후로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떻게든 포드의 몸에 생채기라도 내어 보자. 아론은 그 일념 하나로 계속해서 포드에게 덤벼드는 중이었다.

물론 그러는 만큼 아론이 죽는 횟수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죽고 되살아나고, 죽고 되살아나고. 이걸 반복한다고 해서 고통에 무뎌지는 건 아니었다.

더럽게 아프고 욱신거리고 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론은 멈추지 않고 포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 뛰어넘어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환영이라고는 해도 언제 포드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상대와 마음껏 싸워 보겠는가.

그런 아론의 집념이 통한 것일까. 아론은 무수한 공격의 시도 끝에 드디어 포드에게 한 방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아…….’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기껏해야 포드가 입은 로브의 끝자락을 조금 태우는 게 전부였다.

‘이 공격을 위해 백 번을 넘게 죽었어.’

아론은 까마득함을 느꼈다.

포드의 몸에 상처를 내려면.

나아가서 포드를 쓰러트리려면.

얼마나 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아론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렇게 고민할 바에야 한 번이라도 더 시도를 늘리겠어.’

아론은 이를 악물고 포드에게 덤벼들었다.

공격하고,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추가로 수십 번의 죽음이 더해진 다음에야 포드의 몸에 작은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포드에게서 피를 흘러나오게 할 수 있었다.

아론이 전력을 다해 마법을 쏟아붓고, 쿠브를 이용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포드를 쓰러트릴 순 없었다. 그의 존재는 여태껏 아론이 맛 본 적 없는, 커다란 벽이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 9서클이구나.’

아론은 포드와 자신의 격차를 아주 잘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는 마나를 다루는 차원이 달랐다.

마나를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경지가 되어야 9서클이었다.

단순하게 마나의 양이 많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아론은 이번에 수없이 공격하고 깨지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다시.’

아론은 정신을 다잡고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포드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어느덧 죽은 횟수가 수백 번을 넘겼을 때. 아론은 포드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뒤로 이동할 수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아론은 포드의 등을 노리고 온 힘을 다해 마나를 토해냈다. 어마어마한 화력의 마법이 방출되면서 포드의 후방을 강타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론의 마법을 버티지 못한 포드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러면서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아론은 차마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환영이라고 해도 자신의 스승이었다. 스승의 몰골을 제 손으로 뭉개버린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아…….”

드디어 포드의 환영을 쓰러트렸다. 그걸 실감하자 아론은 여태껏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확 몰려왔다.

‘이게 끝인가?’

아론은 제발 그랬으면 싶었다.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한다는 건 보통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망할 공간을 떠나서 다시 유적지로 돌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포드의 환영이 쓰러졌다뿐이지,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론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쓰러트리는 게 정답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론의 앞에 새로운 형상이 나타났다.

포드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한 위압감이 아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감각은 아론의 심장을 간지럽혔고,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일깨웠다.

아론은 나타난 상대를 보며 허탈함을 느꼈다.

‘대체 왜…….’

결계석을 깨트리고 나가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게 만들었다.

아론의 앞에 등장한 환영은 다름 아닌 카이만 공작이었다.

‘어떻게 하라는 건데?’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수백 번의 고통을 느끼며 포드를 쓰러트렸더니 나타나는 건 카이만 공작이라니.

여태까지 자신이 싸웠던 상대는 카이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작의 실력은 포드보다 강했으니 말이다.

아론은 차마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카이만의 존재가 내뿜는 위압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포드가 일반적인 9서클이라면 카이만은 9서클 마스터였다. 같은 9서클임에도 그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공작의 몸에서 본격적으로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론은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난 공작을 상대로 이길 수 없어.’

기껏 다짐했던 의지는 카이만의 모습을 본 순간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상 공작이 등장했다는 건 이 시험을 포기하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요정족의 신물이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이길래 이 정도 시련을 강요하는 거야?’

아론의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결계석을 부수고 이 장소를 나갈 생각이었다면 이미 포드와 싸우던 도중에 그걸 선택했을 것이다.

아론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최대한 정갈한 정신으로 공작을 마주하려 했다.

