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25/40)
  • Chapter 5

    바스티안은 공격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론이 우뚝 서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론의 공격 마법 때문에 갑옷이 찌그러진 곳도 있었고, 상처가 패인 곳도 있었다.

    하지만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네 녀석이었구나.”

    아론은 그런 바스티안을 보며 허탈했다.

    ‘호흡법에다가 펜던트의 마나를 합해서 날린 공격이었는데, 이걸 견뎌 내다니.’

    바스티안이 번개를 맞은 순간, 칼을 땅에 꽂는 것을 보았다.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영리한 판단이었다. 번개를 온전히 맞지 않고 땅으로 흘려보냈었다.

    ‘보통 녀석이 아니군.’

    평범한 기사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마법사와의 대전을 염두에 두고 훈련을 한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네놈을 찾기 위해 에드먼스와 연관된 사람들을 이 잡듯 뒤졌지.”

    바스티안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하지만 잘도 숨어다녔던 모양이군. 도저히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었어.”

    그의 말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론은 대범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네 덕분에 수도원의 생체 골렘들을 잘 처리했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히려 바스티안을 도발했다. 그 말을 들은 바스티안의 표정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밴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 같은데…… 그건 좀 도의적으로 아니지 않나?”

    방금 전 아론의 발언이 바스티안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처억!

    바스티안은 땅에 꽂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라.”

    그는 경고를 날리면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주변의 마나가 휘몰아쳤고, 아론은 그 기운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째 마탑주하고 싸울 때보다 더 강해진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아론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바스티안의 화를 돋궈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승산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바스티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넌 살아남았잖아? 그건 암묵적으로 네놈의 외숙을 팔아넘기는 데 동의한 거 아닌가?”

    그 말에 바스티안의 이성이 뚜둑 하고 끊어졌다.

    쿠오오……!

    바스티안의 검에서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는 서슴없이 아론을 향해 돌진했다.

    쐐애액!

    금빛 기운이 바스티안의 검에서 휘몰아치며 날카로운 검풍이 만들어졌다.

    마탑주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술이었다. 게다가 아론의 도발이 기폭제가 되어서 더욱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아론은 실드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 저 공격에는 배리어를 몇 겹으로 두르든 깨질 게 분명했다.

    펄럭-

    아론은 자신의 망토를 펼쳤다.

    몸을 살짝 틀어서 바스티안의 검이 몸통이 아닌 망토를 찌르게 했다.

    그의 검은 쑤욱 하고 망토 속으로 들어갔다.

    바스티안은 놀랐다. 무언가를 베었다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벌어지는 광경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츠츠츳!

    망토 안으로 빨려 들어갔던 검이 반대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건 대체?’

    바스티안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속으로 고민했다. 그의 검이 자신을 찌를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그는 너무나 힘차게 찌른 나머지 저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간 위험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바스티안은 오러 아머를 최대한 두르고 몸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아론은 녀석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게 두지 않았다.

    촤라라락!

    미리 준비해 두었던 어스 바인드 마법을 발동시켰다.

    ‘고맙다, 쿠브.’

    쿠브의 도움이 컸다. 아론이 그를 도발하고 있던 사이에 주변의 땅에 마나를 묶어 두었었다.

    땅에서 솟구쳐 올라온 마나 줄기는 바스티안의 다리를 묶었다.

    바스티안은 그 속박을 풀려고 했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해 둔 마법이었기에 빠른 시간 안에 그것을 풀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푸욱!

    결국 바스티안은 자신이 찌른 검에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그러나 아론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바스티안의 피해 여부에 상관하지 않고 또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파지지직!

    5서클 급의 전격 마법을 트리플 캐스팅해서 바스티안의 몸에 퍼부었다. 지금 아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출력이었다.

    콰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섬광이 터졌다.

    “으아악!”

    주변으로까지 퍼져나간 전격이 바스티안의 병사들을 덮쳤다. 이 정도의 위력인데 그걸 정통으로 맞은 바스티안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아론은 직감했다.

    녀석의 오러가 느껴졌다.

    바스티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전격으로 인한 빛이 사그라들고,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론은 바스티안의 상태를 확인했다.

    확실히 이번에는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스스로의 검에 찔린 어깨며, 뇌전으로 타 버린 자국 등등.

    아론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나름 비장의 수였다.

    이걸로도 끝내지 못할 줄이야.

    그래도 끝이 보였다.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마탑주와 합공을 가하면 이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바스티안은 부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것까지는 쓸 줄 몰랐는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푸욱!

    그러더니 간신히 잡은 검을 땅에 꽂았다.

    아론은 거기에 불안함을 느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는 쿠베라 소드의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쿠베라 소드」

    · 1단계 봉인 해제

    ‘뭐야, 이건?’

    아론은 밑에 적힌 ‘1단계 봉인 해제’에 주목했다.

    여태까지 세 개의 칠검을 보았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떠오른 건 처음이었다.

    휘오오-!

    검의 주위로 황금색 입자들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입자가 아론에게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촤학!

    검은색 마나가 아론의 몸을 끌어당겼다. 아론은 이것이 마탑주의 마나임을 알고는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 와중에 검에서 나온 황금색 입자 하나가 아론의 피부에 스쳤다. 그러자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보통 기운이 아니구나.’

    아론은 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른 채 저 입자들에 둘러싸였더라면 신체가 난도질당할 뻔했다.

    “돌을 저렇게까지 다룰 수 있다니.”

    “돌이라고요?”

    마탑주의 말에 아론은 자세히 황금색 입자를 관찰해 보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 입자는 아주 작은 돌이었다.

    ‘1단계 봉인 해제라고 했었지. 저게 그 효과인 걸까?’

    아론은 궁금했다. 젠슨도 칠검을 사용했었지만 저런 능력을 보여주지는 않았었다.

