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현질 전사
-11권 24화
이 난리통 속에서 제아무리 광필두라도 궁니르 하나를 가지고는 무슨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은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게 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철민은 말했다.
"제 장비를 도로 받아야겠는데요."
"오크들 정리가 끝나면 펜리르 부대원들이 돌아올 거야. 다시 무장을 갖추고 그들이 돌아오면 합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팔용대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강영후와 최희를 보고 묵례를 해 보이더니 강영후의 귓속에다 무슨 말을 속닥거렸다.
그러자 강영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그게 정말인가?"
"예."
팔용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희가 짜증 난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니, 왜 사람을 앞에 두고 귓속말을 해?"
애써 귓속말을 한 팔용대의 노력이 무색하게 강영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서울 근교에 광필두로 짐작되는 자가 나타났다는군."
"광필두가?"
최희가 오만상을 쓰며 질문하자 강영후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데 7성 무구를 다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기철민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어떻게? 7성 무구 중 다섯 개는 대장님이 갖고 갔는데요?"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강영후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지."
최희가 곧장 말을 받았다.
"정대식이 7성 무구를 광필두에게 넘겨주었든지, 아니면...... 빼앗겼든지."
전자도 후자도 큰 파란이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
기철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 * *
"후우."
광필두는 숨을 몰아쉬며 딜라이트 소드를 옆으로 뿌렸다.
그것만으로도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몬스터의 피와 살점이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7성 무구를 다섯 개나 두르고 싸운 덕분에, 그는 눈곱만큼도 다치지 않았으나 밀려드는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스켈을 쓰러트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계속해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이 끝이 없었다.
하늘 위에 그리폰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광경을 보아하니, 이러다 정말로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광필두는 피곤함을 추스르고 검과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끼륵거리고 뛰어가는 고블린 한 무리를 처치하고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고가로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이 보였다.
우르르르...... 쾅! 쾅쾅!
도로가 폭삭 주저앉는 것을 보고 광필두는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아스팔트와 건물들을 뚫고 거대한 머리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괴하게 생긴 이무기였다.
헌터들이 간혹 교룡이라고도 부르는 종류였는데, 되다 만 드래곤처럼 생긴 놈이었다.
지하를 파고 온 것인지 하수도를 파고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지상으로 튀어나온 놈이 무너진 고가로의 잔해를 타고 도로 위로 기어올랐다.
광필두는 그놈의 반질반질한 몸뚱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몸에 군데군데 허물 찌꺼기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방금 몸집을 불린 것이 틀림없었다.
던전에서 기어 나온 몬스터가 허물을 벗을 정도면 얼마나 많은 영양분을 섭취한 것인지 알 만했다.
아마 허물 벗기를 위해서 지하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배가 고파 다시 지상으로 기어 나온 게 분명했다.
광필두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퍼버버버버버버벙!
교룡에게 가 부딪친 엘브스가 터져 오르며 굉음을 울렸다.
교룡은 느닷없는 공격에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취리리리리리!"
갓 만들어진 비늘이 몽땅 깨부숴지고 허리춤이 움푹 패 뼈가 드러날 지경이 된 교룡은 분노에 차서 비늘을 세웠다.
교룡은 날개가 없어 하늘을 날지는 못하지만 드래곤보다 훨씬 더 굵직한 네 다리와 어마어마한 길이의 꼬리를 갖고 있었다.
교룡은 광필두를 발견하고 곧장 그것을 휘둘러왔다.
촤아아아아아아악!
광필두는 달리다 말고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궁니르를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꼬리가 자신을 때리는 것을 견뎌냈다.
온몸이 거대한 채찍으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잠깐이었다.
갑옷이 충격을 상쇄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교룡의 꼬리가 광필두를 칭칭 휘감아왔다.
광필두는 순순히 그 꼬리에 잡혀서 허공으로 들렸다.
"취아아아악!"
광필두를 집어삼키려고 교룡이 입을 쩍 벌리는 순간. 광필두는 전신에 힘을 줬다.
아머가 찬란한 빛을 뿌리며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꼬리가 후두두 끊어져 버렸고, 광필두는 곧장 교룡의 아구창으로 떨어지며 검과 창을 한꺼번에 휘둘렀다.
파아아아아아아앗!
광필두가 다시금 지상에 안착했을 때 교룡은 머리부터 모가지까지가 두 짝으로 갈라져 있었다.
교룡의 시체가 도로 위로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시커먼 피가 악취를 풍기며 사방팔방으로 흘렀다.
광필두는 강물처럼 밀려드는 피를 피해 발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쪽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온 것인지 특정 공격대원으로 보이는 각성자들 서너 명이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아니?"
"방금...... 저 사람이 이걸 혼자 쓰러트린 거야?"
"무려 6성급은 되는 몬스터인데!"
광필두는 6성급밖에는 안 되는 몬스터라 금방 죽일 수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런 그를 보고 공격대원들 중 한 사람이 손가락질을 했다.
"앗! 저 사람...... 나 저 사람 아는데! 광필두 아냐?"
"뭐? 광필두라고?"
"설마......."
"그러고 보니 무구가 낯익잖아!"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더니만 개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 진짜 광필두입니까?"
