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골렘…… 드래곤?”
아론은 기껏해야 맷집 튼튼한 아이언 골렘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저 용의 형상을 한 골렘은 뭐란 말인가.
아론은 저런 녀석을 생전 처음 목격하고 있었다.
‘용족은 아닌 것 같아.’
몸은 여타 골렘들처럼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날개는 달렸지만 날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조금 전 켄트의 반응으로 봐선 저 녀석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고…….’
아론은 긴장한 채 골렘 드래곤을 주시했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강했다. 굳이 서클로 환산하자면 6서클쯤 되어 보였다.
‘어째서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나타난 거지?’
이쪽 던전의 책임자가 조사를 소홀히 해서 던전 보고서가 허술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저런 녀석이 나타나는 것은 예상외였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저 녀석을 이길 것인지 떠올려야 한다.’
아론은 재빠르게 머리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쪽의 인원은 세 명.
4서클인 아론과 켄트.
그리고 아직 2서클인 라엘.
‘하지만 라엘은 서클만으로는 그 능력을 다 드러낼 수 없다.’
그녀에게는 【의지】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특성의 능력 중에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대적할 때 능력치가 올라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켄트가 적재적소에 지원 마법을 발휘해 준다면…….’
희미하지만 이길 가능성이 보였다.
저 녀석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지만 일단은 골렘. 핵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다시 돌덩이로 돌려 보낼 수 있었다.
아론은 탐지 마법을 써서 녀석의 마나를 관찰했다.
‘역시…… 던전의 주인이라서 그런지 한 번에 부술 수 있는 마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군.’
그래도 녀석의 이마 부근에 핵이 있다는 정보는 발견할 수 있었다.
“라엘, 켄트. 저 녀석의 이마에 핵이 있다. 내가 화력으로 녀석의 핵을 드러낸 순간 곧바로 둘이서 그 핵에 충격을 주도록 해.”
아론은 전투 방식을 둘에게 알려주었다.
“그럼 라엘. 저 골렘 드래곤의 주의를 좀 끌어줘!”
“알겠습니다.”
라엘은 마법으로 몸을 강화하더니 골렘 드래곤을 향해 튀어나갔다.
켄트는 그녀가 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속도를 올려주는 보조 마법을 걸어주었다.
타다다닥!
라엘이 움직이자 골렘의 고개가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후우웅!
녀석은 자신의 꼬리를 휘둘러 라엘을 공격했다.
콰앙!
다행히도 라엘은 발 빠르게 그 공격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후두둑!
땅이 부서지면서 튀어 오르는 파편은 켄트가 마법으로 막아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골렘의 주의를 끄는 사이에 아론은 에드먼스 호흡법으로 내부 회로에 다섯 번 마나를 축적했다.
그는 그 마나를 이용해 녀석의 머리를 노리고는 화염 마법을 날렸다.
콰앙!
골렘의 머리에 직격한 아론의 마법. 큰 폭발을 일으키면서 이마 부근의 돌들을 날려 버렸다.
“핵이 보인다!”
아론은 그렇게 외치면서 두 사람에게 알렸다.
켄트는 그 말에 즉시 반응해서 마법을 날렸다.
쿠구구!
하지만 켄트의 마법이 닿기도 전에 골렘의 이마가 회복되고 말았다.
펑!
켄트의 마법이 닿았지만 이미 회복된 곳을 때릴 뿐이었다.
‘확실히 던전의 주인답군. 일반적인 골렘보다 회복 속도가 빨라.’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휘오오!
골렘 드래곤이 자신의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거기서 마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설마?’
골렘이지만 용의 형상을 한 녀석이다. 저렇게 모션을 취한다면 자연스레 브레스가 연상되었다.
“균형 잘 잡아!”
아론은 경고한 다음에 마법으로 땅을 깊게 팠다. 갑자기 바닥이 사라진 라엘과 켄트는 놀랐지만 아론이 말한 대로 중심을 잡아서 착지했다.
콰카카!
골렘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브레스가 주위를 강타했다.
후두둑!
파편이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 다행이었다.
진짜 드래곤이 뿜어낸 브레스였더라면 구멍에 피신하는 거로는 피해를 줄일 수 없었을 거였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저 녀석을 죽이냐는 건데…….’
아론은 생각했다.
블러드 임프를 잡을 때처럼 한 번 더 호흡법을 강행해 10번의 마나를 축적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 방법은 동귀어진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돌덩어리를 부수고 핵을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는 없었다.
“아론 님. 혹시 아까 썼던 아티팩트는 하나 더 없습니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는 저 녀석을 죽일 수 없어.”
원정을 떠나기 전에 아론이 급조한 아티팩트는 고작해야 하급 골렘들을 정지시키는 게 다였다.
저 정도 힘을 지닌 던전의 주인의 경우는 아론의 아티팩트로는 어림도 없었다.
‘골렘 드래곤을 죽일 정도의 아티팩트라면 훨씬 더 마력을 정교하게 조정해서 만들어야 하지.’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 기발한 발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아티팩트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정교하게 마나를 조정해서 핵에 간섭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간섭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가까이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다.
‘……할 수 없지.’
어차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녀석을 쓰러트리지 못한다. 쓰러트리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는다.
쿵! 쿵! 쿵!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른 올라갑시다.”
타닷!
아론 일행은 마나를 이용해 땅을 박차고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켄트. 최대한 나를 보호해라.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켄트는 이제 아론이 어떤 말을 해도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골렘 드래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론의 신체 능력이 좋지 않았지만 켄트의 보조 마법 덕분에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거기다가 저 녀석은 덩치가 매우 크고 느렸기에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는 것이 가능했다.
쾅! 콰앙!
아론은 골렘 드래곤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은 켄트가 방호 마법으로 철저하게 막아주었다.
골렘의 근처까지 다가간 아론.
