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현질 전사
-11권 1화
Chapter 63. 복구
최후의 전쟁.
라스트 몬스터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결국, 자신이 싸우게 될 상대가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정대식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비단 본인이 그 사실을 추측해낸 탓만은 아니었다.
정대식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최후의 전쟁이야 어차피 닥치는 거고.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어떡하나 고민한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까."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정대식을 보고 엔트로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정대식 님은 여태까지 해온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정대식이 엄청나게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헐, 너 방금 웃은 거야?"
엔트로피는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제가 웃었습니까?>
"내 착각이 아니라면 웃은 것 같은데?"
<웃었을지도 모르지요.>
"널 보니까 내가 레벨이 업그레이드됐다는 게 확 실감이 나네. 진짜 감정 비슷한 게 생기긴 했나 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제 저의 자아는 정대식 님과 완전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기에는 나와 같이 의식을 공유하는 존재잖아? 나랑 같은 능력을 갖고 있고, 같은 마력을 쓰는 사이이니 완전 분리가 되었다기보다는 분신이라고 해야지."
<예, 분신이 맞습니다.>
엔트로피는 어쩐지 쑥스러운 기색으로 그 말을 하더니 이야기를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어쨌든 만렙이 되기까지 겨우 한 단계가 남았으니 조금만 더 분발하시면 될 겁니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된다기에는...... 레벨 10으로 업그레이드하는데 필요한 금액이 엄청나지 않아? 무려 1000조잖아. 내가 뉴스에서 몇백조 단위까지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 단위는 들어본 적이 드문 것 같거든."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단번에 188조를 벌어들이셨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야! 체르노보그 죽이느라 내가 죽을 뻔했거든! 그런 일을 여섯 번쯤 반복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가당키는 해?"
<방법은 차차 고민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보다, 어느새 업그레이드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습니다. 외부 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
엔트로피와 한담을 나누는 새 업그레이드가 99%에 달했다.
정대식은 심호흡을 하고 광필두를 마주 볼 준비를 했다.
자신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떠들 동안 그가 부대원들을 얼마나 아작내 놓았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부대원들 전원이 이능을 잃어버린 상태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레벨 9단위의 상점에서 광필두를 대적할 만한 스킬이 있어야만 했다.
마침내,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레벨 9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현실 세계로 복귀하게 될 것입니다. 카운트를 시작하겠습니다. 10, 9, 8, 7, 6, 5.......>
정대식은 엔트로피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 *
"2분 형, 1분 형! 으아아! 아아아!"
김송근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허공을 손짓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악을 써 봐도 거대 분신은커녕 일반적인 분신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력이 닳을 대로 닳은 상태에서도 어린 분신 하나쯤은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그조차도 불가능해진 것이다.
김송근은 비로소 자신이 완전히 이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제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이 수북이 쌓인 재 속에 파묻히며 검은 먼지를 일으켰다.
그 속에서 두 손안에 고개를 처박으며 김송근은 신음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김송근은 각성자가 된 이후 항상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다른 보통의 헌터들과는 다르게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에 더욱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으로 탱딜힐의 역할을 한꺼번에 해가며 온갖 던전을 누비고 다녔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만큼 즐거울 때가 없었다.
별다른 능력을 갖추지 못해 항상 남들과 파티를 꾸려야 하는 헌터들이나 능력 하나만 믿고 횡포를 부리는 동료들과 반복을 겪어야 하는 헌터들이 전부 김송근을 부러워했다.
김송근은 자신의 분신들로 파티를 꾸렸고 그 모두가 스스로였기에 반목이나 갈등을 겪을 일이 없었다.
생각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신의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져 혼자서도 일당백의 위력을 발휘하며 수많은 던전들을 공략하고 다녔다.
그런 그에게 쏟아지는 러브콜도 셀 수 없었다.
대형 정공들은 전부 그를 영입해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대단한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김송근은 남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공격대에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김송근에게도 위기가 닥친 적이 있었다.
위험하기로 소문난 던전에 자신의 실력만 믿고 혼자 들어갔다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가진 아이템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의 습격을 받았고, 간신히 놈들을 물리쳤으나 그 던전의 보스몹과 마주쳤던 것이다.
마력이 고갈된 상태였기에 분신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고, 김송근은 혈혈단신으로 보스몹과 싸워야 했다.
그런 상태에 있던 그를 구제해 준 것이 강영후였다.
그에게 신세를 지게 된 김송근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그가 창단한다는 타이탄 공격대에 가입했다.
어디에 매여 있다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공격대 생활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타이탄 공격대엔 내로라하는 여러 종류의 능력자가 많았으나, 개중에서도 자신의 능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질시는 김송근에게 오히려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만족스러워서 다른 것은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김송근은 부끄럽게도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자신의 능력을 잃어버릴 줄 알았더라면, 광필두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펜리르 부대와 척을 지고 정대식에게 등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광필두의 편에 붙거나, 하다못해 도망을 쳤어야 했다.
그런데도 뭐에 홀렸는지 기철민과 고덕화가 이능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감히 제 동료들을 건드렸다는 생각으로 분노하여 앞뒤 재지 않고 승산 없는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그 결과 분신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죽고 싶을 만큼의 낙담과 좌절이 찾아들었다.
