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Chapter 1 (16/40)
  •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4권

    Chapter 1

    아론은 저녁에 있는 족장들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전이라면 부족장들이 심하게 반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루테룬 퇴각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에 족장들은 그 부분에 대한 점을 인정해주었다.

    “다들 모였군.”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안건은 곧 일어날 오크들의 총공격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오크 부대는 지금 루테룬을 돌파하고 중간 지점까지 왔소. 아마 대열을 정비한 뒤에 다시 이동할 예정이겠지.”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하겠구려. 장인들을 시켜서 방어탑을 더 건축하고, 성문도 보강해야겠소.”

    그 의견에 다른 부족장들 역시 동의했다.

    “녀석들은 아무래도 내성의 정문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것이오.”

    “그러면 우리 부족에서 사람을 더 차출해 병력을 보강토록 하겠네.”

    부족장들은 오크의 공격에 맞서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오크와 전투를 치러 왔으니 경험이 풍부했다. 그래서 회의 과정에서 충돌이나 막힘은 없었다.

    “그리고…… 루테룬에서 발견된 울프 라이더에 대해서 정보가 더 필요하오.”

    “그런 종류의 녀석들이 있었다는 건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소.”

    부족장들은 그렇게 말하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녀석들을 목격한 유일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늑대를 탄 오크들을 울프 라이더라 부르지요.”

    “그 거대한 오크가 탈 수 있는 늑대가 있다고?”

    “예. 펜릴이라는 녀석입니다.”

    아론이 말했지만 부족장들은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펜릴은 일반적인 늑대보다 크고 튼튼한 녀석들입니다. 정교한 발톱과 날쌘 발로 절벽도 탈 수 있으며, 겉을 감싸고 있는 가죽도 오크에 필적할 만큼 두껍지요. 놈들의 날카로운 이빨은 철도 씹을 정도고 두려움도 모릅니다.”

    아론의 설명에 족장들은 의아해했다.

    “그런 녀석이 있었다니…… 묘사하는 걸 보니 자네는 본 적이 있는가?”

    “으음. 대륙에서는 희귀하지만 존재합니다.”

    지구에서 봤다고 할 순 없었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저는 가문에서 임무를 받아 몬스터를 토벌하던 중에 알게 된 녀석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족장들은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에드먼스 가문의 자식이란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이제야 오크들이 펜릴을 타고 다니기 시작했는가? 고작해야 녀석들은 멧돼지나 잡아서 탔던 녀석들인데…….”

    “아마 오크 킹이 등장하고 녀석들에게 지성이 조금 생긴 탓일 겁니다.”

    “오크 킹?”

    부족장들은 처음 들어보는 그 이름을 일제히 되물었다.

    아론은 그들에게 오크 킹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오크 치프보다 훨씬 상위의 개념으로, 오크 부족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녀석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말했다.

    “뭐라고? 그런 녀석이 있다고?”

    “예. 몇백 년에 한 번 나올 수 있을까 할 정도로 희박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족장들은 아론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들이 직접 오크와 전투를 치른 것만 해도 인간들보다 훨씬 기간이 길었다. 그런데 아론이 말한 그런 녀석들은 본 적도 없었다.

    “그거참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짓 없이 사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허풍도 적당히 하게! 자네가 우리보다 오크와 더 많이 싸웠나?”

    족장 중 한 명이 아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정하시게.”

    쿠르트가 격해진 회의장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신중할 필요가 있네. 일단 오크들의 피부색부터 여태껏 보았던 것과 다르지 않는가.”

    “그건 그렇지만…….”

    “자네. 계속해서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쿠르트는 아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이렇게 많은 오크들이 군집한 것도 오크 킹의 등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쳐들어온 오크들은 선발대일 확률이 높습니다.”

    “선발대라고? 관측된 것만 해도 천 마리는 넘어 보였는데?”

    그 물음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대는 아마 병력이 더 많을 겁니다.”

    아론의 말대로였다. 선발대가 길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니, 본대도 곧 뒤따라올 것이었다.

    “가장 좋은 상대 방법은 선발대가 본대와 합류하기 전에 공격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중에 피해가 커질 겁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녀석들이 야간이 아니라 대낮에 첫 공격을 감행했더라면, 보고를 받을 때 오크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쳐들어온 녀석이 잿빛 오크고 오크 킹이 존재한다는 게 의심된다면 퇴각 작전은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킹이 나타났다면 필시 오크 나이트도 같이 생겨났을 겁니다.”

    “허…… 그 녀석은 또 뭔가?”

    또다시 나오는 생소한 이름에 족장들은 설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오크 킹의 권능을 미약하게나마 받은 녀석들입니다. 놈들은 보통의 오크보다 강해서 항상 전투의 선봉에 서서 나머지 오크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올려 주지요.”

    그래서 오크 나이트를 없앨 수 있다면 빨리 없애는 게 좋았다.

    “그 오크 나이트라는 녀석은 오크 치프보다 강한가?”

    “물론입니다. 오크 킹의 능력을 작게나마 물려받은 녀석들이니까요.”

    “녀석들이 사기와 전투력을 올려준다고 한다면…… 지금 녀석들만 잡을 부대를 꾸릴 필요가 있다는 건가?”

    “맞습니다.”

    아론의 대답을 들은 부족장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번에는 쿠르트도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들어 보니 오크 나이트는 꽤 강력한 녀석인 거 같네. 하지만 놈을 잡자면 정예병이 필요할 테고, 그들을 따로 차출하면 우리의 수비 전력이 떨어지게 될걸세.”

    쿠르트는 반대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만약 오크들이 수비가 약해진 지점을 찾게 된다면, 녀석들은 그곳만 집중적으로 공략할 걸세.”

    “그 말이 맞소. 오크들은 멍청하지만 전장의 사기는 귀신같이 읽어내는 녀석들이거든.”

    “그건 리스크가 너무 크네! 차라리 수비를 굳건히 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보네만.”