녀석은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는 게 기분이 나빴는지 다시 한번 입을 벌려 브레스를 준비하려고 했다.
‘어딜 감히!’
아론은 자신의 발밑에 마법으로 돌기둥을 만들었다. 그 덕에 어느새 아론은 용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휘오오!
골렘 드래곤은 브레스를 뿜기 위한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겠어.’
저렇게 마나 소모가 큰 공격은 단번에 그만둘 수가 없다.
타악!
아론은 골렘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후웅! 후웅!
녀석은 브레스를 모으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론은 어떻게든 중심을 버티면서 녀석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티팩트의 작동 방식처럼, 내가 동력이 되어서 녀석의 핵을 정지시킨다!’
아론은 제발 공격이 먹히길 속으로 빌면서 녀석의 핵을 노리고 마나를 파동으로 쏘아냈다.
우우웅!
아티팩트가 터졌을 때랑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만 아티팩트는 사방으로 넓게 퍼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론의 이번 공격은 오로지 골렘 드래곤의 핵만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안쪽으로 때려 넣은 것이었다.
아론의 마나 대부분이 녀석의 핵 쪽으로 들어갔다.
퍼엉!
그 반동으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생겼고, 아론은 곧바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아론 님!”
켄트가 재빠르게 지원 마법을 써서 아론이 천천히 착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골렘은?”
아론은 땅에 내려온 뒤에 녀석을 확인했다.
붉게 빛나던 골렘 드래곤의 눈은 어느새 잿빛이 되어 있었다. 즉, 죽은 것이었다.
쿵! 쿠구궁!
골렘 드래곤을 이루던 돌덩어리들이 하나둘 벗겨지더니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론 님, 대단하세요!”
라엘과 켄트는 진심으로 그를 우러러보았다.
어마어마하게 강하던 골렘 드래곤이 단 한 방에 쓰러지다니.
그들의 입장에선 아론이 무엇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경외감이 들었다.
한편, 아론은 상황이 끝나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정말 무모한 짓을 했었구나.’
저 거대한 골렘에게 다가가서 핵에 직접 마나 파동을 쏘는 방법을 선택하다니.
그게 확실하지도 않은데 실행한 자신의 결단이 놀라울 뿐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방법을 가르쳐줘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론의 정신 나간 마나 친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그건 그렇고…… 골렘 드래곤이라.’
아론이 처음 만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녀석의 강함은 도저히 보고된 던전의 수준에 맞지 않았다.
‘혹시 이것도 누군가 수를 쓴 것인가?’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에드먼스 가문의 형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론은 그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라고 해도 던전에다가 장난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임무는 공작이 서신으로 전달한 것이었다. 시험의 성격으로 임무를 내린 건데 공작도 이런 던전인 줄 알았으면 다른 곳을 물색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던전에 조작을 가했다면 내가 알아차렸을 거다.’
헌터로 활동했을 시절에는 자신이 실력이 없었다 뿐이지 그걸 보완하기 위해 던전에 대한 지식을 꾸역꾸역 머리에 넣어 뒀었다.
그런 자신도 던전 내부에선 아무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단순히 운이 없었던 걸까?’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아론은 이제는 죽어 버린 골렘 드래곤의 사체를 바라봤다.
저 녀석의 핵.
다른 골렘이면 몰라도 던전의 주인이니 쓸 만할 것이 분명했다.
아론은 사체에 다가가서 핵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핵을 찾은 아론.
‘이건 색이 왜 이래?’
다른 골렘들은 모두 회색빛을 띄었는데, 이 녀석의 핵은 혼자서 갈색빛을 발하고 있었다.
‘분명히 전투 중에는 붉은색으로 봤었는데.’
아론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서 혹시 상태창이 열어지나 확인했다.
「대지의 정수」
· 대지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정수. 사용하면 안에 있는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다.
아론은 떠오른 글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대지의 정령이 잠들어있는 돌이잖아?’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의 운이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사실 엄청나게 좋았던 것이었다.
* * *
“아론 님, 무엇을 쥐고 계신 겁니까?”
뒤따라온 켄트가 아론이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던전이 보고되었던 것보다 어려웠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저 녀석의 핵에서 나온 것 때문에 그랬다고요?”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게…… 앗! 그건 정령석 아닙니까?”
“맞아.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게 던전의 주인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던전이 전체적으로 이상해진 거였어.”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생각했다.
‘정령은 책에서만 본 존재였는데, 실제로 그게 깃든 돌을 보게 될 줄이야.’
정령은 마나를 원천으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생명체였다.
보통은 정령술사들이 다루는 존재였지만 마법사들 중에서도 간간이 다루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정령 친화력이라는 특별한 재능이 요구되었다. 그 능력은 타고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고, 후천적으로 올릴 방법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A급 정령술사가 있었지.’
같이 던전 원정을 간 적은 없지만, 그가 싸우는 모습을 영상으로 봤었다.
정령술사들은 워낙 수가 적어서 전투 장면을 그저 신기하게 여겼었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정령 친화력이 없으면 정령과 접촉조차 못 하니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자기 재능인 마법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게 있다면 다르지.’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정령 친화력이 전무했다. 하지만 이렇게 정력이 깃든 돌을 사용하면 안에 있는 정령과 계약이 가능했다.
정령은 소환만 할 수 있다면 유지에는 별다른 비용이 들어가지 않았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나는 정령이 스스로 흡수해서 공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령은 계약자의 명령만을 따르므로 그 유용성이 컸다. 그래서 일반인도 정령을 다룰 수 있게 하는 정령석은 가치가 상당했다.
마음먹는다고 정령석을 구할 수 없었기에 시장에는 공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품이었다.
그런 걸 던전의 전리품으로 얻게 되다니. 아론은 운이 상당히 좋은 축에 속했다.
‘설명에 따르면 이 안에는 대지의 정령이 있군.’
