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54화 (253/297)

# 254

현질 전사

-11권 6화

듀라한은 정대식의 놀라운 능력을 목도하고 전율을 느꼈다.

'아무리 올인원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한 인간에게 이만한 능력이 주어질 수가 있지?'

듀라한은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광필두가 7성 무구를 모으는 데 실패하고 무력한 상태라면, 실질적으로는 정대식을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는 게 아닌가?'

듀라한은 파워 랭킹 10위에 드는 강자였으나 현재로선 누가 봐도 그보다 정대식이 더 강한 상태였다.

더욱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마기전을 완성한 데다 복구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설령 파워 랭킹 1, 2위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를 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파워 랭킹 1, 2위의 강자들은 그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그들은 전부 최초의 몬스터 브레이크 때 영웅적인 위업을 이루고 사라진 인물들이었으므로 실재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아니, 설령 그들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정대식이 더 강할 터였다.

누구도 쓰러트리지 못했던 15성급의 암흑신,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 인물이니까 말이다.

듀라한은 저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소름을 쓸어내렸다.

'만약에 정대식이 광필두처럼 공공연히 세상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거나 위험한 야욕을 가지게 된다면 막아낼 자가 아무도 없겠군.'

정대식이 있음으로써 광필두의 야망이 거꾸러졌으나, 정작 정대식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 * *

듀라한의 생각이 어쨌든 간에, 정대식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모두의 이능을 빠짐없이 복구시켜 주었고 기철민에게도 티르브링어를 되돌려 주었다.

"체르노보그가 날을 부러트려 놓았지만 영구 강화를 걸어 놓았으니 임시방편으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날을 완전히 복구시키려면 애를 좀 먹을 거야. 광필두를 연행하고 나면 유럽에 있는 이능장 연맹에 가서 방법을 찾아보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뒤늦은 말이지만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을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기전을 빼놓고는...... 완전히 빈털터리야."

원래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팔아치운 거였지만, 현질에 대해 말을 할 순 없었으므로 정대식은 필사적으로 둘러대었다.

"그래서 그동안 사냥했던 몬스터의 부산물들도 없어졌고......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마기전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어째 남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대식은 그 말을 하면서 진땀을 뻘뻘 흘렸다.

정석대로 하자면 상점을 업그레이드하느라 쏟아부은 금액 중의 일부는 부대원들의 몫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동의도 없이 혼자 다 써버렸으니 정대식으로선 할 말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이라기에는 뭐하지만 손실액은 내가 가능한 한 채워주겠다. 그리고 너희들의 능력 계발과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거 참, 대장님도 괜한 소릴 하시네요."

주절거리는 정대식의 말을 듣다 못한 기철민이 혀를 찼다.

그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대장님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장님 덕분에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기철민이 하는 말에 고덕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엄밀히 말해서 얻은 게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각자 쓸 만한 아이템 하나 정도는 건진 것 같은데요."

곧이어 이재우가 답지 않게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더욱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렸으니 러시아에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겠습니까?"

이재우의 말에 김송근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정대식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내 생각은 다르다. 사실을 말하자면 휴식을 취하고 전력이 회복되는 대로 가능한 떠나야 한다."

"예?"

반문하는 말을 듣고 기철민이 말했다.

"우리 수중에 7성 무구 중 무려 6개 무구가 있는데 블라디미르 대령인지 나발인지가 가만있을 리 없지. 더욱이 듀라한과 같이 어울려 싸우기까지 했으니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아서 우리를 억류할 수 있을 거야."

"말도 안 돼, 체르노보그를 잡아달라고 부탁한 건 그쪽이잖아!"

허미래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으나 정대식은 기철민의 말에 긍정해 보였다.

"블라디미르 대령은 야심가다, 그는 7성 무구 중 6개가 러시아 땅에 들어와 있는 지금 기회를 결코 놓치려 하지 않겠지. 지금쯤은 체르노보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니 듀라한을 쫓는 광필두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을 것이다. 곧 놈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야."

그들의 대화에 블라디미르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듀라한과 미하일 소령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정대식은 곧 미하일 소령을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는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이곳을 떠나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인가가 나타나면 우리도 헤어지도록 하지요.」

그 말을 듣고 미하일 소령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블라디미르 대령의 충복인 그라면 당연히 블라디미르 대령이 조만간 나타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무작정 정대식 일행을 붙잡아 두기에는 그간에 진 빚이 많았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길 동안 정대식과 펜리르 부대가 동료도 아닌 그를 살뜰히 챙겨주지 않았던가?

