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9/40)

Chapter 4

연회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아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사교를 즐겼다.

하지만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바로 아론 에드먼스. 사람들은 언제 그가 등장할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아론은 왕국 내에서도 유명한 약골 망나니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아론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지만,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몰골을 잊지 못했다. 마치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골골대던 녀석이 에드먼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후계자 후보 경쟁에 뛰어들고는 곧바로 사교계 데뷔라니.

귀족들은 그 소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내어서 이번 연회에 참석했다.

“원래 공작님이 관심도 가지지 않다가, 최근에 아론 공자님에게 임무를 맡기신다고 하더군요.”

“믿는 구석이 있기에 그러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어…… 가문의 체면을 세우려고 쉬운 임무만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마지막 귀족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론이 쓸모가 없는 인간이었다면 차라리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공작은 일반적인 귀족과 달리 겉치레 따위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실속파였다.

“그 주정뱅이 망나니가 달라져 봤자죠. 제가 옛날에 공작가에 왔을 때 그놈한테 당한 거를 생각하면…….”

“동감입니다. 사람이 달라지겠어요?”

귀족들 중에서는 예전에 아론에게 당했던 사람들도 있었기에 고운 시선만 있지는 않았다.

한편, 아론은 문 뒤에서 입장을 기다리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흐음, 그렇구만.’

원래라면 들리지 않아야 하지만, 그는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청각을 증폭시켰다. 덕분에 회장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대다수는 나에 대한 호기심. 소문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왔고, 일부는 나를 헐뜯으러 왔군.’

하지만 아론은 후자의 사람들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지금의 아론은 다르니까. 예전의 주인이 벌여놓은 패악질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론님. 곧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알겠다.”

사용인의 말을 들은 아론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갈 준비를 했다.

“에드먼스 카이만 님의 넷째 아들이신 에드먼스 아론 님이 입장하십니다!”

아론의 입장을 우렁차게 알리자 사람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주목했다.

끼이익-.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아론이 나타났다. 아론은 깔려 있는 카펫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론에게 집중되었다. 과연 소문의 망나니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상과는 다른 아론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카펫 위를 걸어가는 아론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예전과 달리 혈색에 화색이 돌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예복은 그의 고고함을 한층 상승시켜주었다.

“원래 아론 공자님이 저렇게 생기셨나?”

“저 정도면 아예 사람이 바뀐 거 아닙니까!”

아론과 면식이 있었던 몇몇 귀족들은 몰라보게 달라진 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오…… 기품이 느껴집니다.”

“동감입니다. 첫째 공자님을 처음 뵀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요.”

원체 아론의 이목구비가 수려하다 보니 조금만 꾸미고 차려입어도 멋이 살았다.

‘다들 놀라고 있군.’

회장을 쓱 둘러본 아론은 귀족들의 반응에 흡족해했다.

다들 놀랐을 것이다. 이전의 아론은 피해 의식이 똘똘 뭉쳐 있어서 남 눈치나 요리조리 살피던 녀석이 이렇게 당당해지다니.

“로하임 백작가의 자우버 로하임입니다. 아론 공자님의 아카데미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론 공자님.”

눈치 빠른 귀족들은 아론에게 다가가기 쉬운 자리를 잡고는 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론은 정중하게 그들의 인사에 대응했다.

귀족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아론과 이야기 나누기를 원했다.

아론은 그런 그들을 상대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다들 내 속을 떠보려고 하는군.’

귀족들은 아론이 정말로 바뀐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걸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니 사교적인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의 속내를 아론은 간파할 수 있었다.

‘내가 후계자 경쟁에서 활약할 수 있는 녀석인지 궁금하겠지.’

아론의 예상은 정답이었다.

에드먼스 가문의 권세는 왕실을 넘어설 정도였다. 비록 후보일지언정 그런 곳의 후계자가 될 사람과는 연을 맺어두는 게 귀족들에게 있어 중요한 사항이었다.

“아론 공자님. 몰라보게 달라지셨습니다. 확실히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군요.”

“별말씀을요.”

아론은 적당히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왕국과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 그들의 심기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아론과 대화를 나눈 귀족들도 속으로 신기해했다. 이쯤 되면 아론의 성격상 한 번쯤은 뒤집어질 만도 한데…… 아론은 여전히 미소지으며 응대하고 있었다.

아론이 어딘가 달라졌다.

그게 귀족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론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분주히 눈알을 굴렸다.

‘형제들 역시 나를 주시하고 있군.’

첫째를 제외한 에드먼스 가문의 나머지 형제들도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그들 역시 자기 세력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아론을 엿보고 있었다.

‘헬브람 가의 차남이 저기에 있었군.’

아론은 시선을 돌리던 중에 그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론 공자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자신을 발견한 로안은 얼른 다가와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고맙네. 잘 지냈나?”

“예. 얼마 전에 보셨지 않습니까.”

“미안하네. 바쁘게 지내다 보니 먼 옛날에 본 것 같아서 말이야.”

그 광경을 보게 된 근처의 귀족들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론이 격 없이 대하는 상대가 존재하다니.

“그때 백작가의 영지에서 먹었던 술이 맛있었지. 기억이 나는군.”

“오르카 소비뇽 17년산 말씀이시군요?”

“하하, 그래. 그거랑 같이 안주도 맛있었어.”

“구하기 힘든 술이지만, 아론 공자님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지요. 원하신다면 몇 병 보내드리겠습니다.”

“됐네, 됐어.”

아론과 로안의 대화를 엿듣던 귀족들은 인상을 썼다.

사교장의 주인공이 꺼낸 말이 고작 술 이야기뿐이라니.

역시 사람 버릇 어디 가지 않는구나.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머지 형제들에게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우리가 갔던 가게 주인장은 잘 있나?”