대지의 정령은 계약자를 방어하는 데 특화된 정령이었다. 현재 적이 많은 아론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는 셈이었다.
“정령석이 던전에서 아주 드물게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그 순간을 제가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래. 역사적인 순간이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고민했다.
이걸 팔아서 돈을 모을까, 아니면 정령석을 사용해 계약을 할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한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
아론은 자신을 지켜줄 방패가 하나 더 늘어나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아론 님. 이제 나갑시다.”
“잠깐만.”
아론은 손을 들어서 저지했다.
“할 일이 아직 있어.”
“……설마 아론 님. 그 정령석을 지금 여기서 사용하시려구요?”
켄트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던전이 닫힐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잖아?”
“그건 맞습니다만.”
“골렘 드래곤은 우리가 죽였다. 나머지 몬스터들도 주인이 죽었으니 나올 일은 없고.”
아론은 주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우리밖에 없다. 누가 염탐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지켜줄 사람들도 있고. 여기만큼 안전하고 비밀을 지키기 좋은 곳이 없지.”
“……맞는 말씀입니다만, 빨리 처리하고 나가야 합니다. 던전이 완전히 닫혀 버리면 저희도 못나가니까요.”
“걱정 마.”
아론은 그렇게 말한 뒤에 정령석을 바라봤다.
‘이걸 사용하려면 안에 마나를 주입하라고 했지.’
아론은 정령석에 천천히 마나를 불어 넣었다.
쩌적!
그러자 정령석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아론의 몸에서 대량의 마나가 한 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으으. 안 그래도 골렘 드래곤을 죽일 때 마나를 많이 썼는데…….’
아론은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비틀거렸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며, 마치 다른 차원을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앗?’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론의 눈에 바위로 된 거인의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아론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지만, 그 형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론 님! 손을 보세요!”
라엘의 그 말에 아론인 정신이 들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는 깨진 정령석 위로 작은 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얘가 정령……?”
주먹보다 작은 돌에 눈과 입이 달려 있으니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 정령은 처음 보는 형태입니다.”
켄트는 허리를 숙여 아론의 손 위에 있는 정령을 관찰했다.
“나도 이건 본 적이 없군.”
아론도 신기해서 계속 정령을 쳐다보았다.
정령은 아직 인격이 없는 모양이었는지 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론은 정령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게 계약이 된 상태로군.’
아론은 정령을 주시하며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대지의 정령 쿠브」
· 갓 깨어나서 아직 미숙한 정령이다. 좀 더 애정을 가지고 교감해 보도록 하자.
‘아직 자세한 정보는 확인할 수 없군.’
아론은 던전에 나가고 나서 이 정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슬슬 던전이 닫히겠군. 얼른 나가자.”
“알겠습니다.”
아론은 던전의 주인이 죽고 나서 떠오른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맞아. 아직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마라. 던전은 나가서도 안심할 수가 없거든.”
“네…….”
아론의 그 말에 일행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긍정했다.
***
한편, 던전의 바깥에선 책임자와 그의 부하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시몬님. 저 망나니가 수확물을 다 가져가 버리면 저희는 뭘 먹고 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수도에 공납품을 못 보내면 왕실에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부하들의 말에 시몬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우리가 던전을 소홀히 조사했다는 것이 위에 보고되면 나는 목이 잘린다고.”
“그래서 그 망나니의 말대로 해주는 겁니까? 만약 그 녀석이 눈 감아 주겠다고 한 약속을 깨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으…….”
부하의 그 말에 시몬은 머리를 싸맸다.
‘이들의 말대로 그 망나니가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몬이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부하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저희들한테도 한몫 챙겨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저희도 그것만 믿고 여태까지 일해왔던 겁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어?”
쾅!
시몬은 역정을 내며 책상을 내리쳤다.
“쯧. 괜히 재수 없는 망나니 눈에 띄어서…….”
시몬이 혼잣말을 하자 부하들도 동감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망나니의 입을 막아버립시다.”
“……입을 막는다고?”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지요.”
부하는 그렇게 말하고선 음흉하게 웃었다.
“던전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맞습니다. 이거, 견적이 딱 나오네요. 던전 주인과 싸우다 두 명이 전사했고, 혼자 귀환한 시녀는 주인을 잃고 미쳐 버려서 도망갔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오오…….”
시몬은 귀를 쫑긋 세우며 부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나.
하지만 그는 이내 죽상이 되어 투덜거렸다.
“에잉. 하지만 그것도 문제점이 있다. 우리 같은 일반인이 마법사를 어떻게 죽이는가?”
시몬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시몬님.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마법사들은 마법 빼면 시체라는 뜻입니다. 방심한 틈을 타서 등 뒤에 칼을 박으면 그 누가 버티겠습니까?”
“그 말이 맞아.”
시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아론을 없애 버리자는 쪽으로 생각이 점점 기울었다.
“망나니가 우리 일을 임무 보고서에 기록하는 순간, 저희 목은 다 날아갑니다. 하지만 망나니만 처리하면 저희는 아무 일도 없던 게 됩니다.”
콰앙!
그때였다.
문이 힘차게 열리면서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던전의 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던전의 주인을 쓰러트린 모양입니다!”
“던전이 공략되었군!”
시몬과 그의 부하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아론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우리가 환대하게 맞이할 테니, 다른 병사들은 물러주게!”
“예? 아…… 알겠습니다.”
병사는 아무 생각 없이 시몬의 말을 따랐다.
***
“오오, 나온다!”
아론 일행이 던전의 문의 건너편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시몬은 그들을 조용히 관찰했다.
일행은 전투로 인해 여기저기가 더러워져 있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쯧. 차라리 치명상을 입었다면 더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시몬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치료를 빙자해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아론 님! 그리고 일행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몬은 검은 속마음을 감추고 그들을 환영하는 척을 했다.
“안에서 많은 것들을 찾으신 모양이군요.”
