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89화 (288/297)

# 289

현질 전사

-12권 17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천루 저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날이 이미 밝아오는 중이었으나 아침이 되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희끄무레한 동녘 빛에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윤곽만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그때, 송시민이 이를 득득 갈며 힘겹게 말했다.

"......방어막에...... 너무, 너무 많아요."

"예?"

송시민이 허공을 가리켰고 거기에 엄청난 수의 몬스터 떼가 달라붙어 있었다.

방어막 위로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올라타 있으니 그 무게를 버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철민은 말없이 광필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광필두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전한 방어막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송시민이 최대한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게 하려면 밖으로 나가 놈들과 싸워야 했다.

쿵, 쿵, 쿵, 쿵.

기철민은 요란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탈라리아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날이 없는 티르브링어를 빼 들고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을 뚫어주십시오. 우리가 나가서 최대한 막아보겠습니다."

송시민은 과연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엄청난 수의 몬스터에 5대 거신까지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데 겨우 둘이서 막아낼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 같은 회의가 엿보였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몬스터들이 뜸한 위치의 방어막의 빛이 희미해지는 게 보였다.

기철민은 광필두와 함께 즉시 허공으로 몸을 날려 방어막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순 방어막이 뚫리는 바람에 그 안으로 짓눌려 죽은 몬스터들의 사체와 괴조 몇 마리, 그리폰 따위가 쏟아져 들어갔으나 방어막은 금방 메워졌다. 그 정도는 안에 남아 있는 다른 딜러들이 처치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그런 걸 걱정할 여력도 못됐다. 기철민과 광필두가 바깥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몬스터들이 덮쳐왔던 것이다.

"천노참격!"

기철민은 큰소리로 외치며 달라붙는 놈들을 뿌리치기 위해 티르브링어를 휘둘렀다. 그러나 날이 없는 티르브링어에는 백날 마력을 흘려 넣어봤자 힘없이 쏟아지기만 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전신을 깨무는 괴조를 어쩌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놈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죽으려고 작정했냐!"

광필두가 망가진 무기를 휘두르는 기철민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기철민은 혀를 차면서 티르브링어가 아닌 빌린 대검을 꺼내 휘둘렀다.

"천광비검!"

파바바바바바밧!

사방으로 난무하는 검격에 몬스터들이 발기발기 찢겨나갔다.

곧 광필두의 딜라이트가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을 내뿜자 일대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타버렸다.

'과연, 굉장한 위력이군!'

방어막 위에 더께처럼 쌓이는 잡몹들을 순식간에 처리한 그들은 아까 광선을 쏴대던 고렘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광경을 보았다.

덤프트럭만 한 덩치가 몸으로 들이받는 것만 해도 방어막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 같았다.

기철민은 왼쪽으로 뛰며 말했다.

"네가 다섯 마리를 맡아라!"

광필두는 오른쪽으로 뛰었다. 그리고 딜라이트 소드를 옆으로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일대의 건물들과 함께 고렘 세 마리가 순식간에 두부 썰리듯이 썰려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놈들이 쏘는 광선은 제법 위력적이었는데 내구성은 별로인 것 같았다.

광필두는 즉시 다음 두 마리를 처치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으나 그 전에 광선이 먼저 그를 덮쳤다.

카아아아아아앙!

미처 방패를 꺼내 들 여력이 없었지만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가 그를 보호해냈다. 광필두는 광선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가 고렘 두 마리를 척살했다.

반면, 기철민은 고렘들을 처치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그는 날아오는 광선을 피해 탈라리아를 써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렘이 내쏘는 광선에 다른 고렘이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지러운 곡예비행을 했다.

그러자 멍청한 놈들이 닥치는 대로 광선을 쏴대다가 서로를 겨냥하는 바람에 자멸했다.

기철민은 팔다리가 광선에 무너져 균형을 잃고 버둥대는 고렘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깨 놓았다.

그러고 나니까 떼를 지어 달려오는 코카트리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바실리스크가 입을 쩍 벌리며 독액을 쏟아냈다.

"우왓!"

기철민은 황급히 몸을 틀어 독액을 피했다. 그게 쏟아지자 아래 있던 몬스터들이 그걸 맞고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독액을 한 방울이라도 맞은 몬스터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실리스크가 거대한 몸뚱이를 뒤틀며 꼬리를 날려왔다.

거의 점보 비행기만 한 사이즈의 꼬리에 얻어맞고 기철민은 허공을 날았다.

"큭!"

공중을 뱅글뱅글 돌던 기철민은 황급히 균형을 되찾았다. 그러다가 바실리스크의 커다란 입이 바로 자신의 코앞에 들이닥친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는 게 늦어져 채찍같이 날아오는 혓바닥에 발목이 휘감겨 그대로 모가지로 끌려들어 갔다.

다행히 독액을 맞은 것은 아니었기에, 기철민은 놈의 목구멍에 산 채로 갇히는 꼴이 되었다.

바실리스크는 그대로 기철민을 위액이 가득한 위장에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했으나 가만있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다지보그의 써클렛으로 광선을 쏘아내 바실리스크의 목구멍에 구멍을 뚫었다.

그렇게 숨구멍이 트이자 뜨끔한 고통에 놀라 몸을 압박하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사냥칼을 끄집어냈다.

