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갑작스러운 아론의 모습 변화에 셀린은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어떻게 모습을 바꾼 거지?’
그녀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거구의 남자가 전혀 아론이라고 짐작할 수 없었다. 그만큼 아론의 의태가 뛰어났다는 의미였다.
‘저 목걸이 때문인가? 아니면 에드먼스 가문의 마법……?’
그러나 셀린은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상대가 인사를 한 이상 받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소식이 들리지 않아서 걱정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말도 전해주지 못하고 내가 떠났었군.”
“어디로 다녀오셨던 겁니까? 대륙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그 말에 아론은 속으로 웃었다.
‘이웨카 길드 조차 찾지 못했다니. 확실히 페리움이 은신처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었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셀린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린데란트 산맥의 페리움에 잠깐 있었었지.”
“예? 거기는…… 드워프들의 왕국 아닙니까?”
“응. 거기서 잠시 훈련을 좀 하고 왔어.”
셀린은 아론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대륙에서 드워프와 접촉한 것 같다는 정보는 들었었다. 하지 만 그들의 왕국에까지 다녀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대륙에서 아론 님을 찾을 수 없었던 건가?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페리움은 아론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대륙의 절대 강자들도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한 곳이 그린데란트 산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론 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셀린은 아론에 대한 평가를 급히 상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이전에는 꼬리가 잡히는 것을 우려하셔서 항상 간접적으로 저희를 이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아론은 본제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웨카 길드를 대여하고 싶다.”
“……네?”
“말 그대로네. 자네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 웬만한 건 건드리지 않겠네. 그냥 나는 필요한 정보를 바로 얻을 수 있고, 또 여기를 내 거점으로 삼기를 원할 뿐이야.”
셀린은 이 도련님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 하하. 역시 에드먼스 가문의 공자님이라서 그런가 농담도 통이 크십니다.”
“농담이 아니야.”
아론이 단칼에 대답하자 셀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여기 할로움의 지부장일 뿐입니다. 본부 쪽에도 이야기를 드려야 합니다.”
“나는 바로 답변을 듣고 싶은데.”
아론의 강짜에 셀린은 표정이 살짝 굳고 말았다.
“아론 님은 저희의 VIP시니까요. 답변이 오는 대로 곧바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정말 나를 VIP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
“…….”
“말이 지부지, 여기가 본부잖아? 수장은 당신이고 말이야.”
아론의 말에 셀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외적으로 이곳은 지부였고, 셀린은 여러 지부장 중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이는 정보 길드 특유의 거짓 정보였고, 실제 수장은 셀린이었다.
“다 알고 계셨군요.”
“여기가 지부라기엔 자네의 실력이며, 일 처리 속도가 상당했거든.”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셀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툭.
아론은 주머니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렸다. 그것은 드워프들에게서 받은 보석들이었다.
셀린 역시 안에 든 내용물들의 가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상당한 가격이긴 합니다만.”
셀린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아론 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왜지? 이유를 들려주겠나?”
“개인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방금 전에 그 단서를 발견했던지라 당분간은 거기에만 신경을 쓸 생각입니다.”
그녀는 정중하게 아론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여 등의 형태로 아론 님에게 길드를 종속시켜 드리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아론은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이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아론은 충분한 돈과, 자신의 배경만 있으면 거래가 성사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니.’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대륙에 마음 놓고 지낼 장소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결단코 없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젠이 인공 미티움 개발에 진심인 것을 안 이상, 칠검과 그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론이 이웨카 길드를 대여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던 것이었다.
‘차라리 내가 그녀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낫겠군.’
셀린이 들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면, 더 이상 아론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뭘 찾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내가 찾아 주면 어떻게 할 거지?”
그 말에 셀린은 아론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떤 건지 들어보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의 나라면 아이젠 왕궁에 쳐들어가라는 것 말고는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군.”
아론의 대답을 들은 셀린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집광 하퍼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대충은 알고 있는 이름이야.”
하퍼 브래들리.
그는 마약이나 노예상 등 질이 좋지 않은 사업을 통해서 대륙의 돈을 긁어모으는 남자였다.
세간에서는 그를 수집광이라 불렀는데, 뒷세계에서 번 돈을 가지고 대륙에 있는 귀한 것이라고는 모조리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하퍼는 아티팩트, 미술품, 무기 등 희귀한 것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아왔다.
“녀석이 수집한 물건 중에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요네스의 강물이라 불리는 겁니다.”
아론은 처음 듣는 이름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하퍼가 지니고 있고, 셀린이 원하는 것이라면 보통 귀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은 할 수 있었다.
“그럼 그걸 내가 찾아 주지. 무사히 완수하면 정보 길드를 내게 대여해 줄 텐가?”
셀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정보 길드를 운영해 온 것도 요네스의 강물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아론 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런데 그 강물인가 뭔가를 빼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침투도 돌파도 가능했다. 전자는 아그니 소드를 훔쳐오면서 했던 거고, 후자는 드워프 뷰란트를 구출하면서 해본 적이 있었다.
“하퍼가 자신의 수집품을 모아둔 곳을 갤러리라고 부릅니다.”
“갤러리라.”
“거기는 아이젠 왕궁이나 에드먼스 공작가 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입니다.”
“그 정도인가?”
“네. 예전에 설계도를 입수하기 위해 몇 번 부하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들통나서 죽임을 당했지요.”
아론은 고민했다.
셀린의 말대로라면 보통 방법으로 요네스의 강물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계도 자체가 없다는 건 거기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잠입하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럼 방법이 있나?”
아론의 물음에 셀린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콜로세움 축제’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셀린은 물어보면서 아론의 안색을 살폈다.
***
아론은 라엘과 켄트를 대동하고 도시국가인 폴린에 와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당연히 평소와 다르게 목걸이를 이용해 의태를 한 상태였다.
