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6권
Chapter 1
아론의 발언에 주위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사단장의 수행원들은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어…… 이것도 계산된 건가요?’
켄트도 아론의 반응에 속으로 초조해했다.
“하하하!”
조사단장은 크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정색을 하면서 아론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오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다고? 지금 당장 죽여달라고 비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4왕자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불경스러운 발언을 한다고? 이건 메도우드 왕실에 대한 모독과도 같다!”
아론은 조사단장의 흥분을 잠재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저 충돌을 피하고 싶었기에 정중하게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아론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쪽에서 조사하려는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닥치거라!”
하지만 조사단장은 노성으로 반응했다.
“네가 흑마법사인지 아닌지는 내가 조사해보고 나서 결정할 일이다! 잠자코 받아들이거라!”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거만한 것까지는 왕실에 속한 녀석들이니 그렇다고 쳤다.
하지만 이들은 명색이 조사를 하러 나온 것인데 자기들이 무엇을 조사하는지 고래고래 떠벌리고 다니는 건, 기본조차 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설마 나한테 오기 전에 다른 녀석들도 이렇게 붙잡고 실랑이를 벌인 건가?’
그러면 곤란했다.
이렇게 소란을 벌이면 테네브라에서 대처하기 위해 움직일 게 분명했다.
‘속여 먹기 편해서 장기 말로 쓰려고 했건만,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아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조사단장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화염 마법을 시전해서 허공에 띄웠다.
“네놈은 단장의 권한으로 이 자리에서 처형해 주겠다.”
당연히 아론은 거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론이 파악한 조사단장의 실력은 6서클이었다. 최근에 그가 상대한 마탑주나 바스티안에 비하면 그저 장난처럼 보이는 수준이었다.
“서로 바쁜 일 하러 온 사이인데, 여기서 큰 소란이 일어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아론의 그 말이 조사단장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화르륵!
조사단장은 아론을 향해 마법을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론은 배리어를 펼치면서 그 공격을 쉽게 막아 버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론은 즉시 반격했다. 곧바로 마법으로 날카로운 얼음의 창을 만들어 내 조사단장에게 날렸다.
조사단장도 놀라서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막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허윽!”
조사단장이 새된 소리를 내었다.
아론의 마법은 녀석의 목 앞에서 멈추었다. 언제든지 아론이 손만 까딱하면 녀석의 목을 꿰뚫어 버릴 수 있었다.
조사단장은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형편없는 실력이군.’
아론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어떻게 6서클을 달성한 건지 신기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확실하게 왕실과 에드먼스 소속 마법사 사이에는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공작가에서 버티지 못한 마법사들이 왕실 쪽으로 빠지기 때문에 그랬다.
‘이 정도 수준이면 공작가의 실력 좀 되는 조사단원과 비비겠네.’
아론이 녀석의 목을 앞에 두고 마법을 멈춘 건 경고였다. 실력의 차이가 여실하니 덤비지 말라는 의미였다.
“가, 감히!”
하지만 수행원들은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녀석들은 마나를 끌어 올리며 아론과 전투할 준비를 했다.
“까불지 마라.”
아론이 그들에게 경고했다.
“조금이라도 마법을 쓰는 기색이 보이면 이 녀석의 목을 뚫어 버릴 거니까.”
강경하게 나오자 수행원들은 그제야 현실 파악이 되었다.
‘오합지졸들이군.’
아론은 속으로 그들을 욕했다.
왕실 소속이라는 이름조차도 아까웠다.
“어, 어디 소속이냐? 내가 돌아가면 거기부터 족쳐 주…… 으허억!”
조사단장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길래 아론은 경고의 의미로 얼음창을 녀석의 목에 가볍게 찔렀다.
‘하긴. 단장부터가 이런 녀석이니 부하들이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지.’
아론은 왕실 조사단이 조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거짓 신분으로 활동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지금부터 신분을 밝히기로 했다.
“어디 소속이냐고? 우리는 국왕 폐하 직속 근위 마도병단 소속이다.”
“그, 근위 마도병단이라고?”
아론의 말을 들은 조사단장은 깜짝 놀랐다.
그 반응은 당연했다. 근위 마도병단은 국왕이 직접 명령하는 최정예의 비밀 단체였다.
그들은 실력 있는 마법사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국왕의 눈과 귀가 되어서 대륙 곳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었다.
비밀 단체다 보니 세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고위 귀족이나 궁정 마법사들이나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단체였다.
‘그자들이 이런 변방 도시에 와 있다고? 우리들보다 한발 빨리?’
조사단장은 아론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녀석의 실력은 진짜였어.’
그렇기에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그래도 6서클인데 아론에게 상대조차 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군.’
아론은 녀석의 반응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더 당당하게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바쁜 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보는 눈이 많아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정 듣고 싶다면 나중에 돌아가서 레들리오 단장에게 물어보도록 해라.”
아론의 그 말에 조사단장의 눈빛이 변했다.
레들리오는 그저 궁정 마법사 정도로만 바깥에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 그의 직책은 근위 마도병단의 장이었다.
‘먹혔나 보네.’
아론은 조사단장의 눈을 바라보며 흡족해했다.
이러한 왕국의 내밀한 정보를 그가 알고 있는 것도 다 에드먼스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왕국 내 정보는 에드먼스를 거치게 되니, 이 정도는 기밀조차 아니었다.
하지만 조사단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들리오를 단장이라고 부르는 건 아론이 왕국의 1급 비밀을 알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그는 아론과 켄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론은 당당했으며, 켄트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분은 내가 고까웠던 모양이군.’
