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현질 전사
-12권 13화
드래곤의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재뿐으로, 방어막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헌터들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강영후는 유유히 허공을 맴도는 드래곤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각오를 했던 바이지만, 드래곤의 위력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나니 자신이 직면한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가 실감이 났다.
인류의 존속을 걸고 저런 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공대장님."
강영후는 옆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어느샌가 팔용대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다행히도 타이탄 공격대의 대부분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매그넘과 십자군 공격대도 비교적 온전한 것 같았다.
피해가 큰 것은 타노스 공격대와 연합대들이었다. 이창준이 있던 8 연합대는 괴멸한 것 같았고 12 연합대도 곤충왕 장재원과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
타노스 공격대도 생각지 못하게 피해가 컸는데, 드래곤이 나타나자마자 제대로 방어를 못 하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은 다 죽었고 도망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계속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드래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로 드레이크 떼거지가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가 한둘이 아닐 뿐만 아니라, 헌터들의 기세가 크게 꺾여 있었다. 이대로는 싸워봤자 희생만 더 늘어날 뿐이라 생각하고 강영후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퇴각한다! 모두 다음 포인트로 이동한다! 서지원, 저 도로를 잠시 폐쇄할 수 있겠나?"
"잠시라면 가능합니다."
"그럼 시간을 벌어라."
"알겠습니다!"
서지원은 즉시 능력을 발휘했다.
"공간 분리!"
그가 몬스터들이 진입해 들어오는 길목에 술수를 부렸다. 강영후는 그 틈을 타서 2차 방어 지점으로 이동하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서지원을 데리고 물러나려는데, 문득 절망적인 기분이 찾아들었다.
드레이크들 뒤쪽으로 고층 빌딩과 맞먹는 크기의 고렘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거대한 장벽처럼 열을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놈들은 단지 걷기만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애써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고 발길을 재촉하는 강영후의 마음속에 절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정대식을 부르면서 들리지도 않는 재촉을 했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된 거냐, 정대식! 이대로라면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서울이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 * *
MFP를 짓밟으며 들이닥치는 몬스터 떼에게 밀려 퇴각한 것은 강영후 쪽만이 아니었다.
MFP가 설치된 1차 방어선을 지키러 나섰던 모든 병력이 물러나야 했다.
그들은 즉시 2차 방어선에서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한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
만약에 강을 따라 수상형 몬스터들이 재차 습격하게 된다면 앞뒤로 공격당하는 셈이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뚫려 있기는 상공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2차 방어선까지 무너지고 나면 한강 다리를 모조리 폭파하게 될 터였다. 그나마도 최희가 북한산 쪽으로 넘어오는 몬스터 떼를 방어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에 사태가 그 지경으로까지 악화하면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방어막을 칠 예정이었다. 방어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송시민이 있고, 국가 기물 금고에서 꺼낸 온갖 방어 아이템이 있으니 그것으로 최대한 버티면서 활로를 뚫어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작전은 정말이지 최후의 방법이었다. 종로구를 제외한 다른 구역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 피해가 어마어마할 터였다.
지금도 강남에 있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대피했다고는 하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문어 괴수의 등장으로 한강 주요 다리 두 개가 부서졌으니 강북으로의 이동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강영후는 올림픽대로가 보이는 압구정까지 후퇴하며 곳곳에 스크롤과 MFP 지뢰를 이용한 함정을 깔아두었다. 그리고 다른 구를 방어하고 있는 공대장들과도 연락을 취해보았다.
상황이 나쁘기는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MFP는 10성 이상급 되는 괴물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데다가, 급하게 만든 탓에 물리적 공격에 취약했다.
듣자 하니 영등포 쪽은 상황이 매우 안 좋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는 양화대교를 사수 중인 공대장은 메두사의 등장으로 양천구와 구로구 일대가 전부 돌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언 비슷한 말을 지껄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일 최악이 뭔지 알아? 15성급 이상이라고 짐작되는 괴물 중의 괴물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야."
신(新)5대 거신의 이름은 각기 네메시스, 헤카테, 에리스, 리비티나, 케레스라고 명명됐다. 그리스신화에서 따온 이름들이었다.
고작 몬스터들에 붙이는 이름치고 거창하지 않으냐는 말들도 있었으나 사실 놈들이 가진 가공할 만한 능력은 신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서울을 둘러싼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 대군만이 물밀 듯 밀려들 뿐,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만약 놈들이 나선다면 이런 방어작전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 전에 정대식이 그 준비란 걸 마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강영후는 그 생각을 떠올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전부 그 하나에 걸고 있다니.'
강영후는 처음 정대식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 무렵에만 해도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느끼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거물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령 그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저 강대한 몬스터들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까?
그는 당당히 보수까지 요구하며 할 수 있다고 말을 했으나 그 준비란 게 길어지자 불안함도 덩달아 커지고 있었다.
드래곤 한 마리를 감당하지 못해 퇴각하고 난 후라서 더 그랬다.
강영후는 행여 또다시 파이어 드래곤이 나타날까 싶어서 불안한 기분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인전투기들이 폭탄을 들이붓고 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잠잠했으나 오래지 않아 놈이 나타나리란 건 자명한 일이었다.