    아론은 쿠베라 소드의 능력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바스티안이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알기에 꾹 참았다.

    “피하다니, 제법이군.”

    바스티안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러 땅을 내리쳤다.

    꽈아앙!

    오러가 땅을 터트리며 아론이 있는 곳을 향해 쇄도했다.

    그 공격은 마탑주가 급히 마나를 펼쳐서 막아주었다.

    그러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서진 돌의 파편들이 비산해서 아론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마탑주가 그것까지 막아내기엔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론은 마탑주가 펼친 마나 위에 배리어를 시전했다.

    파사사삭!

    하지만 황금빛을 띤 돌의 파편들은 하나하나에 강력한 오러가 담겨 있었다. 아론의 배리어는 그것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마탑주도 그 공격이 버거운 모양이었다. 그의 마나는 신체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뼈가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도 상처를 입어서 공격하기가 힘들 텐데, 참 쉽지 않은 상대네요.”

    “……동감이다.”

    아론의 말에 마탑주가 대답했다.

    “내가 역소환 당한다면, 저 녀석에게 라이프 베슬을 빼앗길 가능성이 크겠군.”

    “바스티안을 이기려면 방법이 하나뿐입니다.”

    “그게 뭐지?”

    “저 녀석이 든 검을 떨어트리는 겁니다.”

    “말로는 그게 쉽겠구나.”

    하지만 아론이 궁리해본 결과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마탑주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기에 아론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내가 힘을 쓰면 단 한 번, 저 녀석의 움직임을 묶어둘 수 있다.”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해서 검을 떨어트려내 보겠습니다.”

    아론의 말에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역 소환 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 부디 이번에는 실패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기운을 회복한 바스티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라라락!

    허공에서 피어오른 마탑주의 검은 마나 속에서 사슬들이 튀어나와 바스티안의 움직임을 막았다.

    “안 통한다!”

    까드득!

    바스티안은 힘을 주어 사슬을 풀어내려고 했다.

    마탑주는 거기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이 사슬을 풀기 전에 움직여서 바스티안의 앞으로 갔다.

    파사삭!

    검은 사슬이 부서졌다. 그 타이밍에 마탑주의 손이 검에 닿았다.

    그의 완력으로 이 검을 떼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차라리 검의 힘을 빌려서 바스티안의 속박을 강화시키자고 생각했다.

    우우웅!

    마탑주는 드레인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황금빛 기운이 마탑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로 상성이 맞지 않는 마나였기에 마탑주의 뼈가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흡수한 마나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마탑주는 다시 그 마나를 사용해 바스티안을 더욱 강하게 속박했다.

    촤라라락!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사슬은 검은색이 아니라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이다!’

    아론은 마탑주가 만들어 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저대로 놔둔다면 마탑주는 필시 역소환 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론은 최대한 마나를 모았다. 그러고는 바스티안의 오른팔을 노리고 윈드 블레이드를 날렸다.

    쐐액!

    아론을 떠난 마법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저 검만 떨어트린다면 녀석의 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제발 자신의 시도가 성공하기를 빌었다.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바스티안이 포효했다.

    그러자 쿠베라 소드가 마치 폭주라도 하는 듯이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으윽!”

    마침 검에 손을 댄 채 드레인 마법을 쓰고 있떤 마탑주가 신음을 흘렸다.

    당장에라도 역소환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피해였다.

    콰앙!

    검에서 뻗어 나온 오러가 윈드 블레이드를 막아냈다.

    ‘이런!’

    아론은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저 검을 떨어트리지 못하면 승산이 없었다.

    ‘이젠 마탑주도 사라질 텐데!’

    그럼 아론 혼자서 바스티안과 대적해야 했다.

    퐁!

    그때였다.

    쿠브가 갑자기 소환되어 바깥으로 나왔다.

    휘오오-!

    그의 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쿠베라 소드에서 나오는 것과 동일한 기운이었다.

    아론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그러나 쿠브의 몸에서 뻗어져 나온 기운이 쿠베라 소드에 도달하자, 거기서 나온 오러는 거짓말처럼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어……?”

    아론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라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쐐액!

    그는 다시 한번 윈드 블레이드를 날렸다.

    서걱!

    바스티안이 검을 들고 있던 오른손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 * *

    그 순간 바스티안은 당황했다.

    자신의 오른손이 잘린 것도 놀라웠지만,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가 일순 사라지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어떻게……?’

    바스티안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스릉!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보다는 남은 팔로 허리춤에 있던 다른 검을 뽑았다.

    그러나 바스티안이 동요가 패착이 되었다.

    아론은 아이스 스피어를 시전해 바스티안의 가슴팍을 향해 날렸다.

    쐐액- 콰악!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 바스티안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커헉!”

    바스티안은 피를 토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게 놔두지 않겠다.’

    아론은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할 수 있다면 그를 생포하고 싶었다.

    바스티안은 아이젠의 특임대에서 중역을 맡고 있었다. 그를 심문하면 다른 칠검의 정보는 물론 테네브라와의 관계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론은 손을 뻗어서 다시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 녀석을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바스티안이 부들부들거리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이젠의 영광을 위하여!”

    바스티안은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서 외치더니 아티팩트를 꺼내서 사용했다.

    ‘저건?’

    아론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일순 바스티안의 오러가 아티팩트에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딱 봐도 자폭용이잖아!’

    아론은 당황했다. 저 아티팩트는 바스티안의 오러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8서클 급의 기사가 지닌 오러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터진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 배리어로 막을 수 있을까?’

    아론은 불가능함을 알아차렸다.

    자신도 싸우면서 많은 마나를 소비했다. 바스티안이 전력을 머금은 자폭 아티팩트를 막을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마탑주의 도움을 바라는 것도 힘들었다. 그도 이미 힘을 다해서 언제라도 역 소환이 될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아론이 고민하는 순간.

