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아론은 자신의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라엘을 가르치는 것은 순조롭다.’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녀를 교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흡수해서 문제일 정도였다.
그녀는 마치 스펀지처럼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빨아들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가진 특성 때문이겠지.’
라엘의 잠자고 있던 마나 회로를 일깨우자 생겨난 그녀의 특성.
【의지】
그 특성 덕에 라엘의 성장 속도는 매우 빨랐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되었는데 그녀는 손에서 스스로 불을 피울 정도였다.
‘내가 헌터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4주 차가 되어서야 겨우 마법을 쓸 수 있었는데 말이야.’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자신은 재능이 일천했고, 라엘에게는 【의지】라는 특성이 붙어있긴 하지만.
‘이제 슬슬 공작한테 언질이 올 때가 됐는데…….’
라엘에 대한 건 순조로우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아론은 서열 대련을 치르고 5위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제 꼴찌는 케빈이었다.
듣자 하니 그는 폐인이 되어서 방에만 틀어 박혀있다는 모양이었다.
‘뭐, 그 녀석은 더 이상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자업자득이었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서열 5위는 확실히 좋았다.
이전에는 가문의 천덕꾸러기라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가능해졌고, 삶은 한층 더 윤택해졌다.
‘물론 이것도 마음에 들긴 한데.’
애초에 자신이 서열을 올리고자 했던 목표는 공작에게 부탁해 칠성초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책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칠성초는 여간 구하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5위의 서열이 지닌 권한으로는 칠성초를 얻는 게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공작이 움직이면 다르겠지. 그는 충분히 구해다 줄 수 있을 거야.’
물론 공작이 자신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경우에만 성립하는 이야기였다.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엘이 방에 찾아왔다.
“아론 님. 카이만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알겠다. 바로 가지.”
아론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환복을 한 뒤, 방을 나섰다.
***
아론은 공작의 비서에게 안내를 받아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공작이 업무를 보는 곳이군.’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전 주인의 기억에도 없었다.
망나니가 여기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는 길에 비서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는 공작이 온전히 업무를 위해서만 쓴다는 모양이다.
‘공간 낭비가 심하군.’
듣자마자 든 생각이 그거였다.
물론 잡무를 맡은 사용인들도 있을 것이고, 비서도 있긴 했다.
그걸 감안해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실례지만 이곳에 얼굴을 대어 주시겠습니까?”
비서는 문 옆의 어떠한 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뭐야?”
“안면 인식 장치입니다.”
“……뭐?”
아론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무슨 아X폰도 아니고.’
이 세계에 와서까지 안면 인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게 왜 있어?”
“공작가의 보안 절차입니다. 도련님들도 예외 없이 받으셔야 하는 겁니다.”
아론은 비서가 시키는 대로 얼굴을 장치 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잠시 후.
철컥.
잠겼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비서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단순히 외관만 큰 것이 아니었군.’
아론은 복도를 지나가면서 혀를 내둘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장식품들이 복도에 진열되어 있었다.
‘저건 마정석 아니야?’
아론이 더욱 놀란 것의 정체는 마정석으로 이루어진 동상이었다.
돈 낭비도 저런 돈 낭비가 있나.
과연 메도우드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공작가다웠다.
아론은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장식품들을 감상하며 걸어갔다.
똑똑.
“들어오게.”
안에서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비서가 문을 공손하게 열어주었다.
‘이제 단둘만의 시간이군.’
아론이 현재 원하는 것은 하나.
마나 중독의 현상을 최대한 지연시켜주는 칠성초의 획득이었다.
“저 아론 에드먼스, 아버지를 뵙습니다.”
아론은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공작을 바라보았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군.’
그는 공작이 뿜어내는 기운에 하마터면 절로 몸을 움츠릴 뻔했다.
아론은 간신히 버티며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아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듣자 하니 요즘 괴상한 짓을 하고 다닌다더군.”
괴상한 짓?
아론은 그게 무엇인지 짐작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공작이 언짢아하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네가 망나니짓을 청산하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줄 알았건만. 그새 자기 실력도 가늠 못 하고 남을 가르치고 있느냐? 그것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말이다.”
아론은 그제야 공작이 화가 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어떻게 그 정보를 입수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시녀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이 마땅찮으셨던 모양이군.’
공작이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해는 갔다.
남을 가르치는 행위는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스승이 되려면 우선 자신이 그 분야에 통달해 있어야 했다.
공작은 아직 아론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니라고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에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사실 전생했소,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론은 여기서 말을 조심해야겠음을 느꼈다.
만약 공작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해명을 했다가는 칠성초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전에 축객령을 받게 생겼다.
‘케빈도 매번 이런 압박을 느꼈겠군.’
게다가 그 녀석은 발전도 없다 보니 이렇게 공작의 분노를 사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아론은 천천히 입을 열어 해명을 시작했다.
“아버지. 제가 하는 일은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의 그 말에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를 제지하거나 하진 않았다. 아직 더 들어볼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저는 그녀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가르치는 것일 뿐입니다.”
“가능성이라고?”
“예. 그녀에게는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습니다.”
“고작 그 몰락 가문의 시녀에게서?”
공작은 코웃음을 쳤다.
“기본적으로 사용인들은 우리 가문에 들어올 때 철저히 검사를 거친다. 혹시나 인재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지.”
그건 아론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그것이 공작가의 모토이기도 했다. 그녀가 마법사의 자질이 보였다면 바로 아카데미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시녀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건, 녀석에게서 어떠한 재능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 말은 즉.
“회로를 지녔음에도 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어쩌면 나도 공작과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회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 더해 【의지】 특성이 발견된 이상, 공작의 말은 틀린 것이 된다.
아론은 그 특성을 잘 알고 있다.
그야, 지구의 헌터들에게서도 발견되었던 것이니 말이다.
이 특성이 있는 헌터들은 늦게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지만, 예외 없이 대성했다.
그들 중에는 첫 헌터 적성 검사에서 능력이 발견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었다.
