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15/40)
  • Chapter 5

    휘오오-…….

    바칸의 패배 선언을 들은 아론은 시전했던 윈드 커터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허허.”

    바칸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도 아론의 성장 속도를 짐짓 파악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추월당할 날이 올 거란 것도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사람이 바뀐 것마냥 강해질 줄은 몰랐었다.

    솔직히, 구덩이를 타고 올라온 불꽃의 화력은 얼마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공격을 막아내고 달려들면 될 거라고 그림을 그렸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화염은 강력했고, 아론은 그다음 수까지 예측해서 자신의 뒤로 가서 윈드 커터를 준비했었다.

    ‘아론 님도 저 희한한 마법에 익숙해진 모양이네.’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가속하는 아론의 마법. 하지만 그다음에 중심을 잡기 어려워서 항상 약한 마법만 사용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특히 아론이 이동하고 나서 준비한 윈드 커터는 예술이었다.

    마나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바람을 한곳에 모아 고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윈드 커터는 시전하는 순간 바로 날리는 게 최고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론의 마나 제어력은 얼마나 뛰어난 건지, 바람을 고정해도 그 위력이 줄지 않았다.

    “며칠 만에 서클이 늘어나셨나 보군요.”

    “맞습니다.”

    “제 예상을 훨씬 넘어서 빠르게 성장하시는군요.”

    “바칸 님에 비하면 멀었지요.”

    아론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실제로 저는 오늘 바칸 님의 최대치의 실력을 보지 못했잖습니까.”

    바칸은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정령을 사용해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나 보군요.”

    그 대답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이 여기 온 이후로 드워프의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드워프 워리어들은 정령의 힘을 이용해 싸울 때가 가장 강하다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바칸 님이 정령을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산맥에서 몬스터 대군을 상대할 때도 그저 투기만 사용하셨어.’

    그래서 아론은 바칸이 자신의 힘을 최대로 쓰면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번 대련에서도 그의 진면목은 볼 수가 없었다.

    “웬만해선 제가 정령을 사용해 싸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바칸이 계약한 정령은 특수한 녀석이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는 꺼낼 생각이 없었다.

    만약 자신이 정령을 사용해 싸운다면, 일대가 초토화되어 누구 하나는 죽는 것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머지않아 정령을 불러서 싸우게 될 겁니다. 저는 그런 당신을 이길 거고요.”

    아론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도 바칸이 자신을 무시해서 정령을 꺼내지 않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달간 대련으로 부딪쳐 본 결과, 바칸은 그렇게 음흉한 성격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올곧다고 평가하는 게 맞았다.

    “하하. 제가 이겼습니다.”

    한편, 멀리서 둘의 대련을 보던 쿠르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반면 헤핌은 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쳇. 내가 괜히 녀석을 위해 펜던트를 만든다고 했었군.”

    헤핌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오래전에 내기를 했었다. 헤핌이 아티팩트를 만들기 전에 아론이 바칸을 이길 수 있겠냐는 게 그 내용이었다.

    쿠르트는 아론이 그 전에 이긴다는 쪽에, 헤핌은 아니다에 걸었었다.

    그 결과가 오늘 나온 셈이었다.

    “스승의 물건을 빼앗는 제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헤핌은 그렇게 말하면서 귀금속을 건네주었다.

    “언제는 절 제자로 둔 적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쿠르트는 껄껄 웃으면서 기분 좋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며칠만 늦었어도 헤핌 공이 이겼겠군요.”

    “그래. 마무리 단계였으니 말이다.”

    헤핌은 말하면서 혀를 찼다.

    그의 말대로 아티팩트 제작은 막바지에 있었다.

    “드디어 은인에게 보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쿠르트는 그렇게 말한 뒤에 아론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드워프 워리어를 이긴 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바칸도 수고가 많았어.”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쿠르트는 각자에게 말을 건넨 뒤, 다시 아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여기 오자마자 바쁘게 수련만 하지 않았는가?”

    “뭐, 그런 셈이죠.”

    “손님인데도 대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쿠르트가 말하는 의중을 알아차린 바칸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이번에 아론 님이 이긴 것을 기념해서 제가 축하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대련이 있고 나서 며칠 뒤.

    바칸은 자신이 말한 바를 지켰다. 그는 아론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은 바칸과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가 바칸 님의 집이군요. 굉장히 넓네요.”

    “드워프 분들도 벌써 드시고 계시네요.”

    라엘과 켄트가 각자 소감을 말했다.

    이미 많은 드워프들이 와 있었다. 축하하기 위한 파티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는 그들의 생각을 잘 엿볼 수 있었다.

    테이블에는 고기들이 잔뜩 놓여 있었고, 한편에는 통째로 술이 쌓여 있었다.

    이렇게 오늘처럼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수련의 한 단계가 끝나거나 성취가 있을 때 스승이 제자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여는 문화가 존재했다.

    “오늘의 주인공이 왔구만!”

    “어서 오시게!”

    드워프들은 반갑게 아론을 맞이해 주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바칸과 친분이 있는 드워프 워리어다 보니 성격이 호탕했다.

    다른 드워프면 몰라도, 아론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강자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살갑게 대해주었다.

    “흐하하! 바칸 녀석이 지다니!”

    “이제 대장 자리 내려놓아야 하는 거 아니야?”

    드워프들의 우스갯소리에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펼쳐졌다.

    그들도 처음에 바칸이 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적잖이 놀랐었다. 드워프 워리어에게 있어 바칸은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거 아나? 바칸은 옛날에 다친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오크 백여 마리가 있는 곳을 뚫고 귀환한 거 말일세.”

