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22/40)

Chapter 2

아론은 라둔 왕국에 정보원을 보낸 이후로 느긋하게 기다렸다.

애초에 이웨카 길드는 거기까지 정보망을 구축해 놓지 않았었다. 이용할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라돈 왕국과 관련해서는 시간이 걸리겠거니 생각하며 여유를 가지고 보고를 기다렸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셀린이 아론에게 보고를 하러 왔다.

“아론 님. 라둔에 정보원들을 무사히 보냈고, 그들로부터 조사한 내용이 도착하였습니다.”

“예상보다 빠른데?”

“마침 라둔과 가까운 도시에서 임무를 하던 정보원들이 있길래 그들을 보냈습니다.”

셀린은 부연 설명을 마친 뒤에 본격적인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라둔 왕국이 사실상 아이젠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건 알고 계시죠?”

“그건 알고 있지.”

그녀가 설명한 것처럼 라둔은 명목적으로는 왕국이었지만 사실 아이젠의 휘하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땅 자체는 영양가가 없었기에 아이젠이 직접 지배하지 않고 속국이라 할 수 있는 미묘한 관계를 유지시켰다.

그러한 관계는 라둔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라둔은 대부분의 지형이 사막이었기에 농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젠 측에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그 대가를 받아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아론도 아는 내용이었다.

“아이젠과 이것저것 주고받는 관계가 되면서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는 상단들의 힘이 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라둔은 노동력을 대가로 돈만 받아 오고 생산품은 부족했으니 그러한 방식으로 무역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라둔의 왕권보다 상단 측의 권력이 상당히 강해졌지요. 코뱃 상단은 약 1년 전부터 그러한 대열에 참여해서 세력을 불려가는 중입니다.”

“잠깐만.”

아론은 설명을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상단이란 건 기본적으로 신용 사업이야. 신뢰가 없으면 활동이 불가능하지. 아무리 뒷배가 있다고 해도 1년 만에 거기까지 성장하는 게 가능해?”

“옳으신 지적입니다.”

셀린은 거기에 맞장구치며 아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그 부분이 이상해서 더 조사를 해봤습니다. 알아보니 코뱃 상단은 아이젠 왕실과 직접 거래를 트기 시작했더군요. 그 덕에 1년 만에 큰 성장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신생 상단이 아이젠 왕실과 거래를 트고, 그걸 계기로 급성장을 했다고?”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아무리 봐도 아이젠 측에서 작정하고 밀어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코뱃 길드는 다른 상단의 영역도 위협하면서 주요 상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경쟁하는 상단의 행수들을 암살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추측?”

“네. 행수들의 사인이 모두 심장마비였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독은 검출되지 않아서 물증은 없는 상황입니다.”

“심증만 가지고 다른 상단들이 들고 일어나지는 못하겠군.”

나머지 상단들은 코뱃 상단이 성장하는 걸 그저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녀석들에게 딴지를 걸고 나섰다간 언제 자기들도 먼저 가버린 행수들처럼 당해버릴지 알 수 없었다.

“흐음. 전원의 사인이 심장마비라…….”

아론은 머릿속에서 흘러 다니는 퍼즐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머랭 영지에서의 생체 골렘 연구. 그리고 경쟁 상단 행수의 심장마비.

‘필시 흑마법과 관련이 있겠군.’

아론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애초에 에드먼스 가문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생체 골렘을 만들거나 저주와 연관된 마법을 연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단 취급을 받는 흑마법사들이라면 충분히 이런 짓이 가능했다.

“자세하게 보고해 줘서 고마워.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너는 여기에 남아서 길드 운영을 맡아줘.”

“제가 동행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라엘이랑 켄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너 없으면 이 길드가 안 돌아가잖아?”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아론은 라둔 왕국으로 가기 위해서 본격적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아론은 계획을 세운 다음 날 라엘과 켄트를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워프 게이트가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로 향했다.

이번 여행은 이동할 거리가 꽤 길었다.

우선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아이젠의 국경 근처 도시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다음엔 다시 마차를 타고 라둔 왕국의 근처에 있는 도시인 티라에 가야 했다. 아이젠에는 워프 게이트가 없었으므로 이렇게 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 후, 워프 게이트가 있는 도시에 도착한 아론 일행.

아론은 마탑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서 확인했다.

[키튼]

기특하게도 로안이 새로운 신분증을 준비해서 아론에게 줬었다. 그가 준비한 나름의 깜짝 선물인 셈이었다.

이전에도 아론의 부탁으로 로안이 만들어 준 신분증이 있었는데, 그걸 계속 이용하고 다니면 언젠가 꼬리가 밟힐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주기적으로 신분증을 세탁해 주면 그런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게다가 아론에게는 외형을 바꿔주는 목걸이가 있었으니, 웬만한 추적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로안은 눈치가 빨라서 좋단 말이야.’

그는 강자에게 잘 보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로안이 자신에게 어필하는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그걸 옆에서 본 켄트가 물어보았다.

“아니, 그냥. 이 신분증을 보니까 갑자기 로안이 생각나서 말이야. 참 재밌는 녀석인 거 같아서.”

“아아. 좀 특이한 분이시긴 하죠.”

