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이른 오전 시간.
똑똑.
케빈은 공작이 있는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아버지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 1년 만의 독대였다.
자신의 서열이 낮은 탓에 이렇게 홀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보다 서열이 한 단계 위에 있는 막내 라크는 훨씬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론 녀석보단 낫지.’
그는 덜떨어진 형을 떠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론은 태어난 순서만 네 번째였지, 서열은 최하위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버지를 단독으로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들어오게.”
잠시 후, 안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빈은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보는 건 오랜만이구나.”
카이만은 케빈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인사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동안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텐데, 고작 그거밖에 성장하지 못했느냐?”
공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상벌에 있어서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 점은 자식들에게도 가차 없었다.
케빈처럼 성장이 더딘 아이에겐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
계속해서 케빈을 나무라는 말이 공작의 입에서 나왔다.
‘젠장. 이번에도 결국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구나.’
그는 그것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너보다 위에 있는 막내를 보며 드는 생각이 없느냐?”
아버지는 이제 라크와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넌 막내보다 일찍 태어났지. 그럼 그만큼 시간이 더 주어졌을 텐데, 그 이점은 살리지 못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알량한 말이 아니다. 에드먼스 가문의 피를 지니고 태어났으면 결과로 보여주도록 해라.”
제기랄.
케빈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자신이라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위에 놈들은 가만히 있는가? 그들도 똑같이 달리면서 자신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일구어낸다.
그러면 겉으로 보기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뭔가 더 할 말이 있나?”
이대로 공작과의 독대를 끝낼 수는 없었다.
요즘 공작가 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론이 자신에게 서열 대련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소문의 진상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버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라.”
“아론이 저한테 서열 대련을 신청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낭설을 들었습니다.”
“마침 그거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다만.”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케빈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건 사실이다. 어제 아론이 비서를 통해서 신청했다.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면 다시 알려주마.”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을 들은 케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그는 당연히 그것을 헛소문으로 치부했었다.
‘요즘 뭔가 몰래 꾸미는 것 같이 보이긴 했는데 말이야.’
그게 이걸 위해서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케빈은 자신이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와 아론 사이에는 현격한 실력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소문으로 인해 긁힌 자신의 자존심이었다.
‘감히 망나니 녀석이 나한테 대련을 신청해?’
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이번 기회에 주제를 넘보지 못 하도록 단단히 밟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대련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 당장 녀석에게 찾아가야겠어.’
아론은 자신에게 있어 연습용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심심하면 가서 두들겨 패고 기분을 풀 수 있는 그런 상대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도통 보이질 않아서 손을 못 봐줬는데.’
근래에 주먹맛을 못 봐서 자신에게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건가?
당장 가서 손을 봐주자고 마음먹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케빈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서재를 나왔다.
‘젠장. 오늘도 막내랑 실컷 비교당하다가 나오는군.’
거기다가 예상치 못했던 아론의 서열 대련 신청까지 겹쳐서 그의 화를 한층 돋구었다.
저벅저벅.
케빈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목적지는 아론의 방.
‘오랜만에 교육을 좀 해야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어?’
그때였다.
케빈의 시야에 저 멀리서 걸어오는 라크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으로 가면 아버지의 서재인데…… 저 녀석도 오늘 독대가 예정되어 있었나?’
어느덧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라크도 케빈을 발견했다. 그는 가볍게 묵례를 한 뒤에 계속해서 갈 길을 갔다.
‘이 녀석이?’
케빈은 순간 욱해서 욕을 내뱉을 뻔했다.
‘저 녀석도 나를 무시하는 거야? 어?’
물론 막내는 언제나 자신에게 저런 태도였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실컷 녀석과 비교를 당한 직후라서 그런지, 저런 행동을 보니 화가 솟구쳐 올랐다.
‘두고 봐. 너도 언젠가 내가 무릎을 꿇리고 말 테니까.’
케빈의 피해망상은 막내에게까지 번져갔다.
***
에드먼스 공작가 내에서 서열 대련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이제 그 내용에 대해 모르는 사용인은 없었다.
그야 이목이 집중 안 될 수가 없었다. 서열 대련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카이만의 자제들 사이에서 일어난 서열 대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하위 서열인 5위와 6위의 싸움일지라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서열 대련은 자신보다 높은 서열의 형제에게 신청할 수 있는 게 규칙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아론이 신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받는 사람은 거부권이 없었다.
거기서 대련을 신청한 사람이 이기면 둘 간의 순위가 뒤바뀌며, 그렇지 못하면 아무 변화도 없었다.
아니, 사실 아무 변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서열 대련도 결국 명예를 건 결투였다. 둘 사이에 존재했던 형제간의 정을 뒤엎는 행위. 대련을 신청한 이상 앞으로 사이가 틀어질 것을 각오해야 했다.
비단 개인 간의 문제도 아니었다.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라는 특수한 위치 덕분에 각자의 줄을 탄 사람들끼리도 사이가 멀어졌다.
물론 실력이 없는 아론이나 케빈에게 붙어서 후일을 도모하는 세력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주변이 시끄럽든가 말든가, 당사자 중 한 명인 아론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오늘은 어떻게 자신의 마법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을지만을 고민했다.
아론은 막 아침 식사를 끝내고 수련장으로 갈려던 참이었다.
‘뭐지?’
바깥이 좀 소란스러웠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윽고 라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라!”
그리고 뒤이어서 들리는 목소리.
‘저 목소리는…….’
케빈의 것이었다.
콰앙!
이내 아론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행히 있었구나.”
아론을 본 케빈은 씩 웃으며 말했다.
형 대접을 할 줄 모르는 싸가지 없는 저 태도는 여전했다.
“뭔 쥐 새끼도 아니고, 요즘 도통 안 보여서 죽었나 싶었다.”
케빈은 손가락을 두둑 꺾으며 말했다.
“근데 최근에 재밌는 짓을 벌였더라고?”
아론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몸에 소름이 돋아 올라옴을 느꼈다. 그리고 근육이 위축되기 시작하는 것도 감지했다.
