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5권
Chapter 1
부르르!
폴밴은 방금 반격으로 큰 피해를 받은 모양인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아론은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녀석이 방심하고 찌르는 공격으로 들어와서 다행이야.’
만약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면 이런 대처는 불가능했다. 아직 아론은 아공간을 여러 번 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륵.
아론은 폴밴으로부터 몸을 뗐다. 그러자 녀석의 몸에 박혔던 칼도 빠졌다.
털썩.
폴밴은 받치는 것이 사라지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크게 데미지를 입혔긴 하지만, 이 녀석은 생체 골렘이야. 놔두면 빠른 속도로 회복할 거다.’
아론은 쓰러진 녀석을 바라보며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했다.
‘기간츠를 잡을 때처럼 역으로 마나를 주입할까?’
이내 아론은 그 방법을 폐기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어려워 보였다.
먼저, 기간츠는 힘조차도 인공적으로 쌓은 거지만 폴밴의 육체는 기본적으로 수련을 통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폴밴은 생체 골렘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뒤바뀐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직 마법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쿠브에게 부탁해 통로를 막아달라고 했다.
쿠구구!
그러자 돌벽이 생성되면서 접근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 당분간 경비병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아론은 폴밴을 향해 팔을 뻗으며 점화 마법을 시전했다.
화르륵!
녀석의 온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흐아악!”
폴밴은 몸이 불타오르자 비명을 질러댔다.
화르르…….
아직 녀석의 몸에 남아 있는 오러 때문에 불길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꺼진 불은 다시 지피면 되는 일이었다. 아론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점화 마법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저항하던 오러도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다. 폴밴의 몸은 녹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폴밴의 비명은 더욱 커졌다.
“사, 살려! 살려주게!”
지금까지 괴성만 지르던 폴밴은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돌아온 건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아론은 녀석을 죽이기로 결정했으니 말이다.
“네가 이곳의 아이들에게 벌인 짓을 생각해봐.”
화르륵!
폴밴의 몸에 붙은 불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끄어억!”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리저리 바닥을 뒹굴었다. 하나 남은 팔은 힘차게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내가 죽으면 이 수도원의 녀석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아론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는 협박인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아론은 더욱 불의 화력을 높였다.
화르르르!
공격은 할 수 없었지만 생명력 하나는 끈질긴 녀석이었다. 아론은 펜던트의 마나까지 꺼내쓰고 나서야 녀석을 완전히 태워 버릴 수 있었다.
타닥, 타닥.
아론은 뼈만 남은 폴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죽으면 수도원에 큰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 말은 허풍이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건……?’
아론은 녀석의 뼈 사이에 있는 검은색 물질이 눈에 들어왔다. 폴밴의 살점은 다 타 버렸는데 뼈랑 같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은색 물질의 내부에는 핵이 있었고, 거기를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인공 미티움의 결정」
·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티움이 결정화된 것.
아론은 떠오른 상태창을 보고 놀랐다.
‘이게 인공 미티움?’
이것이 몸에서 자라나면서 생체 골렘이 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녀석이 전투 중에 마셨던 것은…….’
아마 내부에 인공 미티움을 만들고 성장시키는 약물이라고 생각되었다.
‘기간츠 때랑은 느낌이 달라.’
그때 보았던 생체 골렘이 단순 무식한 거였다면, 이번에 만난 녀석은 좀 더 정교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폴밴이 이전부터 이걸 마시고 힘을 쌓았더라면 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로 보아 이 약물을 완성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기간츠를 만난 게 고작 몇 주 전이다. 이 정도로 개선했다는 건 연구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겠지.’
아론은 폴밴이 폐기소라 부른 벽면을 바라보았다.
아마 수도원은 연고지가 불분명한 아이들을 상대로 몹쓸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니지. 여기뿐만이 아닐 거다.’
생체 골램이 개선되는 속도로 보아 실험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행해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젠 녀석들…….’
아론은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대륙의 판도를 뒤집겠다는 명목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최소한의 인간성도 없다는 말인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도덕을 벗어난 희생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그 마인드가 더럽기 그지없었다.
아론은 인공 미티엄 결정을 망토의 아공간 속에 챙겨 넣었다.
‘이건 가져가서 자세히 연구해 봐야겠어.’
이전에 오크 킹을 잡고 획득한 쿠베라 소드의 복제품도 아론에게 있었다.
두 개를 동시에 연구해 보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무슨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녀석들이 미티움에 미쳐 있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칠검을 복제하는 것도 모자라서 생체 골렘에도 쓸 생각을 하다니…….’
아론이 그렇게 생각할 때.
카칵!
돌벽의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경비병들이 벽을 부수고 있는 중이었다.
쾅!
이내 벽이 부서지고 그 틈으로 경비병들이 몰려왔다.
“폴밴 님은 어디 계시지?”
“저, 저 시체!”
경비병들은 뼈만 남은 시체를 가리켰다. 아론이 살아 있으니 저것이 폴밴이리라.
아론은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어중이떠중이들뿐이었다.
아까는 몇몇 강한 경비병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접근했다가 폴밴의 오러에 흡수되어 버렸었다.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어. 적절하게 안배해서 써야겠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펜던트의 마나를 빌려 전격 마법을 준비했다.
파지지직!
경비병들 사이에 번개가 퍼져나가며 순식간에 녀석들을 무력화시켰다.
아론은 그렇게 녀석들을 쓰러트리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유진이는 도망쳤겠지?’
그는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근처에 아이의 것으로 여겨지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군.’
폴밴과의 전투 중에 유진을 마법으로 옮기면서 도망치라고 말을 해 뒀었다. 다행히 유진은 아론의 말을 잘 따라 준 모양이었다.
