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17/40)

Chapter 2

오크 킹의 우렁찬 외침에 드워프 워리어들은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의 압도적인 기운에 순간적으로 기가 눌려버렸다.

하지만 아론은 다른 의미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크 킹이 들고 있는 검에 꽂혀 있었다.

‘저 검…… 어딘가 이상한데?’

험하게 써서 빛이 바래 있었지만, 검에서 넘실거리는 기운으로 보아 오크가 들고 다닐 만한 검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아론은 혹시나 싶어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쿠베라 소드(복제품)」

· 칠검 중 하나인 쿠베라 소드의 복제품.

‘뭐……?’

아론은 진심으로 놀랐다.

오크가 대체 왜 칠검의 복제품을 들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오크 킹이 나타난 것도 아이젠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론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오크 킹을 상대해야 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요소가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이젠이 오크 킹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복제한 쿠베라 소드를 넘겨준 것일까?

아니면 이들이 오크 킹을 생성해내는데 일조한 것일까?

아론이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크 킹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지성이 높다고는 해도 언어가 달라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단 저 녀석을 잡는 것만 생각하자.’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대열을 펼쳐라!”

티푸르의 외침에 드워프 워리어들은 신속하게 움직여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조는 오크 킹과 사투를 벌이는 역할이었다. 나머지 조는 이곳으로 다가오는 오크들을 처리하는 것을 맡았다.

쿠구구…….

오크 킹을 바라보는 드워프 수호자들은 일제히 투기를 최대로 개방하였다.

특히 티푸르의 기운은 놀라울 정도였다. 옆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투기를 자랑했다.

하지만 오크 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뿜어내는 기운은 혼자서 수호자들의 것과 맞먹고 있었다.

아론도 자신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면서 공격할 준비를 했다.

“쿠워어!”

오크 킹이 포효했다.

동시에 수호자들이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투기를 쏘아냈다.

파지지직!

아론의 전격 마법도 그들의 공격에 더해져서 날아갔다.

오크 킹은 그들의 공격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두 세력의 힘이 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굉음을 만들어 냈다.

부딪친 두 개의 힘은 결국 우위를 가리지 못하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충격파를 토해냈다.

그것을 신호로 난전이 시작되었다.

아론과 드워프들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모든 방향에서 오크 킹을 공격했다.

드워프들의 날 선 투기와 아론의 마법이 함께 녀석의 몸통을 두들겼다.

하지만 오크 킹은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았다. 공격이 닿는 순간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면서 그 공격을 튕겨내고 있었다.

콰득!

그러면서 제일 앞에 있던 드워프 수호자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그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한 방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녀석의 위력에 나머지 드워프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공격했다.

드워프들은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크 킹을 쓰러트리지 못하고 개죽음을 맞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드워프 측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철벽과도 같았던 오크 킹의 몸에는 하나둘 상처가 생기는 중이었다.

“쿠르르르……!”

오크 킹이 숨을 토해내면서 양손으로 검을 내리찍었다.

쾅!

바닥을 친 검에서 격류가 터져 나왔다. 강력한 기운이 드워프들을 덮쳤다.

어떤 원리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공격으로 힘의 균형이 순식간에 역전이 되었다.

수호자들은 격류를 맞고는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거기에는 아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우욱!”

아론은 급히 마법을 써서 바닥을 나뒹구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충격이 신체 내부를 강타하는 것은 온전히 막지 못해 구역질이 나왔다.

‘정신을 잃어선 안 된다!’

아론은 자신을 다잡으며 앞을 바라봤다.

‘티푸르……?’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 수호자들은 모두 충격에 튕겨 나갔었다.

하지만 티푸르는 격류를 버텨내고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격을 버텨낸 것은 대단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티푸르 혼자서 킹을 상대하는 형국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건 위험하다.’

오크 킹은 티푸르를 노리고는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아론은 급하게 땅을 짚었다.

‘쿠브, 도와줘!’

그러면서 어스 바인드 마법을 시전했다.

아론의 마나는 순식간에 땅을 훑고 오크 킹이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촤라라락!

녀석의 발밑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 줄기들이 양팔을 구속했다.

오크 킹은 대뜸 자신의 팔을 감싸는 것들이 기분 나빴찌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공격하기로 했다.

쿠구구……!

하지만 공격은 실현되지 못했다.

녀석이 팔을 움직이려고 힘을 준 순간 주변의 땅들이 들썩였기 때문이었다.

주문의 이름대로 오크의 팔을 감싼 마나 줄기는 일대의 땅에 결합되어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론이 5서클의 벽을 깨면서 대량의 마나를 섬세하게 컨트롤 할 수 있어서였다. 물론 쿠브의 도움도 한몫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티푸르는 아론의 도움으로 오크 킹의 공격을 피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머지 수호자들도 충격에서 회복되어 다시 녀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촤학!

팔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지금의 오크 킹은 점점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쿠워어!”

하지만 녀석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쿠구구구……!

오크 킹이 힘을 주자 다시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콰앙!

이내 녀석의 근처 땅이 폭탄이 터진 듯 치솟아 올랐다.

‘저 미친…….’

아론은 오크 킹의 괴력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녀석은 기어코 힘으로 마나 구속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자유를 찾은 오크 킹은 아론을 노려보았다. 그가 쓰는 마법에 당해주면 안 되겠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촤하학!

녀석은 드워프의 거센 공격을 받으면서도 아론을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쐐애액!

그러자 녀석의 검에서 붉은 기운이 빠른 속도로 아론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것을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즉시 전방에 배리어를 몇 겹으로 전개했다.

콰앙!

공격이 부딪히면서 폭음이 일었다. 바로 앞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니 아론은 귀가 순간 멀고 말았다.

털썩.

아론은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입에서는 피가 주륵 새어 나왔다.

“크윽…….”

배리어가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만으로도 아론의 약한 몸이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아론은 혹시 다음 공격이 이어서 오나 싶어 앞을 바라봤다.