제자리에서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 김송근을 보고 기철민이 고함을 질렀다.
"정신 차려, 아직 싸울 수 있잖아! 능력을 잃어버렸어도 아이템이 있다고! 얼른 일어나 싸워! 이재우를 도와야지!"
김송근에게는 정대식이 준 네피림 블레스트 플레이트와 체르노보그의 던전에서 획득한 시마르글의 망치가 있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아이템이 있으니 마력을 갖고 있는 한은 아이템의 힘을 빌려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타고난 마력의 특질, 즉 이능을 잃어버렸으므로 싸울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김송근은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고 그 광경을 보고 기철민이 욕설을 퍼부었다.
"저 얼뜨기 같은 놈이!"
기철민은 이를 악물고 다지보그의 써클렛으로 광선을 내쏘았다.
광필두가 착용한 브릴리언트 아우라 아머가 그 공격을 손쉽게 튕겨내었다.
"위켄, 슬로우!"
아직 이능을 보유하고 있는 허미래가 닥치는 대로 디버프를 써서 광필두를 저지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광필두는 디버프를 모조리 받은 상태에서도 가볍게 한쪽 팔을 휘둘러서 이재우가 닥치는 대로 구현화하고 있는 종이 아군을 베어내고 있었다.
파악!
파르르르르!
이재우는 물량으로 승부를 하려는지 남아있던 그림을 모조리 써서 한꺼번에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스스로 목표물을 찾아내는 딜라이트 소드가 남김없이 그것들을 파훼시키고 있었다.
결국 이재우가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임기응변으로 그를 막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이도 없고 검은 재 위에 되는대로 그려서 구현화 해내는 것들이라 그 수준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망할!"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재우의 공격을 받아주기도 질렸는지 광필두가 그의 이능까지도 파괴해버린 것이다.
"신께서 네 능력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이능 파괴."
"안 돼!"
이재우는 도망치려는 듯이 몸을 뒤로 날렸으나 이미 당해버린 뒤였다.
이능 파괴는 그 엄청난 효과와는 달리 겉보기로는 별다른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지우개로 지우듯이, 애초부터 없던 것처럼 능력이 없어지기만 할 뿐이다.
제풀에 뒤로 넘어진 이재우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별다른 변화가 없는 제 몸 상태를 더듬어보며 정신이 없는지 혼잣말을 했다.
"뭐야, 나...... 이능이 사라진 건가?"
그 모습을 보고 기철민이 고함을 질렀다.
"페룬의 돌도끼가 있잖아!"
이재우는 엉겁결에 페룬의 돌도끼를 끄집어내 움켜쥐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그걸 쳐들어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딜라이트 소드를 막아냈다.
쩌엉!
굉음이 울리고 이재우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광필두가 연이어 그를 베려고 했다.
그런 그를 허미래와 기철민이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싸울 수 있는 인원이 그들 셋뿐이었다.
김송근은 넋이 나갔고 미하일 소령과 듀라한은 부상으로 쓰러진 지 오래였으며, 고덕화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엔트로피라도 전력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정대식에게 의식이 없는 상태라 그런지 그녀는 아무 능력도 쓰지 못했다.
그저 정대식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 남은 사람들은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위기에 몰린 그들을 보고 광필두는 치켜들었던 딜라이트 소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평연하게 말했다.
"마갑을 순순히 내놓는다면 이만 물러가겠다."
듀라한이 쓰러진 직후.
기철민의 빠른 반격으로 광필두가 주춤하는 사이, 허미래가 기지를 발휘해 마갑을 낚아채어 엔트로피에게 던졌던 것이다.
기승자가 사라지자 마갑은 안장의 형태로 변했으며 엔트로피가 그걸 아공간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 바람에 광필두가 펜리르 부대원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였다.
마갑을 손에 넣었더라면 쓸데없는 싸움을 벌일 필요 없이 그냥 그걸 타고 자리를 벗어나 버렸을 것이다.
광필두의 말에 기철민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펜리르 부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손쉽게 마갑을 가지고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광필두는 그런 그에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모두의 이능을 빼앗고 정대식과 그 분신을 죽여서 마갑을 찾는 수밖에는 없다. 정대식을 봐서라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으니 지금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거다."
"천만에! 그리되지는 않을 거다! 대장님이 깨어나기만 하면 너 따위는......."
"그럼 서둘러야겠군."
광필두는 멈췄던 공격을 재개했다.
그는 딜라이트 소드를 휘둘러 이재우를 간단히 쳐냈다. 자신의 능력에 익숙해져 있던 이재우는 페룬의 돌도끼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는 그걸 놓쳐버리고 나동그라졌고 광필두가 인정사정없이 딜라이트 소드를 내리찍었다.
"크아아아아악!"
이재우의 비명이 처참하게 울려 퍼졌다.
딜라이트 소드로 그의 어깨를 찍은 광필두는 곧 그의 가슴을 밟으며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엘브스, 7성 무구 중 뢰를 기철민과 허미래에게로 집어 던졌다.
"피해!"
기철민은 허미래를 확 떠밀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엘브스는 허공에서 두 조각으로 분리되며 기철민과 허미래를 각각 겨냥해 터졌다.
꽈아아아아앙!
폭음이 울리며 푸른 연기가 뭉게뭉게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