‘이미 수백 번 죽은 몸이다. 포드는 그 정도로 이겼으니, 공작은 까짓거 수천 번 부딪쳐서 쓰러트려 주겠어.’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런 아론의 행동을 본 카이만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따라서 마나를 회전시켰다. 그의 표정은 마치 아기의 재롱을 보고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단순히 아론과 똑같은 행동을 했을 뿐인데. 아론은 압박감에 짓눌려 주저앉고 말았다.

“으으…….”

공포가 계속해서 아론의 의지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아니야. 차라리 한 번 죽고 정신 차리자.’

아론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해봤자 공포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손을 들어서 마나를 내뿜어 공격 마법을 날렸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간이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카이만의 환영도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론이 주위를 둘러봤을 땐 이미 유적지로 되돌아와 있었다.

짝짝짝.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가 아론을 환기시켰다.

“네 의지에 경의를 표하지.”

아론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었다.

엘프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요정족이겠군.’

그자는 아론에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친 시험은 의지마저 빼앗는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용기를 되찾고 대항하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반복되는 죽음. 거기에 뒤따라오는 고통. 정신력이 갉아 먹히는 상태에서 압도적인 강자를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너는 다행히 전의를 잃지 않았지.”

“…악독한 방법이군.”

아론이 말했다.

“너는 우리의 힘을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아닌가? 그러면 그 정도는 통과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지.”

그는 낮게 웃었다.

“어쨌든, 시험을 통과한 걸 축하한다.”

딱.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주위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수백 년 전에 시간을 멈춘 것 같은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활기가 넘치고, 사방에서 요정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을이 되어 있었다.

‘요정족은 멸종한 게 아니었나?’

아론은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 * *

아론의 앞으로 다가온 요정.

“난 핀레르다. 이곳 솔티어크의 안내자이지.”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이 유적지의 이름이 솔티어크였군.’

이름을 들었으면 자기의 신분도 밝히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굳이 요정에게까지 신분을 숨길 필요는 없었기에 아론은 자신의 본명을 말했다.

“나는 아론 에드먼스다.”

“으음. 아론 에드먼스.”

그는 아론의 말을 듣고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아무래도 에드먼스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좋아. 아론이라고 부르지. 오랜만에 이곳 솔티어크에 온 손님이군. 로드 님이 자네를 보고 싶어 하네.”

“로드……? 난 만나는 건 됐어. 그보다 시험을 통과했으니 보상을 빨리 받고 싶다. 애초에 난 요정족의 신물을 얻으려고 왔거든.”

“솔직하지만 경솔한 인간이군.”

핀레르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신물을 받기 위해선 로드 님을 만나야 하네.”

“그래?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론은 몸에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워낙 격렬하게 전투를 치른 탓이었다. 수백 번이나 죽고, 공격을 퍼부었기에 육체며 정신이며 피로도가 극한에 달한 상태였다.

그 여파는 쿠브도 겪고 있었다. 쿠브 역시 전투에서 계속 아론을 도왔기에 마찬가지로 힘을 많이 써 탈진해 있었다.

그 결과 깊은 잠에 빠졌고, 당분간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쿠브가 이런 상태에 빠진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고생이 좀 심했나 보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흐음. 보아하니 몸이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

핀레르는 자신이 매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액체가 든 유리병을 하나 꺼내어 아론에게 건넸다.

“이건 뭐지?”

상태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마시면 좀 나아질 거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그걸 받았다.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시험이 끝났다지만, 요정 녀석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론은 냄새를 맡아도 보고, 조금씩 홀짝이면서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효과는 마신 직후에 바로 나타났다. 몸이 따뜻해지더니 체력이 회복되는 것이 체감되었다.

‘신기하네.’

아론은 방금 자신이 마신 액체의 정체가 궁금했다.

전투가 끝나고 종종 켄트가 자신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하지만 육체에 생긴 상처나 피로는 회복 시켜 주어도 정신적인 부분까지는 어찌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핀레르가 준 이 물약은 달랐다. 아론이 알기에 이런 효과를 지닌 포션은 대륙에 없었다.

‘마셨던 물에선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었지. 그게 요정족이 사용하는 힘인 걸까.’

아론은 흥미가 돋았다.

그런 반응을 본 핀레르는 작게 웃었다.

