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현질 전사
-12권 3화
그것은 대단한 장관이었다.
허공에 푸른빛의 마력이 물결치는 가운데 폭포처럼 흐르는 방어막 위로 마력의 빛이 눈부시게 터져 올랐다.
하지만 정작 그 방어막을 펼치고 있는 광필두는 그 광경을 감상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연거푸 들이닥치는 파괴력을 막아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 핏대까지 세운 채로 광필두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가!'
15성급 몬스터를 단번에 처치할 만한 파괴력은 그 여파조차도 엄청났다.
정대식이 가급적 전력을 다하지 않으려는 게 이해가 갔다.
그가 전력을 다했다가는 몬스터가 끼치는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낳을 터였다.
'만약에 이 공격을 직접 맞았더라면 나 정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군......! 심지어 7성 무구조차 압도하는 파괴력이다!'
7성 무구를 완성하여 여신급으로 진화를 시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정대식에게 대적하기는커녕 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을 터였다.
그제야 광필두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토록 배척하고 두려워했던 게 조금쯤 이해가 갔다.
다른 자들의 눈에는 이능 파괴 능력이 지금 정대식이 가진 능력만큼이나 압도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본능적인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신이나 다름없는 힘을 가진 정대식을 보는 기분이 딱 그랬다.
광필두는 그가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새삼 알았다.
만약 그가 파괴자를 자처했더라면 몬스터 브레이크가 없이도 인류 멸망은 정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 *
라푸를 처치하고 정대식은 라푸의 혓바닥과 일월의 눈이라는 아이템을 얻었다.
일단 그것을 아공간에 털어 넣어 놓고 정대식은 뭔지 모를 허기로 요정의 빵 하나를 구입해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갑자기 다량의 마력을 써 버렸더니 속이 좀 허했다. 실제로는 써버린 마력이 라푸의 생명력을 흡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으나 기분상 그랬다는 말이다.
정대식은 에너지 바를 하나 더 까먹고 광필두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방패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놓고 바닥에 대 자로 뻗은 상태였다.
마괴결의 남은 에너지를 상쇄시키는 데 모든 힘을 다 써버리고 탈진한 모양새였다. 정대식은 그런 그의 다리를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일어나,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
광필두는 부스스 일어나 앉아서 말했다.
"엄청난 파괴력이군."
정대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다시피 마냥 좋지만은 않아. 파괴력이 지나쳐서 몬스터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그치지 않으니까."
"더 강한 몬스터가 나타나면, 더 강한 마력으로 응수하겠지?"
"16성이나 17성급이 나타나면 그리되겠지."
"그만한 놈들이 나타날 거라고 보는가?"
"말했을 텐데, 최후의 전쟁이라고."
광필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정대식의 말속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네게 그만한 힘이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군. 말하는 투로 봐서는 오래전부터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정대식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말해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광필두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에 말했다.
"지금의 나로선 여기까지다."
"뭐?"
"네가 더 큰 파괴력을 쓴다면 내가 막아줄 수 없다는 말이다. 마갑이 필요해. 7성 무구를 완성해야 한다."
광필두가 하는 말에 정대식은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이보다 더한 몬스터가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 어쨌든, 지금은 이동해야 한다."
두 사람은 터벅터벅 걸어 아무것도 없는 장소를 벗어났다.
간신히 문명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게 나타날 만한 지점에서 그들은 펜리르 부대원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벌인 일에 약간 기가 죽은 기색이었다.
나름대로 실력을 쌓았다고는 하나 15성급 몬스터 앞에서 아무 맥을 못 춘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기철민 같은 경우에는 표정이 매우 안 좋았다. 티르브링어가 있었더라면 그 역시 한몫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을 광필두에게 빼앗긴 셈이나 다름없어, 자책과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러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광필두가 나타나자 제 것이 아니라는 듯, 딜라이트 소드를 순순히 돌려주었다. 그리고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정대식을 맞아들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광경이었어요."
질세라 다른 부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해댔다. 다들 엄청났다는 소감을 늘어놓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무리의 지프가 나타났다.
그 차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제자리에 섰고, 곧 거기서 여러 명의 각성자들이 하차했다.
중무장을 한 모습이 아마도 라푸의 출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개중에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대식과...... 펜리르 부대원들입니까?"
정대식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당신들은?"
"나는 구 이슈타르 공격대의 대표인 하중일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하중일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가 뒤쪽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뉴 프로젝의 공대장인 최범수와 A급 헌터인 김남준이고...... 그러니까 우리는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해서 임시로 조직된 연합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예. 그렇군요."
"전투기들을 몽땅 집어삼키는 엄청난 놈이 나타났다기에 케르베로스를 떼로 상대하다가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당신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15성급으로 짐작되는 그 몬스터는 처치를 했습니다."
