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백강현은 자신의 손에 있는 약을 쳐다봤다.
「마나의 비약 (S)」
마나 스톤과 희귀 약초를 황금 비율로 정제해서 만든 비약. 섭취 시 효능은 다음과 같다.
-마나 친화력이 대폭 상승
무려 S등급의 비약.
‘정말 운이 좋았어.’
강현은 얼마 전에 있었던 던전 원정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계에서 발견된 사례가 몇 없는 네펜데스의 꼬리초를 자신이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약초의 효능은 간단했다.
바로 마나 친화력의 대폭 상승.
그게 어느 정도냐면 C급에서 정체되어 있던 헌터를 단기간에 A급 이상으로 만들어 줄 정도였다.
하지만 생약초를 그대로 먹었다간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므로 자신의 지식을 살려 포션으로 제조했다.
‘이것만 먹으면 나도 C급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
무려 10년.
강현이 C급 헌터로서 지내 온 기간이었다.
헌터 적성 검사를 받고, 적합자로 판정받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그것도 흔치 않은 마법 적성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C등급 판정을 받은 이후, 그 등급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강현이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노력의 중요함을 믿고 악착같이 헌터 생활을 견뎠다.
언젠가 자신은 빛을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잡기술들을 익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재능의 중요성을 절절하게 느끼고 말았다.
마법 적성을 가진 헌터에게 중요한 친화력 수치. 이 값에 따라서 마나의 양이며 마법의 위력이 정해졌다. 그 수치가 강현은 절망적으로 낮았다.
그 결과 당연히 마나량은 낮았고 쓰는 마법도 형편이 없었다.
그래도 노력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법을 쓰는 것으로 마나 부족과 낮은 위력을 해결해 왔다.
하지만 떨어지는 재능을 커버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왜 자신은 이런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그 사실을 저주하고 있을 때, 얼마 전에 자신에게 희귀 약초가 나타난 것이다.
꿀꺽꿀꺽!
강현은 비약을 힘차게 들이켰다.
잠시 후…….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체내의 마나가 깨어나 마나 회로를 자극하였다.
‘이거 약빨이 듣고 있는 건가?’
강현은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상태창】
· 이름 : 백강현
· 스테이터스
체력 47 마력 30
근력 31 민첩 25
지력 87 친화력 21(10↑)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친화력이 올라가 있었다. 그것도 조금.
‘어라? 겨우 이 정도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친화력 35(24↑)】
【친화력 58(47↑)】
【친화력 96(85↑)】
수치는 미친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친화력 205(194↑)】
최종 수치는 205에서 멈추었다.
무려 194나 올랐다.
“허어…… 헉!”
강현은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역시 S급 비약이야!’
그는 비약의 효능에 감탄했다.
게다가 친화력이 오른 증거는 비단 상태창으로 보이는 수치가 다가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주변에 흐르는 마나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주변의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현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자신에게 이런 기적이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빌빌거렸던 지난날과는 안녕이다!’
여태껏 만년 C급 헌터로 살면서 얼마나 서러웠던가.
주변의 멸시란 멸시는 다 받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버텼다.
그 빛을 이제야 보는 것 같았다.
“우욱!”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강현은 갑작스럽게 내장이 진탕하는 것을 느꼈다.
털썩!
고통 때문에 무릎이 저절로 꿇려졌다.
‘뭐, 뭐지?’
그는 자신의 배를 부여잡은 채로 머리를 굴렸다.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부작용인 건가!’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희박한 확률이었기에 무시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확률이 낮더라도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100%였다.
“커헉!”
비약의 효과가 큰 만큼 부작용의 반동도 거대했다.
강현은 땅을 빌빌 기며 숨을 헐떡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의식은 계속해서 흐려져 가고 있었다.
***
“─. ─.”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님. 이제…… 합니다.”
잘 들어보니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님.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됨과 동시에 강현의 눈이 떠졌다.
‘……저게 뭐야?’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아니, 정말로!
강현은 살면서 천장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가정집을 본 적이 없었다.
‘어? 잠깐만. 나는 분명히…….’
그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려는 찰나였다.
“아론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현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여성이 한 명 서 있었다.
‘쟨 누구야?’
그녀는 검은색의 긴 드레스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복식이었다.
‘저건 분명…….’
그래, 메이드다.
중세 영화에서 볼 법한 메이드 옷을 입은 그녀는 자신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상태였다.
‘내 방에 왜 이런 애가 있어?’
그런 의문이 들 때.
찌릿!
“윽!”
갑작스럽게 강렬한 두통이 찾아왔다. 강현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론 님!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황급하게 다가와서 강현의 상태를 살폈다.
“쿨럭! 쿨럭!”
이어서 기침이 연신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 어서 약을!”
그러자 그녀는 약을 강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신속한 그녀의 동작. 이전에도 이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른 이거라도…….’
강현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른 약을 받아서 삼켰다.
“후우, 후우.”
잠시 후, 기침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미한 두통과 전신의 통증이 남아 있었다.
“아론 님…….”
여자는 호흡을 가다듬는 강현의 모습을 보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얘는 뭔데 나보고 자꾸 아론 님, 아론 님 이러는 거야?’
강현은 서서히 진정이 되자 그의 곁에 있는 여자의 존재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하지만 강현의 몸 상태는 이제 기침만 없다뿐이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일단 쟤부터 좀 내보내야겠어.’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웬 정체 모를 여자 때문에 정신이 사나웠다.
“야, 꺼져.”
어?
잠깐만.
강현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상스러운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난…… 전혀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생각으로는 정중하게 나가 달라고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레 거친 말이 나왔다.
그러나.
여자가 보여준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연신 허리를 숙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뭐지?’
강현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욕을 먹었는데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그녀의 반응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조용해졌군.’
혼자 있게 되자 묘하게 아픈 것도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대체 여긴 어디야?’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눈 떴을 때 보였던 샹들리에 하며, 주변에 배치된 가구들은 전혀 자신의 집에 있던 것들이 아니었다.
방의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자신이 살던 투룸에 비할 곳이 아니었다.
‘미드에서나 볼 법한 중세풍의 집인데.’