‘드워프들이 고맙게도 이걸 무상으로 넘겨줬단 말이지.’
아론은 속으로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폴린은 사시사철 따뜻한 기후를 자랑했고, 위치의 특성상 해상 교통이 발달해 있었다. 또한, 수집광 하퍼의 손바닥 아래에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네요.”
켄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정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보이는구나.”
아론도 그의 말에 동감했다.
[콜로세움 축제의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도시 여기저기에는 그러한 말을 써놓은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이는 셀린이 말한 그 ‘콜로세움 축제’가 맞았다. 아론이 대뜸 이 도시에 와 있는 것도 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콜로세움 축제는 하퍼가 폴린에서 4년에 한 번마다 주최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축제라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섬짓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세 명이 하나의 조를 짜야 했다. 그런 그들을 섬 하나에 모두 모아놓고 마지막 한 조가 남을 때까지 제한 없이 싸우는 일종의 배틀로얄 대회였다.
대회를 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섬에서 무슨 수를 써도 상관이 없었다. 최대한 다른 조를 배제하고 살아남으면 되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축제에 참가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상품이 바로 하퍼의 갤러리에 있는 수집품 중 하나를 고를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퍼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이득은 있었다. 별달리 자극이 없는 이 도시에 일종의 볼 거리를 제공해 자신의 명망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돈이 되었다. 하퍼는 사람들에게서 누가 최후에 남을 것인지 도박을 하게 했고, 여기서 얻은 수입이 상품을 넘을 정도로 짭짤하게 들어왔다.
‘아주 돈벌이에 특화된 영악한 놈이야.’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하퍼는 중세판 토토를 이 도시에서 실현시키고 있었다.
‘여긴가?’
아론은 인파를 제치고 두 사람과 함께 축제의 참가자를 모집하는 곳으로 향했다.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힘 좀 쓰겠다 싶은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주변 사람을 쉴 새 없이 노려보면서 건들먹거리는 양아치 같은 놈도 있었다.
혹은 이번 축제에서 한탕 해먹기 위해 팀을 짠 용병도 보였고, 간간이 기사나 귀족 같은 사람도 존재했다.
아론은 참가를 받는 곳에 도착해 신청서를 작성했다. 물론 거기에는 각종 개인 정보를 기입해야 했는데, 아론은 세 사람 모두 가명으로 써냈다.
“흐음.”
직원은 아론이 건넨 신청서를 받아들고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곱상하게 생긴 것이 어디 이름 있는 가문의 도련님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과 달리 호위조차 대동하지 않은 걸 보니, 가문의 위세가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철이 없는 건지 싶었다.
“여기는 나리님들 노는 곳이 아닙니다.”
”뭐하는 곳인지 알고 왔으니까, 처리해 주게.“
직원은 굳이 거기에 대꾸하지 않고 신청서를 받아들였다. 귀족 중에는 성격이 고약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청을 접수하고 돌아가는 아론 일행을 보며 생각했다.
‘쯧.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객기 부리다가 목숨하나 잃겠구만.’
콜로세움 축제 기간만 되면 유독 저런 귀족들이 많이 보였다.
직원은 금세 아론에 대한 기억을 잊고는 다른 사람의 신청서를 받아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 * *
콜로세움 축제는 아론이 신청서를 내고 나서 5일 뒤에 열리게 되었다.
아론 일행은 그날 저녁 시간에 항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참가자들이 와 있었다.
“저게 우리들이 탈 배군요.”
켄트가 정박 중인 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각각의 배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배 하나당 99명씩 탑승해 섬까지 간다고 했다. 참가한 조들은 무작위로 탈 배를 배정 받았으며, 아론이 타는 배는 5번이었다.
“1번 배에 타시는 분들은 빨리 올라오세요!”
시간이 되자 승선이 시작되었다.
이전에 참가 신청서를 낼 때 보았던 익숙한 면면들이 배에 하나둘 오르기 시작했다.
탑승은 막힘없이 계속되었고, 이윽고 아론이 탈 5번째 배가 열리자 그들도 올라갈 준비를 했다.
줄을 서고 기다리니 직원이 다가와 아론 일행에게 팔찌를 주었다.
“이걸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론은 군말 없이 팔찌를 왼팔에 찼다. 듣자 하니 이건 참가자들의 생체반응을 감지하는 도구라고 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게 마지막 식사였을지도 모릅니다.”
직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로 가서 다른 사람에게 팔찌를 나눠주었다.
‘밥맛 없는 자식일세.’
아론의 모습은 목걸이로 인해 의태 중이었지만 체형은 원본과 비슷한 약골로 해 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는 사람마다 저렇게 시비를 걸었다. 아마 제일 빨리 죽을 거 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올라 가자.”
“네.”
아론은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배에 탑승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미리 타고 있었던 사람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원래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지.’
아론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러면서 배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배는 99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하지만 이곳에 선장이라든가 선원은 없었다.
주최 측에서 말하길, 배는 미리 정해진 항로를 따라 자동으로 섬까지 움직인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참가자들이란 말이군.’
그들은 저마다가 사용하는 무기를 꺼내놓은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언제라도 다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축제는 배의 출항을 알리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시작이었다. 즉, 그 후로 참가자들끼리 치열한 싸움이 펼쳐진다는 의미였다.
“모두 정해진 선실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착장에서 들리는 직원의 외침에 참가자들은 모두 각자의 선실로 향했다.
아론 역시 라엘, 켄트와 함께 움직였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참가자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딱히 눈에 띄게 강한 녀석은 없는 것 같아.’
물론 실력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맞붙어 보면 다 여실없이 드러날 일이었다.
잠시 후, 아론 일행은 배정 받은 선실로 들어갔다.
“여기가 우리가 있을 방이군.”
이곳은 3명이서 지내기에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곳이었다.