    ‘어? 쿠브?’

    아론의 시야에 쿠브가 보였다.

    쿠브는 땅에 떨어진 쿠베라 소드를 끌면서 아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론!”

    쿠브의 외침과 동시에, 아론은 몸속에 마나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질적인 마나는……?’

    아론은 그것이 쿠베라 소드에서 흘러나온 마나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쿠브가 나에게 마나를 주고 있는 건가?’

    그는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깊게 고민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마나면은 자폭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론은 곧바로 배리어 마법을 펼쳤다.

    콰아앙!

    동시에 바스티안이 꺼낸 아티팩트가 폭발했다.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폭발은 주변을 집어삼키는 것은 물론 인공으로 만들어진 섬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아론은 필사적으로 배리어를 유지하며 그 공격을 버텼다.

    잠시 후.

    길게만 느껴졌던 바스티안의 자폭이 끝났다.

    아론이 배리어를 친 영역을 제외한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으으…….”

    아론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휘청거렸다.

    쿠브가 쿠베라 소드의 마나를 흡수해서 공급해 줬다 하더라도 방금 배리어를 펼친 건 꽤나 무리한 일이었다.

    마탑주는 그런 아론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건가.’

    그가 보기에 아론은 10대 후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저 녀석이 데리고 있는 정령. 태초의 정령이었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통을 타고난 것도 모자라 태초의 정령과 계약하는 기연까지 누리게 되다니.

    하지만 마탑주는 더 이상 느긋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파사삭!

    신체를 구성하던 마나가 부족해지자 여기저기서 뼈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전투가 끝난 뒤,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 했지?”

    아론은 마탑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한다면 다시 나를 찾아와라. 장소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마탑주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역 소환이 된 것이었다.

    ‘라이프 베슬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군.’

    아론은 굳이 위치를 묻지 않았다. 역 소환이 되면 흔적이 남게 된다. 아론은 그걸 쫓아가면 되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일단 쿠베라 소드를 챙겼다.

    「쿠베라 소드」

    · 오래전부터 아이젠 왕가에 내려져 오던 재보. 태초의 검에서 갈라져 나와, 땅의 힘을 품고 있는 검이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바스티안과 대치 중에 보았던 봉인이 해제되었다는 알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아무래도 칠검에는 아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능력들이 숨어 있는 듯했다.

    아론은 자신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만약 바스티안이 했던 것처럼 나도 칠검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면…….’

    아마 더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추측 단계였다.

    아론은 이웨카 길드로 돌아간 뒤에 정보를 수집해 보기로 했다.

    일단 망토에서 추출기를 꺼냈다. 칼집처럼 생겨서 칠검을 꽂아 넣을 수 있는 아티팩트. 드워프 장인 헤핌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아론은 거기에 쿠베라 소드를 꽂아 넣고는 다시 망토 속의 아공간에 보관해 두었다.

    그런 뒤에 쿠브를 살폈다.

    쿠브의 주위에는 아직도 황금빛 마나가 감돌고 있었다. 쿠베라 소드에서 흡수한 마나가 남아 있는 탓이었다.

    쿠브는 아론이 바라보자 훌쩍 날아서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쿠브.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거야?”

    “바깥에서 익숙한 마나가 느껴지길래 나왔어! 잘은 모르겠지만, 나랑 이 마나랑 친한 거 같아!”

    쿠브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렇구나.”

    아론은 쿠브를 쓰다듬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온 것 같군.’

    아직 쿠브의 설명은 부족한 검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아론은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다.

    쿠브는 가이안의 화신이었다. 그런 그가 쿠베라 소드에서 익숙한 마나를 느꼈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그 검 안에 깃든 마나가 신의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미티움도 운석에서 채취한 광물이라고 했었지.’

    칠검의 원재료인 미티움.

    혹시 미티움이 신과 관련이 있는 광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나갔나?’

    자신의 추측이 억지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론은 쿠브의 마나가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쿠브가 쿠베라 소드의 마나를 흡수하면서 성장한 모양이었다.

    쿠구구!

    그때, 아론이 서 있는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땅을 유지해주는 쿠베라 소드의 마나가 사라진 탓이었다.

    아론은 돌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마나가 많이 들긴 하지만, 부유 마법을 써야겠어.’

    자신이 타고 온 배는 이미 바스티안의 자폭이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내가 도와줄게!”

    쿠브가 그렇게 말하더니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다 위에 사람 한 명 정도가 걸어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섬까지 거리가 꽤 될 텐데도 다리는 끊임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쿠브가 성장한 덕분인가?’

    원래라면 이런 것을 할 수 없었을 터였다.

    “고마워, 쿠브.”

    아론은 쿠브를 쓰다듬었다.

    쿠브는 헤실헤실 웃었다.

    ***

    아론은 쿠브 덕분에 무사히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탐지 마법을 사용해 마탑주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론은 흑암도에서도 으슥한 주택가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론은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기서 마탑주의 마나가 느껴진다.’

    리치의 라이프 베슬이 이런 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 탁월한 선택이라고 아론은 여겨졌다.

    아론은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마탑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회복하는 중이었기에 몸의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었다.

    “어서 오게.”

    마탑주는 아론을 맞이해주었다.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 했지?”

    그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본제로 들어갔다.

    “하지만 난 거래는 하지 않을 생각이네.”

    아론이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마탑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내 목숨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지. 거래라기보다는 보답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주게.”

    “……감사합니다.”

    마탑주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비록 아론이 참전했을 때는 그가 이미 바스티안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상태였었다.

    그래도 마탑주가 점점 열세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아론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역 소환당했고, 결국 라이프 베슬이 파괴되었을 게 분명했다.

    ‘보답을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싱글벙글했다.