벽에 걸린 거울도 중세 느낌이 물씬 나는 고급 가구였다.
‘응?’
거울?
강현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강현의 모습이 온데간데도 없었다.
‘얜…… 누구?’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의 모습도 똑같이 그 행동을 따라 했다.
아무래도 강현이 맞는 모양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전반적으로 어두워 보였다. 머리는 금발이었지만 윤기가 없어서 초라했다.
‘이목구비가 나쁜 편은 아닌데…….’
다만 관리되지 못한 그 모습이 본판을 가리고 있었다.
찌릿!
또다시 찾아오는 강렬한 두통.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통증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기억?’
누군가의 기억이 강현의 머리에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이 몸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내가…… 아론?”
그는 얼빠진 얼굴을 한 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론 에드먼스.
메도우드 왕국, 에드먼스 공작가의 넷째 아들.
그게 이 몸의 이름이며 지위였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강현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들어온 기억에 의하면 아론은 에드먼스 가문 내에서 천대 시 받는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가 무색하게끔 약골로 태어났었다. 그 때문에 온갖 병을 달고 살았으며, 매 끼니마다 약을 챙겨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강현이 깨어났을 때 느낀 두통이며 기침, 전신의 통증도 아론의 몸에 달린 병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가 곧바로 약을 주었구나.’
오늘 아침에 자신을 깨웠던 여성. 그녀가 어떻게 재빠르게 약을 주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아론의 전속 시녀로, 라엘이라는 이름을 지닌 모양이었다.
‘불쌍한 애구만.’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유약한 성품 때문에 아론의 전담을 거절하지 못하고 맡아버린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론은 성격이 더러웠다. 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녀에게 폭언과 폭행을 밥 먹듯이 했었다.
‘그래서 내가 꺼지라고 험하게 말을 했어도 그저 감사하다고 하면서 나간 거였어.’
맞지 않고 욕만 들은 거는 양반이라는 의미였다.
강현에게 있어서 라엘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들어온 기억만으로도 그녀를 향한 측은함이 느껴졌다.
‘불쌍하긴 한데, 그것보단 내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현재 강현은 그녀를 동정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이 미스터리 같은 상황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비약을 마시고 곧바로 쓰러졌다.’
그 이후론 당연히 기억이 없다.
아마 갑자기 올라간 친화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작용으로 죽었을 것이다.
억울했지만, 거기까진 이해가 된다. 근데 왜 자신이 아론의 몸에 들어와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이 너무나 생생했었다.
‘……설마.’
환생.
그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쉬이 납득하긴 어려웠다.
게임이나 소설에서나 일어날법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거 말고 어떻게 설명해?’
지구에도 몬스터가 생겨났고 사람들이 능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걸로도 충분히 비현실적인데 환생 정도야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론의 기억이 맞다면, 여기에도 마법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고.’
특히 아론의 가문은 마법으로 유명했다. 마법 하나로 공작의 지위를 얻고, 왕국 전체를 좌지우지할 힘을 지닐 정도였다.
그렇다면 아론 역시 마법을 쓸 수 있을 터.
그 생각이 미치자 강현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정신을 집중해 마나를 느끼려고 했다.
‘마나를 느낀다, 느낀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주위의 마나를 탐색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있던 마나가 강현의 몸을 세차게 훑었다.
‘이 느낌!’
강현은 경악했다.
이 몸의 마나 친화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꽈악!
강현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쥐었다.
마나 친화력은 곧 재능과 직결된다. 이런 재능을 가지고 망나니처럼 살아왔다고? 그는 그 사실이 이해 가지 않았다.
‘잠깐만. 여기에서도 상태창을 열 수 있을까?’
강현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상태창】
· 이름 : 아론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12 마력 5
근력 6 민첩 7
지력 5 친화력 300
· 【주의】 마나 중독 상태입니다!
‘뭐야 이거?!’
강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 * *
그냥 별생각 없이 했을 뿐인데.
정말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도 상태창이 있는 건가?’
강현은 아론의 기억을 뒤졌다.
하지만 상태창과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그런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지구에서도 상태창은 헌터들만이 쓸 수 있는 고유 능력이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마치 게임의 능력치처럼 강함을 표시해주었다.
‘즉, 여기서는 나만이 쓸 수 있다는 건가?’
딱히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강현은 상태창을 샅샅이 훑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충격적이었다.
어찌 이렇게 비상식적인 수치를 가졌는지 이해 가지 않았다.
친화력은 300으로 어마어마하게 높았지만, 다른 능력치는 평균보다도 못했다.
하지만 그게 대수일까.
강현은 자신의 친화력이 낮았기에 그저 아론의 높은 친화력에만 눈길이 꽂혔다.
‘내 친화력은 고작 11이었어. 비약을 먹고 올라간 것도 205였지. 근데 이 녀석은……!’
그것보다 높은 300이었다.
비약을 마셨을 때만 해도 느껴지는 마나의 질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지금 아론의 몸은 그때보다 더 선명하게 마나가 느껴졌다.
‘그런데, 친화력에 비해서 마력 수치는 비참할 정도로 낮구나. 5가 뭐야, 5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 수치면 마법이나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명색이 마법 명가의 자제면서 마법 수련은 하나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약골의 몸으론 수련을 버티기 힘들었겠지.’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현은 상태창에 적혀있던 마지막 문장에 주목했다.
· 【주의】 마나 중독 상태입니다!
‘설마.’
강현은 퍼즐의 마지막이 맞춰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왜 아론의 몸이 이렇게 약한지.
그리고 친화력은 왜 또 높은지.
‘마나 중독에 걸렸다면 이해가 된다.’
강현은 이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지구에도 똑같은 희귀병이 있었으니 말이다.
‘걸리면 재앙이나 다름없지.’
신체의 마나 친화력이 너무 높은 나머지 계속해서 마나를 갈망해 결국에는 마나 회로를 붕괴시키는 병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믿었던 헌터들이 사실은 마나 중독이었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는 다들 절망에 빠졌었다.
마땅한 치료법은 없었다. 마나 중독 판정을 받은 헌터들은 길어봐야 30살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현대에서도 최고의 처치를 받았을 때의 기준이고.’