    아론은 답답했다. 여기까지 설명해 줬는데도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처음에 말했지 않습니까? 곧 녀석들의 본대가 도착할 겁니다. 수비에만 치중하면 더 막기 힘들어집니다.”

    “솔직히 말하지. 자네가 말하는 오크 킹이니 그런 건 믿지 못하겠네. 그리고 지금 쳐들어온 오크도 저렇게 많은데 또 본대가 존재한다고?”

    아론은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을 했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이 나오니 이들이 못 믿을 만도 했다.

    하지만 천천히 그들을 설득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직접 맞닥뜨린 뒤에 깨달으라는 것도 가혹한 처사였다.

    “저는 필요한 정보는 다 말해 드렸습니다. 이걸 이용할지 말지는 여러분들 선택입니다.”

    그 말에 족장들은 여전히 불신에 가득 찬 얼굴로 아론을 볼 뿐이었다.

    아론은 부디 그들이 옳은 선택을 하길 바랐다.

    “자네가 여태까지 한 말은 모두 사실인가?”

    그러나 쿠르트만은 다시 한번 더 아론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이보게, 쿠르트!”

    “저 인간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가?”

    다른 족장들의 노성에 쿠르트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떨떠름하긴 하네. 하지만 이자가 거짓말을 해서 얻는 이득이 뭘까 생각해보았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소.”

    쿠르트의 말대로였다.

    자신들에게 거짓 정보를 풀어서 얻을 이득은 아론에게 없었다.

    오히려 이곳이 함락되면 안 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아직 그의 아티팩트 가공이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병사들을 구하는 데에 자신의 몸을 바친 인간일세. 은인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긴 그렇다고 생각하네.”

    “크흠.”

    쿠르트의 그 말에 나머지 족장들은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자네를 믿겠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동족을 모두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네. 그래서 최소한의 인원만 동원할 생각이네.”

    “그 정도는 감안하겠습니다.”

    “자네와 동료들, 바칸, 그리고 나 정도면 되겠나?”

    쿠르트의 그 말에 족장들은 깜짝 놀랐다. 그야 족장이 직접 나서겠다니.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말과 다를 것 없었다.

    “충분합니다.”

    “이해해주게. 나는 자네를 믿지만, 내 믿음 때문에 동족들을 함부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네.”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족장들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족장들은 마지못해서 아론의 말을 수용하고 오크 나이트를 잡기 위한 작전에 동의했다.

    “괜찮겠나?”

    쿠르트에게 우호적인 바위 부족장이 그에게 물었다.

    “우리들의 명운이 걸릴 일일지도 모르네. 전쟁이 일어나면 바위 부족은 자네가 지휘해 주게.”

    “알겠네. 부디 조심하시게.”

    회의가 끝나고, 아론과 쿠르트는 즉시 회의장을 나섰다.

    ***

    회의가 끝나고 각 부족들은 오크와의 전쟁을 대비해 바삐 움직였다.

    깡! 깡! 깡!

    드워프 장인들은 성문 근처로 소집되어 방어탑을 만들고 성문을 보강하는 작업에 열중이었다.

    군역에 종사하지 않는 시민들도 물자를 옮기는 데 힘을 보탰다.

    아론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나탄을 발사하는 방어탑이라…….’

    아론은 그것을 보며 놀랍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마법사가 없음에도 충분히 정교하교 위력적인 도구들을 만들어내는데 능했다.

    그린데란트 산맥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있다. 그런 물량을 상대로 어떻게 드워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꽤 열심히 보는군.”

    쿠르트가 아론을 보며 말했다.

    “예. 드워프들이 만드는 것은 언제나 볼 때마다 놀랍군요.”

    “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연구한 결과일세. 이들 덕분에 페리움이 아직도 굳건한 거라네.”

    쿠르트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뎅- 뎅- 데엥-!

    그때였다. 일대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이 나타났다는 증거였다.

    “어서 가세.”

    “예.”

    아론과 쿠르트는 서둘러 성벽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서 잿빛 오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이 울프 라이더인가?”

    “맞습니다.”

    개중에는 펜릴을 탄 오크들도 있었다.

    “뭐야! 저건 오우거 아니야?”

    병사들은 오크들 사이에 간간이 섞여 있는 오우거를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저 코뿔소는……?’

    아론은 뒤에 보이는 거대한 코뿔소를 보고 생각했다.

    ‘저 녀석이 루테룬의 성문을 부순 녀석인가?’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되겠구나.”

    쿠르트가 전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쿠워어!”

    오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드워프들은 녀석들을 막아내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 * *

    쿠구구구……!

    수천 마리의 오크 군세가 성을 향해 몰려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녀석들에게서는 어떠한 전법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무기를 쥔 채 육중한 몸을 이끌고 성벽을 향해 달려올 뿐이었다.

    그야말로 괴물의 파도가 페리움을 향해 몰아치는 형세였다.

    우우웅.

    성벽 위에서는 드워프들이 열심히 만든 방어탑이 오크의 움직임에 반응해 기동하기 시작했다.

    방어탑의 맨 위에 달린 대포에서 마나탄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콰앙!

    날아간 마나탄은 오크에게 직격했고, 한 번에 두세 마리씩 처리하고 있었다.

    설치된 방어탑만 열 몇 개가 되니, 못해도 스무 마리 정도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크들은 그런 공격에 굴하지 않고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이윽고 오크들이 성벽에 도달했다.

    촤라락!

    그러자 방어탑에서는 작살이 아래로 쏘아졌다. 그것은 펼쳐지더니 커다란 그물이 되어 오크들을 뒤덮었다.

    “던져라!”

    그 말과 동시에 드워프들은 동그란 구슬을 던졌다. 거기에는 불의 힘이 저장되어 있어서 그물에 닿자마자 불꽃을 만들어 내었다.

    “크워어어!”

    옴짝달싹 못하는 오크들은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했다.