    “그거 말고 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지! 여기 앉아 보게. 내가 들려줄 테니까.”

    드워프들은 여기저기서 아론을 부르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바칸을 이긴 자. 그것 하나만으로 그들 사이에서 아론에 대한 평판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들과 오크는 참 안 좋은 의미에서 깊은 관계가 있는 거 같군.’

    아론은 아까 어느 드워프가 얘기한 오크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페리움 왕국이 건국된 초기부터 오크들은 영토를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그 크고 작은 전쟁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특히 산맥에서 다른 몬스터들의 숫자가 적어질 때에 더욱 흉포하게 날뛰었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오크들과의 산발적인 전투가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중이라고 아론은 들었다.

    ‘이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구나.’

    이종족도 각자가 원하는 목표가 있었다. 오크들은 세력을 넓히고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서. 드워프들은 자기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그 목표가 충돌한 결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잠시 아론 님을 데려가도 될까?”

    “얼마든지요, 부족장님!”

    아론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쿠르트가 와서 묻자 드워프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드워프들이 이리 많지 않은가. 못 찾는 것도 당연하지.”

    쿠르트는 껄껄 웃으면서 아론을 자신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바칸은 물론 뷰란트 형제와 헤핌도 있었다.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이 타이밍에 주는 거라면…….’

    아론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헤핌에게 맡겼던 아티팩트의 가공이었다.

    쿠르트가 작은 상자를 하나 주었다.

    ‘어, 아닌가?’

    아론은 의문이 들었다.

    상자가 예상보다 작았다.

    분명 칠검은 저것보다 큰데 그걸 이용해서 만든 거라면 비슷한 크기의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어보게.”

    아론은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펜던트였다.

    아론은 그걸 꺼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다.

    ‘이게 가공한 아티팩트인가……?’

    그는 유심히 펜던트를 살펴보았다. 확실한 거는 드워프가 만들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만듦새가 아주 정교했다.

    펜던트에는 특이하게도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론은 거기서 흐르는 마나의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아그니 소드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 그런데 가능한가?’

    아론은 도대체 어떤 방식을 써서 아그니 소드를 이렇게 작은 크기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굉장히 소중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 듭니다.”

    “그거 다행이군.”

    쿠르트는 아론의 대답을 듣고는 웃을 수 있었다.

    “자세한 거는 헤핌이 직접 설명해 줄 걸세.”

    “흠.”

    그 말에 헤핌은 헛기침을 했다.

    “인간. 마나 하트를 아는가?”

    “예. 개념은 알고 있습니다.”

    마나 하트.

    그 단어는 드래곤만이 지니고 있는 마나 저장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마나는 타고난 회로를 따라서 움직인다. 각자 회로에는 담을 수 있는 마나의 한계가 있으며, 마법사들은 서클이라는 편법을 이용해 보유 마나를 늘린 것이 된다.

    하지만 마나 하트에는 마나를 거의 무한에 가깝게 저장할 수 있었다. 그것 하나 때문에 드래곤들이 인간을 아득히 넘어서서 강한 것이었다.

    “그게 인공 마나 하트의 역할을 할 걸세.”

    “……예?”

    아론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마나 하트는 드래곤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그걸 만든다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드워프는 그게 되는 거야?’

    헤핌은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지만, 아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 아그니 소드에서 순수하게 미티움만 추출해서 만든 거라네.”

    “아…….”

    아론은 이해가 갔다. 그래서 이렇게 작게 보석의 형태로 만들 수 있던 거였다.

    “그것 하나만 해도 마나를 어마어마하게 저장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네가 말했지? 다섯 자루의 검이 더 있다고.”

    “예.”

    “그래서 구멍이 일곱 개네. 바루나 소드는 이제 보석으로 만들 거고, 나머지 다섯 개는 자네가 알아서 구해야지.”

    “그럼 일곱 개를 다 모은다면…… 이게 인공 마나 하트가 되는 겁니까?”

    아론의 물음에 헤핌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아론은 지금 이 이야기가 실화인가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드래곤은 예외 없이 9서클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바로 마나 하트 때문이었다.

    ‘이걸 이용하면…… 9서클이 될 수 있으려나?’

    아론은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9서클에 도달하면 자신의 몸에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마나 중독을 완치할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내가 살아날 방법을 찾다니.’

    아론은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 큰일입니다……!”

    한창 아론이 감격에 젖어 있을 그때였다.

    드워프 병사 한 명이 부리나케 바칸의 집에 들이닥쳤다.

    “오크가 군세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 말에 파티는 돌연 중단되었다. 드워프들의 눈에는 일제히 살기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 * *

    쿠르트는 헐레벌떡 들어온 드워프 병사를 진정시켰다.

    “자세히 말을 해보게.”

    “지금 루테룬 성문이 오크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병사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은 분개하며 소리쳤다.

    “뭐라고?”

    “기어코 녀석들이!”

    쿠르트 역시 그 말을 듣고 놀랐다.

    루테룬은 이곳 페리움을 지키는 외각 성문의 이름이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곳인 만큼 전투도 잦아서 항상 전력을 집중 시켜 두고 있었다.

    보통 전투가 일어나도 끝난 뒤에 보고가 올라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 병사가 보고를 하러 왔다는 것은…….

    “이 밤중에 내가 있는 곳까지 왔다는 건, 다른 부족장들에게도 전령이 갔다는 소리겠지?”

    “예! 그만큼 상황이 심각합니다.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관측된 오크의 수만 해도 천 단위였습니다.”

    “알겠다. 나머지 이야기는 부족장들의 회의에서 듣도록 하지.”