두 사람이 근위 마도병단 소속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신은 그들의 실력도 몰라보고 까분 것이 되었다.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이분이 입은 망토도 보통의 것이 아닌 거로 보이는데.’
그제야 조사단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론이 근위 마도병단 소속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아론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마음대로 녀석들을 주무를 수 있겠군.’
그는 속으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 너희들이 벌인 일. 그냥 넘어가긴 좀 그렇군.”
“……예?”
조사단장의 말투는 어느새 공손하게 바뀌어 있었다.
“감히 임무 중인 우리 마도병단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나?”
“그, 그건…….”
“설마 내뺄 생각은 아니겠지?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아론이 고자세로 나오자 조사단장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런 태도는 연기에서 나오는 게 절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조사단장은 아론의 소속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태도를 달리 해야 했다.
조사단장은 아론에게 사과했다.
“너희들도 빨리 마법을 거둬라!”
조사단장이 부하들에게 일갈했다. 부하들은 우물쭈물거리며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아론도 그제야 녀석의 목에 들이밀었던 얼음창을 해제했다.
“당장에라도 네놈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만, 지금은 임무 중이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아론의 그 말에 조사단장은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들은 4왕자님의 성과를 폐하께 보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조사단장은 왜 이들이 이곳에 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들은 4왕자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 온 건데, 그들은 그보다 한발 빠르게 와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
“에드먼스의 영지에서 흑마법사를 찾아낸다면, 그건 왕실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폐하께서도 이번 일에 관심이 많으시지.”
그 말을 들은 조사단장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만일 이번 일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다면 4왕자의 평가가 올라갈 게 분명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 4왕자는 자신에게도 무언가 보상을 해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에 예기치 않게 근위 마도병단의 사람들과 다툼이 있었다. 만약 이들이 이번 일을 왕에게 안 좋게 보고한다면 그 불똥은 필시 자신에게 튈 게 분명했다.
‘최대한 좋게 끝내야 한다.’
조사단장은 이들에게 저자세로 나가기로 했다.
“마도병단 소속의 두 분을 알아보지 못한 제 결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론은 그의 속내가 뻔하게 보여서 그저 웃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이용해 먹어야 했기에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를 공격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뒤에 있는 분을 건드렸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론이 켄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켄트는 갑자기 지목을 당하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이분도 이렇게 강한데, 뒤에 분은 얼마나 강하길래?’
조사단장은 그 말을 듣고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오래 이렇게 있는 것도 좋지 않다. 잘못해서 흑마법사 단체 녀석들이 알아차리면 곤란하니까, 이제 가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조사단장은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는 이곳을 떠났다.
“하아.”
켄트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 님! 이런 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표정 관리한다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 녀석들이 이리 빨리 올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아론은 켄트가 고마웠다. 자신의 장단에 이렇게 잘 맞춰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연기 잘했어.”
“두 번은 못 하겠습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요.”
“녀석들이 우리의 존재를 착각하기 시작했으니, 저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조사를 시작할 거야.”
“아론 님의 계획대로 된 거군요.”
“그래. 우리는 그 틈을 타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된다.”
아론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단장이 보낸 부하가 아론에게 왔다. 이제 조사를 시작할 테니 와달라는 전언이었다.
그렇게 아론은 켄트와 함께 조사단에 합류했다.
그들이 명목적으로 해야 할 일은 별것 없었다. 4왕자의 행적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파견된 근위 마도병단의 신분이었으니, 조사단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만 평가하면 되는 일이었다.
조사단의 인원은 다 합해서 50명이었다. 전력의 대부분이 4서클 아니면 5서클이었고, 간간이 6서클 마법사도 보였다.
조사단장은 아까도 확인했지만 6서클 마스터였다.
아론은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실력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대다수가 에드먼스 아카데미를 다녔음에도 가문의 정식 마법사가 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에드먼스 가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정작 자신의 못난 실력은 탓하지 않고 말이다.
‘뭐,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사람을 수두룩하게 봐 와서 놀랍지도 않네.’
아론은 그러려니 했다.
그런 감정 때문인지 조사단원들은 실력과 별개로 열의가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에드먼스 러셀이 관리하는 땅. 여기서 흑마법 단체가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 에드먼스 가문의 위세를 떨어트리는 게 가능했다.
‘열정이 있는 건 좋지만…….’
아론은 실력 미달의 조사단이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그동안 봐 왔던 에드먼스 소속의 마법사들에 비해 실력이 매우 떨어졌다.
이들은 서클도 서클이었지만, 그냥 능력 자체가 부족했다.
아론은 4왕자 측에 테네브라와 관련된 정보를 흘릴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 라둔 왕국에서 코뱃 상단이 어떤 일을 벌여서 경쟁 상단을 제압했는지도 같이 말해 주었다.
그래서 당연히 흑마법에 대해 대응책을 꾸릴 줄 알았다.
물론 익명의 신고였기에 어느 정도 정보를 걸러서 들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최소한 생명에 대한 대비까지 하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왕국이 무능한 건지, 이 조사단이 특별히 무능한 건지는 몰라도 조사단원 중에서 흑마법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야 해주의 술식을 갖추고 있지만, 이들의 미래는 안 봐도 뻔하네.’
만약 이들이 조사를 시작했는데 테네브라에서 본격적으로 나온다면 저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론의 걱정과는 달리, 조사단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의욕이 넘치는 상태였다.
“보나 마나 뒷골목의 무뢰한들이랑 비슷하게 녀석들의 규모는 얼마 되지도 않을 겁니다.”
“흑마법에 의존하는 거 보니 실력도 형편없겠지. 얼른 쳐들어가도록 합시다!”
