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현질 전사
-11권 15화
기철민은 몇 개의 기사를 더 훑어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강영후가 나타나 그런 그를 보고 말을 붙였다.
"어째 염려가 많아 보이는 얼굴이군."
"아, 공대장님."
기철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강영후는 그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각성자 조직실의 장한나와 정부 산하의 각성자 범죄 전담반의 조사관들이었다.
기철민은 그들과 악수를 나누고 강영후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기철민은 정대식이 줬던 디멘션 포켓 안 속박의 구슬을 꺼냈다.
그걸 조사관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 안에 광필두가 감금되어 있습니다."
조사관들은 엄중한 봉인이 설치되어 있을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속박의 구슬을 집어넣고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먼 러시아 땅에까지 가서 큰일을 해내셨군요."
"아닙니다. 제가 잡은 것도 아니고......."
"현상금 100억 원은 조만간 지급이 될 겁니다. 축하합니다."
강영후는 상자가 안전하게 잠기는 것을 보고 장한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전번 하와이 원정 일을 잘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영후의 인사말을 듣고 장한나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강영후가 정대식이 하와이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일의 대가를 받아내느라고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닦달한 탓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장한나는 피로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 마땅히 처리해야 할 일이었지요."
"그래서 말인데,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러시아 일은 어떻게 처리가 되었습니까?"
펜리르 부대의 임시 대장직을 떠맡게 된 기철민은 유럽의 포탈을 통해 귀국하자마자 강영후를 찾아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고하고 도움을 구했다.
강영후는 그 길로 장한나를 찾아가서 블라디미르 대령을 죽인 일을 무마하고 체르노보그를 처치한 대가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아닌지, 장한나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러시아 측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어요."
"반응이 없다고요?"
"아마 이 일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을 거예요."
"몬스터 브레이크 때문입니까?"
"그렇지요."
오랫동안 체르노보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데다가 방사능의 여파도 남아있는지라 체르노보그가 없어졌다 해서 당장에 러시아의 상황이 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연달아 벌어지는 새 던전의 출현과 산발적 몬스터 브레이크 현상으로 러시아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듣기로는 시베리아에서 거대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 각 도시를 방어하는 데만도 벅찬 모양이더군요. 정부군이 서부 쪽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아이러니하게도 남부는 반군들이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어요. 지금 러시아 접경 지역에서는 러시아에서 탈출한 피난민들로 혼잡하다고 하더라고요. 유럽 연합과 유엔에서 러시아에 지원군을 보낼 작정이라는데, 각성자들이 가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지요. 각성자 연맹에서 러시아에 파견할 공격대를 조직해본다고는 하는데, 전 세계가 난리인지라 러시아까지 갈 인원이 있을지는 미지수예요."
"그렇담 당분간 그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요."
기철민의 말에 장한나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사실상 걱정해야 할 것은 그 일이 아니라 다른 문제 아닌가요?"
기철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 말입니까?"
장한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정말로 정대식 씨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겁니까?"
기철민은 솟구치는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없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정대식 씨가 펜리르 부대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부하들을 전부 내팽개치고 혼자서 7성 무구를 가진 채로 종적을 감추었단 말인가요?"
"단어 선택이 참 듣기 거북하군요. 부하들을 내팽개쳤다니."
"사실 심각한 것은 그 뒤의 말이지요.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우리 정부나 각성자 연맹, 헌터 협회 측에서는 이 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허락도 없이 대장님을 장기말로 이용할 땐 언제고, 실컷 광필두를 잡아다 주니까 거기에 대한 감사는 못 할망정, 그 저의를 의심하는 것입니까?"
"정말로 다른 뜻이 없다면 왜 나타나지 않는 거죠?"
"당신들이 이따위로 굴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아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게다가 7성 무구를 넘겨다 주면, 그걸 안전하게 지킬 자신은 있는 겁니까? 블라디미르 대령처럼 7성 무구를 노리고 나타날 자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뢰 하나도 지키지 못해 그 난리를 쳐놓고 무슨 배짱으로 다섯 개나 되는 7성 무구를 가져가겠다는 거죠?"
"이보세요,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어요. 정대식 씨의 도움뿐만 아니라 7성 무구의 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핑계를 대든 지 간에 지금 정대식 씨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가 없어요."
"대장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분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의를 의심하고 무구를 빼앗을 생각부터 하는 게 아니라요."
논쟁이 격해지자 강영후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그만 들 합시다. 정부에서 우려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장한나는 입을 다물었고 강영후가 그녀의 속내를 꿰뚫었다.
