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33화 (297/297)

# 233

현질 전사

-10권 10화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저어 보이고 말했다.

「한동안 여러분과 같이 다니다 보니 한국어가 익숙해진 것뿐입니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어떤 말을 하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엔트로피가 제게 통역을 해주고 있으니까요.」

엔트로피는 허미래에게 받은 옷으로 갈아입고 미하일 소령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러시아인 비슷하게도 보여서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덕화가 조금 징그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엔트로피는 이제는 진짜 인간 같군요. 전보다 외양뿐만 아니라 말투나 모든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는 곧 정대식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좋은 현상이라고 봐야겠지요? 엔트로피가 진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장님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포로녜치와 싸우느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었어. 여기 있는 듀라한의 도움으로 포로녜치를 쓰러트렸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해서 포로녜치를 쓰러트리고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블랙 드래곤을 잡아서 판 돈으로 상점 업그레이드를 한 것이지만 그 사실을 고대로 말할 순 없었으므로 적당히 대꾸했다.

그러자 알렉세이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겸양을 표했다.

「여러분께 러시아를 대표해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인인 여러분께서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여정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있을 수 없었지요. 앞으로는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알렉세이가 하는 말에 미하일 소령이 불쾌한 낯빛을 드러냈다.

「네가 뭔데 러시아를 대표하네 마네하는 소릴 하는 거냐.」

정대식은 당혹해 그를 불렀다.

「미하일 소령!」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미하일 소령은 알렉세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는 러시아의 역적이다! 감히 러시아가 네 것인 양 말하지 마라!」

알렉세이도 표정을 굳혔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정대식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서서 경고했다.

「그만하십시오, 미하일 소령. 나는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기 전에 어떤 분란도 겪고 싶지 않습니다. 알렉세이가 이 여정에 동참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지금 당장 왔던 길을 돌아가십시오.」

정대식의 냉정한 말을 듣고 미하일 소령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떻게 러시아 정규군이자 여태까지의 여정을 함께 해온 자신보다 듀라한을 선택하느냐고 비난하는 눈길이었다.

하지만 미하일 소령의 전력보다는 듀라한의 전력이 필요한 게 확실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알렉세이를 내쫓았다가는 광필두에게 델라니포스를 고스란히 내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미하일 소령은 곧 상황을 판단하고 정대식의 말에 수긍했다.

「분란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자에게 입조심을 하라고 말하고 싶군요.」

알렉세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대식은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그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오랜 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아닌, 더 강대한 적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기에 온전히 집중해도 부족할 터. 암흑 영역 바깥에서의 일은 거기에 두고, 지금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는 동료로 서로를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미하일 소령은 동료로 대하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별다르게 반론을 펴지도 않았다.

싸우지만 않으면 됐다는 생각으로 정대식은 제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불어터진 라면을 입에 밀어 넣었다.

어차피 이 평화는 잠시였다.

곧 모스크바로 가게 되면 서로가 반목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 * *

정대식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하룻밤 야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이르게 출발한 그들은 속도를 내어 불타버린 들판을 가로질렀다.

몬스터 떼가 없는 틈을 타 속력을 내어 몇 개인가의 도시를 순식간에 지나고 나자, 모스크바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모스크바의 파괴된 도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땐, 마치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앗! 죽어라!"

김송근의 거대 분신들이 양쪽에서 이두 트롤의 모가지를 잡고 한 번에 뜯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이두 트롤은 신속하게 정리가 되고 있었으나 문제는 삼두 트롤이었다.

미하일 소령이 삼두 트롤을 잡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본 이재우가 무언가를 만들어내 그에게로 던졌다.

"작품명, 뇌격의 삼지창! 미하일 소령, 받아요!"

미하일 소령이 낚아챈 것은 거대한 삼지창이었다.

희한하게도 구름을 꿰어 만든 것처럼 생겼는데 미하일 소령이 그것을 삼두 트롤에게로 던지자 정확히 세 개의 머리 정중앙에 날아가 박힌 삼지창에서 꽈르릉하고 소규모의 뇌전이 쳤다.

그러자 삼두 트롤의 머리 세 개가 한꺼번에 구워져 놈이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간 미하일 소령이 삼지창을 옆으로 잡아당겨 놈의 머리들을 박살 내놓았다.

미하일 소령에게 삼지창을 던져주었던 이재우는 즉시 자신의 볼일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림으로 구현화 해낸 전투기에 올라타 하늘에 날아다니는 가고일들을 조지고 있었다.

이재우가 그려낸 거라서 그 전투기는 볼품은 없었으나 확실히 전투기다운 면모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니, 온갖 기능이 있는 마력탄을 쏴대고 있으니 전투기보다 훨씬 나았다.

이제는 한 번에 몇 개나 되는 것들을 구현화 시킬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곁에서는 기철민이 탈라리아로 한 마리 새처럼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재우의 공격과 박자를 맞추어 티르브링어를 마치 총처럼 쓰고 있었다.