이 세계에서는 이 병에 대한 정보가 없는 모양이었다.
왕국에서 마법으로 명문인 에드먼스 가문에서도 아론을 단순히 약골로 취급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대로 아무 조치 없이 살아간다면…… 20살이 한계겠군.’
만약 강현이 환생한 것이 맞다면 계속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할 터였다.
아론은 10대 후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단 할 수 있는 조치는 해 둬야 한다.’
강현은 대략적으로 병의 진행을 늦추는 방법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먼저, 마나를 끊임없이 순환시켜야 했다. 높은 친화력 때문에 마나를 가만히 놔두면 회로가 빨리 상해버린다.
그리고 약이 하나 필요했다.
‘이 세계에도 칠성초가 있으려나?’
그걸 먹으면 확실하게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었다.
지구에서는 던전에서 종종 구할 수 있는 것이라서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으음. 없나?’
아론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성향상 약 같은 걸 자세하게 알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차차 알아보는 것으로 하자.’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러한 것은 조치에 불과했다. 병을 없애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에서도 이론뿐이었지만 방법은 하나 있었다.
방대한 마나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통제가 가능한 경지에 다다르는 것.
헌터의 경우에는 그 경지가 S랭크였다.
‘이 세계의 지식으로 바꾸면 9서클이 되는 건가?’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지구에서도 S랭크 헌터는 몇 없었다.
이 세계에서 9서클에 다다른 마법사 역시 대륙을 통틀어 몇 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만약 이 몸이 가진 재능을 가지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론 님.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환복을 도와드려야 하니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아침에 자신을 깨운 시녀, 라엘이었다.
하지만 강현은 딱히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는 안정이 필요했다.
“나 아침은 안 먹을래.”
강현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 식사에는 가주님께서 참석하시기에 꼭 동석하셔야만 합니다.”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라면 아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공작가의 식사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지만, 공작이 참여하는 경우는 달랐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가족 전원이 참석해야 했다.
‘빠질 방법은…… 없겠군.’
할 수 없이 강현은 시녀에게 들어오라고 한 뒤, 환복을 도움받고 나서 식사 장소로 갔다.
‘남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짓이 내가 모르는 가족들과 식사라니.’
강현은 입맛을 쩝 다셨다.
웬만해선 며칠간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야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왕국에서 감히 그에게 대적할 사람이 없는데, 비루한 자신이 그의 명령을 어겨서 화를 입고 싶진 않았다.
“헉, 헉…….”
식사 장소까지의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몸이 워낙 약해서 숨이 찼다.
잠시 후, 식장에 도착한 강현.
테이블 위에 음식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사람은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데나 앉으면 되나?’
그는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몸이 어느 자리로 향했다. 이전 주인의 본능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여기가 내 자리군.’
공작가의 식사는 자리조차도 서열순이었다. 아론은 당연히 최하위의 자리였다.
강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망나니였으니 말이다.
평소에 마법 수련은 하지도 않고 불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서열이 높을 리가 없었다.
강현은 자리에 앉아서 잠자코 다른 사람들이 오길 기다렸다.
‘과연 다른 형제들은 어떨까.’
슬슬 좀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벅저벅.
두 명이 식장으로 들어왔다.
그중에 한 명은 먼저 온 강현의 모습을 보고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저들은……?’
둘을 보자 자연스럽게 강현의 머릿속에서 아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섯째 케빈 에드먼스.
막내 라크 에드먼스.
그 둘은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케빈이 자신의 옆이었고, 라크가 케빈보다 앞에 앉았다.
‘그렇군.’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즉, 막내인 라크가 자신과 케빈보다 서열이 높다는 의미였다.
강현도 지나가는 라크의 기운을 느끼면서 알 수 있었다. 비록 막내지만 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말이다.
반면 케빈은 딱히 이렇다 할 느낌이 오지 않았다.
막내는 자리에 앉고는 조용히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
반면 다섯째는…….
“다른 일에는 항상 늦으면서 밥때만큼은 굉장히 빨리 오네?”
‘……오네?’
분명 자신이 형일 텐데.
케빈의 말투는 곱지 않았다. 거기다가 마지막엔 혀까지 찼다.
그러고 보니, 식장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보고 인상을 쓴 것도 저 녀석이었다.
강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아론의 업보긴 했지만 면전에 대고 어린놈이 이러니 어이가 없었다.
‘실력은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지금 당장 아론의 몸으로 붙는다면 이길 자신은 없었다.
마나 중독이라는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고, 아론은 신체를 전혀 단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녀석의 싸구려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굳이 시비에 걸려줄 필요는 없지.’
아론의 기억을 뒤져보니 이런 식으로 시비에 넘어가 녀석에게 당하는 것이 일상인 모양이다.
강현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케빈도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현은 당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기억해 두고 언젠가 손을 봐주리라 마음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사람이 식장으로 들어왔다.
고고함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우아함을 지닌 금발 적안의 여성이었다.
가문의 유일한 여식인 셋째, 일리아 에드먼스였다.
강현은 그녀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실력이 어마어마한데?’
지구의 강한 헌터들과 비견해도 꿇릴 것 없을 정도의 실력자라고 느껴졌다.
‘역시 마법 명가답군.’
강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어 또 다른 남자가 입장했다.
둘째, 러셀 에드먼스였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다들 한 외모 했다. 하지만 러셀의 잘생김은 그중에서도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강현은 순간 러셀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러셀은 싱긋 웃어 보였다.
“아론, 몸은 좀 어떠니?”
그는 평소에 몸이 좋지 않은 아론을 걱정해 물어보았다.
“그저 그래.”
강현은 우물쭈물 대답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강하다.’
셋째와 버금갈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호의는 어딘가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러셀의 태도는 적을 탐색하는 뱀과도 같다고 해야 하나.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강현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카릭은 사정 때문에 못 온다고 하네.”
강현은 의문이 들었다.
빠져도 되는 건가?
그야 그 엄한 가주의 명령으로 모이는 건데 말이다.
“카릭 형은 봐줘야지. 하필 파견 나간 곳이 몬스터 때문에 난리가 났으니 말이야.”