    “기사가 썼었던 신묘한 검은 챙겨 두었나?”

    “예.”

    “그 검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궁금하긴 하지만…… 자네가 가져가도록 하게.”

    마탑주는 통 크게 검을 아론에게 양도하였다.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그 검을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을 텐데, 아론은 그의 관대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가 해주의 술식을 알고 싶어서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적힌 책을 주도록 하겠네. 하지만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마탑주는 아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해주의 술식이 필요한 건가?”

    “머지않아 제가 어느 흑마법 단체와 싸우게 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단체가 흑암도는 아닙니다.”

    아론은 혹시 몰라 뒷말을 곁들였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저주 마법을 보유하고 있더군요. 저도 거기에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서 해주의 술식이 필요했었습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또 이상한 흑마법 단체가 암약하고 있는 모양이군.”

    마탑주는 불만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애초에 흑마법사들이 대륙에서 밀려나고 흑암도로 피신한 것도 그런 일부의 흑마법사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탑주는 그들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녀석들을 잡는 데 도움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흑암도의 마탑은 아직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뿐이지, 우군으로 삼으면 든든한 대상이었다.

    일시적이긴 해도 자신의 세력이 되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공작에게 제시할 성과가 하나 더 늘었군.’

    마탑주는 약속대로 해주의 술식이 적힌 책을 아론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지니고 있으면 웬만한 저주는 피할 수 있을 걸세.”

    아론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흑암도에 온 목적을 무사히 달성해내었다.

    “그리고 자네에게 줄 것이 하나 더 있네.”

    마탑주는 아론에게 뜻밖의 말을 꺼냈다.

    * * *

    ‘나에게 줄 게 있다고?’

    아론이 채 물어보기도 전에 마탑주가 움직였다. 그는 책장을 뒤적이더니 이내 낡은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여기저기 헤지고 손때가 묻은 책이었다. 아론은 그게 무엇인가 싶어서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몬테그의 비전서」

    · 흑마법의 일인자나 다름없는 몬테그의 비전 마법이 담긴 책.

    · 이 책을 이해하면 마법 ‘쇼크웨이브’를 배울 수 있다.

    아론은 깜짝 놀라서 책을 바라봤다.

    비전서는 마법에 정통한 가문이 몇 대를 전승하면서 정립하고 발전시켜온 마법이 담겨 있었다.

    마탑주는 스스로를 리치로 만들어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해 만든 마법을 이 책에 적어 두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게 뭔지 대충은 알고 있나 보군.”

    “……네. 마법서가 맞습니까?”

    아론의 물음에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한 마법이 이 책에 들어있네.”

    “어떤 마법입니까?”

    “접촉한 마법사의 체내 마나를 일시적으로 흩어 버릴 수 있는 마법일세.”

    “그게 가능합니까?”

    아론은 어이가 없어 물었다.

    마법사에게 마나는 꼭 필요한 연료였다. 그게 없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탑주는 지금 자신이 개발한 마법이 마나를 흩어 버리는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마법을 만들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네. 하지만 아직 나도 배움이 부족해서, 이 마법을 쓸 수 있는 대상은 흑마력을 가진 마법사로 한정되어 있네.”

    아론은 그 정도로도 놀라웠다.

    접촉만 할 수 있다면 마법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니.

    게다가 아론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녀석들이 둘째 러셀이 이끄는 흑마법사 단체였다.

    그들의 규모도, 힘의 크기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이런 마법을 익힐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이게 있으면 굳이 잔챙이 녀석들과 씨름하지 않아도 되지.’

    하지만 아론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이걸 받아도 되는지.

    주는 건 좋다만,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걸 주셔도 되는 겁니까?”

    비전 마법서는 한 사람이나 가문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책이었다.

    이걸 자신에게 건네준다는 건 큰 의미였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것도 한때 흑마법사들의 생존을 놓고 싸웠던 에드먼스의 혈육에게 마법서를 주는 선택을 하긴 쉽지 않았다.

    “내 목숨값은 자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훨씬 비싸다네. 나는 사실상 영생을 살아갈 사람이니까. 구해준 대가로 이 정도를 지불하는 건 오히려 합당한 처사라고 생각하네만.”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흑마법사들의 위신을 추락시킨 쓰레기 단체들이 대륙에서 활보하는걸 지켜 보고 싶지만은 않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으니, 부디 자네가 처리해 주었으면 해서 이렇게 도움을 주는 걸세.”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비전 마법서를 건네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마법서를 챙겼다.

    “자네 정도면 책만 보고도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걸세. 에드먼스의 혈육이니 말이야.”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도 자네가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지만, 역 소환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휴식이 필요하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긴. 지금 이 상태로 흑암도의 결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겠지.’

    아론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혹시 흑암도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있나?”

    “아닙니다. 애초에 마탑주님을 만나 해주의 술식을 구하기 위해 왔었으니까요.”

    “그럼 밑에 애들에게 말해서 떠날 수 있는 배편을 준비해 주겠네. 자네도 대륙으로 돌아가면 바쁠 테니 말이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은 마탑주의 도움으로 흑암도를 빨리 떠날 수 있었다.

    ***

    아론이 흑암도를 떠난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에드먼스 공작의 집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별일이군.’

    공작은 집무실의 한편에 놓여 있는 포탈 아티팩트를 보며 생각했다.

    저 포탈은 공작을 바로 만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직통 포탈이었다.

    당연히 아무나 이용할 수는 없었다. 그가 허락한 몇몇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방해 술식이 잔뜩 걸려 있어서 평범한 마법사라면 감히 통과할 시도도 할 수 없었으며, 만약 그랬다면 몸이 산산조각나서 전송이 되는 무서운 포탈이었다.

    파아앗!

    포탈의 빛이 점멸하더니 사그라들었다.

    공작은 흥미로운 얼굴로 등장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었지만.

