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현질 전사
-11권 8화
그러길 얼마나 있었을까.
엔트로피는 거짓말처럼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환을 한번 해제했다가 다시 나타난 것인지, 그녀에게는 전투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옆구리에 크고 둥근 알 하나를 끼고 있었다.
<정대식 님, 명령하신 바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게 화이트 드래곤의 알이지?"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정대식은 입을 헤벌쭉하니 벌리고 웃었다.
"잘했어! 화이트 드래곤은 어찌 됐지?"
<물론 화이트 드래곤도 제거를 하고 그 사체를 아공간에 넣어놓았습니다.>
화이트 드래곤까지 사냥했다는 말에 부대원들이 다들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드래곤까지 잡아 왔어?"
"어지간한 헌터보다 낫잖아? 아니...... 더 대단한데?"
"이거야, 우리 다들 헌터 관둬야 하는 거 아냐?"
경악과 감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엔트로피는 침착하게 알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정대식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것의 값어치를 꼽아보았다.
'부대원들 랭킹 순위도 올리고, 타이탄 공격대에 도움도 될 겸 이건 이대로 들고 가서 처리하는 게 좋겠어. 이걸로 얻은 수익은 부대원들에게 나누어주면, 치사한 놈이라고 뒤에서 욕먹지는 않겠지?'
부대원들이야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정대식의 기분상으로는 체르노보그를 사냥한 대가를 혼자 독차지해버린 게 적잖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제아무리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는 일을 혼자 하다시피 했다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살아난 것도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구하러 와준 서지원의 덕분이었으니 어떻게든 그 대가를 치르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 이런 드래곤 몇 마리만 더 잡으면 좋겠는데. 그건 무리겠지?'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던 그때였다.
"저길 좀...... 저길 좀 보세요!"
서지원이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며 외치는 말에 정대식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 아래서 보이는 광경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원들도 전부 입을 멍하게 벌리고 경악했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무려 세 개나 되는 던전이 흩어져 있었다.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새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던전에서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기어 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끼루루루룩!"
"크아아아아아!"
"캬르르르릉!"
"캬아아아아아!"
갖가지 괴성을 내뱉으며 놈들이 방사능이 머무르고 있는 지상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서로 뒤엉키고 물어뜯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달려 나오는 놈들이 끝도 없었다.
"엄청나군요......."
기가 찬 듯이 고덕화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김송근이 염려스러운 듯이 말했다.
"또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진 모양인데요? 새로 생긴 던전까지 합하면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뛰어나올 겁니다."
정대식은 짧게 벌써 최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인가 염려했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라스트 몬스터 브레이크가 시작되었다면 엔트로피가 경고했을 가능성이 컸다.
이것은 연거푸 일어나는 전조였다.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재앙이 닥치리라는 예고장이었다.
"어엇, 대장님!"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눈을 팔고 있느라고 정대식은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격을 알아차리는 게 좀 늦었다.
번쩍 고개를 들어 보아하니 도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지 난생처음 보는 몬스터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덮쳐들고 있었다.
그러자 서지원이 고래고래 외쳤다.
"저놈들은 마리드입니다!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리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주변으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종이비행기가 확 뒤집혔다.
그 충격으로 종이비행기 구현이 해제되어버리고 펜리르 부대원들이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런 부대원들을 마리드 떼가 휩쓸었다.
붉은 피부를 한 거인과 같은 용모를 한 놈들은 영체라서 하반신이 연기처럼 불분명했고 빠른 속도로 사방천지를 날아다니며 삼지창과 같은 무기로 부대원들을 찔러대었다.
"끼루루루루루!"
"까루루루루루!"
기묘한 울음소리가 난립하는 가운데 정대식은 부대원들의 보호막을 약간 변형시켰다.
마기전과 같은 식으로 마력이 작용하도록 돕자 부대원들의 발밑에서 마력이 방출되며 그들이 공중을 떠다닐 수 있게 됐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아이템을 가진 고덕화와 기철민은 벌써 마리드를 여러 마리 처치하고 있었다.
정대식은 허공에서 균형을 잡는 부대원들에게 즉시 명령을 내렸다.
"모조리 해치운다!"
"예!"
그 명령을 따라 하늘에서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다.
* * *
마리드 떼를 소탕한 펜리르 부대는 국경이 머지않은 것을 보고 서지원의 능력을 통해서 러시아를 벗어나기로 했다.
서지원은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몹시 긴장했으나 정대식의 서포트로 무사히 부대원들을 러시아 국경 밖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찔한 감각이 스쳐 지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외딴 숲속이었다.
목적한 키예프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일단 러시아를 벗어났다는데 안도감이 찾아들어 정대식은 서지원을 크게 칭찬했다.
"잘했어."
"아닙니다."
서지원은 몹시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을 보니 조금만 도와주면 포탈을 제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지도 모른다.
만약에 최후의 전쟁이 끝나고 서지원이 포탈제작자가 되면, 포탈을 이용한 유통 사업을 벌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현재까지는 포탈의 수도 적고 일부 각성자만 이용할 수 있는 탓에 대중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포탈을 일반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확장 현실 세계의 등장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게 다름 아닌 유통업이었기 때문이다.
몬스터가 출몰하는 세상이 되었다 보니 물자를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이 막대했다.
