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35화 (234/297)

# 235

현질 전사

-10권 12화

엔트로피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소환 스킬은 시전자로부터 물리적 거리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나타납니다. 여러 차원의 성녀 중에 그녀가 정대식 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여기로 소환된 것이지요.>

"이런, 젠장!"

정대식은 스킬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부를 걸, 후회했다.

모스크바 성전대가 비참한 실패를 겪고 난 후 성녀 루나는 온 러시아인들의 비난 속에 반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고 들었다.

마약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던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루나의 모습은 볼품이 없었다.

그녀에게선 한때 천사처럼 아름답던 미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깡마른 채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덜덜 떨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정대식은 그녀의 팔을 억지로 붙잡아 내리고 말했다.

「이보세요! 당신은 내 소환 스킬로 이곳에 불려온 겁니다! 내 요구를 들어주면 내 마력을 대가로 가질 수 있게 돼요! 그러니 정신 차리고 언데드 드래곤들을 처치해주면 좋겠군요.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소용없었다.

그녀는 벌벌 떨고만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기에 정대식은 별수 없이 스킬을 썼다.

"각성!"

정대식의 마력이 스며들자 루나는 조금쯤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언데드 드래곤들이 호시탐탐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때였다.

언데드 드래곤들이 일제히 브레스를 내뿜기 시작했다.

"캬르르르르르르!"

"캬아아아아아아!"

"콰르르르르르르!"

놈들이 토해낸 시커먼 사력이 덮쳐들어 정대식은 황급히 마기장을 넓혔다. 그리고 루나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말했다.

「여기서 당신이 나서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죽어요! 모스크바 성전대에서 겪은 일을 또 겪을 참입니까?」

정대식의 말에 루나의 눈에 의지가 돌아왔다.

그녀는 문득 정대식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이게 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군요.」

곧, 루나가 눈을 감았다.

은은하면서도 투명한 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그 빛이 내뻗은 손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니...... 신성 정화!」

파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물결치듯 정화의 빛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언데드 드래곤들이 그 빛에 놀라서 황급히 물러서려고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곧 정화의 빛에 가 닿기가 무섭게 한낱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것은 거기에 타고 있던 드래곤 라이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뱀파이어인지라 사악한 존재인 그들은 힘을 잃고 햇볕에 노출된 것처럼 타들어 갔고, 아래에 득시글거리던 데스 솔져나 데스 스나이퍼, 부정한 프리스트와 비숍들도 기겁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황급히 후퇴하는 것을 본 루나가 자신의 능력을 거두어들였다.

갑작스레 신성력을 쓴 탓인지 탈진한 듯 보였지만, 곧 정대식의 마력이 그녀에게로 흘러 들어가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푸석푸석하던 머릿결이 살아나는가 하면 쪼그라붙었던 살갗이 도톰해지고 병색이 완연하던 얼굴빛도 되돌아왔다.

「이것은.......」

루나는 자신의 몸을 채우는 놀라운 마력의 힘에 놀라서 정대식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소환수가 정대식의 의지를 실현해주는 대신에 받는 대가였다.

정대식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곧 소환이 해제되었다.

루나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소환술을 여러 번 봐왔고 쓰기까지 했으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불러내는 스킬이라는 사실을 그렇게까지 실감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 사실이 체감이 됐다.

어쨌든, 오묘한 소감은 길지 못했다.

몬스터 떼가 흩어지는 자리에서 아크 비숍과 듀라한의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전력이 비등비등해 보여도, 아크 비숍의 성배가 부서지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듀라한이 엄청난 속도로 쏟아붓는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려는 것이다.

정대식은 듀라한이 최후의 일격을 쓸 수 있도록 스킬을 썼다.

"마력 접속!"

정대식의 의지에 따라 그의 마력이 듀라한에게로 전송되었다.

일전에 마력 전이의 레벨을 10까지 높여놓았기에, 원거리에서도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자 듀라한의 속력이 한층 더 빨라지는 게 보였다.

실제로 눈으로 보인 것은 아니지만 아크 비숍의 성배가 시커먼 빛을 내뿜다가 결국에는 콰창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아크 비숍의 모가지가 허공을 날았고, 결국에는 놈의 사지가 수백 개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유."

"엇."

정대식은 화들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아크비숍을 처치한 알렉세이가 곁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정대식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로 적응 안 되는 빠르기로군요.」

알렉세이는 씩 웃어 보이다가 곧 면목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자신만만하게 나서놓고 결국에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아크 비숍을 쓰러트린 건 당신의 공입니다. 보십시오. 우두머리를 잃은 몬스터들이 뿔뿔이 흩어지는군요.」

신성 정화에 놀란 몬스터들은 지휘자마저 잃어버리자 갈피를 못 잡은 채로 달아나고 있었다. 심지어는 부대원들과 싸우고 있던 몬스터들까지도 등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몇몇은 그 뒤를 쫓았으나 정대식은 굳이 놈들을 끝장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 트였으니, 지금은 잡놈들을 상대로 시간을 쓸 때가 아니었다.