    “직접 뵙는 것은 오랜만일세.”

    포탈을 타고 넘어 온 그는 공작을 향해 인사했다.

    “몬테그. 자네가 직접 오다니. 참으로 별일이군. 거의 10년 만이 아닌가?”

    공작의 집무실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흑암도의 마탑주, 몬테그였다.

    “자네는 여전히 골골대는구만.”

    “리치니까 어쩔 수 없지. 그쪽도 조금씩 늙어가는 게 보이는군.”

    그들은 서로 별다른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을 주고받았다.

    세상을 살아온 연수는 마탑주가 훨씬 오래되었지만, 둘의 힘은 대등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건가?”

    공작이 마탑주를 보며 물었다.

    카이만과 몬테그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불가침 조항을 맺고 서로 간에 정기 보고를 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이렇게 찾아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마탑주가 등장하는 건 이전에 자기 자식이 문제를 일으킨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이번에도 그 정도의 일이 아닌가 생각할 뿐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알리러 왔네.”

    “이전에 내 자식의 부하를 죽인 것보다 더 중요한 건가?”

    공작이 가볍게 묻자,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아론이라는 녀석이 흑암도에 방문했었네.”

    “그건 보고로 받아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군.”

    “당돌한 녀석이었어. 영리하게 꾀를 써서 나에게 접촉하더니 대뜸 거래를 요구하더군.”

    “하하! 그 녀석은 원래 그런 놈이지. 그래서, 무엇을 달라고 했었나?”

    “해주의 술식이 적힌 책을 달라고 했네.”

    “그걸 줬고?”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녀석이군.’

    공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탑주는 절대 어리숙한 녀석이 아니었다. 대충 말로 구워삶는다고 거래에 응할 자가 아니라는 건 공작이 잘 알고 있었다.

    ‘자기에게 현시점에서 필요한 게 뭔지 알고, 그걸 얻어낼 능력이 출중한 녀석이다.’

    그래서 공작은 아론의 행보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만 준 건 아니네. 나는 녀석에게 목숨을 빚졌으니까. 내 비전 마법서도 같이 주었지.”

    “……방금 뭐라고 했나?”

    “비전 마법서를 줬다고 했네만.”

    이전까지의 이야기에 공작은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 마법, 얼마 전에 완성시킨 것 아니었나?”

    “그랬었지.”

    공작은 마탑주가 어떤 노고를 기울여서 비전 마법서를 작성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선뜻 아론에게 주었다니. 마탑주의 행동은 꽤나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군. 자네가 그걸 줬다는 게 알려진다면, 우리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 관여했다는 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뭘 지지까지야. 나는 그저 이 대륙에서 기생하고 있는 질 나쁜 흑마법사 단체를 녀석이 처리한다길래 도움을 준 걸세.”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공작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탑주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무언가 아론과 더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마탑주는 거기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론을 위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공작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나쁜 일은 아니니 말이지.’

    오히려 반가워해야 할 일이었다.

    아론이 흑암도의 마탑주와 만나 성공적으로 협상을 이끌어 내다니. 이는 아론의 입지가 더욱 굳어지는 셈이 되었다.

    ‘다른 녀석들도 자극을 좀 받겠군.’

    과연 후계자 경쟁에 참여한 나머지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공작은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

    아론은 흑암도를 떠나 무사히 할리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이웨카 길드로 향했다.

    “아론 님!”

    길드에 들어서자 자신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흑암도에 아론 혼자 갔었고, 거기 가 있는 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으니 라엘을 비롯한 사람들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또 큰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가슴 졸였습니다.”

    켄트가 아론에게 말했다.

    그런 그의 걱정은 일리가 있었다.

    아론은 항상 자신의 능력에서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는 문제를 계속 해결해 왔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숨을 계속 배팅해 왔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간담이 서늘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군. 그래도 이번에도 별일은 없었어.”

    아론은 그렇게 얘기하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정말 그런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셀린이 아론에게 물었다.

    “좀 길 텐데, 괜찮겠어?”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흑암도에서 겪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풀어주었다.

    마탑주를 만난 일이며, 그의 압도적이었던 힘, 그리고 바스티안의 공격, 마탑주와 합세해서 그를 물리친 이야기 등등을 말했다.

    “아니, 그거 별일이 없었던 게 아니잖아요?”

    켄트가 그리 말했고, 라엘도 동의해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봐봐.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별일이 아닌 거지.”

    아론은 웃으면서 말했다.

    동시에 문득 지구에서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의 그는 항상 혼자였다.

    던전 탐사나 토벌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었다.

    길드의 동료? 당연히 사무적인 관계였고, 일이 끝나면 따로 연락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곳에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존재들이 있었다.

    아론은 이들과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그걸 위해서 살고 싶었다.

    ‘그러려먼 나를 노리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처리해야겠지.’

    지금 눈앞에 들이닥친 건 둘째 러셀과 그가 이끄는 단체인 테네브라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아이젠도 여전히 건재한 힘을 과시했다.

    또, 자신의 몸을 좀먹고 있는 마나 중독도 꾸준히 치료해야 했다.

    아론은 차근차근 문제들을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일단 이야기는 다 풀었고. 마탑주에게서 받은 해주의 술식부터 한번 써봐야겠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론은 이번에 흑암도를 다녀오면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그가 간 목적은 테네브라와의 다툼을 앞두고 해주의 술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부가적인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가장 예상외의 물건은 당연히 칠검 중 하나인 쿠베라 소드였다.

    흑암도에 가서 마탑주만 만날 생각을 했지, 바스티안이 직접 검을 들고 그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래도 녀석을 해치웠고, 검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쿠베라 소드는 아론이 입은 망토의 아공간 속에서 추출기에 꽂힌 상태로 있었다.