아론의 그 물음이 곧 이웨카 길드에 대한 질문인 것을 알아차린 로안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예. 다행히도 몸이 좋지 않았는데, 의원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맛있는 요리를 하는 인재인데 벌써 가면 섭하지.”

“예. 약도 받아서 잘 챙겨 먹고 있다고 하니, 다음에도 맛있는 요리를 대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알겠다.”

아론은 방금 대화로 아그니 소드에 대한 정보가 로안에게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는 눈도 많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로안과 헤어지려고 할 때였다.

“이게 정말 아론이란 말이냐?”

대뜸 어느 청년이 아론에게 다가왔다.

“놀라겠군. 그 약골이던 녀석이 이렇게 변했다니.”

아론은 빠르게 머릿속을 뒤적여 그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왜 인사하러 오지 않았느냐? 어렸을 적에 너를 많이 귀여워해 주었거늘…….”

다행히도 이 몸의 이전 주인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 자는 메도우드 왕국의 4왕자, 레온 반 잉그리드. 아론과 면식이 있는 자였다.

‘어렸을 적에 에드먼스 아카데미에 다녔었군.’

그는 마법 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의 아카데미에 다닌 적이 있었다.

레온 왕자의 입에서는 자신을 귀여워해 줬다고 했지만, 좋은 기억은 없었다. 그는 케빈과 함께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할 때마다 아론의 코에 은은히 풍기는 술 냄새. 벌써 술이 들어가 취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레온 왕자님.”

“내가 많이 섭섭하구나!”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시종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레온이 왕자라고 할지라도 여기는 왕실이 아닌 에드먼스 공작가였다. 그는 왕자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다.

“연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술이 많이 되셨군요. 과음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네 이놈!”

레온 왕자는 노성을 토했다.

“후계자 후보에 올랐다고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그는 아론의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이래 봬도 왕족이란 말이다! 그리고 너보다 성취가 높다!”

레온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주변에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이목이 집중되었다.

“레온 왕자도 맛이 가버린 건가?”

“이거 참. 축하 자리인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귀족들은 이 작태를 보고 저마다 목소리를 낮춰서 수군거렸다.

4왕자가 성격이 개차반인 건 워낙 유명했다. 하지만 왕족이라서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이렇게 뒤에서나 뭐라고 할 뿐이었다.

레온이 폭주하기 직전, 어디선가 둘째 러셀이 불쑥 나타나 끼어들었다.

“레온 왕자님 아니십니까.”

“으…… 응? 아아. 러셀이군.”

아론은 러셀의 등장을 기이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가 상황을 일단락시키려고 하는 것 같으니 아론은 조용히 여기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 아론이 실수를 한 모양인데, 명예를 되찾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러셀이 보인 다음 행동에 아론은 기가 찼다.

‘이런. 불난 곳에 물을 들고 온 줄 알았는데 기름을 끼얹는구나.’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 아론은 내 명예에 흠집을 내었지!”

레온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아론을 노려보았다.

“결투다! 결투로 내 명예를 되찾겠다!”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젠장. 능구렁이 녀석이 왜 왔나 했더니 분탕질을 하려고 온 거였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러셀은 공정한 중재자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레온 왕자의 성취는 5서클을 목전에 둔 4서클 마스터.

반면 아론은 아직 수련 중인 4서클이었다.

수치만 본다면 결투에서 이기는 것은 레온 왕자였다.

러셀의 입장에서, 아론이 지면 그가 주인공인 연회에서 망신을 줄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설령 아론이 이기더라도 자신은 단순한 중재자에 불과했으니 잃는 건 없었다.

“레온 왕자님. 진정하십시오. 연회 첫날인데 결투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론은 그를 잘 구슬려보기로 했다.

“아직 저는 만나야 할 분들이 많습니다. 혹시 내일까지 계신다면 그때 결투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흥! 무서워서 내빼는 것이냐? 좋다. 하루 정도는 아량으로 기다려 주마!”

레온은 씩씩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레온 왕자도 어지간히 취한 모양이군.’

내일은 왕실 행사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일정에 맞추려면 레온은 내일 오전 떠나야 했다.

‘결투는 당연히 못 하겠지.’

시간이 빠듯했으니 말이다.

아론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대응이었다.

만약 결투를 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비난의 화살은 일정을 어그러트린 레온 왕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론은 그에게 질 생각이 없었다.

그때, 슬쩍 보인 러셀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러셀. 언제나 능구렁이처럼 굴었지만, 이번에는 네 뜻대로 놀아날 생각이 없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러셀을 바라보았다.

* * *

“하지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넌 내일 내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될 테니까!”

레온이 아론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거기에 대고 아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편, 러셀은 당황했던 기색을 싹 지우고는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레온 왕자님. 내일 오후에는 왕실 일정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레온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상관없다! 네 말대로 내 명예는 회복하고 가야겠어!”

레온은 그렇게 억지를 부리며 눈을 부릅떴다.

완고한 그의 모습을 본 러셀은 한숨을 쉬더니, 레온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쯤에서 하고 물러나시지요.”

러셀의 목소리는 한층 내리깔았고, 마나가 잔뜩 실려 있었다.

그걸 들은 레온은 정신이 번쩍 들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일이었군!”

레온은 금방 태도를 뒤집었다.

“중요한 왕실 행사라 이번 결투는 없던 거로 하겠다. 다만 아론. 너는 언젠가 두고 볼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론으로부터 멀어졌다.

‘추하군.’

아론은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구나.”

러셀은 아론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행실의 문제는 레온 왕자에게 있었다. 하지만 거기다가 기름을 드럼통째로 들이부어 불을 지른 사람은 러셀이었다.

“형님 덕분입니다.”

물론 그에게 따질 수는 없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연회를 마저 즐기거라.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니까.”

러셀은 그 말을 끝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뱀 같은 녀석이야.’

처음 러셀을 보았을 때도 그의 웃는 모습이 꺼림칙하게 느껴져서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태도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온 왕자가 나한테 시비를 걸도록 부추겼었지.’

