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61화 (260/297)

# 261

현질 전사

-11권 13화

아직까지는 그게 누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갑을 소유하고 있고, 체르노보그를 처치하러 가는 길에 도움을 준 데다가 정대식에게 신세 진 것이 있는 듀라한이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궁니르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 궁니르는 1차 몬스터 브레이크가 끝난 이후 사라져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정대식은 짧게 말했다.

"그걸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보군."

"그렇다고 해두지요."

정대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최선이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벌써 가시겠다고요? 이제 막 러시아에서 돌아오신 거잖아요. 좀 쉬다 가시는 게 어때요? 여기라면 누구도 정대식 님을 찾아올 수 없어요."

안타까운 표정을 한 최선의 옆에서 최희도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 끝났다 싶으니까 잽싸게 내빼겠다는 거야? 여기 있어도 안 잡아먹어. 적어도 하루쯤은 쉬었다 가지그래."

정대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의 능력이 되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와 접촉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각성자 연맹이나 헌터 협회를 상대할 때 객관성이 옅어져 입지가 좁아지겠지요. 그러니 서둘러 떠나는 게 낫습니다."

"그런 것쯤은 내가 알아서 해. 내가 그 정도 영향력도 없을까 봐?"

최희는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상 러시아 측에서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할 말이 없어. 러시아의 재앙인 체르노보그를 처치해준 것만으로도 네 발밑에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판국이란 말이야. 그러니 오히려 블라디미르 대령을 죽인 것을 기뻐할지도 모르지. 그로 인해 너를 트집 잡아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 대가에 대해서 모르는 척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최선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말이 맞아요. 어차피 블라디미르 대령은 7성 무구를 탐내다가 그리된 거잖아요. 제 생각에는 러시아 정부도 블라디미르 대령이 국경을 넘어 키예프로 간 것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만약에 그자의 손에 7성 무구가 들어갔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러시아 정부였겠죠. 그러니 러시아 정부에서는 체르노보그를 없애준 것에 더해, 국가반역자를 처치해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거예요."

자매가 조목조목 따지는 말을 들어 보아하니 그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강영후도 서펜트와 헤르보르를 처치해준 값을 톡톡히 받아낸 것을 보아하니, 보통 수완이 아닌지라 이 문제를 잘 해결해줄 것 같았다.

그 걱정을 덜어내고 보니 남은 것은 최후의 전쟁에 대비하는 것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1000조를 벌어들여 만렙을 달성함과 동시에, 궁니르를 획득하여 7성 무구를 완성할 준비를 해 놓는 것. 그것이 정대식이 당면한 과제였다.

정대식은 현관으로 발길을 하며 말했다.

"그럼 뒤를 잘 부탁합니다."

그런 정대식의 팔에 손을 얹고 최희가 말했다.

"7성 무구가 완성되었을 때, 부디 내가 주인 될 자격이 있었으면 좋겠군."

정대식은 그녀가 7성 무구를 욕심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희는 누구보다 강함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응당 여신급으로 진화가 가능한 무구가 탐나지 않겠는가?

정대식은 얼굴을 흐리고 말했다.

"최후의 전쟁이 지나가고 나면 7성 무구는 다시 해체될 것입니다. 마기전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모든 여신급 무기를 사라지게 할 작정입니다."

정대식 자신도 마기전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말에 최희가 조금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신급의 무기는 그야말로 지구를 박살 낼 수도 있는 무기이다.

최후의 전쟁이 지나가고 나면 그만한 힘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존재해봤자 분쟁만 일으키는 골칫거리가 될 뿐이다.

최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대꾸했다.

"나는 7성 무구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아냐. 내가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 날이 왔을 때, 네 곁에서 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녀는 곧이어 순순히 정대식을 놔주고 말했다.

"물론, 내가 그만큼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지."

정대식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7성 무구가 없이도 이미 충분히 강했다.

그 천둥과 벼락을 부르는 그 능력 때문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만 가보라고."

정대식은 시큰둥한 척 손을 휙휙 내젓는 최희를 뒤로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정원 가운데서 발을 박차 허공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가 없어진 자리를 최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최선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니."

최희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젠장, 저 자식은 너무 멀리 가버렸어. 내가 미처 따라잡지도 못할 만큼 강해졌다고."

"걱정하지 마. 이제 능력을 되찾았잖아. 언니라면...... 언니라면 틀림없이 그를 따라잡아 함께 싸울 수 있을 거야."

"정말로 그럴까?"

되묻는 자매를 보고 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끄러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도 반드시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정대식의 곁에서 싸울 수 있기를 바랐다.

* * *

저택을 벗어난 정대식은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대신에 지하상가를 찾아서 싸구려 옷가지를 샀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카키색의 블루종을 걸치고 청바지를 입은 특징 없는 모습이 됐다.

