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82화 (281/297)

# 282

현질 전사

-12권 10화

계약서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계약 내용이 간단한 탓이었다.

100조 원이나 되는 돈을 지출하려니 계약서를 매우 상세하게 작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대식을 부려먹을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어야 할 터인지라 별로 읽어볼 것이 없었고, 정대식은 망설임 없이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에게 필요한 것은 레벨 업을 위한 돈이었다.

보수 운운한 것은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정대식은 대가를 요구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으나 이 일이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놈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니, 10원 땡전 한 푼 안 생긴다고 하더라도 싸워야 했다.

설령 그만한 능력이 없다고 해도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정대식은 신속히 서명한 계약서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장한나가 제자리에서 휴대폰을 이용해 계약서를 촬영하여 파일로 전송했다.

곧, 그녀가 정대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대식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의식으로 엔트로피를 불렀다.

'엔트로피.'

<예.>

'잔고 확인해봐.'

<예. 지금 막 500억이 입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총 잔액은 565조 원입니다.>

정대식은 마침내 만렙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사뭇 흥분했다. 그는 곧 장한나를 보고 말했다.

"놈들을 처치하러 가기 전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정대식이 또 무슨 요구를 하려 든다고 생각한 장한나가 짜증을 내며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대식이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놈들을 처치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정대식에게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레벨 9 때 겪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레벨 10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또 의식의 재조정이니 뭐니 하면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뻗어 있을 가능성이 크니, 그 사실을 알려두어야 했다.

화를 내려던 장한나는 좀 머쓱한 모습으로 말했다.

"물론 준비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서둘러 줘요."

정대식은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괜한 불안감만 조성할 뿐이라고 생각해 대신에 대비책을 일러두었다.

"만약 내 준비가 마쳐지기 전에 공격이 시작된다면, 전력을 다해 방어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 다섯 마리의 몬스터...... 새로운 5대 거신은 절대로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상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광필두와 기철민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여신급으로 진화할 수 있는 무구가 있으니, 내가 복귀하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상세한 지시에 장한나는 그렇게까지 준비가 오래 걸리냐고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대식이 어떤 방식으로 그 준비를 하려는지 몰랐다.

대신에 그 말을 총사령관에게 전해놓겠다고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정대식은 정신적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던 운동을 마저 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를 불러내 말했다.

"이곳 서울 시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지? 역시, 대통령 전용 방공호인가?"

정보망에 접속해 즉시 검색을 하고 천리안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그 장소를 꿰뚫어본 엔트로피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냐? 그럼 어딘데?"

<송시민의 패닉룸입니다.>

"송시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더라?"

<아마 공식 랭킹에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최희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송시민, 그 남자가 공식 랭킹 1위였어! 지금도 항상 10위권 내에 들잖아. 그자의 패닉룸이 대통령 방공호보다 안전하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럼 그건 어디 있는데?"

<그건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송시민, 그자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 *

정대식은 즉시 송시민이라는 그자를 만나러 갔다.

뜻밖에도 송시민은 정대식에게 몬스터 한 마리의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정대식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전 송시민입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정대식은 그가 송시민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송시민은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바가 그다지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 자체가 대중의 관심을 끄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이 별 볼 일 없다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오랫동안 공식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송시민의 능력은 방어막을 만들어내는 거였다.

그가 만들어낸 방어막은 그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그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지난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지방 소도시 하나를 혼자서 한 달 가까이 지켜낸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판매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국가 기물 금고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그가 한번 방어막을 만들어두면 일정 시간 동안은 그게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크기나 강도에 따라 유지 시간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철저한 안전이 필요할 땐 그의 능력만 한 게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여러 업적을 많이 쌓았다.

한국형 몬스터 방어 기기 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었으며, 손수 몬스터들의 침입에서 안전할 수 있는 패닉룸이나 세이프 하우스 사업을 벌여 보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파워 랭킹에선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도 공식 랭킹에서는 순위가 매우 높았다.

정대식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주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서 상당히 나이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송시민은 젊었고 이십 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대꾸했다.

"1차 몬스터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땐 나이가 어렸거든요. 저를 걱정한 부모님이 미디어 노출을 최대한 삼갔죠. 그래도 예전엔 절 좀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는 모양이네요."

"하여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뭘요, 제가 영광이죠."