아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지구에서 말단 헌터로서 구른 게 몇 년인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정치질에는 빠삭했었다.

한편, 레온과 아론의 다툼을 보았던 귀족들도 아론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아론이 생각보다 신중하다.

분명 약골 망나니라 들었었는데.

후계자 경쟁에서 의외의 저력을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의견들이 귀족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내 평판은 깎이지 않아서 다행이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 일을 치워 버리고는 손님들을 계속해서 맞이했다.

“이야~ 아론 공자님께서는 4왕자님도 유하게 구슬릴 줄 아시는 분이군요.”

“정말로 다시 봤습니다. 그래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4왕자께서는 술을 워낙 좋아하시다 보니, 하하하.”

귀족들은 그렇게 은근히 4왕자를 깎아내리면서 아론을 칭찬하였다.

레온 왕자가 들었더라면 불경하다고 대노하겠지만, 어차피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었다.

아론은 웃으면서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연회의 첫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덧 회장에서 거의 빠져나간 상태였다.

현재 공작가에는 왕국 내외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거의 모인 상태다 보니, 이 기회에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각자들 방으로 간 상태였다.

“백작가도 일로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맙네.”

아론은 아직 남아 있는 헬브람 백작가의 차남 로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닙니다. 오는 게 당연한 도리인걸요.”

로안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아론은 자신의 손에서 무언가가 잡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로안은 눈치껏 남의 눈을 피해 아론에게 쪽지를 건네는 데 성공했다.

아론은 그대로 로안과 헤어진 뒤 자신의 방으로 가서 쪽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후, 안에 든 내용을 확인한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워프는 워낙 폐쇄적인 종족이라서 접촉이 힘들다라…….’

아론도 그 정도 지식은 이미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이웨카 길드도 그 점에 대해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미스릴을 다룰 줄 아는 장인을 찾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그니 소드는 미스릴 소드가 주재료였다. 만약 그 재료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그니 소드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도 대단하군. 의뢰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조사해서 알려주다니.’

아론은 이웨카 길드의 정보력에 새삼 감탄하였다.

‘다만 그 대장장이가 사는 곳이 헤카롯이라…….’

흔히 대장장이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 바로 헤카롯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이젠 왕국의 수도와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특성상 아이젠의 기사들이 자주 그곳에 들락거렸다.

‘아이젠 왕국에서 아그니 소드의 소재를 아직 찾지 못했어야 하는데…….’

아그니 소드는 아이젠 왕가의 재보였다.

만약 아론이 들고 갔다는 것이 파악되었다면 그가 아이젠 왕국의 인접지로 가는 순간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정식 후계자 후보야.’

현재 자신의 위치에선 가문의 지원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고, 자율 행동도 가능했다.

그리고 라엘은 물론 켄트도 필요할 때 언제든 부를 수 있었으니 전력은 문제없을 거 같았다.

‘그럼 연회가 끝나고 출발하는 거로 일정을 잡아봐야겠군.’

아론은 그리 생각한 뒤, 예복을 벗어 던지고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후우. 한결 낫네.”

이곳의 예복은 답답하기에 그지없었다. 저런 옷을 앞으로 3일이나 더 입어야 한다는 것이 막막할 뿐이었다.

***

다음 날이 되었다.

아론은 오늘도 답답한 예복을 입은 채 귀족들과 인사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바뀐 건 거의 없었다. 단지 새로운 사람들과 비슷한 말들을 나눌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아론에게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연회란 건 실제로 겪어보니 참 시시하구나.’

현대인의 심정으로는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중세의 연회를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사람들과 춤을 추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맛있는 음식이든 술이든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걸 며칠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론을 질리게 만들었다.

‘슬슬 다시 사람을 맞으러 가볼까.’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아이젠 왕국의 7왕자, 바르트한 아이젠님이 오셨습니다!”

시종이 큰 소리로 왕자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자 연회장의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아론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저자가 아이젠의 7왕자인가.’

그는 소수의 수행원을 데리고 연회장에 등장하였다.

바르트한은 아이젠 왕가의 사람답게 짙은 남색 머리가 특징이었다. 그리고 연회복을 입었음에도 겉으로 다부진 몸이 티가 났다.

다들 바르트한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아론은 그의 뒤편에 있는 수행원에게 눈길이 갔다.

‘……저 사람은?’

아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수행원 중 한 명이 바로 할리움에서 빠져나올 때 싸웠던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그때의 그 서늘한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강한 자였지.’

이미 아그니 소드를 탈취할 때 다른 기사와 싸웠기에 마나를 소진한 것도 있었지만, 저자는 강했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 뒤에 귀환 마법을 써서 도망갔던 것이었다.

‘……나를 기억하려나?’

그때 아론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게끔 복면을 착용한 상태였었다.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곳은 에드먼스 공작가의 본진이었다. 거기서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아론을 노리지는 않을게 분명했다.

아론은 심호흡을 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여차하면 공작이 움직이겠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르트한과 수행원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바르트한은 곧장 카이만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아이젠에서 여기까지 먼 길 오느라고 고생 많으셨소.”

“아이젠 황제께서도 에드워드 가문의 아드님이 이루어낸 성취를 축복한다고 하셨습니다.”

“하하. 왕실의 손님이니 우리도 극진히 모시겠으니, 부디 즐기다 가시길 바라겠소.”

둘은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음을 아론은 알 수 있었다.

‘바르트한은 굳이 남의 나라에서 황제를 들먹였고, 공작은 꿋꿋하게 왕실이라고 언급하면서 받아치셨군.’

귀족들은 인사에도 칼을 숨기는 것을 목도한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공작이 왜 아이젠의 사람을 초대했는지 모르겠군.’

바르트한이라고 해서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닐 것이 분명했다. 초대장을 받았으니 나선 것이리라.