‘라엘도 그들과 같은 부류겠지.’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공작에게 말할 순 없었다.
“백 마디 말보다는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헛된 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겁니다.”
아론은 공작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해명이 통했던 것일까.
공작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을 아론도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의 위기는 극복한 건가?’
아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말은 여기서 끝이다.”
설마, 이대로 대화는 끝?
아론이 당황했을 그때.
공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이 너와 나의 첫 독대인 셈이군.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공작이 아론에게 물었다.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버지. 저,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말해보아라.”
“칠성초라는 약초를 아십니까?”
“들어 본 적은 있다.”
“이번에 서열이 올랐지만 제 권한으로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제게 칠성초를 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어렵지 않다.”
공작은 아론을 주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칠성초가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그걸 어디다 쓰려고 그러는 거지?”
공작의 당연한 물음.
“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살고 싶다고?”
아론의 진지한 대답에 공작이 다시 물었다.
“그 약초가 저의 타고난 약한 신체를 고칠 방법이 되어줄 지도 모릅니다.”
“근거는 있느냐?”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라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해결법이라고 확신합니다.”
“흐음.”
공작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힐난하는 말투였다.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여태껏 약한 몸을 핑계로 놀면서 망나니짓을 일삼았던 아론이었다. 공작은 당연히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하겠다는 겁니다. 늦었다고 해서 계속 도망치기만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론은 결연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은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기다려라.”
공작은 자신의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보관소에 있는 칠성초를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흠칫 놀랐다.
‘칠성초가 공작가에 있다고?’
구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비서는 작은 함을 들고 왔다.
“아론, 받거라.”
공작의 말에 비서는 함을 아론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이 안에 칠성초가…….’
아론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것을 받았다.
“지금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공작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아론은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칠성초가 있었다.
하지만, 아론이 원하는 ‘칠성초’는 아니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다.’
이거는 칠성초라 부를 수 없는, 반쪽짜리 칠성초였다.
약초의 망울을 보아하니 마나를 머금은 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산삼이 연수가 쌓일수록 고급품인 것처럼, 칠성초도 마나를 머금은 햇수에 따라 그 효능이 달라졌다.
이 세계에서도 5년 이상의 순도 높은 마나를 머금은 것을 비로소 칠성초라 불렀다.
‘어쩌면 이건 공작이 내게 해보는 작은 시험일지도 모르겠군.’
진짜 칠성초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녀석이 칠성초를 구해달라니.
만약 여기서 좋다고 이것을 받아들였다간 공작이 대노할 게 눈에 선했다.
“아버지. 이거는 칠성초가 아닙니다.”
아론은 함을 닫으며 말했다.
“얄팍한 지식으로 내게 칠성초를 요구한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아론의 반응에 공작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 *
“어떻게 그게 칠성초가 아니란 것을 알았지?”
공작이 아론을 향해 물었다.
그거야 간단했다.
아론의 눈에는…….
「만개 전의 칠성초」
· 약 2년 정도 마나를 머금은 상태. 완전한 칠성초가 되기에는 아직 마나가 부족하다.
· 복용했을 시에 칠성초의 효과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물품의 상태창이 보였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어. 칠성초를 그리 쉽게 줄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공작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상벌에 있어서 엄격한 분입니다.”
아론은 말을 잘 골라서 답변하기 시작했다.
“제가 서열이 한 단계 올랐다고 해서 칠성초를 덥석 구해다 주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필시 이 칠성초도 가짜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공작은 아론이 서열 6위에 머물렀을 때,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었다. 자기 자식에게 있어서도 그만큼 엄격한 사람이었다.
‘뭐, 그건 아론이 발버둥 치지 않고 망나니짓을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이야.’
아론은 조심스럽게 공작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하하! 의외로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녀석이었군.”
공작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틀린 답변을 하진 않은 모양이야.’
아론은 그의 반응에 속으로 안도했다.
“그래. 그 함에 담겨 있는 약초는 아직 칠성초가 되기 전의 것이지. 네 말대로 나는 서열 5위의 자식에게 그런 대단한 것을 줄 생각이 없다.”
공작의 입에서 신랄한 말이 나왔다.
‘자기 자식이 죽어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을 사람이군.’
아론은 속으로 그렇게 평가했다.
“네가 어떤 판단으로 칠성초가 네 몸을 고쳐줄 거라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얻고 싶다면 내게 걸맞는 가치를 입증해 보아라.”
칠성초를 줄 만한 가치를 보여 봐라. 아버지는 자식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공작이 말하는 가치란 게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서열이겠지.’
아론은 머리가 아파짐을 느꼈다.
케빈이야 정도만 덜할 뿐이지 아론과 비슷한 망나니 과였다. 그래서 서열을 제치기가 쉬웠다.
하지만 4위부터는 진짜였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추측이지만, 칠성초를 구하려면 서열 3위 정도는 되어야 할지도 몰라.’
이 세계에서도 칠성초는 귀한 약초였다. 아론만이 알고 있는 치료 효과를 빼더라도, 정체기가 온 마법사들의 비약으로도 쓰였었다.
공개된 시장에서는 거의 구할 수가 없는 약초이니 서열 3위는 되어야 구할 만 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아론은 그 방법이 탐탁지 않았다.
서열을 올라가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3위부터는 본격적인 후계자 경쟁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집안싸움은 관심 없어.’
그 누구도 아닌 에드먼스 가문의 후계자 경쟁이었다. 위에서의 경쟁은 얼마나 치열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가주가 되고 싶다는 동기 또한 아론에겐 없었다.
“그 말은 즉, 저보고 서열을 올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합리적이지.”
아론은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그걸 몰라서 아버지한테 칠성초를 구해 달라는 우를 범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독대하는 시간에 따로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내게 정을 바라고 떼를 쓰는 것이냐?”
공작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타고난 약한 몸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살려고 발버둥…… 아니, 발악하는 겁니다.”
“흥. 발악이라.”
공작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론의 눈빛에서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말이다.’