때마침 수호자들이 오크 킹을 향해 견제 공격을 해주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만약 다음 타가 날아왔다면 아론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내 몸 상태라면 이들한테 민폐만 끼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품에서 환 하나를 꺼냈다.

그건 비상시를 대비해 준비해 두었던 칠성초의 환이었다.

여기에는 극미량의 칠성초가 담겨 있었지만, 각성 효과는 확실했다.

‘반동은 심하겠지만, 지금 물불 가릴 때가 아니아.’

아론은 즉시 환을 씹어서 삼켰다.

그러자 몸에 기운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고통이 가셨고, 마나가 서클 주위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아론은 즉시 마법을 써서 오크 킹이 서 있는 바닥을 무너트렸다.

쿠쿵!

그 속도는 오크 킹이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매우 빨라 대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깊이도 꽤나 깊어 오크 킹의 전신을 담을 수 있었다.

수호자들은 순간 일어난 상황에 당황했다. 하지만 바칸은 아론이 왜 이렇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전에 오크 나이트를 상대할 때도 비슷한 방식을 사용했었다.

“전부 구덩이 속을 향해 공격해!”

바칸이 외치면서 자신의 도끼를 휘둘렀다. 나머지 수호자들도 일제히 구덩이 속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콰콰쾅!

어마어마한 굉음이 일어나며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저번에는 아론이 만든 돌벽이 충격을 감쇄해 주었지만, 이번에는 그게 없었기에 사방으로 기운이 날뛰었다.

잠시 후, 충격이 잦아들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잡은 건가?”

수호자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면서 구덩이 아래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콰득!

그 순간이었다. 수호자의 목은 허공을 날아갔다.

쿵!

만신창이가 된 오크 킹이 피를 흩뿌리며 다시 땅 위로 올라왔다.

다른 종족이었다면 금방이라도 쓰러졌을 정도의 상처였다.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힘을 과시했다.

“쿠워어어!”

오크 킹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론을 향해 분노를 토해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은 녀석의 행동을 막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광기에 찬 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녀석이 다가오거나 말거나.

아론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오크 킹이 공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온 순간. 아론은 영창을 완성했다.

화아악!

주위에서 빛줄기가 솟아 올라왔다. 아론이 어스 바인딩을 썼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촤라라락!

무수히 많은 빛줄기가 오크 킹의 몸을 옭아맸다.

드워프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이내 그들은 자신의 무기에서 빛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단 살아 있는 드워프의 무기만이 아니었다.

명을 달리한 자들의 무기에서도 모두 빛줄기가 나와서 오크 킹을 붙들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그들의 무기가 레어 메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레어 메탈은 마나가 잘 통하는 특성이 있었다.

특히 이들의 무기는 드워프들이 만든 것이니 순도가 높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즉, 마법을 쓰는 최적의 수단이 되어주는 셈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의 무기를 공명시켜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아론에겐 시간 가속 마법이 있었다.

그가 칠성초 환을 복용하고 구덩이를 파 오크 킹을 떨군 것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었다.

거기에다가 바칸이 눈치 빠르게 구덩이 속으로 일제 공격을 해준 덕에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다.

쿠구구……!

오크 킹은 이 악물고 속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진짜 힘 하나는 무지막지하게 센 녀석이군.’

지금 이 마법은 어스 바인딩보다 훨씬 강하게 녀석을 묶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것도 결국 시간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른 수호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크 킹을 죽이기 위해 힘을 모아 총공격을 가했다.

서걱!

수호자들이 쏘아낸 투기가 녀석의 목을 날렸다.

동시에 오크 킹을 속박하던 상체 주위의 빛줄기도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갔다.

녀석은 목숨이 끊어졌지만 원념만은 남아 있었는지 아론을 향해 주먹이 휘둘러졌다.

아론은 급히 배리어를 펼쳤다.

콰앙!

공격이 날아올 줄은 몰랐기에 미처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었다.

쿠당탕!

배리어가 붕괴되면서 아론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갔다.

* * *

아론은 그만 오크들이 있는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호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겨우 오크 킹 사냥에 성공했는데 아론이 죽거나 기절한다면 페리움으로 귀환할 수 없었다.

수호자들은 아론을 지키기 위해 그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쿠르르…….”

하지만 오크 나이트와 잿빛 오크들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오크 킹이 죽은 결과, 녀석들은 통제되지 않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오크 본대를 여섯 등분으로 나누어서 접근을 막았던 불의 장막도 시간이 다 되어서 사라진 상태였다.

여러모로 드워프 측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수만의 오크 대군을 맞이해야 하는 광경이 펼쳐질지도 몰랐다.

수호자들은 어떻게든 아론에게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 분투했다.

촤학!

그들의 공격에 오크가 한 번에 십수 마리씩 터져 나갔다.

하지만 물량 앞에선 장사 없었다. 녀석들은 꾸역꾸역 밀려들어서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크워어!”

그리고 이성을 잃은 오크 나이트들은 지성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흉포한 힘이 채우고 있었다.

“젠장!”

바칸은 오크를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몰려오는 오크의 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간 아론 님이 죽겠어!’

자기 혼자라면 모를까, 이곳에는 다른 수호자들과 드워프 워리어들이 있었다.

그들을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아론의 생존은 필수였다.

바칸은 결국 눈을 감고 자신의 정령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어…… 바칸?”

“너 설마 정령을 쓸 생각인가?”

주변의 수호자들이 바칸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그의 주위로 정령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칸이 계약한 정령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게 아니면 아론 님을 구할 수 없다.”

그는 눈을 뜨면서 그렇게 말했다.

쿠구구……!

주위가 진동하면서 허공에 공간의 왜곡이 생겨났다. 이윽고 그곳에선 거대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칸이 계약한 땅의 정령왕이었다.

“대가를 치를 각오는 하고 나를 부른 거겠지?”

“그렇습니다.”