문은 닫을 수 있었지만 잠금장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섬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 틀어박혀 있기란 불가능했다.
선실의 창문 너머로는 바다가 보였다. 항해가 시작된다면 도망칠 곳은 바다 뿐이었다.
실격 처리는 되겠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다른 참가자들이 탈출하는 것을 곱게 놔두진 않겠지.’
콜로세움 축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조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하지만 범접치 못할 실력자가 나타날 경우, 급작스럽게 연합이 형성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실력자라고 해서 무조건 우위를 차지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섣불리 자기 실력을 드러내는 건 협공을 자처하는 길이었다.
특히, 이 좁은 배에서 다수의 적을 만드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론이 자신의 겉모습을 연약하게 설정한 것은 무시는 당할 지언정 장점이 되어주었다.
아론 일행을 얕본 잔챙이가 달라 붙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다수의 협공은 피할 수 있었다.
뿌우우-
어느덧 배의 출항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철컥!
각자의 선실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퍼억! 서걱!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 조라도 더 탈락시키겠다는 열의를 엿볼 수 있었다.
콰앙!
누군가가 아론의 선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론은 녀석들의 낯이 익었다.
‘분명 우리가 올라올 때부터 계속해서 노려봤던 녀석이었지?’
아무래도 약해 보이는 자신들을 먼저 해치울 생각인 모양이었다.
“발버둥치지 않으면 곱게 보내주마.”
3명 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남의 실력도 가늠 못하는 녀석이 칼을 들다니.’
아론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녀석들의 상태창은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 낭비였다.
겉으로 느껴지는 기운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그저 한탕하러 온 시정잡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실력이 있다면 이렇게 쳐들어오지 않았겠지.’
녀석들의 태도는 이쪽을 한참 깔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신사스럽다고 느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곳에서, 누가 정정당당하게 나 들어갑니다 하고 공격해 오겠는가.
만약 아론이었다면 기습을 선택했을 것이었다.
“굳이 여기서 힘을 뺄 필요가 있나?”
“뭐?”
갑작스럽게 들어온 3인조는 아론의 말에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섬에 도착하면 하나의 조가 남을 때까지 피터지게 싸울텐데, 굳이 미리 싸울 필요는 없지 않나?”
아론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그렇지. 너희들이 우리 방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건 어떤가? 그렇게 해 준다면 섬에 도착할 때까지 목숨은 살려주겠다.”
물론 정말 원해서 그렇게 제안한 건 아니었다. 아론 특유의 도발 방식이었다.
“……크하핫! 들었냐?”
먼저 말을 걸었던 녀석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눈을 희번득 거리며 라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익!
놈은 그녀의 목을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라엘은 그것을 가볍게 피했고, 곧바로 손목을 낚아챘다.
화르륵!
그녀가 잡은 부위에서 화염이 방출되었다. 녀석의 피부는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끼야악!”
놈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저, 저 새끼가!”
대장이 당하자 뒤에 있던 두 남자의 눈이 뒤집혔다. 그들은 라엘을 죽일 듯이 바라보며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동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꽈아악!
켄트가 마법으로 두 사람을 속박해 버렸다.
“윽! 으윽!”
둘은 발버둥쳤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게 조용히 내 말대로 하지 그랬어.”
아론은 충고하며 그들에게 마법을 날렸다.
서걱! 서걱!
동시에 두 사람의 양팔이 잘려나갔다.
“끄아아악!”
팔이 절단되며 느껴지는 고통에 그들은 처절하게 소리쳤다.
“켄트, 좀 도와 줘.”
상황이 정리되자 아론은 켄트와 함께 세 사람을 선실 바깥으로 내던졌다.
굳이 죽이진 않았다.
어차피 저들의 능력으론 재기해서 복수를 다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만신창이가 된 세 사람이 나가게 된다면 그걸 본 나머지 참가자들이 경각심을 가지길 바랐다.
아론 일행이 있는 선실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의미를 깨달았으면 했다.
아론은 굳이 배 위에서 힘을 빼기가 싫었다. 어차피 섬에 가면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괜히 여기서 마법을 쓰다가 배가 난파되기라도 한다면 실격 처리가 되니 곤란할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선실 문에 함정을 설치해 두자.’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에 작업을 해두었다.
뭣도 모르고 들어오는 녀석에게는 강력한 전격 마법이 선사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선실 밖에 던져둔 세 사람을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들어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쳐들어왔다.
그런 불나방들에게는 아론이 준비해 둔 함정이 발동했고, 기어코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론의 선실을 노리는 자들 중에선 제법 머리를 쓰는 녀석도 있었다.
끼익- 탁.
선실 문을 살짝 열고는 안에 무언가를 던지고는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론은 그게 뭔가 싶어 유심히 바라봤다.
「마나 폭탄」
· 발동 후 일정 시간 뒤에 터지는 마나 폭탄. 안에는 다량의 독이 함유되어 있다.
‘독?’
상태창을 본 아론은 순식간에 몸을 날려 그것을 망토로 덮었다. 그런 뒤에 재빨리 아공간을 열어 마나 폭탄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몇 초가 지났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나 폭탄이 무사히 아공간 안에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아론은 숨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 님. 방금 그건……?”
“독이 든 폭탄이었다. 터졌으면 큰일날 뻔했어.”
영문을 몰랐던 두 사람은 아론의 설명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었다. 아론이 입고 있는 망토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위험에 처했을 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전략을 바꾼다. 이러다간 스트레스 때문에 컨디션을 망치겠어.”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이끌고 선실을 나왔다.
차라리 밖에서 마주치는 족족 쓸어 버리는 선택이 나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잔챙이들 뿐이었다. 녀석들을 상대하고 나서 오늘 밤은 편하게 배를 타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가관이군.”
“이미 한번 휩쓸고 갔군요.”