***
아론은 셀린과 약속했던 수로에 도착했다.
내부에는 아이들이 가득 있었다. 셀린이 숙소에서 대피시킨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론의 존재에 얼어붙고 말았다.
“아론 님!”
하지만 이내 유진이 그를 반겨주자 아이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수로의 한쪽 벽면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아론은 오는 도중에 경비병들을 맞닥뜨려 몇 번 전투를 치렀었다.
실력이 좋은 녀석들은 아니었기에 금방 해치웠다. 하지만 그의 마나가 거의 바닥인 상태였기에 탈력감이 찾아오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유진이 다가와서 아론의 안색을 살폈다.
“응. 너야말로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구나.”
“이거, 받으세요.”
유진은 아론에게 약초를 내밀었다.
“멜린이라는 이름의 약초에요. 탈진 증상이 있을 때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어요.”
“그래? 어디서 난 거니?”
“몰래 챙겨둔 거예요. 혹시 도중에 체력이 떨어져서 도망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을까 봐요.”
아론은 유진의 준비성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저희는 무사히 여기까지 왔고, 아론 님께서 저희들을 구하다가 그렇게 되셨으니 부디 아론 님이 이걸 먹어 주세요.”
“그러면 고맙게 받을게.”
아론은 약초를 받아서 먹었다.
그러자 조금은 피로감이 가시면서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거론 부족했기에 그는 최대한 안정을 취하면서 마나를 회복시켰다.
‘……이 정도면 됐을까.’
너무 오래 쉴 순 없었다.
셀린은 아직 별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나갔다 올게. 셀린을 데려와야 하거든.”
“알겠습니다.”
유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그러자 뒤에 있던 아이들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같이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광경에 아론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수로를 나가려고 했다.
“흑, 흐윽.”
그때, 유진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참아왔지만, 이미 떠나 버린 아이들 생각이 나서였다.
아론은 그런 유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긴 힘들겠지.’
얼마 전까지 같이 뛰어놀았던 아이들이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오죽 심정이 착잡했으랴.
유진의 울음에 나머지 아이들도 비슷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들도 어떤 참사가 벌어졌는지 유진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이내 눈물을 닦고는 감정을 추슬렀다.
“꼴사납게 죄송해요. 아론 님이 없었으면 저희도 다 그렇게 되었을 텐데…….”
“아니야. 슬픈 일을 겪으면 당연히 울어야지.”
아론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말고 충실하게 표현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참 기특한 아이란 말이지.’
어린 나이지만 남을 생각하는 마음도 깊었고, 행동도 용기있게 할 줄 알았다.
“조금만 더 여기 있어주렴.”
아론은 유진을 토닥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셀린 님에게 가시는 건가요?”
그 물음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 별관에 있을 거야.”
유진은 셀린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가 왔을 때 셀린은 여기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으시겠죠?”
“그녀는 충분히 강하니까. 아마 열심히 별관을 탐색하고 있을걸?”
아론은 유진을 안심시키며 수로를 나가려 했다.
콰앙!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히익!”
아이들은 갑자기 난 큰 소리에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폭음이 들린 곳은 별관이 있는 곳이었다.
* * *
그 소리를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설마, 폴밴이 말한 게 허풍이 아니었나?’
그는 죽기 직전에 말했었다. 자신이 죽으면 수도원의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아론은 당연히 개소리로 치부하고 녀석을 죽였었다.
우우웅.
그때, 망토 속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론은 아공간을 열어서 넣어 두었던 인공 미티움의 결정을 꺼냈다.
‘어? 이건 또 왜 이래?’
인공 미티움이 모종의 이유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화르륵!
꺼낸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인지 미티움 결정은 검은 불꽃을 내며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쾅! 콰앙!
그때였다.
마치 인공 미티움이 녹은 게 도화선이 된 것처럼 별관에서 여러 번의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 건 단순한 폭발이 아니야!’
아론은 별관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못해도 30개에 가까운 개체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간츠 급이잖아?’
아마 생체 골렘이 기동을 시작했다고 여겨졌다.
아론은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는 지금까지의 전투로 마나를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쉬면서 조금은 회복했지만 오래 전투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론은 아이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이들도 역시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대피하는 건 힘든 일이겠군.’
그러나 아론은 그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정말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면 모를까.
‘셀린이 위험하겠어.’
가장 먼저 생체 골렘의 목표가 되는 대상은 가까이 있는 그녀일 게 분명했다.
‘녀석들은 집요하다. 한번 본 대상은 절대 놓치려고 하지 않아.’
셀린은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론이 살기 위해서 그녀를 버림 패로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론이 이웨카를 사들인 건 정보 길드가 필요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셀린의 능력을 높이 산 점이 컸다.
그녀가 사라지게 된다면 그 공백이 컸다. 이웨카 길드는 셀린이 있기에 돌아가는 것이지, 자신이 대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아론은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과연 30마리에 가까운 생체 골렘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서 싸울 순 없었다. 폴밴과의 전투로 이미 마나가 바닥이 난 상태였다.
‘도움이 필요하다.’
당장 아론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에드먼스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는 아이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영지였다. 그런 곳에 에드먼스 가문의 마법사들이 몰려온다면 문제가 커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내 의지로 공작가 밖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대뜸 구조 요청을 넣는다면, 공작은 자신을 좋게 봐주지 않을게 분명했다.
아론은 이내 막내 동생인 라크가 주었던 패가 떠올랐다.
‘그것도 힘들다.’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기간츠를 둘이서 상대할 때도 전력을 다했었다. 게다가 라크는 성유물까지 하나 소모했었다.
그 정도로 치열했는데, 라크가 더해진다고 해서 다수의 생체 골렘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30마리에 가까운 생체 골렘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아이젠까지 올 수 있을 정도로 활동이 자유로운 상대.