광필두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도,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광필두의 정체를 알아차린 각성자들의 낯빛이 희게 변했다.
그가 이능 파괴자라는 것을 만천하가 알고 있으니 그를 가까이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도주한 공공의 적이니 각성자라면 마땅히 나서 체포해야 옳겠지만, 다들 그럴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해, 광필두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쉬아아아악!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만 누군가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곧장 자리에 바로 서는 인물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광필두가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곱씹는 사이, 상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진짜로 여기 있었군."
광필두가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이를 갈며 광필두를 쏘아보았다.
"지난번엔 내가 꽤 신세를 졌지?"
그제야 그자의 이름이 생각이 났다.
그가 기철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광필두가 말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빨리도 회복했어."
"그럼 그대로 얌전히 죽어 자빠져 있을 줄 알았냐?"
기철민은 이를 득득 갈며 말을 이었다.
"오늘에야말로 네놈에게 쓴맛을 보여주겠다."
광필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수로? 네 무구도 망가졌을 텐데."
"티르브링어 없으면 못 싸울 줄 알고?"
사실을 말하자면 광필두가 옳았다.
티르브링어 없이는 광필두의 상대가 안 됐다.
궁니르 하나라면 모를까, 7성 무구 중 여섯 개를 가지고 있으니 불가능했다.
물론 기철민에게도 탈라리아라든지 체르노보그의 던전에서 획득한 다지보그의 써클렛 따위가 있었으나 그것은 보조적인 무기에 불과했다.
기철민의 큰소리가 허풍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선뜻 덤벼들지 못했다.
그 사이에 펜리르의 다른 부대원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고덕화와 허미래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허공을 날아온 그들은 광필두를 겹겹으로 둘러싸고 말했다.
"이번에 도망치려면 펜리르 부대 전원을 상대해야 할 거다!"
김송근이 외치는 말에 뒤이어 고덕화가 그에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그 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어.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난 거지?"
그가 말하는 그거는 7성 무구를 이르는 말이었다.
광필두는 자신이 장착하고 있는 7성 무구를 한번 내려다보고 말했다.
"받았다."
"누구한테서?"
허미래가 불안한 목소리로 당연한 말을 물었고, 광필두는 간단히 답했다.
"정대식한테서."
그 말에 이재우가 고함을 질렀다.
"그럴 리가 없어! 왜 네놈에게 우리 대장님이 그걸 다시 돌려준단 말이야?"
기철민이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다시 내놓아야 할 거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지원이 나섰다.
"공간 분리!"
광필두는 움찔했다.
그가 서 있는 자리 주변으로 기묘한 위화감이 찾아들었다.
마치 결계에 갇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실제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졌다.
시험 삼아 광필두는 궁니르를 내뻗어 휘휘 저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궁니르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어떤 공간을 넘어가지 못했다.
저번에 펜리르 부대와 싸웠을 땐 서지원이 없었으므로, 광필두는 성가신 능력을 가진 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짜증을 느끼고 말했다.
"지금 사방에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졌다는데 네놈들은 참 한가하기도 하군. 겨우 나 하나를 잡으러 부대원들이 총출동하고 말이야."
광필두가 하는 말에 기철민이 버럭 했다.
"너 하나 잡자고 우리가 전부 몰려왔을까 봐? 우리는 이쪽에 있는 매그넘 공격대의 지원 요청을 받고 온 거다. 저 교룡을 처치하려고 말이야! 그런데 운 좋게도 여기에 네가 있었다는 거지."
"그럼 내가 저 교룡을 처치했다는 사실도 알겠군. 그렇다면 굳이 나와 싸울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건......!"
"지금은 우리끼리 치고받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광필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땅이 우두두두 떨렸다.
고개를 돌리자 건물과 도로를 타고 엄청난 숫자의 쥐 떼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보통 쥐 떼가 아니었다.
던전에서나 볼 수 있는 지옥 쥐였다.
그들 뒤를 따라 지옥 개 같은 놈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지옥 야수나 케르베로스도 있다는 말이었다.
오래지 않아 놈이 나타날 가능성이 컸으므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제기랄!"
기철민이 갈피를 못 잡고 욕설을 지껄이던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르르르!
갑자기 허공에서 흰색의 새와 같은 것들이 우르르 날아왔다.
그것의 형체가 일반적인 새는 아니었다.
까마귀만큼 커다란 날개에 커다란 주둥이와 꼬리만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몬스터가 떼로 나타난 줄 알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새들이 쥐 떼들을 덮쳐들더니 놈들을 모조리 잡아먹기 시작했다.
새떼가 쥐 떼를 쓸어버리고 남은 것은 지옥 개들이었는데, 오래지 않아 지상에서도 지옥 개와 맞먹을 만한 기이한 생명체들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머리통에 큰 입만 붙어 있는 놈들은 놀라서 멍하게 선 공격대원들을 스쳐 지나가 지옥 개들을 덮쳐들었다.
곧 자기들끼리 격렬하게 싸움이 붙었고, 이게 당최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노라니 허공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다들 몰려선 채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대원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앉는 인물을 발견하고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