바칸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저는 아론 님을 구하고 싶습니다.”

“알겠다.”

정령왕은 아론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땅이 뒤틀리더니 일직선으로 무수히 많은 가시가 솟아났다.

콰콰콰칵!

솟아난 가시는 발을 디디고 있던 오크들을 모조리 꿰뚫었다. 결국 녀석들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어 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길이 뚫리자 수호자들은 전력으로 달려 아론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는 바닥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여태까지 그를 지켜준 건 쿠브였다.

녀석은 작은 몸집으로 벽을 만들어 내면서 오크의 접근을 막느라 애를 썼었다.

“네가 바친 대가로는 이 정도가 전부다.”

정령왕은 길을 뚫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수련의 성과를 모두 바친 건데, 생각보다 짧군요.”

바칸은 탄식하며 말했다.

못해도 자신의 성취가 이 일대의 오크들을 소멸 시켜 줄 정도는 될 줄 알았었다.

“계약자여, 착각하지 말거라. 네가 나에게 바친 대가는 내게 있어서 결코 귀한 것이 아니었다.”

정령왕의 대답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보통의 생물체보다 오랜 시간을 사는 그들에게 바칸의 성취는 평범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아론 님이 깨어나실 때까지는 필사적으로 막아보지요.”

바칸은 자신의 무기를 쥐고 오크들을 상대하려고 했다.

“어? 그쪽은…….”

그때, 정령왕이 쿠브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흐렸다.

“크흠!”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령왕이 본격적으로 권능을 다루었다. 그러자 아론을 노리던 일대의 오크들은 아까처럼 솟아난 가시에 찔리거나, 벌어진 땅 밑으로 추락하는 등 최후를 맞이했다.

그 숫자는 못 해도 천 마리 가까이는 될 것이었다.

바칸을 비롯한 드워프들은 영문을 몰라서 그 광경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정령왕은 소란을 끝낸 뒤, 예의를 갖춰서 쿠브에게 인사했다.

“대지의 신 가이안 님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쿠브는 그런 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기억을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 형태라면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정령왕은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쿠브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와 쿠브를 비추기 시작했다. 쿠브는 그것을 모두 흡수하였다.

“제가 물질계에서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대지의 신의 품이라면 그 씨앗은 빨리 자랄 수 있겠지요.”

주위에 있는 드워프들은 물론이고 쿠브도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네 덕분에 귀한 인연을 만나고 가는군.”

정령왕은 바칸을 보고 그렇게 말한 뒤 사라졌다. 그건 그 나름의 인사였다.

쿠브는 자신에게 벌어진 신기한 일 때문에 잠깐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아론을 향해 다가갔다.

쿠브는 그의 이마에 자그마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쿠브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으음…….”

덕분에 아론은 깨어날 수 있었다.

정령왕이 오크를 해치우고, 쿠브와 어떤 것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은 아론이 깨어난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내가 기절했었나?’

아론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분명 자신은 오크 킹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이 죽고 나서 그 속박이 풀렸다. 그리고 힘이 실린 주먹이 자신을 강타했고, 그 충격으로 기절한 것이 떠올랐다.

“오크 킹은 확실히 죽었습니까?”

아론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생명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했네.”

티푸르가 대답해 주었다.

“혹시 녀석이 들고 있던 검은?”

“그것도 챙겼으니 걱정 마시게.”

아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티팩트를 가동해 퇴각만 하면 되었다.

“일대의 오크를 정리했지만 모든 오크를 죽인 것이 아닐세. 시간을 지체하면 곧 녀석들이 몰려올 것이야.”

“알겠습니다. 바로 텔레포트를 기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티팩트를 꺼내 작동시켰다.

우우웅.

마나를 불어넣자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드워프들은 작은 마정석을 꺼내서 손으로 쥐었다.

마정석은 아티팩트에서 나온 빛에 반응해서 깜빡거렸다.

잠시 후, 모두가 마나로 연결되는 데 성공했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은 거기서 사라지고 없었다.

***

한편, 페리움 성에서는 초조하게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작전 중인 모양인지 오크들의 공세는 아직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켄트는 손에 있는 아티팩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만약 저쪽에서 아론이 텔레포트를 기동했다면 아티팩트에 신호가 올 터였다.

‘제발, 아론 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켄트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라엘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켄트의 손에 있던 아티팩트가 빛을 점멸하기 시작했다.

“와, 왔다! 신호가 왔어!”

그는 서둘러서 넓은 공간에 아티팩트를 설치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마나를 계속해서 주입했다.

화아악!

아티팩트가 빛을 내뿜었다.

이윽고 100여 명이 넘는 실루엣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오……!”

드워프들은 그것을 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매스 텔레포트가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환한 자들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도련님!”

라엘은 곧바로 아론을 향해 달려갔다. 드워프 워리어들은 그녀를 위해 길을 터 주었다.

“도련님……!”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론은 눈을 감은 채 티푸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설마 아론이 봉변을 당한 건가 싶어 그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사람 죽은 것처럼 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이내 아론은 눈을 뜨고 라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사하셨군요!”

“응.”

그는 매스 텔레포트를 기동하기 위해 마나를 대량으로 끌어다 썼었다.

거기에 더해 칠성초의 환까지 먹은 상태였으니, 그 반동을 여실 없이 겪고 있는 중이었다.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켄트도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에도 좀 무리하긴 했네. 그래도 도박은 성공했으니까.”

“저희가 더 강해질 테니까, 앞으로는 목숨 좀 그만 거세요.”

아론의 말에 켄트는 핀잔을 주었다.

“고맙네, 아론.”

이어서 부족장들이 아론을 향해 다가왔다.

“자네 덕분에 페리움을 지킬 수 있었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전사들이여! 모두 수고 많았다!”

부족장의 말에 드워프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거, 아직 전쟁이 끝난 거 아닙니다.”

아론은 그들의 반응이 난처할 뿐이었다.