에드먼스 가문이라 하더라도 어지간히 큰 규모의 연회가 있지 않고서야 아이젠의 사람까지 부르지는 않았다.

그건 아론도 인정하는 부문이었다. 자신이 주인공이긴 했지만 이 자리는 고작 에드먼스 아카데미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아론의 형제들도 연회를 여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공작과 인사를 마친 바르트한이 아론을 향해

‘오는구나.’

아론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에드먼스 아론.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을 축하드리오.”

그의 어투는 사뭇 정중해 보이지만 기세는 매우 거친 것이 느껴졌다.

“일부러 멀리서까지 축하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론은 적당히 그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흘끔 수행원을 살폈다.

‘이 정도 거리에서 보는데도 반응이 없다면…….’

정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재능이 있거나, 자신의 정체를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때 싸우던 모습을 봐서 기색을 잘 숨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러면 이자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술 한잔 어떻겠소?”

“좋습니다.”

바르트한이 먼저 술을 권하자 아론 역시 술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잔을 가볍게 부딪혀 건배하고는 술을 마셨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술잔을 비운 바르트한이 아론을 보며 말했다. 그의 입가엔 서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뭐지?’

아론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 * *

‘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는 대체……?’

아론은 바르트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아그니 소드를 가지고 있는걸 알고 있나?’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론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헬브람에서 만났던 첫 번째 기사는 내 손으로 죽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체가 알려졌을 리가 없었다.

지금 바르트한의 수행원으로 있는 저 기사는 아론이 도주 중에 만났지만, 그때는 복면을 새로 썼었기에 자신의 얼굴을 몰랐다.

‘설마 이웨카 길드에서 배신을 하고 정보를 흘린 건가?’

그쪽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고객을 배반하는 것은 정보 길드의 신용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즉에 아론의 뒤통수를 칠 거였다면 그가 아그니 소드에 대해 정보 수배를 요청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그니 소드가 보관되어 있던 창고의 도면을 준 것은 이웨카 길드다. 만약 우리의 관계가 알려진다면 그들도 화를 피하기 어려워.’

그렇게 생각하니 아론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대체 바르트한이 물어보려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기로 했다.

괜히 긴장한 티를 내어서 책을 잡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왕자님께서 제게 듣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론의 그 말에 바르트한은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리며 입을 열었다.

“아론 공자는 제대로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다고 들었소. 그런데 벌써 4서클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하더군.”

“예. 늦게 시작했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부족한 점이 많네. 그리고 기사이지만 마법에도 관심이 많지.”

바르트한은 아론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나와 비무를 겨뤄 보지 않겠는가? 서로의 진전에 있어 도움이 될 거라고 보네만.”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그런 거 물어보려고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해?’

조금 전에 바르트한이 보여주었던 서늘한 미소는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아이젠의 왕자들은 에드먼스 가문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와서 연회의 주인공에게 비무를 신청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관습이었다. 예로부터 아이젠과 메도우드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아이젠은 상대국의 강자와 붙어서 힘을 과시하기를 원했다.

주로 아이젠의 왕자들이 오는데, 그들에게는 비무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만약 패배할 경우 불명예를 이유로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날 수 있었다.

에드먼스 가문에 있어서도 이러한 비무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리 상대국의 기사와 붙어서 힘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드먼스 가문이 승리한다면 명예도 덤으로 챙길 수 있었다.

물론 아론이 그러한 내막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비무쯤이야 괜찮지.’

마침 연회도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한데, 차라리 한번 붙어보는 것도 낫겠다 싶었다.

‘그동안 성장시킨 쿠브의 힘도 시험해보고 말이야.’

연회를 준비하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아론은 정령과 계속해서 교감을 시도했었다.

과연 전투에선 그 성과가 어떨지 궁금했다.

‘나중에 아그니 소드의 진상이 발각되면 아이젠하고 붙을 일도 생길 거 같으니까, 그걸 대비하는 겸 해서도 좋겠군.’

여러모로 불리한 것이 없는 비무였다.

특히, 상대측에서 정중하게 비무를 신청해 왔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공작이 매우 실망할 게 분명했다.

‘아직은 공작에게 바짝 숙여야 한다. 에드먼스 가문에서는 얻을 게 많으니까 말이야.’

속으로 결론을 내린 아론.

그는 바르트한을 쳐다보며 대답하기 전에, 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 이름 : 바르트한 아이젠

· 스테이터스

체력 101 마력 63

근력 110 민첩 70

지력 41 친화력 96

바르트한의 수치는 꽤 높았다.

이전에 만났던 기사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였다.

하지만 아론도 그 이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나름의 성장을 거쳤었다.

그는 이 비무가 할만하다고 여겨졌다.

파악을 마친 아론.

그는 바르트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역시 검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로 간에 좋은 교류가 될 수 있겠군요.”

“받아줘서 고맙소.”

“잠시만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연회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공작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라.”

“얼마든지 하시오.”

아론은 바르트한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작에게 갔다.

“상대가 비무를 신청했더냐?”

“예.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대답을 들은 공작은 아론을 향해 물어보았다.

“7왕자의 경지가 너보다 높은 것은 알고 받아들인 거겠지?”

“물론입니다.”

아론도 상태창으로 봐서 알고 있었다.

바르트한은 4서클의 마스터에 오른 기사.

그러나 아론은 4서클 마스터의 마법 교육생도 이겨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을 못 할 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상대가 마법사가 아닌 기사라는 것이지만…….

“비무를 받아들인 이상 절대 지면은 안 된다. 그랬다가는 네가 누렸던 모든 권한을 빼앗길 것이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공작이 저렇게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고작 비무에서 지는 것 가지고 왜 저러나 싶겠지만, 이미 공작은 아론의 패악질을 많이 눈감아 줬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론은 공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나름 계산한 수가 있나 보군.”

아론의 대답을 들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보였다.