아론은 갈 길이 멀었기에 잡담은 그 정도로 하고 마탑 안으로 들어가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다.

***

아론 일행은 라둔 왕국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인 티라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기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곳이네요.”

“동감이야.”

하늘에선 뜨거운 태양이 가감 없이 아론 일행을 내리쬐고 있었다. 습하진 않았지만 뜨거운 공기가 계속해서 그들을 때렸다.

이곳은 라둔 왕국과 아이젠 왕국 사이에 위치한 도시인 만큼 사막을 보러 온 여행객들이 다수 보였다.

물론 여행객뿐만이 아니라 라둔 출신임을 드러내는 특이한 복장을 입은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얼른 이동하자.”

하지만 아론은 이곳에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주위 경관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곧바로 상인 길드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가 제일 먼저 여기에 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일단 라둔 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긴 사막을 횡단해야 했었다.

하지만 아론 같은 사람들은 이곳의 길을 몰랐었기에 무턱대고 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런 초행자들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길잡이였다. 아론은 그들을 고용하기 위해 상인 길드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하게 사람이 적네.’

평소와 다르게 이곳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라면 라둔과 아이젠을 오고 가는 상인이며 길잡이들이 많아야 했는데 말이다.

‘일단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할까.’

아론은 그나마 사람이 많이 있는 길드 건물에 들어가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라둔으로 가는 길잡이가 있습니까?”

“총 세 명입니까?”

“예.”

“으음. 그 인원으로는 길잡이를 구하기 힘들 겁니다.”

직원은 난색을 표하며 말해 주었다.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한 일주일 전부터 사막에 몬스터의 숫자가 이상할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기에 사막을 건너려는 길잡이는 많이 없지요.”

‘갑자기 몬스터가 늘어났다고?’

아론은 그 점이 수상하게 여겨졌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직원은 어느 한 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있는 길잡이들은 지금 전부 사막으로 나간 상태고, 남은 녀석들은 보시다시피 겁쟁이들뿐입니다. 저들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람들 아니면 일을 안 맡으려고 하지요.”

“그렇습니까.”

직원은 아론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론 일행을 떨쳐내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갑자기 사막에서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국에 고작 세 명을 길잡이에게 소개시켜줘 봤자 욕만 들을 뿐이었다.

“위험해서 못 가는 거라면 저희들이 실력을 입증하면 되는 겁니까?”

“예?”

“안전하다는 보장만 있으면 사막을 횡단할 길잡이는 얼마든지 있는 거 아닙니까?”

아론이 그렇게 나오자 직원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못해도 두 명 이상의 5서클 급 기사가 필요합니다. 설령 최소한의 인원을 갖춰도 사막 횡단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직원은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아론은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5서클 마법을 하나 보여주고 실력을 인증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벅저벅.

그때, 아론을 향해 누군가가 걸어왔다.

아론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직원은 갑자기 그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의 첫인상은 부티가 흐르는 인상 좋은 노신사였다.

“안녕하십니까. 들어보니 곤란한 일을 겪고 계신 거 같은데.”

노신사는 아론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예. 라둔 왕국으로 가고 싶은데 아직 길잡이를 못 구해서요.”

“그럼 저랑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쪽이랑요……?”

아론은 노신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리가르드. 변변찮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내일 사막을 횡단할 예정인데, 적당한 돈만 지불해 주신다면 같이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길잡이와 호위 모두 다 있으니 몸만 오시면 됩니다.”

노신사의 제안은 아론에게 전혀 나쁜 것이 아니었다.

* * *

노신사의 그 말에 상단 직원은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들, 운이 엄청 좋네요. 리가르드 님은 라둔 왕국에서 알아주는 거상이십니다. 솔직히 그 어떤 길잡이나 호위보다도 믿음직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 자가 리가르드였군.’

아론도 얼굴을 모른다 뿐이지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출발 전에 이웨카 길드를 통해 필요한 정보는 대충 습득해 뒀었다.

지금 아론의 앞에 서 있는 노신사가 리가르드 상단의 주인인 키리스 리가르드였다.

보고에 의하면 라둔 왕국 출신 중에서 몇 안 되는 됨됨이가 된 자였다.

“이보게. 이 늙은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건 알지만, 너무 과해도 좋지 않네.”

리가르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합류하겠습니다.”

아론은 그에게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하하, 돈을 받겠다는 건 농담입니다. 그쪽은 멀리서 온 외지인인 것 같은데, 라둔 왕국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리가르드의 물음에 아론은 말보다는 상인패를 보여주었다.

“이건 헬브람 상단의 증표군요.”

“새로운 거래 루트를 뚫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아론의 말을 들은 순간 리가르드의 눈빛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잠깐 날카로움을 띄웠었다.

“헬브람 상단에서 오셨다면, 라둔에서 코뱃 상단이랑 거래를 하러 오신 겁니까? 참고로 저희와 코뱃은 경쟁 관계랍니다.”

리가르드는 그렇게 말하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완전히 진심은 아니었고, 반쯤 농담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아직 어떤 상단을 정해두고 가는 건 아닙니다. 단순히 조사하는 차원에서 나온 거라서요.”