“이제 곧 구심점을 잃은 오크 중 일부가 이곳으로 올 겁니다. 우리는 녀석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록 오크 킹이 사라져서 일사불란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오크의 수는 많았다.

“쿠워어어!”

때마침, 성벽 너머에서 오크의 괴성이 들려왔다.

“자네의 말이 맞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병사들을 지휘해 곧장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끝나면 자네를 위해 파티를 열 생각이네. 참가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쿠르트의 말에 아론이 대답했다.

“제가 공이 큰데, 맨입으로 오면 곤란할 겁니다.”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물론이지. 우리 드워프들은 절대 은혜를 잊지 않는다네.”

쿠르트는 아론을 뒤로하고 오크 잔등과 전투를 치르기 위해 성벽 위로 올라갔다.

* * *

오크의 군세가 페리움의 내성을 공략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행동은 어딘가 엉성했다.

이전에는 일사불란함을 보여주었다면, 지금은 본능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크 킹을 잃은 녀석들의 모습이 여실 없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오크 치프들은 복종에서 풀려나니 자기 부하 오크들을 데리고 다시 산맥을 내려가는 녀석도 있었다.

어떤 오크 치프는 다른 오크들을 공격하게 했고, 냅다 성으로 달리는 오크들도 있었다.

녀석들은 수만 많다뿐이지 중구난방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오크들은 페리움에 큰 위협을 줄 수 없었다.

드워프들은 착실히 수성을 하면서 오크들의 수를 줄여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우위를 점했다 싶었을 때, 그들은 녀석들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나가는 과감함도 보였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오크를 해치우는 것을 넘어 루테룬의 영토를 다시 확보하는 것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드워프 측이 연일 승전 소식을 들려오는 동안, 아론은 자신의 방에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저번 전투에서 너무 많은 마나를 쓴 탓이었다. 거기다가 칠성초의 환을 복용한 결과 얻은 부작용도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아론은 매일 끙끙 앓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라엘이 매일 아침 칠성초를 달여다 주었지만, 차도가 극적으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제 칠성초도 마신 지 꽤 지났으니 효과가 초반만큼 크게 나타나진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증상을 낫게 해주기보다는 마나 중독으로 인해 줄어든 수명을 다시 늘리는 효과밖에 없는 듯했다.

‘조금만 더 육체 능력이 좋았었더라면…….’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약골의 신체를 한탄했다.

침대에 누워서만 시간을 보내니 심심해진 아론은 쿠브를 불러냈다.

퐁!

아론은 녀석을 보고 놀랐다.

쿠브의 머리카락 색이 갈색에서 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너 머리색이…….”

“나도 몰라! 자고 일어나니 바뀌어 있던걸?”

“그, 그렇구나…….”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잠깐만. 얘 말하는 것도 좀 길어지지 않았나?’

그리고 자연스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짧은 문장 단위로만 말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어?”

“글쎄? 으음…… 아! 나, 정령왕을 만났어!”

“정령왕이라고?”

아론은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언제 만난 거지?’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억의 편린이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기절했을 때였나?’

그때 정신이 혼미했었지만 정령왕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대지의 신 가이안이라고 했었나?

정확한 상황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단어들은 이상하게도 아론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론은 기억을 더듬으면서 쿠브를 바라보았다.

쿠브는 무언가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아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게 대지의 신이라니.

아론은 잘 믿기지 않았다.

“쿠브. 너 가이안이라고 알아?”

그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쿠브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쿠브가 좀 더 성장하면 알게 되려나……?’

지금 깊게 생각해봤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아론은 차후 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니 아론은 침대에서 일어나 움직일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서클이 늘어나서 그런 건지, 옛날과 비교해서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이제 슬슬 밖에 나가도 괜찮을 때가 되었을 때, 드워프 측에서 그를 찾아왔다.

드워프는 오크들을 모두 토벌했으니 승전 파티에 참여해달라고 말을 전했다.

***

파티가 열리는 곳은 왕성의 연회장이었다.

아론은 거기까지 마차를 타고 가면서 페리움을 돌아보았다.

도시와 거리는 멀쩡했기에 전쟁을 겪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드워프들의 희생도 따랐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게 막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론은 왕성 앞에 도착하자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에서는 페리움의 성벽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저기는 그래도 흔적이 있구나.’

성벽 근처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당연했다.

오크 중에는 성벽 위로 올라와 난동을 부린 녀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드워프들이 발 빠르게 보수 작업을 진행한 결과, 다시 예전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새삼 아론은 드워프들의 기술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왕성으로 들어가서 연회장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많은 드워프들이 모여 있었다.

“오, 아론!”

누군가가 들어오는 아론을 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아론에게 꽂히게 되었다.

“어서 오게!”

“술 한잔하게나!”

드워프들은 아론을 서로 모셔가려고 난리였다.

처음에는 그가 배척을 받았지만, 이제는 모든 드워프들이 그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건 당연했다. 아론이 오크 킹을 사냥하는 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는 것은 드워프 중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은혜를 입으면 절대로 잊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론은 그들의 입장에서 이종족임에도 불구하고 페리움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미리 연회장에 도착했었던 라엘과 켄트가 와서 아론에게 인사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응. 푹 쉬니까 나아졌어.”

아직 찌뿌둥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오늘은 나 걱정하지 말고 다들 즐기라고.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니까 말이야.”

아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부족장들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리 공신이 왔구만.”

그들 역시 아론을 환영해 주었다.

“자, 다들 축배를 들게나!”

부족장이 외치자 드워프들은 각자 술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론도 분위기에 맞춰서 따라 행동해 주었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드워프들은 서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과 음식을 나눠 마셨다.

그중에서도 아론은 단연 인기인이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한다고 몸이 바빴다.

“오셨군요.”

어느덧 아론은 바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바칸을 보자마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들어 보니, 바칸은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계약한 정령왕에게 대가를 치렀다고 했었다.

아론은 솔직히 자신이 그럴 만한 인간인가 의구심이 들긴 했다.