그런데 포탈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대식은 서지원을 이용하여 돈 벌 궁리에 즐거워 흐흐 웃었다.
그런 정대식의 속내를 모르고 서지원은 칭찬받은 것을 그저 기뻐할 뿐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갈 길을 서둘러야 하는 고로 정대식은 산을 벗어나 도로를 찾았다.
한참 동안 문명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다가 아스팔트가 깔린 길을 보니 매우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이재우의 능력을 이용해 빠르게 이동하기로 했다.
그와 마력 접속을 한 채 자동차를 그리게 하고 그것을 구현화해 타고 갈 생각이었다.
"우와, 이거 되게 몰골이 우스운데."
"싫으면 내려라!"
이재우가 구현화 해낸 자동차는 되는대로 그린 거라 그 모양새가 굉장히 조악했다.
마치 종이박스를 이어 붙여 만든 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었으나 모양이야 어쨌든 속력은 보통 차 못지않게 빨랐다.
그들이 그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자 반대 차선을 달리던 운전사들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따라 달리던 차들은 안에 도대체 누가 타고 있나 싶어서 그들을 추월하기도 했고, 앞서가던 차들은 갓길에 차를 멈춰 세우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관심을 끌면서 달린 끝에, 그들은 동이 틀 무렵 키예프로 가는 길목에 다다랐다.
키예프 주변으로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막기 위함인지 드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도로 끝에 철책이 둘러쳐진 입구가 있었는데, 정대식은 거기에서 마력 접속을 해제해 멈춰 섰다.
'높은 장벽을 보니까 어쩐지 예감이 안 좋군.'
정대식은 찜찜한 기분 속에서 입구를 쳐다보았다.
일종의 관문처럼 만들어진 입구에서는 방사능이나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바이러스를 씻어내기 위한 소독약이 쏟아지고 있었다.
차들이 그 밑을 지나갔고 도보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소독약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망설이고 있는 정대식을 보고 기철민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냐. 일단 들어가지."
현재로선 그들의 신분이 밀입국자나 마찬가지인지라, 입구를 통과하고 나면 책임 있는 사람을 찾아서 사정을 밝히고 각성자 연맹이나 국제 헌협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니면 도시를 통하지 않고 돌아가거나, 몰래 들어가야 했는데 그럼 또다시 야숙을 하거나 숨어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오랜 여정에 부대원들이 지칠 대로 지쳤으므로 오늘만은 도시에서 편안하게 쉬게 해주고 싶었다.
정대식부터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좋은 식사를 한 뒤에 푹신한 잠자리에서 자고 싶었던 것이다.
정대식은 부대원들을 거느리고 소독약이 분사되어 나오는 입구를 통과했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신분을 밝힐 것을 권했다.
「외국인은 신원을 증명해야 합니다. 여권을 꺼내주십시오!」
군인들이 하는 말에 정대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권을 꺼내려는 찰나.
지이이이이이이잉!
별안간 사방에서 푸른 스파크가 일어나며 몸에 어떤 충격이 닥쳐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쓰러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대식이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부대원들의 몸에 둘러놓은 보호막을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사방으로 마력을 너르게 펼쳤다.
"마기장!"
퍼버버버버버벙!
그가 쏟아낸 마력이 파동처럼 번지며 사방에 지뢰처럼 설치되어 있던 기묘한 장비를 망가트렸다.
그게 불꽃을 피워 올리며 터져버리자 군인들이 닥치는 대로 총을 휘갈겼다.
물론, 그것은 정대식의 손짓 한방에 모조리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아무 마력도 깃들어 있지 않은 평범한 총알 같은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허공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총알을 보고 공격을 그친 군인들이 머뭇거렸다.
곧, 그 군인들을 헤치고 비로소 적수라 할 만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검은 군복을 차려입은 또 다른 군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와 펜리르 부대를 둘러쌌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틀림없는 각성자들이었다.
그들이 팔에 찬 붉은 완장을 보고 정대식은 그자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놈들이 바로 미하일 소령이 말했던 특공대인가 보군.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키예프에 와 있는 것이지?'
곧 그들이 질서정연하게 옆으로 비켜섰고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이 뒤편에서 반갑지 않은 인물이 나타났다.
"블라디미르 대령......."
손수 키예프까지 행차한 블라디미르 대령은 기분 나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정중하게 정대식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였다.
「과연! 올인원의 능력이 대단하군! 정말로 체르노보그를 없애다니. 온 러시아가 기뻐할 일일세. 러시아를 대표해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군.」
정대식은 질세라 입가에 미소를 띠어 올렸다.
「별일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죠.」
「그런데.......」
천천히 뒷짐을 지고 선 블라디미르 대령이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가? 나는 자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길 기대했는데 말이야. 설마,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 대가도 받지 않고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참이었나?」
정대식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아시다시피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꽤 멀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유럽을 통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방사능을 뒤집어쓰고 피폭되느니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무엇보다 떠나겠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면 내가 섭섭하지.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도 있는데.」
「그래서, 설마 여기까지 배웅이라도 하러 오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가? 날 만난 게 썩 반갑지 않은 눈치로군.」
「저를 위해 준비하셨다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 것 같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정대식이 대꾸하는 말을 듣고 블라디미르 대령이 말장난은 그만하자는 듯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