    파티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쿠르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앞으로 있을 전투를 준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다들 신속하게 움직이는군.’

    아론은 드워프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비상 상황이라면 허둥지둥할 법도 하건만, 다들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네.”

    그때, 쿠르트가 아론을 불렀다.

    “부족장 회의에 같이 가겠는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바칸은 당황했다.

    “부족장님…….”

    드워프의 회의에 인간을 초대하다니. 물론 바칸이 아론을 싫어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때와 상황을 가리는 편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다른 드워프 부족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게 분명했다. 인간이 왕국에 들어온 것도 심기가 불편할 텐데, 아론을 회의에 참석시키겠다니.

    “괜찮겠습니까?”

    아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물어보았다.

    “오히려 내가 동석을 부탁하고 싶네. 자네가 있으면 이번 사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일세.”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어차피 바루나 소드도 가공해서 펜던트에 넣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곳이 전화에 휩싸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만큼 제작 시간이 길어지게 되니 말이다.

    “염치없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이런 사태는 오랜만이라서…… 도와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아론은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내고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론 일행은 쿠르트와 함께 서둘러 바칸의 집을 나섰다.

    ***

    부족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에 도착한 아론 일행.

    “잠깐 밖에서 기다려 주겠나? 먼저 들어가서 설명을 좀 하겠네.”

    쿠르트는 아론을 향해 그렇게 말한 뒤에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구려.”

    “강철 부족장도 왔으니, 빨리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나머지 부족장들은 이미 도착해서 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소.”

    “무엇인지?”

    “몇 달 전에 우리 왕국에 체재를 허가했던 인간은 기억하시오?”

    “물론이지. 그걸 어떻게 잊겠소?”

    “그 인간을 오늘 회의에 참석시켜도 될지 여러분께 여쭙고 싶소.”

    “……그게 무슨 소리요?”

    쿠르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인간을 나라에 들인 것만 해도 우리가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했소.”

    “동의하네. 한데, 이젠 족장 회의에도 참석을 시키겠다고? 회의가 장난인가?”

    부족장들은 심한 반감을 보였다.

    평소에 쿠르트에게 우호적이던 바위 부족의 족장도 여기서는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쿠르트도 저들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드워프는 인간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수많은 피를 흘려가면서 그린데란트 산맥을 개척하고 왕국을 세운 것도 결국 인간들의 핍박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오래전의 이야기였지만, 후손들은 선대의 역사를 잊고 있지 않았다.

    당장 인간들에게 쳐들어가서 복수하자.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원한은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기에 나머지 부족장들은 쿠르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반발을 예상하고도 쿠르트가 아론을 데려온 이유는 다름이 아닌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에게는 마법사가 없다. 하지만 그의 전력이 있다면 이번 사태에서 큰 도움이 될 거다.’

    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론을 참여시킬 계획이었다.

    “듣자 하니 오크의 숫자가 천 마리를 넘어간다고 들었소.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인간 마법사는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우리 드워프 워리어들도 충분히 강하다!”

    “그는 최근 대련에서 바칸도 이긴 실력자요.”

    “하! 2개월이 넘는 지난 기간 동안 패배한 건 왜 쏙 빼고 말하는 거요? 운이 좋아서 어쩌다 한번 이긴 거 아닌가?”

    쿠르트가 설득을 시도했지만 드워프들의 반발은 여전히 거셌다.

    “우리에겐 마법사보다 더 효율적이면서 위력을 지닌 마도구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굳이 마법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소.”

    부족장들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반박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드워프들은 기본적으로 제작에 능했다. 그들은 아티팩트에 회로를 새겨 넣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마법사의 경우에는 마나를 전부 소진하면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마도구는 마정석만 갈아주면 되니 운용하기에도 편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정한 수준의 마법사와 비교해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쿠르트가 보기에 아론은 감히 마도구에 비교하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할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그래서 그는 욕심이 났다.

    아론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를 전투에 쓸 수 있다면 아군의 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서 그러는 것일 뿐이었다.

    “나를 믿고 한 번만 더 억지를 받아주시오. 이번 일의 책임도 온전히 내가 질 테니 말이오.”

    쿠르트가 그렇게 나오자 부족장들은 말이 없었다. 이번 일도 그가 고집을 부리는 거지만, 강철 부족이 여태껏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쉽게 거절하긴 힘들었다.

    “오크가 저렇게 군세를 이끌고 들어온 것도 초유의 사태 아니겠소? 우리는 이 사태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뭐든 이용해야 한다고 보오.”

    바위 부족장이 쿠르트의 의견을 거들었다.

    “……만약 문제라도 생겼다간, 부족장의 자리가 위태로울 줄 아시오.”

    나머지 두 명의 부족장도 일단 이번 일은 넘어가는 것으로 했다.

    인간이 싫어도, 결국 이번 일의 목적은 오크를 막아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드워프는 합리적이었다. 원한은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매몰돼서 앞일을 그르치지는 않았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론을 회의장으로 들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론이 들어와 인사하자 그들은 난색을 표했다. 쿠르트 말고는 처음 그를 보았기에, 연약한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들어온 라엘이 더 건장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쿠르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그를 물릴 수도 없었으니 그냥 놔두었다.

    아론 일행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2주 전부터 오크들의 산발적인 공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부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오크들은 오늘처럼 대규모로 쳐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수가 많지만 하나로 통솔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크들도 대장은 있었다. 오크 치프라 불리는 녀석들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오크 치프도 소규모로 오크를 데리고 다닐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천 마리가 넘는 녀석들이 일제히 루테룬 성문을 공략하고 있었다. 이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루테룬 성문뿐만이 아니라 외각에 존재하는 나머지 성문에서도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부관의 자세한 보고를 들은 부족장들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루테룬 성문이 뚫리면 오크들이 왕국 내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거기에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크들이 연합을 하게 되었는가?”