‘……있었잖아.’
그것도 의외로 가까운 곳에 말이다. 게다가 아론은 그들을 부를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너네가 흘린 똥은 스스로 치워야겠지?’
생각을 마친 아론은 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런 모양의 물건을 본 적이 있니?”
그는 허공에 포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아티팩트를 그렸다.
유진은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 본 적 있어요. 항상 밖으로 나가실 때마다 저걸 품에 넣고 다니셨어요.”
다행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그 위치도 알고 있겠구나?”
“네. 아마 집무실의 책상 서랍에 있을 거예요.”
“알려줘서 고맙다.”
단서를 찾은 아론은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제발 있었으면 좋으련만.’
물론 아티팩트가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자신이 폴밴을 제거할 때 아예 몸을 태워 버렸는데, 그때 유실되었을 수도 있었다.
일단 아론은 수로 밖으로 나갔다. 먼저 셀린과 합류한 다음 폴밴이 지녔던 포탈 아티팩트를 찾기로 했다.
***
셀린은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 같으니까, 아래로 가보자.’
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에 도착하자 그녀의 코끝에 썩은 내와 텁텁한 공기가 감돌았다.
기분 나쁜 장소였지만 셀린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주변 조사를 시작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이미 도망친 건지, 아니면 활동 시간이 아닌 건지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셀린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
거기서 셀린이 발견한 건 시체 더미였다. 그 시체들은 모두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은 채 말라비틀어져 죽은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에는 시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형 유리관이 수십 개 늘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탁한 액체와 함께 아이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입양된 아이들도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목격한 셀린은 아이젠 왕국에 대해 역겨움을 느꼈다. 도대체 뭘 꾸미고 있길래 아이들까지 연구에 동원한 건지 궁금했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셀린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잠시 후, 그녀는 종이 뭉치며 알 수 없는 도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히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는 걸 보니 사람들이 정리하지 못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셀린은 그것들을 모두 챙기기 시작했다.
츠츠츠-
그녀가 한참 자료들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시체 더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셀린 역시 그걸 느끼고는 예의주시하며 상황을 살폈다.
시체들 사이에서 나온 그 기운은 유리관에 담겨 있는 아이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들이 일제히 눈을 번쩍 떴다.
셀린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쨍그랑!
셀린의 예상이 정답이었다.
아이들은 유리관을 깨고 나오고 있었다. 그 수가 대략 30마리에 가까웠다.
녀석들은 검은 기운을 흡수하면서 몸집이 점점 커지는 중이었다.
‘저 녀석들, 콜로세움 축제 때 아론 님이 맞붙었던 기간츠랑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
셀린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타다다닥!
일단 아론과 만나기로 했었던 수로를 향해 달렸다.
“끄으으…….”
녀석들은 생체 골렘 특유의 소리를 내면서 셀린을 뒤쫓았다. 아직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탓에 움직임이 둔한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기력을 회복하고 전력으로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앞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데?’
셀린은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오는 기운을 감지했다. 혹시 경비병인가 싶어 그녀는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나타난 사람은 아론이었다.
“아론 님!”
“무사했구나.”
아론은 셀린을 보고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들이 별관에 있었습니다.”
셀린은 뒤에서 따라오는 녀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기운을 느끼자마자 달려왔어. 저거는 아무래도 갓 깨어난 생체 골렘들인 것 같아.”
“그리고 별관 지하에서 연구 자료들을 발견했어요. 그건 챙겨 두었습니다.”
“잘했어. 일단 도망치자.”
아론이 그 말을 끝으로 달려 나가자 셀린도 그를 뒤따랐다.
“하지만 어떡하죠? 하나하나가 기간츠 급이라고 생각하면 둘이서는 상대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건…….”
“그건 힘들어. 아이들의 수도 많을뿐더러, 저 기세를 보아하니 생체 골렘은 곧 완전하게 힘을 쓰게 될 거야.”
“그러면 녀석들에게 따라 잡히겠네요.”
셀린의 말대로였다.
생체 골렘의 추격 속도가 빠르다는 거는 이전 전투를 겪고 충분히 알게 되었다.
“걱정 마. 지금 녀석들을 해치울 방법을 찾으러 가는 길이니까.”
“생체 골렘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요?”
셀린은 아론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숫자 싸움에서부터 압도적으로 지고 들어가는데, 도저히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고 따라와.”
아론은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목적지는 폴밴을 해치웠던 건물이었다.
잠시 후, 그곳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어마어마하네요.”
주변을 둘러본 셀린이 말했다.
아론과 폴밴이 격렬하게 전투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론 님. 길어도 10분 정도면 생체 골렘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그 정도면 충분해.”
아론은 시체들을 뛰어넘고는 거의 무너져 가는 폴밴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난장판 속에서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보았다.
이윽고 아론은 포탈 아티팩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깄었군.”
“아론 님! 그건…….”
셀린은 당연히 아론이 든 것이 에드먼스 가문만이 사용하는 포탈 아티팩트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길게 설명할 순 없어. 하지만 우리 가문 내에서 물건을 빼돌리는 아이젠의 내통자가 있는 것 같아.”
지난번에 제블린 길드를 습격했을 때 보았던 아이젠의 귀족에게서도 포탈 아티팩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젠이 비밀리에 꾸미는 일과 연관이 되어 있는 고위급의 사람들은 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근데 그걸로 어떻게 하실려고요?”
“아이젠 녀석들을 부를 거다.”
“예? 아이젠이요?”
셀린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그걸 가동한다고 정말 올까요?”
그녀는 아론의 생각이 황당하기만 했다.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 포탈이 열리면 무조건 반대편에서 건너오도록 약속이 되어 있는 것 같아.”