밖에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타다닥!
통로에 있는 아론 일행을 발견한 어느 조가 무기를 쥔 채 달려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하지만 아론이 곧바로 마법을 쏘았고, 녀석들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았다.
아론은 시체들을 피해 천천히 갑판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자리를 잡은 뒤에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 알아서 꿀을 탐하러 온 벌레들이 꼬일 것이었다.
켄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근처에 배리어를 쳐 두었다.
파바박!
숨어서 이쪽을 노려보던 사람들이 암기를 날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켄트의 마법을 뚫지 못했다.
잠시 후.
갑판 위에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아론을 바라보았다.
암묵적인 연합이 형성된 셈이었다.
원래라면 아론도 이 점을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일망타진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으니 더 이상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전부인가?”
아론은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죽을려고 작정을 했구나, 너희들.”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론 일행에게 말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이 정도 수의 사람에게 협공을 받게 된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같이 싸운다 해도, 절대적인 실력 앞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지금 이 배에 탑승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포식자는 바로 아론이었다.
분명 아론 일행은 세 명이고 공격을 하려는 쪽은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본능이 그들이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 * *
“객기 부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여기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도 살아남을 것 같나?”
아론 일행을 둘러싼 무리 중에서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너부터 갈기갈기 찢어주마!”
한 명이 아론에게 도발을 하자 그 분위기가 전염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겁쟁이들이라고 해도 뭉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딱 지금 상황에 알맞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어중이 떠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힘 좀 쓰니까 이 축제에 참여한 것이었다.
‘저런 샌님한테 겁을 먹었다는 게 알려지면 창피를 당할 거야!’
물론 그런 창피도 살아 남아야 당할 수 있는 거지만, 이미 바보 같은 용기가 샘솟은 그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분위기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합류해서 아론 일행을 쓸어 버리려고 했지만, 이내 아론의 강함을 알아차리고 뒤로 빠지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녀석들까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왕 갑판 위로 모두 나오게 했으니, 한 번에 다 잡아 버릴 생각이었다.
아론의 사전 준비에는 물이 필요했다. 그것을 소환하기 보다는 원래 있던 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휙!
아론이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쿠구구!
그러자 바닷물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리버스 그래비티 마법이었다.
‘마나 소모는 최소화 해야지. 저 섬에 며칠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식량도 미지수이니 말이야.’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뭐, 뭐야?”
나머지 참가자들은 갑자기 양옆으로 바닷물이 허공에 떠오르자 깜짝 놀랐다. 그러한 반응이 이들이 어중이 떠중이라는 증거였다.
어느 정도 눈치가 빠른 녀석들은 실드 마법을 쓰거나 오러를 둘러 몸을 지킬 준비를 했다.
촤하학!
떠올랐던 바닷물이 갑판 위로 몰아쳤다. 사람들은 원치 않았던 물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그러자 아론은 라엘과 켄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전에 오크를 잡을 때 보여줬던 연계 기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파지지직!
세 사람의 전격 마법이 허공에서 부딪히자 순식간에 화력이 커지면서 사방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 전격 마법이 물에 닿는다면 아론 일행도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콰카칵!
그래서 아론은 동시에 마법을 하나 더 시전했다. 자신과 일행을 주위로 감싸는 반구 모양의 얼음벽을 세웠다.
콰콰쾅!
전격 마법은 굉음을 만들면서 내리쳤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하고 동시에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파지직-…….
잠시 후. 아론은 얼음벽을 치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쾌한 냄새가 주위에 풍기고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전기에 타서 죽은 시체 뿐이었다.
갑판 위에 바닷물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아론 일행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운 얼음벽 때문이었다. 얼음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아론이 기지를 발휘한 셈이었다.
“이제야 좀 조용히 쉴 수 있겠군.”
아론은 죽어 버린 참가자들을 뒤로 하고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아침.
아론은 배의 기적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이 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곧 섬에 도착한다는 뜻이었다.
아론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잠을 못 잔 것 같진 않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은 페리움에서 실력을 향상시키고 왔으니까.’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갑판 위로 나갔다. 그러자 시야에 여러 척의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는 우리 배처럼 아예 다른 참가자들을 제거한 모양이군.’
아론이 탄 배처럼 오직 3명만이 갑판에 나와 있는 배도 있었다.
또 어떤 배는 참가자들끼리 여전히 눈치를 보면서 섬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곳도 존재했다.
‘3번 배가 안보이네?’
배는 자동 항해이므로 뒤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밤중에 전투를 벌이다가 그만 배가 침몰했다는 뜻이었다.
“곧 섬에 도착합니다.”
각 배에 설치된 아티팩트에서 일제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배들은 섬에 흩어져서 정박하게 될 겁니다. 각 배들이 어디에 내릴지는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아론은 최대한 빨리 내리길 원했다. 그래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섬에는 곳곳에 식량과 식수가 있는 거주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섬에 내리는 사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즉, 수요에 비해 공급이 훨씬 적으니 살고 싶다면 먼저 구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뺏으라는 말이었다.
“모든 배에서 사람이 내리면 섬의 경계에 결계 마법이 설치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결계가 좁아질 겁니다. 결계 밖에 5초 넘게 있으면 탈락입니다.”
이어서 자잘한 설명이 계속해서 나왔다.
아론은 그 내용을 듣자마자 지구에 있을 때 몇 번 해 봤던 PC 게임이 떠올랐다.
이렇게 어느 섬에 떨어지고 식량과 무기를 모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그 게임. 방식은 거의 비슷했다.
아론이 탄 5번 배는 속도를 올려 섬의 동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배가 선착장에 정박했다. 아론은 내리자마자 곧장 탐지 마법부터 펼쳤다. 섬의 전역에 참가자들이 뿌려진 이상, 상대의 위치부터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되돌아오는 마나를 느끼면서 섬의 지형과 사람들의 위치를 하나둘 파악해나갔다.