“이제 움직이기 좀 편해졌지?”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로드 님을 만나러 가자고. 나를 따라오도록 해.”

핀레르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아론은 그 뒤를 따라갔다.

***

아론은 핀레르를 따라가면서 솔티어크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엄청난 곳이군.’

그는 속으로 솔직한 감상을 표현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보였던 옛 도시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몇백 년 전의 장소라고 여겨지는데도 지금 대륙의 생활 모습과 견주어도 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솔티어크는 다른 차원에 숨겨져 있었다.

‘지구의 엘도라도나 아틀란티스를 실제로 보았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지구에서 전설로만 전해지는 두 도시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솔티어크는 마치 그곳과 닮아 있었다.

지금 이곳은 아론의 첫인상과 달리 생기가 곳곳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도시인 페리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드워프들의 기술에 감탄했지만, 솔티어크는 존재 자체가 그저 신비롭기만 했다.

“흥미로운 얼굴이네.”

핀레르가 뒤를 돌아 아론을 보며 말했다.

“기술 수준이 대단해서 그래. 그리고 다들 활기가 넘쳐 보이는걸.”

“그래? 예전에는 이보다 더 많은 요정들이 같이 살고 있었거든. 지금은 수가 많이 줄었어.”

그렇게 말하는 핀레르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론은 그에 대해 굳이 깊게 물어 보지는 않았다. 저마다 사연은 있기 마련이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도 유난히 높게 솟아 있는 나무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핀레르가 말하길 저 나무가 세계수라고 했다. 저 나무의 힘이 현재 차원을 유지하는 근원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론도 걸어가면서 그 힘을 느끼고 있었다. 땅에 흐르는 생명의 에너지가 나오는 곳이 바로 세계수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세계수를 지키며 관리하는 사람이 지금 만나러 가는 로드라고 말했다.

잠시 후. 세계수 앞에 도착한 아론과 핀레르.

‘가까이서 보니 엄두도 못 낼 정도로 크군.’

아론은 위를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잠깐만 기다리게.”

핀레르는 아론에게 말한 뒤에 세계수를 향해 달려갔다. 로드를 불러오려는 모양이었다.

아론은 조용히 그들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주위에 요정족들이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정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하론을 보며 수군거렸다.

외부에서 온 인간이 그들에게 있어서 신기한 듯했다.

그 감정을 느끼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라 아론도 그랬다.

‘요정들 전부 가진 힘이 대단한데?’

핀레르를 만났을 때도 느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길 자기는 안내인이라고 했다. 그 정도 직책을 가졌으니 강한 거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주위에 몰려든 요정들도 모두가 8서클 급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론은 그들의 실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들이 다른 차원이 아니라 여전히 산맥에 살고 있었고, 대륙에 영향을 끼쳤더라면…….’

지금의 세력 구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세계수에서 핀레르가 나오고 있었다.

‘꼬마애……?’

핀레르의 옆에는 누가 봐도 어린 여자아이가 같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저 아이에게서 풍겨지는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요정들과 차원이 달랐다.

‘저자가 로드겠군.’

그녀의 존재감이 엄청났다.

힘이 없는 일반인이 마주했더라면 절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을 게 분명했다.

“반갑구나, 아론 에드먼스.”

로드는 아론의 앞에 서서 인사했다.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신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저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론도 정중하게 로드를 향해 인사했다.

“에드먼스의 사람이 또 솔티어크를 방문해 주다니. 우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구나.”

로드의 말을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또 방문했다고? 그리고 약속?’

아론은 모르는 내용이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뜸 마탑주가 이 장소를 추천해 준 것부터 이상했지.’

마탑주는 예고도 없이 할로움으로 찾아와 아론을 만났었다. 그리고 피신하기 좋은 장소로 요정의 유적지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마탑주와 공작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마탑주가 독단으로 움직인 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요정족과 에드먼스 가문과도 어떤 연관이 있다.’

아무래도 복잡한 인연이 얽혀 아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에드먼스 가문과 요정족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다. 보아하니…… 모르는 눈치구나.”

아론의 물음에 로드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에드먼스의 피를 타고난 자들은 모두 특별한 마나 회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난히 마나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지. 그게 과연 자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일까?”