아론은 그렇게 대답하며 리가르드의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그는 왜 리가르드가 직접 나서서 같이 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전에 로안이 라둔에 들른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때 코뱃 상단을 만났다는 건 나머지 상단들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메도우드 왕국의 복식을 한 자가 이곳에 나타나 라둔으로 가려고 하니, 리가르드는 이 틈을 이용해 곁에 두고 감시를 하는 겸 정보도 얻기 위해서 아론에게 동행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확실히 연륜이 있구만.’

능구렁이 같다. 그게 아론이 평가하는 리가르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론에게 그 제안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리가르드의 상단에 얹혀 가면 빠르고 안전하게 사막을 건널 수 있었고, 가는 길에 코뱃 상단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론은 리가르드를 향해 말했다.

“물론이지요. 나중에 헬브람 백작가로 돌아가실 때 저희 상단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좀 전해 주십시오.”

“그 부분은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껄껄 웃어댔다.

***

그날 아론 일행은 티라에서 묵고, 다음날 리가르드의 상단 행렬에 합류해서 도시를 떠났다.

아무래도 사막을 횡단해야 하다 보니 이곳의 이동 수단은 말이 아닌 낙타였다.

수십 마리의 낙타들은 짐을 실은 채 사람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백 명이 넘는 호위병들이 그것을 지키면서 움직였다.

리가르도와 아론 일행은 낙타를 타고 이동했다.

다만 아론만 복장이 조금 독특했다. 다른 이들은 사막의 모래를 막기 위해 로브를 걸쳤지만, 아론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입으셔도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나란히 가던 리가르드가 아론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 망토가 바람도 막아주고 온도도 자동으로 조절해 주거든요.”

“그렇습니까? 그거, 상인으로서 좀 탐이 나는 물건이군요.”

리가르드는 눈을 번뜩이며 아론의 망토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거, 여분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게 파실 생각이 있으신지…….”

“안타깝게도 이건 하나뿐이고 팔 생각은 없습니다.”

“그거참 아쉽군요.”

아론의 거절에 리가르드는 그저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한편, 라엘과 켄트는 낙타를 탄 채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해보니 이 두 사람에게는 사막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지구에 살았던 아론은 사막을 실제로 보기도 했고, 사진으로도 충분히 접할 수 있었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사막이나 대양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흔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론은 바쁜 일이 끝나면 이들을 데리고 관광을 다니며 힐링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계속해서 사막을 이동했다. 하지만 가도 가도 사막만이 나올 뿐이었다. 그 끝없는 황금빛 일렁임에, 만약 혼자서 여기에 왔다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길잡이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군.’

초행자들이 한 번에 라둔 왕국으로 가는 것은 길잡이의 도움이 없다면 매우 힘들어 보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고,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야영을 준비했다.

호위병들은 야영지를 꾸림과 동시에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언제든 전투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잔뜩 날이 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래 사막에는 몬스터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론은 리가르드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예. 특히 최근에 들어서 출몰이 잦아졌습니다.”

리가르드는 어두운 안색을 한 채 대답했다.

“원래 라둔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사막은 날씨 말고는 별달리 위험한 요소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1년 전쯤인가요. 그때부터 몬스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리더니, 최근에는 녀석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1년 전이라…… 묘하게 코뱃 상단이 활동을 시작한 시기랑 겹치는 것 같은데요.”

아론의 그 말에 리가르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저희가 이렇게 보통의 상단보다 호위를 큰 규모로 꾸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리가르드는 열심히 일하는 호위병들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는 이번에 이동하는 도중에 100% 확률로 습격을 당할 겁니다.”

“……무슨 의미이십니까?”

“라둔으로 가는 대형 상단들은 공교롭게도 이 사막을 건널 때 항상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단, 코뱃 상단만 제외하고 말이지요.”

리가르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당신들을 사지로 데려온 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호위병이 이렇게나 많은걸요. 어지간한 습격이 아니고서야 큰 피해 없이 지나갈 겁니다.”

아론 역시 그의 말에 동감했다.

게다가 그는 그린데란트 산맥도 통과한 사람이었다. 몬스터가 나타나서 위협을 가하는 건 그리 큰 위험 요소도 아니었다.

‘……!’

그때였다.

아론은 자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느낀 감각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쿠브?’

쿠브가 어떤 위험을 감지한 모양인지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간이라 시야가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별다른 위험한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쿠브의 이런 감각은 틀린 적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론의 표정 변화를 읽은 리가르드가 걱정된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쿠브는 아론의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내려가 귀를 가져다 대었다.

쿠브의 감각이 아론에게도 전해졌다. 기운은 더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지상이 아니라 땅 밑이었어.’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곧 적이 나타날 겁니다! 아마 모래 밑에 숨어 있는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아론의 그 말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투 준비!”

리가르드가 그렇게 외치자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며 자신의 무기를 쥐었다.

“여기서부턴 제가 밥값을 하겠습니다.”

“예?”

“길잡이도 해 주시고 낙타도 빌려주셨으니까요.”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충분히 마나가 모이자 아론은 호흡법을 몇 번 반복한 뒤, 아래를 향해 전격 마법을 쏘았다.

파지직……!