“네가 저자를 궁지에 몰아붙인다면, 재밌는 광경을 보게 될 거다. 내가 왜 아그니 소드를 너에게 줬는지 조금은 이해하겠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아론에게 이제 가보라고 손짓했다.

아론은 공작의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밌는 광경이라고……?’

그리고 갑작스럽게 아그니 소드에 대해서도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론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일단 비무에만 정신을 집중하기로 했다.

‘비무를 마치고 나서 다 알게 되겠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바르트르가 있는 곳으로 갔다.

***

아론과 바르트한은 공작가에 있는 비무장으로 이동했다.

‘비무장을 쓰는 건 처음이군.’

잠시 후, 시종이 와서 두 사람에게 걸치는 보호구를 건네주었다.

“이 보호구는 5서클 이하의 공격은 무조건 막아줍니다. 대신에 피해를 입은 만큼 보호구의 구슬에 충격이 갑니다. 이게 깨지면 패배하는 겁니다.”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각자 보호구를 받아서 착용했다.

아론은 이전에 서열 대련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보호 장비도 없이 했었지.’

당시에는 신관만 대기했던 거 말고는 아무런 보호 없이 결투를 진행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야 간단했다. 바르트한의 경우는 외부인이기에 예를 차릴 필요가 있었고, 서열 대련은 가문 내의 사람끼리의 결투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런 게 있으면 목숨을 건 진정한 비무는 불가능하군.”

보호구를 다 입은 바르트한이 투덜거렸다.

“다치는 것보단 서로 무사히 배워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르트한의 기분을 배려했다.

“흠. 아론 공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내 바르트한의 수행원이 그에게 검을 가져다주었다.

‘검이 두 자루……?’

아론은 그가 허리에 두 자루의 검을 차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설마 양손에 하나씩 검을 들고 싸울 생각인가?’

그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비무를 앞두고 잡념은 집중에 좋지 않았다.

‘어차피 붙어 보면 알겠지.’

아론은 바르트한과 함께 비무장으로 올라갔다.

“그럼 한 수 부탁하겠소.”

“저야말로요.”

둘은 서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한 뒤, 비무를 시작했다.

스릉!

바르트한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사나웠던 그의 기세가 한층 더 강해졌다.

‘쌍검을 쓰는 건 아닌가 보군.’

나머지 하나의 검을 뽑지 않고 그대로 찬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아론은 비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세는 매우 안정적이군.’

아론은 이전에 자신이 결투로 쓰러트렸던 벤지가 기억이 났다.

그도 4서클 마스터는 아니지만 상급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빈틈이 워낙 많이 보였다.

그러나 바르트한에게는 그러한 빈틈이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아이젠의 기사라서 다르구만.’

아이젠은 왕자라고 해도 기사들과 같이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파박!

바르트한이 크게 한 걸음 내딛더니 이내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론의 앞으로 온 그는 아론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후웅!

아론은 예상외의 속도에 놀랐긴 했지만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장 실드 마법을 사용해

카앙!

바르트한의 검은 실드를 뚫지 못하게 튕겨 나갔다.

아론은 이어서 반격을 하기 위해 얼음 마법을 날렸다.

후웅!

그러나 바르트한은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검에 오러를 두른 채 마법을 받아쳤다.

‘무지막지하군.’

바르트한은 아론에게 거리를 벌릴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들러붙었다.

아론은 실드를 펼치거나 공격 마법을 날려서 바르트한의 공격을 피했다.

‘이 녀석,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바르트한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는 법이 없었다. 아론이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기 전에 제압하려는 수였다.

마법을 이용해서 집중포화를 펼친다면 기사 쪽이 불리하기에 당연한 전투법이었다.

‘나도 기사들과 두 번 전투를 치르면서, 경험을 쌓았다고.’

바르트한이 검을 휘두르며 짓쳐들어오려 할 때. 아론은 그 틈을 노려 발밑에 돌을 소환했다.

쿠구구!

돌은 순식간에 벽을 만들었고, 아론은 그 위에 발을 딛고 섰다.

바르트한은 갑작스러운 아론의 시도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잠깐의 당황이 만들어 낸 간극은 아론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화르륵!

아론은 화염 마법을 시전해서 바르트한이 있는 아래로 내리꽂았다.

바르트한은 오러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론은 이번에 충분히 마나를 모으고 방출한 마법이라서 위력이 상당했다.

“크윽!”

결국 바르트한은 공격을 맞받아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오러를 몸에 둘러 방어 태세를 취했다.

쩌적!

그러나 바르트한의 보호구에 박혀 있는 구슬에 금이 가고 있었다. 허용치 이상의 충격이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타악.

바르트한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내려놓았다.

스릉!

그런 뒤, 허리춤에 꽂고 있던 또 하나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제대로 싸워 주겠다.”

바르트한은 새로운 검을 뽑자 마치 처음부터 전투에 임하는 것처럼 투지를 불태웠다.

* * *

그 광경을 내려다본 아론은 당황했다.

‘원래 들고 있던 검을 버리고, 새 검을 뽑았어?’

그는 바르트한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무장에 올라와 처음 바르트한과 마주했을 때는 그저 그의 기량에만 감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뽑은 검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대체 뭐길래 그러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바루나 소드(복제품)」

· 칠검 중 하나인 바루나 소드의 복제품.

‘과연…… 심상치 않다 했더니, 저것도 아티팩트였었군.’

아론은 검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그니 소드와 마찬가지로, 특이한 힘을 낼 수 있는 검이라고 예상이 되었다.

처음부터 바르트한이 저 검을 뽑고 싸우지 않은 것은 순수하게 실력으로 맞붙어보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잠깐만. 근데 저거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잖아?’

아론은 검의 이름 옆에 ‘복제품’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복제품치고는 상당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데?’