아론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결국 그들의 입장은 무작정 바하 교단에 들이닥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조사단은 의견을 내면서도 아론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폈다. 근위 마도병단이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잘 보이기 위해서 좀 더 과장된 행동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멍청이들.’
아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들의 명줄은 길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론의 입장에선 전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도 이들을 버림 패로 쓰려 했었다.
그의 입장에선 이들을 이용해 바하 교단의 영역에 무사히 들어갈 수만 있다면 충분히 성공이었다.
“녀석들이 도망가기 전에 얼른 갑시다!”
그래서 아론은 별말 하지 않고 순순히 조사단의 뒤를 따라갔다.
***
마다바드의 서부 도시에 흑마법 단체가 있는 것 같다.
그 소문을 듣고 4왕자의 주도하에 조사단이 꾸려졌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언제든지 수를 써서 도망갈 수 있었기에 기습적이고 은밀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망각한 채 행동하고 있었다.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모여서 바하 교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딱 봐도 어딘가 심상치 않은 집단이라는 기운을 풀풀 풍기는 중이었다.
아론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혹시, 따로 요구하실 거라든가 고쳐야 될 점이 있습니까?”
“……아니. 완벽하다.”
“그렇습니까? 하하. 저 테르크가 이끄는 조사단입니다. 다들 우수한 인재들이지요.”
반어법으로 한 말인데, 조사단장은 칭찬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조사단장은 그 외에도 계속해서 조사단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론은 그의 목적이 단순한 아부임을 알고는 적당히 흘려듣고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어느덧 조사단은 바하 교단 앞에 도착했다.
갑작스런 대인원이 교단 건물로 들이닥치려 하자, 그곳을 지키는 신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우리는 왕실에서 파견된 조사단이다. 이곳을 살펴봐야 하니 교주를 불러주게.”
조사단장은 당당한 얼굴로 외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도는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들어갔던 신도가 아닌 다른 사람이 건물에서 나왔다.
“저는 바하 교단의 부교주인 브룩스라고 합니다.”
그는 훤칠한 외양이었다. 표정에서는 왠지 모를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흑마법과 관련된 연구가 진행된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하러 왔다.”
“저희들은 바하 신을 모시는 평범한 종교 단체입니다. 흑마법 같은 것은 전혀 모릅니다.”
자신을 부교주라 소개한 브룩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에드먼스 러셀 님이 관리하시는 땅입니다. 에드먼스 영지를 조사할 경우엔 왕실 조사단이 파견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부교주가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교단 건물의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거기서 신도들이 우루루 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냐. 갑자기?”
“이들은 바하 신을 믿는 평범한 신도들일 뿐입니다.”
당황해서 외치는 조사단장의 말에 브룩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론은 신도라고 나온 그들의 상태창을 살폈다.
‘……평범한 신도는 무슨. 전부 흑마법사들이잖아.’
상태창을 열어보니, 이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흑마력이 충만한 흑마법사들이었다.
당장 바깥으로 나온 신도들만으로도 조사단과 충분히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리라곤 예상했다.
중요한 건 조사단의 대응이었다. 아론은 과연 이들이 어떻게 신도들을 뚫고 교단 건물에 들어갈지 궁금해졌다.
“신도들이 갑자기 몰려나온 이유가 무엇인가?”
“방금 예배가 끝난 모양입니다.”
조사단장의 물음에 부교주는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를 막아서려는 건가? 왕명을 받아서 온 우리들을?”
아론은 조사단장의 말에 놀랐다.
물론 부교주도 당황했을 것이다.
왕명.
이것이 있으면 원칙상 에드먼스 가문이라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여기에 불응을 한다면 당장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다.
‘이런 건 들은 적 없었는데? 정말 왕명을 받아서 온 거 맞아?’
아론은 조사단장이 꺼낸 말의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웠다.
왕명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 대상이 에드먼스 가문이 아니라고 해도 꽤 큰 부담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정말로 왕명을 받아냈다면, 4왕자가 무슨 수로?’
아무리 왕자들이라 해도 단순히 투덜거린다고 내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론은 브룩스의 표정에서 잠깐이나마 당황한 기색이 비쳤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왕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브룩스는 그렇게 말하며 신도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건물 입구를 막고 있던 신도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뭔가 이상하군.’
아론은 생각했다.
아무리 왕명을 받아왔다고는 하지만 너무 순순히 길을 내어주는 것 같았다.
뭔가 미약한 저항이라도 할 줄 알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러셀의 부하가 오길 기다리든가. 아니면 이곳에 있는 중요한 물건을 빼돌리든가 하는 기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계책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조사단장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위풍당당하게 조사단원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직 아론만이 브룩스의 저의를 의심할 뿐이었다.
‘어차피 이들에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어.’
어찌 되었든 안으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아론은 더 이상 이들에게 미련이 없었다.
내부는 평범한 종교 단체의 건물이었다. 평온한 분위기에 여기저기에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물건들이 있을 뿐이었다.
“다들 움직여라! 수상한 게 발견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예!”
조사단장의 명령에 그들은 의욕이 찬 상태로 조사를 시작했다.
우우웅-
조사단은 각자 아티팩트를 꺼내서 마나 반응을 살폈다. 혹시라도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브룩스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여유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이군.’
아론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조사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곳이 흑마법 연구가 이루어지는 단체라고 할 만한 자료나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사단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덩달아 아론의 눈치를 보는 횟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왕명을 사용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면목이 없었다.
게다가 근위 마도병단인 아론이 조사를 관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티팩트를 여기서 다 써도 좋다! 뭐든 증거 하나만 찾으라고!”
조사단장은 다급해져서 외쳤다.