공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좋다. 그러면 내게 칠성초에 맞먹을 무언가를 가져올 수 있겠나?”
그 말에 아론은 다행이라 여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공작이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무엇이든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아그니 소드. 그래. 아그니 소드를 가져오면 칠성초 정도야 내어줄 만하지.”
아그니 소드?
아론은 생소한 그 이름에 자신의 머릿속을 뒤져보았다. 하지만 전혀 그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그니 소드라 함은…….”
“아론. 이건 시험이다. 네가 얼마나 살고 싶은지, 그리고 살아남기에 적합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기 위한 시험이란 말이다. 정보는 알아서 찾도록 해라.”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추가 정보는 주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면 공작도 많이 관대하게 해준 셈이지.’
아론은 더 이상 공작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내어 준 시험이 설마 서열 3위가 되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시험을 받아들인 뒤 돌아가서 아그니 소드에 대한 정보를 찾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가 준 가짜 칠성초는 가져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아론은 약초가 든 함을 챙긴 뒤에 공작에게 인사하고는 서재를 나왔다.
***
아론이 나가자, 공작의 서재에는 공작과 비서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공작님. 아그니 소드와 관련된 임무는 라크 님에게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비서는 공작을 향해 물었다.
원래라면 공작이 꺼냈던 임무는 막내인 라크 에드먼스에게 가야 했었다.
그런데 어떤 바람이 불었기에 그것을 아론에게 주었는지 궁금했다.
“아론의 저 모습. 재밌지 않은가?”
“재미…… 말씀이십니까.”
“그래. 패악질이나 일삼던 녀석이 갑자기 서열을 올리더니 나에게 대뜸 살고 싶다고 말을 하다니. 그게 재밌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래서 임무를 아론에게 준 것도 단순한 흥미본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래도 아론 님의 실력으로는 아그니 소드를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녀석의 실력으로는 어려울지 모르지.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뭐…… 공작님은 엄격하지만 불합리한 분은 아니시니 말이죠.”
비서의 그 말이 맞았다.
공작이 준 임무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아론이 노력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공작이 생각하는 노력의 크기가 일반인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아론 님께서 저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비서는 아련한 눈빛을 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공작님께서도 예전에는 아론 님을 아쉬워하셨지 않습니까. 재능은 타고났지만 약골이라서 아깝다고 하셨지요.”
“이봐, 타릭.”
공작은 비서의 이름을 부르며 찌릿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을 텐데?”
“하, 하하…… 그렇지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공작의 그 한마디에 비서는 멋쩍게 웃으면서 서재를 나갔다.
“으음.”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이 칠성초로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론이 어렸을 적, 타고난 그의 약골을 치료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했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어서 치료하지 못했었다.
‘그 병은 약초 따위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할 텐데 말이야.’
공작은 다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어차피 아론에게 기회를 준 것도 작은 흥밋거리에 불과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
아론은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번 일은 포드 공한테 한번 물어봐야겠어.’
공작이 말한 아그니 소드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히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 정통한 포드 공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기대를 가진 채 포드를 만나러 갔다.
다행히도 포드는 도서관에 있었다.
“어서 오게.”
아론의 눈빛을 읽은 포드는 그와 함께 도서관 깊숙한 곳의 개인실로 향했다.
“오늘, 아버지와 독대했습니다.”
“처음이라 감회가 남다르겠구나.”
“예, 뭐…….”
아론은 쓰게 웃었다.
“그래. 거기서 진전은 있었느냐?”
“아버지로부터 임무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보를 거의 주지 않으셔서…….”
“한번 말해보게.”
“포드 공은 ‘아그니 소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그니 소드? 설마 그걸 가져오라는 임무를 받았느냐?”
아론의 말에 포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역시 포드 공이시군요. 근데 아그니 소드는 또 뭐고 그건 어디 있는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네만.”
포드는 설명을 이어갔다.
“아그니 소드는 칠검이라 불리는 보검 중 하나일세.”
“보검…… 이요?”
“강력한 기운을 담고 있는 검이다. 아티팩트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쉽겠군.”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아론의 물음에 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아이젠 왕국의 보물고에서 보관 중이던 재보였다네. 그 검이 사라진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지.”
“잠시만요. 아이젠 왕국이요?”
“그래. 어딘지는 잘 알고 있지?”
아론은 도서관에서 읽은 책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아이젠 왕국은 검술과 기사로 유명한 곳이었다. 메도우드 왕국이 마법으로 유명하니, 어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국가였다.
‘아이젠과 메도우드는 서로 앙숙이라고 들었다.’
아무래도 두 나라가 신성시하는 무력이 다르다 보니 서로를 폄하했었고, 위치도 가까운지라 오래전에는 전쟁도 잦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걸 저보고 찾아오라고 하신 겁니까?”
“근거도 없이 시킨 것은 아닐 거다. 아마 어디선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걸 알려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아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참 성격 고약한 공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 임무는 서열 4위인 라크에게 갔을 것이다.”
포드 공의 말을 들은 아론은 생각에 잠겼다.
‘그 말은 즉, 서열 4위의 실력이라면 무난히 해내는 임무라는 뜻이겠군.’
아론은 안도했다. 그래도 앞의 서열에 있는 형제들을 제치고 3위에 오르는 것보다는 쉬워 보였으니 말이다.
“그 외에 지원해준다는 말은 없었나?”
“예. 그냥 구해오라고만 들었습니다.”
“그거참. 너한테는 어려운 임무가 한층 더 어려워졌구나.”
“그래도 아버지가 절 믿고 주신 임무입니다. 해내 보일 겁니다.”
“계획은 있느냐?”
포드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아론을 향해 물었다.
“일단 정보 길드에 알아볼 생각입니다. 역시 물건 찾는 데는 거기가 제격이지요.”
“이런 일은 처음일 텐데. 걱정되는구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일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살아가기 어려울 텐데요.”
“으음.”
아론의 그 말에 포드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예. 걱정 마십시오.”