‘떨고 있군.’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몸의 전 주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처음 아론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서 평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시녀에게 원치 않는 막말도 내뱉고 그랬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공포라는 원초적인 감각에 대해서는 아직 원래 주인의 영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아론은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자 서서히 긴장했던 것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쯧. 너는 당하고만 살았던 게 부끄럽지도 않았냐?’
아론은 과거의 아론에게 따졌다.
그 당시의 자신은 강약약강의 결정체였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혈육들에게는 한없이 쭈그러들었다.
특히, 케빈은 그 점을 잘 노렸었다. 자신이 강한 것을 아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끊임없이 아론을 괴롭혔었다.
그래서 그 공포가 아직도 각인되어 있었다.
왜 맞고만 있었던 걸까.
힘을 길렀다면 문제없었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마나 중독에 걸렸다 하더라도, 타고난 재능 때문에 극한의 노력만 갖춰진다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아니지. 이 망나니가 오히려 힘을 가지면 더 큰 일인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힘을 기르지 않은 이유야 간단했다. 노력하기가 싫었던 거겠지.
마법의 성취는 스스로가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
반면 가문의 위세는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후광을 비춰주었다.
“뭘 노려보기만 하면서 가만히 있는 거야? 무서운 건 알아서 벌써 얼어붙은 거냐?”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야, 하나만 묻자.”
이내 케빈은 웃음을 거두고는 아론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으로 서열 대련을 신청한 거냐?”
“그거 물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잔말 말고 대답하기나 해.”
케빈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야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나보다 실력도 낮으면서 거들먹거리는 게 같잖았거든.”
“……뭐?”
케빈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론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그 충격 때문인지 잠깐 정적이 일었다.
아론은 그 틈에 녀석의 상태창을 봐두었다.
【상태창】
· 이름 : 케빈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31 마력 60
근력 40 민첩 20
지력 87 친화력 172
‘역시.’
모든 능력치가 자신과 비등했다.
하지만 녀석의 성장은 멈추었고, 자신은 한창 성장 가도에 있다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대충 한 달 뒤에 서열 대련이 열린다 생각하면…….’
그때 가면 격차는 더 벌어져 있을 터. 충분히 자신이 이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나 아론은 성장의 스퍼트를 더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이긴다면 저 녀석은 계속해서 덤벼들 것이다.
‘아예 확실하게 짓밟아야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대들지 못 하도록 뇌리의 깊은 곳에 두려움을 각인시키자고 마음먹었다.
“이, 이……!”
그때였다.
케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뚫린 입이라고 아주!”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아론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역시 네 놈은 패야 말을 듣는구나!”
후웅!
아론의 얼굴을 노리고 케빈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전의 아론이라면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포드의 무자비한 신체 단련으로 담금질 된 상태였다.
‘느리군.’
아론은 케빈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러자 갈 곳을 잃은 그의 주먹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뭐, 뭐야?’
케빈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론은 자신의 손에 마나를 모았다. 그 마나를 파동으로 바꾸어 아직 허공에 있는 케빈의 오른팔을 강타했다.
“으헉!”
쿠당탕!
케빈은 빙글빙글 몇 차례 돌더니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졌다.
“싸움은 나중에 서열 대련 때 실컷 해줄 테니까. 지금은 좀 참아. 발정 난 개도 아니고 말이야.”
아론은 그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방을 나갔다.
“이, 이……! 망나니 새끼가!”
케빈은 쓰러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두고 봐! 감히 나한테 손을 대?’
케빈의 자존심은 완전하게 박살이 난 상태였다.
이 수모를 몇 배로 갚아주리라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 *
케빈이 아론의 개인실에서 난동을 부리려다가 제압당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때 일로 케빈은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무슨 일만 하려고 할 때면 아론에게 당했던 것이 떠올랐다.
‘크윽…… 그땐 내가 방심해서 그래!’
케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묘하게 사용인 녀석들이 나를 깔보는 것 같단 말이지.’
물론 이는 케빈의 피해망상이다.
사용인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론 그 녀석이 떠들고 다니는 것은 아닐 테고.’
그도 그럴 게, 에드먼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아론을 피하려고 했다. 아론과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젠장. 서열 대련 때는 꼭 이겨주마.’
그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아론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 역시 있었다.
‘오늘부터 선생한테 대련 위주로 수업해달라고 요청해야겠군.’
그는 그리 생각하며 자신의 개인실을 나와 수련장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케빈은 라엘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동료 시녀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케빈이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라엘과 동료 시녀는 쭈뼛쭈뼛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저년은…… 아론의 전속 시녀였지?’
자신이 아론의 개인실에 들어서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막아섰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라엘 역시 이 상황이 어색했다. 그래서 빨리 인사를 마치고 이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케빈이 그녀를 막아섰다.
“야. 너도 내가 우습냐?”
케빈은 라엘에게 다가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네, 네?”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시녀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슬금슬금 빠져나가려고 했던 것도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지?”
“아, 아닙니다.”
라엘은 케빈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이제는 가 봐야…….”
“뭐?”
그녀의 말에 케빈의 심지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아주 무시를 해도 개무시를 하는구나?”
“그게 아니라…….”
짝!
케빈은 라엘의 뺨을 있는 힘껏 갈겼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히익!”
옆에서 그 광경을 본 동료 시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케빈은 달아난 시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땅에 엎드린 라엘만을 바라봤다.
그 후로 케빈의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퍽! 퍼억!
케빈은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휘둘렀다.
이 상황에서 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껏 웅크리고 최대한 덜 아프게 맞는 것뿐이었다.
감히 공작가의 자제에게 반항할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더 큰 화를 입을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있어 맞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이미 아론에게 많이 맞아 봤으니 말이다. 지금은 단지 대상이 바뀌었을 뿐.
복도에는 그녀가 두들겨 맞는 소리와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당연히 지나가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쉬쉬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사건 현장에서 멀어졌다.
괜히 나섰다간 불똥만 튈 뿐. 이럴 땐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었다.
“윽! 으윽!”
케빈의 쉴 새 없는 폭력에 라엘의 정신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내가 기절하면…… 끝나겠지.’