그러면서 그도 탐지 아티팩트를 꺼내 이곳저곳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런 조사단장의 노력이 빛을 보려는 것인지, 그의 아티팩트에서 큰 에너지 반응이 느껴졌다.
“어?”
조사단장은 깜짝 놀랐다.
그야 자신이 탐지하고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주변에 있던 단원들도 의아해했다.
‘……설마?’
오직 아론만이 상황을 읽어냈다.
그는 즉시 조사단장이 있는 위치로 가서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느껴진다.’
밑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땅 밑에서 마나 반응이 느껴졌다.
그는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브룩스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는지도 이해했다.
‘간도 큰 놈들일세. 여기에 던전을 만들어 놨다고?’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 *
아론이 던전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서 서성거렸다. 그걸 본 브룩스의 표정은 굳고 말았다.
‘저 자식이……?’
녀석이 초조해하든 말든.
아론은 탐지 마법에 의존해서 여기저기를 짚어 보았다.
잠시 후.
‘여긴가?’
아론이 만지기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그는 즉시 거기에 마나를 흘려 보았다. 그러자 감추어져 있던 문이 나타났다.
“오오!”
조사단장은 눈이 커지며 놀라워했다.
“이걸 어떻게 찾은 것입니까?”
그는 신기해서 물어보았다.
자신의 탐지 아티팩트가 반응을 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니다. 그저 감에 의존했을 뿐이다.”
아론의 발언은 격식을 차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던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이었다.
지구의 헌터들이라면 이런 던전 반응을 그냥 지나치고 갈 수가 없었다.
특히 벌어 먹고살기 위해서 온갖 던전을 다닌 아론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아론은 그렇게 던전으로 들어가는 문만 발견하고 뒤로 빠졌다. 이제부터 밀어붙이는 건 조사단의 역할이었다.
“이보게! 이 수상한 문은 대체 뭐지?”
조사단장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성과가 될만한 것을 발견하자 신이 난 상태였다.
“거긴 신물을 보관해두는 곳입니다. 교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입니다.”
브룩스는 그제야 시간을 벌기 위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뭐어? 교주의 허락?”
조사단장은 코웃음을 쳤다.
“밖에서 듣지 못했나? 우리는 왕명을 받아서 조사하러 왔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원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다른 방에 조사하러 간 단원들을 불러라! 지금부터 우리는 이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
조사단장의 명령에 그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이 선택을 후회하실 겁니다. 바하 신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우실 테니까요.”
그런 브룩스의 모습을 보며 아론은 생각했다.
‘이제야 좀 초조해하기 시작하는구먼.’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던전 안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머지 조사단원들이 모이는 동안, 아론은 문을 열어서 던전 안을 살펴보았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아니군.’
만약 그랬었다면 던전 내부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가 존재했을 터였다.
일부러 지하 공간을 만든 뒤에 던전화를 유도한 모양이었다.
아론은 좀 더 마나를 써서 안쪽으로 탐지 마법을 퍼뜨려 보았다.
‘던전의 특성 때문에 그런지, 탐지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잔뜩 깔려 있군.’
그는 안전을 위해서 내부의 상세한 정보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마나가 깊게 나아가면 흩어져 버렸다.
‘하급 던전이지만 이런 거는 철저하게 대비해 두었군.’
아무래도 외부에 들키면 곤란하니 탐지 마법이 닿지 않도록 손을 써둔 것 같았다.
‘못해도 7에서 8서클쯤은 되는 녀석이 관여한 게 분명해.’
그때, 아론의 탐지 마법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방해 요소들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던전 안에서 무언가가 이동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기운…… 여기 신도들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설마 내부에도 사람들이 있는 걸까. 탐지 마법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저희 교단에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교주님께서 정식으로 왕실에 항의할 겁니다.”
“그러시든가!”
뒤에서는 부교주와 조사단장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군.’
던전 내부에서 느껴지는 미지의 기운. 그리고 브룩스의 이러한 행동. 아론은 대충 미래가 예상되었다.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우리를 던전으로 몰아넣어서 죽일 작정이군.’
뻔히 수가 보였다.
하지만 아론은 오히려 그것이 반가웠다.
여기 신도들은 모두 흑마법사다. 알아서 도망치기 어려운 던전 내부로 모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론이 새로 배운 비전 마법인 쇼크웨이브를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기에 아론은 굳이 브룩스의 행동에 훼방을 놓지 않고 모르는 척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단, 조사단분들이 원하시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럴 리가 있나! 우리는 무조건 찾아낼 것이다!”
브룩스는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너도 같이 가야 한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도망치면 곤란하니 말이야.”
“예, 예.”
조사단장은 브룩스를 앞장세워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론과 켄트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안에서도 자세한 탐지는 불가능하군.’
아론은 계속해서 탐지 마법을 써보았다. 그러나 마나가 나아가면서 벽에 부딪힌 순간 이리저리 튕기면서 흩어졌다.
‘쿠브. 여기 조사를 부탁할게.’
아론이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쿠브가 꼬물꼬물 나타나서 땅속으로 들어갔다. 아론은 후미에서 가고 있었기에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는 지하였다. 아론은 탐지가 힘들지 몰라도, 쿠브에게는 아니었다.
잠시 후, 그는 쿠브 덕분에 선명하게 주위를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신도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론이 위에서 느꼈던 기운은 이곳의 신도들이 맞았다. 정확히는 흑마법사 녀석들이었다.
그 숫자는 50명 내외였다. 그들은 조사단을 감싸는 진형을 갖춘 채 이동하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동시에 저주를 걸 생각이군.’
아론은 굳이 지금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여기서 정보를 흘려봤자 더 난잡해질 뿐이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해주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웬만한 저주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켄트.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내가 갑자기 달려도 바로 따라오고. 알겠지?”