    “오크들의 특성상 이런 움직임은 보일 수 없다고 보는데 말일세.”

    “그 부분은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가능성은 두 개로 보고 있습니다. 오크들이 필요성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연합했거나, 아니면 그들을 통솔할 강력한 존재가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쿠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루테룬 성문을 지키러 가는 건 무리겠어.’

    오크는 무식하다. 하지만 힘만은 무시할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저렇게 많은 군세가 뭉쳤는데 전면에서 그들의 공격을 받아준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일단 루테룬 성문은 포기하도록 하세. 그쪽이 뚫리는 건 시간문제니 말이네.”

    “하지만…….”

    “그쪽 인원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네. 퇴로를 확보해준 뒤에 본성에서 같이 싸우는 게 좋아 보이네.”

    쿠르트의 말을 들은 부족장들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소.”

    “맞네. 이렇게 대규모의 오크 병력과는 싸운 적이 없으니, 차라리 본성의 수비 시설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낫지.”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오자 쿠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수호자급의 워리어들을 파견해서 퇴로를 확보하도록 돕도록 하지.”

    “그러세.”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수호자급의 드워프 워리어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총 세 개의 성문에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병력을 잘못 나눴다가는 퇴각하다가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루테룬 성문이 가장 오크들이 많이 공격하고 있소. 거기에 최소 수호자급 3명을 배치해야 하오.”

    그 타이밍에, 아론이 손을 들었다.

    “자네, 왜 그러나?”

    “제가 루테룬 쪽으로 지원 가겠습니다.”

    아론의 말에 쿠르트는 화색을 보였다. 하지만 나머지 부족장들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 * *

    “그건 안 되겠소!”

    “동석하게 해 준 것도 감지덕지인 줄 아시오!”

    아론의 말에 나머지 부족장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껏 노기를 띠고 있었다.

    “감히 어떻게 인간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단 말인가?”

    “아직 실력도 제대로 검증이 되지 않은 자일세.”

    그들은 강한 반감을 표출했다.

    그러면서 쿠르트를 바라봤다.

    최종 결정 권한은 강철 부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쿠르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론이 저렇게 나서주는 건 고마웠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반발을 어떻게 재울지가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이자가 나서준다면 안전한 퇴로를 꾸릴 수 있다.’

    어차피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것도 자신의 고집이었다. 그렇다면 그 고집을 끝까지 관철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아론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모두 안전하게 본성까지 모셔오도록 하지요.”

    아론은 자신감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부탁하겠네.”

    쿠르트의 태도에 나머지 부족장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까지 반발을 했는데 밀어붙이다니.

    “차라리 우리 쪽 수호자를 한 명 더 보내겠소!”

    “인간의 실력이야 뻔하지!”

    그들은 아론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쿠르트는 자신의 의사를 철회할 마음이 없었다.

    아론도 그런 그들을 무시했다. 그냥 개가 짖거니 하고 흘려들을 뿐이었다.

    ***

    회의는 끝이 났고, 아론이 합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루테룬 성문 쪽의 퇴로를 확보할 부대에는 아론을 더해서 4명의 수호자급 워리어, 그리고 10명의 드워프 워리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론의 실력을 믿지 못한 부족장들은 이쪽에 수호자급을 한 명 더 추가하였다.

    아론도 굳이 거기에 토를 달진 않았다. 사람을 늘려 준다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위험이 줄어드니 그만큼 더 좋았다.

    ‘수호자급 워리어는 실력자니까. 늘어날수록 위험도는 떨어지지.’

    거기다가 동행하는 드워프 워리어들도 모두 한 실력 하는 드워프들이었다.

    다들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라 아론은 든든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아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아론의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드워프가 아닌 인간이기에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서 아론의 실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와 대련을 했던 바칸뿐이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다들 아론 님의 본 실력을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저야 별 신경 안 씁니다.”

    아론은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저런 이들을 대하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거, 입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칸은 정체 모를 로브를 아론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웬만한 갑옷보다는 튼튼하게 지켜줄 겁니다.”

    아론은 로브를 살펴보았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독특한 점이 없는 평범한 붉은색 로브였다.

    하지만, 직접 손으로 만져보니 그의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로브를 쥐었을 때 가벼움이 느껴졌지만, 창칼 정도는 거뜬히 막아낼 수준의 보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세심하게 회로가 각인되어 있어 각종 보호 마법도 발동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드워프들이랑 같이 지내고 있지만, 이런 부분에서 새삼 놀란단 말이지.’

    아론은 로브를 만지작거리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럼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는 그걸 입고는 이동했다.

    아론이 내성의 성문에 도착하자 볼 수 있었던 것은 드워프들이었다.

    그들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무사히 귀환하라는 염원이 담긴 응원이었다.

    드워프들은 성문을 나서며 세 갈래로 흩어졌다. 퇴로를 확보해야 할 곳이 총 세 군데였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달릴 겁니다. 따라오실 수 있겠습니까?”

    바칸은 아론을 보며 물었다.

    그가 마법사였기에 배려해서 한 질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차를 타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마차의 요란함이 자칫 잘못하면 몬스터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쓸데없는 전투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타다다닥!

    드워프들은 작은 키에 걸맞지 않게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아론은 적절하게 힘을 분배하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헉, 허억!”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자, 문제는 아론이 아닌 켄트에게서 일어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아론은 슬쩍 켄트를 살폈다. 헤이스트를 썼는데도 점점 속도가 느려지는 중이었다.