‘직선 거리로 수 키로미터 정도의 섬이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크기는 아니야.’
어느 정도 파악을 끝낸 아론은 이제 움직이기로 했다.
“숲으로 들어가면 식량을 구하기 어려울 텐데, 여기 근처에서 구해서 들어갈까요?”
켄트가 아론을 향해 물어보았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바로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여기에 며칠이나 있을 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식량은 가는 길에 하루나 이틀 정도 버틸 양만 챙기면 된다.”
“예?”
켄트는 아론의 그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우리가 구할 필요는 없지. 내 말 알지?”
“아……!”
켄트는 아론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동시에 그가 무서우면서도 효율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론이 탐지 마법으로 파악한 결과 섬의 동쪽면에는 총 18명의 사람이 내렸었다.
‘이들이 움직일 방향은 정해져 있지.’
사방에 위협이 노출되어 있을 텐데 노상에서 식량을 구하고 잠들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밖에서 야영을 하기 보다는 거주지를 구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결계의 존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참가자들은 마지막에 중앙으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아론은 가장 많은 이들이 향할 것으로 예상되는 거주지로 향했다.
거주지라고 해봤자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빈 집들이 늘어져 있는 장소였다.
잠시 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거주 구역에 도착한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가 좋겠어.”
아론은 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은 그가 말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흔적을 지운 뒤에 숨기 시작했다.
쿠웅!
챙! 챙!
아론 일행이 숨은지 시간이 좀 지나자 사방에서 산발적인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모이는군.’
참가자들은 아론이 예측한 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꾹- 꾹-.
그때, 쿠브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론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니?”
“적이 오고 있어.”
쿠브는 그 말을 전달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라엘, 켄트. 2층으로 올라가서 숨어 있어.”
아론은 두 사람에게 지시한 다음에 자신은 반대편 문을 통해 집을 빠져 나갔다.
저벅저벅.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그들은 이 집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아론은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일단, 피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리고 등에 맨 가방이 어느 정도 차 있는 상태였다.
아마 여기까지 오면서 몇 명을 죽이고 전리품을 획득한 모양이었다.
“역시 두목 따라 가니까 일이 쉽게 풀린다니까.”
“맞아. 덕분에 우리가 제일 먼저 거주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잖아?”
“식량도 많이 모았고. 이제 나머지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이는 걸 보면서 기회를 노리면 되겠군.”
두 사람은 자신의 두목을 칭찬하며 낄낄거렸다.
“이봐. 잡소리 하지 말고 여기 수색부터 해.”
그러나 두목은 냉정했다.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두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쯧. 융통성이 그리도 없어서야.”
한 명은 두목이 듣지 못할 크기의 목소리로 말하면서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우리보다도 빨리 온 사람이 없을 텐데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올라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라엘과 켄트가 있었다.
남자가 무어라 말도 하기 전에 켄트의 마법이 먼저 발동되어 그를 속박시켰다.
그리고 라엘의 재빠른 공격으로 녀석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 수색을 끝낸 부하가 두목에게 보고했다.
“1층 수색 끝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나?”
“예, 그렇습니다.”
“흥. 제프는 아직 안내려왔고?”
“그런 모양입니다.”
“쯧. 왜 이렇게 굼뜬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2층에 올라간 제프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객이 와 있었군.’
두목은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위층에서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비록 한 명이 당했더라도, 과감하게 버린다는 판단을 하면 되었다.
‘먼저 와서 숨어 있다면 괜히 들쑤시고 다니는 게 등신이지.’
판단을 마친 두목은 이 집을 빠져나가자는 내용을 부하에게 수하로 전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집밖으로 나왔다.
쑤욱!
그러나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딘 순간,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그 둘은 추락하고 말았다.
슈슈슉!
동시에 구덩이에서 뾰족한 가시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두 사람의 몸을 관통했다. 결국 그 둘은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렇게 함정을 파 둔 건 당연히 아론이었다.
그는 밖에 나간 사이에 녀석들이 빠져나올 때를 대비해 이렇게 해 두었었다.
‘나오지 않으면 라엘과 켄트랑 협공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당해주니 고맙군.’
아론은 구덩이 속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방금 참가자들 말고 여기에 도착한 사람은 없었다.
아론은 녀석들의 가방만을 챙겨서 집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이 정도 식량이면 잘하면 이틀은 버티겠어.’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한 아론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좋은가. 직접 식량을 구하지 않아도 이렇게 남들이 챙겨와 주니 말이다.
‘여기서 한두 팀만 더 잡고 떠나자.’
아론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탐지 범위에 이상한 기운이 잡혔다.
‘뭐지?’
그 기운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른 기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한 명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요동치는 기운은 단 하나였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주위의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죽이면서 이동하고 있었다.
* * *
아론은 뒤통수가 싸함을 느꼈다. 무언가가 확실하게 이상했다.
여기 참가한 사람들은 그래도 어딘가에서 한 가닥 하는 자들이었다. 지방 영지에서 싸움 좀 했거나, 칼밥을 먹었거나, 방랑 용병 생활을 하는 등 그들 나름대로 커리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움직이는 녀석이 있다니.
아론은 그 미지의 참가자가 엄청난 실력을 보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자신과 동급은 되지 않을까 하는 판단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은 없었는데?’
아론은 곰곰이 생각했다.
배를 타기 전에 선착장에서 모든 이들의 면면을 살펴 두었었다.
적어도 자신과 비빌만 하거나 강한 자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착각을 했나?’
그럴 리는 없었다.
아론은 상대가 긴가민가 했으면 상태창부터 열어 봤으니 말이다.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러나 탐지 마법에 걸리는 이자는 진짜였다. 누군가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섬까지 왔다고 아론은 판단했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군.’