아론은 웃어 보이며 포드를 안심시켰다
***
열흘 후.
오늘은 아론이 공작가를 떠나는 날이었다.
10일은 짧은 기간이었다. 아론은 그 기간 동안 떠나기 위해서 준비를 했었다.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마부가 아론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했다.
마차는 단출했다. 과연 공작가의 마차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지금부터 가야 할 곳은 너무 눈에 띄면 안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직접 말을 몰고 갈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말 그대로 죽을 뻔했었다.
아론은 직접 말을 타보기 전까지 그저 안장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녀석들이 저절로 움직여 주는 거로만 알았었다.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승마는 숙련된 기술을 요구했었다.
그래서 단념하고 허름한 마차를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었다.
“라엘, 괜찮겠어?”
아론은 곁에 있는 라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원래는 혼자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라엘이 한사코 같이 가겠다고 애원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힘들면 굳이 안 따라와도 돼.”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보필하겠습니다. 그게 시녀의 의무니까요.”
“그래…….”
아론과 라엘은 마차에 탑승했다.
“그럼 출발하지.”
“예, 알겠습니다.”
찰싹하는 채찍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론과 라엘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아론이 공작가의 성을 떠나 밖으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바깥의 풍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덜커덩!
그때, 마차의 바퀴가 울퉁불퉁한 곳을 밟았는지 큰 소리를 내었다.
‘마차란 건 정말 불편하구나.’
아론은 그 점을 절실히 느꼈다. 노면이 고르지 못한 땅을 지날 때마다 그 충격이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얘는 어떻게 버티는 걸까?’
아론은 라엘을 흘긋 바라봤다.
그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떻게 이 불편한 상황에서 미동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마차가 허름한 것도 탑승감에 한몫을 했다. 만약 공작가에서 준비한 마법이 내장된 마차를 탔더라면 훨씬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론이 향하는 곳은 할로움이라는 용병 도시였다. 그곳은 법이 아닌 힘으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그 설명에 맞게,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힘 좀 쓰는 용병들이었고, 으슥한 곳에는 범죄자들도 횡행했다.
물론 아론은 그런 시정잡배들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 치들은 에드먼스 공작가라고 하면 설설 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행여나 거기서 소란을 피워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애써 공작의 호감도를 조금 높여 놓았는데 와르르 무너뜨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할로움에는 대륙 최고의 정보 길드가 자리 잡고 있지.’
어차피 공작가에는 아론에게 제대로 정보를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제 발로 뛰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포드 공도 현재 아그니 소드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모양이고.’
정보 길드에 연줄이 있었더라면 아래 사람을 시켜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첫 고객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도련님. 저희가 가는 곳이 분명 할로움이라고 하셨죠?”
그때, 라엘이 아론에게 물었다.
“응. 거기서 할 일이 있거든.”
“괜찮을까요? 거기는 무법지대로 악명이 자자해서…….”
“괜찮아. 내가 누구야? 케빈도 이긴 사람이야.”
“그건 그렇지만…….”
아론은 마차 한편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건들도 단단히 챙겨 왔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도련님. 안에 든 그것들은……?”
“마법 스크롤 몇 장이랑 비상시 쓸 약들이야.”
내용물을 들은 라엘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이런 것도 준비하시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옛날의 아론이라면 남이 챙겨줘도 스스로 그것들을 내팽개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이러한 준비성은 지구에서 헌터로 활동했을 적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재능이 없었으니까. 던전 안에서 죽지 않으려면 최대한 챙겨서 들어가야 했거든.’
이젠 완전히 아론의 몸에 동화된 것일까. 몇 달 전에는 분명 백강현으로 살았을 텐데, 그것이 벌써 아련하게 느껴졌다.
‘백강현은 죽었으니까. 나는 이제 아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과거에 대한 기억은 그것으로 끝냈다.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정보 길드였다. 가서 어떻게 협상해야 할지, 아론은 머릿속으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
두두두두!
거대한 마차 행렬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물건과 사람을 실은 마차만 여러 대였고, 그것을 호위하는 병사들을 포함하니 장관을 이뤄냈다.
그 행렬의 주인은 헬브람 백작가였다.
“쯧. 감히 나를 돌려보내?”
마차에 타고 있던 남자, 헬브람 백작가의 차남인 로안이 중얼거렸다.
그는 오늘 중대한 일이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툴란 후작가 장녀와의 혼담이었다.
원래라면 오늘 혼사에 대한 확답을 받아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후작가의 장녀는 돌연 몸이 아프다면서 그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사교에 있어서 이러한 행위는 큰 결례였다. 분명 그녀를 포함한 후작가도 이를 알고 한 것이리라.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사실상 혼담을 없던 일로 하자는 의미였다. 그것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다.
‘젠장. 이번 혼담은 성사시켰어야 했는데!’
로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는 백작가의 차남. 모든 면에서 뛰어난 형을 이길 수단은 후작가와의 혼담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 패가 사라진 것이다.
“공자님. 돌아가면 백작님께 단단히 말해 놓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종자의 말에 로안은 성을 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로안이 속으로 앓고 있을 그때.
마차의 바깥이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로안은 마부를 향해 물었다.
“건너 도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차가 저희랑 같은 속도로 달리는 중입니다!”
“그게 왜?”
“곧 있으면 도로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충돌할 것 같습니다!”
마차 도로에서도 작위의 힘이 존재했다. 상위 가문이 지나갈 경우 하위 가문은 길을 양보해야 했다.
특히나 도로가 합쳐지는 지점은 사고의 위험이 있었기에 이런 규칙을 지키지 못한 쪽은 큰 문책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로안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뭐? 상대가 누군데?”
“깃발이 없어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로안은 창문을 열었다. 대체 어느 마차가 그러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기로 했다.
“뭐야, 저건?”
마부의 말대로 마차는 가문의 깃발조차 달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외양은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가문의 문양조차 없는 곳이거나, 아니면 가문의 지위가 낮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곳이었다.