“네.”
아론은 켄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도망치는 것까지 염두에 뒀었다.
잠시 후.
“어, 어…….”
선두에서 나아가고 있던 조사단원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허억!”
나머지 조사단원들도 전방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는 셀린이 머랭 영지의 수도원에서 보았던 실험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모두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에 갇혀서 둥둥 떠 있었다.
‘이런 것들이 있었군.’
아론은 담담하게 보았지만, 나머지 단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머랭 영지의 실험체들은 그래도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었다면 여기의 실험체는 사람의 몸통에 몬스터의 팔다리가 붙어 있거나 그랬다.
“네 이놈……! 뭐? 여기가 그저 신성한 종교 건물이라고?”
조사단장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더 볼 것도 없다! 당장 돌아가서…… 으븝!”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고장 난 장난감처럼 덜컥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작되었군.’
쿠브의 탐지 범위에 있던 신도들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하던 브룩스는 비릿하게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았다.
“분명 수차례 경고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요.”
브룩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실험체가 이렇게 넝쿨째 굴러와서 참 좋군요. 덕분에 교주님도 즐거워하실 겁니다.”
털썩!
조사단원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신도들이 나타났다.
아직 남아 있는 단원들은 황급히 방어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거는 건 평범한 마법이 아닌 저주였다. 그들의 마법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조사단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아론은 확실했다.
‘분명 숨어 있는 신도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론도 쿠브가 있어서 녀석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던 거였다.
만약 근처에 있었더라면 6서클 마스터인 조사단장이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론은 조사단원들이 쓰러지는 순간, 강력한 마나 반응을 느꼈다.
아마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을 이용해서 나타난 것 같았다.
‘이 던전은 최소 8서클의 마법사가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간 마법은 쓸 수가 없는 거였다.
바하 교단이 있는 곳은 러셀이 관리하는 마다바드. 그리고 거기에 있는 8서클 이상의 마법사.
이 증거들은 모두 에드먼스 러셀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증거만 제대로 보관해서 공작가에 보낼 수 있다면 러셀에게는 치명적인 한 방을 먹일 수 있었다.
‘기다렸던 보람이 있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브룩스의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흐흐. 당신은 일부러 살려 두었지요.”
브룩스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거든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임?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 뭐 그런 말인가?”
“잘 아시는군요.”
브룩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눈은 초승달 모양이 되어 있었다.
“그러게 던전을 좀 잘 숨겨두지 그랬어? 고작 아티팩트에 드러날 정도면 만든 사람 문제 아닌가?”
아론의 도발에 브룩스는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으십니까? 남은 사람은 당신이랑 그 뒤에 있는 마법사뿐입니다.”
브룩스의 경고에도 아론은 앞으로 나아갔다.
‘……내 말을 무시해?’
브룩스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아론을 향해서 마비의 저주를 사용했다.
‘어?’
브룩스는 당황했다.
아론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조준이 빗나갔나?’
브룩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번 더 저주를 걸었다. 그러나 효과는 여전히 발동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그때, 브룩스의 시야에 아론의 팔뚝이 보였다. 그의 팔뚝에서 작은 글자가 돋아나더니 옅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건……!’
브룩스는 놀라고 말았다.
그의 팔뚝에 적힌 글자는 깨알 같았지만,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주의 술식? 이게 왜 저 녀석에게 새겨져 있는 거지?’
브룩스는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저주를 막아낼 정도의 술식을 쓸 수 있는 흑마법사는 몇 없었다.
아론은 당황하는 브룩스를 놔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쿠브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여기에 모인 녀석들이 전부지.’
그 외에 숨어 있는 신도들은 없었다.
아론은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손에 마나를 모은 뒤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쿠웅!
충격이 일어난 곳을 중심으로 마나가 세차게 휘몰아쳤다.
그가 얼마 전에 배운 비전 마법인 쇼크웨이브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 * *
거친 마나의 물결이 테네브라의 단원들을 덮쳤다.
그들은 갑자기 마나가 들이닥치니 놀랐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알고는 의아해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휘오오!
이내 그들의 몸에서 검은 마나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순식간에 마나를 강탈당한 그들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바닥을 나뒹굴며 울부짖었고, 또 몇몇은 마나가 빠진 탈력감으로 경련했다.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전 마법을 썼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잔챙이를 처리하는 용도였다. 어느 정도 격이 있는 상대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부교주 녀석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거 같은데?’
그 증거로 브룩스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마나를 뺏기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중이었다.
저 상태라면 브룩스는 저항을 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이 녀석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켄트! 부교주에게 공격 마법을 날려!”
아론은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 비전 마법은 조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간신히 쓸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은 아직 힘들었다.
그래서 켄트에게 부탁했다.
그는 지원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지만, 대응할 수 없는 상대를 쓰러트리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켄트는 곧바로 대답하고는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에서 마나가 뭉쳐지더니 마탄이 쏘아졌다.
‘이런……!’
브룩스는 위기를 직감했다.
아론이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전신의 마나가 빠져나가려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브룩스가 체념을 한 순간이었다.
퍼엉!
켄트의 손을 떠났던 마탄이 날아오던 중간에 터져버렸다.
그는 영문을 몰라 브룩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녀석이 나타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전신을 가리는 로브를 입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른 테네브라의 녀석들과 다르게 비전 마법을 썼음에도 마나가 빠져나오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쇼크웨이브가 먹히지 않는다고?’
아론은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7서클이 넘는 실력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쿠브가 이곳을 탐지할 때는 파악되지 않았던 녀석이다.’