로드는 생긋 웃었다.

아론은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설마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로드는 말없이 아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내부까지 관찰당하는 느낌이었다.

“흐음.”

로드는 아론을 살펴보고는 흥미로워했다.

“너는 에드먼스의 사람들 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구나. 거기다가 신의 화신과 계약까지 하다니. 우리들의 힘을 배울 만한 자격이 충분해 보이네.”

“그 힘이 무엇입니까?”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의 힘은 신에게 가장 근접한 힘이라네. 그래서 우리는 신력이라고 부르고 있지.”

로드의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은은하게 기운이 퍼져 나왔다.

솔티어크의 대지에서 흐르는 힘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 정체가 다름 아닌 신력이었다.

“신의 화신이 기운을 다해서 탈진한 상태구나.”

로드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퐁 하고 소리를 내며 쿠브가 강제로 소환되었다.

쿠브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로드는 자신의 손을 쿠브에게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흘러나와 쿠브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쿠브가 몸을 들썩이더니 눈을 떴다.

‘……대단하네.’

아론은 로드가 보여 주는 능력에 감탄했다.

자신도 오는 길에 마나를 이용해 쿠브를 회복시켜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론의 마나는 쿠브가 일정량 이상을 흡수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쿠브는 로드의 힘을 온전하게 흡수했다. 마치 원래 자기의 힘인 것 마냥.

‘신력이라서 그런가. 신의 화신인 쿠브하고 잘 맞는 모양이야.’

아론은 생각했다.

저 힘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다면, 쿠브가 더 성장해서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었다. 앞으로 자신이 배울 힘이 바로 저 신력이라니.

‘그 죽을 것 같던 시험을 악착같이 버틴 보람이 있었구나.’

여전히 치가 떨렸던 시험이지만, 신력을 얻을 것을 생각하니 그나마 그 감정이 좀 상쇄가 되었다.

“저도 그 힘을 배울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지. 우리가 정한 시험을 통과했으니 자격은 충분해. 그리고 재능마저 있으니.”

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상한데.’

아론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녀의 웃음은 본 적이 있었다.

포드에게 자신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가 보여 주었던 웃음을 꼭 닮아 있었다.

* * *

타앗, 타앗.

아론은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좌우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지구에서 선수들이 하체 단련을 하는 운동 중 하나인 사이드 스텝과 매우 유사한 방법이었다.

아론은 오로지 자신의 체력만을 이용해 이 동작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가속 마법을 쓰면 훨씬 빠르고 쉽게 목표 횟수를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를 이용해 훈련하는 건 금지라고 했었다.

지이잉-

정해진 횟수를 채우자 신호가 울렸다. 아론은 그제야 몸을 멈출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아론은 숨을 헐떡였다.

지금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로드는 힘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니 대뜸 몸부터 만들라고 말을 했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기운이 깃든다. 로드는 그 사실을 강조했다.

‘어디서 들은 말 같단 말이지.’

물론 로드가 일부러 아론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아론의 몸으로 신력을 받았다가는 버티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체력 훈련이 시작된 거였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군.’

포드가 자신의 스승이 되고 나서도 고된 운동을 시켰었다. 그래도 그때 단련해 둔 것들이 초석이 되어서 안정적인 마나 운용이 가능했다.

아론은 한번 그걸 체험했기에 이번 체력 훈련도 군소리 않고 수행했다.

‘이제 다음 운동이다.’

휴식 시간은 짧았고 아론은 이어서 다른 부위를 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론은 신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한동안 열심히 몸을 가꾸고 체력을 늘려나갔다.

‘이 훈련들. 하면 할수록 검사들이 하는 기초 훈련과 비슷한 것 같은데?’

아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로움에 있으면서 셀린과 그녀의 부하들이 훈련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훈련에도 이러한 운동이 존재했었다.

“핀레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훈련 말인데. 이거 검술 기초 훈련 아니야? 대륙에서도 종종 비슷한 걸 봤었어.”

“그거야 당연히 비슷하겠지. 먼 옛날, 인간에게 체계적인 검술을 가르친 게 우리 요정족이거든.”

“그게 정말이야?”

그 이야기를 들은 아론은 놀라워했다.