    원래라면 드워프 장인에게 재료 추출을 맡겨야 할 정도로 칠검은 고급품이었다. 하지만 헤핌이 만들어 준 추출기 덕분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칠검을 온전하게 녹일 수 있었다.

    추출이 끝나고 펜던트의 세 번째 빈자리에 넣게 된다면 아론에게 큰 전력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쿠브도 쿠베라 소드의 영향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어떤 원리에서인지는 몰라도 쿠브가 검의 마나를 흡수하고 강해져 있었다.

    그 덕에 이제는 쿠브로부터 마나를 공급받을 수 있었고, 더욱 강해진 대지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론은 그것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해주의 술식이 더 중요했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부터 사용하기로 했다.

    아론은 해주의 술식이 적힌 책을 꺼냈다.

    마탑주가 말한 바에 따르면, 마나를 이용해서 이 책에 적힌 주문을 추출해 몸에 각인하는 형태로 적용할 수 있다고 했었다.

    별도의 수련 기간이 필요 없다는 점은 아론에게 큰 이점이었다. 만약 수련이 필요했더라면 그 과정 중에 흑마법사 녀석들의 습격을 받으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방식은 딱 술식이 적힌 정도로만 적용되었고,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 책에 적힌 주문의 힘이 너무 강력할 경우엔 의식을 잃거나 심각하면 목숨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론은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켄트를 대동했다.

    “후우.”

    아론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그럼 시작할게.”

    “네.”

    켄트에게 알리고는 책을 들었다.

    아론은 마나를 책에 불어 넣었다. 그러자 책이 빛나기 시작했다.

    사르르륵!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책 속에서 글자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아론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이내 글자들은 아론의 몸으로 하나둘 들어갔다.

    “으윽!”

    글자가 들어올 때마다 아론의 몸에 고통이 전해졌다. 예상한 것보다 꽤 큰 통증이었다.

    ‘분명 설명은 들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술식의 작성자에 마나 크기에 따라서 고통의 세기가 다르다고 했는데, 확실히 마탑주 정도 되는 사람이 쓴 술식이라 그런지 강력했다.

    아론은 자신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켄트에게 치료 마법을 부탁했다.

    술식을 흡수하는 과정은 대략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작업을 끝내자 아론은 탈진 상태가 되었고, 옆에서 봐주던 켄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론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셀린을 불렀다.

    그가 흑암도로 떠나기 전에, 셀린에게 테네브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부탁을 해 뒀었다. 흑암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든 테네브라를 상대하러 갈 수 있도록 해두고 싶었다.

    ‘녀석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단 내가 가서 처리하는 게 낫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셀린. 테네브라 녀석들에 대한 조사는 다 끝냈지?”

    “물론입니다. 지금 이야기해 드릴까요?”

    셀린의 대답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해본 결과, 테네브라는 마다바드의 서쪽 지역에 거처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그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자주 관찰된다는 정보를 보면 그렇네요.”

    “그래도 마다바드는 규모가 작은 도시가 아닌데, 용케 거기서 일을 벌이네.”

    “테네브라라는 이름을 직접 쓰진 않지만, 대외적으로는 종교 단체처럼 보이도록 위장해서 활동을 하는 모양입니다.”

    “종교 단체라.”

    아론은 그들의 방식이 이해가 갔다. 옛날 역사이긴 하지만, 흑마법의 토벌에 앞장섰던 곳이 에드먼스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 혈육이 자신의 영지 안에서 흑마법 단체를 운용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종교 단체인 척하는 것이었다.

    “러셀이 테네브라와 접점이 있다는 증거는 혹시 발견할 수 있었나?”

    “그쪽도 거기에 대해선 철저하게 대비해 두었습니다. 그분이 테네브라의 수장이라는 증거는 찾기 어렵더군요.”

    “하긴, 그렇겠지.”

    그 증거만 잡을 수 있다면 러셀을 금방 끌어내릴 수 있었다.

    마탑주를 비롯한 흑암도의 흑마법사들과는 다르게, 테네브라의 녀석들은 생체 병기를 만들거나 저주 등의 금지된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이 그곳의 수장이라는 게 밝혀지면 공작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공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해.’

    러셀도 바보는 아니기에 그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녀석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지?”

    “300명은 넘어갈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꽤 수가 많네?”

    “확인된 숫자만 이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비밀리에 활동하는 단체이다 보니…….”

    “또, 놈들의 실력은?”

    “말단 흑마법사라 하더라도 4서클 정도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대부분 5, 6서클 정도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야? 러셀이 정말 이 악물고 긁어모았나 보네.”

    아론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이상하기도 했다.

    저 정도 수에 이만한 실력이면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러셀의 밑에서 일하는 에드먼스의 정식 마법사들도 있을 터였다.

    녀석들은 알면서도 쉬쉬하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러셀이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던가.

    ‘부담되는 규모이긴 하네.’

    아론이 단신으로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아론에게는 마탑주로부터 받은 비전 마법서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게 비장의 한 발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테네브라의 소속 마법사들은 모두 흑마력을 사용하는 흑마법사들이었다. 이 비전 마법서의 쇼크웨이브 마법을 익힌다면 실력 없는 녀석들을 전부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에드먼스 러셀이 본가로 호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언제 불려 갔어?”

    “아론님이 흑암도를 나온 날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최근이네.”

    아론은 굳이 셀린에게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왜 러셀이 불려갔는지 알 것 같았으니 말이다.

    아론이 마탑주에게서 들은 내용이 있었다. 세간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에드먼스 가문과 흑암도의 마탑은 서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탑과 공작가 사이에는 몇 가지 조건을 걸고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흑암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기적으로 공작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흑암도에서 내가 마탑주를 만나 해주 술식을 얻었다는 것도 알려졌겠지.’

    아론은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했다. 과연 좋아했을까, 아니면 당연하게 여겼을까.