"제가 당신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능력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패닉룸 말입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왜 패닉룸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정대식은 간략히 설명했다.

"저는 조만간 서울을 포위하고 있다는 5대 거신을 상대하러 가게 될 겁니다. 그걸 위해서는 다소 준비가 필요한데, 그동안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음, 마기전을 착용하고 있으니 완전히 무방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의식이 없는 상태일 거라는 거지요. 그러니 제게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는 당신의 능력을 빌려야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닉룸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대강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송시민의 질문에 정대식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적어도 몬스터들의 공세가 쏟아지기 전까지는 준비를 끝마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타이밍을 놓쳐 등장이 늦어진다면 사람들이 괜한 오해를 할 겁니다."

송시민은 그가 꾸물거리면 혼자 패닉룸으로 도망쳤다는 누명을 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정대식이야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으나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또 다르게 보일 터였다.

정대식은 그런 자잘한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기분으로 말했다.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패닉룸을 만들어드리죠."

송시민이 패닉룸으로 고른 곳은 짓다 만 공사장 한편에 있는 컨테이너였다.

"이 정도 크기면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송시민과 정대식은 컨테이너 룸 안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바깥에 내버렸다. 그리고 정대식은 컨테이너 안에 있으라 하고 그는 바깥으로 나갔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출입이 가능한 식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안전성은 완전 폐쇄가 더 뛰어나다고 했다.

"이 패닉룸은 그 어떤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겠지만 제가 사망할 경우에는 다릅니다. 즉시 배리어가 해제되어버려 평범한 컨테이너에 지나지 않게 될 테니까 곧장 밖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오는 방법은 평범합니다. 이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순 없어도 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준비를 끝마쳤을 때 그냥 문을 열고 나오시면 됩니다."

"예."

"그럼, 준비됐죠?"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컨테이너 문을 닫았다.

정대식은 컨테이너 바닥에 침낭을 깔고 거기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엔트로피를 불러내 말했다.

"어차피 업그레이드 중에는 너도 능력을 쓸 수 없겠지만, 네가 나와서 내 몸을 지켜봐 줘."

<알겠습니다.>

"시작되었군."

곧 컨테이너 전체가 우우우웅 떨렸다. 오래지 않아 은은한 빛이 컨테이너 벽면을 따라 번져나갔고, 이윽고 컨테이너의 모양 자체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덕분에 정대식은 엷은 푸른 빛을 띠는 직사각형의 상자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됐다.

정대식은 패닉룸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엔트로피를 향해 말했다.

"그럼, 우리도 시작해볼까? 엔트로피! 네크로맨서의 이끼망토, 굴라의 오브제, 라푸의 혓바닥, 일월의 눈을 판매해."

<네크로맨서의 이끼망토, 굴라의 오브제, 라푸의 혓바닥, 일월의 눈, 이 네 가지 아이템을 판매하고 599조 원을 획득합니다.>

"상점을 레벨 10으로 업그레이드 하겠다!"

<상점을 Lv10으로 업그레이드하고 1,000조 원을 차감합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지막지한 빛이 우주에서부터 떨어져 패닉룸을 뚫고 정대식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정대식은 레벨 9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마치 머리가 펑 터지고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느낌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악!"

Chapter 70. 서울 방어작전

사령부 일대에서는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곧 닥쳐들 재앙을 예감하고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은 기철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펜리르 부대원들과 함께 타이탄 공격대에 포함되어 배정받은 위치로 이동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광필두 역시도 끼어 있었다. 정대식이 그에게 7성 무구를 넘긴 만큼 강영후가 그를 임시로 휘하에 두기로 한 것이다.

타이탄 공격대가 도맡은 구역은 이번 전투의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서초 IC 일대였다.

여기에는 서울로 진입하는 고속도로가 바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층 건물이 즐비한 곳이기도 했다.

그 건물들을 엄폐물 삼아 작전을 진행하기로 하고 타이탄 공격대는 지프에 올라 강남으로 이동했다.

서울 시내의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고 있었기에 차는 평소에는 상상도 못 할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곳에선 이미 군인들이 와서 기본적인 방어 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방어작전에는 타이탄 공격대뿐만 아니라 매그넘 공격대, 십자군 공격대, 타노스 공격대, 8번 연합대, 12번 연합대가 같이 참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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