‘검술도 요정족이 가르쳤다고? 그럼 인간이 쓰는 마법과 검술은 모두 요정족에게 기원이 있는 거였구나.’

아론은 이들 종족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었다.

“이런 잡담할 시간 없어. 빨리 다음 훈련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핀레르는 아론을 재촉했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어.”

아론은 울상을 지었다. 자신도 움직이고 싶었지만 전신이 비명을 지르는 상태였다.

“그거야 이거 한 방이면…….”

“으븝!”

핀레르는 물약을 꺼내서 아론의 입에 강제로 물렸다. 처음에 만났을 때 받았던 거랑 똑같은 물약이었다.

물약을 강제로 마시자 아론의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적 피로도 단숨에 회복이 되었다.

“어때? 이젠 할 수 있겠지?”

“…다음엔 그냥 물약만 줘. 내가 직접 마실 테니까.”

아론은 불만을 토로하며 훈련을 계속해나갔다.

그 이후로도 아론이 힘들어할 때마다 핀레르는 물약을 건네주었고, 아론은 그것을 꾸역꾸역 마셔가며 훈련을 계속했다.

덕분에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물약이 지닌 신비한 회복 능력 덕분이었다.

***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아론은 그 기간 동안 체력 훈련만 했고, 그건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후우.”

한 달이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핀레르가 지속적으로 준 회복 물약 덕택에 아론은 몇 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 덕인지 처음 훈련을 시작할 때에 비해서 이제는 운동을 어느 정도 진행해도 거친 숨을 토해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아론을 살펴본 핀레르가 말했다. 그 말은 즉, 이제 신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었다.

“드디어 끝이군.”

아론은 궁금했다. 신력이 얼마나 거친 녀석이길래 이 정도로 준비 과정이 필요한지를 말이다.

핀레르는 아론을 다시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안으로 들어갈 거다.”

핀레르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세계수 안에 가보는 것은 처음이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세계수 내부는 넓었다. 별다른 장식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안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핀레르는 그것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문은 각각 세계수가 뻗어 나가 있는 가지로 향하는 곳이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핀레르는 어느 문 하나를 열었다.

“우리는 이곳으로 갈 거다.”

아론은 핀레르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들인 순간, 아론은 차원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놀라지 마. 이 문들은 대수림의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거든.”

핀레르는 부연 설명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대수림의 어딘가로 빠져나왔다.

보이는 풍경은 흔한 대수림이었지만, 아론은 이곳이 질적으로 다른 곳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모인 기운이 다른 장소와는 차원이 달라.’

아무래도 신력이 생성되는 중심이 이곳인 모양이었다. 대수림을 유지하는 신력은 이곳에서 뻗어 나가는 듯했다.

“신력을 훈련하기엔 이곳이 좋지.”

핀레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한 달 동안의 체력 훈련은 그저 준비 과정에 불과해.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핀레르는 아론을 보며 잔뜩 무게를 잡으면서 이야기했다.

겁을 주려는 모양이었지만, 되려 아론은 신력을 배울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기대되었다.

“일단 편하게 앉아 봐.”

아론은 핀레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먼저 해야 할 건 신력을 느끼는 거다.”

아론은 그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도 신력을 느끼고 있는데?”

“그건 신력이 지닌 본연의 힘을 느끼는 게 아니야. 넌 단순하게 그걸 여태까지 써왔던 마나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

핀레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나와 신력은 전혀 다른 힘이다. 그걸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해.”

그 말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들으면 말장난 같지만… 무슨 이유로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알겠어.’

요정족에게는 신력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력이 주위에 있었고, 그걸 활용하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생소한 힘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이 신력을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들겠지만, 걱정 마. 너라면 할 수 있을 테니까.”

핀레르는 아론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꺼냈다.

“시험을 통과한 인간에게는 특별히 이곳, 신성한 샘이라 불리는 장소에 데리고 오지. 과거에 몇몇 인간들이 여기서 신력 훈련을 했었어.”

“나 말고도 인간이 왔었다고?”

“과거라 해도 천 년도 더 된 일이야. 그 이후에 인간은 오지 않았어.”