실제로 그 당시에 젠슨은 귀찮아하면서도 포탈을 넘어왔었다.
그렇다면 필시 이번에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기사가 넘어 올 확률이 높았다.
아론은 망설임 없이 마나를 불어 넣어 아티팩트를 가동했다.
* * *
아이젠 왕궁 내에 위치한 특임대 제 6지부.
그들은 인공 미티움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 여러 지부 중에 하나였다.
“어? 갑자기?”
“무슨 일인데?”
“포탈 아티팩트의 가동이 감지되었어.”
“뭔 소리야? 지금 위험 임무 중인 특임대 녀석은 없잖아?”
기사들은 예고 없이 열린 포탈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딘데?”
“머랭 영지에서.”
“하!”
위치를 들은 기사들은 코웃음을 쳤다.
“거긴 폴밴이 있는 곳이잖아?”
그렇게 말한 기사의 얼굴은 이미 긴장이 풀려 있었다.
“보나 마나 또 혼자서 술 처먹고 외로워서 술친구 부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 녀석, 예전에도 포탈을 허투루 열어서 우리가 한 소리 했잖아.”
“쯧쯧. 사람 안 변하네.”
기사들은 한 마디씩 거들며 다시 본인의 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쾅!
그러나 그때, 어느 기사가 책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지… 지부장님?”
그는 이곳을 책임지는 지부장인 아이젠 바스티안이었다.
아이젠의 성을 달고 있었지만 그는 서자였다. 그 증거로 검의 낙인도 찍혀 있었다.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아서 어린 나이에 특임대의 지부장을 맡는 중이었다.
“모두 나갈 준비를 해라.”
“예? 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친구, 시간을 보아하니 딱 적적해서 술 마실 친구가 필요한 것 같은데…….”
기사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하지만 바스티안의 차가운 눈빛에 감히 말을 더 잇는 사람은 없었다.
“왜 과거를 통해 배우는 게 없는가? 얼마 전에 그런 안일한 방식으로 대처했다가 젠슨 경이 당하지 않았나?”
바스티안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젠슨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슨이 있는 지부에 포탈이 열렸지만, 그는 그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혼자 갔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결국 포탈을 타고 넘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가겠다.”
그때, 바스티안 역시 장비를 챙기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부장님은 남아 계십시오.”
“맞습니다. 저희들만 가도 충분합니다.”
기사들은 바스티안이 굳이 힘을 빼지 않기를 바랐다.
“외숙님의 요청이다. 내가 무시할 순 없지.”
바스티안의 어머니는 현재 국왕의 후궁 중에 한 명인 엘레나 발슈타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가 폴밴이었다.
그렇게 특임대 6지부의 기사들은 지부장을 포함해서 포탈을 넘어갈 준비를 마쳤다.
***
폴밴의 집무실에선 포탈이 빛나고 있었다. 아론은 부디 사람들이 빨리 와 주기를 빌었다.
잠시 후, 포탈을 타고 넘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였다. 아론과 셀린은 긴장하며 그것을 보았다.
총 15명의 기사들이 위압감을 자랑하며 이 자리에 나타났다. 그중에서 아론과 면식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폴밴과 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스릉!
기사들은 주위의 전투 흔적을 보고 칼을 뽑았다. 언제든지 도륙을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바스티안은 고개를 돌려 이곳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기는 외숙님의 집무실이군. 그런데 어디에 계시는 거지?’
주변에는 시체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인공 미티움을 쓴 것 같은 기운도 남아 있었다.
‘외숙님이 쓰신 건가?’
그리고 자신의 앞에는 웬 정체 모를 녀석 두 명이 서 있었다.
‘그 인공 미티움은 아직 미완성품이다. 그걸 쓰셨다는 건 설마…….’
바스티안은 아론과 셀린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들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만약 외숙님이 변고를 당했다면, 결코 곱게 놔두지 않겠다.’
바스티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아론도 이 상황에 대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는데?’
저번에 젠슨이 왔던 것처럼 한 명이나 많아도 몇 명 정도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15명이나 대동하고 넘어올 줄이야.
상대가 무작정 이쪽으로 달려든다면, 아론과 셀린은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검만 뽑아서 겨누고 있을 뿐, 아직 상황을 파악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아론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일단 말을 나눌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저벅저벅.
그때, 바스티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 녀석이 대장인가?’
동시에 곁에 있던 셀린이 흠칫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이전에 바스티안을 봤던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아이젠 왕국의 기사, 아이젠 바스티안이다. 폴밴 님은 어디 계시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대며 아론에게 말을 걸었다.
“폴밴 님이 무사하면 너희는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아론은 잠시 그의 안색을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이 수도원은 뭐 하는 곳이지?”
“뭐라고?”
아론의 질문을 들은 바스티안은 어이가 없었다.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흥. 어차피 너희들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서 조금은 알려주지.”
아론은 녀석의 그 태도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술술 불어준다면 이쪽 입장에선 편했다.
“여긴 실험장이다.”
“실험장? 무엇을 실험하는 곳이지?”
처억!
아론의 물음에 바스티안은 칼을 들었다.
“대답은 했을 텐데? 이제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차례다.”
바스티안이 윽박질렀다.
하지만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여기서 인공 미티움을 만들고 있었나?”
아론의 그 말에 기사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너…….”
“폴밴의 상태를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답하는 게 좋을 거다!”
바스티안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아론이 큰 소리로 그것을 막았다.
그걸 곁에서 보는 셀린은 걱정이 되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 역시 아이젠의 서자였고, 바스티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의 성품상 이런 일은 보통 참지 않았다.