전기는 그대로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 이내 모래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저 멀리에서 모래가 폭포처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호위병들이 솟아오른 몬스터들을 보고 소리쳤다. 단순히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마리가 공중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자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던 건가?’

키리스는 아론의 실력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혀 지친 모습도 보이지 않아.’

한 번에 커다란 마나를 방출하고 저렇게 먼 곳으로 전격을 쏘았는데도 아론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리가르드는 이자가 절대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툭! 투둑!

땅에 떨어진 몬스터의 시체를 확인해보니 그 정체는 샌드 웜이었다.

방금 아론의 마법으로 명을 달리한 녀석들의 수는 스무 마리가 넘었다. 모두 다 배를 뒤집고 뻗어 있는 상태였다.

“이거…… 놀랍군요.”

리가르드가 감탄했다.

그가 아론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할 때.

지지직!

갑자기 샌드 웜의 배가 죽 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윽고 샌드 웜의 뱃속에서 기괴한 몬스터들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저런 녀석들이 나타나는 것도 알고 대비하고 있었습니까?”

“아니. 애초에 이런 놈들이 나온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네.”

몇몇 호위병들은 출몰한 몬스터를 보고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생긴 것이 기괴했기 때문이었다.

몸통만 사람이지 팔과 다리는 각기 다른 몬스터의 것이 붙어 있는 녀석이며, 코브라의 몸통에 전갈의 꼬리를 달고 있는 녀석 등등. 기상천외한 외양을 자랑하는 몬스터들이 상단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키메라가 나타날 줄은 몰랐네.’

아론은 녀석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 *

키메라 역시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생체 골렘과 마찬가지로 흑마법의 산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생물들을 강제로 합성시켜서 새로운 개체로 탄생시킨 것을 통칭해 키메라라고 불렀다.

만든 사람의 악취미가 곁들여진 모양인지, 지금 꾸득꾸득 기어 나오고 있는 키메라는 비단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언데드도 합성한 개체가 있었다.

‘샌드 웜은 공격용이 아니라 단순히 키메라의 이동 수단이었군.’

아론은 당연히 샌드 웜이 습격하는 몬스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누구의 발상인지는 몰라도 참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저 멀리에 있는 샌드 웜의 배를 찢고 나온 몬스터에는 언데드도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정리되었다고 배웠는데 말이지.’

아론이 알고 있는 바로는 이렇게 대규모의 키메라와 언데드를 부리는 흑마법사가 나타난 적은 적어도 최근의 역사에는 없었다.

에드먼스 가문이 앞장서서 흑마법 집단을 토벌한 이후로 흑마법은 쇠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에 가능성은 두 개였다.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가 이제 활동을 시작했다든가, 아니면 흑마법에 특효를 보이는 촉진제가 있다든가.

아론은 후자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었다.

사막을 지날 때 대규모 상행은 몬스터의 습격을 피할 수 없지만, 유독 코뱃 상단만은 멀쩡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코뱃 상단은 아이젠과 관련이 높아 보였다.

아이젠은 비밀리에 인공 미티움을 만들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후자의 가능성이 더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아론은 코뱃 상단이 과연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우선 해야 할 일은 저 키메라와 언데드를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모두 수비 대형을 갖춰라!”

호위대장의 말에 호위병들은 리가르드와 아론 일행을 뒤에 두고 진형을 갖추었다.

챙! 챙!

그들은 무기를 부딪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단주님을 지켜야 한다!”

호위병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야, 충성심 한번 죽이네.’

아론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런 태도만으로도 상단주인 리가르드가 얼마나 인품이 괜찮은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하나의 샌드 웜이 담고 있던 몬스터의 수는 못 해도 열 마리가 넘었었다.

지금 모든 녀석들이 나왔으니 수백 마리가 이곳에 풀려 있는 셈이었다.

반면 이쪽의 호위병의 수는 백여 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불리한 판도임에도 불구하고 호위병들이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여주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웬만한 귀족의 기사단도 이 정도의 충성심을 보여주기란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이런 충성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리가르도라는 인물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전투에 끼어들면 오히려 더 큰 피해가 생길 수 있다.’

아론이 그들을 무시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저런 의지는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최대의 효율을 추구할 뿐이었다. 여기서는 자신이 나서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적인 차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단순한 샌드 웜이면 몰라도, 몬스터들의 수준에 비해 호위병들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여기서는 저희만 싸우겠습니다. 호위병들은 유사시에 사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론이 리가르도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호위대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저희는 리가르도 님도, 손님분들도 반드시 지켜드릴 겁니다!”

그런 의욕에 찬 반응이 오히려 아론에겐 한숨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용맹함은 좋지만, 또 그게 무식함과는 종이 한 장 차이거든.’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라엘과 켄트를 바라보았다. 아론의 의중을 알아차린 그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앗!

라엘이 몬스터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호위해야 할 손님이 대열에서 이탈해 버리니 병사들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저렇게 튀어 나가 버리면 지켜줄 방법이 없었다.

뻐어억!

하지만 라엘은 그들의 걱정을 호쾌하게 날려버렸다. 그녀가 마나가 담긴 주먹을 날리자 키메라 세 마리가 한순간에 명을 달리했다.