듀라한은 아무 말이 없는 미하일 소령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군. 블라디미르 대령이 이들의 위업을 치하하러 올 것이니 천천히 있다 가라고 말해보지그래?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제아무리 군대의 개라도 일말의 양심은 있나 보지?」

듀라한이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 미하일 소령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빡, 하는 소리가 났으나 진심으로 때린 것은 아닌지 듀라한은 그냥 그 주먹을 맞아주었다.

「닥쳐라.」

싸늘하게 경고한 미하일 소령은 곧 무언가 결심한 눈으로 정대식을 보고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블라디미르 대령께선 당신들을 그냥 보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7성 무구를 가진 채로 러시아 땅을 떠나려 한다면 즉시 특공대가 뒤따를 것입니다.」

「특공대라고요?」

「뛰어난 이능자들로만 선발된 특수 부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따라붙을 테니 최대한 행적을 지우며 이동해야 할 것입니다.」

미하일 소령은 지도를 꺼내 들고 블라디미르 대령의 감시망을 피해갈 수 있는 루트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정대식은 그가 내미는 지도를 받아들고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블라디미르 대령의 부하인데 우리를 이렇게 도와줘도 되는 것입니까?」

「감사는 도리어 제가 해야지요. 모든 러시아인의 절망이었던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려 주었으니, 군인이기 이전에 러시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뒷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중에 낙오되었다고 하면 될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듀라한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어 보이는군요.」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속박의 구슬은.......」

「아, 그건 상관없습니다. 얼마든지 가지시지요. 내 이능을 되찾아주고 마갑을 지켜준 보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세 사람은 곧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주먹질을 할 때는 언제고 미하일은 말없이 듀라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든 듀라한은 곧 몸을 돌려 안장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마갑이 그 형체를 갖추었고 듀라한이 그 위에 올라타 말했다.

「그럼 이만.」

그의 모습은 바람결을 따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정대식은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그가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부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내일 아침 해뜨기 전에 출발하겠다. 그 전까지는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잊고 푹 쉬도록."

어딘지 모르게 상기된 얼굴들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으나 실제로 다들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 갔을 땐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러시아에 도착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온 이후로 수많은 일을 겪었으니 눕자마자 기절할 만도 했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은 정대식이 유일했다.

그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심심한 김에 엔트로피를 불러냈다.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레벨 9에서 모두의 이능을 되돌릴 수 있는 스킬이 있어서 다행이야."

<예.>

"이 스킬로 최희의 능력을 되찾아줄 수도 있겠지?"

<가능합니다.>

기뻐할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던 정대식은 곧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복구 스킬이 시간에 관계하는 스킬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과거나 미래로 가는 스킬도 있나?"

<레벨 9에는 없습니다.>

"그럼 레벨 10에는?"

엔트로피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레벨 10은 데모크리토스 님이 정대식 님께 허락한 능력의 정점, 즉 만렙을 이르는 말입니다. 만렙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니 그 역시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만렙이라...... 말이 쉽다...... 1000조를 도대체 언제나 모으냐고."

정대식은 평소와 같이 몹시 투덜거렸다. 그리고 엔트로피 역시도 그 불평을 무심히 들어 넘겼다.

모처럼 만의 평온한 시간을 지나,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가 잦아들 때쯤.

동녘이 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했고 펜리르 부대원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미하일 소령이 떠날 채비를 갖추어 나타났다.

「미하일 소령. 지금 가시려는 겁니까?」

「예. 생각해보니 저 역시 빨리 떠나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되돌아가기엔 위험할 텐데요.」

「인가가 나타날 때까지 동행하면 누가 우리의 모습을 목격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죠. 게다가 저는 제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 아무래도 함께 갈 수는 없겠습니다.」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또 뵙지요.」

짧게 악수를 나눈 미하일 소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니, 또 만나선 안 되겠군요. 부디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그런 말을 남기고 미하일 소령이 몸을 돌렸다.

그들이 다시 만난다는 것은 정대식이 블라디미르 대령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만나선 안 되는 게 맞았다.

정대식은 듀라한과는 달리 서서히 멀어지는 미하일 소령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이라 생각하니 서운한 기분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정대식은 그 기분을 털어버리고 부대원들을 깨워 자신의 갈 길을 서두르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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