그렇기에 바칸이 보여준 헌신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아론은 말끝을 흐렸다.

지금 그의 기운을 느껴 보니 거의 2서클 정도가 날아가 있었다.

실력이 낮았던 자면 몰라도, 그는 높은 성취를 이뤘었다.

거기서 두 단계가 낮아진 셈이니 그 상실감은 크게 느껴질 게 분명했다.

“저를 구해주기 위해 힘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론의 말을 들은 바칸은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무려 정령왕이 당신을 구해준 겁니다. 언제 그런 기회를 겪어보겠습니까?”

바칸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탁탁 쳤다.

아론은 그게 자신을 배려한 허풍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도 10년 가까이 수련하신 걸 날리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아론 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번 전투는 격렬했으니까 언젠가 쓰겠구나 하고 각오는 했었습니다.”

바칸은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아쉽긴 합니다. 당신과 대련을 못 할 걸 생각하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칸 님이 다시 성취를 회복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습니다. 먼 훗날 다시 붙어 봅시다.”

둘은 서로 악수를 하면서 미래를 다짐했다.

“이보게!”

그때, 누군가가 아론을 불렀다.

그 정체는 헤핌이었다.

“헤핌 공.”

“바루나 소드를 성공적으로 가공했네.”

“정말입니까?”

아론은 그 소식이 반가웠다. 펜던트에 박힌 보석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아론의 마나 역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아그니 소드를 만들 때 요령이 생겨서 이번 건 빨리 끝낼 수 있었지.”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드워프를 도와서 싸운 이유도 어찌 보면 이것 때문이었다.

“이거 받게나.”

헤핌은 아론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아론이 그것을 받아 열어보니, 안에는 푸른색의 보석이 있었다.

‘이게 바루나 소드를 가공한 거구나.’

아론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고맙습니다.”

“나도 만드는 데 재밌었으니 됐다. 나중에 마나를 이용해서 펜던트에 보석을 넣으면 될 거다.”

한번 써봐야 알겠지만, 이걸 이용하면 5서클 마스터의 힘은 충분하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도 받게나.”

헤핌은 웬 검집을 아론에게 주었다.

별다른 꾸밈이 들어가지 않은 민무늬의 검집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뭡니까?”

아론은 그 쓰임새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헤핌에게 물어보았다.

“앞으로 남은 검들을 찾아다닐 것 아니냐? 설마 자네는 그때마다 이곳으로 올 생각을 한 건가?”

“그건 힘들겠죠……?”

“그래서 내가 만든 거다. 이건 검을 넣기만 하면 미티움을 추출할 수 있는 도구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다만.”

헤핌의 설명을 들은 아론은 검집을 감탄하면서 바라보았다.

‘대체 드워프의 기술력은 어떻길래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는 거야?’

역시 헤핌이 괜히 페리움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론 역시 앞으로 칠검을 얻으면 어떻게 가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만 있다면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거기 비어 있는 공간이 마정석을 넣는 곳이다. 이걸 가동하려면 꽤 고순도의 마정석이 필요할 텐데, 그건 알아서 구하도록 해라.”

그건 당연했다.

이렇게 도구까지 줬는데 마정석까지 내놓으라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마정석이 아무리 비싸도 그린데란트 산맥을 매번 건너는 것보다는 기회비용 면에서 훨씬 경제적일 게 분명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것도 만들어 주시고.”

“나야말로 오랜만에 미티움을 만져볼 수 있어서 좋았네.”

헤핌은 만날 손님이 있다며 줄 것만 주고 다른 곳으로 갔다.

“오오, 아론.”

이어서 아론은 부족장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태까지 미안했네.”

쿠르트를 제외한 부족장들은 아론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들은 회의에서 사사건건 아론에게 반대를 했었다. 사실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가 인간이라서 무시했던 것이 컸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는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론은 그들의 사과를 신사적으로 받았다.

“우리가 영웅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네.”

쿠르트의 말을 들은 순간, 아론은 저번에 자신이 입 밖으로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선물을 달라고 했는데 정말 준비해 준 건가?’

그건 반쯤 농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챙겨주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금 이동해도 되겠나? 자네 동료들도 같이 따라와 주면 고맙겠네.”

“알겠습니다.”

아론은 라엘과 켄트를 데리고 쿠르트를 따라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페리움의 왕실 무기고였다.

거기에는 페리움이 건국된 이후로 드워프 장인들이 만들어 낸 걸작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자네들이 원하는 무구들을 아무거나 고르게. 하나씩 주겠네.”

여태까지 왕실 무기고에서 포상으로 한 번에 세 개의 무구가 나간 적은 없었다.

그것도 드워프가 아닌 인간에게 내리는 포상이라니.

쿠르트의 말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거고 저거고 다 고급 무구들인데…….’

아론은 아픈 것이 싹 가시고 군침이 돌았다.

목숨을 걸고 드워프의 왕국을 지킨 대가는 충분했다.

* * *

아론은 무기고 내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급스러운 무구들이 벽면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대륙으로 나온다면 하나하나가 비싼 값에 팔릴 것이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추측은 망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여기 있는 것들을 다 팔면 중간급 영지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드워프들이 이걸 인간에게 팔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비유할 정도로 여기엔 최상급 무구들뿐이었다.

라엘과 켄트도 하나씩 가져갈 권한을 얻었으니 신중하게 무기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두 사람도 여기의 무기가 질이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류가 아쉽긴 하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무기가 도끼, 메이스의 둔기류거나 검들이었다.

아무래도 드워프들이 쓰는 것이다 보니 종류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잘 찾아보면 스태프도 몇 개 있었고, 방어구도 쓸 만한 종류가 있었다.

“이걸 저희가 받아도 되는 건지…….”

켄트는 무기들을 살펴보며 말을 흐렸다.

“우리 왕국을 구해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일세.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갚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지만요.”