    쿵, 쿵, 쿵!

    오크가 성벽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자 이제는 오우거들이 몰려왔다. 녀석들은 오크의 시체를 밟고 성벽에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쿠웅!

    녀석들의 무식한 괴력에 성벽이 흔들렸다. 저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벽이 뚫리고 말 것이다.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드워프 워리어들은 투기를 날려 오우거를 저지했다.

    투두두두!

    이어서 울프 라이더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성벽 아래에 있는 오우거를 밟고 폴짝 뛰어올랐다.

    루테룬의 성벽을 넘었던 것도 저런 방식으로 했던 것이었다.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드워프 워리어들은 각자 자신이 계약한 정령들을 불러냈다.

    나타난 정령들은 돌벽을 만들어 내거나 바람이나 화염을 뿜어내서 올라오는 울프 라이더들을 막아냈다.

    오크들은 드워프의 방어에 굴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이제 사다리를 가지고 와 성벽에 걸치기를 시도했다.

    “끈질기구만!”

    투웅!

    그러자 성벽의 벽돌이 튀어나와 설치된 사다리를 밀어냈다.

    “족장님! 녀석들이 코뿔소를 끌고 오고 있습니다!”

    뒤편에 배치되어 있던 코뿔소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뿔소의 몸집은 오크보다 훨씬 거대했다. 녀석은 오크의 호위를 받으면서 성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절대 성문에 도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족장이 명령하자 방어탑이 일제히 코뿔소가 달려오는 경로에 마나탄을 쏘았다.

    콰앙!

    아무리 단단한 코뿔소라 할지라도 마나탄의 집중포화를 견뎌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드워프들은 치열하게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크의 숫자는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편, 아론은 오크 나이트만을 찾아서 요격하고 있었다.

    오크 나이트는 다른 오크들과 다르게 덩치도 크고 뿜어내는 안광도 훨씬 진해서 찾기 편했다.

    녀석들은 다른 오크들의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기에 이 기회에 빨리 처리해 버리는 것이 좋았다.

    공성전은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 아래에는 오크들의 시체가 쌓여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크는 어디서 수를 충원하는지, 계속해서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그런 괴물 같은 녀석들을 막아야 하니 점점 지쳐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전투가 질질 끌리게 되어 버린다면 언젠가는 오크의 본대가 도착하게 될 것이다.

    선발대와 합류하게 되면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간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최대한 빨리 선발대와의 전투를 종결시키고 드워프에게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왼쪽! 왼쪽 성벽을 도와줘!”

    그 외침에 드워프들은 일제히 성벽의 왼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올라온 것인지는 몰라도 오크 나이트 한 마리가 성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오크 나이트의 밑에는 드워프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녀석의 손에 죽은 드워프 워리어만 해도 열 몇 명이 넘어갔다.

    ‘다른 나이트보다 강해 보이는데?’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성벽 위에 올라왔다는 것만 해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녀석이 길을 만들어 주자 오크들은 그쪽 성벽에 사다리를 걸고 하나둘 올라오고 있었다.

    ‘어쩌면 저놈만 없앤다면 이번 전투를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

    판단을 마친 아론은 쿠르트와 바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모양이었다.

    타다닥!

    쿠르트와 바칸이 오크 나이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오크 나이트 역시 두 사람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눈을 번득거렸다.

    후웅-!

    녀석은 짓쳐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육중한 도끼를 휘둘렀다. 그 둘은 잽싸게 그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공격 기회를 잡았다.

    촤학!

    두 사람의 공격이 오크 나이트의 양 옆구리를 베었다.

    하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쩡함을 과시하듯이 도끼를 들어서 쿠르트를 공격했다.

    카앙!

    원래라면 맞았을 공격. 아론이 그의 앞에 배리어를 씌워준 덕분에 쿠르트는 무사할 수 있었다.

    배리어가 벌어다 준 잠깐의 시간 동안 쿠르트는 몸을 굴러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오크 나이트의 뒤로 접근한 바칸과 라엘이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파앙!

    녀석은 쿠르트를 공격한다고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덕분에 그대로 성벽 바깥으로 몸이 날아갔다.

    “쿠워어!”

    녀석의 고함이 점점 멀어졌다.

    쿠웅!

    거대한 몸이 땅에 떨어지며 굉음을 내었다.

    이제 저 녀석 때문에 성벽 위가 초토화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저 공격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론은 녀석이 몇 번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오크 나이트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론을 비롯한 그들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타앗!

    켄트의 마법 덕분에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살아 있다니. 질긴 녀석이군.”

    바칸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크 나이트를 바라보았다.

    아론은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곧바로 구속 마법을 걸었다.

    휘리리릭!

    바닥을 뚫고 올라온 마법으로 만들어진 줄기들이 오크 나이트의 온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녀석이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크 나이트의 움직임이 봉쇄되자 바칸과 라엘이 뛰어들어 오크 나이트의 다리를 공격했다.

    “쿠어억!”

    오크 나이트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부웅- 콰득!

    쿠르트가 휘두른 도끼가 녀석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그는 투기를 내뿜으며 녀석의 팔을 잘라낼 기세로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오크 나이트는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부르르르!

    녀석이 몸을 떨자 주위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혀냈던 도끼를 튕겨내며 구속 마법도 찢어발겨 버렸다.

    “족장님!”

    바칸이 튕겨 나가는 쿠르트를 보고 소리쳤다.

    오크 나이트는 무방비 상태의 쿠르트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때, 쿠르트의 팔찌에서 빛이 희미하게 발했다. 일순 쿠르트가 사라지더니 바로 옆에서 다시 나타났다.

    콰앙!

    오크 나이트가 휘두른 도끼는 아무것도 없는 땅을 때릴 뿐이었다.

    ‘저거는 블링크잖아?’

    순간적으로 거리를 이동하는 마법이었다.