강현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케빈이 말했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둘째와 셋째도 저렇게 강한데, 첫째는 얼마나 강할까.
잠시 후.
찌릿.
강현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너머에서 풍겨오는 어마어마한 위압감.
‘……이건.’
여태껏 다른 형제들을 마주할 때도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그들을 넘어 초월적으로 강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이내 그 위압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벅저벅.
바로 에드먼스 공작가의 가주.
카이만 에드먼스였다.
그가 식장에 등장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강현 역시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저절로 그들을 따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지.”
둘째가 대표로 인사했다.
“다들 앉거라.”
카이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렇게 말했다.
‘……어마어마하구만.’
강현은 앉으면서 감탄했다.
분명 힘을 억제하고 있을 터인데도 밖으로 새어 나오는 기운이 남달랐다.
강현이 공작을 계속해서 바라봤지만 그는 이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수저를 들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한 달마다 있는 자리이다 보니 각종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특히 둘째 러셀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강현은 그저 조용히 그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식사했다.
이야기는 어느덧 왕국의 왕자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3왕자가 몰래 세력을 만들고 있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지?”
“처리했습니다.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겁니다.”
“흥.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러셀의 말을 들은 카이만은 콧방귀를 뀌었다.
“예정대로 1왕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강현은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한 왕국의 차기 왕마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가문이라니…… 대체 얼마나 힘이 센 거야?’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가문의 힘이 세더라도 왕국에 대적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만.’
강현은 이 어마어마한 가문의 힘을 오히려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 봬도, 나 역시 에드먼스 가문의 일원이야.’
비록 몸이 약하고 망나니의 천성 때문에 가문에서 없는 놈 취급을 받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구에 있었을 때의 강현은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마법이 좋아서 10년을 악착같이 노력으로 버텼었다.
아니, 쓸 수 있는 게 노력이라는 자원밖에 없다는 말이 맞았다.
하지만 아론 에드먼스의 몸으로 환생한 지금. 그는 재능도 갖추었고 공작가의 위세도 누릴 수 있었다.
‘마법 계열에서 S급이 되는 게 헌터 아카데미 시절 꿈이었었지.’
어쩌면 지구에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왕 여기서 사는 거.
강현은 오래 살아남고 싶었다.
고작 30살에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가문의 힘을 빌면 칠성초쯤이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먹고 고비만 넘기면 30살 전까지 9서클의 성취를 이루면 되었다.
강현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덧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마.”
카이만은 그 말을 남기고는 식장을 먼저 나갔다.
이제 이곳에는 공작가의 자제들만 남은 상황.
둘째 러셀은 다른 사람들의 일정을 물어보았다.
각자 자기가 할 일들을 대답했고, 차례는 어느덧 강현에게까지 돌아왔다.
“아론. 너는 이제 뭘 할 계획이니?”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구나.”
러셀은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 말고 다른 형제들은 아론의 거취에 관심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동해야지.’
이 가문에서 아론의 입지를 잊으면 안 되었다. 최약체의 신체를 타고났으며, 망나니의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180도 바뀐 모습을 보여주면 의심을 사기 마련이었다.
* * *
강현은 식사 장소를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방이 아니었다.
‘이쪽이 맞나?’
강현은 아론의 기억을 뒤져서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는 이 신체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마법을 쓰는 방식은 지구에서 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친화력 300의 몸으로 마법을 쓰면 어떤 느낌일지.
길을 찾는 데 고생을 좀 했다. 아론이 직접 거기에 가 수련을 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수련장에 도착한 강현.
그는 수련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공작가 자제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이 각자에게 주어졌다.
‘허…….’
강현은 들어가자마자 입을 벌렸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 수련장을 사용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마법 명가 아들놈이 말이야.’
아무리 약골에 망나니라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이제 이 몸의 주인은 강현이었다.
‘이 몸의 재능은 얼마나 뛰어날지, 직접 테스트해 보자.’
그는 연습용 과녁을 마주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뒤 매직 애로우를 시전할 준비를 했다.
이 마법은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배우는 기초적인 것. 강현은 천천히 수식을 짚어나가며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제대로 쓸 수 있을지 걱정되긴 하네.’
아론의 몸은 친화력이 높았지만 마력 수치는 젬병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저장된 마나가 적다면 마법을 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한번 시도해 보는 게 나았다.
강현은 몸속에서 일렁이는 미약한 마나를 느끼며 마법 준비를 마쳤다.
‘이야. 친화력이 높아서 그런가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 자체가 다르네.’
생생한 정도가 달랐다. 이전에 강현의 몸으로 마법을 쓸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강현은 천천히 과녁을 조준해서 손목에 모인 마나를 발사했다.
피시식!
“어?”
분명 손에서 매직 애로우가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손에 맺힌 마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있었다.
‘뭐야?’
강현은 혹시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시전해 보았다.
피시식!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또다시 마나가 흩어져 버렸다.
‘그렇구만. 마나 중독 상태는 이런 느낌이네.’
실제로 느껴보니 알게 되었다.
마법이 방출되는 회로에서 무언가가 막혀있는 것 같은 이 느낌.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회로에 촘촘한 그물망이 깔린 기분이었다.
‘이러면 당연히 마법 발현이 힘들다.’
아론이 왜 마법을 배우지 않고 막 나가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배우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빨리 이 상태를 벗어나야 해.’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칠성초를 구해서 먹는 것이다. 그러면 30살까지는 중독의 진행을 늦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약초가 이 세계에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부모님께 여쭙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아론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나를 만나주지도 않겠지.’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그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없는 사람 취급을 했었다.
‘그는 성향상 강자만을 존중한다.’
적자생존.
공작은 왕국에서 제일가는 마법 명가의 수장. 그렇기에 강한 자가 아니면 취급하지 않았고, 그 규칙은 자식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태어나길 약골이고 망나니짓을 일삼는 아론은 가문의 치부에 불과했다.
공작이 그를 처분하지 않은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공작에게 물어보는 것은 힘들겠어. 그렇다면.’
형제들은 어떨까.
이내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어림도 없지.’