시몬은 아론의 뒤에 두둑이 찬 자루를 보고 말했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죠? 수확물은 우리가 가져갑니다.”
“저희를 뭐로 보시고. 물론입니다.”
시몬은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암, 암. 다 가져가야지. 물론 우리가. 흐흐.’
한편, 아론은 곁에 있는 두 사람만이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해.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네요.”
아론은 이미 이변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아론의 속을 모르는 시몬과 부하들은 그저 자신들의 계획이 잘 될 거라 생각했다.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짐들은 저희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시몬의 부하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면서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아론의 뒤쪽으로 갔다.
끄덕.
혼자 남은 시몬은 부하들을 보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칼을 꺼내어 아론 일행의 등에 찌르려고 했다.
“쓸데없는 짓만 안 했어도 목숨만은 붙여주려 했었는데.”
촤학!
아론을 중심으로 마나탄이 쏘아져 나왔다.
뒤에서 급습하려던 부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른 채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아론 님이 조심하라고 했던 의미가 이런 뜻이었군요.”
“쓰레기들…….”
켄트와 라엘이 한마디씩 꺼냈다.
“이런 짓도 상대를 골라가면서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켄트가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얼굴로 시몬을 바라봤다.
“그 정도로 똑똑한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던전을 이 상태까지 놔두지 않았겠지.”
아론의 말이 정답이었다.
이들은 그 정도의 지능도 가지지 못한 자들이었다.
“히이익!”
켄트는 새된 소리를 내며 바짝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주제에, 자기 목숨은 소중한가 보구나.”
아론은 하찮다는 얼굴로 시몬을 보았다.
“좋아, 살려주지. 넌 우리 증인이 되어줘야 하니까.”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엎드려 있는 시몬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우드득!
그러고는 그대로 양팔을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끄아악!”
시몬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침과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멀쩡히 가면 수지가 안 맞지?”
켄트는 밧줄로 시몬을 꽁꽁 묶어서 전리품과 함께 두었다.
“아론 님. 이제 공작가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으음.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가 헬브람 영지였나?”
“예, 맞습니다.”
켄트의 대답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을 굳이 공작가까지 데려갈 필요도 없지. 헬브람까지 가서 인도하자. 거기서 내가 할 일도 있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론 일행은 부산물과 시몬을 데리고 출발했다.
* * *
“아이구, 다리야.”
“교대한지 얼마 됐다고 엄살은.”
헬브람의 영지로 들어가는 성문.
경비병들은 거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도 마. 어제 상점 털던 도둑놈 잡느라고 몇 시간이나 추격전을 했다니까.”
“그러게 평소에 단련했었어야지. 맨날 농땡이 피우다가 제대로 일 하려니까 힘들지?”
“에휴. 나도 꿀이나 빨면서 살고싶다.”
“그러면 양봉장에 취직하든가.”
“……그거 웃으라고 한 소리냐?”
경비병은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낄낄거렸다.
“나도 훈련병 시절에 좀 더 열심히 해둘걸. 왕도 경비병들은 돈도 많이 줘, 일도 쉽다던데.”
“뭔 소리야. 거기도 똑같아. 힘든 곳 걸리면 죽어 나가는 건 마찬가지라고.”
“그래?”
“잘못해서 국경 수비대로 발령되면 어떻게 하려고?”
“아…… 그거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 경비병이 나을지도.”
으레 경비병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였다.
어디가 편하니, 어디가 돈을 많이 주느니.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검문을 하다가 하면 일이 끝났다.
“그런데 공인된 한직은 던전 관리로 파견된 애들 아니냐?”
“맞는 말이야.”
“우리랑 같은 병사인 주제에, 무슨 대우는 다 누리려고 든다니까.”
“걔네들이 마을에서 행패 부리는 건 유명하지. 공납품에서 슬쩍 빼돌려서 챙기는 것도 자주 하는 쓰레기들.”
“아아…… 이 이야기 하니까 얼마 전에 술집에서 난동 부렸던 대머리 자식 생각나네.”
“아, 그 북쪽에 있는 던전 관리 책임자?”
“그래. 그 이름이…… 시몬인가 그랬나? 하여간 대머리들 인성은 알아준다니까.”
그 둘은 그렇게 던전 관리인을 까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어어…… 저기 마차 온다.”
“뭐? 보고 들어온 건 없었잖아.”
경비병은 귀찮은 게 왔다는 눈을 한 채 여기로 오는 마차를 바라봤다.
“멈추십시오!”
그 말에 마차는 멈추었다.
잠시 후, 안에서 세 명의 사람이 내렸다.
다름 아닌 아론과 라엘, 켄트였다.
“저희 헬브람 영지에서는 신고되지 않은 마차를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일이 좀 있어서 왔는데.”
아론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에서 허가가 나올 때까지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럼 뭐 잠깐 기다리지.”
“실례지만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경비병의 그 말에 아론은 마차의 짐칸에서 사람 한 명을 데려 왔다. 그는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어? 그 대머리……!”
경비병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누구인지 아는 거 같군. 이 녀석이 던전 관리를 소홀히 해서 말이야. 이쪽 영지에 신변을 인도하러 왔다.”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아론이 건네주는 밧줄을 받았다.
“그런데, 신분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허가를 받는 데 필요한 거라서 말입니다.”
그 물음에 아론은 인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나는 에드먼스 아론이다. 이 녀석을 넘기러 온 건 덤이고, 여기 영지의 둘째 아들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
에드먼스 가문의 인장을 본 경비병은 사색이 되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른 허가를 받아 오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너머에서 사람이 오는 것이 보였다.
“오신다고 말씀을 주셨으면 성대하게 환영해 드렸을 텐데요.”
헬브람 백작가의 차남, 로안이 부리나케 달려와 아론을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아론 공자님도 별일 없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근처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아니, 어떻게 공자님을 데리고 허름한 곳을 갑니까.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로안이 질색을 하자 아론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긴히 할 이야기요……? 알겠습니다.”