하지만 바스티안은 주먹을 한번 꽉 쥘 뿐이었다.
“…그렇다. 여기서 그걸 만들고 있었어. 자, 이제 폴밴 님이 어디 계신지 말해라.”
“폴밴은 저기 있다.”
아론은 엄지로 어깨 뒤를 가리켰다. 부서진 집무실 벽의 너머에는 뼈만 남아 있는 시체가 복도에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바스티안은 안색이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너희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
타앗!
그는 다른 기사들이 대처를 하기도 전에, 먼저 검을 겨눈 채 몸을 날렸다.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던 아론은 전방에 배리어를 전개했다.
콰카칵!
검과 배리어가 충돌하면서 불꽃을 일으켰다.
“너무 성질이 급한 거 아니야?”
아론은 바스티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어떤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륙에 알려진다면 아이젠은 어떻게 될까.”
“그 입 닥쳐라. 나는 네 녀석을 도륙 낼 뿐이다.”
바스티안은 그렇게 말하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아론은 이자에게 말이 안 통한다고 여기고는 뒤에 있는 기사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봐! 폴밴이 죽었다고!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기사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 녀석들이 깨어났을 거야!”
기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이제 슬슬 생체 골렘들이 도착할 시간이 됐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할 때.
쿵! 쿵! 쿵!
생체 골렘들이 오고 있다는 진동이 느껴졌다. 비단 아론만이 아니라 기사들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생체 골렘들을 가만히 놔 둘 거야? 여길 부순 다음에는 사방으로 퍼져 나갈 텐데?”
아론이 그렇게 말하자 기사들은 검을 굳게 쥘 뿐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지부장님! 그 마법사가 말했었죠. 폴밴이 죽으면 실험체가 깨어나도록 모종의 장치를 해뒀었다고요.”
어느 기사의 말에 바스티안은 이성을 찾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 사실을 알려 주려고 친히 포탈을 가동 시켰지. 생체 골렘들의 수가 꽤 많던데, 너희들 실력으로 상대가 가능할까?”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을 도발했다.
“너부터 죽이고 처리해도 늦지 않다.”
바스티안은 아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디 할 수 있음 해보든가. 난 있는 힘껏 다해서 네 공격을 막을 테니까. 아까도 맞붙으면서 느꼈잖아? 내가 쉽게 죽어주진 않을 거란 걸.”
그 말에 바스티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 그동안 생체 골렘이 여기에 들이닥쳐서 풍비박산을 만들어 놓겠지? 그럼 다음엔 어디로 갈까? 만약 아이젠 밖으로 나간다면 이번 일은 그냥 덮지 못할 텐데.”
아론의 말이 정론이었다.
바스티안은 그저 이를 갈 뿐이었다.
아론은 상대의 반응을 보고 지금이 기회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선택해. 나 죽이고 폴밴의 복수를 할 건지, 아니면 너희 특임대가 맡은 사명을 다 할 건지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바스티안은 당장이라도 아론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이젠에 속한 기사였다. 단순한 복수심에 휩싸여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생체 골렘이 외부로 나가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
이번 일을 무마시키지 못한다면, 국왕은 자신의 낙인을 발동 시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소수 인원만 여기에 남겨서 저 녀석을 상대하게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생체 골렘화된 폴밴을 죽인 실력자다. 게다가 마법사이니 작정하고 방어로 나온다면 죽이는 건 힘들었다.
‘어떡하지?’
바스티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복수냐, 아니면 특임대의 사명이냐.
“지부장님!”
기사들은 바스티안을 재촉했다.
[아론! 준비 끝났어!]
그때, 마음속에서 쿠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탈을 열기 전, 쿠브에게 부탁해 뒀었다.
이곳에서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땅굴을 파달라고 말이다.
다른 정령이었다면 힘들었겠지만 쿠브는 태초의 정령이었다. 그는 아론의 부탁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다.
아론은 기사들을 바라보며 한껏 웃었다.
“사실, 너한테 선택지는 없었어.”
그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퍼엉!
셀린이 연막을 터트렸다.
아론은 미리 준비했던 마법으로 땅을 꺼트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지하로 떨어졌다. 파여진 구멍은 쿠브가 다시 단단하게 막았다.
“젠장할!”
분노한 바스티안이 소리쳤다.
“지부장님! 일단 생체 골렘들부터 처리합시다!”
“…알겠다.”
바스티안은 그렇게 말하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만났을 땐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그는 이성을 되찾고는 곧바로 기사들을 지휘해 생체 골렘을 상대하러 나갔다.
* * *
땅굴로 떨어진 아론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체력이 거의 없어서 휘청휘청했다.
셀린은 즉시 아론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안 그래도 힘이 없었는데, 무리를 한 모양이야.”
그의 마나는 폴밴과의 전투 때 대부분을 소진했었다. 그러고 나서 생체 골렘으로부터 도망치고, 바스티안을 비롯한 기사들을 만나서 대치했으니 꽤 오래 버틴 셈이었다.
“얼른 가자. 우리가 늦을수록 애들이 겁을 먹을 테니까.”
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론을 부축한 채 앞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번에 아론이 벌인 일들을 속으로 곱씹었다.
‘정말 대담하신 분이야.’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아론의 계획을 들었을 땐 놀랐다. 둘의 전력으론 생체 골렘을 상대할 수 없으니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는 건 정답이었다.
말로 들으면 계획은 쉬워 보인다. 그러나 막상 적이 나타났을 때 아론처럼 당당하게 맞서서 말로 눌러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거기다가 그 상대가 바스티안이었다. 아이젠의 서자들 중에서도 출중한 무력을 지녔고, 성격이 악독스럽기로 소문난 자식이었다.
그에게 된통 당해서 이름만 들으면 몸서리를 치는 서자들이 꽤 있었다.