아론은 다시 바르트한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 이름 : 바르트한 아이젠

· 스테이터스

체력 130(↑29)마력 78(↑15)

근력 151(↑41)민첩 94(↑24)

지력 41 친화력 116(↑20)

맞붙기 전과 비교해서 능력치가 확연하게 올라가 있었다.

특히, 마력의 수치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진하게 내뿜는 바르트한의 오러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제길. 아티팩트라 해도 검인데, 마력은 왜 올려주는 거야?’

안 그래도 바르트한은 비등한 실력의 상대라서 까다롭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무 중에 저렇게 수치를 올려 버리면 더욱 이기기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후웅!

아론이 더 의문을 가지기 전에, 바르트한이 검을 이용해 아론이 세운 돌기둥을 베어 버렸다.

아론은 충격이 전해지기 전에 거기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에드먼스 호흡법을 사용해 단숨에 마나를 축적했다.

파지지직!

아론은 내려오면서 번개 마법을 시전해 발사했다. 총 네 개의 뇌전이 바르트한을 향해 질주했다.

번개 마법은 대인 살상력이 가장 뛰어난 마법이었다. 그리고 바르트한이 들고 있는 바루나 소드의 역상성이었다.

제대로 마법이 직격한다면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파직!

쏘아진 네 개의 번개 중 하나가 저 멀리 뒤로 날아갔다. 만약 바르트한이 뒤로 물러난다면 한 발이라도 맞추기 위해서였다.

타악!

그러나, 그는 날아오는 뇌전에도 굴하지 않고 몸을 앞으로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파지직!

바르트한이 검을 휘두르니 그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뇌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론은 일부러 뒤로 던진 뇌전 한 발의 방향을 긴급하게 틀었다.

바르트한은 그 한 발마저도 몸에 오러를 둘러 받아쳤다.

원래라면 바르트한에게 데미지를 줬어야 할 공격이었다. 하지만 바루나 소드로 인해 마력이 향상된 결과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후욱!

공격을 성공적으로 받아낸 바르트한의 검이 아론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일견 간단한 동작으로 보이지만 아론의 눈에는 검의 주위에 휘몰아치는 오러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실드로 막아내면 그대로 뚫고 들어와 내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 거다!’

타앗!

아론은 힘차게 뒤로 뛰어오르면서 전방에 돌벽을 생성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겹겹이 만들었다.

쿠구구!

바르트한은 멈추지 않고 검을 찔렀다.

파사삭!

첫 번째 돌벽은 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카앙!

하지만 두 번째 돌벽부터는 그의 검이 돌벽을 뚫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는 굴하지 않았다. 곧장 벽을 피해 새 경로로 아론을 노리고 들어왔다.

쉬익!

아론은 쇄도하는 칼날을 바라보며 다시 돌벽을 쌓았다.

카가각!

그의 공격은 이번에도 아론이 만들어 낸 돌벽을 뚫어내지 못했다.

‘공격을 막는 방법을 바꾸길 잘했어.’

아론은 실드가 아닌 돌벽을 만들어내 바르트한의 공격을 틀어막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방법을 생각하면서도 긴가민가했었다.

쿠브와 교감이 올랐다지만 그게 실전에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정령에 대해 공부하면서 쿠브와 교감을 쌓길 잘했어.’

그 결과, 실드보다 단단하면서 캐스팅 시간도 거의 필요가 없는 새로운 방어 수단을 얻게 되었다.

‘쿠브가 내가 쓰려는 마법을 스스로 알아차려서 힘을 더해준단 말이지.’

아론은 실감했다. 바르트한의 실력은 대단하다는 것을. 쿠브가 없었다면 이 전투를 막상막하로 끌고 가지는 못했음을 말이다.

쿠브 덕분에 방어에 여유가 생긴 아론은 바르트한을 향해 간간이 공격 마법을 날릴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쿠브가 공격 마법에는 힘을 보태주지 못하네.’

아무래도 방어 마법은 계약자와의 생존 본능과도 직결되다 보니 쿠브가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하지만 공격 마법까지 도와줄 정도로 교감이 깊지는 않았다.

전투는 결국 교착 상태로 흘러갔다.

바르트한이 거세게 치고 들어오고, 아론이 그것을 막으면서 반격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무.

쉬익- 카가각!

하지만 아론은 노림수가 있었다.

‘바르트한이 저 검으로 공격을 할 때마다 얼음이 흩뿌려진다.’

아티팩트의 설명에도 적혀 있듯이, 그게 바루나 소드의 특성이었다.

아론은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생겨난 얼음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면 비무장 전체가 물로 적셔질 것이다.

‘그때, 번개 마법을 다시 사용한다.’

아론은 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아론은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바르트한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에드먼스 호흡법을 시전했다.

그렇게 7번을 반복한 결과, 마나 회로에는 무시할 수 없는 양의 마나가 축적되어 있었다.

타앗!

아론은 제자리에서 위로 뛰어올랐다. 그다음, 손을 아래로 뻗은 채 여태껏 모았던 마나를 전부 전격으로 토해냈다.

‘쿠브, 부탁해!’

동시에 아론은 쿠브에게 돌기둥을 만들어 달라고 지시했다. 바닥에 있다가는 자신도 공격에 휘말리기 때문이었다.

쿠구구!

돌기둥이 아론의 발밑에 솟아남과 동시에.

꽈르르릉!

아론의 손에서 나온 전격이 비무장 바닥에 직격했다.

어디를 정확히 노리고 조준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비무장은 바르트한이 열심히 검을 휘두른 덕분에 물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큭!”

전격은 순식간에 바르트한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는 즉시 오러를 방어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론은 혼신을 다해서 뿜어낸 마법이었다.

파지지직!

그 위력은 비무장 전역에서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였다. 바르트한의 오러가 아론의 전격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크악!”