    비록 거리는 짧았지만, 드워프들이 고위 마법인 블링크를 마도구로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말도 안 되는 기술력이군.’

    하지만 아론은 지금이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그는 라엘이 쿠르트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쿠르트의 구출을 돕기 위해 아론은 오크 나이트에게 화염 마법을 날렸다.

    화르르륵!

    녀석의 몸 전체를 화염이 뒤덮었다. 그 틈에 라엘은 쿠르트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콰직!

    동시에 바칸이 녀석을 공격하며 주의를 끌었다.

    “쿠워어!”

    오크 나이트는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바칸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으윽!”

    공격을 맞은 바칸의 몸이 붕 떴다. 투기를 둘러막았지만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오크 나이트는 이어서 바칸을 향해 도끼를 내려찍으려고 했다.

    카가각!

    그 공격은 아론과 켄트가 동시에 펼친 실드에 막혔다.

    쨍그랑!

    그러나 녀석의 힘은 무식하게도 셌다. 순식간에 두 겹의 실드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론은 급히 쿠브에게 명령했다.

    쿠브는 바칸의 밑에 순간적으로 돌기둥을 만들어 내 그를 이동시켰다.

    “쿠어어억!”

    오크 나이트가 포효했다.

    쥐새끼처럼 계속해서 공격을 피하는 것이 녀석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다시 제일 가까이에 있던 라엘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공격을 명중시키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라엘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오크 나이트. 그때, 아론은 쿠브에게 준비해 둔 것을 발동시키라고 했다.

    쿠구구!

    그러자 오크 나이트가 서 있던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론이 반구체의 형태로 돌벽을 세워 버렸다.

    콰앙! 콰앙!

    녀석은 그것을 부수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아론이 마나를 끌어모아서 만들어 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허억, 허억!”

    아론은 순간적으로 막대한 양의 마나를 방출한 탓에 숨이 가빠졌다.

    펜던트의 마나를 빌림과 동시에 호흡법도 한계치까지 사용해서 쓴 마법이었다.

    “저 위로 모두 올라가세요!”

    아론이 오크 나이트가 갇힌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모두들 군말 없이 아론의 지시에 따랐다.

    쿠르트와 바칸, 켄트, 라엘, 그리고 아론이 반구의 위에 섰다.

    그 가운데에는 오크 나이트는 비집고 나오지 못할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모두 동시에 공격하세요!”

    아론의 말을 신호로 모두 오크 나이트가 갇힌 안쪽을 향해 일제히 공격했다.

    쿠르트와 바칸은 자신의 투기를 이용해서, 아론과 켄트, 라엘은 마법을 쏟아냈다.

    콰쾅!

    안쪽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일어나며 바깥으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아직도 구체 안쪽은 각종 기운이 얽혀 활활 타고 있었다. 그 탓에 바깥에서는 내부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쿠브는 받치고 있던 땅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후두둑!

    그러자 안에서 원본을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정체는 방금까지 갇혀 있었던 오크 나이트였다.

    수천 갈래로 발겨진 녀석에게선 더 이상 생명의 반응을 느낄 수 없었다.

    아론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른 오크 나이트보다 훨씬 강했어.’

    지금까지 아론 일행이 잡은 오크 나이트의 수는 방금 녀석까지 해서 총 스무 마리였다.

    이 녀석은 그들 중에서 강함의 격을 달리했다.

    아무래도 오크 킹의 권능을 좀 더 많이 받은 녀석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태초의 정령은 정말 대단하구만.”

    쿠르트가 쿠브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단단하게 돌벽을 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지 말일세.”

    “쿠르트 님께서 부화기를 주신 덕분에 정령의 등급이 올라서 그런 겁니다.”

    “허허. 그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쿠웅!

    그때, 위쪽에서 드워프의 시체 하나가 떨어졌다.

    “아직 성벽 위에서 소요가 끝나지 않은 모양일세.”

    아론 일행은 켄트의 마법으로 다시 성벽을 올라갔다.

    그곳에는 오크 나이트를 따라 올라갔던 오크 병력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사기나 전투력이 확연히 떨어진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오크 나이트를 죽인 효과가 있어.’

    그리고 녀석이 죽었다는 소식은 드워프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데도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덕분에 드워프 병사들과 합세해서 올라온 오크들을 수월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고, 아론은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직 잿빛 오크들은 다수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크 나이트가 없으니 이제 승기는 이쪽에 있었다.

    ‘마나도 다시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아까 오크 나이트를 상대한다고 대량의 마나를 사용했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펜던트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 상태였다.

    아론은 남아 있는 오크들을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쿠르르릉!

    강력한 뇌전 마법이 오크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던 오크들이 이제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봐라! 녀석들이 도망친다!”

    드워프들은 녀석들의 뒤꽁무니 빼는 모습을 보며 깔깔거렸다.

    하지만 곱게 도망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녀석들 덕분에 이번 전투에서 많은 드워프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그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오크들의 목숨을 바치고 싶었다.

    “성문을 열어라!”

    부족장의 명령에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드워프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고는 오크들을 소탕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

    성밖에는 오크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투의 결과는 드워프 측의 대승이었다.

    원래 공성전은 이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다. 보통은 며칠, 길게는 주 단위로 공방이 오고 가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하루 만에 수천의 선발대 병력의 대부분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면 그들의 희생은 오크가 죽은 것에 비하면 1할도 채 되지 않았다.

    전투는 이처럼 단기에 끝내는 것이 좋았다. 설령 다음 병력이 오더라도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재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널브러져 있는 오크들의 시체는 치우지 않았다.

    어차피 본대가 올 것이다. 땅에 있는 시체들은 자연스럽게 진로를 방해해 줄 것이었다.

    “고맙네, 아론.”

    쿠르트는 아론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저도 여기가 무너지면 곤란하니까요.”

    아론도 맡겨둔 바루나 소드의 재가공을 위해서 이곳을 지켜야만 했다. 어찌 보면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었다.