심지어 검의 낙인에 걸린 저주를 힘으로 억누르고 적자에게 덤벼든 적도 있으니, 그 독함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만큼 적으로 정한 상대는 손속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아론은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바스티안을 상대로 한치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단순히 대치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아니라 그에게 굴욕감마저 선사 시켜 주었다.
셀린은 그런 아론의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결단력 있게 작전을 실행하고, 상대의 약한 부분을 후벼 팔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저 마법의 재능에 뛰어나기만 한 다른 형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론 님이 에드먼스 가문을 잇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셀린은 그런 미래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잠시 후, 아이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아론과 셀린.
“무사하셨군요!”
유진이 그들을 발견하자 달려 나와 반겨주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제 여기서 나가자.”
폴밴을 처리하긴 했지만 아이들을 더 이상 아이젠에 두는 건 위험했다.
어찌 보면 아이들도 이번 사건의 목격자였다. 아이젠이 입막음을 위해서 처리해 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아론의 그 말에 유진을 비롯한 아이들은 머뭇거렸다. 수도원 밖을 나가게 되어도 문제였다. 어디서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아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이 부모님이 없거나 행방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 아이들보고 구해줬으니 알아서 살길 찾으라고 하는 건 안 도와주니만 못한 처사였다.
“걱정 마. 너희들이 지낼 곳은 내가 마련해 줄 테니까.”
아론의 그 말에 아이들의 표정은 단숨에 밝아졌다.
“잠깐만요, 아론 님.”
셀린이 아론에게 속삭이며 손짓을 했다. 아론은 아이들에게 잠시 이곳에 있으라고 한 뒤 그녀를 따라갔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수십 명이 넘는데…….”
“생각을 좀 해 봤어. 우리가 버려 버리면 이 아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
“대부분이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겠죠. 아니, 살아남는 것도 기적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셀린의 말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차라리 이 아이들을 길드의 정보원으로 키우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
“……네?”
셀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생각해 봐. 수도원의 아이들은 끔찍하게 죽을 운명이었지만 우리가 구해준 거야. 그러면 우리를 신뢰하겠지?”
“그건 그렇죠.”
“어디 가서 사람 신뢰를 얻긴 쉽지 않아. 뒷세계의 의뭉스러운 놈들을 고용할 바에야 이 아이들을 키우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아론의 세 치 혀에 셀린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건 맞는 말씀이지만…… 그래도 정보원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체력도 좋아야 되고…….”
아론은 셀린의 말을 막았다.
“수도원의 애들은 기본적으로 운동 신경이 좋아. 그리고 교육도 잘 받은 상태고.”
아이들의 능력이 전반적으로 좋은 이유는 생체 골렘으로 만들었을 때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그러니까 정보원 교육만 잘 시킨다면 쓸만한 인재가 될 거야. 어차피 우리 길드도 대륙 전체에서 활동하니까 항상 사람이 부족하잖아?”
셀린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고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흐음. 알겠어요. 하지만 나중에 아이들에게도 물어볼 거예요. 선택권은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당연하지.”
아론과 셀린은 서로 의견을 맞추고는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가자, 얘들아.”
“네!”
아이들은 밝게 대답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
아론과 셀린이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원에서 도망친 이후. 그곳에 남은 특임대는 생체 골렘을 저지한다고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숫자에서 두 배 차이가 났기에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생체 골렘 몇 마리가 수도원 밖으로 나가 민가를 습격해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생체 골렘을 보았다는 소문도 점점 퍼져나갔다.
아이젠에서는 결국 꼬리자르기에 나섰다. 발슈타인 가문에서 단독적으로 흑마법을 연구했다고 공표했고, 그들을 처단했다.
그 상황에 이웨카 길드가 은밀하게 개입을 했다. 길드에서는 정보원들에게 지령을 하달해 아이젠의 기사단이 이번 일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길드의 정보원들은 비단 정보 수집만이 아니라 이렇게 정보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렇게 퍼진 이야기를 들은 아이젠의 귀족들은 당연히 왕국에 반감을 가졌다. 자기들 몰래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숨기고 진행한다는 건 뒤가 켕긴다는 뜻이었다. 그 칼끝이 귀족들을 향할지도 몰랐으므로 이번 일은 그들도 크게 반발했다.
아론은 그 상황을 보고를 통해 듣게 되었다.
‘아이젠 왕국 측에서도 우리가 퍼트린 이야기를 잠재우기 위해 힘이 좀 많이 들어가겠구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 일로 아이젠 왕국이 심대한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로 나라가 휘청인다면 애초에 에드먼스 왕국과 쌍벽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젠이 벌이고 있는 연구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다.
이젠 보는 눈이 많아졌으니 일을 과감하게 벌이기도 힘들 것이다.
물론 그들이 연구를 멈출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야 했기에 그 속도는 자연히 느려질 터였다.
‘그리고 중립 세력들의 시선도 곱지 않아졌어.’
아이젠과 에드먼스의 경쟁에 다른 나라들은 불똥이 튀는 것을 두려워해 중립을 선언한 곳도 많았다.
그들 개개의 세력이 특출난 무력을 지녔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수의 세력이 에드먼스에 붙게 된다면 아이젠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파지는 일이 되는 셈이었다.
‘이 정도면 꽤 시간을 벌었어.’
아론은 그동안 녀석들이 숨기는 비밀들을 파내면서 동시에 자신도 성장할 계획이었다.
한편, 에드먼스 카이만에게도 이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발 빠르게 전달이 되었다.
“머랭 영지에서 생체 골렘 실험이 있었고, 익명의 사람에 의해 그것이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공작은 비서를 통해 그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젠의 기사인 폴밴 발슈타인이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보고를 들은 공작은 크게 웃었다.