쐐애액!

4서클의 경지에 들어선 그녀는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윈드 커터가 같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콰드드득!

거기에 맞은 키메라들은 팔과 다리가 분리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키메라들도 그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갑자기 날아온 불청객을 없애기 위해 라엘을 향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콰카칵!

그러나 그 공격은 라엘의 근처에 펼쳐진 배리어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그것을 시전한 사람은 켄트였다.

콰앙!

덕분에 라엘은 오로지 공격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화르륵!

켄트도 간간히 공격 마법을 날리면서 키메라들을 처리해 주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본 호위병들은 감탄하면서 그걸 지켜보았다.

“저렇게 큰 몬스터 무리를 두 명이서…….”

상대 몬스터는 악명이 높은 키메라와 언데드들이었다.

아마 사막에서 다른 대형 상단들을 습격한 것도 저 녀석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위병들은 자신의 상단주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무기를 잡았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지켜야 할 손님 쪽에서 몬스터들을 너무 쉽게 처리해 버리니까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었다.

“보, 보고만 있을 건가!”

호위대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손님들이 저렇게 싸우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도 싸우자!”

그에 감화된 몇몇 호위병들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으어어억!”

“저, 저게 뭐야?”

호위병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쿠구구……!

동시에 사막 일대가 들썩였다. 호위병들은 영문을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저, 저거!”

호위병 하나가 손가락을 허공에 들었다. 거기에는 거대한 모래의 산이 천천히 치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파르르르!

이내 그것은 산이 아닌 사람의 상반신 형태를 갖추었다.

누가 봐도 그것의 정체는 모래 거인이었다.

후우웅-!

녀석은 거대한 손바닥을 키메라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내리쳤다.

콰아앙!

모래 거인이 손바닥을 내리치자 그 아래에 있던 수십 마리의 키메라들이 짓뭉개지고 말았다.

콰드득!

근처에 있던 녀석들도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살갗이 터져나갔다.

“대체 이건 누가……!”

호위병들은 기적과도 같은 이 일에 놀라서 소리쳤다.

모래 거인의 등 뒤에는 푸른색의 마나선이 보였다. 그거를 눈으로 쫓아서 시작이 된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모래 거인을 조종하는 사람은 아론이었다.

“얼마나 마나가 많은 거야?”

병사들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떻게 아론의 손에서 뻗어 나간 저 가느다란 선이 결과적으로 모래 거인을 만들어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놀라는 것은 아직 일렀다. 아론은 이것을 넘어서는 다음 수를 준비 중이었다.

파사사삭!

그 거대했던 모래 거인이 무너지면서 다시 땅으로 되돌아갔다.

‘조금 무리해서 시험해 봤는데, 괜찮은 거 같아.’

이곳은 사막이었다. 그리고 쿠브는 대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향상시켜주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이곳 사막은 쿠브의 힘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쿠브가 대지 속성을 지닌 이상 땅의 마나를 연결해서 쓰면 더 강화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땅은 밀도가 컸다. 반면 모래가 가득한 사막은 대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하나가 작았기에 그것을 마나로 연결하는 것이 더욱 쉬웠다.

‘아!’

그때, 아론은 저 많은 몬스터들을 한 번에 처리할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혼자서 할 수는 없었다.

“라엘! 미안한데 몬스터들을 좀 유인해 줄래?”

“알겠습니다!”

라엘이 몬스터들의 앞에 서면서 자신의 주먹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타앗!

그다음에 공중으로 힘차게 도약했다. 오른쪽 주먹에 마나가 최대한으로 모였을 때, 바닥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우우웅!

마나 충격이 전방으로 퍼져나갔다. 앞에 있던 몬스터들이 모두 그 충격에 이끌려 한 자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역시, 사냥은 몰이 사냥이지.’

라엘이 그렇게 준비를 해 놓는 동안, 아론은 쿠브와 함께 이 일대를 뒤틀어버리는 마법을 시전했다.

쿠구구……!

그러자 몬스터들이 모인 곳의 모래들이 강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거대한 모래 지옥이 되어 몬스터들을 빨아들였다.

토옹!

자칫 잘못하면 라엘도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아론은 돌벽을 튕겨서 그녀를 범위 바깥으로 빼내 주었다.

콰드득! 콰드득! 콰드득!

몬스터들이 모래 지옥 아래로 빨려 들어가자 서로 부딪히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모두 밑에 모이자 아론은 다시 한번 마법을 썼다.

쿠쿵!

일대가 진동했고 몬스터들의 살가죽이 짓눌려져서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꽈드드드득!

수백 마리가 일제히 토해내는 그 소리와 녀석들의 비명은 전투에 숙달된 호위병들도 소름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후우, 후우.”

아론은 큰 마법을 사용한 반동으로 힘이 부쳐서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 피륙이 터지는 소리나 괴성은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요가 끝났다는 소리 없는 증언이었다.

짝……. 짝짝…….

짝짝짝짝!

호위병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리가르도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론이 벌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거, 참……. 내가 당신에게 선심을 쓴 게 아니었군요. 오히려 내가 천운을 얻게 된 셈이네요.”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제 길잡이가 되어 주셨으니 퉁친 거죠.”