그가 티르브링어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거기서 불꽃이 화살처럼 우수수 날아가 가고일들을 때렸다.

가고일들은 그 공격에 피막이 찢기거나 눈을 다치거나 하여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럼 서지원의 공격에 휘말려 즉시 사망했다.

서지원은 일전의 사신과 같은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마력 흡입으로 부대원들이 상대하는 몬스터들의 전력을 깎아 먹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그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몬스터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져 죽으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거대한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전면에 나섰다.

"샤아아앗!"

독니를 드러낸 바실리스크를 보고도 서지원은 침착했다.

그의 능력은 마력을 흡수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공간 마법이라는 경이적인 기술이 있는 것이다.

서지원은 공간 분리로 바실리스크의 번개 같은 공격을 무위로 만들었다.

오히려 거울을 세우듯 겹겹으로 바실리스크가 있는 공간을 나누어 놈을 몹시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바실리스크는 서지원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앞뒤 가리지 않고 서둘러 공격했다.

그러다 그만, 서지원의 공간 왜곡 마법에 걸려들어 자신의 몸을 물어버리고 말았다.

"샤아아아아아아!"

바실리스크의 독은 만지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초강력 한 극독이었다.

그 효과는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통용이 되었기에, 바실리스크는 자신의 독에 자신이 중독되어 죽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캬아아아!"

바실리스크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지는 한편으론, 고덕화가 바람의 신인 양 주변의 모든 것들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천강벽수선에 깃든 실라이론과 함께 쉴 새 없는 바람 술법으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으니, 몬스터들은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조차 못했다.

그나마 그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것은 거대한 고렘 뿐이었다.

온 전신이 반짝이는 광물로 뒤덮인 놈은 원체 몸이 무거워 엄청난 바람에도 버티고 고덕화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고덕화가 그가 자랑하는 기술을 펼치자 당해내지 못했다.

"백년풍진!"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모든 것을 부식시켜버리는 공격에 보석 고렘은 당당히 맞서는가 했다.

그러나 곧 무수한 세월을 한 번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푸슬푸슬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알알이 조각나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후유."

고덕화가 천강벽수선을 내리며 한숨을 토해내던 그때.

이번에는 더욱 강력해 보이는 고렘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놈은 전신이 쇳덩어리와 같아 보였는데, 번들거리는 검은 광택이 범상찮아 보였다.

고덕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몸체를 눈여겨보고 말했다.

"......흑철? 아다만티움인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검은 고렘은 우렁찬 괴성을 내뱉으며 곧장 고덕화에게로 덤벼들었다.

"크와아아아아앙!"

쿵! 쿵! 쿵! 쿵!

놈이 달릴 때마다 땅이 흔들리며 바닥이 깊이 팼다.

고덕화는 "지진 나겠네."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처음부터 강력한 공격을 펼쳤다.

"백년풍진!"

콰르르르르르르르르!

또다시 백 년의 세월과 맞먹는 거센 바람이 일어나 검은 고렘을 때렸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절대 견뎌내지 못하는 공격인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바람이 그쳤을 때 검은 고렘의 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놈의 신체 어디도 부식되거나 훼손된 자리가 없어, 고덕화가 신음을 흘렸다.

"아다만티움인 모양이군."

흑철이라면 백년풍진에 어느 정도는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만한 공격을 버텨내는 것은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과 같은 신비 금속 중에서도 최상위의 값어치를 자랑했다.

온몸이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니, 만일 쓰러트리게 된다면 떼돈을 벌게 해주겠지만, 그것도 쓰러트릴 수 있을 때의 일이었다.

고덕화는 이를 악물고 천강벽수선을 파르르 떨었다.

의식을 집중한 그의 손안에 무언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폭풍의 핵 같아 보였다.

사방팔방에서 그가 끌어당긴 바람이 그 손안에 압축되고 있었다.

처음엔 새하얗게 보이던 그것은 곧 새카맣게 변했고, 파지직 거리는 번개 같은 마찰을 일으키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아아!"

검은 고렘의 주먹이 고덕화에게로 날아오는 그 순간.

실라이론이 맨몸으로 그 주먹을 가로막아 섰다.

까아아아아아아-!

검은 고렘에 강타당한 실라이론이 힘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흩어졌다.

고덕화는 여전히 일격을 준비하느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로 날아오는 검은 고렘의 주먹을 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포스 오브 그래비티!"

허미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검은 고렘이 별안간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그 주변의 땅이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 검은 고렘은 땅속으로 파묻히기 시작했고 그 뒤로 허미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에 허미래의 디버프가 가해지자 자신도 움직이지 못하고 땅속에 파묻힐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자 마침내 공격 준비가 끝난 고덕화가 바람의 핵을 검은 고렘이 빠진 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었다.

"질풍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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