그는 보고에서 말하는 익명의 사람이 아론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작은 아론에게 자유를 주면서 대신 단 하나의 의무를 주었다. 그것은 정기적으로 행적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대충 아론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었고, 이번 일도 그가 했다는 것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아론 녀석, 밖으로 나가더니 더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는구나.’
공작은 아론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젠도 이번 일로 타격을 좀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해서 아이젠은 최대한 덮으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소문을 퍼뜨리는 단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할 순 없지만, 대륙 곳곳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는 걸로 보아 계획적으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말에 카이만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도 아론이 한 것이겠지. 그런데 벌써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세력을 꾸렸다고?’
공작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건 꽤 중요한 일이었다.
후계자 경쟁은 혼자 강해진다고 유리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에드먼스 가문을 이끌어갈 차기 공작으로서, 무력도 중요했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세력을 얼마나 잘 갖춰두었는지도 중요했다.
‘놀랍군.’
아론은 뒤늦게 갱생하고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늦게 출발한 쪽이 여러모로 불리한 법. 그러나 아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내 정보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단체를 가지고 있었다니.’
공작은 그 점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간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았건만, 아론은 폭풍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공작은 과연 아론이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가 기대되었다.
***
이웨카 길드에 위치한 다용도실.
그곳에는 아론, 라엘, 켄트, 그리고 셀린이 모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도원에서 가져온 연구 자료들이 놓여 있었다.
“순서를 맞추기 쉽지 않네요.”
셀린이 종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그녀가 별관에 들이닥치기 전에 녀석들은 자료들을 없앤 모양인지 꽤 많은 자료들이 빠져 있었다.
이래서는 폴밴이 마셨던 약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 주동자는 정확히 누구인지 찾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래도 아론 일행은 자료들을 샅샅이 살폈다. 아이젠을 돕는 마법사가 대체 누군지만 찾아도 판을 크게 뒤집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종이에서 같은 표식이 보이네요.”
켄트가 몇 장의 종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동일한 문양의 표식이 희미하게 종이에 남아 있었다.
“셀린. 이게 뭔지 알겠어?”
“저도 처음 보네요.”
여기서 그 표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자료에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을 때.
똑똑.
누군가가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밑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
“로안 헬브람입니다.”
“잠깐만 기다려 줄래?”
셀린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론을 바라보았다.
“하필 이때…… 로안 님은 중요한 고객 중에 한 명이라서요.”
“괜찮아. 손님을 내칠 순 없지. 그리고 나도 아는 녀석이거든.”
“네? 로안 님과 면식이 있으신가요?”
“응. 우연하게 서로 친해졌어.”
애초에 이웨카 길드를 알게 된 것도 로안 덕분이었다.
‘이렇게 로안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
아론이 페리움으로 들어간 이후로 따로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전에는 로안이 이웨카 길드로부터 아론을 대신해서 정보를 받아오는 등 많은 도움을 줬었다.
‘나중에 셀린을 만나고 나서 나도 얼굴 좀 봐야겠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셀린을 로안에게 보내주었다.
* * *
아론은 목걸이를 쓰고 의태한 채 방에 있었다.
잠시 후, 셀린이 로안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아론은 로안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는 방에 있는 아론을 보았지만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로안은 아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셀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요? 내가 며칠 전에 이 도시에 도착했지만 당신을 볼 수가 없었소.”
“죄송합니다. 어디에 잠깐 다녀오고 정리 좀 한다고 바빴습니다.”
“후우! 이 정도로 일을 맡겼으면 내가 언제쯤 올 거라는 건 짐작이 가지 않소?”
로안은 셀린의 사과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얼마나 급한 상황인지 알고는 그러시오?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빨리 처리 부탁하겠네!”
아론은 로안의 그 태도에 그닥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능력이 있었지만 전형적으로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타입이었다. 그는 첫 만남 때 그것을 확 느꼈었다.
그날 이후로 아론에게 공손하게 대해왔던 건 그가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임과 동시에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하긴. 백작가의 호위병들도 로안을 골칫덩어리로 생각할 정도였었지.’
로안은 아론만큼은 아니긴 해도 한 성깔 하는 망나니에 가까웠다.
“으음 이를 어쩐다…….”
셀린은 말꼬리를 흐리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헬브람 가의 공자님께서 바쁘신 일이 있으신 모양이에요. 이쪽 일부터 처리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아론은 이것이 셀린 특유의 장난임을 알고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뭐야, 이분이 선객이었소?”
로안은 아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미안하게 됐수다. 백작가에는 급히 돌아가는 일들이 많아서 말이오. 이해해 주시게.”
그는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말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셀린을 바라보았다.
“안면도 있는 사이인데, 양보하는 건 어렵지 않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목걸이를 벗었다.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허억!”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아까 전에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론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아론 님!”
그는 아론을 보자마자 굽신거렸다.
“오랜만이네. 딱 봐도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먼저 처리하게.”
“아이고, 아이고. 제가 눈이 삐어서 미처 아론 님을 몰라뵀습니다.”
로안은 큰 죄를 지은 것마냥 최대한 웅크린 태도를 취했다.
“너무 그러지 마. 네가 제대로 본 게 맞으니까. 심심해서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던 것뿐이야.”
“하, 하…… 아론 님도 참.”
아론은 그를 바라보며 씩 웃었고, 멋쩍은 로안도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연락이 없으셔서 큰일이라도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그가 아론과 연락을 못 한 지는 벌써 몇 달이 넘었었다.
그동안 아론에게 이웨카 길드의 정보를 대신 전해 줬는데,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자신이 쓸모가 없어져서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을 도였다.