“그렇구만. 그러면 그들 중에서 가장 빨리 신력을 깨우친 인간은 얼마나 걸렸어?”

“으음. 아마 가장 마지막에 신성한 샘에 왔었던 인간일 거야. 일주일 정도 걸렸을걸?”

“일주일?”

“그래. 나는 물론이고 그 소문을 들은 요정들도 놀라워했지. 보통 신력을 느끼는 것만 해도 몇 달이 걸리거든.”

신력을 인지하는 데에만 몇 달이 걸린다니. 아득한 이야기였다.

“물론 신력을 느끼는 게 끝이 아니야. 그걸 받아들이고 자기 힘처럼 쓰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핀레르는 아론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래도 네 재능을 보아하니 금방 해낼 수 있을 거다. 처음에 네 인상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후에 보여준 자세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내가 전력을 다해서 가르쳐 줄 거다.”

“그 말은 고맙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2주 정도?”

신력을 느끼는 데 2주.

요정은 아론의 능력을 꽤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신력을 수련한 사람들도 다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다. 그들이 몇 개월이 걸렸다는데, 2주일이면 빠른 축이군.’

어찌 되었든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핀레르는 그런 아론을 보며 생각했다.

‘이 인간, 보면 볼수록 괜찮군.’

그는 아론이 마음에 들었다.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자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먼 옛날. 신력을 얻기 위해 여러 인간이 대수림에 찾아왔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시험에 돌입하고 첫 번째 강적은 어떻게 버텨도 두 번째로 등장한 상대를 버티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론은 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한 인간임에도 그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게다가 시험이 끝나고도 아론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비범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신력을 유도해서 끌어다 주지. 너는 이걸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라.”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일깨우는 과정도 보통 이런 식으로 훈련했었다. 신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핀레르는 아론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신력을 네 몸에 약하게 흘려보낼 거다. 그걸 함부로 잡으려고 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놔둬. 그냥 흐름만 느끼는 거야.”

“신력을 다루려고 하면 위험한가?”

“당연하지! 느끼지도 못하는 기운을 잡으려고 한다? 곧장 네 몸이 폭주할 거다.”

“알겠다. 조심하지.”

“이것만 며칠을 해야 할 지도 몰라.”

핀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의할 점을 하나 더 설명해 주었다.

“내가 신력을 흘려보내면 고통이 찾아올 거야. 신에 근접한 힘인 만큼 단순히 체내에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주거든.”

“고통을 참는 건 자신 있어.”

“그래.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이미 아론은 시험에서 수백 번도 더 고통을 느끼면서 죽음을 체험했었다.

그런데 고작 신력이 주는 아픔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핀레르는 본격적으로 아론의 몸에 신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

신력이 전신에 퍼지자 몸이 마치 불구덩이에 던져진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동안 괜히 체력 단련을 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이 없었더라면 아론은 여기서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잠깐만!’

아론은 고통에 정신이 사나워진 와중에, 또렷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다.

‘이게… 신력인가?’

아론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2주는 걸릴 거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무수한 통증 속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 기운. 마나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 * *

핀레르는 아론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가 빨리 신력을 깨우치고 더욱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걱정도 되었다.

과연 그가 신력을 인지하는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요정족이 신력을 쉽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신과 오랜 기간 교류를 한 것도 큰 도움을 주었다.

반면 인간은 신과 접점을 잃은지가 몇 천 년은 되었다. 그런 그들이 신력을 느끼기란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사실 2주도 거짓말을 좀 섞은 거지.’

핀레르는 아론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 말에 과장을 보탰었다.

2주는 무리였다. 신력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도 대단한 거야.’

핀레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의 힘을 다해서 아론을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놀랍게도 아론의 몸은 이미 신력에 반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핀레르는 당황했다.

처음엔 자신의 착각이라고 여겼다. 인간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충분히 착각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게, 신력을 한번 불어 넣어 줬다고 해서 그걸 바로 깨닫는 인간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아론은 마나와 신력을 구분하고 확실하게 인지했다.

‘아론의 몸이… 신력에 맞춰서 변화하고 있잖아?’

핀레르는 깜짝 놀랐다.

아론의 체내에서는 신력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건 우리 요정들도 불가능한 일이야!’