로안은 아론의 말뜻을 이해 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론과 로안은 성내에서 구석진 술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손님도 얼마 없었다.
로안이 주문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술과 음식들이 날라졌다.
식사를 하러 찾아온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망나니도 아니고 뭔 대낮부터 술을 마시나 싶어서 아론이 있는 테이블에 눈치를 주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론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마르스 던전은 알고 있지?”
“예. 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던전이지요.”
“거기 책임자가 어마어마하게 비리를 저질렀더라고. 던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납품도 거하게 빼돌리고 말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로안은 놀라서 물었다.
“응. 그걸 알고 나니까 넘어 가기도 그런데 난 좀 바쁘거든. 그래서 공작가로 바로 가지 않고 여기에 들른 거다.”
“그래서 저희 쪽으로 신변을 인도한 거군요.”
“너네가 알아낸 거로 해서 수도에 올리도록 해.”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엄연히 아론이 발견하고 잡은 것이었다. 그걸 로안은 감히 뺏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했다시피 난 바빠. 너네 쪽에서 처리해 줬으면 해.”
로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던전의 관리는 사람 목숨과도 연관되어 있기에 소홀히 하면 중형이었다.
그걸 신고하면 왕국으로부터 꽤 큰 공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론도 생각 없이 그 공을 넘기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난 국왕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없거든.’
에드먼스 공작가는 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속해 있는 아론으로서는 국왕보다는 가주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대신, 하나 부탁 좀 들어주라.”
“얼마든지요.”
자신에게 공을 넘겨 주었는데, 로안은 아론의 부탁을 안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네가 나를 대신해서 이웨카 길드와 접촉해 줬으면 좋겠어.”
“그때 할로움에 가셔서 만나신 거 아니었습니까?”
“요즘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졌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의뢰하기는 좀 그래.”
“으음.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네가 그들과 접촉하는 루트를 통해서 의뢰를 맡기고 싶다.”
그 말을 들은 로안은 생각했다.
혹시 이걸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하지만 이내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아론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계속해서 아론과 연을 이어갈 수 있다면, 자신의 후계 과정에서도 유리한 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지금 전달하실 내용이 있습니까?”
“그게 가능한가?”
“물론이죠.”
로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카운터를 향해 외쳤다.
“이봐, 주인장! 고기가 식었으니 새 것으로 내오게!”
아론은 그제야 이 가게가 일반적인 곳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웨카 길드의 지부 중 한 곳입니다.”
로안은 작은 목소리로 아론에게 말해주었다.
아론은 종이에 의뢰 내용을 적었다. 잠시 후, 주인장이 왔을 때 그에게 종이를 건네 주었다.
거기에는 아그니 소드를 가공할 수 있는 드워프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젠 왕국이 아그니 소드에 대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보니, 아론은 최대한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길 원했다.
‘이웨카 길드라면 믿을 만하지.’
아론은 지난번에 아그니 소드를 탈취할 때 그들의 실력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아론에 대한 정보는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그니 소드에 대한 정보를 판 건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잘못했다간 불똥이 자기들한테도 튈 수 있었다.
“자네 덕분에 이렇게 수고를 덜었군. 고맙네.”
“아닙니다. 언제든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주십시오.”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계속했다.
***
아론은 헬브람 영지에서 볼일을 마치고 곧장 공작가로 복귀했다.
아론은 공작에게 임무를 마쳤다는 보고를 했으며, 다음 날엔 교관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했다.
교관 브란은 아론의 말을 들으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 세 명이서 던전을 해결하다니 말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잘 들어보니 던전의 등급도 예상과 달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에드먼스가의 마법사들이 나서야 할 던전이었는데 말이다.’
브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또 한편으로는 과연 아론에게 고급반 과정이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이 정도면 당장 졸업을 시켜도 무방하지.’
게다가 공작이 아론에게 내린 임무의 내용을 살펴보니 성공하면 졸업을 할 수 있는 점수를 부여했다.
브란은 아론의 졸업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수고했다. 돌아가도 좋다.”
“알겠습니다.”
아론은 브란을 만난 후에는 포드를 찾아갔다. 그에게 던전에서 발견한 정령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서오게.”
포드는 아론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첫 던전 원정이라 걱정했는데, 무사히 돌아 왔구나.”
“제가 누구 제자입니까. 그리 쉽게 당하진 않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포드를 안심시켰다.
“공작은 네게 유독 어려운 일들만 주는구나.”
“아닙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니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지요.”
아론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준 공작에게 감사할 정도였다.
“그보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허. 너는 나를 그저 지식의 샘처럼 이용하는구나. 그래, 뭐가 궁금한가?”
포드는 인자하게 웃으며 물어보았다.
“제가 던전에서 정령과 계약을 했습니다.”
“뭐라고? 너는 정령 친화력은 없지 않더냐?”
“정령석을 발견했습니다.”
“으음. 그거라면 가능하겠구나.”
“이 정령은 제가 정보가 없어서요. 포드님께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어디 한번 소환해 보게.”
아론은 포드의 지시대로 정령을 불러냈다. 그러자 퐁 소리를 내면서 연기와 함께 쿠브가 나타났다.
쿠브는 처음 보는 환경해 당황해서 그런지 아론의 손바닥에서 웅크렸다.
“이런 정령은 책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호오…….”
포드는 감탄하면서 아론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뭔지 아십니까?”
“이건 태초의 정령이네.”
“예?”
아론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모든 정령의 시조일세. 전설로만 내려오는 정령왕들도 결국은 태초의 정령에서 나온 것이라네.”
“그 말은…… 이 정령이 정령왕과 동급이라는 말입니까?”
“힘으로 따지면 이 정령은 아직 하급 정령보다 약할걸세. 하지만 잠재된 힘은 정령왕 그 이상일세.”