“일이 있어서 잠시 멀리 다녀왔거든. 그나저나 나도 길드에 뭐 좀 물어보려고 온 건데, 자네가 왔다길래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지.”
로안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속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아론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일단 서 있지 말고 앉지그래.”
“예, 예.”
로안은 아론이 의자를 가리키자 거기에 앉았다.
“표정을 보니까 꽤 다급해 보였는데, 무슨 일로 길드를 찾아온 거야?”
“아, 그게…….”
“혹시 내가 들으면 곤란한 내용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로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아론 님도 정보를 의뢰하러 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급한 일이시면 먼저 처리하십시오.”
“난 어차피 이 도시에 며칠 더 머무를 거거든. 무슨 일인지 한번 얘기해 보게.”
“알겠습니다.”
로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론뿐만이 아니라 셀린도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제가 아론 님을 호위했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습격 이후로 저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형을 제치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암살자를 잡고 심문했을 때 녀석이 말한 형제는 헬브람 백작가가 아니라 아론의 가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걸 원동력으로 열심히 사는 것 같구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론은 침묵을 지키며 로안의 말을 경청했다.
“그중 하나가 형의 약점이 될 만한 정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괜찮은 걸 찾았나?”
“예. 아무래도 형님이 가문의 금고로 가야 할 돈을 몰래 착복하는 것 같습니다.”
“허어. 그거 큰일이 아닌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살펴보았는데, 마약을 유통하는 일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마약 유통이라고?”
이 세계라고 해서 마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론은 그쪽에 대해 정보가 무지했기에 과연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 형님이 라둔 왕국을 통해서 몰래 들여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 출장을 핑계로 그곳에 가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길드에 의뢰를 하러 온 거구만.”
아론의 말에 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일은 아론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로안은 자신의 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형을 끌어 내리고 헬브람 가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면 나중에 아론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것이었다.
‘상업 가문인데 개인이 돈을 빼돌리는 건 큰 문제지. 거기다가 마약도 연루되어 있다니.’
아론은 잘하면 이번에 헬브람 백작가의 장남이 실각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보게.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 알았지? 하지만 나보다 아론 님의 의뢰를 먼저 처리해주게.”
로안은 처음에 대했던 무례가 미안했던 모양인지 계속해서 그런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아론 님께서도 ‘얼마든지’ 로안 님의 일을 처리하라고 말씀 하셨는걸요.”
“어, 아니…… 그건……!”
로안은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렸다. 그때, 그의 시야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종이가 들어왔다.
“잠깐만, 이 종이들은…….”
“죄송해요. 책상이 좀 지저분하죠? 금방 치워 드릴게요.”
“아니, 아니. 내 의뢰를 어떻게 알고 이렇게 준비해 둔 건가?”
“……네?”
셀린은 로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걸 보게.”
로안은 종이 위의 표식을 가리켰다. 아론 일행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그 표식이었다.
“이건 라둔 왕국에서 활동하는 코뱃 상단의 문양이 아닌가.”
셀린을 보고하는 그 말에 아론은 귀를 기울였다.
‘코뱃 상단?’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표식의 단서가 나온 건지도 몰랐다.
‘어? 잠깐만…….’
그때, 눈치가 빠른 로안도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고 빠르게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 한 건 한 거 같은데?’
어쩌면 처음에 부렸던 추태를 이번에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론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장난이었지만, 로안은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아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혹시 이 표식과 관련된 곳을 찾고 계셨던 겁니까?”
“응. 우리 둘 다 이게 뭔지 정체를 모르고 있었거든.”
“이 표식은 코뱃 상단의 것입니다. 라둔 왕국에서 한창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상단이지요.”
그때, 셀린이 끼어들며 말을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이 표식이 코뱃 상단의 문양이라고요?”
그녀는 로안의 말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억에는 코뱃 상단은 이런 문양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식은 아니네.”
“일단 계속 설명해 보게.”
아론의 재촉에 로안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라둔 왕국의 상단과 안면을 트겠다는 이유를 들고 코뱃 상단과 접촉했지요. 그 덕에 행수의 집무실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본 종이에 이런 문양이 찍혀 있었습니다.”
“사실인가?”
“예. 제가 들어가자 황급히 그 종이를 치우는 걸 보니 비밀문서인 것 같았습니다.”
“혹시 내용은 보았나?”
“으음…… 워낙 순식간이었고 훑어보기만 한 정도라서…….”
로안은 미간을 좁히며 어떻게든 내용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머랭 영지에 관한 거라는 건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이게 정답이다 싶었다.
머랭 영지와 코뱃 상단. 둘 간에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로안. 생각보다 네 일이 빨리 처리될 수 있겠어.”
“그 말씀은…….”
로안은 눈치가 빠르기에 아론이 그렇게 말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의뢰하고자 하는 것과 아론의 의뢰 내용이 일부 겹친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선 내가 빠지는 게 의뢰 진행에 더 도움이 되겠어.’
그렇게 생각한 로안은 아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린 말씀이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네 덕분이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린. 내 의뢰도 천천히 부탁하오.”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길드 건물을 나섰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단서를 얻어 버렸군.”
“그러게요.”
아론의 말에 셀린도 동의했다.
“근데 어째서 라둔 왕국일까요.”
라둔은 땅은 드넓었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개척 불가능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대륙의 정세에서 별 영향력이 없는 국가로 취급을 받았었다.
“어찌 보면 관심이 덜한 곳이니 무언가 암약을 노리는 단체들에겐 오히려 좋은 곳일 수 있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라둔 왕국으로 우리 정보원들을 보내자고.”
“알겠습니다.”
먼저 아론이 그곳에 가는 것보단 정보를 좀 모은 후에 나서도 늦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