아론의 몸이 변화하는 건 신력을 구분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신력이 느껴지나?”

“응.”

얼떨떨하게 묻는 핀레르의 말에 아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론의 확답을 들은 핀레르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이런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핀레르는 이 인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아론이 빨리 통과하면 좋은 일이었다.

‘좀 더 과감하게 나가보자.’

핀레르는 아론에게 신력의 운용을 가르쳐 보려고 마음먹었다.

첫날에 이걸 가르치는 건 처음이었다. 과연 아론이 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잘 들어. 신력이 느껴진다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바로 운용 단계로 넘어갈 거야.”

“바라던 바다.”

“…신력이 몸에 들어갔을 때, 어떤 느낌이었지?”

“무지 아팠지. 하지만 참을 만했다.”

“신력을 느끼는 단계에선 일부러 마나 회로를 피해서 흘려보내지. 하지만 이제는 신력이 회로도 지나갈 거야. 기절할 정도로 아플지도 모른다.”

핀레르는 아론에게 경고했다.

그런 뒤에 다시 한번 그의 몸에 신력을 흘려 넣었다.

“아프겠지만, 정확하게 신력에 집중해.”

그러나, 핀레르는 이번에도 놀라고 말았다.

아론의 몸에 있는 회로는 신력마저도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론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다소 통증은 있는 모양이지만, 핀레르가 경고했던 것만큼 죽을 만큼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이 인간의 몸은 도대체…….’

핀레르는 놀람을 넘어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신이 빚어낸 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핀레르는 욕심이 들었다. 과연 이 몸이 어디까지 버티나 궁금해졌다.

그는 좀 더 강하게 신력을 몸에 흘려 넣었다.

“으윽.”

신력이 흐르는 강도만큼 고통이 따르기 마련. 그 변화는 아론이 흘리는 신음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이러는데도 정신을 잃지 않다니!’

핀레르는 아론의 의지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아론의 몸 내부에서 신력이 뭉쳐지는 현상이 느껴졌다.

‘허억……! 벌써 서클을 만드는 걸 시도한다고?’

핀레르는 경악했다.

아론이 의도한 건지, 본능이 저절로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숙하게나마 신력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신력은 그 힘의 크기 때문에 다루기가 쉽지 않은 힘이다. 그런데 아론은 그걸 능히 해내고 있었다.

‘놀라운 재능이다.’

핀레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클을 형성하는 건 자신이 가르쳐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신력을 가르쳤던 인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

핀레르는 그가 가진 재능이 어디까지 날뛸 수 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여태까지는 신력이 날뛰지 않도록 핀레르가 조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신력의 주도권을 아론에게 넘겨 보았다.

‘허어…….’

결과는 놀라웠다.

아론은 넘겨받은 신력의 흐름을 무리 없이 통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주변에 흐르는 신력까지 흡수하기 시작한 점이었다.

‘요정의 아이들도 며칠은 걸리는 과정이다. 이걸 단 하루 만에!’

핀레르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물론 놀라는 건 아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력이라길래 아예 생소한 힘일 줄 알았더니.’

아론은 신력이 주는 새로움 사이에서 익숙한 느낌을 찾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쿠브와 교감을 할 때였다. 쿠브에게서 마나를 전달받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이 신력에서 전해지는 중이었다.

아론은 단순히 그 기억을 살려서 신력을 다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방법이 잘 먹히고 있었다.

‘근데 너무 잘 되어서 걱정인데.’

바깥에서 흐르는 신력까지 아론의 몸에 들어오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회로가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실제로 회로는 어마어마한 힘을 버티느라 과열이 된 상태였다.

“그만, 그만!”

핀레르가 아론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신력 공급을 멈추었다. 더 진행되었다간 위험하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핀레르가 보내던 신력이 끊기자 아론의 몸속에서 뭉쳤던 신력들도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고통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아론은 여태까지 체내에서 날뛰던 기운이 사라지자 왠지 모를 상실감을 느꼈다.

핀레르는 그런 아론의 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인간. 그릇 자체가 다르다.’

오늘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신력을 마치 원래 제 것인 양 다루었다.

‘로드 님에게 버금갈 재능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분한 칭찬인 걸까.’