정대식은 전투로 인해 일어났던 먼지가 가라앉자, 한층 선명하게 보이는 모스크바 시가지의 마천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가 모스크바로군요.」

알렉세이가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가 진짜로 체르노보그의 영역입니다.」

* * *

암흑 영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는 무저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방에는 정체 모를 검은 재가 뒤덮여 있었는데, 그게 바닥에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허공에도 풀풀 날아다니고 있어 미세먼지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관지를 괴롭게 했다.

결국, 다들 정대식이 마기장으로 만들어낸 마력구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주위의 광경이 한층 더 잘 보여서, 그 검은 재가 인간 문명을 효과적으로 부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곳곳에 새하얗게 뼈가 드러난 시체가 널브러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자동차나 아스팔트 도로, 가로등, 건물의 간판과 창문, 지붕, 울타리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수백 년의 세월을 한 번에 얻어맞은 것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는데, 그게 검은 재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곳곳에는 그 재를 뒤집어쓴 몬스터들이 활보하고 있었으나, 개나 고양이만 한 크기의 소형들이라 펜리르 부대를 보자 전부 꽁지 빠지라 도망치기에 바빴다.

덕분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시가지에 진입하여 한참을 걸어갔다.

"이쪽입니다."

미하일 소령의 인도로 체르노보그가 나왔다고 추정되는 던전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땅이 우르르 울릴 정도의 굉음이라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커먼 구름이 가득 낀 하늘 아래, 높은 마천루들 사이로 커다란 머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그 몬스터를 보고 허미래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저건 대체......?"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대꾸한 사람은 미하일 소령이었다.

「게게네이스라는 놈입니다. 워낙에 덩치가 크고 강력해서 사람들이 체르노보그로 착각하기도 하지요.」

게게네이스는 높이만 10m에 가까워 보였고 어깨너비가 그 절반만큼이나 넓었다.

게다가 두 팔은 손이 땅에 끌릴 만큼 길었으며 손가락 하나하나의 굵기가 통나무만 했다.

걸작인 것은 놈의 하반신이었는데, 뱀과 문어를 뒤섞어 놓은 것 같아 보였다.

문어처럼 여러 개의 다리가 붙어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뱀과 같아서 각자 머리가 달려 있었다.

그 안광이 어찌나 밝은지 마치 써치 라이트처럼 검은 재로 뒤덮여 어두운 사방을 훑고 있었다.

"정말이지 끔찍스럽게 생겼네."

김송근이 진저리를 치며 하는 말에 다들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대식은 주의 깊게 그놈을 살피다가 미하일 소령에게 물었다.

「저놈을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괜히 체르노보그를 만나기도 전에 저런 괴물을 상대하다가 전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요.」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몸풀기용으로 적당한 상대는 아니지요. 놈을 피해서 이동하겠습니다.」

정대식은 은신 스킬을 펼쳤고 일행은 번뜩이는 여덟 마리 뱀들의 시야를 피해서 몸을 낮추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하며 움직였으나 두 블록을 지났을 때 미하일 소령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안 되겠습니다.」

보아하니 안에 거미줄같이 끈끈이는 실타래가 잔뜩 엉켜 붙어 있었다.

어떤 몬스터인지는 몰라도 그 안에 제대로 둥지를 꾸려놓은 모양이라 그 건물을 통해서는 이동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건물 옆 골목으로 이동하려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다가 뱀의 안광이 바로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 식겁해 몸을 낮추었다.

"젠장......."

누군가가 욕설을 지껄이는 가운데 그들은 골목 막다른 길에 수북한 인골을 밟고 담 위로 기어올라 비상계단에 매달렸다.

곧 허미래가 네팅 스킬로 일행을 담벼락에 매달려 걷기 쉽게끔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벽에 매달려 이동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발밑으로 웬 리저드 떼가 우르르 지나갔다.

놈들은 마치 공룡처럼 두 발로 선 채 날카로운 발톱이 붙은 앞발을 세운 채로 펜리르 부대원들의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무사히 또 한 블록을 통과한 그들은 곧 낭패한 지경에 빠졌다.

광장이 나타난 것이다.

「사방이 노출된 곳이라 몸을 숨길 방법이 없습니다.」

미하일 소령이 중얼거리는 말에 정대식이 대꾸했다.

「은신과 교란 스킬을 동시에 써서 지나갈 수 없겠습니까?」

미하일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게게네이스의 안광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잡아내지는 못해도,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채겠죠. 그럼 일대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달려들 테니까 골치 아파질 겁니다.」

정대식은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가 손상된 것을 다시 한번 안타까워했다.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가 망가져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어둠을 불러내거나 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뿐만이랴? 야마환도 먹통 이기는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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