    “걱정 마라, 인간! 그건 내가 목숨을 다해서라도 완성시킬 테니 말이야!”

    그때, 헤핌이 나타나서 아론에게 외쳤다.

    그는 다음 본대가 올 동안 이곳의 마도구들을 정비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아론은 그의 활동력에 놀랐다.

    쿠르트에게 얼핏 들은 바로는 이번 전투를 위해 필요한 마도구들을 만들면서도 바루나 소드의 작업을 틈틈이 했다는 모양이다.

    쿠르트는 왕실 공방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헤핌이 무리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다고 했었다.

    차라리 만들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일했었다.

    헤핌은 무언가에 몰두했을 때에만 그렇게 행동했다. 그가 이러는 경우는 비행선을 만들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론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그쪽에서 두 팔 걷고 나서주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다음 전투를 대비해 열심히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틀 뒤, 페리움 성벽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존재감이 확실히 느껴지는 꺼림칙한 기운이었다.

    “이제 슬슬 본대가 오는 것 같군.”

    쿠르트가 아무것도 없는 성벽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성에 있는 병력으로는 어느 정도의 병력까지 막아낼 수 있습니까?”

    “으음. 우리 쪽 병사는 다 합해야 1만 명 정도니까, 한 10만 마리의 오크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네.”

    ‘1대 10의 교환비라.’

    물론 페리움 성이 갖춘 방어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경우였지만, 아론은 그 정도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이상의 병력이 온다면 힘들 것 같긴 하군.”

    “그렇다면…… 본대의 규모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정찰을 보낼 수호자와 워리어를 뽑아 뒀었네.”

    쿠르트는 그들이 발이 빠르고 그린데란트 산맥을 잘 아는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아론은 그들이 무사히 병력 규모를 파악해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야심한 시각.

    타다다닥!

    드워프 수호자 한 명이 그린데란트 산맥을 내달리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길이었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머지 세 명의 워리어들은 각자 오크들이 있다고 추측되는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어느덧 그의 코에는 오크들의 악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근방인가 본데?’

    거기다가 냄새 중에는 다른 몬스터의 것도 섞여 있었다.

    ‘이건…… 오크들이 부리는 몬스터인가?’

    그것도 수가 좀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오크가 휘하에 몬스터를 많이 두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인간의 말이 사실인가 보군.’

    수호자도 오크 킹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오크에게 이 정도 이변이 일어났다는 걸 설명하려면 인간이 말한 오크 킹의 존재 말고는 설명이 힘들었다.

    ‘저 나무가 좋겠어.’

    그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맨 꼭대기 나뭇가지에 걸터앉고는 투력을 이용해 눈을 강화했다.

    그러자 어두웠던 시야가 점점 주위 분간이 가능할 정도로 변했다.

    ‘저게 다 오크라니…….’

    드워프 수호자는 이 일대를 빼곡하게 채운 오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시야에 가득 차게 보였으니 못해도 3만 마리는 넘어 보였다.

    그는 품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그것은 신호를 보내거나 수신할 수 있는 도구였다.

    달칵, 달칵, 달칵.

    그는 신호기를 세 번 눌렀다.

    3만 마리가 관측된다는 신호였다. 이로써 나머지 세 명에게도 그 신호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신호기에서 사념이 느껴졌다. 총 세 번의 신호였다.

    ‘바르크도 3만 마리 정도라고 보고했군.’

    이로써 관측된 오크 병력은 6만 마리였다.

    그는 나머지 두 명의 신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신호기에서 느낌이 전해졌다.

    ‘……그쪽도 3만 마리야?’

    또 다른 드워프 워리어가 보낸 곳도 총 세 번의 신호가 보내졌다.

    드워프 수호자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9만 마리의 병력이었다.

    본성의 규모로는 최대 10만 마리의 오크를 막는 게 최대였다.

    ‘제발, 제발……!’

    그는 마지막 신호가 부디 좋은 소식을 들고 와주길 바랐다.

    ‘마지막 장소도…… 3만 마리가 관측됐다고?’

    그는 마지막 신호를 받고 허탈해했다. 이로써 오크의 총 병력은 12만 마리 이상이라는 소리였다.

    ‘이건 버티기 힘들다!’

    그는 빨리 본성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다시 내려가려고 하는 순간, 그는 아래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어?’

    아래에는 붉은 안광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어느 틈에?’

    분명 올라올 때에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근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크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오크 나이트도 있잖아?’

    그는 이곳을 도망쳐 나가는 게 힘들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부디 나머지 세 명에게는 별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쿵!

    오크들이 나무를 때리기 시작했다. 드워프가 움직이지 않으니 나무를 부숴서 아래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살아나가긴 글렀군.’

    그는 품 안에 있는 통신용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을 두들기면서 관측한 병력을 암호로 전환해 보냈다. 몇 시간 뒤면은 본성에서도 이 정보를 알게 될 것이다.

    ‘……임무는 완수했다.’

    스릉!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의 생명이 꺼질 때까지 최대한 오크의 수를 줄이자는 각오로 녀석들과 전투를 벌였다.

    ***

    몇 시간 뒤.

    이른 새벽에 수정구로 통신을 받은 쿠르트는 찬물을 맞은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찰병 네 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정찰로 보낸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수호자와 워리어였다. 그들이 당했다는 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섬뜩한 정보는 관측된 오크의 수가 12만 마리가 넘는다는 것이었다.

    ‘야단이 났군.’

    쿠르트는 채비를 마치고 나섰다.

    지금 병력으로는 전력을 다해도 10만 마리를 막는 게 고작이었다.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는 다른 부족장들을 소집해 회의를 할 준비를 마치라고 전달했다.

    * * *

    아론은 회의장에 도착하고 드워프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아론은 조심스레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론은 쿠르트에게 물었다.

    “저번에 보냈던 정찰대원들이 전멸했다네.”

    “그럼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겁니까?”