    반면 라엘은 잘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투술을 쓰다 보니 육체의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은 성과를 보여주었다.

    “아론 님은…… 허억.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켄트는 달리면서 아론에게 물었다. 마법은 몰라도 육체가 약한 거로는 아론도 뒤지지 않았다. 세 명 중에서 가장 약체라고 봐도 무방했었다.

    그런데 아론은 드워프들의 이동 속도를 잘 따라가고 있기에 켄트의 입장에서는 신기할 뿐이었다.

    “다 방법이 있지.”

    아론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켄트가 자세히 살펴보니, 아론은 이동하는 중에 시간 가속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허어…….”

    켄트는 어이가 없었다.

    그가 관찰하기에 시간 가속 마법은 세밀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아론은 그 특유의 재능으로 마법을 안정적으로 쓸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달리는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어려웠겠지만, 헤핌 님이 만들어 준 펜던트 덕분에 가능한 것 같아.”

    5서클을 도달하고 나서 펜던트까지 생겼으니 아론은 마법의 운용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켄트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달렸다. 상황이 시간을 다투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달렸을까.

    선두의 시야에 루테룬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에 험준한 산맥이 솟아 있어서 성문 하나만 있어도 천혜의 요새가 되어주는 장소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아론의 코끝에서 피 냄새와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함이며 병장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잠깐 소강상태인 것 같았다.

    “이곳에는 모두 병사들뿐이다. 이 틈을 타서 퇴각시키도록 하자.”

    이번 지원군의 대장인 수호자급 워리어, 카멜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병력을 빼는 순간 오크들도 알아차리고 다시 공격을 하지 않겠는가?”

    “괜찮아. 여기도 본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성벽에서 방어 시설이 기동하고 있으니까. 잠깐 동안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거야.”

    바칸의 물음에 카멜은 그렇게 대답했다.

    “알겠네. 그러면 당장 병사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리도록 하지.”

    바칸의 명령을 받은 병사는 재빠르게 루테룬 성문으로 출발했다.

    나머지 드워프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퇴각하는 병력이 나올 동안,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는 퇴각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퐁!

    그때였다. 쿠브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귀를 쫑긋거리며 땅에 밀착시켰다.

    ‘하필 이 타이밍에 쿠브가?’

    갑작스러운 쿠브의 행동에 아론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린데란트 산맥을 오르는 도중에 몬스터의 습격을 알아차린 것도 이러한 쿠브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칸도 쿠브의 그러한 움직임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예의주시했다.

    “저기 벽 너머! 네 발 달린 녀석이 매우 빠르게 접근해!”

    쿠브는 성벽을 가리키며 그렇게 외쳤다.

    “그 뒤에 매우 커다란 녀석이 있어!”

    그것은 오크를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네 발 달린 녀석이라고?’

    아론이 고민하고 있을 때.

    “성문이 부서질 거야!”

    쿠브가 그렇게 말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닙니다.”

    아론은 드워프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직 함정을 설치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쿠브의 말을 들어보면 곧 오크들이 쳐들어올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드워프들이 슬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칸이 보냈던 병사가 퇴각 명령을 수행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는 도망치는 드워프 병사들에게 먼저 오크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뭐? 하지만 적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거 같은데?”

    실제로 성벽 바깥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이보게! 이자는 태초의 정령과 계약한 사람이네!”

    바칸의 그 말에 나머지 드워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도 자세히 살펴보니 아론의 정령은 태초의 정령이 맞았다.

    “오! 태초의 정령이라면……!”

    그제야 그들은 아론의 말을 따르기 시작했다.

    “제 정령이 말하길, 적들이 지금 공격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얼른 퇴각하는 병사들과 합류해야 합니다.”

    드워프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잠시 후, 루테룬 성문에서 병사들이 모두 빠져나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병사들이 나온다!”

    “뭐야? 아무 일 없잖아?

    어느 드워프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타앗!

    성벽 바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 저건……!”

    드워프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놀랐다.

    “울프 라이더가 어떻게?”

    오크들은 커다란 늑대를 타고 성벽을 단숨에 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성벽의 곳곳에서 계속해서 늑대를 탄 오크가 나타났다.

    “저런 녀석들이 있었다는 보고는 없었잖아!”

    드워프들은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녀석들은 퇴각하고 있는 드워프들의 후방을 노려 공격하기 시작했다.

    쿵! 쿵!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는 오크들이 성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다들 따라 오십시오!”

    아론이 먼저 튀어 나갔다. 시간 가속 마법을 사용한 그의 모습은 번개와도 같았다.

    “모두 죽을힘을 다해 달려라!”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

    드워프들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두두두!

    늑대를 타고 성벽을 뛰어넘은 오크들은 후퇴하고 있는 드워프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오크들의 덩치는 거대했고, 회색빛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대륙의 오크가 초록색인 것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었다.

    거기다가 덩치도 더 크고 탄탄했고, 눈에는 붉은빛이 서려 있었다.

    “크워어!”

    늑대를 탄 오크와 드워프는 기동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녀석들은 검푸른 갈기의 늑대를 몰아서 드워프를 추격했다.

    금방 드워프의 후미를 따라잡은 녀석들은 공격을 시작했다.

    서걱!

    오크가 휘두른 도끼에 드워프 병사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반격할 틈조차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

    콰직!

    거대한 늑대는 그 드워프를 잔인하게 밟고는 다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녀석들은 잽싸게 다음 사냥감을 쫓았다.

    도망치는 드워프들도 동료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니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부 병사들은 달려드는 울프 라이더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콰악!