그런 그때.
라엘에게 있어 기적이 일어났다.
타다다닥!
저 멀리서 아론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케빈은 그녀를 때리는 데 심취해서 아론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뻐억!
아론의 주먹이 케빈의 얼굴 옆면을 강타했다.
“끄허억!”
케빈은 잠깐 공중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그에게 있어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이 느껴졌다.
“누, 누구야!”
“나다 X새야.”
빠악!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넘어져 있는 케빈을 향해 발길질을 한 방 더 먹였다.
“감히 내 시녀를 건드려?”
아론이 지금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방금 전까지 라엘과 같이 있었던 동료 시녀의 덕이었다.
그녀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아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아론은 여기저기 다친 채 반쯤 정신이 나가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라엘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얻어맞았다간 아마 치료의 범위를 넘어서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남의 사람을 이유도 없이 건드렸다는 건, 너도 그만큼 각오를 한 거겠지?”
아론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케빈을 때렸다.
‘시비를 걸 거면 나한테나 걸 것이지.’
녀석은 이길 자신이 없으니 약한 시녀를 건드린 것이었다.
“그, 그만!”
케빈이 비틀어진 몰골로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아론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케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론에게 맞고 말았다.
아론은 그를 때리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열 대련 때 제대로 복수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지금 이렇게 힘을 써버리면 나중에 그가 겁을 먹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잠시 후.
아론은 가만히 케빈을 바라봤다.
그는 얻어맞은 충격으로 거품을 물면서 기절해 버렸다.
여기 놔두면 누군가가 사람을 불러 데려갈 것이다.
이 정도로 때렸으니 소문은 나겠지. 하지만 문제는 없을 터였다.
어차피 공작가는 강자존의 세계. 무고하게 사람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아론은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라엘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아론은 라엘을 안아 들었다.
자신의 품에서 와들와들 떠는 라엘을 보며 혀를 찼다.
‘지독하게도 때렸구나. 전신에 멍이 안 든 곳이 없어.’
치료하지 않고 가만히 놔둔다면 라엘은 몇 달간 고생해야 할 것이다.
아론은 그것이 싫었다.
그녀가 피해를 입은 건 케빈 때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이 원인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 몸의 이전 주인이 그녀를 모질게 대했던 것도 마음 한편에서 짐이 되었었다.
‘내가 치료해 줘야겠어.’
물론 에드먼스 가문은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치료 신관들의 힘을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혜택이 집안의 사용인에게까지 돌아가는 것은 힘들었다.
고작 서열 6위의 전속 시녀다.
자신이 치료를 부탁해 봤자 가볍게 거절당할 것이 눈에 선했다.
차라리 자신이 힘을 써서 치료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지구에 있을 때, 하급 헌터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 배운 것이 없었다. 치료 마법 역시 그 범주에 들어갔다.
‘그때는 간단한 치료 마법밖에 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지식을 쓸 수 있는 몸이 있으니 알고 있는 치료 마법의 대부분을 쓸 수 있을 터다.
그리고 라엘은 공작가에서 몇 없는 자신의 편이었다.
아론이 은혜를 베풀어 그녀를 치료해 줬다, 라는 식으로 빚을 만들어 두면 언젠가 덕을 볼 날이 오겠지.
그는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며 자신의 개인실로 갔다.
잠시 후, 라엘을 안은 채 개인실에 도착한 아론.
그는 시녀를 침대에 눕힌 뒤 치료할 준비를 했다.
아론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차근차근 치료 마법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그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일단 마나부터 동기화시켜야 해.’
치료 마법이란 결국 자신의 마나로 다른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동기화 과정을 거쳐 마나가 잘 스며들도록 해야 했다.
왼손은 라엘의 배 위에 놓고, 오른손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 뒤에 마나를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마나가 스며든 것을 확인한 뒤, 부위별 치료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아론은 그녀의 치료를 거의 끝낸 상황이었다.
‘이상하네. 배 쪽의 상처가 회복이 더딘 거 같은데.’
다른 쪽은 거의 상처가 사라졌는데, 배에는 흉한 멍이 아직 남아 있었다.
‘좀 더 강하게 마법을 써야 하나?’
아론은 좀 더 세게 써 보기로 했다.
이윽고.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아이…… 회로가 있잖아?’
라엘의 복부를 중심으로 희미하게 마나 회로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회로의 존재 여부는 마법사가 되냐 안되냐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였다.
마나는 보통 사람도 미량이나마 가지고 있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 이유는 회로를 지니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라엘은 회로를 지니고 있다니.
아론은 생각에 잠겼다.
‘잘만 하면 얘도 마법사가 될 수 있을지도?’
그렇게 된다면 그녀 입장에서는 굳이 힘들게 시녀 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자신의’ 마법사로 만들 수 있냐가 중요한데…….
‘이건 확신이 서지 않는군.’
라엘에게 회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자신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이에 대한 판단은 서열 대련이 끝나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론은 그녀의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치료 마법이 완전하게 효과가 듣자, 라엘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 아론 님?!”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자신이 감히 아론의 침실에서 누워 있는 상황이라니.
‘상처가…… 낫고 있어?’
몸에 통증이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황상 이러한 조치를 한 것은 아론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방에는 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라엘로서는 케빈에게 얻어맞은 것만큼이나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여태껏 자신을 분풀이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아론이 치료를 해줄 줄이야. 이런 상황은 꿈에도 몰랐다.
비록, 최근의 그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라엘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 방금 막 치료를 끝낸 참이라서 안정될 시간이 필요하니까.”
아론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본 라엘은 결국 토 달지 못하고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뇌는 현재 과부하 상태나 다름없었다.
케빈에게 영문도 모르고 구타를 당하고, 또 뜻하지도 않게 아론으로부터 치료를 받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그래도 감사 인사는 확실하게 해야 했다.
“아니다. 내가 대처를 잘했다면 이런 일까진 일어나진 않았을 텐데.”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힘이 약하니까 케빈이 뒤를 생각하지도 않고 넘본 것이다.
첫째나 둘째를 향해서도 케빈은 대들 생각이 있었을까? 결단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론 님…….’
