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81화 (280/297)

# 281

현질 전사

-12권 9화

정대식이 보통의 헌터와는 좀 다른 부류라는 사실을 진즉에 알아보기는 했다.

일반적인 헌터들은 최희 자신과 비슷했다. 강해지는 데서 삶의 보람을 찾고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데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부류 말이다.

그러나 정대식은 아니었다.

그는 강함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데도 강해졌고 남들이 모르는 목표가 있는 듯했다.

그게 뭔지 몰라서 줄곧 궁금했는데 결론은 돈이었던 것인가?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세상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에서 거론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기는 했다.

까놓고 말해서 엄청나게 속물적이었다.

그러나 정대식이 지적한 바는 매우 정확했다.

최희는 은연중에 그가 나서서 어떻게든 해주겠지 기대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를 무보수 영웅 취급을 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100조 원이면 엄청난 돈인데 과연 정부에서 네 조건을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세상을 구하는데 100조 원이면 엄청나게 싼 거죠. 맘 같아선 더 부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재건에 막대한 돈이 들어갈 테니까 참은 겁니다."

"......."

최희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가버렸다.

강영후도 그에게 가벼운 눈인사만 건네고 멀어졌고, 김승수와 박희진은 정대식을 천하의 쓰레기 보듯 하며 지나쳤다.

남은 것은 정대식이 모르는 인물이었는데, 회의하는 도중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만 갑자기 정대식에게 다가와 말했다.

"개중 한 마리쯤은 제가 낼 수 있습니다."

"예?"

"한 마리 정도는 낼 수 있다는 겁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지 않나요?"

"기부금이라 생각해요."

그는 그렇게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놓고 가버렸다.

정대식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잠자코 뒷전에 서 있던 엔트로피와 발길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게 되자 엔트로피가 말을 걸어왔다.

<보수를 요구한 것은 역시, 만렙 달성을 위해서입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10레벨이 되기 위해서는 정확히 401조 원이 모자라. 사냥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으니, 그걸 보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요구한 거지."

<과연, 401조나 되는 돈을 융통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해봐야 아는 일이고."

* * *

정대식은 무료급식소에서 늦은 식사를 했다.

용감한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줄곧 음식을 만들어 배식하고 있었기에, 아무 때나 가서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정대식이 막사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상대는 다름 아닌 장한나였다.

그녀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더니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보수를 요구하셨다고요."

정대식은 미역국을 후룩거리고 들이킨 뒤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장한나는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마리에 100조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도대체 얼마만 한 돈인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이에요?"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장한나는 주위에서 누가 듣든 말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봐요, 정대식 씨. 당신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올인원이에요. 당신이 가진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있는 거예요. 왜 신께서 당신의 존재를 내려보냈다고 생각해요? 그건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작금의 사태는 정대식 씨의 임무라고요!"

정대식은 장한나가 늘어놓는 장황한 말을 딱 자르고 본론을 꺼내 놓았다.

"마리당 100조 원, 현금으로, 선불이어야 합니다."

장한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기함을 했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그만한 돈을 어디서 갑자기 만들어내 입금하라는 거예요? 그 정도의 돈이 들어갈 통장이 있기는 해요?"

"참고로 나는 마리당 요구를 한 겁니다. 입금되는 금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몬스터를 쓰러트릴 수 있죠."

장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고 말했다.

"세상을 구한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였군요."

"전해 들었나 보군요. 그래요, 맞습니다. 난 한국만 구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구든 보수를 지불하면 날아가서 몬스터를 처치해줄 겁니다."

지금 국가적 재난에 처해 국가 파탄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멸망을 예감하고 있는 곳은 한반도뿐만이 아닐 것이다.

미국을 비롯해 중국, 유럽,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등...... 전 세계가 사방에 넘쳐나는 강력한 몬스터들로 경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정대식은 그 모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할 수 있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최소 18성급 이상 되는 몬스터들이 정확히 몇 마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한 현금을 당장에 마련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난리가 일어난 시점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과 같이 거대 자본을 가진 나라들은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내가 간다 말하고 돈을 끌어오세요. 내 명의로 된 통장에, 그러니까 전산상에 그 금액이 찍히기만 하면 됩니다."

장한나는 정대식의 말이 좀 묘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또렷하게 잡아낼 수 없었다.

대신에 정대식의 요구가 그렇게까지 황당무계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장한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당신의 요구조건은 알겠어요. 일단, 기다리세요."

그녀는 무료급식소를 떠났고 정대식은 식사를 마저 마쳤다. 배를 불리고 나서 소화를 위해 산책을 조금 하며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서울 방어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각성자들은 어수선해 보였다. 계영일은 아직까지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으나, 서울 주변으로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었나 보았다.

"들었어? 서울이 포위됐다던데."

"그럼 지금까지 잠잠한 이유가 MFP 때문이 아니었던 거야?"