    그러나 내지른 창은 늑대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오히려 창대가 힘을 못 버티고 뚝 하고 부러졌다.

    “커흥!”

    드워프의 공격에 심기가 불편해진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녀석을 탄 오크가 도끼를 휘둘러 드워프를 처리하려고 했다.

    콰득!

    “쿠워억!”

    그러나 오크의 공격은 이어지지 못했다.

    루테룬 성문을 지키는 대장 중 한 명이 나타나 철퇴로 늑대의 머리를 내리쳤기 때문이었다.

    늑대 머리는 형체를 알 수 없이 으스러졌고, 오크는 중심을 잡지 못해 땅을 나뒹굴고 말았다.

    콰앙!

    드워프 워리어는 가차 없이 그 오크에게 공격을 가했다.

    “빨리 도망가라!”

    그런 뒤에 드워프 병사를 향해 외쳤다.

    “대, 대장님!”

    “저 녀석들에겐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 너희가 도망쳐서 하나라도 더 사는 게 도움이 된다!”

    드워프 워리어는 그렇게 대답하며 달려드는 오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워리어들에게는 같은 동족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머지 드워프들을 살려야 한다!’

    그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든 하나의 라이더라도 더 상대하기 위해 악을 쓰고 공격했다.

    타앗!

    그러나 성벽 너머에서는 계속해서 울프 라이더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그 물량이 드워프 워리어 혼자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정도였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드워프 워리어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 그는 정령을 불러 자신의 투기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쿠구구!

    드워프 워리어의 주변으로 강력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오크를 맞서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태산과도 같았다.

    부웅부웅!

    그는 철퇴를 허공에 몇 차례 휘두르더니 이윽고 땅을 향해 내리쳤다.

    콰아앙!

    그러자 땅이 뒤집히며 부채꼴 모양으로 충격이 퍼져나갔다.

    그 기운에 맞은 늑대와 오크들은 산산조각이 나 살점이 비산하기 시작했다.

    후두둑!

    녀석들의 피와 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또다시 새로운 오크들이 나타나 드워프 워리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득!

    미쳐 막지 못한 늑대의 주둥이가 드워프 워리어의 왼팔을 깨물었다.

    ‘이런!’

    그 반동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드워프 워리어는 어떻게든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했다.

    퍼억!

    하지만 오크가 그 틈을 노려 도끼를 휘둘러 어깨를 강타했다.

    “크윽!”

    몸에 투기를 잔뜩 두르고 있었기에 팔이 잘려 나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공격을 전면으로 받아내니 커다란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후웅!

    드워프 워리어는 젖먹던 힘을 짜내서 철퇴를 휘둘렀다. 그러자 자신을 물었던 늑대와 오크가 일단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이걸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의 드워프들을 정리한 오크들도 슬금슬금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근처의 드워프들은 모두 죽었거나 자신처럼 풍전등화의 상태였다.

    드워프 워리어의 투기가 점점 약해지는 것을 오크도 볼 수 있었다.

    “크워어!”

    녀석들은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드워프 워리어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한 녀석이라도 더 끌고 간다는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부웅!

    그가 철퇴를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쿠구구!

    드워프 워리어가 딛고 있던 땅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허공을 부유했고, 어느새 드워프들이 후퇴하고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그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고 착지할 수 있었다.

    “인간……?”

    자신의 눈앞에 붉은색 로브를 걸친 사람이 보였다.

    오크에 대한 분노로 인해 희번덕거리던 드워프의 눈은 피로가 몰려오면서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페리움에 인간이 들어왔다고 했었지…….’

    아마도 그 녀석인가 싶었다.

    화르륵!

    인간은 오크들을 향해 십 수 개의 불덩어리를 날리고 있었다.

    드워프 워리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오크들이 불타는 장면이었다. 그는 기력을 다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이분을 뒤로 옮겨 주세요!”

    아론은 자신이 방금 마법으로 데리고 온 드워프 워리어의 이송을 부탁했다.

    근처에 있던 드워프들은 군말하지 않고 따랐다.

    비록 인간의 요청이었지만, 그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무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수십 마리의 오크를 마법으로 죽인 상태였다.

    ‘이 오크들은 대륙의 녀석들과 다른 종류군.’

    아론은 오크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 마주하는 오크는 그린데란트 산맥에서만 보이는 종족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론은 이들을 알고 있었다. 지구에서 ‘잿빛 오크’라 불리는 몬스터들이었다. 이들은 일반적인 오크보다 훨씬 강했다.

    ‘저런 녀석들이 늑대를 타고 달려오니, 일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어째서 저런 녀석들이 그린데란트 산맥에 나타났는지는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아론은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해치우는 것에 집중했다.

    ‘한 번에 최대한 많이 잡아야 한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을 시전했다.

    화르륵!

    그의 앞에 거대한 불의 벽이 생성되었다. 아론은 그곳을 향해 수십 개의 작은 파이어 볼트를 발사했다.

    아론은 날아가는 불덩어리들이 불의 벽을 통과하는 순간에 다시 한번 점화 마법을 사용했다.

    화르르르!

    그러자 파이어 볼트의 크기가 커지면서 위력이 강해졌다. 그것들은 돌진하는 오크에게 직격해 녀석들을 불태웠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오크들 중에 무사히 그 불길을 피한 녀석은 없었다.

    아론은 거기서 쉬지 않고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라엘, 켄트!”

    아론은 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라엘과 켄트는 허공을 향해 전격 마법을 쏘아 올렸다.

    파지지직!

    아론도 곧바로 전격 마법을 발사했다.

    지지직!