라엘은 오늘 아론이 보여준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케빈의 패악질에 마치 자기의 일처럼 대응해 주셨다. 게다가 과분할 정도로 치료까지 해 주셨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련님이 변하긴 확실히 변한 모양이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철이 든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아론 님께 할 수 있는 것은 충성을 다하는 것뿐이야.’
라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론에 대한 충성심을 강하게 다졌다.
* * *
에드먼스 케빈은 자신의 훈련장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아론에게 크게 깨진 이후로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서 수련했었다.
‘며칠 남지 않았어.’
정확히 4일 뒤.
서열 대련이 열린다.
최대한 기량을 끌어올려야 했다.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들은 열 살을 기점으로 서열이 부여된다. 그 순서에 따라 가문에서의 대우도 달라졌다.
서열 1위가 차기 후계자가 됨은 물론이요, 상위로 갈수록 가문의 장로에 준하는 대우를 해준다.
반대로 서열 꼴찌에게는 가차 없었다. 형식상 에드먼스 가문의 자식이지, 내부에서는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조차 해주지 않았다.
케빈의 서열은 5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서열은 상대평가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하위권이었다.
그래서 케빈은 서열이 부여된 이후로 자신의 순위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예 나락이 아니었음에는 내심 안도하였다.
왜냐. 이번 대에는 걸출한 망나니인 아론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런 녀석에게…….
자신이 깨지고 말았다.
‘싸가지 없는 자식.’
비록 아론이 형이었음에도 케빈은 속으로 그를 향한 욕설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그에게 있어 아론은 연습용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심심하면 가서 화를 풀고 대련을 빌미로 때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에게 두 번이나 당하고 말았다.
‘두 번 다 주먹다짐이라서 그래. 마법 전투는 내가 이긴다.’
케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당한 것도 다 방심을 해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망나니면…… 망나니답게 밑바닥이나 기면서 살라고.’
요즘 아론이 도서관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책을 보고 마법을 겉핥기로 배우고 있는 거겠지.
그런 녀석에게 정식 대련에서 질 수는 없었다.
케빈이 그를 향한 분노로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똑똑.
“들어가도 되겠니?”
문밖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철컥.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사람은 카이만의 넷째 부인이자 케빈의 어머니, 카트리였다.
“수련장에 없길래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녀의 말투는 케빈을 나무라고 있었다.
“지금 가려고 했어요.”
“그렇게 굼떠서야 이길 수 있겠니?”
카트리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말했다.
어머니가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필시 아론 때문이리라.
“그 녀석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데, 꼭 이겨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가 지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케빈은 저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자식이 혹시라도 망나니에게 질까 봐 불안한 것이겠지.
그리고, 자식이 서열 꼴찌가 되면 공작의 대우는 물론 부인들 간의 알력 싸움에서도 지게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
“어머니, 이것은……?”
케빈은 카트리가 건넨 것을 받아서 확인했다.
‘약이잖아?’
동그란 구슬 모양의 약이었다.
“마나 회로를 민감하게 만들어주는 약이다. 입에 숨기고 있다가 필요할 때 깨물어서 복용하거라.”
“그 말은 즉…….”
“그래. 대련 때 위험해지면 써.”
어머니가 건네준 약은 먹는 순간 마나량은 물론 주문의 시전 속도가 증가하고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도 없어서 정체를 들킬 일도 없었다.
케빈은 다시 팔을 내밀었다.
“아론 상대하는 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무조건 챙겨 둬!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그녀는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여기 온 건 약을 건네주려고 온 거다. 그거, 대련 날까지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어머니는 나가면서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그 어미 없는 녀석한테 지면 우리 꼴이 뭐가 되겠니? 절대 지면 안 된다.”
그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케빈은 방금 전까지 어머니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케빈이 보기에 어머니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걱정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는 거에만 관심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론 녀석이 꼴 보기가 싫은 건 동감이다.’
케빈은 서열 대련을 꼭 이기자고 결심했다.
***
며칠 후. 드디어 서열 대련의 날이 되었다.
아론과 케빈 두 사람은 아침 해가 밝자마자 대련이 치러질 장소로 이동했다.
공작가 영지 내의 큰 대련장.
‘여기서 오늘, 누군가는 패배하게 되고 치욕을 받겠지.’
아론은 대련장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치욕을 받게 될 사람은 케빈일 것이다.
‘근데, 사람은 얼마 없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오늘의 대련이 가문 내의 서열 순위를 걸고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참관하는 사람들은 가문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로만 한정했다.
공작가의 현재 주인인 카이만은 당연히 참관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근엄하게 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케빈의 어머니인 넷째 부인 카트리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대련장을 보는 중이었다.
‘어? 저 두 사람도 있네.’
아론은 의외의 사람을 발견하고는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셋째, 일리아 에드먼스. 그리고 막내, 라크 에드먼스.
그 둘 외에 다른 형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저 두 사람이 참관했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잠시 후.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작될 모양이군.’
저벅저벅.
그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공작이 멈춤과 동시에 사람들은 모두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오늘 서열 5위인 케빈 에드먼스와 서열 6위, 아론 에드먼스 간에 서열 대련이 열린다.”
공작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둘 중 한 명이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면 된다. 제일 쉬운 방법은 의식을 잃게 만드는 것이겠지. 아니면 입에서 항복이 나오도록 만들거나.”
참고로 이 대련에서는 보호장구 따윈 없었다. 즉, 다치는 것도 실제로 다치는 거였다.
물론 치료 마법사가 상시 대기 중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아론은 케빈을 바라보았다.
케빈 역시 그를 보며 투기를 다지고 있었다.
【상태창】
· 이름 : 케빈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33 마력 61
근력 40 민첩 20
지력 88 친화력 172
· 상태 : 【불안】
전투에 들어가기 전, 케빈의 상태창을 확인해 두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비교해서 얼마 오르지도 않았군.’
【상태창】
· 이름 : 아론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41 마력 108
근력 21 민첩 31
지력 95 친화력 310
반면 아론은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성장해 있었다.
케빈과 비교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상태는 불안이라.’