이 만큼의 몬스터를 해치웠으니 당분간 습격하는 녀석들은 없을 터였다.

병사들은 마저 야영 준비를 계속했다.

* * *

어느덧 야영 준비가 끝났고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병사들에게는 방금 전까지 대량의 몬스터들과 마주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비록 그들이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느꼈던 흥분 때문에 잠을 제대로 청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론은 편하게 잠을 잤다.

다음 날 해가 뜨자 상단은 다시 낙타와 짐을 이끌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제 대전투를 치렀지만 피해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더 이상 몬스터가 다가오는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몬스터가 없다면 이곳은 위험 요소가 없는 사막이었다.

유일한 위협 거리가 사라졌으니 상단은 안전하게 사막을 나아갈 수 있었다.

“저기…… 키튼 님?”

리가르도가 아론의 가명을 불렀다. 그는 이렇게 이동 중에 아론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저희 상단에서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리가르도는 적극적으로 아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가 성품이 아무리 인자하다고 해도 리가르도 역시 상인이었다. 아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아론에게 협상을 시도해야만 했다.

이런 인재는 놓치면 안 된다.

리가르도의 머릿속에선 계속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아론에게 권유해 보았지만, 아론은 헬브람 소속의 상인으로 남고 싶어 했다. 결국 리가르도는 권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아론은 포기할 때를 아는 그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코뱃 상단의 경쟁 상단주들이 모두 안 좋은 사고에 휘말렸다고 하는데…… 혹시 아시는 거 있습니까?”

어느덧 이야기는 코뱃 상단의 저주와 관련된 것으로 흘러갔다.

그 얘기가 나오자 리가르도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혹시 금기시되는 이야기였나?’

아론은 조심스럽게 리가르도의 얼굴을 살폈다.

“……내 아들도 거기에 휘말렸습니다. 다른 상단주들과 똑같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지요.”

담담한 말투로 말했지만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이런…… 그런 일이 있을 줄이야.’

일이 또 이렇게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론은 리가르도가 하는 말을 경청해서 듣기 시작했다.

“아들 녀석이 저한테 독립해서 혼자 상단을 꾸려보겠다고 하고 나간 게 몇 년 전이었습니다.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했지요.”

그는 아련한 눈빛을 한 채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다음번에 아들을 만났을 때, 녀석은 나름 중견 상단주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기뻤던지…….”

하지만 뒷말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리가르도는 조금 뜸을 들인 뒤에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둔 왕국에 코뱃 상단이 들어서고 녀석들과 핵심 품목이 겹치면서 경쟁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 녀석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거참……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계속해서 낙타를 탔다.

아론은 자식을 잃어본 슬픔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함부로 그를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가 많습니까?”

“꽤 됩니다. 코뱃 상단이 지난 1년간 성장하면서 부딪쳤던 경쟁자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중견 상단은 상단주의 역량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렇게 상단주가 급사해 버리면 자연스레 상단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코뱃 상단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끄는 리가르도 상단이나 다른 대형 상단과도 견줄 정도지요.”

하지만 코뱃 상단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녀석들은 신묘한 힘으로 사람을 말 그대로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이 죽고 나서 저는 코뱃 상단을 의심하고 녀석들을 좋게 보지 않았지요. 그런데 놈들이 알아서 저희가 다루는 영역을 침범하면서 경쟁을 걸어오더군요.”

그래서 리가르도는 그들과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다음에 죽는 상단주는 제가 될 수도 있겠군요.”

“거기도 참…… 흉흉한 곳이네요.”

아론이 그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어느새 라둔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둔은 사막에 위치한 국가답게 특이한 형태의 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론은 성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어우, 길기도 해라.”

“괜찮습니다. 저기는 일반 줄입니다. 저희는 다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리가르도 상단은 왕국 내에서 규모가 컸다. 그들의 인장이 찍힌 패는 적어도 라둔 내에서 왕실의 것만큼이나 귀하게 대우를 받았다.

그 결과 그들은 일반 검문소가 아니라 상단을 위해 만들어 둔 특별한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병사들은 리가르도를 알아보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론은 외국인이었지만 상단의 힘으로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쉽게 통과했군.’

아론은 검문소를 지나면서 생각했다.

라둔 왕국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리가르도와 헤어지고 자신은 맡은 일을 해야 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나도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리가르도는 아론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식사라도 같이하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아직 아론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의지를 접지 않은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여기서 할 일이 있는지라.”

“어쩔 수 없지요.”

리가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아론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뭡니까?”

“리가르도 상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증하는 패입니다.”

아론은 그 패를 유심히 보았다. 패에는 리가르도 상단을 나타내는 짐을 끌고 가는 늙은 낙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흔히 상단의 사람이 은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할 때 이런 걸 주고는 했다.

이게 있으면 대륙 어디에서든 상단의 지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꽤 괜찮은 사례의 표시였다.

“중요한 물품을 운반할 때 신분 위장용으로 쓰이는 패입니다”

“예? 이걸 왜 제게……?”

“아무래도 라둔에서는 헬브람 소속보단 우리 상단 쪽이라고 말하면서 이 패를 내미는 게 더 유용하고 편하지 않겠습니까?”