결국 바르트한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전기의 영향이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손발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찬 보호구의 구슬에도 금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받은 피해가 꽤 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론은 돌기둥에서 내려와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내가 이대로 질 줄 아느냐!”

그때, 바르트한이 부들부들 떨면서 아론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그는 힘겹게 검을 부여잡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촤학!

‘뭐 하는 거야?’

그 광경을 본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손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피는 검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검이 피를 흡수하고 있었다.

‘뭐지? 오러가 짙어지는데?’

아론은 즉시 바르트한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마력 135(↑42)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아론은 당황스러웠다.

상태창에 기록된 마력의 증가 수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후웅!

바르트한은 검을 휘두르자 그의 주변에 있던 뇌전의 기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바르트한의 보호구에 있는 구슬은 거의 한계다.’

저게 깨지면 아론의 승리였다.

하지만, 아론은 지금 저 상태의 바르트한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르트한의 저 귀기 서린 눈빛. 마치 딴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에드먼스에게는 질 수 없다!”

바르트한이 포효하며 일어났다.

‘좀 위험한 거 같은데?’

보호구는 어디까지나 착용자끼리 5서클 이하의 공격만 막아주었다.

만일 그 이상의 공격이 가해진다면 아론에게도 피해가 올 것이 분명했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비무다. 여기서 목숨을 걸 생각은 없어.’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과연 괜찮은지 눈짓으로 비무장의 관리인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관리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버틸 수 있다는 뜻인가.’

아론은 한숨을 쉬면서 바르트한과 맞설 준비를 했다.

크게 다치거나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니, 격차가 크게 나는 싸움도 경험이 되어줄 거라 생각하고 임하기로 했다.

타악!

그때였다.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더니 바르트한의 눈이 풀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론과 바르트한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누구야?’

아론은 갑작스럽게 개입한 사람을 좇아 눈을 돌렸다.

그러자, 바르트한의 뒤에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도주할 때 봤었던 그 수행원이잖아?’

아론은 긴장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상당한 실력을 가진 모양이었다. 바르트한이 쓰러질 때까지 아론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바르트한 왕자님께서 많이 흥분하신 것 같아서 개입했습니다.”

그는 아론에게 사과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비무는 아론 공자님의 승리로 하고 마무리 지어도 되겠습니까?”

아론은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관대한 처사 감사드립니다.”

수행원은 묵례를 하고는 바르트한의 용태를 살폈다.

“신관에게 치료를 받고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르트한을 업고 나가려는 수행원에게 시종이 다가가서 물었다.

“괜찮다. 우리 쪽에서도 데려온 신관이 있으니 말이다.”

그는 정중히 거절하며 나머지 수행원들과 함께 비무장을 나섰다.

‘복제품을 시연하는 무대치고는 너무 크게 일을 벌였군.’

수행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비무장에는 바르트한 일행이 빠져나가고 나머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론은 신관에게 치료를 받으며 생각했다.

‘오늘 연회 일정을 소화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치료를 받고 있지만 기력이 회복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나를 무리하게 소모한 탓이었다.

아론은 간단한 치료를 마치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비무가 길지는 않았지만, 아론은 마나를 꽤나 쏟아부었었다.

바르트한이 4서클 마스터임을 여실 없이 실감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이상한 검을 뽑아 들더니 더 강해졌었지.’

아론은 그가 나머지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던 때를 떠올렸다.

그래도 그 검의 특성 덕분에 약점을 파고들어 아론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여줬던 그 모습은…….’

거의 이겼다고 확신할 때쯤, 바르트한은 자신의 손바닥을 베더니 오러가 크게 짙어지는 것을 보았었다.

마치 그 광경은 검이 피를 먹는 것과도 같이 느껴졌었다.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아론은 바루나 소드라는 이름의 검에 대해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몸이 피로한 탓에 더 이상 깊게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아론은 방에 도착한 즉시 침대에 몸을 던져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아침.

아론은 해가 창문을 비추기 시작할 때 일어났다.

‘오랜만에 푹 잔 것 같군.’

그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똑똑.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마침 라엘이 방문을 두드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응. 들어와도 돼.”

라엘은 칠성초를 달인 물과 함께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왔었다.

아론은 칠성초 물을 마시면서 라엘에게 물었다.

“내가 비무를 한 뒤에 공작님으로부터 따로 말씀은 없었어?”

“공작의 비서님이 서신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라엘은 아론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안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단지 비무에서 이긴 것을 축하하고, 푹 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별것 없지만, 이걸 보낸 사람이 공작이라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칭찬이군.’

아론은 공작의 성격을 잘 알았다. 아론의 행동에 이 정도면 공작이 만족했다는 의미였다.

‘공작도 아이젠에게 이겨서 내심 기분이 좋으신가 보군.’

웬만해선 이런 내용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을 텐데 말이다.

퐁!

그때, 쿠브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 아론에게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론이 비무를 마치고 내내 잠만 잤으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이길 수 있었어.”

아론은 쿠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쿠브도 붕붕 떠다니며 기뻐하고 있었다.

‘예전과 비교해서 쿠브의 표현이 늘어난 것 같군.’

이번 비무를 거치면서 정령도 같이 성장한 것 같았다.

물론, 정령만 성장한 건 아니었다. 아론에게도 소득이 있었다.

바르트한과 합을 겨루면서 아이젠의 왕자들이 쓰는 검술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비무가 쿠브의 도움을 받아 본 첫 전투였다. 아론은 쿠브가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쿠브는 방어 마법에만 도움을 주는 형태였지만, 더 교감을 쌓고 성장하다 보면 공격에도 정령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번 비무를 통해 공작이 흡족해했으니 그의 속에선 아론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을 터였다.

‘곁가지지만, 칠검 중 하나인 바루나 소드의 위력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복제품이긴 하지만,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과연 본래의 검이었다면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바르트한이 그 검을 뽑자마자 능력치가 상승했었지?’