이 점을 대련에서 잘 이용하면 허를 찌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대련을 시작하도록.”
공작의 그 말과 동시에.
대련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론과 케빈, 두 사람은 마나를 끌어 올리며 주문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론의 쪽이 훨씬 빨랐다. 그는 이미 마법 시전 마치고는 케빈을 향해 발사했다.
‘뭐, 뭐야?’
그 광경을 본 케빈은 놀랐다.
자신을 향해 재빠르게 날아오는 불이 이글거리는 창.
‘파이어 스피어?’
그냥 볼트 마법이면 몰라도, 상위 단계의 마법을 저렇게나 빨리 시전할 수 있다니.
그러나 지금은 대련 중이었다.
케빈은 놀라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얼른 실드 마법을 전개할 준비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는데―.
날아오는 투사체의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퍼엉!
아론이 날린 마법이 케빈의 몸에 명중했다. 그는 충격으로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금세 털고 일어나 자신의 마법을 시전했다.
‘확실히. 속도를 중시한 결과 위력이 많이 떨어졌군.’
첫 공격은 케빈의 정신을 빼놓을 목적으로 빠르게 날린 것이었다. 그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케빈의 시전 속도도 나름 빨랐다. 공격을 맞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속도였다.
‘어떤 공격 마법이……?’
아론은 이내 녀석이 펼친 마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옭아매는 듯한 느낌. 시선을 내려 확인해보니 속박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걸 본 케빈은 즉시 마법을 날렸다. 허공에 맺힘과 동시에 날아오는 얼음덩어리들.
‘아이스 볼트인가.’
아론을 그것을 보자마자 디스펠 마법을 외워 속박마법의 해제를 시도했다. 동시에 전방에 실드를 전개해 공격에 대비했다.
‘어? 주문을 동시에 두 개를 쓴다고?’
케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마법도 쓰지 못하고, 신체는 약해서 골골대던 녀석이 이제 더블 캐스팅이라고?
어느새 아론에게 걸렸던 속박마법은 풀려 있었고, 날아갔던 아이스 볼트도 실드에 힘없이 막히고 말았다.
‘젠장. 다음 공격 마법을……!’
케빈이 주문을 외우려 할 때였다.
휘익! 휘익!
아론이 매직 애로우를 날리면서 자신의 시전을 방해했다.
‘저 녀석이!’
케빈은 시전을 포기하고 급하게 공격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매직 애로우는 위력이 그다지 크지 않은 마법이었지만 그렇다고 맞아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타다다닥!
그때였다.
아론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예상외의 상황이 벌어지자 케빈은 당황하고 말았다.
마법사끼리의 대결은 거리를 유지하며 싸우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일 뿐. 그게 절대 지켜야 할 규칙은 아니지.’
그 거리는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공격 마법을 날려야 해!’
케빈은 달려드는 아론을 향해 마법을 날렸다. 오히려 이게 기회라고 생각했다. 거리를 좁혀올수록 마법을 맞추기 쉬워지니 말이다.
문제는 케빈이 당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마법의 조준이 흔들리고, 아론은 쉽게 공격을 피했다.
그때, 아론은 돌진하면서 오른팔을 들어 마법을 시전했다.
케빈은 그것이 당연히 공격 마법인 줄 알고 방어 마법을 펼치려고 했다.
‘앗……!’
그러나 아론은 공격 마법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양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론이 날린 건 구속 마법이었다.
‘뭐지? 묶어둔 뒤에 마법을 날릴 생각인가? 근데 왜 달려오는 거야?’
케빈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아론은 달리는 상태에서 주먹을 굳게 쥐고는 뒤로 쭉 젖혔다. 케빈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가서는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끄흡!”
호쾌한 타격음이 울리면서 케빈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 떴다.
쿠웅!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바닥을 몇 차례 굴렀다.
“방금 주먹질을 한 거야?”
아론의 공격을 지켜보던 참관인들은 놀라서 웅성거렸다.
마법사가 마법이 아닌 주먹으로 공격을 하다니. 어찌 이럴 수 있냐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경기를 멈출 권한은 그들에게 없었다. 공작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공작은 그저 묵묵히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카악, 퉷.”
케빈은 자신의 입에 고인 침을 뱉어내면서 일어났다.
“감히 마법사가 긍지를 버리고 주먹을 써?”
그 말에 아론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먹이든 마법이든, 결국 아무거나 써서 살아남으면 그만 아니야?”
그런 뒤, 아론은 케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네 코피나 닦고 말해. 추하니까.”
그는 케빈의 코에서 주르륵 흐르는 피를 보며 키득 웃었다.
* * *
아론의 그 말에 케빈은 부들거리면서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아냈다.
‘제기랄!’
갑자기 돌진해서 주먹을 날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저 녀석은 주먹 쓰는 게 특기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부득 갈았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케빈은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며 마법을 시전했다. 손에서 피어나온 화염구들이 아론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 공격은 아론의 실드에 허망하게 녹아내리고 말았다.
반면, 아론의 공격은 손쉽게 파고 들어가 케빈에게 피해를 주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공방이 계속해서 오고 갔다.
‘녀석, 집중력이 많이 흐트러졌군.’
아론의 예상대로였다.
케빈의 공격은 위력이 일정하지 못했고, 정확도와 속도도 떨어져 있었다.
자신이 굳이 몸을 던져서 주먹을 날린 것도 이 점을 노렸었다.
아무래도 멀리서 마법으로 맞는 것보단 직접 주먹으로 맞는 게 더 정신적 타격이 크니 말이다.
이번 대련.
이대로만 가면 아론은 쉽게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공방이 진행될수록 아론은 멀쩡했지만, 케빈에게는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대련장 밖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알 것이다. 더 이상 이 대련은 막상막하가 아니라는 것을.
아론이 몇 수는 앞에 있다.
그렇게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대체 케빈이 왜 밀리는 거야?’
둘의 대련을 보고 있던 케빈의 어머니는 점점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망나니 녀석이 저리 셌던가?
대련이 시작된 이후로 케빈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는 걸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너는 왜 약을 받았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거야!’