"그런 부실하게 생긴 기계가 무슨 힘이 그리 있겠어? 핵무기도 그놈들한테는 별 소용이 없다고."

"몬스터들이 몽땅 몰려들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군."

"내일이면 우리 다 몬스터 뱃속에 들어가 있는 거 아냐?"

불안을 잊기 위한 자조 섞인 농담을 흘려들으며 걷다가 정대식은 어린이 공원 한구석에서 몸을 단련하고 있는 광필두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 곁엔 기철민이 있었다.

기철민이 광필두에게 무어라고 떠들고 있었는데 그는 그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정대식은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큼성큼 광필두에게로 다가갔고 기철민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어, 대장님!"

정대식은 그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 뒤늦게 몸을 일으키는 광필두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마갑을 꺼내어 던져주었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든 광필두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조금 크게 떴고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기철민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겁니까?"

정대식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듀라한이 사망했다."

"예?"

기철민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정대식은 계속 말했다.

"러시아가 몬스터들의 손아귀에 넘어간 모양이다. 끝까지 저항하던 듀라한은 피난민을 지키려다 당했다는군. 그가 죽기 전에 부하를 보내서 나에게 이것을 맡겼다."

광필두는 묘한 표정으로 마갑을 어루만졌다.

그로선 기분이 이상할 만도 했다.

그는 그것을 가지러 갔다가 정대식을 맞닥뜨렸고 패배했다.

그로 인해 7성 무구를 몽땅 빼앗겼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7성 무구를 갖게 되었어도 마갑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데 듀라한의 사망으로 인해 그것을 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철민은 잠시 죽은 이를 상기하며 침울한 표정이 됐다. 그리고 곧 염려스러운 기색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이것을 광필두에게 줘도 되는 겁니까? 그럼 7성 무구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셈인데......."

정대식은 단언했다.

"7성 무구의 완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내 뜻을 어길 수 없어. 무엇보다 정신머리가 붙어있는 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려 들지는 않겠지. 7성 무구를 가지고 달아나 봤자 맞닥뜨릴 것은 어차피 몬스터뿐일 테니까. 그리고......."

정대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광필두를 훑어보았다. 그건 일종의 도발인 셈이었다.

"7성 무구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진화한다는 보장은 없지."

광필두는 침묵했고 정대식은 기철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다."

"예?"

기철민이 어리둥절해 하며 반문하자 정대식이 말했다.

"네가 갖고 있는 티르브링어 또한 진화가 다 끝나지 않았다."

기철민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다가 황급히 반문했다.

"하지만 티르브링어는 날이 부러져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체르노보그가 그걸 완전히 망가트리지 않았습니까?"

"글쎄......."

정대식이 보기에 손잡이만 남아 있는 티르브링어의 상태는 좀 묘했다.

티르브링어가 여신급으로 진화가 가능한 무기라면 그리 손쉽게 망가질 리가 없었다.

여신급 무기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을 뜻한다.

제아무리 체르노보그의 발에 밟히고 궁니르와 부딪친 충격에 부서졌다고 해도 손잡이만은 멀쩡한 게, 아무래도 망가진 게 아닌 것 같았다.

업그레이드된 감정 스킬을 사용해 보면 확실히 알겠지만, 티르브링어는 이제 정대식의 손을 떠난 무기다.

기철민이라면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정대식은 여지만을 남겨두었다.

"그게 정말로 여신급의 무기라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실제로 날이 망가졌을 뿐, 그 외에는 멀쩡하니까."

기철민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고 정대식은 그 자리를 떠났다.

장한나가 어떤 결과를 들고 나타날지는 모르겠으나 서울을 포위하고 있다는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광필두와 기철민이 진화를 이루어내기를 바랐다.

* * *

장한나는 썩 마음에 드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로 인해 라스베이거스에서 당한 게 있었으므로 아무리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는 사이라 해도 곱게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정대식을 오래 붙잡아 놓은 만큼 수완만큼은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곳에서 얼마만 한 직책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정대식이 요구하는 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오랜만에 체육관에서 기초 체력 단련을 하고 있던 정대식은 입구에 장한나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녀는 또각또각 걸어와 정대식에게 두툼한 계약서 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당신이 서명해야 할 계약서예요."

"그래요?"

그걸 받아들고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장한나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총 다섯 부예요. 당신이 서명만 하면 즉시 500조 원이 입금될 거예요. 정확히 서울을 포위하고 있는 15성급 이상의 몬스터 수와 일치해요."

"놈들의 정체가 파악이 됐나 보죠?"

"투시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서 살펴본 결과, 놈들은 의정부, 구리, 성남, 과천, 부천 방향에 있어요. 보아하니 개성이 참 남부럽지 않은 수준이더군요. 지금은 각자의 위치에서 머무르고 있는 상태예요. 하지만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놈들이 서울로 진입하기 전에 서명을 하는 편이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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