야구모자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나니까 그냥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다.

정대식은 길가의 분식점에서 어묵과 삶은 달걀로 배를 채우고 잠자리를 찾았다.

진화한 마기전이 그의 몸에 완전히 합체되었기 때문인지 사실상 피로도 고단함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러시아에서의 여정이 길었다 보니 하루쯤은 아무 생각 않고 푹 자고 싶었다.

내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탓에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잠자리를 찾기가 마땅찮았다.

거리를 쏘다니던 정대식은 찜질방을 찾아서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수면실에서 낮잠을 푸지게 잤다.

눈을 떠보니 벌써 해가 져 있어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찜질방을 나와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 식당 바로 옆에 있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보여 아무 생각 없이 거기로 들어갔다.

그런 뒤 달짝지근한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마시는데, 문득 자신의 행동이 자각됐다.

'그러고 보니 고민도 하지 않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들어와 있잖아? 그런 데다가 아메리카노가 아닌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시고 있어!'

물론 지금의 정대식에게 커피 한 잔의 값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커피숍 하나쯤, 아니 이 커피 프랜차이즈를 통째로 사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을 버는 족족 현질을 하느라 써버리기 바빴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져 있다 보니 자신이 갑부가 됐다는 사실을 그다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대식의 기질 자체가 수전노인 탓에,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제 돈 주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로소 오늘에야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가성비를 따지지 않은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감격에 가까운 기분이 찾아들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바라온 것은 그렇게까지 엄청난 돈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실은 커피 한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 마시고, 급할 땐 택시를 맘 놓고 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지.'

갑작스런 깨달음에 정대식은 커피숍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나, 길거리를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도로를 지나치는 차들과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을 매우 정겹게 느꼈다.

진짜로 소중한 것은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이런 일상들일 터였다.

러시아의 황량하고 황폐한 풍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잠시 답지 않은 감상 속에 잠겨 있던 정대식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상대가 등 뒤에 있었기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예리할 대로 예리해진 감각이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의나 살기가 섞여 있지는 않았기에, 정대식은 아마도 저를 알아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이 언론에 꽤나 노출이 되었으니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대식은 안경이나 마스크 따위로 얼굴을 더 가리든지 해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시선을 눈치 못 챈 척, 커피숍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상대방이 정대식을 쫓아와 옷소매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정대식은 얼핏 그를 돌아보았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낯익은 얼굴에 절로 입술이 열렸다.

"윤현민?"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는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윤현민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저 기억하시죠?"

정대식은 못 본 사이에 부쩍 자라버린 윤현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설마 그새 네 얼굴을 잊었으려고."

윤현민은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형한테서 아무 연락이 없기에...... 절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무, 물론 이런저런 일로 바쁜 탓이었겠지만, 아무튼 절 알아보실 줄은 몰랐어요."

"너야말로 용케 날 알아봤구나. 변장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니까 알아봤죠. 전 형의 골수팬이니까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못 알아볼걸요?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진짜 젊어 보여요."

"야, 나 아직 젊거든?"

윤현민은 공격대나 각성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일종의 오타쿠였다.

정대식을 알게 된 후로 줄곧 그의 팬을 자처하며 뛰어난 분석력으로 뜻밖의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적잖이 반가워 정대식은 자리를 옮겨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러시아로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도대체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윤현민이 하는 말을 듣고 정대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러시아로 간 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사람들 다 아는걸요. 물론 타이탄 공격대에서는 형의 행방을 뚜렷하게 알리지 않았지만, 뻔한 일이잖아요. 광필두가 뢰를 탈취하려고 국가 기물 금고를 공격했을 때 형이 없었으니까. 다들 뢰는 최희에게 맡겨두고 형은 듀라한이 갖고 있는 델라니포스를 지키러 갔다는 말이 많았죠."

"나 참, 넌 모르는 게 없구나."

"요즘엔 정보가 빠르게 퍼지잖아요. 인터넷 검색만 잘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인데요. 뭐."

"그래도 아직 광필두가 잡혔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가 보군."

"헉! 결국 잡혔어요? 어떻게요? 형이 잡은 거예요?"

"그래, 내가 잡았다."

"어디서요? 듀라한하고 같이 잡은 거예요? 듀라한은 어떻게 만났는데요?"

정대식은 흥분해서 질문을 쏟아내는 윤현민을 진정시켰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 어쨌든 광필두는 잡혔고, 마갑은 안전해."

"그럼 7성 무구는 어떻게 된 건데요?"

"광필두가 갖고 있던 건 내가 갖고 있지."

"우와, 진짜요? 좀 보여주실 순...... 없겠죠?"

윤현민은 그들이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꼬리를 흐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