분명 며칠 전에 약을 건넸었다.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쓰라고.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었다.
근데 케빈은 얻어맞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써!’
물론 그 약은 만능이 아니었다.
능력을 폭주시키는 만큼 부작용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케빈이 서열 6위로 떨어져서 자신이 멸시를 받는 것보다는 부작용을 감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 케빈도 역시 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난 꼭 이겨야 해. 죽어도 서열 6위론 떨어지지 않겠어.’
서열 6위는 자신의 아버지인 공작조차도 독단으로 볼 권한이 없으니,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
다른 형제들이었다면 서열 꼴찌에 있을 바에야 차라리 가문을 나가거나 죽음을 택할 것이다.
아론이야 망나니처럼 살아오면서 사용인들에게 몹쓸 짓을 하여 스트레스를 푼 것 같다만.
케빈은 그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까득!
케빈은 입안에 숨겨두었던 약을 깨물어 삼켰다. 그러자 금방 약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 느낌……!’
회로를 따라 이동하는 마나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보다 몇 배는 그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았다.
쿵쾅쿵쾅!
중심에 자리한 서클도 미칠 듯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이긴다! 이길 수밖에 없다!’
덩달아 케빈의 기분 역시 한층 고양되기 시작했다.
아론은 케빈에게서 심상치 않은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거 같은데?’
이상함을 느낀 그는 케빈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 이름 : 케빈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33 마력 104(↑43)
근력 40 민첩 20
지력 88 친화력 202(↑30)
· 상태 : 【약물 복용】
‘마력이랑 친화력이 올랐다고?’
순간 아론은 놀랐지만 상태 항목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약을 먹어서 그렇게 된 거였군.’
아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기기 위해서 이런 더러운 수까지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의 마력, 회로 등의 요소는 지구와 거의 유사한 것은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저 약물의 메커니즘 역시 대충 이해가 갔다.
‘아마 지구에서 쓰던 스팀팩과 비슷한 거겠지.’
흔히 스팀팩이라 불리는 약.
지구에서는 마나 각성제로 쓰이며 사용자의 마력과 반응을 향상시켜주었다.
물론 좋은 작용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효과가 즉각적이다 보니 약에는 의존성이 강했고, 점점 회로를 망가뜨렸다.
‘일단 조심해야겠군.’
저 약의 부작용이 어떻든.
당장의 각성 효과는 확실했다.
때마침, 케빈이 공격 마법을 사용해 날리고 있었다.
‘시전 속도며 위력이 확실히 약을 먹기 전보다 늘어나 있어.’
휘오오!
아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화염구.
저 크기나 속도를 감안하면 피하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수였다.
또, 이 정도 위력이면 단순히 실드만 사용해서는 막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동하기로 했다.
완벽히 피할 수는 없지만 마법의 중심부보다는 가장자리를 맞는 것이 충격이 덜했다.
아론은 이동해서 자리를 잡은 뒤, 실드 마법을 시전했다.
물론 이걸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론은 실드를 유지한 상태에서 마법을 하나 더 외웠다.
‘스톤 월!’
콰가각!
그러자 대련장의 바닥이 아론의 앞에 솟구쳐 올랐다.
‘이 정도면 되겠지.’
솟아오른 돌들이 1차 방어막이 되어서 날아오는 마법의 위력을 크게 감쇄시켜 줄 것이다.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두 가지의 마법을 사용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재능이 있는 아론의 몸으로는 충분히 그것이 가능했다.
콰앙!
케빈의 마법이 정통으로 직격했다. 하지만 아론의 기지 덕분에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쾅! 콰앙!
그러나 공격은 그 한 발이 다가 아니었다. 케빈의 마법이 계속해서 날아들고 있었다.
“하하! 크하하!”
케빈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어대며 마법을 시전했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거야?”
케빈의 기분은 한껏 치솟아 있었다.
안 그래도 아론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아서 정신이 흐트러져 있었는데, 약의 효과 때문에 기분이 붕 떠 있는 상태였다.
“그래! 넌 그렇게 숨죽인 채로 꼭꼭 숨어 있어. 그 자리가 제일 잘 어울리니까 말이야!”
케빈의 도발.
‘웬 개가 짖어대냐.’
아론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저 상태라면 그저 힘만 센 멍청이나 다름없겠군.’
그렇다면 그 상태에 맞는 방법을 써서 상대하면 된다.
퍼엉!
아론은 사람의 형상을 한 디코이를 만들었다.
세워 둔 스톤 월 덕분에 아론이 지금 뭘 하는지는 케빈이 알 수 없었다.
휘익!
그는 만든 디코이를 밖으로 던졌다.
“거기냐!”
케빈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는 곧장 마법을 시전해 디코이를 향해 날렸다.
웬만한 마법사라면 디코이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케빈은 약물에 너무 취해서 사리 판단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아론은 케빈이 마법을 사용한 것을 확인하고는 디코이가 던져진 반대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타다다닥!
그런 뒤 녀석을 향해 곧장 달렸다.
케빈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준비했던 마법은 디코이에게 쏘아지고 난 뒤였다.
“이익!”
케빈은 급하게 공격 마법을 쏘았다. 하지만 약의 도움이 있더라도 시전 시간이 짧은 마법은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겼군.’
순식간에 케빈에게 도달한 아론은 아이스 볼트를 시전해 그의 옆구리에 날렸다.
“끄아악!”
케빈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론은 연속해서 다른 부위에도 아이스 볼트를 날렸다.
털썩!
전의를 상실한 케빈은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아버렸다.
‘녀석은 무리해서 마법을 썼다. 슬슬 부작용이 올라올 텐데.’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커헉!”
케빈은 기침을 하며 검붉은 피를 토했다. 대련장 바닥에 녀석의 피가 퍼져나갔다.
동시에 팔에도 붉은 멍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저 약만을 믿고 마법을 난사한 결과였다.
“경기를 당장 멈춰 줘요!”
카트리가 공작을 바라보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그는 부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대련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보!”
카트리가 새된 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공작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경기 전에 내가 뭐라 말했었지?”