아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 라엘과 켄트를 불렀다.
“작전을 좀 변경해야 할 것 갈다.”
“무슨 일이십니까?”
두 사람은 다급해보이는 아론의 표정에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강적이 나타났다. 녀석은 단신으로 우리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다.”
“예? 그런 참가자가 있었습니까?”
켄트는 놀라서 물었다.
그도 승선하면서 면면을 살폈지만 눈에 남을 정도로 강한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따.
“놈의 진행 방향이 우리가 있는 쪽이다. 딱히 우리를 노리고 오는 것 같지는 않아. 이동 패턴으로 보아 방향만 겹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 탐지 마법에 걸린 거니까 녀석의 거리는 여기서 꽤 멀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점점 다가올수록 우리를 알아차리게 되겠지.”
지금도 세 사람은 기운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의 강자라면 어느 정도 거리에서도 그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녀석을 피해 다른 방향에서 다시 터를 잡는 게 나아 보인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아론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싸워서 좋을 것이 없었다. 설령 악전고투를 해서 이기더라도 피해가 클 것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온갖 하이에나들이 달려들겠지.’
필연 부딪친다면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이었다. 그러면 소리를 듣고 나머지 참가자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컸다. 그렇게 된다면 녀석들과도 싸워서 이겨야 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 미지의 강자와는 싸울지언정 마지막에 가서 붙어야 한다.’
아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도 배에서 나머지 참가자들을 정리하고 숙면을 취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거주 구역을 다시 옮겨야 하지만 하루 정도는 잠이 부족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론 일행은 방금 전투로 획득한 짐만을 챙겨서 이동했다.
***
아론은 미지의 녀석이 이동하는 방향과 접점이 없는 거주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세 팀의 연합이었다.
놈들도 아론과 비슷하게 주거 지역에 숨어들어서 이곳으로 오는 참가자들을 기습하는 작전을 세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론의 탐지 마법에 걸려 버린 이상, 그 작전은 무용지물이었다.
녀석들은 상대하기 편하게 한 집에 모두 모여 있었다.
아론은 라엘과 켄트를 이끌고 들어가 순식간에 녀석들을 처리했다.
그는 9명의 시체를 치운 후에 그들이 남긴 물품들을 확인했다.
꽤 많은 참가자들을 처리한 것인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 물건을 획득한 것인지는 몰라도 식량과 식수가 많이 있었다.
‘이 정도면 아예 여기서 버텨도 되겠는데?’
하루나 이틀 정도의 식량이 아니었다. 나머지 참가자들이 싸우다 죽기를 기다리는 게 가능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식량도 냄새가 멀리 풍겨나가지 않는 것들로 되어 있었다.
“아, 이 느낌은…….”
“그래. 나도 감지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팔찌를 통해서 마나 반응을 겪었다. 이는 결계가 점점 범위를 좁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탐지가 틀리지 않았다면 여기가 섬의 중앙 근처다.’
이곳의 위치도 버티면서 기회를 노리기에 적절했다.
아론은 탐지 마법을 계속 가동하면서 참가자들의 동향을 살폈다.
결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는 모양인지,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운이 좋지 않아서 섬의 가장자리에 둥지를 튼 녀석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녀석들끼리 서로 이동하는 도중에 격렬하게 맞붙었다.
물론 아론이 있는 주거 구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론 일행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들어오는 족족 녀석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섬에서의 1일차가 끝나가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전투로 인해 피곤함을 겪었다.
예상보다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섬에 사람이 많을수록 전투 횟수가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밤이라고 해서 편히 쉴 순 없었다. 오히려 습격을 노리는 자들이 좋아하는 시간이었기에, 섬의 각지에서는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건 아론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세 사람은 실력이 있었기에 금방 침입자들을 처리했지만, 피로가 점점 누적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2일차 낮이 밝았고, 전투는 전날보다 심해졌다.
결계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참가자들을 중앙으로 몰았기에 서로 부딪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론은 거주 구역으로 들어오는 자들과 전투를 하면서도 미지의 강자에 대한 움직임을 계속해서 살폈다.
다행히도 이동한 것이 정답이었다. 누군진 몰라도, 아론 일행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눈앞에 마주친 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하면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쯤되니 호기심이 일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는 녀석을 죽이는 게 편할 텐데, 저렇게 규칙 없이 움직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인건가?’
간혹 그런 사이코패스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2일차도 끝이 나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래도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많이 줄어 든 모양이었다.
아니면 중앙의 거주 구역에 들어가면 살아 남는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라도 돈 것일까.
이번 밤에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쉴 수 있는 기회였다.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보초를 서며 잠을 청하기로 했다.
맨 처음의 보초는 켄트가 자청했기에 아론과 라엘은 잠깐 휴식을 취했다.
아론이 누워서 기분 좋게 잠에 빠지려고 할 때. 켄트가 아론을 깨웠다.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아론은 벌떡 일어났다.
단잠이 방해되었다고 해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켄트에게 위험하다 싶으면 깨우라고 말을 해뒀으니 말이다.
라엘도 아론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같이 따라서 깨어났다.
“어디에 있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기에 탐지 마법은 자제하기로 했다. 갑자기 마나 파동이 뻗어 나가면 상대에게 위치를 들킬 수 있었다.
“저깁니다.”
켄트는 창문 너머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아론이 유심히 살펴보니 인영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상대의 실력이 잘 가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간에 움직이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녀석이라면 절대로 약한 녀석이 아니었다.
‘게다가 혼자라고?’
아론은 저 인영이 여태껏 경계했던 미지의 강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상태를 지켜본다.”
아론은 선공보다는 관망을 택했다. 그렇다 해도 아론이 숨어 있는 이 집으로 온다면 곧바로 공세에 나설 생각이었다.
