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현질 전사
-9권 17화
그의 표정은 밝았다. 이두 트롤을 처치했다고 자신하고 있었으나 곧 낭패감이 그 얼굴에 찾아들었다.
"아니?"
공격이 얕았는지 이두 트롤은 아직 살아있었다. 팔 두 개가 잘려나가고 머리 두 개가 놓인 가운데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으나 멀쩡히 서 있었다.
트롤이 상대일 경우 일격에 쓰러트리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트롤은 순식간에 상처를 복구해냈고 잘린 팔도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입술을 깨문 기철민이 곧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못한 원인을 알아냈다.
"젠장!"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칼을 옆으로 뿌렸다. 그러자 거기에 묻은 트롤의 녹색 피가 흩뿌려지며 창백한 칼날이 드러나 보였다.
고가의 검이었으나 거기에는 희미하게 금이 가 있었다. 아마 하와이 제도에 있으면서 몬스터들을 많이 잡는 바람에 무구가 손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불어나 버린 기철민의 마력량까지 감당해 내려다보니, 날이 버티지를 못한 것이다.
한 번만 무기를 더 휘두르면 칼날이 부러질 판국이라 기철민은 팔을 재생시키고 있는 트롤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광경을 보고 정대식이 아공간에 넣어두었던 무구를 꺼내 들었다.
"티르빙!"
정대식은 한 줄기 빛처럼 눈부시게 작렬하는 그 검을 기철민에게로 집어 던졌다.
"받아라!"
그제야 뒤를 돌아본 기철민이 날아오는 티르빙을 낚아챘다. 그는 즉시 손상된 무기를 버리고 티르빙을 움켜쥔 채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 기철민이 이두 트롤을 일격에 쓰러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죽어라!"
번-쩍!
티르빙이 일순 밤하늘을 찢어놓을 듯 밝은 광채를 내뿜었다.
정대식조차도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아야 했을 정도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두 트롤 같은 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땅과 철로가 깊게 패 있고 그 앞에 기철민이 얼떨떨한 모습을 한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티르빙을 내려다보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대체 이건......?"
정대식은 그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헤르보르가 갖고 있던 무구, 티르빙이다."
"티, 티르빙이라고요?"
당황한 기철민은 말까지 더듬었다. 아마도 그 위력에 놀라기도 했을 것이고, 헤르보르가 쓰던 무기라는 말에 더 당혹했을 터였다.
그는 무기의 정체를 알고서 칼날을 이리저리 놀려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대단하군요. 이 무기는...... 마치 마력이 용솟음치는 기분입니다."
실제로 칼날 주변으로 용암이 흐르듯 밝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티르빙은 사용자의 마력과 공조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그야말로 초특급의 무기였다.
정대식은 티르빙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기철민에게 말했다.
"이건 이미 마스터급 무기로, 갈수록 진화하는 특징을 가졌다. 네가 이걸 티르브링어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겠지."
"제가...... 제가 말입니까?"
못 믿을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반문하는 기철민에게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브링어만 해도 레전드급 무기이니 그에게는 엄청난 전력이 될 터였다.
사실은 최종 단계인 티르벵거, 즉 가드니스급으로도 진화가 가능한 무구였으나 그 사실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G급의 힘이 한 인간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다는 일반론에는 정대식도 동의하는 바였고, 기철민이 그 힘을 갖기 위해 정신을 파는 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기철민이 그만한 힘을 가질만한 충분한 자격이 된다면 애써 말하지 않아도 티르빙은 자연스럽게 진화의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이다.
"이제 이 무기는 네 것이다."
정대식이 하는 말을 듣고 기철민의 표정이 요동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이만한 무기를 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철민은 강함에 대한 추구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쓸데없는 겸손을 보이거나 겁을 집어먹고 마다하는 대신, 담담하게 티르빙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정대식은 빙긋이 미소 짓고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걸 어떡하지?"
티르빙의 위력이 지나치게 강력한 바람에 철로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렇게 되면 철로를 복구하는데 한참이 걸릴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기철민이 면구스러운 기색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지 모르고...... 힘 조절을 못 했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코카트리서스 처치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함성이 들려왔고 곧 펜리르 부대원들이 용병들을 데리고 정대식에게로 다가왔다.
"코카트리서스는 다 치워버렸습니다."
"러시아 몬스터는 남다른가 했더니, 별거 아니던데요?"
"건방 떨기는."
고덕화가 하는 말에 이재우가 우쭐거렸고, 김송근이 타박을 놓았다. 그 가운데 객실 안 상황을 정리하고 온 허미래가 망가진 철로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 저건 어떻게 된 일이죠?"
그녀의 질문에는 기철민이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두 트롤과 싸우다가 망가트렸어. 다시 출발하려면 시간을 꽤 잡아먹을 것 같아."
그러자 서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있잖아요?"
그는 앞으로 나서 즉시 능력을 사용했다.
"공간 복구!"
우우우우웅!