핀레르에게 감히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론은 대단했다.

“사라져 버린 신력에 대해서 너무 아까워 하지 마. 그건 당연한 거야. 이미 네 몸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마나가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거니까.”

핀레르는 그렇게 말하며 아론을 위로했다.

“신력을 어떻게 하면 내 몸에 담을 수 있지?”

“지금 네 몸은 원래 있던 마나와 같이 섞어야지. 지금까지 내가 가르쳤던 인간은 모두 그 방법을 썼다. 기사들은 오러에, 마법사들은 마나에 신력을 융합시켰지.”

핀레르는 그편이 신력을 다루기 쉽다고 덧붙여 말했다.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

“글쎄다. 딱 잘라서 말은 못 해주겠는걸.”

신력을 단순히 느끼는 것을 넘어서 그걸 몸에 담는 것은 기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몇 달이 걸린 인간도 있었고, 몇 년을 넘긴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오늘 어마어마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욱 기간을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네 재능이라면 금방 끝내지 않을까?”

핀레르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핀레르는 돌아갔다.

신력에 대한 친화력을 쌓아야 하니 아론은 수련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해야 했다.

다행히 아론이 머무를 수 있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 안에는 식량도 있었고 몸을 뉠 곳도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핀레르가 보충해 준다고 했다.

“후우.”

오두막 안에 들어서니 아론의 몸에 피로감이 엄습했다.

신력을 받아들이는 작업은 당연히 고된 것이었기에 몸에 매우 부담이 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함부로 요정족이 주는 물약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론은 이 피로감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쉬고 싶지만, 더 수련해 볼까.’

몸이 천근만근 같았다.

하지만 아론은 밖에 있는 일행들이 신경 쓰였다.

미티움을 보유한 자신만 없으면 추적자들이 일행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이곳에 오래 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아론은 수련을 더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정좌해서 신력을 몸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핀레르의 도움이 없으니 느껴지는 신력의 힘은 아주 미약했다.

‘그래도 신력과 마나를 구분할 수 있다. 작은 양이라도 계속 이렇게 신력을 받아들이면 도움이 될 거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력을 체내로 끌어들였다.

‘좋아, 좋아.’

신력은 어느덧 회로를 타고 서클 근처까지 갔다. 서클 주위로 통증이 일었지만, 그만큼 충만감도 느껴졌다.

‘이 힘을 밖으로 꺼낼 수 있다면… 8서클 급의 실력을 지닌 기사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거 같다.’

아론은 본능적으로 신력의 힘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신력을 빨리 제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급함은 금물이지.’

너무 의욕이 앞서면 일을 망칠 수 있었다. 아론은 차분하게 서클 주위에서 신력과 마나를 혼합하려는 작업을 진행했다.

‘으음.’

생각과는 다르게 잘 섞이지 않았다. 마치 물과 기름을 억지로 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부터는 시간이 답이겠군.’

아론은 조바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기로 했다.

꾸준히 노력하는 것. 그건 아론이 제일 잘하는 분야였다.

***

시간은 몇 주가 흘렀다.

핀레르는 4일 혹은 5일마다 아론을 찾아와 식량을 보충해 주고 신력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그가 아론을 마지막으로 찾아본 지 5일째. 오늘도 변함없이 먹을거리를 챙겨서 신성한 샘으로 갔다.

‘이번에는 얼마나 성장해 있으려나.’

핀레르는 매번 그를 찾아갈 때마다 기대가 되었다. 5일 전에는 마나와 신력을 융합시키는 데 거의 근접해 있었다. 과연 오늘은 어떨지 궁금했다.

“오오…….”

핀레르가 샘에 도착한 순간.

아론은 이미 훈련을 하고 있었다.

휘오오-!

샘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근원지는 아론이 만들어 낸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었다.

폭풍은 아론이 머물던 오두막을 부수고 저 멀리 날려버렸다.

‘저게 인간의 1서클 마법인 윈드군.’

아론의 재능은 대단했다.

원래 1서클 마법은 고작해야 가벼운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게 전부.

그러나 신력과 융합한 윈드 마법은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핀레르는 그 광경을 보고 미소지었다.

‘말도 안 되는 재능이야.’

아론의 능력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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