‘상대가 강하긴 해도, 이제는 사람이 많이 줄었으니까 어부지리를 노리고 오는 하이에나도 거의 없겠지.’
그것이 싸워도 된다는 판단 근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투만은 피하고 싶었건만, 녀석은 아론 일행이 있는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이동한다.”
아론은 라엘과 켄트와 함께 1층으로 이동했다. 여차해서 문을 여는 순간 기습을 할 생각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밖에서 발 소리가 멈추었다.
아론은 두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화력을 쏟아붓기로 했다.
잠시 후.
끼익-
문이 열렸고.
털썩!
공격을 하려는 찰나에, 들어오던 정체불명의 사람이 쓰러졌다.
이것도 무슨 연기인가 싶어서 세 사람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고, 쌕쌕 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론은 영문을 몰라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 상대가 있는 곳으로 비추었다.
이내 그 정체를 확인한 아론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크 에드먼스?’
에드먼스 가문의 막내였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나타나자 아론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라크가 이 섬에 나타난 것일까.
자신을 쫓아서 온 건 아니었다. 산맥을 내려온 이후로 쭉 의태한 모습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라크는 자신이 아론인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론은 그가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라크는 땅에 쓰러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가라.”
엮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어차피 원한 관계도 아니었기에 여기서는 내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잠깐만 여기에서 숨을 시간을 줘.”
라크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제안인데?”
“내가 몸을 회복할 시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보상은 두둑히 챙겨주겠어.”
그 말을 들은 아론은 고민했다.
라크의 현재 몸 상태로는 아론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라크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왔을 것이다. 만약 그게 공작과 관련된 거라면 이번 일을 정보로 넘길 수 있겠지.’
만약 그가 임무 중이었다면 이 정도 상태까지 되었다는 건 사실상 임무를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공작에게 알린다면 라크에게는 타격이 크리라.
설령 라크가 회복을 하고 보상을 주지 않은 채 도망간다면, 그때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 되는 일이었다.
“알겠다.”
“그럼 부탁하겠다.”
라크는 그 말을 끝으로 기절했다.
‘대체 우리를 뭘 믿고 이러는 건지…….’
아론은 그런 라크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절대 이런 방법은 쓰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는 깨어난 뒤에 들어야 겠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라크를 안쪽으로 옮겼다.
* * *
아론은 라크를 눕혀둔 뒤에 다시 한번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이 아이가 내 탐지 마법에 걸렸던 그 녀석일까?’
잠시 후, 되돌아 오는 마나 파동을 분석한 아론은 라크가 그 미지의 강자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강력한 기운을 지닌 채 떠돌아다니는 녀석을 한 명 찾아낼 수 있었다.
‘……녀석의 정체는 라크가 아니었군.’
아론은 한숨을 쉬었다.
라크라면 그 정체 모를 강자라고 해도 이해가 되었다. 그는 에드먼스 가문 출신이었고 강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또는 라크와 비견될 정도의 다른 강자가 이곳에 존재한다니. 아론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져옴을 느꼈다.
일단 쉬기로 했다. 이쪽으로 오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날 밤은 세 사람이 보초를 번갈아 서면서 휴식을 취했다.
라크는 오전이 되어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주변을 경계했다.
‘……집안?’
이내 그는 자신이 새벽에 무슨 일을 벌였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라크는 자신이 노리던 표적과 싸우다가 마나를 거의 다 소모하게 되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다른 참가자들이 몰려들어와 공격을 했었다.
그는 겨우 그것을 피하면서 이 거주 구역까지 오게 되었다.
빈집인 줄 알고 들어왔지만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보호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다.
설령 코웃음을 치더라도 가문의 이름을 내걸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누군진 몰라도 이들은 자신의 요청을 수락해 주었다.
라크는 다시 한번 집안을 살펴보았지만 그 세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아무래도 어디 정찰이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도망칠까?’
라크는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접어두기로 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건들지 않고 지켜 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뒷통수를 친다는 건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로서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였다.
‘고마운 사람들이군.’
그들에게는 제대로 보상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아론을 비롯한 세 사람이 집으로 돌아왔다.
라크는 그들을 보자마자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간밤에 나를 이곳에서 쉬게 해줘서 고맙네.”
그러면서 맨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뭐지?’
라크는 남자의 주위로 흐르는 마나 흐름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러 형태로 마나를 방출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이 정도는 허용 범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불편하긴 했지만 이내 의심을 거두었다.
“감사 인사는 됐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기진맥진해서 여기로 오게 된 건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론은 자세한 전말을 듣고 싶었다. 라크를 곤경에 빠트릴만한 녀석은 그 미지의 강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라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언젠가 맞붙을 녀석의 정보도 얻게 될 터였다.
“좀 긴데 괜찮겠나?”
“주변을 돌아보고 왔는데 당분간 사람은 오지 않을 것 같아. 시간은 기니까 천천히 들어보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가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이 대회에 참가했네. 참고로 임무 내용은 말해 줄 수 없으니 양해 바라네.”
라크의 말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종의 임무를 지니고 이 축제에 참가한 모양이었다. 급작스럽게 온 준비해서 온 모양인지 나머지 두 명의 팀원도 여기서 구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섬으로 오는 배에서 두 사람이 라크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고, 당연히 라크는 반대로 녀석들을 힘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가 탄 배는 서쪽에 정박했고, 거기서부터 행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 녀석도 라크와 같이 서쪽에서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 빨리 만난 게 이해가 안 된다.’
라크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중심지로 이동하던 도중에, 거구의 사내에게 습격을 당했다. 녀석은 어떤 무기도 쓰지 않고 두 주먹만을 휘둘렀는데, 매우 강한 녀석이었지.”
아론은 라크가 말하는 녀석이 그 미지의 강자임을 알아차렸다.