    그 물음에 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정보는 도착했다. 오크 병력의 규모가 12만 마리를 넘는다고 하더군.”

    아론은 왜 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12만 마리면 막을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선 규모잖아?’

    페리움의 병력으로는 전력으로 막아야 10만 마리가 최대였다.

    하지만 오크의 병력이 12만 마리를 넘는다고 하니 드워프 측의 승리하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위 부족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녀석들이 접근하지 않은 지금 도망치는 것이 어떻겠소?”

    “지금 그 말은 이 땅을 버리자는 말이오?”

    “그렇소.”

    대답을 들은 나머지 부족장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되오! 이 땅의 역사를 부정할 생각이오?”

    “고작 오크들에게 밀려났다는 걸 선대들이 하늘에서 보신다면 통곡을 할 것이오!”

    “냉정하게 생각하시오. 우리가 결사 항전을 한다고 그 많은 오크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겠는가?”

    그 물음에 부족장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버티다가 죽는 것 말고는 미래가 없소.”

    “하지만…….”

    “선대들이 이 땅을 사수했던 것도 드워프들의 번영을 위해서지.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어서야 되겠소?”

    그는 잠깐 말을 끊고는 다른 부족장들의 눈을 바라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후일을 도모하도록 하세.”

    그 말에 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나도 그 의견은 반대일세.”

    “쿠르트!”

    그는 바위 부족장에게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도망친 다음을 생각하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건……!”

    “비록 오크를 피한다고 할지라도, 이 그린데란트 산맥에는 녀석들 말고도 몬스터들이 수없이 많이 있네. 녀석들로부터 우리 동포를 지켜내면서 다시 세력을 도모하는 게 쉽다고 생각하나?”

    그 말에 바위 부족장은 생각해보았다. 아무 기반 없이 몬스터들과 싸우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거기를 쓰는 건 어떤가? 비행선이 보관된 곳으로 가는 지하 통로 말일세. 그곳을 쓰면 바로 산맥 초입까지 내려갈 수 있어.”

    바위 부족장의 그 말에 쿠르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통로는 너무 좁네. 우리 드워프 네 부족을 합치면 모두 몇 명인지 아는가? 수십만 명이네. 그들이 모두 통과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네.”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인원을 구성하면……!”

    “나가서도 문제이지 않는가? 산맥을 내려온 이상 우리는 대륙으로 나가야 하네. 인간계에 우리가 발붙이고 살 땅이 있다고 생각하나?”

    “…….”

    바위 부족장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쿠르트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사실 알고 있었다. 단지 이 답답한 상황에서 타개책을 찾지 못해 비현실적인 것을 외쳤을 뿐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론도 생각에 빠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라면 여길 도망치는 것이 좋았다.

    산맥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쿠브가 있다면 위험한 상황은 피해서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그 선택지는 바루나 소드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곳이 오크들에 의해 짓밟혀지면 바루나 소드는 그 흔적도 찾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9서클이 되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걸 포기하라고?’

    아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능이 뛰어난 에드먼스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노력을 한다면 언젠가 9서클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언제가 30살을 넘긴다면 자신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론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싸우다 죽나, 십여 년 뒤에 죽나 비참한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론은 이곳에 몇 달 있으면서 그들에게 정을 붙이게 되었다. 이들을 버리고 나만 살기 위해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습니다.”

    아론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부족장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공격을 버티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오크 킹의 존재 때문에 오크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녀석이 오크들의 전투본능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허……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오크 킹을 쓰러트리면 됩니다.”

    아론의 그 말에 부족장들은 할 말을 잃었다.

    “말로 하면 쉬울 걸세. 하지만 그 방법은 어떻게 하나? 녀석의 강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주변을 지키는 오크들이 수두룩하네.”

    “맞소. 그리고 공성이 시작되면 오크들이 성 앞에 깔리게 되니 길을 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오.”

    그들의 반박은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데에는 항상 논리를 벗어난 해답이 필요했다.

    “녀석들이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이 오크들이 넓게 퍼지는 때입니다. 그때를 노려 오크 킹이 있는 곳까지 돌파하는 건 어떻습니까?”

    “흐음. 드워프 수호자들과 워리어를 동원하면 녀석의 앞까지 가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지.”

    쿠르트가 대답하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크 킹과 전투를 치루어야 하네.”

    “맞소! 그리고 쓰러트린 다음도 문제가 아닌가? 십만에 가까운 오크에게 둘러싸일 걸세!”

    다른 부족장도 쿠르트의 의견에 거들었다.

    “쿠르트 님. 저번에 나이트 오크와 싸울 때 팔에 차셨던 거 말입니다만.”

    “블링크 아티팩트를 말하는 거군.”

    “그게 몇 개나 있습니까?”

    “아마 왕실 공방에 몇백 개는 있을 걸세.”

    “그걸 이용하면 짧은 거리지만 대인원을 이동시킬 수 있는 매스 텔레포트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론의 말에 쿠르트를 비롯한 부족장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여러분들은 마도구를 만들 때 공식화된 회로를 새겨 넣으시지만, 사실 이 회로는 꽤나 복잡한 술식을 매우 간단하게 만든 겁니다.”

    아론은 그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회로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술식을 바꿀 수 있다면 응용도 가능하지요.”

    “그게 정말인가?”

    “저는 에드먼스 가문 출신입니다. 마법에 대해서는 도가 텄습니다.”

    아론의 대답에 쿠르트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쓰고 싶네……!”

    “아직 개념만 잡힌 상태라서 연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대가 페리움에 도착하기 전까지 가능하길 빌어야겠지요.”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부탁하네, 아론.”

    “제 목숨도 달려 있으니까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부족장들은 질문을 했다.

    “그럼 오크 킹은 누가 상대할 텐가?”

    그러자 회의장에 있던 수호자들이 모두 손을 들며 자신을 뽑아주길 바랐다.