    그래도 확실한 점은 공작이 그걸 빌미로 나머지 아이들에게 경쟁을 부추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아론이 이런 성취를 얻었으니, 너희는 더 뛰어난 무언가를 얻어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알려줘서 고맙다. 그런데 러셀의 동향은 따로 물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지?”

    “테네브라를 조사할 때부터 에드먼스 러셀만을 추적하는 정보원을 심어 두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쉽지 않을 텐데.”

    “아론 님 말씀대로 어려운 상대였습니다. 그래도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행적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셀린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아론은 저 정도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론은 자신이 에드먼스의 자식이었으니까, 그 자제들을 추적한다는 건 어려운 일임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지금 마다바드에 러셀이 없는 건 확실하겠군.”

    “그렇습니다.”

    아론은 지금이 테네브라를 상대할 좋은 기회라는 판단이 들었다. 녀석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난장을 부린다면 증거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러셀은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 뒤져봐도 증거가 안 나올 수 있지.’

    테네브라를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잘라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계속해서 녀석을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뒤가 잡힐 게 분명했다.

    ‘옛날에 케빈에 나한테 보여준 적개심은 귀여운 수준이었지. 하지만 러셀은 위험하다.’

    이번 기회에 러셀을 처리해 버릴 수만 있다면 가문 내에서의 안전은 크게 확보할 수 있었다.

    “혹시 아론 님…….”

    옆에서 같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켄트가 입을 열었다.

    “테네브라를 치러 가실 생각인 겁니까?”

    “넌 나를 잘 알고 있구나.”

    그의 물음에 아론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아론님…….”

    켄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론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말릴 방법은 없었다.

    “이번에도 무언가 또 준비해 놓으신 게 있으신가요?”

    “해주의 술식을 각인시킨 것만으론 불안해서 그래?”

    “아론 님도 인간이니까요.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걸요.”

    “걱정하지 마. 난 그렇게 앞뒤도 안 보고 무식하게 달리는 타입이 아닌 건 알잖아?”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망토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그건……?”

    “흑암도의 마탑주에게서 받은 비전 마법서다.”

    “비전 마법서라고요?”

    “그래. 이것만 제대로 익히면 테네브라의 잔챙이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지.”

    “아니, 아론 님. 그건 또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켄트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걸 본 셀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직 완벽히 준비된 건 아니야. 일단 오늘부터 이 비전 마법서를 익히기 위해서 수련에 들어갈 거야. 한 3주 정도 걸릴 것 같군.”

    3주.

    아론은 그 기간 동안 비전 마법서를 익히고, 테네브라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 * *

    아론은 그 후로 비전 마법서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일과는 식사와 수면을 제외하고는 수련장에 박혀서 마법을 연습했다.

    대련 상대를 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익히고자 하는 쇼크웨이브 마법은 흑마력에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꼬박 2주가 흘렀다.

    오늘도 아론은 비전 마법을 수련하기 위해 수련장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검은색 마정석들. 이것들이 아론의 수련을 도와주는 녀석들이었다.

    이 마정석들은 일반 마정석과 다르게 흑마력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대륙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설령 에드먼스 가문의 위세를 빌려도 구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론은 별 수고를 들이지 않고 이 마정석을 얻을 수 있었다.

    흑암도를 떠나기 전, 마탑주가 마법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고 이 마정석들을 넉넉히 챙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눈을 감고, 비전 마법서에 적힌 술식을 외우기 시작했다.

    휘오오-!

    그러자 아론의 주위에서 마나가 들썩였다. 이윽고 마나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아론을 중심으로 회전하더니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마정석에서 흑마력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마력석이 빛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빛을 띠던 마정석은 회색으로 바뀌었다. 아론이 시전한 쇼크웨이브 마법이 성공적으로 먹혔다는 증거였다.

    아론의 앞에 있는 것들이 마정석이 아닌 흑마법사였다면 당분간 마법을 쓸 수 없는 일반인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론은 결과물들을 확인하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테네브라의 잔챙이 마법사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한 성능이야.’

    짝짝짝!

    그때, 수련장에 박수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이곳에 온 켄트가 조용히 아론의 마법을 보다가 감탄하여 나온 표현이었다.

    “어때?”

    “대단하십니다.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네요.”

    “칭찬이지?”

    “물론이죠. 저는 아론 님이 제 적이 아닌 것에 아직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물음에 켄트가 대답했다.

    켄트는 아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비전 마법을 2주 만에 성공적으로 익힐 줄은 몰랐었다.

    “혹시 셀린이 러셀과 관련된 정보를 말한 건 없었나?”

    “새로 들어온 내용은 없던 거 같던데요.”

    “그래? 그럼 아직 공작가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구나.”

    아론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러셀이 예상한 것보다 일찍 마다바드로 돌아가게 된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비전 마법도 무사히 익혔고, 이제 테네브라를 처리하러 가야겠어.”

    “아론 님. 혹시 어떤 방법으로 상대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상대는 300명이 넘는 집단이고, 저희는 다 모아도 한 자릿수인데 말입니다.”

    켄트는 걱정이 되어서 아론에게 물어보았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 2주 동안 혼자서 수련하면서 여러 방법을 구상해 뒀었거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일단 나랑 너만 마다바드로 갈 것 같다.”

    “네? 라엘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아론 님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어쩔 수 없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라엘은 걱정이 되어서 아론을 따라오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이전에 흑암도를 갈 때도 아론이 혼자서 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따라오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되게 토라질 것 같긴 한데…….’

    아론은 라엘을 잘 구슬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

    마다바드 서부에 위치한 도시, 델프. 아론과 켄트는 할로움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 지역은 에드먼스의 혈육인 러셀이 관리하는 곳인 만큼 정갈하고 체계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저기가 테네브라의 거처겠군.”

