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현질 전사
-10권 24화
듀라한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 광필두의 반격이 시작된 그때.
만약에 듀라한이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고 마갑을 이용했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듀라한은 본인을 더 믿었기에 이능을 사용했다.
듀라한은 그 능력을 아지랑이라고 불렀다.
광필두는 한 박자 뒤늦게 듀라한의 공세를 깨닫고 딜라이트 소드로 그가 있다고 여겨지는 자리를 찔렀다.
감으로 찌른 것치고는 상당히 정확한 공격이었고, 마찬가지로 7성 무구 중 하나인 딜라이트 소드는 스스로 타깃을 찾아서 데미지를 입힐 수 있을 만한 성능의 무기였다.
한데 딜라이트 소드가 듀라한의 어깨를 찔러 들어가자, 그 자리가 스르르 녹아버렸다.
정확히는 사라졌다고 해야 하겠다.
공격이 비껴 나가는 것을 보고 광필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듀라한은 실책을 한 번 더 저질렀다.
그는 보란 듯이 광필두의 이격을 기다렸다.
광필두는 숙련된 헌터답게 본인의 놀람과는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공격을 연이었고, 딜라이트 소드가 듀라한의 목을 치러 날아왔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듀라한의 목이 또 스르르 흩어져 버렸다.
그 광경에는 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그에게 붙은 듀라한이라는 별명이 실제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듀라한에게는 자신의 형체를 자유자재로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원한다면 신체 일부에서부터, 전신을 없앨 수도 있었고 그 상태에서 이동을 할 수도 있었다.
실로 유령과 같은 능력으로, 마갑과 만나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제아무리 강력한 적이 나타나 어마어마한 공격을 퍼붓는다고 하더라도 형체도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듀라한을 명중시킬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광필두가 입술을 달싹였다.
"듀라한, 신께서 네 능력을 거두어 가셨다. 이능 파괴."
듀라한은 일순 광필두의 눈이 번쩍였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별안간 몸속에 엄청난 충격이 찾아들었다.
충격이라 말하기에는 좀 부족한 느낌일지도 모른다.
몸에서 무언가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감각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극심한 무기력과 함께 허탈감이 찾아들었다.
듀라한은 마치 망치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뒤로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그러면서 마갑의 고삐를 놓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어!"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고 펜리르 부대원들은 전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에게는 그 모든 일이 한 호흡 동안 벌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듀라한이 사라지고, 광필두 주변으로 무언가가 번쩍인다 싶더니, 별안간 듀라한이 마갑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이 보인 것이다.
"듀라한!"
기철민이 고함을 내질렀으나 듀라한은 사지를 대자로 뻗고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입을 벙하니 벌리고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광필두는 그런 듀라한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마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철민이 이를 악물고 마력을 쥐어짜 냈다.
파아아아아앗!
기철민에게는 티르브링어가 없는 상태였으나 대신에 다지보그의 써클렛이 있었다.
그것이 레이저 광선 같은 빛을 뿜어내었고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펜리르 부대원들이 일제히 광필두에게로 덤벼들었다.
* * *
정대식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서 있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언제부터 이런 이상한 곳에 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대식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난...... 난 분명히 체르노보그와 싸우고 있었는데.'
길어지는 전투에 몹시 지쳐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결코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폭권이라는 통합 스킬을 만들어내어 그것을 사용했다.
'체르노보그를 처치하는 데 성공한 것인가?'
어째 자폭권을 쓴 후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마치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을 때처럼 막연한 장면만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린 것 같기는 한데...... 설마, 여긴 사후세계?'
정대식은 가슴이 덜컹하는 기분을 느꼈다. 자폭권은 말 그대로 체르노보그와 함께 죽자고 덤빈 최후의 방법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폭권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기랄...... 이거 실화냐? 진짜 나 죽은 거야? 그럼 저승사자가 마중 와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있어도 되는 거야?'
정대식은 혹시 여기가 사후세계라서 어디에도 오도 가도 못하고 계속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단순한 사후세계가 아닌 지옥인지도 모른다.
이런 자극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백색의 무한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지옥이 아니고 뭐겠는가?
오소소 소름이 끼쳐 오르고 정대식은 혹시나 해서 스킬을 사용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일체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몹시 무력한 기분이 드는 것이 마치 일반인일 때의 예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망할! 젠장! 말도 안 돼!"
정대식은 혼자서 화를 내다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엔트로피, 엔트로피!"
스킬이 전혀 시동되질 않아 엔트로피가 나타나리라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에 엔트로피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에...... 엔트로피? 네가 여길 어떻게?"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불렀으니 온 것이지요. 저는 정대식 님의 도우미니까요.>
"나 죽은 거 아니었어?"