공간이 이지러지며 곧 철로가 망가지기 전의 멀쩡한 광경이 되돌아왔다. 그것을 보고 놀란 용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들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아하니 다들 하나같이 놀라워하다 못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외심이 가득한 눈으로 펜리르 부대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나서서 인사를 해왔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많은 수가 목숨을 잃거나 낙오했을 겁니다. 이런 벌판에 버려지면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니게 되죠.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러시아 남자답지 않은 정중한 태도에 정대식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저희는 한국에서 온 펜리르 부대입니다. 저는 펜리르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정대식이라고요 하고요.」
「저는 철도국에 고용된 용병대 대장인 이고르라고 합니다만...... 한국에서 오셨다면 혹시, 오, 오, 올인원이십니까?」
이고르가 하는 말에 정대식은 놀라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세상에!」
이고르가 뒤쪽을 보며 다른 용병들을 향해 외쳤다.
「그 말이 사실이었어! 올인원이 왔다!」
곧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져나갔다.
「올인원이 왔다!」
「올인원!」
「올인원!」
정대식이 당혹해 있자니 함성을 내지르며 용병들이 정대식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정대식의 앞에 서서 전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꼭 체르노보그를 없애주십시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땅을 되찾게 해주십시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이 체르노보그를 처치하러 가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므로 정대식은 그들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체르노보그는 쓰러질 것이고 몬스터들은 사라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그 광경을 미하일 소령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뭔지 모를 씁쓸한 기색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한낱 외국인에게 나라의 운명을 떠맡기게 된 것이 못마땅한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정대식의 존재에 대한 소문을 흘린 것은 블라디미르 대령일 가능성이 컸다. 그가 정대식에게 일종의 책임을 씌워 이 상황을 쉬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니면 반군 쪽에서 조작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들 역시 정대식이 대령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잘하면 정대식이 듀라한을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렇기에 내전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정대식이 체르노보그를 사냥하는 일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것이다.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였든지 간에, 눈앞의 사람들이 가지는 간절함은 사실일 터였다. 어쩌면 그 간절함으로 인해 정대식이 헌터 협회에 모습을 드러냈던 일이 들불 번지듯 번져나갔을 수도 있었다.
체르노보그를 사냥하는 일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정대식은 반드시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겠노라고 몇 번이나 거듭해 약속해야만 했다.
* * *
소란 끝에 다시 출발한 기차는 목적지의 절반 정도밖에 가지 못하고 이르쿠츠쿠에서 멈춰 섰다. 거기서 차로 갈아타기로 하고 기차역을 벗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거리가 보였다.
그래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제법 번화한 시가지의 느낌이 났는데 이르쿠츠쿠는 이 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군인이거나 용병, 혹은 헌터들이었다.
지나는 트럭에 수북하게 실린 것도 전부 몬스터 부산물이라 근처에 몬스터들이 버글버글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심지어는 몬스터 고기를 파는 식당들도 여럿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허미래가 비위가 상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몬스터 고기를 먹다니......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정대식은 답했다.
"식량이 부족할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헌터들도 간혹 던전에 고립되면 몬스터 고기를 먹곤 하잖아."
"그래도 헌터들은 각성자이지 않습니까? 사력에 오염이 되어도 자신의 마력으로 정화할 수 있다지만 일반인들은 다르잖아요. 어떤 식으로 영향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김송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기철민이 냉소적인 투로 내뱉었다.
"굶어 죽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그들은 미하일 소령의 안내로 몇 남아있지 않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메뉴는 빵과 약간의 베이컨이 들어간 수프였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각자가 챙겨온 에너지 바로 배를 채웠다.
그러자 같이 식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힐긋거렸다. 곧 어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 광경을 보고 다른 자리에 앉아있던 군인들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를 제지했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저, 식량을 좀 살 수 없겠습니까?」
「너희에게 팔 식량 같은 건 없어.」
군인들이 그 남자를 위협하는 것을 보고 정대식이 나서 제지를 했다.
「괜찮습니다. 놔두세요.」
군인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고 정대식은 말했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에너지 바를 좀 샀으면 합니다. 저희는 이 근방에서 몬스터를 사냥 중인데 강도들이 식량을 훔쳐 갔거든요.」
그 말을 듣고 이재우가 한마디를 했다.
「아니, 헌터들이라면서 강도들에게 식량을 빼앗겼다고요?」
그러자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말이 강도들이지 아직 어린애들입니다. 몹시 굶주린 상태라 차마 식량을 도로 빼앗아올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식량을 구해보려고 하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식량에 여유분이 있다면 저희가 가진 물건과 좀 바꾸시지요.」
「뭐가 있습니까?」
「스크롤이나 포션도 있고, 술과 담배가 많습니다.」
정대식은 아공간에 쟁여 두었던 에너지 바 한 상자를 스크롤과 더불어 술 한 병과 바꾸었다. 야마환을 쓰면서 배가 고파지는 경우가 많아 혹시나 싶어 대량의 비상식량을 저장해 두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