이 지하 던전에서 쿠브의 탐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쿠브는 태초의 정령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탐지 범위를 벗어난 곳에 있었다면 말이 된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이 던전을 만든 놈이겠군.’
던전을 만든 자. 던전 마스터라면 그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브룩스가 자신을 부교주라고 말했으니까.’
브룩스보다 실력이 높은 자.
저놈이 교주인 모양이었다.
‘후우.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지.’
아론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상대하는 건 결국 러셀이었다. 그 녀석이 자기 구역에서 관리하는 단체가 바로 테네브라다. 능구렁이 같은 놈의 성격상 허술하게 놔뒀을 리가 없었다.
“오…….”
브룩스의 뒤에 있는 정체불명의 녀석이 아론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더니 그는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비쩍 마른 녀석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재밌는 놈이로구나.”
남자가 말했다. 그의 눈은 흰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해주 술식이 새겨져 있고, 흑마력을 흩뜨려버리는 마법을 사용하다니.”
그는 이 상황을 재밌어하고 있었다.
녀석의 부하들은 다 쓰러졌다. 반면 아론은 켄트도 있었고, 조사단원도 몇 명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수적으로는 아론 쪽이 유리한 상황. 하지만 상대는 그 점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가 브룩스이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자 간신히 아론의 비전 마법에 버티고 있던 그의 표정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저 흥미로운 녀석이랑 한바탕 놀아보려고 한다. 나머지는 네가 맡아라.”
남자는 브룩스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순순히 그 명령을 따랐다.
‘브룩스의 실력은 6서클 마스터 수준이다.’
아론은 녀석의 힘을 가늠했다.
그 정도면 켄트와 나머지 조사단원들이 같이 싸우면 충분히 할만했다.
“너는 내 모습이 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남자가 아론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보통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던데 말이야.”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보다 더한 것도 많이 봤거든.”
아론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기 흉하니까, 얼른 그 눈을 감게 해줄게.”
“하하! 당돌한 녀석이구나.”
남자는 뭐가 웃긴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자신감, 싫지는 않아. 보아하니 흑암도의 마탑주에게 뭔가 받은 것 같은데…… 맞지?”
아론은 잠깐 흠칫했다.
녀석의 입에서 마탑주가 나올 줄은 몰랐다.
“굳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긍정이겠군.”
남자는 그리 말하면서 아론을 위아래로 한번 쓱 훑었다.
“그 해주 술식이며, 방금 쓴 이상한 마법. 묘하게 흑암도의 마탑주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녀석의 몰골은 기괴했지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다.
“그렇지! 우리는 너 같은 재능이 필요했거든. 어차피 나랑 붙으면 죽을 텐데, 살려줄 테니까 이쪽으로 오는 게 어때?”
“테네브라에 입단하라고?”
“그래! 말귀가 통하는구나.”
남자는 낄낄 웃었다.
‘대뜸 이런 제의라니.’
남자는 아마 자신을 마탑주의 제자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타당한 추측이었다. 아무에게나 이런 해주 술식과 마법을 가르쳐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하나만 묻자.”
“얼마든지!”
녀석이 저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니, 아론은 질문을 하면서 정보를 얻어보기로 했다.
“테네브라는 흑마법사들의 단체잖아? 근데 여기는 에드먼스 러셀이 관리하는 구역이지. 둘은 상극인데 어떻게 이 상황이 된 거지?”
“목적이 맞아서 같이 움직이는 거다.”
“목적이…… 맞았다고?”
“그래! 그게 궁금해? 그럼 너도 들어오면 되겠네. 러셀이 이렇게 땅을 내준 덕분에 너도 온다면 마음놓고 흑마법을 연구할 수 있을 거야.”
남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 뒤에 있는 놈들은 모두 처리하는 게 조건이야. 저 녀석들을 입단시키기엔 실력도 별 볼 것 없고, 그렇다고 살려두면 우리 정보가 새어 나가는 꼴이잖아?”
아론은 녀석이 나불대는 것을 보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남자와 러셀은 확실히 연관이 있다.’
저렇게 입을 놀리는 것도 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게 분명했다.
‘좀 더 정보를 알아내고 싶긴 한데.’
슬슬 녀석은 선택을 바라고 있었다. 들어올 것인지 아니면 싸울 것인지.
아론은 이왕이면 저 남자를 생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온전히 살려두면서 제압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어차피 이 녀석들을 다 처리하고 증거만 보존하면 되니까.’
그게 자신이 할 일이었다.
이후에 공작가에 이 사실을 알리면 가문의 조사단이 아주 샅샅이 이곳을 뒤질 테니 말이다.
“만약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잘 알잖아?”
아론의 물음에 남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들어가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죽을 것 같지 않거든.”
“뭐…… 라고?”
그 대답에 남자는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쿠구구……!
남자의 몸에서 흑마력이 넘쳐흘렀다.
“넌 마탑주 녀석에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다. 그자가 준 술식이 아니었다면 넌 이미 말라비틀어져 죽었을 테니까.”
그는 아론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네가 재능이 있어서 한 번 더 묻지. 정말 들어오지 않을 생각인가?”
“난 테네브라를 박살 내러 온 거지, 너희에게 합류하려고 온 게 아니야.”
아론은 그렇게 대답하며 자세를 잡았다.
“정 내 재능이 탐나면 쓰러트리고 끌고 가든가. 너희가 좋아하는 생체 골렘으로 써먹으면 되겠네.”
그 말에 녀석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반면 아론은 침착하게 놈을 바라보았다.
화륵!
남자의 손에서 기분 나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흑마법 특유의 꺼림칙한 기운이었다.
“건방지게 내뱉은 말.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남자는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화르르르!