    “아론 공이 저렇게 나서주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제 목숨을 바쳐도 좋습니다. 오크 킹을 쓰러트리겠습니다!”

    수호자들은 각자 자기의 포부를 밝히며 뽑아줄 것을 요구했다.

    쿠르트는 그들 중에서 일부만을 뽑았다.

    모두 차출해서 데려가면 정작 성문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론. 자네는 이번에 빠져도 좋네. 연구에만 전념해 주게.”

    “예?”

    “이건 드워프와 오크들의 싸움이네. 오크 킹을 잡는 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야. 자네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고 싶진 않네.”

    아론은 쿠르트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들어줄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기동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마 만드는 데 성공하면 저만 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일부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실력이 부족해서였다.

    “우리가 자네에게 너무 큰 짐을 짊어지게 하는군.”

    아론에 대한 쿠르트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방에서 기다릴 테니, 거기로 블링크 아티팩트를 전부 가져다주십시오.”

    아론은 그 말만 하고 회의장을 나가려고 했다. 오크 킹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회로를 수정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아론.”

    그때, 쿠르트가 그를 불러 세웠다.

    “고맙네.”

    “우리들도 감사를 표하지.”

    쿠르트를 비롯한 부족장들이 예를 갖추어 아론에게 인사했다.

    “감사 인사는 전투가 끝나고 나서 받겠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그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엘과 켄트에게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 앞다투어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들도 가겠습니다.”

    “도련님만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런 그들이 고마웠지만, 아론은 미안한 감정이 더 앞서 있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다 나 때문이잖아. 너희를 위험에 빠트릴 순 없어.”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도련님……!”

    그들은 완고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부탁할게. 이곳에는 제대로 된 마법사가 너희 둘밖에 없어. 내가 매스 텔레포트를 가동하려면 너희가 남아서 힘을 써 줘야 해.”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부디 두 사람이 성안에서 남길 부탁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도련님. 너무 무리하시지 마세요.”

    아론은 그들과 헤어져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가 방에 도착했을 때, 언제 준비했는지 안에는 벌써 블링크 아티팩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날부터 아론은 그것을 골몰히 살펴보며 연구를 시작했다.

    블링크 아티팩트의 설계도를 토대로 분해하면서 회로를 샅샅이 살폈다.

    아론은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는 자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약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의 지능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설계도를 보고 이해하는 게 가능했고, 어느 정도 응용도 할 수 있었다.

    ‘좀…… 어렵긴 하네.’

    회로를 이해했어도 그 술식에 미세하게 변형을 가하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조금만 수식을 잘못 건드려도 이동 거리가 이상해지거나, 마법이 통하는 범위가 자기 멋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들었다.

    여기서 아론의 마나 제어 능력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미세하게 회로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마 일반적인 마법사였더라면 몇 달이 걸려도 회로를 조정하는 게 불가능했을 터였다.

    아론이 아티팩트를 붙들고 몇 날 며칠을 씨름하는 동안, 오크 킹이 본대를 이끌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아론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수비가 뚫리지 않는 한 아론은 이 연구를 마치고 난 뒤에 방을 나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오크와 드워프 간에 공방이 펼쳐졌었다.

    그리고 정확히 팔일 차에 아론은 방을 나왔다.

    연구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아론의 머릿속에서만 있던 개념을 실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 * *

    이른 새벽.

    공성전은 잠시 소강상태였다.

    양쪽 다 지속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그 증거로, 페리움의 성벽은 전투로 인해 성한 곳이 없었다. 곳곳이 움푹 파이거나 금이 가 있었으며, 몬스터들의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영광스러운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 증거로 아직 페리움은 오크들에게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현재 성문 앞에서는 도합 300명의 드워프 워리어들이 출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크 킹을 잡기 위해 선발된 정예병들이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무장도 최고로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이며 무기는 모두 드워프들이 레어 메탈로 정성 들여 만든 것이었다.

    드워프 중에서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는 그들이 최상의 무구를 입고 있었지만, 여기 있는 대다수가 이번 전투 후에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이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부족장들의 축복이었다.

    그들은 도열된 드워프 워리어들의 앞에 나가 기도문을 읊었다. 드워프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요함을 지키며 그것을 들었다.

    이어서 이번 300인의 대장이자 왕국 최고의 수호자인 티푸르가 앞에 나와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내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몸 바쳐 싸울 것이다.”

    그의 연설을 들으며 흐느끼는 드워프도 있었다. 그들은 오늘 출정하는 드워프 중 누군가의 부모님이었으며, 형제며, 연인이었다.

    “동포들은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단지 남들보다 빠르게 전사들의 땅, 티르 나 노이로 떠나는 것이니 말이다.”

    그 말은 즉, 그들은 영광스러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대들이여! 한 점 부끄럼 없이, 싸우다 죽으리라!”

    티푸르의 연설이 끝났다.

    드워프 워리어들은 무기를 하늘 높이 들어 화답했다.

    “아론.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겠네.”

    쿠르트가 아론의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왜 분위기가 곧 장례식이라도 열릴 것 같이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아론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꼭 살아서 돌아올 겁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네가 한 말은 꼭 들어주겠네. 만약 실패하더라도 자네의 동료 두 명은 우리가 책임지겠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론은 쿠르트와 대화를 마치고는 출정만을 기다렸다.

    그때, 라엘과 켄트가 아론에게 다가와서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아론은 그런 그들에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너무 걱정 마. 내가 철저하게 계획하고 나서 움직이는 사람이란 건 잘 알잖아? 여차하면 도망칠 방법도 마련해 뒀으니까.”

    하지만 아론의 말을 들어도 그들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목숨을 판돈으로 걸며 도박을 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라엘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아론은 가슴이 조금 뭉클해졌다.

    이전 주인이 라엘에게 한 몹쓸 짓은 지울 수 없는 과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을 따라주는 것이 고마웠다.

    ‘이 아이에겐 마음고생만 하게 하는구나.’