아론은 그때 보았던 그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마치 강화약을 먹은 것 같이 수치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검이 피를 빨아들였을 때,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갔었어.’

마치 그때는 바르트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비무장에 서 있는 것 같은 기운을 감지했었다.

마력은 오러와도 연관이 있지만, 마법사가 지닌 서클의 기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오히려 바루나 소드가 마력을 올려주는 것은 기사보다 마법사에게 더 어울리는 능력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아론은 방 한편에 보관해두었던 아그니 소드를 꺼냈다.

‘이걸 들면 내 마나가 올라갈까?’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 검을 집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와 마법사는 마나 운용법이 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그니 소드는 착용자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특성이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공작이 말했었지. 이번 비무를 거치고 나면 왜 그가 아그니 소드를 주었는지 알게 될 거라고.’

아론은 다시 아그니 소드를 보관함에 넣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감히 잡히지 않았다.

‘도저히 모르겠군. 이제 남은 건 이웨카 길드에서 알려준 대로 헤카롯에 있는 장인을 만나보는 것밖에 없어.’

그를 방문하는 건 아그니 소드를 분해해 자신에게 맞는 장비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엘. 이번 연회가 끝나면 조금 위험한 곳에 갈 생각이다.”

“어디로 가실 계획입니까?”

“장인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헤카롯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한테는 적지나 다름없어. 아이젠하고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저는 도련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겁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저번에 갔던 던전만큼 위험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상관없습니다.”

아론의 물음에 라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켄트에게도 여쭤볼 건데, 괜찮지?”

“저는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켄트도 따라와 주겠지?”

“겉으로는 툴툴거리시겠지만, 그분도 결국 도련님을 따라간다고 말할 겁니다.”

확실히 라엘의 말대로였다.

아론이 가자고 하면 켄트가 마지못해 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론은 라엘의 도움을 받아 예복으로 갈아입고 연회 일정을 소화할 준비를 했다.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회를 마치고 나면 먼저 포드 공을 찾아가야겠군.’

아무래도 가는 곳이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 있는 곳이다 보니 포드의 조언을 구해볼 생각이었다.

***

드디어 연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론은 공작가로 밀려들어 온 귀족들을 상대한다고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이제 거의 끝날 시간이 되어갈 때. 아론은 헬브람 백작가의 차남, 로안을 찾아갔다.

“마지막 날까지 있어 줘서 고맙네.”

“별 말씀을요.”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로안에게 악수를 하는 척하며 종이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로안은 아론이 건네준 것을 자연스럽게 품속에 넣고는 연회장을 떠났다.

아론이 그에게 준 것은 다름 아닌 다음 의뢰 내용과 대금으로 지불할 수표였다.

이웨카 길드에는 아이젠 왕국의 7왕자인 바르트한 아이젠과 그의 수행원 젠슨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종이에 적어 뒀었다.

‘연회는 무사히 끝났군.’

이번 연회는 아론의 첫 사교 데뷔였다. 그를 직접 만나본 귀족들은 아론에 대한 평가를 고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오늘 오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도 아론이 약골 망나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굳이 그 부분은 상관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뒤처져서 착각하라지.’

그리고 자신에게 씌워진 망나니라는 프레임은 단점이 되기도 했지만, 아론에게 행동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점도 존재했다.

어떤 행동이든 ‘아론은 망나니니까’라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로 들면, 갑자기 집을 훌쩍 떠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게 분명했다.

망나니가 또 이상한 바람이 불었구나, 하고 생각은 하겠지만 말이다.

아론은 연회를 끝낸 뒤, 계획했던 대로 포드를 찾아갔다.

그는 포드한테 비무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이젠의 왕자랑 붙어서 네가 이겼단 말이지…….”

포드는 아론이 말해준 내용을 곱씹었다.

“그런데 왕자가 지녔던 칠검의 복제품을 뽑자 오러의 농도가 상승했었고?”

“예. 그 점이 참 이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기사는 자신과 상성이 맞는 검을 쥔다면 간혹 오러의 위력이 상승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론의 이야기를 들은 포드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눈에 상태창이 보이고, 그의 마력만 이상할 정도로 올랐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론은 답답했지만, 공작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포드에게 알려주었다.

“공작님께서는 비무가 끝난다면 저에게 아그니 소드를 준 이유를 알아차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예.”

그러자 포드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앞서 바르트한이 보인 이상한 행각 보다 공작의 말이 더 의심되는 듯했다.

“칠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포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니 소드의 재료로 쓰인 미스릴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가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호오. 어느 틈에 그런 정보를 얻었느냐?”

포드는 아론의 주도면밀함에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 장인은 어디에 있느냐?”

그 물음에 아론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대답했다.

“헤카롯에 있다고 하더군요.”

“헤카롯이라고……?”

포드는 되물으면서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거기는 아이젠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 아니냐? 심지어 아이젠의 기사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예. 그렇죠.”

“거기서 네가 아그니 소드에 대한 정보를 묻고 다닌다는 것이 드러나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그래도 정보에 대한 가치와, 아그니 소드를 저에게 맞는 아티팩트로 바꿀 기회를 생각하면 감수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허어, 참! 너란 녀석은!”

포드는 미간을 좁히며 탄식했다.

“이번에는 귀환 주문서 같은 요행을 바라지 말거라! 어차피 거리가 멀어서 쓰지도 못하니 말이다.”

“없어도 괜찮습니다.

아론의 대답에 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거 원.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군.’

남들에겐 비밀이긴 하지만 포드는 아론의 스승이었다.

무릇 스승이라면 제자가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론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위험한 거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준비해서 갈 생각입니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 성격상 또 어떤 도박 수를 둘지 모르니 말이다!”

포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녀석을 제자로 두어서…….”

포드의 그 말은 아론이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 일종의 포기가 담긴 탄식이었다.

“저도 저 같은 놈은 제자로 못 둘 것 같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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