그냥 단순한 정령일 줄 알았는데 태초의 정령이라니.
게다가 힘이 정령왕 이상?
아론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참 신기하구나. 이 정도면 온갖 기연이 네게만 쏟아지는 것 같구나.”
“그러게요.”
포드의 그 말에 아론은 미소지었다.
‘이걸 팔지 않길 잘했어.’
아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싱글벙글이었다.
* * *
쿠브는 아론의 손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입을 쩍 벌렸다.
“흐암.”
쿠브는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네 손바닥이 편한 것 같구나.”
포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 녀석, 귀엽기는 하지만 아직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제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건 아직 이 아이가 정령체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정령체요?”
“그래. 사람으로 치면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기인 셈이지. 이 세상인 물질계에서 힘을 쓰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걸세.”
“어떻게 해야 이 녀석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까?”
“정령의 주인과 정신적으로 연결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걸세.”
“정신적으로 연결이라…… 그러면 제가 이 아이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야겠군요.”
아론의 말에 포드는 껄껄 웃었다.
“너무 요령 부리는 것 아니냐? 정령석을 얻은 것도 기연이면서, 성장도 운에 바랄 셈이냐.”
포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론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누군가와 교류하려면 그 대상에 대한 공부가 우선이다. 그게 정령이라 할지라도 달라질 건 없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잠깐 기다려보게.”
포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곳을 나갔다.
잠시 후, 그는 책 몇 권을 들고 와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 책을 가지고 정령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거라. 녀석들에 대해 잘 알아야 교류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을 토대로 정령에게 말을 걸어보거라. 네가 지식을 충분히 쌓은 순간, 너에게 반응을 보일 것이다.”
포드의 그 말에 아론은 손바닥 위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그런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포드가 준 책들을 살폈다.
“그럼 오늘 안에 이 책들을 다 읽어 보겠습니다.”
“허허, 쉽지 않을 텐데…… 그리고 그것들 말고 더 있는데 괜찮겠느냐?”
“예. 언제든 환영입니다.”
아론의 대답을 들은 포드는 크게 웃더니 다시 방을 나갔다. 이내 돌아온 그의 손에는 책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고작해야 몇 권 더 추가되는 줄 알았는데, 저걸 다 읽어야 한다고?’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공작가의 이른 아침 시간은 사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일 때였다.
라엘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녀는 아론으로부터 비밀리에 마법 수업을 받고 있긴 했지만, 공식적인 직책은 여전히 공작가 소속 시녀였다.
“요즘 아론 도련님, 좀 더러워지지 않았어?”
“맞아 맞아. 피부 빛도 어두워 보이고, 머리칼도 푸석푸석해 보이셨어.”
“뭐야? 요즘은 술이 아니라 마약이라도 하시는 건가?”
라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용인들이 모인 곳에서 있다 보면 가끔씩 저런 험담을 듣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아론을 험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네. 망나니 성격 어디 안 가지.”
사용인들은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렸다.
“라엘도 참 불쌍해. 아론 님 뒤치다꺼리한다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거 같던데…….”
그들은 물끄러미 라엘을 바라보았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랑 아론 도련님은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희들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라엘은 방금까지 아론을 험담하던 무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 그래.”
사용인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슬금슬금 라엘로부터 멀어졌다.
‘내가 도련님 때문에 얼마나 인생이 달라졌는데.’
라엘은 아론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도련님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주지 못했더라면 그녀는 평생 시녀로만 지내다가 인생을 마쳤을 것이다.
라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된 아론의 식사를 들고 그의 방으로 갔다.
아침이었지만 아론은 이미 일어나서 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도련님, 아침 식사입니다.”
“응. 고마워.”
최근 라엘이 지켜본 아론은 늘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보아하니 정령을 얻은 뒤로 그것을 성장시키기 위해 공부한다는 모양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걱정 마. 그것보다 이 녀석을 좀 봐.”
아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바닥을 활짝 폈다. 이내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령이 나타났다.
“어때. 좀 달라진 거 있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네요.”
라엘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론의 공부가 허사는 아니었는지 쿠브의 모습이 더 선명해져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아론은 그리 말하고는 쿠브를 쳐다보았다.
“쿠브. 내 이름이 뭐야?”
“……아롱! 아롱!”
쿠브는 아론의 손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발음이 완벽하지 않아서 아기의 옹알이를 듣는 듯했다. 하지만 아론은 이 정도도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봐! 이젠 내 이름도 알고 부른다니까!”
아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아이를 보는 아버지 같으세요.”
라엘은 그런 아론의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도련님이 저렇게 웃는 모습은 몇 번밖에 본 적 없는 희귀한 것이었다.
“쿠브 덕분에 내 대지 속성 마법의 효율도 꽤 좋아졌어.”
아론은 직접 스톤 마법을 시연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돌이 생겨났다.
라엘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도 마법을 배웠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쓴 마법은 아론이 투입한 마나보다 훨씬 큰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아론의 재능을 생각하더라도 이 정도 출력은 대단한 거였다.
“이게 그 정령 마법이라는 건가요?”
라엘의 물음에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령 마법은 아니야. 쿠브가 내 마법을 도와주는 느낌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
“돕는 게 그 정도라니…… 정령의 힘은 정말 대단하네요.”
설명을 들은 라엘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라엘, 옷은 내가 혼자서 갈아입을 테니 가봐도 좋다.”
“네. 바쁘신 건 알겠지만 식사는 거르지 말고 꼭 하세요.”
“응.”
아론은 라엘이 나간 뒤에 식사를 빠르게 하고는 아카데미에 갈 준비를 하였다.
‘오늘이 내가 아카데미에 가는 마지막 날이 되겠군.’
전날, 아론은 교관으로부터 오늘 수료식이 열릴 거라고 들었다.
그 대상은 켄트와 아론.