녀석의 손아귀에 있던 검은 불꽃의 크기가 확 커졌다. 그는 그것을 아론에게 던졌다.
아론은 즉시 배리어를 쳐서 방어했다.
‘어?’
아론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충분히 막을만하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점점 배리어에 균열이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배리어에 들러붙은 불꽃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배리어가 깨진다!’
남자는 아론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웃었다.
“그렇게 버텨봤자 소용없다. 그 불은 한번 붙으면 대상이 연소해버릴 때까지 꺼지지 않거든.”
화르륵!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다시 검은 화염을 만들어 내 아론에게 던졌다.
‘그렇다면 이걸 막아낸다는 건 무식한 선택이다.’
아론은 그렇게 판단하고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는 이번 공격까지는 배리어로 받아냈다.
잠깐 공격이 멈춘 사이, 아론은 배리어가 깨지기 전에 얼른 해제했다.
이대로 있으면 저 검은 불덩어리들이 자신을 덮칠 것이다.
아론은 그 전에 가속 마법을 써서 그 자리를 회피했다.
동시에 아론은 쿠브에게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파바박!
남자의 발밑에서 날이 서 있는 돌이 튀어 올랐다.
쿠브가 성장한 덕택에 그 돌들은 하나하나가 검보다 날카로웠다.
타앗!
남자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게 공격해 올 줄은 몰랐기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살짝 스친 건데도 저 정도였다.
아론은 그걸 보며 아쉬워했다.
‘한 방에 죽일 생각은 없었어도, 어깨 정도는 박살 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남자는 아론을 노려보았다.
“대체 이건 무슨 잡종이지……?”
녀석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흑마법과 관련된 술식을 새기고 있는데 마법을 쓰고, 거기다가 정령까지 다루다니.
그는 이런 존재를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살아남으려고 이것저것 다 배웠거든.”
“……넌 내가 꼭 잡아서 실험체로 써주마.”
남자의 말에는 더 이상 웃음기가 없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아론은 녀석을 도발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 * *
쿠구구……!
아론은 남자의 마력이 강력해지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 수를 쓰는군.’
던전이 머금고 있는 마나가 벽면을 타고 남자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던전의 구조를 야금야금 허물어서 그걸 마나로 바꾸고 있었다. 이 던전 자체가 마나 저장고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남자는 공급 받은 마나를 이용해 불꽃을 만들어냈다.
‘아까보다 훨씬 크고 짙다.’
아론은 녀석이 만든 불덩어리를 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서 막아야 할 거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불꽃을 발사했다.
육중한 크기의 화염이 아론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큰지 이 던전의 통로 자체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이건 도망치기 힘들겠군.’
아론은 배리어를 치기 시작했다. 하나만으로는 금방 녹아 없어질 게 분명했으니 여러 겹의 배리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쿠브의 도움을 받아 돌벽도 생성했다.
화아악!
남자가 쏘아낸 불꽃이 아론의 배리어와 충돌했다. 그 뜨거운 열기가 배리어를 넘어서도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몇 겹으로 만들었던 배리어가 깨졌다. 하지만 불꽃은 쿠브의 돌벽을 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건 아론이 막아낸 부분만 그랬다.
“으아악!”
아론의 배리어가 닿지 않았던 곳은 불꽃이 뒤로 넘어가 아직 남아 있던 조사단원들을 덮쳤다. 그들의 몸은 불에 급속도로 타들어 갔다.
다행히도 켄트는 녀석이 공격을 할 때 눈치 빠르게 아론의 뒤에 붙어 있어서 살 수 있었다.
“저 녀석, 장난이 아닌데요.”
켄트가 열기 때문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마나를 공급받지 못 하게 해야 해. 녀석은 던전으로부터 마나를 공급받고 있는 중이다.”
“방법은 있습니까?”
“쿠브를 이용하면 가능할 것 같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지금 불꽃을 막아주고 있는 이 벽을 제거해야 해.”
“그러면…… 저 무지막지한 화력을 막아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켄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조사단원들은 남자가 쏘아낸 불덩어리에 휩싸인 상태였다.
심지어 녀석은 아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브룩스도 엉겨 붙은 불꽃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제가 쿠브의 벽을 대신해서 방어 마법을 사용하겠습니다.”
“그건 위험해. 네가 녀석의 화력을 막아내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럼 너도 죽는 거야.”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계속해서 저 공격을 막고 있기만 해서는 녀석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아론은 결국 쿠브를 이용해서 수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켄트. 그럼 네가 대신해서 방어 마법을 좀 써 줄래?”
“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몇 초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력해볼게.”
아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켄트는 전방에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 마법을 펼쳤다.
아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쿠브가 설치한 벽을 제거했다.
‘쿠브, 부탁할게!’
아론은 쿠브에게 던전의 벽면을 타고 흐르는 마나를 차단해 달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남자가 당황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덩달아 불꽃의 화력도 약해지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아론은 가속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남자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마법을 시전했다.
녀석의 코앞까지 다가간 순간.
파지지직!
최대 전력으로 전격 마법을 퍼부었다.
‘이 정도면 녀석에게도 충분히 치명적일 것이다.’
후우욱-!
그때였다. 남자의 몸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전격이 밀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분명 마나 공급은 차단했을 텐데.’
아론은 이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쿠브가 마나 공급을 차단시킨 곳을 우회해 새로운 곳에서 마나를 받고 있었다.
“넌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내 마나의 흐름을 읽고 그걸 막아 버리다니.”
“그래서 말했잖아. 네가 날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고 말이야.”
“……널 실험체로 쓰겠다는 마음조차도 사라졌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죽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싸워주마.”