“오히려 입을 닫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속이 불편해서 참지 못하겠네.”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고민이 되네요. 무기들이 이렇게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켄트는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라엘 역시 똑같은 마음이었다.

“자세히 살펴보게. 아마 각자에게 맞는 걸 고를 수 있을 걸세.”

쿠르트가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다.

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보이자 쿠르트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고르다 보면 알 수 있을걸세.”

아론은 설명을 요구하려 했지만, 쿠르트의 다음 말이 그것을 막았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편히 고르기 어렵겠지. 잠깐 자리를 비켜줄 테니 천천히 골라 보시게.”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왕실 무기고를 나갔다.

이제 이곳에는 아론과 라엘, 켄트뿐이었다.

‘우리를 이렇게 놔둬도 되는 건가?’

그들을 감시하는 드워프는 없었다. 아론은 괜스레 걱정이 들었지만, 그만큼 드워프들이 자신을 믿는다는 증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쿠르트가 해준 조언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열심히 무기고를 둘러보았다.

“저는 이게 괜찮아 보이는데요?”

켄트가 어느 스태프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휘둘러서 무게를 측정해 보고, 마나를 불어 넣어서 얼마나 마법 발현이 잘 되는지도 시험해보았다.

아론이 옆에서 본 그의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저 스태프가 마음에 드나 보군.’

아론은 켄트가 들고 있는 것의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가디언즈 스태프」

· 드워프 장인 오멘이 만든 걸작 시리즈 중 하나. 좋은 소재와 견고한 마감이 돋보인다.

· 지원 계열 마법의 효율을 소폭 상승 시켜 준다.

그걸 본 아론은 살짝 놀랐다.

켄트가 상태창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보조 마법의 효율을 올려주는 스태프를 골랐는지 신기했다.

‘혹시 다른 것들도 똑같은가?’

아론은 근처의 스태프들의 상태창을 모조리 열어보았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켄트에게 맞는 옵션이 붙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딱 맞는 걸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걸 골라서 다행이야.’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라엘이 무엇을 고르는지 살펴보았다.

그녀는 마투사다 보니 자신이 쓸 만한 건틀릿을 살펴보고 있었다.

라엘도 마음에 드는 건틀릿을 하나 찾더니 신중하게 사용해보기 시작했다.

아론은 건틀릿의 상태창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염 계열 마법을 사용하면 효과를 증가시켜주는군. 그리고 일정 확률로 폭발하는 기능이 있네.’

다행히 그녀도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은 것 같았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는군.’

그러나 아직 아론만이 무기를 선택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쿠르트 님이 말했었지. 무기를 고르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걸 찾을 수 있다고.’

저들에겐 그 조언이 통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아론은 켄트에게 왜 그것을 골랐는지 물어보았다.

“으음.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마치 이 스태프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이게 널 불렀다고?”

“예. 말로 하니까 참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요. 근데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켄트는 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해 답답한 모양인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론도 그 설명이 이해 가지 않았다.

‘무기가 자신을 불렀다라…… 얘네가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아론은 혹시나 싶어 라엘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도 켄트와 비슷한 대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결국, 아론이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무기들을 둘러볼 때까지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여태껏 봤던 것 중에 가장 옵션이 나은 걸 골라야 하나?’

다행히 아론에게는 상태창이 보였으니 그걸 지표로 삼아 무기를 고를까 생각했다.

그래도 둘러보면서 후보군 몇 개는 정해 뒀었다.

‘그래. 그중에서 고르자.’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왔던 곳을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아론의 감각에 싸한 기분이 들었다.

‘어?’

마치 뭔가를 놓고 가는 느낌이었다.

퐁!

동시에 쿠브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쿠브?”

아론이 이름을 불렀지만 쿠브는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갔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쿠브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거!”

쿠브는 구석에 있는 웬 상자를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건 아론도 보고 지나쳤던 것이었다. 처음 봤을 때 딱히 이렇다 할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쿠브가 스스로 무언가 했을 때, 나쁜 걸 당한 기억은 없었어.’

아무래도 태초의 정령은 신묘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쿠브는 상자에 손을 대었다.

찰칵!

그러자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저절로 그것이 열렸다.

아론은 조심스럽게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

‘이건…… 망토잖아?’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붉은색의 망토였다.

아론은 혹시나 싶어서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알 수 없는 망토」

· ? ? ? ?

· ? ? ? ?

상태창에는 이름도 제대로 뜨지 않았고 그 밑으로는 죄다 물음표였다.

아론의 머릿속에도 물음표가 차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뭐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망토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 감각은 전신을 타고 전해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론은 켄트와 라엘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구가 부른다는 느낌이 이런 뜻이었구나.’

아무래도 이게 자신에게 딱 맞는 무구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론은 한편으로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거, 가져가도 되려나……?’

다른 무기들처럼 공개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다는 건, 어느 정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아무거나 가져가도 상관없다 했으니, 별일 없겠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망토를 챙겨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다들 괜찮은 것들을 골랐나?”

쿠르트는 웃으면서 세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자네는 건틀릿을 선택했구나. 그쪽은 스태프를 골랐군. 둘 다 좋은 것을 고른 거 같아 다행이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하지만 아론이 고른 것을 보고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고를 줄은 몰랐군.”

“혹시 이건 가져가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아닐세. 여태껏 많은 이들이 이곳을 방문했지만 그걸 찾아낸 자는 없었네. 자네가 골랐다는 건 운명일 테지.”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혹시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우리의 전신인 그렘달 님이 사용했던 무구 중 하나이네.”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론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상태창에는 죄다 물음표만 차 있는 건가?’

어쩌면 자신이 대박을 고른 걸지도 몰랐다.

“이 망토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까?”

“망토 안에 아공간이 들어있네.”

아론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공간이란 말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가.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아공간이 존재하네. 그래서 그 안에는 어떠한 물건이든 수납이 가능하지.”

“가방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지는군요.”