물론 수료식을 마쳤다고 해서 바로 졸업은 아니었다. 졸업 시험은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 시험만 통과하면 정식으로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
아론은 환복을 마치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
아론과 켄트는 지난번 던전 원정으로 졸업에 필요한 점수를 모두 모았다.
수료식을 마치면 졸업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졌다. 그것만 통과하면 에드먼스 가문의 정식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아론, 켄트. 앞으로 나오도록.”
브란 교관이 두 사람을 불렀다.
아론과 켄트는 당당하게 단상 앞으로 나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나머지 학생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에드먼스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것이 졸업이었기 때문이다. 저 두 사람은 거기에 한층 가까이 간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시기하는 시선도 존재했다.
“흥. 몇 달도 안 돼서 고급반을 수료하는 게 말이 되나?”
“뻔하지. 망나니라도 자기 집안 식구라고 밀어주는 거지.”
“얼마 전에 던전에 갔다 왔다며? 거기서 뭔가 부정이 있었던 게 분명해.”
학생들은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뭐가 됐든 졸업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건 부럽네.”
“맞아. 이럴 거면 우리도 그날 습지 실습 때 아론을 따라갈걸 그랬어.”
“켄트는 봉 잡은 거지.”
아론이 부정을 저질렀건 아니건 부러운 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단상에 오르자 브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론, 그리고 켄트. 두 사람은 에드먼스 아카데미에서 정한 졸업 요건을 충족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고 많았다.”
브란 교관은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론과 켄트는 묵례하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수료생 신분이다. 다른 학생들도 이 두 명을 축하해 주도록.”
짝짝짝짝.
교관의 말이 끝나자 고급반 학생들은 말없이 박수를 쳤다.
‘그래도 빠르게 아카데미 과정을 통과했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 시험만 통과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자신은 후계자 후보에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공작은 나를 보호해주겠지.’
후계자 후보에 뛰어들 정도의 인재가 죽는 것은 공작가로서도 손해였으니 말이다.
물론 다른 형제들의 견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차라리 규칙이 있는 링 위에서 싸우는 게 낫지.’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언제 암살을 당할지 몰랐다. 다른 형제랑 투덕거리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뭐, 앞으로의 걱정은 일단 졸업 시험부터 통과하고 봐야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수료식이 끝나길 기다렸다.
“수료생이 되면 졸업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진다.”
아론은 교관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켄트 말로는 졸업 시험은 어렵지 않다고 하던데…….’
그는 오히려 아론과 같이 갔던 던전이 더 어려웠다고 말했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지.’
사람은 쉽게 죽지 않지만, 의외로 어이없이 골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론은 조심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다. 너희 둘은 이제부터 에드먼스 가문의 정식 마법사다.”
브란 교관의 말이 끝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방금 교관님이 뭐라고 하셨어?”
“정식 마법사라고?”
학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식 마법사 자격은 졸업 시험을 통과해야 부여되었다.
그런데 방금 교관의 입에서 두 사람이 정식 마법사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은 즉…….
“너희 둘이 다녀왔던 던전은 이미 던전화가 2단계가 진행 중인 곳이었다. 원래라면 에드먼스 가문의 마법사들이 정식 토벌대를 꾸려서 가야 하는 곳이지.”
교관의 말대로였다.
아론은 직접 가혹한 던전을 겪었기에 공감이 갔다.
“단순히 던전을 갔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닫고 나온 너희의 실력은 정식 마법사급이다. 이런 인재들에게 졸업 시험을 치르게 한다는 건 시간 낭비라고 아카데미는 판단했다.”
브란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수료, 아니 졸업을 축하한다. 앞으로도 잘해주길 바란다.”
나머지 학생들은 조용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다들 충격에 빠진 탓이었다.
* * *
두 사람의 파격적인 졸업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의 판단이었다.
즉, 에드먼스 공작도 승인한 사안이라는 의미였다.
아카데미의 졸업 시험은 정말로 에드먼스 가문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지를 보는 것.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실력에 걸맞는 대우를 한다.
에드먼스 가문이 여태까지 지켜온 원칙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바로 졸업할 수 있었다.
아론이 후계자 후보 자격을 얻었기 때문일까.
공작은 아론이 졸업한 당일, 다음 날 아침 식사에 참석하겠다고 자녀들에게 통보를 했다.
가주가 참석하는 식사는 웬만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모두 참가해야만 했다.
아론이야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준비를 마치고 식장에 들어섰다.
거기서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케빈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케빈이 6번째 자리에 앉았다는 점이다.
케빈도 아론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이내 아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완전히 쫄았구만.’
예전에 보던 케빈이 아니었다.
‘하긴, 이젠 회로도 망가져서 마법도 못 쓰게 되었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업자득이었으니 말이다.
아론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인 5번째 위치에 앉았다. 아직 4번째 자리는 막내 라크가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다른 형제들도 식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론은 그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폈다.
‘저 중에 내 목숨을 노리는 녀석이 있단 말이지.’
누군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 명일 수도, 아니면 여럿일 수도 있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사람 잘못 건드렸어.’
자신을 암살하려 하는 자의 정체가 확실히 드러나게 되면 걸맞는 보복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형제들도 아론을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단순한 망나니였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시선에서 경계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경쟁 상대로 생각지도 않던 애가 치고 올라온 게 놀라웠나 보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렸다.
‘첫째는 임무 중이라서 못 온다고 했고…… 이제 둘째만 오면 되는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아론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러셀이 식장에 들어섰다.
그는 아론을 보자마자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론. 요즘 성취가 뛰어나다는 소식을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칭찬이지만, 그걸 둘째가 하니까 기분이 꺼림칙했다.
마치 뱀이 혀를 낼름거리며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쫓아가는 입장이라서요.”
“그래도 대단해. 너도 정신을 차리고 가문에 힘을 보태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러셀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잠시 후, 공작이 식장에 들어섰다. 형제들은 모두 일어나서 예를 갖춰 인사했다.