“아…….”

아론은 그 말을 이해했다.

리가르도는 아론이 평범한 상인이 아님을 알고는 좀 더 쉽게 위장할 수 있는 신분 패를 준 것이었다.

‘이걸 통이 크다고 해야 할지, 미래를 위해서 과감하게 투자하는 거라고 봐야 할지…….’

그래도 아론은 그의 결단력에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판단을 끝내고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이렇게 하는 건 이해가 되었다. 만약 자신이 리가르도와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사막에서 죽은 목숨이 되었을 터였다.

아론은 리가르도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그렇긴 한데, 여전히 이자는 내 정체를 모르지.’

그런데 자신이 속한 상단의 신분 패를 건네준다?

자칫 잘못하면 상단의 미래가 흔들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거를 아론에게 준다는 건, 그만큼 신뢰를 보이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말 새로운 거래를 트기 위해서 온 거라면, 나중에 우리 상단도 한번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꼭 그러겠습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아론은 멀어져가는 리가르도의 모습을 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나?’

아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보던 어둠 속의 시선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저 사람, 쫓기고 있어.’

아론은 불안했다. 이대로 놔두면 리가르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리가르도 상단주를 쫓는다.”

“예? 어째서요?”

두 사람은 아론의 결정이 의문스러웠다. 그야 갑자기 내린 것이니 당연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아주 미약하지만 누군가가 쫓아오는 느낌을 받았었어.”

처음에는 그게 자신을 노린 건 줄 알았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리가르도가 누군가에게 노려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 기운. 그때 수도원에서 보았던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아론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신들이 쫓아가 정체 모를 녀석을 잡길 원했다.

아론은 두 사람과 함께 리가르도가 돌아간 방향을 쫓아갔다.

***

흑색의 로브를 입은 남자는 커다란 저택을 응시하고 있었다.

튀는 복장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의식할 법도 하건만, 마치 그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었다.

스스슷!

그가 주문을 외니 몸이 붕 떴다. 그는 가볍게 저택의 담장을 넘어갔다.

입구에는 경비병이 서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도 역시 로브를 입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마치 어둠과 하나라도 된 것마냥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저택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키리스 리가르도의 방은 2층,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방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았다. 창가에 리가르도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본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스스슷!

사내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어느새 리가르도가 있는 방의 창문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리가르도도 그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남자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것 같은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파앗!

그러자 남자의 앞에 검은색 마법진이 서서히 그려졌다.

“잘 가라, 리가르도.”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츠츠츳…….

그때였다.

갑자기 마법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남자는 깜짝 놀랐다.

이는 누군가가 강제로 개입해서 마법을 방해한 게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땅에 있는 어느 소년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껏해야 10대 후반쯤 되었을까.

그 소년은 자신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현행범이 여기 있었네.”

* * *

아론의 등장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아론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누구야?’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남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저 녀석, 범상치가 않았다.

자신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자가 쓰고 있는 은신 마법은 7서클의 마법사라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절대 운이 좋아서 자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츠츠츠…….

남자는 땅에 내려왔다.

그러고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벌컥!

그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을 느꼈던 리가르도가 창문이 열어젖혔다.

“아, 아니?”

리가르도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자신의 저택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그 정체가 아론이라는 것에 놀랐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당신을 코뱃 상단의 저주에 걸리는 걸 막기 위해서 왔습니다.”

“예, 예?”

리가르도는 당황했다.

대체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론은 자신과 대화를 끝내고 허공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리가르도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분명 자신의 눈에는 아론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론은 마치 그 앞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리가르도 님! 여기에 아드님의 원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주길 원하십니까?”

아들을 죽인 원수!

리가르도는 그 말에 반응하였다.

그러자 그의 인자한 얼굴에 노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쉽게 저세상으로 보내주고 싶지는 않군요.”

리가르도는 아론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부디 생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녀석의 몸값은 얼마든지 쳐 드릴 테니까요!”

그의 처절한 외침을 들은 아론은 씩 웃었다.

“그 주문, 확실히 접수했습니다. 사실 저도 생포를 바랐습니다. 이 녀석한테서 알아볼 게 많거든요.”

아론은 그렇게 대답한 후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대체 무슨 깡으로…….’

남자는 자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흑마법을 배운 이후로 웬만한 일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감정이 발달했었다.

하지만 저 소년에게선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이 이 정도로 요동치는 건 위험했다. 평소라면 도망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깨어난 그의 생존 본능이 여기서 도망치면 죽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도망치는 건 안 된다.

그러면 기습뿐이었다.

사실 남자는 아론과 리가르도가 대화하는 그 잠깐의 틈을 노리고 아론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그려 뒀었다.

마침 아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히하하! 걸렸구나!”

남자는 그렇게 외치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아론의 밑에 있던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촤라라락!

칠흑의 사슬이 뻗어 나와 아론을 전 방향에서 덮치려고 했다.

마법사 간의 전투에서는 먼저 속박에 걸리면 마법을 못 쓰고 도망도 칠 수 없으니까 패배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승리를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스슥!

하지만 아론의 몸은 마치 블링크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시간 가속 마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빠져나온 것이었다.