    그러나 이번 일은 피할 수 없었다. 아론은 라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켄트. 텔레포트 관련해선 잘 부탁할게.”

    “물론입니다. 꼭 신호 보내셔야 합니다.”

    켄트는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었다.

    아론이 매스 텔레포트를 기동하고 나서 좌표를 유도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켄트의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있는 티푸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출발합시다. 오크들이 깨어나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죠.”

    “자네 말이 맞네. 얼른 출발하도록 하지…… 성문을 열어라!”

    끼이익-

    티푸르가 외치자 굳게 닫혔던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300명의 드워프 워리어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번 작전에 드워프들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 그들은 꼭 해내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

    오크들은 드워프의 공격이 닿지 않는 곳에 야영지를 꾸렸었다.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서 24시간 내내 전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성전은 일주일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크들도 피로는 쌓이기 마련이었다.

    “잘도 자는군.”

    아론은 망원경으로 녀석들의 동태를 살폈다. 정찰을 돌고 있는 몇몇 오크를 제외하면 모두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야영지를 둘러싸고 아티팩트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나중에 오크 킹과 전투가 있을 때 나머지 오크들을 분산시킬 용도였다.

    그들은 오크가 깨어나기 전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한 장소에 집결했다.

    스릉!

    티푸르가 말없이 칼을 빼 들었다. 이제 오크 킹을 잡으러 간다는 신호였다.

    녀석의 위치는 이미 파악이 끝났었다. 따로 정찰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오크 킹의 기운은 워낙 강해서 여기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두에는 아론과 바칸, 티푸르가 서 있었다.

    “아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근처에서 벗어나지 말게. 이번 작전에서 자네는 중요하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매스 텔레포트를 기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론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면 이번 작전은 자동으로 실패였다.

    휘익!

    티푸르가 검을 앞으로 휘둘러 돌격을 명령했다.

    두두두두!

    드워프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술은 단순했다.

    오크 킹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도달해서 녀석을 처리하고, 매스 텔레포트를 기동해 잔여 인원을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난 이상 오크들도 드워프들의 침입을 알아차렸다.

    오크 경비병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드워프들이 돌진하는 경로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론은 고작 저런 녀석들에게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펜던트의 마나를 빌려 마법을 준비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불덩어리가 생성되었고, 그것들은 날아가면서 화염의 파도로 변했다.

    화르륵!

    불의 세례가 길을 막고 있던 오크들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녀석들의 몸은 그 화력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말았다.

    철컥.

    선두에서 달리던 티푸르는 자신의 어깨에 메고 있던 도끼를 꺼냈다.

    그런 뒤 도끼를 냅다 앞으로 던졌다.

    휘리릭! 촤학!

    날아간 도끼는 앞에 있는 오크의 머리통을 부순 뒤 다른 녀석에게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오크들을 죽였다.

    아론이 자세히 보니 티푸르가 계약한 정령이 도끼에 깃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령을 저런 방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아론은 기발한 방법에 감탄했다.

    그렇게 오크들을 죽이자 점점 방어가 느슨해지는 것이 보였다.

    드워프들은 말의 속도를 올리며 돌파를 시도했다.

    일부 오크들은 드워프가 돌진하는 측면에서 공격을 하려고 했다. 쐐기 대형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무리에서 빠져나온 오크들은 오히려 표적이 되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요란하게 싸움이 벌어지자 취침을 하던 오크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무기를 챙겨 들고 드워프들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번 작전의 목적은 오크 킹이었다.

    “슬슬 오크 본대 녀석들이 일어나서 몰려옵니다!”

    어느 드워프 워리어의 외침에 티푸르는 아티팩트를 꺼내 발동시켰다.

    그것은 일종의 기폭 스위치였다.

    콰콰쾅!

    멀리서 폭음이 들리면서 오크 진영 바깥에서 하늘 높이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기둥은 간격을 두고 여러 군데 설치했었다.

    이내 불기둥에서 뻗어 나온 불이 서로 연결되었다. 그로 인해 불의 장막이 생성되었고, 오크의 본대는 순식간에 여섯 등분으로 나뉘고 말았다.

    아론은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보며 쿠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저게 우리가 설치했던 아티팩트에서 나온 불기둥이 맞습니까?”

    “그렇다네.”

    아론은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고품질의 마정석이 들어가 있었길래 저렇게 큰 출력을 낼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얼마 동안 지속되는 겁니까?”

    “약 십여 분 정도일세.”

    “그럼 그 시간 안에 빨리 돌파해야겠군요.”

    갑자기 생겨난 불의 장막으로 인해 그 가운데에 있던 오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명횡사를 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오크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 왔고 살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드워프들은 오히려 거기에 반응해 사기가 올라갔다. 그들은 날이 선 투기를 뿜어내면서 오크들을 쳐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 앞에 오크 킹이 있다!”

    어느덧 목표로 하는 대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티푸르가 앞에 있는 거대한 오크를 바라보며 외쳤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쳐내야 할 방해물들이 또 있었다.

    오크 나이트들이 앞을 막아서며 오크 킹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은 말의 고삐를 늦추며 긴장했다. 그들도 오크 나이트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추리고 추려서 선발된 정예의 드워프 워리어들이었다.

    촤학!

    드워프들이 영리하게 합공을 하자 오크 나이트들은 하나둘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우린 앞으로 가지!”

    두두두두!

    티푸르는 말을 재촉해 달려 나갔다. 선두의 인원은 오크 나이트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상대는 뒤에 따라오는 드워프 워리어들에게 맡겼다. 아론을 비롯한 그들은 오로지 오크 킹만을 노리고 나아갔다.

    아론의 눈에 처절하게 싸우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오크 나이트들을 방해하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저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아론 일행은 오크 킹의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오크 킹…….’

    오크 킹은 아론 일행을 섬뜩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쿠워어어어!”

    녀석은 빛바랜 황색 검을 든 채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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