어찌 됐든 별 볼 일 없는 마차라는 뜻이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저 마차의 마부는 눈깔이 없나?”
로안은 심기가 불편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차마저 자신의 화를 북돋우고 있었다.
“병사를 보내! 감히 백작가 보다 앞서가려고 해?”
로안의 노성에 말을 탄 병사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차 쪽에 붙었다.
“여기는 헬브람 백작가다! 마차는 속도를 줄여서 예를 갖춰라!”
병사는 마부를 향해 외쳤다.
그 정체불명의 마차는 다름이 아닌 아론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병사의 외침에 마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감히 백작가 따위가 에드먼스 공작가의 마차 속도를 줄이라고 요구하다니.
“이봐! 귀가 없는 건가?”
드르륵.
마부가 반응하기 전에 아론이 창문을 열고 밖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가?”
아론의 물음에 마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그…… 도로가 곧 합쳐지는데, 건너편에서도 마차가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말에 아론은 건너편을 보았다.
“저쪽은 행렬이 많네? 먼저 보내.”
“아…… 예!”
마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차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병사는 그것을 확인한 뒤 다시 백작가의 행렬로 돌아갔다.
아론은 상대 마차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이쪽보다 마차가 많고 바빠 보여서 먼저 보낸 것이었다.
지위 고하에 따른 도로 위의 규칙은 아론의 머릿속에 없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갑자기 마차가 속도를 완전히 줄여서 멈추었다.
“또 무슨 일이야?”
아론은 마부를 향해 물었다.
“그, 그게…….”
마부가 채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이봐! 마차에 탄 일행은 당장 내리도록 해라!”
남성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백작가의 차남인 로안이었다.
“뭐야? 저거 우리한테 하는 말이야?”
아론은 어이가 없었다.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로안은 씩씩거리며 아론이 탄 마차를 노려봤다.
그의 뒤로는 마차 행렬이 일제히 멈춰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창밖으로 침 한번 뱉는 것으로 이번 일을 끝내며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로안은 오늘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지위 고하를 가르칠 겸 화풀이 상대로 아론의 마차를 손봐주기로 했다.
“그쪽은 마차를 타면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도 모르는가? 고위 귀족의 마차가 먼저 도로를 지나가는 것을 말이다!”
로안은 아직 굳게 닫혀 있는 마차를 향해 쏘아붙였다.
“이번 일은 헬브람 백작가에 대한 모욕임과 동시에 작위를 내리신 메도우드 전하에 대한 불충이다!”
그 말을 듣던 아론은 생각했다.
‘……헬브람 백작가?’
지금 백작가가 공작가를 멈춰 세운 것인가?
아론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그때. 사정을 모르는 로안은 계속해서 외쳐대고 있었다.
“헬브람 백작가의 차남 로안 헬브람! 나는 이 일을 가볍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후작가와의 혼담이 파투난 것에 대한 화를 이 자리에서 절찬리 풀고 있었다.
“어서 마차에서 내려서 얼굴을 드러내라! 그리고 우리 백작가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할 거다!”
“아, 거 더럽게 꽥꽥거리네!”
타앙!
아론은 마차의 문을 거칠게 열면서 나왔다.
“백작가, 백작가. 말할 때 작위를 들먹이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뭐, 뭐라고?”
로안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안이 벙벙했다.
“너!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것이냐?”
“네가 스스로 말했잖아? 헬브람 백작가의 로안이라고.”
“잘 알고 있다면 당장 무릎을 꿇어서 사죄하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겠다!”
“내가 왜?”
아론의 그 말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
스릉!
백작가의 호위병들이 발 빠르게 칼을 빼 들고 나섰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그 광경을 본 아론은 피식 웃었다.
“이놈? 어느 안전? 무슨 싸구려 사극도 아니고 말이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론은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는 공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명패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렇게 작위를 따지는 네 녀석이라면 이게 뭔지 잘 알겠지.”
“에드먼스 공작가……?”
로안은 헛것을 본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땅에 넙죽 엎드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백작가의 호위병들도 제 주인을 따라 무기를 집어넣고 땅에 엎드려 조아렸다.
‘어, 어떻게 이 허름한 마차의 주인이 에드먼스 공작가의 것이란 말인가!’
로안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절로 났다.
정말이지 죽을죄를 지은 셈이었다. 여기서 자신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 * *
아론은 그들이 조아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 세계는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군.’
아론이 단순히 공작가의 문양을 내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사색이 되어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 같은 귀족인데도 말이다.
그는 새삼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게 되었다.
‘지구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지.’
백강현이란 존재는 만년 C급 헌터에 불과했었다. 자신이 대우받은 적은 없었고, 언제나 상위 헌터에게 굽신거리는 인생을 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군,’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백작가의 자제마저도 벌벌 떨게 할 수 있었다.
‘굳이 여기서 위력을 쓸 필요는 없지.’
저쪽도 아론의 정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나.”
아론이 그렇게 말하자 로안을 비롯한 백작가의 사람들은 쭈뼛쭈뼛 바닥에서 일어났다.
‘……대체 어떤 요구를 하시려고.’
로안은 속이 타들어 갔다.
메도우드 왕국 내에서 공작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헬브람 백작가는 며칠 내로 없앨 수 있었다.
‘젠장. 나 때문에 가문이 쑥대밭이 된다면…….’
공작가의 위세에 쓰러지는 백작가를 상상하니 오한이 일었다.
하지만, 로안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 아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음에는 조심하도록 해.”
아론의 말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이내 약삭빠른 로안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차 가는 길 바쁘니까, 다음부터 조심하자고.”
로안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혹시 나중에 문제 걸고넘어지는 거 아니야?’
로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럴지도 몰랐다. 특히 선을 넘는 것에 대해 엄격한 공작가라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뒤탈 없게 미리 숙이고 들어가는 게 나았다.
로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에게 호위를 맡기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생각했다.