    두 사람이 쏘아 올린 마법에 아론의 것이 들어가자 전격이 불안정해지면서 마구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폭음이 들리면서 사슬과도 같은 뇌전들이 아래로 수백 갈래가 퍼져나갔다.

    “크워어어!”

    그 아래에 있던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타 죽어갔다.

    그야말로 화염과 뇌전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라고 말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드워프들은 그런 아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었다.

    인간이 마법을 쓰면서 싸우는데, 또 잘 싸웠다.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오오…….”

    그들은 감탄했다.

    자신들이 모시는 전신인 그렘달이 재림해서 싸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대단한 광경이었다.

    오로지 전투에 집중하는 사람은 바칸밖에 없었다. 그는 아론의 실력을 애초부터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아론은 자신이 만들어 낸 마법에 도취하고 있었다.

    ‘이 황홀감이 얼마 만인지!’

    처음 이 세계에 아론의 몸으로 전생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이 몸이 지닌 마나 친화력에 감탄을 했었다.

    지금은 헤핌이 만들어 준 펜던트 덕분에 다시 한번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칠검이 하나밖에 박혀 있지 않은 상황인데도 마나를 쉼 없이 공급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 모든 칠검을 박게 된다면…….’

    헤핌이 말했던 인공 마나 하트도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에드먼스 호흡법과도 잘 맞았다. 마법의 효율이 몇 배나 상승했다.

    ‘이 기분, 최고군.’

    아론의 황홀함을 깨트린 것은 라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드워프들이 충분히 후퇴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그 말에 아론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아론의 마법 덕분에 그 많던 오크와 늑대들은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물론 바칸도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많은 오크들을 죽였었다.

    그러나 전장에는 찢겨나간 오크의 시신보다 불타거나 지져진 것이 훨씬 많았다.

    “아론 님! 후미를 따라갑시다!”

    바칸이 그렇게 외치며 슬금슬금 후퇴했다.

    아론도 라엘과 켄트를 이끌고 잔존 병력들을 견제하면서 먼저 간 드워프들을 따라갔다.

    쿵! 쿵!

    그때였다.

    콰앙!

    굳건했던 루테룬의 성문이 굉음을 내며 박살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워어어!”

    오크들은 고함을 치며 루테룬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는 울프 라이더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걸 본 순간 아론의 마음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아론은 즉각 그렇게 판단하고는 쿠브를 불렀다.

    “쿠브! 성문을 다시 막을 거야! 날 좀 도와줘!”

    “응!”

    쿠브가 소리를 내자 잠들어있던 다른 드워프들의 정령도 깨어나 쿠브를 도와주었다.

    쿠브는 그 기운을 받아 다시 아론에게 보내주었다.

    아론은 성문에 스톤 월 마법을 사용했다.

    쿠구구구!

    그러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벽이 나타났다. 오크들이 몇십 마리 들어온 상황이었지만, 뒤에 있는 천 단위의 군세는 그 벽에 막히고 말았다.

    무식한 행동이었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론은 부디 저 성벽이 오래 버텨주기를 바랐다.

    * * *

    털썩.

    순식간에 많은 마나를 써 버린 아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록 펜던트가 있었고, 정령들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힘에 부치는 마법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저 커다란 성문을 대신해서 새로운 벽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오크들의 공격을 버틸 수 있게끔 단단하게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마나가 필요했다.

    “도련님!”

    라엘이 놀라며 아론을 부축했다.

    그녀도 오크들을 상대한다고 힘들었을 텐데,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켄트도 얼른 아론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증상은 완화되었지만 기력 자체가 떨어진 것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래도 켄트가 회복을 해 준 덕분에 아론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

    아론은 라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드워프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일렬로 서 있었다.

    척!

    제일 앞에 선 워리어 대장이 무기를 가슴 앞에 들이밀자 뒤에 있던 나머지 드워프들도 절도 있게 그 동작을 따라 했다.

    아론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이건 드워프들이 보여주는 나름의 충성 의식이었다.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테룬을 지키는 워리어 대장이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뒤에 있던 루테룬의 드워프 병사들도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에게서는 더 이상 아론이 인간이라고 무시하는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의 드워프들은 아론을 은인으로 여기고 예를 갖추었다.

    아론은 거기서 오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나네.’

    그는 지구에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이번과 비슷하게 대규모 던전 토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아론은 만년 C급 헌터였기에 그 많던 헌터들 중에 고작 한 명일 뿐이었다. 그 어떤 주목도 받지 못했었다.

    그저 위의 헌터가 시키는 대로 했고, 온갖 궂은일은 다 했지만 걸맞는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병사들. 그것도 종족도 다른 자들이 자신을 향해 충성의 예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딘가 간질간질한 이 기분.

    유치하긴 하지만 남자들이라면 동경하는 이 우러러 받드는 상황에, 아론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손을 하늘 위로 번쩍 올렸다. 그러자 드워프들도 거기에 화답해 자신의 무기를 두드렸다.

    챙! 챙!

    “우오오!”

    그들이 내는 환호는 아론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쿵! 쿵!

    그러나 저 멀리서 들려오는 돌벽을 공략하는 소리에 아론은 다시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태도는 고맙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무사히 페리움까지 가야 해.’

    그렇게 생각한 아론은 드워프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둘러 도망쳐야 합니다!”

    아론의 그 말에 드워프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부상자들을 들쳐메고,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오크의 시신 근처에서 쓸만한 것들을 노획해서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식간에 정리를 마친 드워프들은 다시 퇴각 행렬에 올랐다.

    쿵! 쿵!

    돌벽을 공략하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후퇴하는 도중에, 다른 성문에서 온 드워프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아론은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던 모양인지 다들 상태가 멀쩡했다.