화르륵!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주위로 무수한 작은 불꽃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언뜻 크기만 보면 약해 보였다. 하지만 아론의 눈에는 보였다. 저 불꽃 하나하나가 방금 막아낸 불꽃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론은 곧바로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저 불꽃을 지근거리에서 몇 개 맞았다간 큰일 날 것이 분명했다.
남자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론을 향해 불꽃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판사판이다!’
아론은 녀석이 걸어오는 화력전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는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단순히 에드먼스 호흡법만 쓰지 않았다. 펜던트의 마나도 끌어다 썼다.
화르르륵!
허공에 거대한 불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아론은 그 화염을 전방으로 발사했다.
콰앙!
이윽고 남자가 쏜 무수한 불꽃들과 아론의 화염이 충돌했다.
그러자 장관이 펼쳐졌다. 검은 화염과 붉은 화염. 두 세력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밀리면 안 된다……!’
아론은 계속해서 화염에 마나를 공급했다.
그걸 본 남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놀고 있는 왼손으로 또 다른 불꽃을 만들어냈다.
‘이걸로 녀석을 죽이겠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론을 노려보았다.
뚜욱, 뚜욱.
녀석이 만들어 낸 불꽃은 마치 점성을 가진 것처럼 불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론은 녀석의 불꽃이 지닌 마나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화악-!
남자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불꽃이 쏘아졌다.
‘저게 지금 더해진다면 내가 만든 화염이 밀릴 게 분명해.’
아론도 어떻게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 마나를 이용해 고위급의 화염 마법을 날렸다.
콰앙!
각각 새로운 마법이 더해진 불꽃들이 재차 격돌했다.
처음에는 남자의 마나가 불꽃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가 강했다. 하지만 이내 아론의 화력이 강해지면서 녀석의 불꽃을 막아냈다.
그걸 본 아론은 놀랐다.
자신도 녀석의 공격을 저렇게 깔끔하게 막아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밀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더욱 출력을 끌어 올렸던 거였다.
우웅!
그때였다. 아론은 자신의 펜던트에서 마나 공명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자리에서 빛이 나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아그니 소드의 자리잖아?’
아론은 순간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대충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설마, 바스티안이 쿠베라 소드를 썼을 때랑 비슷한 상황인가?’
그는 그 당시가 떠올랐다.
바스티안은 쿠베라 소드를 이용해 대지의 마력을 끌어다 썼고, 그 결과 인공 섬을 만들어내는 말도 안 되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이번에 아론이 녀석의 화염을 집어삼킨 것도 아그니 소드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조금 전에 화염 마법의 술식을 짜 올릴 때, 순간적으로 마나 출력이 상승한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아론도 방금 전 마법을 쓴 것은 위기 상황에서 나온 기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남자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공격이 막힐 줄이야.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남자는 바로 다음 수를 준비했다.
‘저 녀석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마법은 조심해야 해.’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아론이 거리를 좁혀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화르륵!
남자는 다시 한번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래. 전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론은 마음을 다잡았다.
녀석의 불꽃을 꺼트렸다 뿐이지,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정면으로 화력 대결을 하는 건 나한테 불리해.’
남자는 던전의 마나를 끌어다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나가 동이 날 때까지 싸우는 것은 결국 저 녀석이 이기는 길이었다.
그래도 일단 녀석이 공격을 택했으니 이쪽도 나름의 선택을 해야 했다.
아론은 다중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녀석의 머리를 노린 얼음 마법.
발아래에는 날카로운 돌의 창을.
정면으로는 화염을 발사했다.
그러나 남자는 방출한 불꽃을 제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화르륵!
그 불꽃은 점점 커졌다. 그러더니 아론이 시전한 마법을 모두 막아 버리고 말았다.
파바박!
녀석의 몸에 둘러진 화염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중 일부가 아론을 향해 날아왔다.
아론은 가속 마법을 써서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남자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일을 방해해온 녀석이 저놈이 아닌가 싶었다.
쿠구구!
던전이 점점 허물어져 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남자가 무리해서 마나를 끌어 썼다가는 이 던전에 갇혀 버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마나도 얼마 안 남았고, 녀석도 더 이상 싸움을 길게 끌고 싶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콰앙!
두 사람의 마법이 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검은 화염과 붉은 화염이 뒤엉키면서 어마어마한 충격을 만들어냈다.
아론은 순순히 화력 싸움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빠르게 남자의 측면으로 이동해서 얼음의 창을 날렸다.
콰득!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무사히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화르르륵!
이내 녀석이 쏘아낸 불꽃들이 자신을 향하기 시작했다.
아론은 가까스로 가속 마법을 써서 피했다. 하지만 몇 개의 불덩어리가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크윽!’
작은 불씨였지만 그것은 꺼지지 않고 아론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전투를 길게 끌고 갔다가는 자신이 진다는 게 명확해졌다.
우웅!
그때였다. 아론의 펜던트가 다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감각에 집중했다.
시간이 느려지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대한 생각이 저편으로 날아갔다.
‘펜던트가 반응을 보이는 건, 그냥 이러는 게 아니다.’
아론은 펜던트의 첫 공명을 느낀 이후로 마법을 쓰면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회로가 보석에 각인된 회로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펜던트가 계속해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거였다.
‘왠지 모르게 지금 마법을 쓰면 저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아.’
아론의 정신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화염 마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아그니 소드의 보석이 광채를 뿜어냈다.
화아아악!
아론은 남자를 향해 불덩어리를 쏘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불꽃이었다.
‘뭐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남자는 공격을 거두어들이고 방어 마법에 전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아론의 불꽃이 녀석을 휩쓸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