"솔직히 말하지요. 정부에서는 정대식이 제2의 광필두가 될까 봐 염려하는 게 아닙니까. 그나마 광필두에게는 대적할 만한 상대라도 있었지 정대식이 허튼 생각을 품는다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7성 무구가 없다고 한들, 15성급 몬스터를 혼자 쓰러트릴 만한 실력의 정대식을 누가 막겠습니까? 펜리르 부대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에겐 이미 마기전이라는 여신급의 무구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7성 무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7성 무구를 갖고 행적을 감춘 것은 오히려 그것을 지키기 위함일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보다......."
강영후는 서류 봉투에서 인쇄된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장한나는 그걸 보고 놀라는 대신에 팔짱을 까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강영후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정대식은 어제 교차로 한복판에 생겨난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로부터 시민을 지켰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든,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만을 쫓지는 않는단 증거죠."
사진에 찍혀 있는 것은 몬스터들과 싸우는 정대식의 모습이었다.
일전에 정대식이 시가지 한복판에 나타난 던전의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CCTV나 행인의 휴대폰 카메라로 여러 장의 사진이 찍혔던 것이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몬스터들을 일소했을 뿐만 아니라, 교차로에 나타났던 던전까지 완전 파괴를 했다고 합니다."
장한나는 할 말이 없어진 표정이었다.
강영후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정부 관계자인 그녀가 모를 리 없을 터.
장한나는 별수 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늘어트리고 말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정대식 씨의 행방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가 던전을 폐쇄할 수 있다면 우리도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시가지 가까이에 생겨난 던전들을 닫아서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전면적인 몬스터 브레이크에서 인명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글쎄요...... 제 생각에 이건 정대식이니까 가능한 일 같습니다. 그에게 방법을 물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미 정대식은 몬스터들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획득했습니다. 그의 활약 덕분에 하와이 방어 기지가 보유하고 있는 MFP 제작 기술을 보급받지 않았습니까? MFP를 대량 생산을 서두르는 쪽이 더 현실적이라고 보여집니다만."
장한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정대식 씨가 대한민국 소속의 각성자인 이상, 국가에 귀속된 몸이에요. 정부와 연맹, 그리고 협회의 지시에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에 그가 회수한 7성 무구를 국가에 반납하고 몬스터 재난관리실의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강영후는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장한나는 조사관들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기철민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강영후에게 물었다.
"이상하군요. 집요하다 싶을 만큼 7성 무구의 획득에 집착하는데요."
강영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마 누군가의 압력이 있는 거겠지."
"누구 말입니까?"
"어떻게든 7성 무구를 손에 넣고 싶은 고위 관리자...... 라고 해야 할까?"
강영후는 짚이는 데가 있는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몬스터의 난립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각성자의 지위도 올라갈 것이고 큰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형국이 되겠지. 만약에 지금의 산발적 몬스터 브레이크가 1차 몬스터 브레이크를 능가하는 대규모 몬스터 브레이크가 된다면, 세계의 모습은 크게 변화하게 될 거야."
"각성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기철민의 질문에 강영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문제는 야욕에 눈이 멀어버린 나머지 코앞에 닥친 일을 못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7성 무구든 무엇이든, 힘을 놓고 각성자들끼리 반목하는 이상 닥치게 될 재앙에서 인류를 구원하지는 못할 거야."
기철민은 강영후의 말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끼고 말했다.
"각성자들끼리의 반목이라면, 설마 공대장님은 정부나 연맹 등에서 정대식을...... 그러니까 대장님을 배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7성 무구와 엮어 그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유가 뭐겠어? 누구보다 강대한 힘을 갖고 있는 그가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거지."
"허, 참."
혀를 찬 기철민은 분개에 차서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작금의 상황에서 믿을 데라고는 그분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대규모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보니, 어쩌면 전에 없던 올인원의 존재가 나타난 이유가 이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지만 그만큼 그의 강대한 힘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을 거라는 말이지. 일각에서는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보다 그를 더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을 거야. 내 억측이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을지도 몰라."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철민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했지만, 강영후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은 그만큼 두려움도 많은 법.
실제로 기철민은 그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광필두의 경우다.
그가 7성 무구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 연맹과 협회 측의 반응은 그야말로 신경질적이었다.
광필두가 7성 무구를 모아서 세계를 멸망시킬 거라고 공언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그가 그것을 모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능 파괴의 능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