거기에 마력을 밀어 넣어 검기를 날카롭게 갈아 올린 뒤, 단번에 살을 찢었다.

"캬아아아아악!"

기철민은 바실리스크의 질긴 가죽을 베어내고 놈의 목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독한 놈이 목에 구멍이 뚫리고도 아직 살아 있었다.

기철민은 구멍에 자신의 다리를 단단히 끼워 넣고 대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목 뒤에 올라탄 자신을 떼어내려고 몸부림치는 바실리스크의 대갈통을 깨 놓았다.

"천래일섬!"

퍼어어어억!

두개골이 터지면서 사방에 산성 피가 튀었다.

기철민은 방어구가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바실리스크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재빨리 벗어냈다.

계속 입고 있다가는 살갗까지도 타들어 갈 지경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제기랄! 몬스터 떼 속에서 알몸으로 싸우게 생겼군!'

그때 기철민의 눈에 죽어있는 헌터 한 명이 보였다.

미처 치우지 못한 시신이 그럴싸한 방어구를 입고 있었다.

방패까지 근처에 나뒹구는 것을 보고 기철민은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 거기서 방어구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물론, 몬스터들이 그가 한가하게 장비를 갖추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곧장 기철민의 두 배 크기만 한 오거가 달려들었으나 광필두가 때를 놓치지 않고 케이론으로 놈의 머리통을 뚫어주었다.

"아주 고오맙다."

기철민은 혼자서 빈정거리며 방어구를 벗겨내 착용했다. 그리고 헬멧 비슷하게 생긴 투구까지 벗겨 쓰고 방패를 집어 들었다.

임시방편으로 못할 짓까지 해가며 얻어 입은 방어구였으나 착용감이 꽤 훌륭했다. 트롤과 싸우면서 내구성을 시험해보니 성능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훌륭했다.

'트롤의 발톱쯤은 너끈히 견뎌내는 걸 보니 쓸 만한걸!'

기철민은 트롤 서너 마리를 베어 넘기고 몸을 돌렸다. 이번엔 집채만 한 만티코어가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기철민은 숨 돌릴 겨를이 없다고 대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아슬아슬하게 비껴낸 대검이 만티코어의 강철같은 수염 몇 가닥을 잘라냈다. 그리고 만티코어의 흉측한 주둥이가 기철민의 머리통을 콱 물었다.

"으악!"

기철민은 머리통을 물린 채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와중에 대검을 놓쳐버렸다.

결국 헬멧에서 머리를 빼내자 몸이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곧 헬멧을 물고 있던 만티코어가 그걸 수박처럼 박살을 내놨다. 계속 거기에 머리를 끼우고 있었으면 절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헬멧 조각을 내뱉은 만티코어가 다시금 달려들었고, 기철민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는 방패로 놈의 주둥이를 후려쳤으나 한 호흡을 버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대검을 집어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어, 방패를 휘두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만티코어가 뛰어오르는 틈을 타 몸을 홱 돌려서 대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0.1초 만에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쩌억!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방어복의 등이 갈라지며 만티코어의 발톱이 살을 스쳤다.

만티코어의 발톱에는 독이 가득했기에 순식간에 등이 불타오르면서 엄청난 고통이 찾아들었다.

그 바람에 기철민은 대검을 집어 들지도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해독 포션을 찾아 마시려고 했으나 이미 독이 꽤 퍼졌는지 손이 떨려서 포션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엔 만티코어를 다시금 맞닥뜨리게 되어, 놈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꼴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죽는다!'

그 순간, 손이 자연스레 옆구리로 향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그는 장식품처럼 매달려 있던 티르브링어를 낚아챘다.

'절대 죽지 않는다!'

번-쩍!

순간, 티르브링어에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광염이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다는 표현은 적당치 않았다.

그건 말 그대로 거대한 채찍처럼 날뛰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주변을 휩쓰는 광염에 티르브링어를 휘두른 기철민조차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온몸이 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나 차마 티르브링어를 놓지 못했다.

광염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만티코어와 주위의 잡몹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철민까지도 남김없이 휘감았던 것이다.

곧 소용돌이치던 그 백색 불꽃이 폭발하는 별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라 구름을 찢어놓았다.

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

용트림을 하듯 광염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자 짙게 드리웠던 구름이 밀려나 느닷없이 하늘이 개었다.

아침 햇살 한줄기가 비쳐드는 가운데 기철민은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백색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불구덩이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건 조금도 그를 해하지 못했다.

도리어 매우 편안하고 안락하여, 몸에 스몄던 독이 다 사라지고 상처도 전부 낫는 기분이었다.

기철민은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티르브링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형태가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손막이가 손을 완전히 감싸는 식으로 변해 있었고 무엇보다 금속의 날 대신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검기가 솟구쳐 있었다.

기철민은 티르브링어가 마침내 여신급 진화를 이루어냈음을 깨달았다.

'이게 바로 티르벵거인가!'

기철민은 경이로운 기분으로 티르벵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티르벵거의 위력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주위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광염이 모든 것을 휩쓸어 지상이 아주 깨끗했다.

몇몇 건물들의 뼈대와 도로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몬스터들뿐만 아니라 그 사체와 잔해들까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 바람에 몬스터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기철민이 놀라움에 멀거니 서 있자 그 광경을 보고 광필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신급 무기를 갖겠다고 7성 무구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자신인데, 정작 그는 아직까지 진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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