그는 차가운 눈으로 카트리를 바라봤다.
“한쪽이 의식을 잃거나 항복을 외치지 않는 한 대련은 중단되지 않는다.”
공작은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 반응에 카트리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케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약을 썼다는 게 들통나면 어쩌지?
그리고 그 약을 자신이 줬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면?
……정말 케빈이 져서 서열 꼴찌가 되면 어떻게 하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케빈의 안위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입지가 위험하지 않을까에 대해서만 걱정이 가득했다.
아론은 팔짱을 낀 채 케빈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그도 이 대련이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녀석의 입에서 항복이 나오지는 않을 테고.’
케빈은 눈만 떠 있다 뿐이지 이미 정신이 나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항복을 외칠 여유는 없을 것이다.
남은 것은 녀석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케빈의 서클은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손을 써서 녀석을 기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미 녀석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과거의 이 몸 주인이 겪은 폭력. 그리고 시비를 거는 것쯤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람인 시녀를 건드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에게 위협을 가하겠다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아.’
그런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만큼 자신은 호구가 아니었다.
“케빈! 일어나!”
그의 어머니, 카트리가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외침이 무색하게 그는 눈을 까뒤집고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케빈은 더 이상 몸을 떨지도, 숨을 헐떡대지도 않았다.
“확인해!”
그제야 사람들이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급히 케빈에게 다가가서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을 확인하고, 마나 반응을 살핀 신관이 일어나서 말했다.
“기절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서열 대련은 아론의 승리다. 규칙에 따라 아론은 지금부터 서열 5위로 올라가며, 케빈은 6위로 떨어지게 된다.”
공작이 선언했다.
나머지 참관인들은 침묵으로 반응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이런 식으로 서열이 뒤바뀐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이번 일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지. 그들은 그것을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쯧.”
아론은 실려 나가는 케빈을 보며 혀를 찼다.
이미 그의 서클은 너덜너덜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신관들이 데려가서 치료를 하겠지만, 이전처럼 마법을 제대로 쓰기는 힘들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론은 그런 그가 불쌍하지 않았다.
약을 쓴 것도 다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고 썼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에게는 좋은 감정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힘이 없어진다면 더 이상 까불지 않게 되니 좋은 일이었다.
아론은 조용히 대련장을 내려왔다.
* * *
케빈은 신관들에 의해 업혀 내려왔다. 그들은 평평한 바닥에 케빈을 눕히고는 재빠르게 행동에 들어갔다.
“회복 마법부터 써!”
신관들은 케빈을 치료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회복을 받아도 케빈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해서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빨리 케빈을 좀 깨워봐!”
그의 어머니인 카트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닦달했다.
잠시 후.
“이 정도 해두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관 중 한 명이 말을 흐렸다.
“회로를 스캔해 보았지만, 마나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서클이 망가진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서클이…… 망가졌다고?”
그 말을 들은 카트리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마법은 이제 못 쓰는 거냐?”
“치료하는 것은 힘들어 보입니다.”
신관의 그 말은 마법사로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었다.
“케빈, 케빈……!”
그녀는 깨어나지 않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에드먼스 공작가에서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식은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역할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론이 맡고 있었다.
근데 그 자리를 이제 자신의 아들이 꿰차게 생겼다.
그 말은 즉, 그녀의 지위 또한 추락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이 공작가에 오게 되었는데.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일군 노력을 아들 녀석이 다 망쳐버렸다고 느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카트리는 쓰러져 있는 케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 광경을 본 신관들이 놀라며 그녀를 막아섰다.
“아아악!”
카트리의 처절한 외침이 대련장에 울려 퍼졌다.
‘추하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아론의 감상이었다.
한편, 공작은 그녀와 케빈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론을 향해 다가갔다.
“아론.”
카이만의 중후한 목소리가 아론의 귓가에 들렸다.
“나중에 따로 부르도록 하마.”
“예.”
공작은 그 말만을 남기고 대련장을 나갔다. 축하한다는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냉혈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형제들도 있었는데.’
아론은 그들이 있던 자리를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막내는 이미 나간 모양이었고, 셋째 일리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아론은 그녀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내 그녀도 고개를 돌리더니 공작을 따라서 대련장을 나가버렸다.
‘잠깐 흥미로워하는 눈빛을 띤 것 같았는데?’
마치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일리아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서열 대련도 끝이 났군.’
아론은 자신이 이길 거라는 것은 예상했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대련은 수단.
그의 목표는 서열 상승으로 인해 공작과 만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거였다.
‘마침 공작이 나를 따로 부른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독대가 조만간이었다.
아론은 그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
에드먼스 공작가의 아침은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사용인들은 시설 청소며 사람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다.
아론의 시녀인 라엘 역시 청소를 마치고 식사를 가져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단연 화제는 최근에 있었던 서열 대련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녀도 직접 대련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론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망나니 도련님이 이길 줄이야. 힘을 숨기고 계셨던 걸까?”
“아니지. 케빈 도련님이 의외로 약했던 걸 수도 있어.”
사용인들은 이번 서열 대련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분명 실제 참관인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어떻게든 퍼질 이야기는 퍼지는 모양이었다.
“근데 아론 님은 무슨 연유로 서열 대련을 거셨대?”
“글쎄…… 아무래도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시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 추측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웠다.
아론이 직접 의도를 말하지 않는 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이러다가 아론 님 서열이 쭉쭉 올라가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사용인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봤자, 개망나니가 작은 망나니를 이긴 것뿐이야.”
“어머, 얘. 함부로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정작 말리는 사람도 그 의견에 동조하는 모양인지 키득거렸다.
그 말을 엿듣게 된 라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마찰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기에 대꾸하지 못했다.
‘아론 도련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속으로 소리 없는 반박만을 할 뿐이었다.
옛날의 라엘이라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속에서 아론에 대한 평가가 올라간 건 최근의 일이었다.
더 이상 자신을 구박하거나 하지 않고 바뀐 태도를 보여준 것은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리고 케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구해주고 치료해 준 것이 속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라엘. 여기 아론 도련님 식사.”
“아, 네.”