“녀석에게는 내 공격이 통하지 않았어. 마법을 계속해서 날렸지만 몸에 가벼운 생채기를 내는 게 고작이었지.”
그러던 도중에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했고, 라크는 일단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워낙 요란하게 싸웠고 피도 흘린 터라서 근처에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몰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녀석들과 전투를 치루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나를 한계치에 가깝게 사용해서 탈진을 해 버린 것이었다.
“그대들은 나를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표하지.”
라크는 예를 갖춰서 세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론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웠다.
‘라크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론이 가문 내에서 그와 말을 섞은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망나니 생활을 하고 나서는 자신을 본 척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예를 갖춘다던가 그런 녀석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말도 조리있게 잘 했고, 은혜도 갚을 줄 아는 녀석이었다.
“나는 에드먼스 라크라고 하오.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그대들이 여기에 참가한 이유는 승리가 목적이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그럼 내가 그대들을 이 대회 기간 동안 지켜주도록 하겠네.”
라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인장이 찍힌 패를 하나 주었다.
‘이건……?’
아론도 잘 아는 것이었다.
“이게 있으면 단 한 번. 어느 상황에서든 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내 무력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돈이 필요하면 이걸 보여주시오.”
아론은 그 패를 확인해보았다.
이전에 아론이 헤카롯에서 경매 직원들을 속일 때 꺼냈던 신분 증명패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거는 정말 대가를 치룰 때 쓰는 백지 수표였다.
‘허허, 참.’
아론은 자신의 뒷목을 어루만졌다.
상황이 웃기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기가 에드먼스 가문의 사람인데, 동생에게 도움을 받고 거기다가 인장이 찍힌 패까지 받게 되다니.
‘웃기긴 하지만 나쁠 것은 없지.’
아론은 그 패를 잘 받아 두었다.
나중에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터였다.
“밖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니, 공도 마법사인 것 같소. 그것도 꽤나 실력 있는 사람 같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소속을 알 수 있겠소?”
아론은 그런 라크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그는 자신이 아론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나도 처음에 드워프의 목걸이를 봤을 때 구분을 못했으니 말이야.’
그 정도인데 라크도 알아보긴 힘들 것이었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방랑 마법사다.”
아론은 굳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흐음. 그대 실력이면 꽤 좋은 스승을 둔 모양이오.”
“뭐, 그런 셈이지.”
그는 라크의 질문을 적당히 받아 넘겼다.
“그대라면 실력에 있어서 문제는 없겠군. 혹시 아까 이야기 했던 그 거구의 녀석을 나와 함께 잡지 않겠소?”
라크는 제안을 했다.
아론에게도 나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맞붙어야 할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말했었지만, 우승자 자리는 자네에게 주겠네.”
라크의 방금 말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콜로세움 축제에서 승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미지의 강자인 거구의 사내를 해치우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가문에서 받은 임무는 바로 녀석을 처리하는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좋지. 받아 들이겠소.”
그렇게 둘 사이에 공동의 목표를 두고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
라크와 연합하게 된 그날 저녁.
결계는 이제 반경이 3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또, 결계가 줄어드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살아 남은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결계가 줄어드는 속도 때문에 다시 전투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아, 아.”
그때, 섬 전체에 아티팩트로 확장시킨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별 볼 일 없는 애들은 다 죽었을 테고, 진짜들만 남아 있지 않습니까? 좀 더 속도를 올려볼까요?”
그런 말이 들리더니 이내 참가자들의 팔찌에서 빛이 흘러 나왔다.
아론도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빛은 허공에 지도를 띄워 주었다.
‘이건 섬의 지도잖아?’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현재 줄어 들고 있는 결계의 모습이며, 붉은 점들이 섬 곳곳에 찍혀 있었다.
‘이 점은 딱 봐도 생존자들이 있는 위치를 나타내고 있군.’
아론에겐 친숙한 것이었기에 금방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남은 건 11명에 다섯 팀인가?’
아론 일행 세 명.
정체를 모르는 3인으로 이루어진 두 팀.
라크.
그리고 미지의 강자.
이렇게 총 11명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얼마 없으니 주최 측에서는 화끈하게 서로 싸운 뒤에 끝내라고 이렇게 진행하는 것 같았다.
“앗! 이쪽 점이 움직입니다.”
그때, 켄트가 지도를 가리키며 외쳤다.
점 하나가 3인의 팀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이내 두 세력은 마주치고 말았다.
콰쾅!
실제로 저 멀리서 전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몇 차례의 소리가 더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져 버렸다.
아론은 지도를 확인했다.
세 개의 점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녀석이 그 미지의 강자…….’
그는 지도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아론 일행과 라크. 3인의 팀과 강자 한 명이었다.
형세가 좋지 않았다.
자신들이 정체 모를 팀과 미지의 강자 사이에 끼어 있는 상태였다.
‘녀석의 행동 패턴 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놈을 노리고 달려들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저 세 명의 팀을 노리기 보다는 아론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올 것이 확실해 보였다.
아론은 급히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저 세 명의 팀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이내 파악을 끝낸 아론은 라엘과 켄트에게 부탁했다.
“너희 둘이서 오른쪽에 있는 저 팀을 맡아 주도록 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저 녀석을 쓰러트릴 동안 시간만 벌어줘도 고마워.”
“알겠습니다.”
아론은 두 사람을 보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협공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론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라엘의 마투술이나 켄트의 보조 마법을 보는 순간 라크는 자신을 아론이라고 특정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이름을 묻지 않았군.”
“……반스라고 부르면 된다.”
“반스. 좋은 이름이군.”
아론은 가명을 불러주었다.
“그대와 같은 곧고 강한 사람과 같이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네. 잘 부탁하오.”
라크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아론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도 잘 부탁하지.”
더는 잡담할 시간이 없었다.
지도상에서 붉은 점 하나가 아론과 라크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