"저희도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정말이지, 뭐라고 말로 할 수가 없군요. 15성급이라고요?"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굉장하군요. 체르노보그가 15성급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말로 그놈을 쓰러트린 게 맞는군요."
"예.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정대식의 질문에 하중일이 간략히 설명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서울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이 굴라를 처치해준 덕분이었습니다. 타이탄 공격대를 비롯하여 최희와 우리와 같이 은퇴한 헌터들,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실력자들까지 총출동해 활약한 덕분에 서울로 진입하려던 여러 주요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서울 주요 길목에 MFP라고 하던가요? 몬스터 접근을 저지하는 장치를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잡몹들이 아직 시가지에서 설치는 중이기는 합니다만 그거야 오래지 않아 정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종합대책반은요?"
"대통령 지시로 헌협 부회장인 계영일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그가 작전지휘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종합대책반은 전면에서 물러나 대민지원과 후방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사령본부는 어디 있습니까?"
"광화문 광장에 설치되었다고 하더군요. 현재 서울 인근에 있는 모든 공격대의 공대장과 C급 이상 헌터들이 사령부로 소환 명령을 받았습니다. 물론 올인원인 정대식 당신도 가야 합니다."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사령부로 가야겠군요."
"예, 저희와 함께 가시죠. 부대원들도 서울까지 함께 이동하면 될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하중일은 산만한 시선으로 부대원들 뒤쪽에 멀찍이 선 광필두를 쳐다봤다.
"그런데 저기 저 사람은 광필두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도주한 거 아녔나요? 7성 무구를 당신에게 뺏겼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 지금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만."
"제가 도로 붙잡아 놨습니다. 7성 무구를 돌려준 것도 저고요."
"예?"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지요."
정대식은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광필두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간략히 설명했다.
하중일은 이능 파괴라는 위험한 능력자를 특급 각성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사령부로 데려간다는데 굉장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러나 정대식은 앞으로 무슨 작전을 세우든지 간에 반드시 그의 능력이 필요하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한편으로는 광필두가 결코 허튼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보증했다.
어쨌든 정대식이 광필두를 두 번이나 붙잡은 전적이 있으니 책임을 질 수 있을 터였다.
하중일은 광필두와 함께 사령부로 가는 것에 동의했다.
곧, 차량이 서울로 진입했다.
* * *
서울 일대에 설치된 MFP 주위로는 무장한 군인들이 쫙 깔려있었다.
도로 대부분이 폐쇄되어 있었고 탱크가 무슨 버스만큼이나 흔하게 널려 있었다.
정대식은 그 광경을 보고 회의적인 기분을 느꼈다. 제아무리 MFP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는 것 정도의 역할 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것도 어디까지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상황이 시작되면 군인들의 목숨이나 막대한 비용의 장비들은 한낱 휴짓조각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군인들만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 근교에서 몬스터들과 일전을 치른 각성자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었다.
군대가 급히 차린 방어 진지 주변으로는 각성자들이 바글거렸다. 그러나 벌써 몬스터와 한바탕 전투를 벌인지라 하나같이 피로에 절어 있거나 부상을 당해 있었다. 던전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헌터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즐비한 시가지로 들어가자 일반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사방에 널린 몬스터 시체를 넘어 새로이 배정된 대피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각기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많았고 한강 다리 주변으로는 극심한 정체가 빚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어디로 간들 서울 내에 있을 수밖에는 없는지라, 사실상 큰 의미가 없는 이동이었다.
그나마 서울 시민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하중일이 설명했다.
"방어에 성공한 곳은 서울밖에는 없어요. 나머지 광역 도시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내륙에 있는 도시들의 피해가 심해서 사람들이 다들 해안가로 피난을 가고 있는가 본데, 그 길조차 몬스터 천지인지라...... 정부에서 서울 외 다른 지역을 버린 게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나마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공격대들이 나서서 안전한 곳에 대피소를 설치하고 그곳으로의 피난을 돕고는 있습니다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죠. 듣자 하니 10성급 몬스터는 아주 우습게 발견이 된다더군요. 10성급을 훌쩍 넘는 것으로 보이는 몬스터들도 간혹 눈에 띈다고 합니다."
하중일이 하는 말에 정대식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노라니 그가 탄식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하중일은 그 연배에 걸맞게 1차 몬스터 브레이크 때 활약했던 헌터 중의 한 명이었다.
강철우처럼 그렇게까지 유명인사는 아니었으나 잔뼈가 굵은 헌터들이라면 으레 그의 얼굴을 알아봄 직했다.
한때는 공격대를 운명하기도 하고 각성자 연맹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은퇴한 상태였는데, 대규모 몬스터 브레이크로 인해 다시금 무기를 잡고 필드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하중일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싸울 만큼 싸웠다 싶어서 은퇴한 지가 이년 정도 돼갑니다. 전원에 짓고 있던 주택이 완성되기 직전이라 그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버리다니. 인생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