그녀는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받아 들고 그의 방으로 갔다.
***
드르륵.
바깥에서 트레이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왔군.’
아론은 그 소리에 반응했다.
그는 라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서열 대련도 무사히 마쳤겠다.
이제 슬슬 그녀가 가지고 있는 회로에 대해서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아론은 그게 오늘이라고 느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라엘은 방으로 들어오며 인사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아론이 아침에 깨어있는 것에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라엘. 잠깐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이십니까?”
라엘은 테이블에 음식을 올리다 말고 아론을 바라봤다.
“만약에 말이야. 네가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어, 음. 그게…….”
아론의 질문은 단순히 떠보는 것이었다. 라엘은 머뭇거리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감히 제가 마법사라니. 도련님은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라엘은 감히 자신에게 당치도 않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론은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상태를.
상태 : 【충성】 【기대】
라엘의 마음속에서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참,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라니까.’
그것을 본 아론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회로를 지녔다는 건 치료를 하면서 확인했다.
자신이 도와준다면 그녀를 마법사로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답일까?
그녀를 마법사로 만드는 일이 괜히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또, 도와주려고 칼을 쥐여 줬는데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때 치료한 이후로 라엘의 상태에는 항상 ‘충성’이 떠 있긴 했다.
‘하지만 충성한 놈이 배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거든. 그것은 역사로도 무수히 증명 되었다.’
그래서 아론은 그녀의 의중을 캐보기로 했다.
“라엘. 내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니야.”
“……네?”
“정말로 내가 너를 마법사로 만들어 줄 수 있으면 말이다. 너는 그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
라엘은 잠시 생각했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그리 말했다.
“설령 제가 마법사가 되더라도 저는 도련님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라엘은 잠깐 숨을 고른 뒤에 말을 이어갔다.
“저는 기억도 어렴풋한 어린 시절부터 에드먼스 가문에서 자랐고 시녀 교육을 받았습니다. 도련님은 어렸을 적부터 제가 전담해서 시중을 들어왔었지요.”
라엘은 가세가 기운 귀족 집안의 딸이었다.
이 집에서 시녀로서 살아가게 된 것도 집안의 입을 줄임과 동시에 에드먼스 가문에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저는 그것과 관련된 일 말고는 모릅니다. 다른 것은 경험해 본 적도 없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씁쓸한 인생이었다.
그녀도 나름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별달리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 존재 이유는 에드먼스 가문과 아론 도련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라엘의 말이 끝났다.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녀의 ‘충성’이 강해져 ‘헌신’이 되었습니다.]
‘어?’
아론은 창이 떠오른 것에 놀랐다. 이런 일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강해져서 헌신이 되었다니까, 더 높은 단계인 건가?’
기본적으로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기에 비춰 본다면, 라엘이 자신을 배신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었다.
‘이 정도면 믿고 마법사로 만들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더는 미룰 필요가 없었다.
아론은 라엘을 마법사로서 각성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라엘.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썩힐 필요가 없단다. 너는 마법사가 될 자질을 가졌어.”
“제가요?”
그녀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그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어때. 마법사가 된다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어. 물론 거저는 아니지. 넌 그 대가로 내게 충성을 다해야 해.”
“그건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걸요.”
라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마법사가 되는 것이 도련님께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 편이 더 나을 거야.”
라엘의 동의도 받았겠다.
아론은 곧장 그녀를 각성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혹시 내가 치료하면서 잘못 봤었을 수도 있으니까.’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라엘의 내부를 세심하게 스캔했다.
그러나 그때 본 건 틀린 게 아니었다. 라엘은 회로를 지니고 있었다.
“도련님. 만약 제가 마법사가 된다면요, 도련님처럼 강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요?”
“너, 내가 마법 쓰는 걸 봤니?”
그 말에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케빈 도련님을 이기셨잖아요. 그렇다면 충분히 강하세요.”
“으음, 글쎄.”
케빈은 자신보다 재능도 떨어지면서 노력을 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지는 건 수치나 다름없었다.
“강해지는 건 너 하기에 따라 달려있지.”
아론은 그녀의 물음에 그렇게 답변한 뒤, 본격적으로 그녀의 몸을 각성시키기 시작했다.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론은 무사히 라엘의 각성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후우. 도서관에서 책을 최대한 읽어둔 보람이 있었어.’
공작가의 도서관이라 그런지 없는 책이 없었다.
아론은 거기서 회로를 보유한 사람을 마법사로 각성시키는 법이 적힌 책도 읽었었다.
오늘 그녀에게 한 방법도 모두 그 책의 내용대로였다.
“어때. 좀 달라진 점 없어?”
“몸속에서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느껴져요.”
“그게 마나의 느낌이야.”
라엘은 형용할 수 없는 황홀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다들 처음 마나를 느끼게 되면 저런 기분이지.’
그 충만함은 아론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라엘은 연신 허리를 숙이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괜찮아. 그래도 당분간은 시녀 생활을 해 주겠어? 마법은 차차 가르쳐 줄게.”
“물론입니다. 저는 아론 님의 시녀이자 마법사인걸요.”
라엘은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끝.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나가줄래?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어졌어.”
원래 포드를 만나러 가려고 했지만, 도저히 기운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각성시키는 일은 마나를 굉장히 많이 쓰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라엘은 그렇게 말하며 아론의 방을 나갔다.
“후우.”
아론은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가 거물을 발굴한 걸지도 모르겠어.’
라엘의 각성을 돕던 도중이었다.
아론은 그녀의 상태창이 변하는 걸 실시간으로 봤었다.
마력과 친화력이 오르는 건 각성을 하면서 겪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그녀가 특성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라엘에게서 【의지】 특성이 피어날 줄이야.’
아론은 그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지구에서도 있던 것이었다.
‘이걸 가졌던 헌터들은 예외 없이 대성했었지.’
아무리 못해도 최소 A랭크의 헌터가 되었었다.
만약 자신이 라엘이 회로를 지녔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재능을 영원히 썩힐 뻔했군.’
아론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편이 된 것도 다행이었다.
그녀를 잘만 키운다면.
앞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