아론의 형제들 중에서 그를 사람 취급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둘째인 러셀은 겉으로는 웃으며 대해주고 있지만…….
‘속으로는 분명 무시하고 있겠지.’
게다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케빈이 자신을 하대하는 것만 봐도 형제 사이에서의 취급은 훤했다.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나?’
먼저 칠성초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정도 정보는 공작가에 있는 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있더라도 구하는 난이도가 높다면 문제가 되는데.’
길가에 널렸으면 몰라, 구하기가 어렵다면 그것 또한 문제였다.
공작가에서는 서열에 따라 가문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구분되었다.
아론이야 물어볼 것도 없이 가문 내에서 최하위였다.
현재 상태로는 밖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도 힘들었고 외부의 물건을 조달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
‘방법이 없으려나?’
강현은 손 놓고 있기 싫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구하고 싶었다.
죽기 싫으니까.
특히, 이렇게 재능있는 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능력을 썩히는 것이 아까웠다.
지구에서의 그는 마법의 힘에 매료되었지만, 재능이 없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기회가 생긴 현재.
강현은 이 기회를 놓고 싶지 않았다.
‘난 원래 이 몸의 주인과는 다르다.’
녀석은 해결 방법을 모르니까 절망에 빠졌고, 결국 망나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강현은 달랐다.
왜 아론의 몸이 약골이 되었는지 지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해결법도 알고 있다.
남은 것은 자신의 실행력뿐.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이용해서, 9서클에 도달해 보이겠다.’
강현은 주먹을 쥐며 의지를 다졌다.
일단 약초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그는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먼저 회로를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안 그래도 마나 중독 상태로 인해 회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몸의 주인은 마법조차 쓰지 않았으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강현은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대로 처치를 시작했다.
체내의 마나를 미세하게 조정해서 회로에 마나를 순환시켰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고통도 뒤따랐다. 하지만 강현은 참으면서 그 과정을 계속했다.
독으로 얼기설기 얽혔던 회로가 뚫리는 것이 느껴졌다. 짜릿한 그 기분은 전신을 관통할 정도였다.
[마력이 소폭 상승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떠오른 알림창.
강현은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보았다.
【상태창】
· 이름 : 아론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12 마력 15(↑10)
근력 6 민첩 7
지력 5 친화력 300
‘진짜네.’
회로를 다시 사용하기만 했을 뿐인데 마력이 오르다니.
‘친화력이 높아서 그런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마력이 올랐다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 후, 마나 순환을 완전히 마친 강현.
‘이제는 마법을 쓸 수 있겠지?’
그는 다시 집중했다.
마나를 끌어 올린 뒤 과녁을 향해 매직 애로우를 날렸다.
파밧!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 이거지!’
강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 자신의 몸으로 마법을 썼을 때보다 훨씬 위력이 좋았다. 이게 재능의 차이인가 싶었다.
‘여기서 더 마력을 축적하고, 고위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하지만 성장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 공작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앞으로 치열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 기왕 재능 넘치는 새로운 몸을 얻은 거. 한번 기깔나게 살아주마.’
백강현이 아닌 이 세계의 아론으로써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으윽…….”
아론은 머리를 감싸 쥐며 일어났다. 어제 회로만 간신히 가다듬었다뿐이지 몸은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후우, 후우.”
아론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나를 순환시켰다. 그러자 두통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는 나아.’
그리고 마나 역시 차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분이 아닌가?
아론은 혹시나 싶어서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상태창】
· 이름 : 아론 에드먼스
· 스테이터스
체력 12 마력 18(↑3)
근력 6 민첩 7
지력 5 친화력 300
이것도 친화력이 높은 결과일까.
잠만 자고 일어났는데도 적은 양이지만 마력이 올라가 있었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재능인 거야?’
이제 이 몸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새삼 두려움이 느껴졌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전속 시녀일 것이었다.
“들어와도 돼.”
아론이 그리 말하자 문이 열렸다. 시녀는 다급하게 들어와서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론이 깨어있을 때 들어올 경우 늦었다고 온갖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때때로 제 시각에 깨웠는데도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얻어맞은 경우도 존재했다.
‘미친개가 따로 없군.’
아론은 멋쩍어서 뒷목을 어루만졌다.
“됐어. 그만, 그만.”
아론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렇게 계속 용서를 구하는 것도 정신이 사나워진다.
시녀가 준비된 약을 내밀자 아론은 그것을 물과 함께 삼켰다.
‘잠깐만…… 혹시 다른 사람의 상태창도 볼 수 있나?’
약을 먹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지구에서는 남의 상태창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아무 때나 볼 수는 없었고, 상대 헌터의 동의가 필요했다.
‘되려나?’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는 자신만 상태창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남의 것을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궁금한 건 당장 해결하고자 하는 게 아론의 성격이었다.
“야. 이리 가까이 와 봐.”
아론의 그 말에 시녀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쭈뼛쭈뼛 자신에게 다가왔다.
‘자, 보여줘. 이 아이의 상태를.’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상태창】
· 이름 : 라엘 그랑블루
· 스테이터스
체력 16 마력 35
근력 14 민첩 11
지력 27 친화력 20
· 상태 : 【공포】
‘어? 뜨네?’
아론이 실제로 타인의 상태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게 쓰이는 경우는 길드 면접 때나 사냥 시 팀장이 팀원들의 능력을 파악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만년 C급 헌터로 지냈던 그는 남에게 상태창을 보여주는 경우는 있어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동의도 필요 없는 것 같고.’
아론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이 능력을 잘 이용한다면 앞으로 난관을 헤쳐나갈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력이 좀 높은 거 빼면, 얘 능력치는 평범한데…… 잠깐만.’’
그녀의 현재 상태가 이상했다.
공포에 빠져 있다고?
아론은 상태창을 끄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아차.’
그녀는 얼굴을 푹 숙이고는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자신이 그녀를 가까이 부르는 이유는 보통 때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이제 됐어.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겁에 질린 아기고양이가 보이는 반응 같았다.
‘칠성초에 대한 정보를 구해야 해.’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선 그 약초가 필수였다.
아론의 머리에는 아무리 뒤져봐도 그 정보가 없었다.