    “어떻게 된 건가?”

    합류한 드워프가 루테룬에서 온 드워프에게 물었다.

    자기들과는 반대로 이들은 많이 지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울프 라이더들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루테룬의 성문이 부서졌다는 말에는 더 놀랍다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루테룬의 성문은 그렇게 빨리 파괴되지 않을 텐데?”

    “설명할 시간이 없다. 일단 페리움으로 가자고.”

    합류한 드워프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본성을 향해 달렸다.

    쿠르릉-…….

    한참을 퇴각하던 도중, 아론을 비롯해서 드워프들은 작은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아론은 자신이 세워두었던 돌벽이 무너졌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버텨 주었다.’

    아무리 오크가 전력을 다해 쫓아온다 하더라도 이 행렬이 뒤따라 잡힐 걱정은 없었다.

    잠시 후, 페리움 본성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온다! 성문을 열어라!”

    안에서는 후퇴 행렬을 확인하자 바삐 성문을 열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들을 맞이하던 드워프들은 깜짝 놀랐다. 유독 루테룬 성문에서 온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네!”

    쿠르트도 이곳에 있었다. 그는 아론에게 다가와 상황을 물었다.

    아론은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희도 빨리 루테룬에 도착했습니다만, 예상보다 빨리 함락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일단 여기는 혼잡하니 자리를 옮깁시다.”

    아론 일행과 바칸은 탈것을 타고 왕성으로 들어갔다.

    아론은 거기서 상세한 이야기를 쿠르트에게 해주었다.

    “가장 큰 복병은 울프 라이더였었습니다.”

    “울프 라이더라고?”

    “예. 오크들이 늑대를 타고 성벽을 훌쩍 뛰어넘더군요. 드워프 병사들은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쿠르트는 아론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야, 오크가 멧돼지를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늑대를 길들였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건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저자의 말이 정말인가?”

    “예. 정말로 오크들이 늑대를 타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바칸이 거들자 쿠르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론은 자신이 봤지만 불분명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넘겨짚고 가야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크들은 정체불명의 도구로 루테룬의 성문을 부순 것 같습니다.”

    “정체불명의 도구?”

    “예. 실체를 보지 못했기에 뭐라 말하긴 힘들지만…… 성문이 순식간에 부서진 것을 보면 일반적인 공격으로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론의 그 말에 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테룬 성문은 쉽게 부서질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간밤에 오크의 공세도 버텨냈던 것이었고 말이다.

    “그걸 가진 오크들이 내성의 성문을 부순다면…….”

    참혹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당장 성문을 보강해야겠군.”

    이어서 바칸이 루테룬에서의 전투를 보고했다.

    루테룬의 병력 중 삼 분의 일이 후퇴하는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울프 라이더의 습격을 받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

    그나마 아론의 기지가 있었기에 그쯤에서 멈출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훨씬 더 큰 병력의 손실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그 내용을 들은 쿠르트는 참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아…… 전사들이 또 허망하게 가버리고 말았구나.”

    그는 목숨을 잃은 드워프들을 기리며 탄식했다.

    “자네에겐 고맙다는 말밖에 못 하겠군.”

    그러면서 아론에게는 감사를 표했다. 그가 이번 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보고를 마쳤으니 이만 떠나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말일세. 혹시 치료가 필요하진 않은가?”

    쿠르트는 아론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저보다는 다른 드워프 병사들에게 해주십시오. 저는 휴식만 취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알려주겠네.”

    아론은 쿠르트와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전신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에휴, 이 몹쓸 몸.’

    아론은 침대에 누웠다.

    항상 무리를 하면 몸에서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라엘이 칠성초를 달인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걸 들이켜니 몸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 라엘. 너도 잠깐이겠지만 푹 쉬도록 해.”

    “네.”

    라엘은 인사를 하고는 방을 떠났다.

    상태가 나아지니 생각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잿빛 오크라…….’

    아론은 자신이 쓰러트렸던 오크들이 지구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크는 특유의 지적 능력 때문에 큰 연합을 꾸리지 못하는 종족이라는 걸 아론도 잘 알았다. 고작해야 십에서 수십 마리 정도가 뭉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오크들도 수천 마리 이상이 연합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론은 지구에서 그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참여했던 건 아니지만, 전 세계의 헌터들이 고비 사막에 있는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원정을 갔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헌터들은 수십만 마리의 오크들과 전투를 벌였었다.

    그 바보 같던 오크들이 군집할 수 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오크 킹의 존재 때문이었다.

    오크 킹은 자연재해처럼 무작위로 생성되는 녀석이었다. 무슨 혈통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크 킹은 특유의 권능으로 치프에게서 복종을 받아냈고, 어마어마한 군세를 이끌 수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오크 킹은 인간에 필적할 만한 지능을 지녔고, 다른 오크와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자랑한다고 했었다.

    ‘이 산맥의 오크들이 저렇게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오크 킹 때문이겠지.’

    아론은 그렇게 추측했다.

    아직 오크의 규모가 완벽히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오크 킹이 존재한다면 이번 전투는 결코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헤핌 공은 오크와 전쟁이 일어나도 바루나 소드를 가공해 주신다고 하셨지.’

    하지만 걱정되었다. 드워프들이 오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면 그걸로 끝이었기 때문이었다.

    ‘참, 상황 한번 기구하네.’

    아론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형제들의 견제와 아이젠 왕국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드워프 왕국에 왔더니, 이곳도 평온한 곳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바루나 소드를 가공하기 전까진 드워프들과 같이 오크를 막아낼 수밖에 없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곤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헌터, 공작가 망나니 되다 3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