“하지만 그렘달 님은 그걸 좀 다르게 사용하셨지. 망토의 아공간을 활용해서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하는 방법을 쓰셨다.”

“그게 됩니까?”

“말로는 쉽지만 어려울 걸세. 공격을 맞는 순간 수많은 아공간을 적절하게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지.”

쿠르트는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망토에 새겨진 방어 마법 회로도 괜찮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걸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아공간을 이용해서 공격을 무효화할 수 있다니.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이 망토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여태까지 아론은 몸이 약해서 항상 목숨을 판돈으로 도박을 걸어왔었다.

운이 좋아서 여태까지 죽음을 피했다뿐이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망토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아론의 위험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쿠르트의 말을 들어 보니 사용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쿠르트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들을 위해 다른 선물도 준비했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어쩐지 미안해졌다.

챙겨줘도 너무 챙겨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또, 그만큼 자신들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걸 여실 없이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준다는 데 사양하지 않고 받기로 했다.

“이렇게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네. 선물을 빨리 주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그렇게 됐네.”

“아닙니다. 덕분에 좋은 것을 받았는걸요.”

“어서 연회장으로 가세. 파티는 기니까 말일세.”

아론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 연회를 즐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론은 점심 즈음에 회의장으로 급히 찾아갔다.

오크 킹이 들고 있던 검의 분석이 끝났으니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게.”

회의장에 들어선 아론은 드워프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들 굳은 얼굴로 회의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검을 분해해본 결과, 조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드워프 장인 한 명이 설명을 시작했다.

“저는 이게 미티움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하게 분해해보니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인가?”

“미티움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 인공 소재입니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소재를 만들어내다니.

그것도 미티움과 비슷한 것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드워프들은 동경하는 소재인 미티움을 다루고 싶어서 여러 연구를 했었다.

극미량만 세계에 존재하다 보니, 만질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했으나 그들도 실패했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치세. 그러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더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드워프 장인을 두고 나머지 드워프들이 계속해서 질문 세례를 날렸다.

아론은 생각했다.

‘복제품을 만든 건 당연히 아이젠일 것이다.’

이전에 바루나 소드의 복제품을 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양산이 힘들 텐데, 왜 세상에 이런 식으로 계속 존재를 드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이것도 실험을 위한 자료 수집 같은 건가?’

아론은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미티움이 가진 힘은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아그니 소드를 이용해 마법을 썼었고, 지금은 펜던트를 사용 중이니 말이다.

그와 비슷한 소재를 써서 무구를 만들 수 있다면 기사든 마법사든 그것을 가지길 원할 것이다.

만약 이걸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면…….

대륙의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이젠은 그걸로 패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속셈이라고 추측되었다.

* * *

아론은 회의가 끝난 뒤 방으로 돌아갔다.

회의에서는 결국 오크 킹의 검이 인공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것 말고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어떻게 오크 킹의 손에 들어왔는가. 그것은 알아내지 못했다.

아론은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페리움에 온 건 결과적으로 잘한 것 같다.’

그는 이곳에서 수련한 결과 5서클의 벽을 뚫을 수 있었다. 만약 바깥이었다면 갖은 방해로 성장 속도가 늦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라엘과 켄트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대륙에 있을 때 라엘은 체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오로지 책에만 의존했었는데, 여기서 드워프들과 대련을 하면서 그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고의 수확은 이 펜던트지.’

아론은 헤핌이 만들어 준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에 칠검을 모두 모아 박을 수 있다면 인공 마나 하트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그 방대한 마나를 토대로 9서클에 도달하는 게 가능했다.

아직 다섯 개를 더 모아야 했다. 하지만 기약 없이 서클 수련을 하는 것보단 이게 더 가능성이 큰 방법이었다.

‘그리고 쿠브의 정체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지.’

대지의 신 가이안.

반쯤 기절했던 상태에서 들은 그 이름. 만약 아론이 잘못 들었던 게 아니라면, 쿠브의 정체는 대지의 신일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쿠르트의 배려로 얻게 된 망토. 아직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익힐 수만 있다면 유용할 게 분명했다.

‘여기에 와서 많은 걸 얻었군.’

물론, 이번에도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에 걸맞는 보상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할 순 없었다. 아직 갈 길은 멀었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포드 공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도 알아내야 한다.’

그가 공작에게 포드에 대해서 물었을 때는 그저 구금되어 있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서열을 올려라. 공작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놈의 서열……!’

아론은 이를 갈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아론은 실력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가 아이젠도 문제다.’

그는 이번에 오크 킹이 지닌 검 역시 칠검의 복제품이란 것을 알게 되고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아이젠이 칠검의 양산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들이 미티움을 인공 소재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고, 그걸로 무기를 양산해 낸다면…….

‘대륙의 판도가 뒤집혀 버린다. 그들의 창끝이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메도우드 왕국. 그것도 에드먼스 가문이 되겠지.’

아론은 그 전에 남은 칠검의 행방을 찾아서 펜던트를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실력을 증진시키고, 가문 내 서열도 올리고, 아이젠의 음모도 막아야 했다.

‘후우. 할 일이 많구나.’

아론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크들도 무사히 막았겠다.

이제 페리움에서 볼 일은 없었다.

그럼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아론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칠검의 행방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동안 어디에서 몸을 숨겨야 하는지도 문제겠군.’

아론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고민했다.

생각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똑똑.

라엘이 문을 두드리고 나서 들어왔다. 그녀는 아론이 먹을 저녁 식사를 가져온 것이었다.

만약 라엘이 이렇게 환기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아론은 한밤중까지 고민했을 게 분명했다.

“라엘. 슬슬 여기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아론의 그 말에 그녀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에 몇 달간 지내면서 정을 붙인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아론은 이미 생각해 둔 곳이 있었다.

“할로움으로 갈 생각이다.”

“그쪽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있으신가요?”

“이웨카 길드를 찾아갈 거야. 거기서 나머지 칠검의 행방 등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지.”