“혹시 여기 서재가 있어?”
“서재라면…… 도서관 말씀이신가요?”
“어. 좀 가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어?”
“3층에 가시면 중앙에 다리가 있어요. 거길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녀는 대답은 정확하게 했지만…….
정말요? 도련님이요?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면전에 띄고 있었다.
아론은 애써 무시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아론의 반응에 라엘은 죄지은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 * *
시녀가 가르쳐준 대로 가니 도서관이 나왔다.
‘공작가라 그런지 더럽게 넓구만.’
설명만 들었을 때는 가까워 보였는데, 10분을 넘게 걸어야 했었다.
안 그래도 약골인 아론의 몸. 그는 헥헥 거리면서 겨우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내부는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공작가답게 꽤나 많은 장서를 보유한 듯했다.
“엥? 저 망나니가 여긴 왜?”
“……나 먼저 간다.”
“야, 같이 가!”
그때였다.
공작가에서 마법을 배우는 교육생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아론에 대해 수군거리더니 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내가 저들한테 해코지한 것이 있었나?’
공작가에서 숙식하며 배우는 사람들에게마저도 자신의 이미지는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에 온 목적은 칠성초에 대한 정보가 적힌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깨어났을 때부터 여기 말을 하고 들을 수 있었어. 아마 글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않고 글자부터 배워야 한다면 난감하긴 했다.
‘사서에게 책을 좀 물어보자.’
아론은 마침 사서 한 명이 눈에 띄어서 그를 불렀다.
“잠깐만.”
그와 눈이 마주친 사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서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체념한 듯 아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론 님. 여긴 어쩐 일이신지요……?”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 표정으로 보였다.
“어쩐 일이긴. 책 읽으러 왔지.”
“그, 그렇죠. 도서관이니까요.”
사서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했다.
혹여나 트집이 잡히면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론 도련님.”
그때였다.
아론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웬 노인이 서 있었다.
“에릭슨 대신 제가 보좌해드리겠습니다.”
‘누구야?‘
아론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상태창을 열어보려 했다.
-상태창 열람 불가-
‘어?’
아론은 떠오른 글자를 보고 놀랐다.
열람할 상대의 격이 너무 높은 경우에는 상태창을 읽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이?’
하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노사서는 전혀 그런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이 경우엔 자신의 감보단 보여주는 정보를 따르는 게 맞았다.
‘근데 왜 읽을 수 없는 거지?’
자신은 현재 아론의 몸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의 재능으로는 웬만한 상대의 상태창을 볼 수 있을 터.
그런데도 읽을 수가 없다면…….
‘이 노인은 어마어마한 실력자라는 의미겠군.’
이런 사람이 공작가의 사서를 맡고 있다고? 에드먼스 가문에는 이게 보통인 건가?
어쨌건, 자신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사람인 것은 잘 알겠다.
‘……설마 아론 이 녀석. 이 노인한테도 뭔가 일을 벌인 건 아니겠지?’
그때, 아론에게 부름을 받은 사서가 만류하며 나섰다.
“아닙니다. 아론 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뭐야?’
아론은 그의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물어본 걸 탐탁지 않아 했으면서 말이다. 왜 이제 와서 묘하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까.
그 순간.
놀랍게도 아론이 지녔던 기억의 편린이 돌아왔다. 그것도…… 좋지 않은 기억이었다.
‘……예전에 이 노인을 만난 적이 있었군.’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지 않았단 이유로 노인을 몰아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노인은 최대한 웃으면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그 태도가 오히려 성을 돋궈서 아론이 주먹을 들기까지 했었다.
마침 그 장소를 지나가던 공작이 그 광경을 보고는 불같이 화를 내서 때리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었다.
‘얘는 위아래도 없어? 완전 미친놈이잖아.‘
그게 망나니의 법도인가?
유교의 나라에 살았던 강현으로서는 이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제야 저 사서가 태도를 바꾼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론이 또 노인에게 무슨 무례를 일으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서의 걱정과 다르게, 아론은 자신의 안위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저 정도 실력을 가진 사람이면 나를 처리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 거다.’
만약 예전에 아론이 벌였던 일을 아직도 원한으로 품고 있다면 정말이지 위험했다.
아론은 자신이 한 일도 아닌 것에 위기를 겪자 괜히 억울해졌다.
“아론 도련님은 공작가의 자제시지 않는가. 내가 안내해 드리는 게 좋겠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아니, 왜요!’
아론은 속으로 외쳤다.
왜 그렇게 포기가 빠른 건데.
그러나 아론의 생각까지 읽을 수 없었던 사서는 이미 물러나고 있었다.
‘후우…… 노사서가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네.’
혹시 복수를 위해 자신을 골려 줄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하나,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론은 앞으로 잘못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도련님. 어떤 책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그, 갑작스럽게 들릴지는 몰라도 약초에 관심이 생겨서요. 칠성초에 대한 정보를 좀 구하고 싶습니다.”
“으음…… 칠성초라.”
노사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노사서는 어느 한 책장 앞에 도착하더니 책들을 몇 권 뽑아주었다.
“부디 도련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을 아론에게 건넸다.
아론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괜히 예의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번처럼 한 손으로 받으셔도 됩니다.”
……이 태도. 여전히 그때의 일로 앙심을 품고 있는 거 맞지?
그래도 책이 무거웠기 때문에 두 손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개인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곳도…… 있어요?”
“예. 도서관은 마법 연습생들도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도련님들이 편하게 책을 보실 수 있도록 개인실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를 따라가자 잠시 후 아론의 개인실이 나왔다.
방안은 그야말로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갖춰져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노사서는 그 말을 남기고는 방문을 닫았다.
“후우.”
아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불편하군.’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예전에 했던 짓도 마음에 걸렸지만, 저 노인이 풍기는 분위기가 마주하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능하다면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것보다, 칠성초가 우선이다.’
아론은 가져온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칠성초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
아론은 책장을 지나면서 수많은 마법 서적들을 보았다. 그중에서 몇 권 뽑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먼저야.’