    아론이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교회처럼 보이는걸요.”

    켄트가 아론이 가리킨 방향을 보며 말했다.

    거기에는 신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도 큰 규모의 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녀석들은 바하 교단의 이름을 빌려서 대외적으로는 종교 단체 행세를 하고 있지.”

    하지만 저곳은 실상 생체 골렘을 만드는 등의 인체 실험을 일삼는 흑마법사들의 단체였다.

    “쓰레기나 다름없네요.”

    켄트가 말했다. 그도 아론에게서 머랭 영지의 일을 들었기에 녀석들의 악행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 성인에게 그런 짓을 해도 비난받을 행위인데, 수도원에서 키우는 아이들에게 비인도적인 짓을 할 줄이야.

    “동감이다.”

    아론이 켄트의 말에 대답했다.

    아론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녀석들을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감정이 앞서면 그르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에드먼스 러셀이 이끄는 흑마법사 단체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들어간다면 된통 당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단순히 기도를 드리러 온 민간인들도 섞여 있으니 조심해야 해.’

    만약 지금 전투가 벌어진다면 아수라장이 될지도 몰랐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녀석들을 들쑤실 거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설명하기엔 시간이 없어. 조금만 기다려 봐. 그러면 알게 될 테니까.”

    켄트는 답답하긴 했지만 아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틀린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다그닥다그닥!

    잠시 후, 마차 여러 대가 멀리서 오는 것이 보였다.

    “어…… 저건?”

    켄트는 마차를 보고 반응했다.

    마차에는 메도우드 왕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왕실의 마차가 왜 이곳에 온 겁니까?”

    켄트가 놀라서 물었다.

    여기가 수도면 몰라도, 왕실 마차를 다른 도시에서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아론은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

    “그래. 내가 부른 거야.”

    “예? 혹시 이게 아론 님이 생각하셨던 계획인 겁니까?”

    켄트의 물음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테네브라를 아론이 원하는 만큼 들쑤시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바로 왕실 조사단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메도우드 왕국은 정통 마법이 주류였고 흑마법은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이었다. 그래서 흑마법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무조건 왕실에서 조사단을 보냈다.

    영지에서도 단속을 하긴 하지만, 이곳은 러셀의 영역이었다. 정보를 흘린다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론은 곧장 왕실에 마다바드에 수상한 흑마법 현상이 관찰된다고 정보를 흘렸었다. 그것도 4왕자 쪽 사람에게 말이다.

    ‘그라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지.’

    아론은 자신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기념으로 열린 연회를 떠올렸다.

    그때 4왕자도 왔었고, 러셀에게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아마 호시탐탐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다.’

    그렇게 러셀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혹할 만한 정보를 던져준 결과, 이렇게 빠른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왕실 조사단을 곧장 보내버린 것이었다.

    4왕자에겐 마다바드에 관련된 이야기가 뜬소문이라고 해도 강한 유혹이었을 터였다. 흑마법사 단체를 잡는 건 큰 공적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에드먼스 러셀이 관리하고 있는 영지에서 흑마법 단체가 암약하고 있다니. 이는 4왕자에게 있어서 복수를 하면서도 좀 더 큰 공을 세울 수도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론 님. 그냥 에드먼스 본가의 조사단을 이용해도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왕실 소속 마법사들은 실력도 없으면서, 왕실에 속해 있다는 권위 하나만으로 양아치 짓을 일삼는 녀석들인데요.”

    “그래도 왕가인데 평가가 신랄하구나.”

    “사실인걸요, 뭐.”

    “그래서 녀석들을 부른 거야.”

    “아…….”

    “테네브라의 녀석들을 처리하겠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게 이득이 되어야 하는 목적이야. 그건 이해하지?”

    “그렇죠.”

    “그런데 거기에 에드먼스 소속의 조사단이 오면 내 마음대로 일을 주무르기가 힘들어. 그들은 본격적으로 나설 테니 말이야.”

    “설마, 아론 님…….”

    켄트는 괜시리 불안해졌다.

    특히 ‘주무른다’는 표현이 걸렸다. 아론이 왕실 조사단을 이용해 좋지 못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면 우리는 왕실 조사단이 저 안으로 들어가서 헤집는 동안에 일을 벌이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조사를 시작하는 걸 기다리자고.”

    “알겠습니다.”

    켄트는 아론이 시키는 대로 조용히 대기했다.

    다그닥다그닥!

    왕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론이 있는 곳을 지날 무렵,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어? 왜 갑자기 멈추는 거지?”

    켄트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론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수행원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서 조사단장이 뭉그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왕실 소속 특유의 거만한 모습이 만연해 있었다.

    조사단장의 시선이 아론과 켄트에게 향했다.

    아론은 공작가의 자식이었고 켄트 역시 귀족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의태를 한 상황이었기에 신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아론은 조사단장을 향해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자 켄트도 눈치 빠르게 아론을 따라 했다.

    “흠. 나는 왕실에서 파견된 조사단장 디아스타드 테르크라고 한다.”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는 이곳에 흑마법 단체가 있다는 정보를 받고 조사하러 왔다.”

    조사단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론을 흘겨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높은 서클 반응이 관측되어서 말이야.”

    조사단장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아티팩트군.’

    마나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아티팩트였다.

    “이 도구는 주변에 있는 마나 반응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강하게 기운을 내뿜는 걸 보니…….”

    조사단장은 아론을 노려보았다.

    “6서클 정도 되는군. 이런 변방 도시에 어째서 이런 수준의 마법사가 있는 거지? 혹시 정체를 숨긴 흑마법사가 아닌가?”

    역시 왕실 사람 아니랄까 봐.

    초면에 만난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대응하고 있었다.

    “조사를 좀 해봐야겠다.”

    “이렇게 나오시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텐데요.”

    아론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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