남자가 당황해서 아론의 위치도 파악하기 전에, 그의 뒤편에서 강력한 마나 반응이 느껴졌다.

파지지직!

아론의 손에서 강력한 뇌전이 뻗어 나와 남자를 노렸다.

지잉!

그때, 남자의 등 뒤에 검은색 배리어가 펼쳐졌다. 그렇게 공격이 막히나 싶었다.

츠츠츳!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발밑에서 생겨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정체는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의 창이었다.

‘5서클 급의 공격 마법을 쓰면서, 동시에 같은 급의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그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 상대는 자신이 이길 수 없다고.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줄 건 내주고 도망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쿠당탕!

사내는 옆으로 몸을 던져 굴렀다. 그는 저택에 있는 숲을 통해 여기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콰앙!

동시에 아론이 쏜 전격과 얼음이 만나면서 허공에서 폭발했다.

아론은 남자가 도망을 간 방향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윽! 으윽!”

이내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숲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숲의 입구에 거미줄 같이 마나의 실이 엉켜 있었다.

‘이 무슨 괴물 같은!’

남자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자신과 마법으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또 언제 이걸 준비해 뒀단 말인가?

‘설마 한 번에 3개의 마법을 컨트롤한 건가?’

자신이 생각하고도 그건 말이 안 된다 싶었다.

빠악!

그러나 남자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론이 그의 턱에 주먹을 갈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아론은 리가르도에게 부탁해 저택의 지하실을 빌렸다. 그곳에 남자를 묶어 두고는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

아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의 눈에 보이는 건 여러 명의 사람이었다.

“몇 가지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남자는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자신의 몸은 묶여 있었다.

또, 이 소년의 태도로 보아하니 자신을 고문이라도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래 봬도 명색이 내가 흑마법사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자신의 정보를 밝혀도 되나?”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낮게 웃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에게 죽음과 고통은 전혀 위협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고통을 즐기는 변태 같은 자들도 더러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에게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말라비틀어진 오징어라도 짜면 물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아론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뭐하러 고문을 해? 어차피 네가 술술 불 텐데 말이야.”

아론의 하염없이 당당한 저 태도에 오히려 남자가 당황했다.

‘대체 뭘 하려고?’

아론은 천천히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우웅-

아론은 정신계 마법을 사용했다.

그가 기절한 사이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자살 마법은 미리 해제해 두었었다.

“으그극! 으그그극……!”

반응은 바로 왔다.

녀석은 마치 접신이라도 한 것마냥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이는 정신 마법에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마법이 먹힌 것 같자 아론은 천천히 질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 아니 너희는 누구냐?”

아론의 첫 번째 물음에 녀석은 떠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픽!

이내 허공으로 고개를 쳐들더니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흑마력을 숭상하는 테네브라.”

“……테네브라는 단체 이름인가?”

“그렇다.”

정신계 마법은 성공적으로 먹힌 모양이었다. 저게 거짓된 답변이 아니라면 아론은 이 녀석으로부터 꽤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테네브라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일단 아론은 녀석에게 더 물어보기로 했다.

“너희들은 코뱃 상단과 어떤 관계지?”

“코뱃 상단은 우리들에게 실험 재료와 그 결과물을 운반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무엇을 실험하고 있는데?”

“우리 테네브라가, 지금 실험 중인 것은, 인공, 미티움으로, 생체 골렘과, 키메라를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남자의 몸이 급격하게 떨렸고, 문장도 끊어져서 들렸다.

‘슬슬 정신계 마법에 대한 방어 작용이 펼쳐지고 있군.’

이는 마법사라면 본능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특히 실력이 있는 마법사일수록 별도의 방어 마법 없이도 정신 마법에 저항할 수 있었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비밀일수록 방어가 탄탄했다.

‘이 정도 질문에도 이런 반응이야?’

아론은 어쩌면 주동자를 알아내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론은 눈 한번 질끈 감고 녀석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만약 민감한 질문이면 녀석의 정신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리가르도 님이 생포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뭐, 정신은 날아갔어도 숨은 붙어 있으니까 생포 맞지 않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테네브라의 수장은…… 누구지?”

“그, 그분은…… 끼야아아악!”

부르르르!

녀석은 몸을 격심하게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그 반응에 아론은 결국 이 질문을 접어두기로 했다.

‘역시, 주동자를 물어보는 건 무리였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결국 녀석이 잠잠해 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남자는 겨우 고통에서 해방되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론은 고심 끝에 마지막 질문을 하기로 했다.

“테네브라의 본거지는 어디에 있지?”

이거는 주동자를 물어보는 것보다 조금은 약한 수준의 질문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끄르르…… 끄르르르……!”

부르르르!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질문도 대답을 못 하는 건가 싶었다.

“……마다…… 바드…….”

“……뭐?”

픽!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론의 뒤에서 지켜보던 라엘과 켄트는 남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먹었다.

아론의 고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때문이었다.

“마다바드…….”

“마다바드라면…….”

라엘과 켄트 둘 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론 역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마다바드.

에드먼스 가문의 둘째 형인 러셀 에드먼스가 소유하고 있는 영역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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