노사서의 반응을 보아하니 칠성초라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직접 물어볼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일단, 아론은 그 노사서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몰랐다. 만약 정보를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이곳에 떨어진 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빚을 지기는 싫었다. 차라리 시간 들여서 직접 찾는 게 나았다.
‘그래. 마법 서적은 나중에 읽어도 되잖아.’
아론은 그렇게 결론 내리고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책을 펼쳤다.
‘다행히 글자는 읽을 수 있어.’
이 세계의 말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라는 것은 인지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론은 책들을 읽어가며 칠성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렇구만.’
책들을 완독한 아론.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칠성초는 이 세계에도 있었다.
문제는 희귀한 약초였기에 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사실상 공개된 시장에서는 얻는 방법이 없었다.
칠성초를 구하려면 공작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돈만 있어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구나.’
물론 아론의 경우에는 가문 내 서열이 낮아서 돈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한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작가에서의 아론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 현 상태에서 어떻게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있을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힘이라도 키워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그때.
“으윽.”
아론의 몸에 통증이 찾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형편없는 몸이야.’
아론은 속으로 투덜대며 급하게 마나를 순환시켰다.
하지만 통증은 조금 누그러졌을 뿐,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칠성초를 먹기 전까진 여기에 빨리 익숙해져야 할 텐데.’
아론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책들을 챙겨서 개인실을 나가려고 했다.
‘얼른 가서 쉬자.’
문을 연 순간.
‘워, 깜짝이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정말 많이 놀랐다. 그야 문을 열자마자 노사서가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론에게 말을 걸었다.
“추천해드렸던 책은 어떠셨습니까? 원하시던 정보는 찾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괜찮았습니다.“
아론은 이 노사서가 껄끄러웠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기에 적당히 긍정적인 대답을 꺼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노사서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책은 저한테 주십시오. 뒷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아론은 책을 노사서에게 맡기고는 도서관을 나섰다.
노사서는 멀어져가는 아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윽!
그때, 노인의 뒤로 불쑥 사람이 나타났다.
분명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마치 공간을 찢고 나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자네도 오랜만이군.”
“……왠지 표정이 즐거워 보이십니다만.”
“허허. 자네도 그렇게 보이나?”
노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는 일이 일어났거든.”
“어르신께서 흥미를 느끼실 법한 일이라. 궁금하군요.”
“저 망나니 녀석.”
노인은 아론이 나간 방향을 응시하며 말했다.
“눈빛에서 두려움이 보이더군.”
“망나니라도 강자 앞에선 꼬리를 말기 마련이지요.”
“허허. 녀석이 그럴 놈이었다면 첫 만남 때 나에게 달려들진 않았을 거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노인은 반응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녀석의 몸을 돌던 마나가 안정된 것이 느껴졌다.”
“예? 분명 타고나길 회로가 엉망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작조차도 온갖 방법을 썼지만 아론의 타고난 병을 고치지 못했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도와준 것일까요?”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공작가 안에서 망나니 아론이라면 다들 치를 떨 텐데, 누가 그를 도와주겠는가?”
“……제가 멍청한 말을 했군요. 하지만 마나가 안정되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야. 하지만 왠지 몰라도 나중에 있을 일이 기대되는구만.”
노인은 창밖에 어둠이 깔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녀석도 무언가 변화를 겪은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표정에는 아련함이 엿보였다.
“최고의 재능을 지닌 녀석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 안타까웠거든.”
“만약 아론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면 공작가에 새로운 바람이 불겠군요.”
“글쎄…….”
노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다. 공작도 해결법을 찾지 못한 문제니 말이다.”
“어르신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아론을 도와주실 겁니까?”
그 물음에 노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에드먼스 가문에 더는 도움을 주지 않기로 마음을 접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잠시 후, 노인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지닌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스무 살도 넘기기 어려운 아이지.”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만약 살고자 하는 발버둥을 보인다면, 조금 도움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오래 살지도 못할 가여운 녀석이야.”
“저는 어르신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알겠네. 물러가 보게.”
노인의 그 말에 불쑥 나타났던 그는 마치 환상이었던 양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 * *
아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푹신한 침대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러나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양반이지?‘
눕자마자 노사서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개인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설마 거기서 내내 그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런 상상을 하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론은 자신을 세뇌시키듯 반복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노인네가 자신을 향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하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아닐 거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 앞에 있던 거겠지.’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영 찝찝한 기분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의문점이 드는 건 그거 하나가 아니었다.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강한 거지?’
노사서의 상태창을 보려고 했지만 열람이 불가하다고만 떴다. 지구에서 이런 경우는 격이 높은 상대뿐이었다.
아직 자신이 공작가의 생리를 잘 모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로 강한 사람이 고작 사서직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사서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저 도서관에 있었고 그곳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사서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 정도로 강한 사람이 스승이 된다면 제법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자고로 마법도 학문이었다.
공부는 혼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돌파하는 것보다는, 앞선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나아가는 게 훨씬 성장 속도가 빨랐다.
‘그렇지만 그 노인이 내 스승이 되어 줄 이유는 없다.’
아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몸의 예전 주인이 벌인 추태 때문에 괜히 노사서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오히려 그가 앙심을 품고 자신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와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겠어.’
아론은 앞으로 도서관에 자주 들를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배울 것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공작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법 수련을 빼면 책 읽는 것 뿐이었다.
***
아론의 몸에 강현의 영혼이 깃든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의 일과는 단순했다.
생존을 위해 달성해야 하는 9서클이라는 목표. 아론은 그걸 위해 조금씩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래서 마법 수련과 공부에만 매진했었다.
남들이 그를 지켜본다면 지루해서 어떻게 버티냐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 반복 생활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지루할 틈이 어딨어.’
여기에는 그가 배울 게 많았다. 비단 마법뿐만 아니라 왕국과 대륙의 역사를 익히는 것도 흥미로웠다.
자신이 몰랐던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그 기쁨. 겪어보지 않은 자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지구에서 생활할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때는 성장의 벽에 막혀서 미쳐버릴 것 같았었다.
‘거기다가 환경도 나름 괜찮아.’