‘으음. 이 녀석들이 나한테 해를 가할 생각은 없는 거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자신이 탄 마차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그 마차를 계속 탈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럼 그렇게 할까? 백작가 사람들 틈에 섞여서 같이 가도 내가 어디 있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모를 테니 말이야.’
아론은 속으로 그렇게 결정을 내린 뒤에 대답했다.
“그럼 기꺼이 그러도록 하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안은 굽신거리면서 아론에게 물었다.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 나는 아론 에드먼스다.”
“아…… 아론 공자님이셨군요.”
로안은 순간 표정이 구겨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공작가의 망나니 아니야?’
아론이 사교계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에 얼굴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만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공작가의 천덕꾸러기 아론.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았다.
‘내가 망나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조아렸단 말이야?’
그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화도 났다.
‘공작가의 위세만 없었다면 한주먹 거리였을 놈이.’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 해도 공작가의 자제였다. 먼저 싸움을 걸어봤자 이쪽의 손해가 막심했다.
‘쳇. 똥 밟았군.’
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표정에서 다 보인다, 녀석아.’
아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이름을 대자마자 이런 반응이라니.
자기 딴에는 가면을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론의 눈에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속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하라지. 어차피 아론은 이 녀석이 자신에게 대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오히려 좋아. 내가 막 나가도 망나니라는 수식어가 날 보호해 주겠지.’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아론 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할로움으로 가던 중이었네.”
“용병 도시 말이군요.”
“혹시 헬브람 영지랑 방향이 반대인가?”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럼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로안이 병사를 부르려고 할 때, 그를 멈춰 세웠다.
“혹시 같이 타도되겠는가? 갈 길이 머니 그동안 말동무라도 하지.”
“아…… 예. 좋습니다.”
헬브람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시녀도 괜찮은 마차에 넣어 주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론은 예상외의 동행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
***
아론은 마차를 타면서 로안으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상업 가문의 자제라서 그런지 말솜씨가 좋은 녀석이었다.
그러면서 아론은 대화 도중에 로안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윗사람한테는 싹싹하게 잘 대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가차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나한테는 편하지.’
아론의 위치는 그에게 있어 윗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아론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
‘속으로는 열불 끓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걸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태껏 아랫사람들을 막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라.’
그래도 로안은 성격이 나쁠 뿐이지 노력하지 않는 타입은 아니었다.
‘특히 자기 형에 대한 열등감이 상당하군.’
로안은 그 열등감을 연료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형을 뛰어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녀석…….’
아론은 로안의 상태창을 엿보면서 그의 특징을 알아낼 수 있었다.
【거상】
로안은 ‘거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 특징을 가진 사람은 특히 상업에 능통했다.
‘지구에서도 웬만한 대기업 회장들은 이 특징을 지니고 있었지.’
아론은 그 특징을 본 순간 로안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놓으면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막 대하지 않는 한, 먼저 등에 칼 꽂을 녀석은 아니야.’
그게 아론이 로안에 대해서 내린 판단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그가 자신을 호위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로안의 잘못이었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빚을 하나 지우게 한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론 님. 할로움에는 어떤 연유로 가시는 겁니까? 거기는 무법지대인데 말입니다.”
로안이 다른 화제를 꺼내 들며 대화를 시작했다.
“정보 길드에 일이 좀 있네.”
“그러시군요.”
로안은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유로 정보 길드를 찾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봐 둔 곳은 있으십니까?”
“하임 길드와 렉스 길드 이 두 곳이 크다고 하더군. 거기를 찾아가 볼 생각이네.”
“아, 그곳들도 좋지만…….”
로안은 말끝을 흐렸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결심을 한 모양인지 뒷말을 이어갔다.
“요즘 두 길드 간의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요. 서로 가격을 깎고 난리도 아닙니다.”
“정보 길드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이군.”
“그래서 정보의 질이 예전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삼인자 취급을 받던 이웨카 길드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웨카 길드?”
“예. 요즘 귀족가에서 괜찮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저희 가문에서도 애용하고 있고요.”
아론은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역시 책으로 접하는 것보다 이렇게 실제로 부딪쳐서 얻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정보군.’
아론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혹시 필요하시다면 이웨카 길드의 위치랑 접선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보 길드를 주제로 한 대화에서 로안은 유독 말이 많았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는 듯이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 이걸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는 생각인가 보네.’
아론은 그리 생각했다.
다행히도 영양가가 있는 정보였다. 그 덕에 아론의 속에서 로안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올라갔다.
“알려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제게 물어보십시오.”
이어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론 님.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려고 합니다.”
로안이 바깥을 보며 이야기했다. 호위병들은 이미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합류하길 잘한 거 같아. 식사랑 잠잘 곳에 대한 걱정은 없어졌군.’
아론은 그 광경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최소 인원으로 오다 보니 음식은 건조식품뿐이었다. 게다가 자는 곳은 허름한 마차였고.
그러나 백작가의 마차 행렬은 식사를 준비할 인원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차. 푹신한 것이 잘 때도 편하겠어.’
안 그래도 아론의 약골 특성 때문에 수면은 중요했다.
잠시 후, 아론의 앞으로 식사가 대령 되었다.
‘바깥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다니.’
아론은 접시 위의 음식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라엘은 잘 있겠지?’
눈을 돌려서 라엘을 찾았다. 그녀는 사용인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식사 중이었다.
‘다행이군.’
건조된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이게 나을 것이었다.
아론은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일단 할로움까지는 로안 일행과 같이 가는 게 확정이다.’
거기서 로안과 헤어진 후에는 바로 정보 길드를 찾아갈 계획이었다.
고맙게도 로안이 준 정보 덕택에 괜찮은 정보 길드도 알게 되었다.
‘부디 길드에서 아그니 소드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만약 정보가 없다면 계획을 새로 짜야 했다.
아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식사가 끝이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를 좀 확인해 둘까.’
시간이 늦어지니 몸이 슬슬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쉬고 싶었지만 움직이기로 했다.
‘정찰은 필수지.’
헌터 시절에는 던전에서 잠을 청할 일이 많았다. 안전을 위해선 야영지 근처의 정보를 수집하는 게 필수였다.