“모두 앉거라.”
여기까진 이전의 식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작의 다음 말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론. 아카데미 졸업을 축하한다.”
아론을 포함한 사람들은 공작이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말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작은 공에 대해서 합당한 보상을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안부를 서열 순서로 물어본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아론에게 먼저 말을 건넨 건 여간 파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아론은 얼떨떨했다.
하지만 이후에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들을 더 충격에 빠트렸다.
“네 정진을 축하하기 위해서 연회를 열고자 한다.”
일동은 침묵했다.
식장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건 막내인 라크였다.
“아버지. 연회라니요? 연회는 가문의 경사가 있을 때 여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론은 라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한테 관심도 안 주던 막내가 이럴 정도라니. 내가 확실히 나머지 형제들에게 신경이 쓰이는 존재가 되긴 했나 보군.’
공작은 라크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형이 후계자 후보가 되었는데 이게 경사가 아니면 무엇이냐?”
공작의 그 말에 이번에는 셋째 일리아가 질문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못해도 5서클의 경지는 이루고 연회를 열어야…….”
하지만 공작은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너희들 중에 아론보다 빠르게 고급반을 졸업한 녀석이 있더냐?”
공작의 그 말에 나머지는 조용해졌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순, 식장의 분위기가 180도 뒤집혔다. 공작이 어마어마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내가 너희의 의견을 다 들어가면서 일정을 고려했지? 너희들의 지금 말은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약간은 노기를 띤 공작의 말.
아론의 형제들은 거기에 대꾸할 수 없었다.
“끄르륵.”
그때, 케빈이 공작의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 마법을 제대로 못 쓰는 몸이 된 그에게는 버티기 버거운 모양이었다.
“쯧. 밥맛이 떨어지는구나.”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식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가 버렸다.
식장에 남겨진 사람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런, 이런. 나도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러셀은 웃으면서 재빠르게 식장을 나섰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른 사람이었다.
나머지 형제들도 말없이 식장을 떠났다.
‘이 놈의 집안은 바람 잘 날이 없군.’
아론은 사용인들이 케빈을 실어서 나가느라 분주한 동안 태연하게 식사를 했다.
***
공작이 연회를 열겠다고 말한 지 몇 주가 지났다.
그리고 정말로 연회가 열렸다.
공작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를 말릴 사람은 없었다.
아론은 창밖의 광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왕국의 귀족들은 다 모인 것 같군.’
귀족을 태운 마차가 계속해서 영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마차들은 저마다 자기 가문의 깃발을 뽐내는 중이었다.
아직 연회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다들 공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고 노력했다.
“아론님. 환복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론도 슬슬 준비해야 했기에 라엘의 도움을 받아서 옷을 갈아입었다.
“으음.”
아론은 격식에 맞춘 예복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미적 관점이랑은 동떨어진 옷이었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멋있지도 않고.’
차라리 지구에서 입었던 정장이 훨씬 나을 정도였다.
“도련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러나 라엘은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건진 몰라도 칭찬을 연발했다.
‘라엘이야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으니까 의견이 참고가 되지 않는군.’
아론은 옷을 다 갖춰 입은 뒤 공작을 찾아갔다. 연회가 시작하기 전에 찾아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더군.”
공작은 아론의 인사를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공작의 눈에도 내가 옷을 입은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나 보군.’
아론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모두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 약골 망나니가 정말로 변한 건지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전 아직 약하고, 망나니가 맞으니까요.”
그 대답에 공작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아직도 몸은 힘겹고, 외부로는 목숨의 위협을 받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마음대로 하는 편입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망나니의 특성에 들어맞지요.”
아론의 부연설명을 들은 그는 표정을 풀었다.
“네 사고방식은 흥미롭군.”
공작은 그렇게 말한 뒤 아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왜 이번에 연회를 열었는지 이유를 알겠는가?”
“예.”
아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형제들의 말대로, 자신은 고작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작의 의중은 짐작이 갔다. 형제들이 지적할 정도로 과하게 자기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자신의 성장 속도가 빨라서? 아니었다. 아론이 아는 공작은 고작 그 정도로 사람을 편애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그날 식사 자리에서 했었던 치사는 모두 가식일 터.
“경쟁을 부추기려고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아닙니까?”
“제법 눈치가 좋구나.”
공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른 형제들이 저를 경계하게 만들고, 동시에 저도 그 속으로 편입시키려고 그러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론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자리가 탐이 나니까요.”
하지만 공작은 아론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넌 이 자리에 관심이 없을 텐데.”
“아버지의 자리는 왕국 내에서 최고의 마법사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미래에 그 자리에 앉게 되겠지요.”
아론의 대답에 공작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아론에게서 강한 본능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군.’
공작은 생각했다.
‘아론은 살아남을 방법을 알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속으로 부정했다.
‘그럴 수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아론이 어렸을 적에 녀석의 병을 고쳤겠지. 온갖 수를 썼지만 치료할 수 없었어.’
아론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공작은 그가 어렸을 적에 어떻게 해서든 아론의 몸에 있는 정체불명의 병을 치료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몸이 좋아지는 건 기껏 1, 2년뿐.
완치는 되지 않았고 아론의 몸 상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저번에 칠성초를 구해가더니 몸이 좀 달라진 것 같군.’
공작은 무언가 달라진 것을 아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상태로 알 수 있었다.
‘포드 공도 아론의 의지에 동해서 돕기로 한 것일까. 궁금하구나.’
공작은 궁금했다.
그토록 아까워했던 아론의 재능이 다시 꽃필 수 있을지 말이다.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되겠군. 가서 마저 준비를 마치거라.”
“알겠습니다.”
아론이 공작의 서재를 떠나려 할 때, 그는 뒷말을 덧붙였다.
“오늘 주인공은 너다. 그리고 이곳은 에드먼스 가문의 본진이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아론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