이웨카 길드의 실력은 검증이 끝난 지 오래였다. 거기라면 믿고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바로 오늘 떠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천천히 준비해 둬. 켄트한테도 말해두도록 해.”

“알겠습니다, 도련님.”

아론은 그렇게 일러둔 뒤에 자신도 준비를 해 두었다.

***

그로부터 나흘 뒤.

아론은 떠날 준비를 마치고 라엘, 켄트와 함께 페리움의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주위로 많은 드워프들이 모여 있었다.

페리움을 오크로부터 구한 은인이 떠난다길래 다들 배웅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홀가분해서 좋군.’

아론은 현재 빈손으로 나와 있었다. 원래라면 짐이 많았겠지만, 망토의 사용법을 어느 정도 익혀서 아공간에 물품을 보관해 두었다.

“아론 님, 조심해서 가세요!”

배웅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뷰란트도 있었다. 그는 아론에게 다가와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래. 혹여나 다시 대륙으로 나올 거면 나한테 언질을 줘. 몰래 나오려고 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한편, 뷰란트의 형인 카슈는 라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여기에 있는 동안 카슈가 대련 상대로 어울려 줬었다. 그래서 떠나보내는 그의 마음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니다. 밖에서도 정진하도록 해.”

카슈는 웃으면서 그녀를 보내주었다.

“부족장님들이 오십니다!”

그때, 쿠르트를 비롯한 족장들이 아론 일행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아론을 산맥 아래까지 안전하게 호위할 차와 워리어들이 따라오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바칸이 호위대장으로 같이 갈 예정이었지만, 저번 전투 이후로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는 따라갈 수 없었다.

“가시는 길도 호위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아닙니다. 이번만이 만남은 아니니까요.”

“다시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는 반드시 제가 호위해 드리지요.”

바칸의 그 말에 아론은 웃으면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쿠르트 님.”

“수고 많았네.”

쿠르트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동안 거처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제든 오시게. 그대는 우리의 은인이니 말일세.”

쿠르트의 그 말에 나머지 부족장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 행선지는 정했는가?”

“할로움으로 갈 생각입니다.”

“거기는 용병 도시라고 했었나? 내가 인간들의 도시는 잘 몰라서 말일세.”

“예, 맞습니다.”

“어딜 가든 자네에게 행운이 깃들길 빌겠네.”

“감사합니다.”

아론은 그렇게 모두와 인사하고 그만 페리움을 떠나려고 했다.

“자네. 약소하지만 이걸 받아주겠나?”

그때, 쿠르트가 아론에게 주머니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열어보게.”

아론은 그가 말한 대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보석이 잔뜩 들어있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드워프들이 세공한 거잖아?’

하나하나가 대륙에서는 특등품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보석들이었다.

이것의 가치는 감히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내가 왕국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챙겨주나?’

괜히 드워프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말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먼 옛날에 인간과 드워프들이 교류하던 시절, 인간들은 이러한 것들을 탐내서 그들의 성품을 이용해 먹은 적이 있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론의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할로움에서 행동하려면 돈이 들었다. 게다가 가문의 의무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중에 이런 선물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조심해서 가시게.”

아론은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다. 그들을 배웅하는 드워프들을 뒤로하고, 차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론 일행을 태운 차는 성을 지나고, 그린데란트 산맥을 질주했다.

그들은 바깥의 풍경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몇 달간을 있어서 그런지, 나오니까 섭섭하네요.”

“맞아요. 마치 꿈만 같아요.”

아론은 두 사람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들 좋은 분들이셨죠.”

“응, 대륙에 퍼져 있는 소문과는 다르게 착한 이들 뿐이었어.”

언젠가 한가로워 졌을 때, 다시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운이 좋게도 아론 일행은 산맥 초입에 도착할 때까지 몬스터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까지 오크 대군세의 이동이 있었기 때문인지 산맥의 몬스터들이 사리는 모양이었다.

아론 일행은 차가 멈추고 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저희 페리움을 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호위대장을 맡은 티푸르는 아론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대가는 충분히 받았으니까요.”

“할로움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저희 비행선으로 태워드리겠습니다.”

아론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비행선을 타고 가기로 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인비저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남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덕분에 할로움으로 가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스륵스륵.

이웨카 길드의 수장, 셀린.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방금 올라온 정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오늘 처리해야 하는 정보들만 책상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렇게 정보 길드에는 온갖 곳에서 정보들이 몰려오는데, 그것 중에서 중요한 것만 추려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런 일에 잔뼈가 굵었다. 보고 내용을 몇 번 훑어보는 것으로도 요점을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경이로운 정보 처리 속도 덕분에 이웨카 길드는 항상 품질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던 중, 셀린은 어느 보고서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게 드디어 발견되었구나.’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하필 이게 하퍼에 있다니. 이걸 어떻게 해야 가져올 수 있지?’

셀린은 나머지 보고서를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끄적거리기도 하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면서 그 보고서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똑똑똑.

그런 그녀의 집중을 깨트린 것은 노크 소리였다.

“……들어 와.”

셀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렇게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 의뢰인이 찾아오셨습니다.”

“없다고 해. 지금 바쁜 일 중이니까.”

“그, 그게…….”

탁!

셀린은 부하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화가 나 책상을 내리쳤다.

“뭐? 확실하게 말해.”

“의뢰인이 아론 님이십니다.”

“……아론 에드먼스?”

“네.”

그 이름을 들은 셀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여보내도록 해.”

그는 이웨카 길드의 VIP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차 없이 돌려보냈겠지만, 아론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은 웬 거구의 사내였다.

‘아론 님이 이렇게 생기셨나?’

절대 아니었다.

‘혹시 부하 녀석이 속은 건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책상 밑에 있는 투척용 칼을 꺼내려고 했다.

“아. 모습을 바꾸는 것을 깜빡했군.”

남자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목걸이를 벗었다.

그러자, 거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셀린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이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셀린에게 재차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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