아론은 주변을 돌던 중, 병사 무리를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마법사와 함께 경계 마법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저렇게 해두면 안심이겠군. 몬스터나 괴한 집단이 나타나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그 작업을 살펴보던 아론은 점점 의아함을 느꼈다.
‘너무 대충하는 것이 아닌가?’
경계 마법은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한 지지대 사이의 마력을 잘 조정해야 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 작업을 허술하게 하고 있었다. 그저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저자는 백작가에 고용된 마법사였지?’
아무리 마법사가 귀하다고 해도 저렇게 성품이 글러 먹은 자가 백작가에 속해있을 줄은 몰랐다.
‘저런 애들도 마법사라고 떵떵거리는 모양이군.’
아론이 가늠하기에 마법사의 실력은 고작 2서클이었다.
“이봐!”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던 아론이 결국 나서기로 했다.
“아론 공자님?”
“경계 마법 설치는 내가 하도록 하지.”
호위병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론은 제대로 마법 설치를 끝냈다.
‘저 망나니 도련님이 뭘 하려는 거지?’
마법에 대해 조예가 없는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그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분명 아론이라는 녀석은 마법을 전혀 할 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귀찮아서 대충해놓은 경계 마법을 해제하고는 견고한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 아닌가.
“자, 끝났으니 돌아가지.”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고작해야 망나니일 줄 알았는데…… 대단하군.’
마법사는 돌아가는 아론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 * *
야심한 밤.
백작가의 호위병 중 일부는 밤을 새우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헬브람 가문은 상업 가문이었기에 병사들은 이렇게 호위 임무를 자주 했었다.
“흐아암.”
병사 중 한 명이 하품을 했다.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굳이 백작가의 마차를 건드리는 녀석들은 잘 없었다.
힘 좀 쓰는 녀석들이야 알아서 피해 갔고, 이름 모를 소규모 도적 떼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품 참 크게 하네. 벌레 들어가겠어.”
옆에 있던 병사가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졸린 걸 어떡해?”
“참아야지. 그런 모습 로안 공자님한테 걸리면 큰일 난다고.”
“그분도 사람이라서 지금쯤 주무실 텐데 뭐.”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보는 눈도 없겠다, 병사 둘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잡담을 시작했다.
“로안 공자님도 성질을 좀 죽이셔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니까. 덕분에 우리가 공작가의 도련님도 호위를 해야 하는 수고를 맡게 됐잖아.”
“정말로.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야.”
병사들은 현재 상황이 달갑지가 않았다. 장남이면 몰라도, 차남 로안은 성격이 불같았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으로 어떤 불똥이 튈지 몰랐기에 병사들은 로안의 호위를 맡는 일을 꺼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에 더해 공작가의 악명 높은 망나니마저 합류하게 될 줄이야.
“아론 님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만 들어도 어마어마하던걸.”
“심기를 거스른 사용인들은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지?”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병사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공작가에서도 포기할 정도로 망나니라던데, 그래서 허름한 마차를 타고 배회 중인 건가 봐.”
“하하.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그러게 패악질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만약 내가 공작가의 아들이었더라면 공작님 심기 안 건드리고 좀 더 편하게 살았을 거야.”
병사 둘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낄낄거렸다.
“근데 말이야. 프랜시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마법 실력은 괜찮다던데?”
“뭐? 그 망나니 도련님은 마법을 못 쓴다며?”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주위에 경계 마법을 혼자서 완벽하게 설치했다던데?”
“하! 프랜시스 그 녀석. 실력이 부족해서 에드먼스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도 못한 걸, 이제 망나니한테 아첨해서 뒷구멍으로 들어가려고 그러나?”
“에이, 설마…….”
푸슉!
그때였다.
파공음이 들리더니, 방금 전까지 대화를 하고 있던 병사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으, 어…….”
일순 뇌 정지가 온 병사.
“습격이다!”
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병사의 외침에 호위병들은 빠르게 일어나 무기를 집어 들었다. 백작가 호위병답게 움직임들이 기민했다.
“로안 공자님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
호위대장이 외쳤다.
공격을 가한 쪽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숨긴 상태였다.
푸슉! 푸슉!
그러는 사이에 호위병들은 하나둘 죽어 나갔다.
하지만 섣불리 튀어 나갈 순 없었다. 호위병들은 자신보다 로안의 목숨을 우선시해야 했다.
“젠장! 설치해 둔 경계 마법은 왜 작동하지 않았던 거지?”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경계 마법의 설치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그것을 해체하고 습격을 시작했거나.
어느 쪽이든 상황은 좋지 않았다.
***
아론은 저녁을 먹고 경계 마법을 설치한 뒤, 로안의 마차에서 잠을 청했다.
아론이 여기서 잔다고 하자 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른 마차로 피신했다.
졸지에 혼자서 이 큰 마차를 쓰게 되었지만, 오히려 편했다.
문제는 잠을 잘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칠성초를 구해야 할 텐데.’
몸의 피로는 누적되어 있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만큼 고통이 따로 없었다.
칠성초를 먹을 수만 있다면 향후 10년 정도는 이런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차라리 반쪽짜리 칠성초라도 지금 먹을까?’
아론은 품속에 있던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공작과의 독대 당시에 받았던 반쪽짜리 칠성초를 혹시나 몰라서 약병에 소분해 뒀었다.
반쪽짜리라도 칠성초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있었다. 먹으면 며칠 정도는 정신이 말끔해지고 마나가 진정될 터였다.
하지만 이것도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기에 오늘은 참기로 했다.
‘아직은 아니야. 만약 전투 중에 이런 상태가 되었는데 먹을 약이 없다면 그게 더 큰 일이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바꾸면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론은 이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침입자?’
설치되었던 경계 마법에서 미약한 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세 사라졌다.
‘만약 진짜 침입자라면 경보가 울릴 터.’
몇 초가 지났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하나밖에 없었다. 상대가 경계 마법을 알아차리고 해제한 것이었다.