후계자 경쟁 때문에 공작가 내에 있는 것이 가시방석이라 짐작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자신과 다섯째 케빈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의 일정 때문에 밖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를 방해할 사람이 없으니 편한 환경이었다.
‘이대로 탄탄대로였다면 좋았겠지만…….’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불쑥 나타나서 괴롭히기 마련이었다.
지금 아론에게 있어서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도서관에서 만났던 노 사서와의 거리였다.
한 달 전. 그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아론은 그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웬만하면 책을 추천받는 건 다른 사서에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노사서가 나타나서 안내를 맡아 주었다.
게다가 책을 다 읽고 나오면 언제나처럼 그에게 다가와서 책의 소감을 물었다.
그러다가 그만 아론이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세계에는 없는 마법 이론을 그만 노사서에게 말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그 이론을 생각해 냈는지 집요하게 물었었다.
물론 그에게서도 여러 도움을 받았었다.
마법서에 대해 모르는 것을 그날 소감을 말할 때 물어보면 그는 명쾌하게 잘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예전에 무례하게 굴었던 아론을 찾아가 추궁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문제가 또 있었다.
‘성장 속도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친화력이 높아도, 아론은 마나 중독에 걸린 상태였다.
의식적으로 마나를 순환시켜 통증을 감안하고 회로를 자극했다. 하지만 마나 중독으로 인해 망가진 회로는 단순히 순환만으로는 완전 복구가 힘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칠성초를 구할 수만 있다면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약초를 구하려면 공작가의 힘을 빌려야 했고, 자신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었다.
‘공작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론은 공작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인데도 서열이 낮다는 이유로 말이다.
공작가는 철저하게 강자존의 세계였다. 가문 내에서 최하위 서열인 아론에게는 공작을 홀로 만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뭔 놈의 집안이 이렇게 굴러가는지.’
아론은 속으로 한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란 사람이 강한 자만 키우겠다는 성격이시니 말이다.
궁한 건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그 룰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다른 형제가 날 도와줄 리는 없고. 결국 공작의 눈에 띄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겠군.’
공작가는 적자생존의 세계.
그렇다면 공작에게 눈도장을 찍는 확실한 방법은 강해지는 것이다.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내가 서열을 올리면 된다.’
앞에 한 녀석만 제치면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공작가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이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약골 망나니 아론이다. 서열을 한 단계 제치는 것만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물론 아론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칠성초를 얻고, 공작가 내에서 숨통 좀 트고 생활하는 거니까 말이야.’
더 앞의 서열을 노려 봤자, 이놈이 본격적으로 후계자 경쟁을 할 생각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건 니들끼리나 하쇼.’
아론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이전 생에 이루지 못했던 마법의 성취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공작가 내에서 서열을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공작가 내에서의 커리큘럼 성취 순서였다.
에드먼스 가문의 자제들은 기본적으로 가문 고유의 커리큘럼을 따라서 마법을 배우게 된다. 거기서 각자가 얼마나 성취를 이뤘냐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진다.
물론 먼저 태어난 아이들이 유리하긴 했다. 시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재능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를 따라잡고 앞서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막내 라크가 자신과 다섯째를 뛰어넘어 네 번째 서열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난 이 방법으로 서열을 뒤집을 수가 없어.’
아론은 혀를 찼다.
이 무식한 망나니 놈이 수업받기를 거부해서 커리큘럼 자체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아론은 아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이 방법은 기각.
자동으로 두 번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서열 대련이었다.
‘이 방법을 쓰면 나중에 잡음이 생기는 걸 피할 순 없겠지만…….’
아론에게는 이것뿐이었다.
서열 대련은 간단했다. 밑의 서열에 있는 사람이 자신 보다 위의 서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대결하면 되었다.
‘물론 쉽지 않은 방법이다.’
자신의 상대는 가문 내 서열 5위인 케빈. 그도 공작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케빈도 에드먼스 가문의 피를 받은 이상, 타고난 그의 능력 자체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고 아론이 망나니 생활을 할 동안 케빈은 그래도 마법 수련을 하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실력을 쌓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싸움.
하지만 아론은 이 몸이 지닌 재능을 믿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어.’
이 세계에 눈을 뜬 첫날.
케빈은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대뜸 반말을 하며 시비를 걸어왔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저 무시로 일관했었다.
‘하지만 난 당하고만 사는 성격은 아니거든.’
아론은 그래도 그 짧은 시간에 녀석을 마주하면서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특출나지 않았었다.
또, 서열 대련을 벌이면 사실상 받아주는 상대와는 평생을 척지고 살아야 한다는 문제가 존재했다. 이때 적으로 돌아서는 것은 형제 한 명이 아닌, 그 세력 전체였다.
그러나 아론은 어차피 약골 망나니였다. 공작가에 자신의 편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점은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할지…….’
아론은 피식 웃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다른 문제점이 떠올랐다.
‘결국 녀석과 맞붙어서 이기려면 또다시 성장해야 한다는 거로 귀결된다.’
과연 지금의 성장 속도로 녀석을 넘어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현재 아론은 마나의 운용과 발현이 미숙했다. 아무리 재능 있는 신체에 환생했어도 운용법이 익숙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었다.
‘이 부분은 누군가 가르쳐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걸.’
확실히 스승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도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재능이 없어서 방황할 때, 우연히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았었다.
‘스승이라기보다는 내가 그 사람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린 거긴 하지만…….’
뭐 과정이 어쨌든.
그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덕분에 재능이 없었어도 헌터로서 어찌어찌 살아가는 방법을 익힐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론에게는 스승이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왜냐면 다른 공작가의 자제들은 마법 수업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사제 관계를 형성했지만, 이 망나니는 거기에 불참했었다.
‘재능 빼고는 시체인 놈.’
아론은 속으로 원래 주인을 저주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스승이 되기 위해선 일단 자신보다 뛰어나야 했다.
그리고 입이 방정맞은 사람은 안 된다.
괜히 자신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했다.
‘혹시 후계자 경쟁에 뛰어든다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말이야.’
누가 있을까.
“음…… 음…….”
아론이 신음을 흘리며 아무리 궁리해 보았지만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도서관에서 만났던 노사서였다.
‘으음…… 그래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