<죽었다면 정대식 님의 의식이 살아있을 리가 없지요.>
"의식? 의식이라고?"
<예. 여긴 정대식 님의 의식세계입니다.>
정대식은 저도 모르게 "헐......."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내 머릿속이 이렇게 텅 비어 있다는 말이야?"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현재 정대식 님의 의식을 재조정 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최소한도로 사고할 수 있는 의식만을 남겨둔 상태라서 이런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봐."
<정확히는 상점 레벨 9의 업그레이드 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대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벨 9라고? 내가 업그레이드를 했다는 말이야?"
엔트로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전혀 안 나는데."
<그럼 잠시 그 시점을 재생해 보겠습니다.>
엔트로피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스크린 같은 것이 펼쳐지면서 일인칭의 화면이 나타났다.
아마도 정대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의 기억인 것 같았다.
그것을 올려다보며 정대식이 물었다.
"체르노보그...... 내가 놈을 없앴나?"
<그렇습니다. 자폭권으로 인하여 체르노보그가 소멸하였고, 기억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 여파로 던전이 붕괴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무슨 특수 효과로 만들어진 영상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방이 유리처럼 조각조각 깨어져 나가는데 여러 공간의 파편이 뒤섞여 있는 게 보였다.
그곳에서 정대식은 그 파편 중의 한 조각인 것처럼 어딘가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허공에 붕 뜬 손을 보아하니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품에 뭘 안고 있었다.
"저건......?"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획득한 마정석입니다.>
"마정석! 그렇지!"
칠흑처럼 새카만 빛을 내뿜는 돌을 보고 정대식은 쾌재를 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고 마정석을 획득했다 하니 일이 어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저걸 팔아 상점 레벨을 업그레이드 한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정대식은 자신의 무의식에 찬사를 보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활로를 찾았던 모양이다.
"다행히 체르노보그의 마정석이 100조에 준하는 값어치가 있었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188조에 달하는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기에 상점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럼 지금 내 수중에 아직 88조가 남아있겠군?"
<그렇습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마정석을 처분해 레벨을 업그레이드하고 나면 상태가 회복되어 붕괴하는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근데 상점 업그레이드했으면 내가 멀쩡해져서 던전 밖으로 나갔어야지. 왜 아직도 업그레이드 중이라는 거야?"
<레벨 9 업그레이드로 인해 주어지는 정보량이 지나치게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일시에 업그레이드를 해버리면 인간에 불과한 정대식 님의 신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다소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지금 나는...... 그러니까 현실 세계의 나는 어디 있는 건데? 설마 무너지는 던전 안에 그대로 굴러다니고 있는 거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펜리르 부대원 중 한 명인 서지원 님이 정대식 님을 구조하여 던전 밖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정대식은 깜짝 놀랐다.
"서지원이?"
<예. 그가 공간 마법을 쓸 줄 아는 유일한 부대원이었으므로 정대식 님의 구조를 도맡은 것이겠지요.>
"그 녀석이 공간 조작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한데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나? 그 던전은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었다고. 거기서 날 빼내려면 차원을 건너뛰어야 했을 텐데 포탈도 못 여는 녀석이 그게 가능하긴 해? 체르노보그라 한바탕 하고 난 뒤라 마력도 부족했을 텐데."
<서지원 님에게는 리치 써클렛이 있습니다.>
"마력을 흡입해서 날 구해냈단 말이야? 그렇지만 던전이 붕괴하는 와중에 누구의 마력을 빨아들였다는 말이야?"
<체르노보그의 마력이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던전 자체가 체르노보그의 능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공간이었기에, 체르노보그가 쓰러진 뒤에도 그 영향력이 걷히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방에 체르노보그의 마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서지원 님께서는 그 마력을 흡입하여 정대식 님을 던전 밖으로 빼낼 공간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체르노보그의 마력이라고? 말이 좋아서 마력이지 무려 15성급 몬스터의 사력을 흡입했다는 말이잖아! 그럼 엄청나게 위험했을 텐데......!"
<다행히 정대식 님을 구조해내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아니, 나 말고 서지원 말이야!"
엔트로피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염려하신 바대로 서지원 님께서는 감당 못 할 마력을 흡입한 후유증으로 탈인간화, 몬스터화 될 뻔하였으나 지금은 속박의 구슬에 갇혀 있으므로 그 현상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속박의 구슬이라고? 그런 아이템이 있었나?"
<그것은 듀라한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던전 밖에 그자가 있었지......! 지금 그자는 어쩌고 있지?"
<광필두와 일전을 치르는 중입니다.>
"광필두라고?"
기겁하는 정대식에게 엔트로피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