'하늘에서 브레스를 퍼부으면 우리로선 당해낼 방법이 없다. 지상에 설치해둔 함정들도 놈에게는 해당이 안 돼. 우리를 무시하고 한강을 건너가기라도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상상도 하기 싫군. 어떻게든 파이어 드래곤을 처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강영후는 펜리르 부대를 호출해 파이어 드래곤을 끌어내릴 상세한 계획을 세웠다.
일단 놈을 지상에 묶어두는 것만으로도 전력이 크게 손실될 터였다.
파이어 드래곤을 추락만 시킬 수 있다면 브레스를 쏜다 하더라도 나머지 타이탄 공격대의 대원들이 가차 없는 공격을 쏟아부어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터였다.
"파이어 드래곤은 필시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에 길을 터주기 위해 다시금 나타날 것이다. 놈은 브레스를 쏘면서 날아들 가능성이 크니까, 첫 번째 브레스를 쏘고 나서 생기는 빈틈을 타 공격하겠다."
강영후는 홀로그램 맵을 켜놓고 각 고층 건물들을 표시했다.
"허미래가 와이어로 여기에 덫을 놓아라. 그리고 서지원 네가 공간 왜곡으로 드래곤을 이곳에 밀어 넣어야 한다. 드래곤이 덫에 걸리면 고덕화 네가 놈이 날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틈을 타 이재우가 작살을 구현화하고 김송근이 거대 분신을 만들어 놈을 끌어내린다. 거기에 광필두가 7성 무구로 힘을 보태주면 좋겠군. 일단 지상으로 끌어내리기만 하면 나머지는 타이탄의 다른 부대들이 알아서 처치할 것이다."
강영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철민이 입을 열었다.
"저는요? 뭘 하면 되겠습니까?"
강영후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네는 놈이 지상으로 끌려 내려왔을 때를 노리게."
기철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티르브링어를 쓸 수 없으니 파이어 드래곤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전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없었다.
다지보그의 써클렛이 있다고는 하나, 그거로는 파이어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이재우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을 끌어내릴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작살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 비늘을 뚫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제 능력으로는 구현화의 내구성에 한계가 있는지라......."
"그건 내가 도와주겠다."
강영후는 허리춤에 찬 그의 검, 고스트를 눈짓했고 이재우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그 검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안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폭탄이 터지는 것과는 좀 다른 종류의 폭발음이 들렸다. 공격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러자 저 멀리서 화염이 일직선으로 솟구치며 전투기들이 터져 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강영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온다!"
펜리르 부대원들은 신속히 제 위치로 향했다. 그러자 전투기들을 때려 부순 파이어 드래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아!"
파이어 드래곤의 울부짖음이 붉게 물든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강영후의 계산대로 놈은 몬스터 떼가 북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함정이 깔려 있는 대로로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화염을 토해놓았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엄청난 열기가 솟구쳐 사방에 아지랑이가 피어나 풍경이 흔들렸다.
그 현상을 교묘히 이용해 서지원은 파이어 드래곤이 눈치챌 수 없도록 놈이 날고 있는 곳을 허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고층 건물의 길목으로 연결했다.
"공간 왜곡!"
쑤욱!
파이어 드래곤의 거체가 일순 사라진다 싶더니만 느닷없이 고층 건물이 도로를 끼고 쌍둥이처럼 마주 보고 있는 위치로 나타났다.
파이어 드래곤이 어떤 술수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덩이들을 아래로 쏟아내었으나 정작 공격은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질풍신뢰!"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고덕화가 응축된 바람의 힘을 놈의 몸 위로 떨어트렸고 파이어 드래곤이 거대한 볼링공에라도 맞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러느라 고도가 낮아져 놈이 건물 사이로 날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허미래가 디버프를 시동했다.
"와이어!"
파아아아아아아아!
건물들 사이로 새파란 마력의 빛이 뻗어 나가며 파이어 드래곤의 기다란 모가지가 거기에 엉켰다.
분노한 파이어 드래곤이 발버둥을 치며 건물 벽에 발톱을 박으며 버텼다.
콰드드드득!
유리가 깨지고 콘크리트가 파열되며 그 잔해가 아래로 떨어졌다. 파이어 드래곤이 와이어를 감은 채 건물을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자 강영후가 신속히 자신이 몸에서 고스트를 뽑아냈다.
스르릉!
사람의 몸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그 검은 곧 이재우의 등에 가 박혔다.
"크악!"
이재우는 몸이 뚫리는 느낌에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으나 곧 흘러드는 마력의 힘을 느끼고 미리 작살을 그려두었던 종이를 하늘로 던졌다.
"작품명, 용 작살!"
파아아아아아앗!
종이 속에서 거대한 작살이 튀어나오자 김송근이 즉시 거대 분신을 만들어냈다.
"2분형, 거대 분신!"
그들이 이재우가 구현화 해낸 대형 작살을 낚아챘다. 그리고 있는 힘껏 어깨를 젖혀 팔을 뒤로 당겼다가 작살을 앞으로 쏘아냈다.
파슈-----------웃!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날아간 작살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