‘상대는 아무래도 소규모 도적 떼 따위는 아닌 거 같은데…….’
야영지와 경계 마법을 설치해 둔 곳의 거리가 좀 되는 상황. 아론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떡한다. 사람들을 깨워? 아니면 도망칠까?”
고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론은 라엘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습격 타이밍이 아무래도 수상해.’
상대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노리고 온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파혼당하고 돌아가는 백작가의 자제를 뭘 털어먹겠다고 습격하겠어? 당연히 내가 목적이겠지.’
아론은 자는 라엘을 깨웠다.
“습격이다. 적이 알아차리기 전이니 얼른 도망치자.”
“……네.”
라엘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아론을 뒤따랐다.
‘매정한 판단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아론은 야영지를 뒤로 한 채, 거리를 두고 숨은 뒤에 상황을 살폈다.
“습격이다!”
잠시 후, 백작가 호위병의 외침이 들렸다.
콰직!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아론이 타고 있던 마차에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날아들었다. 마차는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확실하다. 이건 나를 노린 공격이야.’
거기다가 상대는 그걸로 끝내지 않고 이쪽을 전멸시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로안 님을 지켜야 한다! 습격자들을 모두 죽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복장을 한 자들이 나타나 호위병들과 백병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백작가 병사들이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아론은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내가 아무 능력이 없는 망나니라고 착각해서 어중이떠중이들을 보낸 건가?’
어차피 백작가 호위병이 쓰러지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잔당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추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합세해서 녀석들을 전멸시키는 편이 나았다.
아론은 반쪽짜리 칠성초를 소분해 두었던 약병을 꺼내 마셨다.
약효는 즉각적이었다. 욱신거리던 몸의 통증이 사라지고, 체내의 마나가 세차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라엘. 넌 여기에 조용히 있어.”
아론의 말에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수련하는 입장인 라엘은 아직 한 명분의 몫을 해낼 수 없었다.
‘전방에 두 놈.’
아직 녀석들은 아론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론은 파이어 볼트를 시전했다. 그런 뒤에 두 명의 심장을 노리고 발사했다.
콱! 콱!
아론의 마법에 심장이 뚫린 두 녀석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한 방에 즉사했다고?’
상대가 마법 저항 아이템을 지니지 않았다고 해도 위력이 너무 강했다.
‘내 실력이 오른 걸까 아니면 약이 잘 들어서 그런 걸까?’
지금 상황에선 어떤 것이든 좋았다.
실제로 맞부딪혀 본 결과, 다시 한번 상대방의 전력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면 백작가 호위병들로도 이기겠는데.’
누가 고용했는지 몰라도, 아론을 암살하는 것만 성공하면 이 녀석들은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괜찮겠어.’
로안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 것으로도 이미 빚이 있는 상황. 거기에다가 습격자로부터 목숨마저 구해준다면 빚은 더 늘어나게 된다.
계산을 마친 아론은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이런 잡병들은 백작가 병사들에게 맡기는 게 낫다. 문제는 내 경계 마법을 해체한 녀석이다.’
아론은 그 녀석이 습격자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포할 수 있다면 습격한 배후를 캐낼 수도 있겠군.’
아론은 즉시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탐지되는 거리에서 가장 마나 반응이 센 곳을 추적했다.
‘……저기군!’
유난히 마나 반응이 큰 곳이 느껴졌다. 아론은 그곳으로 움직였다.
‘저 너머에 있겠지?’
아론은 조우를 대비했다.
슈욱!
그때, 갑자기 날아드는 얼음 덩어리들.
아론은 실드를 전개해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방금 공격 덕분에 상대를 보지 않았더라도 방향을 특정할 수 있었다.
화아악!
아론은 마나를 가득 담은 화염구를 전개해 날렸다.
“크윽!”
아론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땅을 구르는 검은 복장의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아론의 공격을 피하다가 옆구리를 맞은 모양이었다.
‘기회다!’
아론은 재차 마법 공격을 가했다.
“크악!”
날아간 마법이 오른팔에 적중했다.
‘저러면 한동안 마법은 못 쓰겠지.’
하지만 회복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아론은 싹을 잘라두기 위해 녀석에게 접근했다.
‘마법사는 분명 한 명뿐이라고 했을 텐데……!’
한편, 아론을 습격한 사내는 생각했다.
백작가의 2서클 마법사라 해도 귀찮아질 것을 대비해 아론과 함께 최우선 암살 대상으로 정해두었다.
그래서 마법사는 습격이 시작되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근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다고?
‘대체 누가?’
이내 그는 아론의 얼굴을 본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론…… 에드먼스?”
자신을 공격한 자가 아론이란 말인가? 그 실력 없는 망나니가?
그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으…… 으악!”
그러나 이내 팔 쪽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에 다시 현실 감각을 되찾게 되었다.
아론은 마법으로 녀석의 두 팔을 짓뭉개버렸다.
‘이러면 마법은 쓰지 못할 것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손과 팔은 출력 기관이었다. 그걸 망가뜨린 셈이니 더 이상 마법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 잔챙이들만 처리하면 되겠군.’
아론은 열심히 싸우는 호위병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남아 있는 잔당들이 덤벼들고 있었다.
***
아론이 합세하자 잔당들은 금세 처리되었다.
백작가의 호위병들은 아론의 실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실력은 도저히 망나니가 아닌데?’
그게 병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망나니가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론은 습격자들을 상대할 때 손속을 두지 않았다.
“로안 님! 어디 계십니까!”
상황이 정리되자 호위대장이 로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로안이 벌벌 떨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잘 숨어 있었던 모양이군.’
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싸……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안은 후들거리면서도 아론에게 다가와 감사를 표했다.
‘어찌 보면 나 때문에 봉변을 당한 거지만, 그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야겠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습격한 녀석들 때문에 잠은 다 잤고.”
아론은 손목을 두둑 꺾으며 두 팔을 못 쓰게 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나 심문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