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 전사-213화 (213/297)

# 213

현질 전사

-9권 14화

저택은 무슨 영화 속에서나 본 것처럼 고풍스럽게 생겼는데, 홀 중앙에 아치형의 멋들어진 계단이 있었다.

그 위에 러시아 군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다듬어진 콧수염이 위압감을 주는 사내였다. 정대식은 그의 살기 어린 눈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각성자로군.'

빅토르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령님.」

「그래. 빅토르.」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정대식을 턱짓하며 말했다,

「저자가 아까 말한 올인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정대식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대식이라고 합니다.」

「흠. 올인원이 탄생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내 집에 온 것을 환영하네. 식사를 준비해두었으니 같이 들지.」

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됐다. 대령과 빅토르는 몇 마디 잡담을 나누었으나 알맹이 없는 수다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빅토르가 대령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는 모양이라 거의 아부에 가까운 대화였다. 그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대식은 대령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모스크바로 간다고?」

「그렇습니다.」

「서펜트와 헤르보르를 처치했다더니 이번에는 체르노보그를 처치하기라도 할 셈인가?」

「그것은 아니고, 그곳에 있는 던전에 볼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무언지 물어도 되겠는가?」

「제가 모으는 무구가 아무래도 그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허어.......」

대령은 정대식의 어설픈 러시아어가 답답한지 도중에 영어로 말을 바꾸었다.

「위험한 일을 자초하려 하는군.」

「어쩔 수 없지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면.」

「모스크바라......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무사히 그곳까지 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주겠네. 더불어 내 휘하의 뛰어난 군인들도 붙여주지.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안전하게 모스크바까지 당도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조건이라는 말에 정대식은 한쪽 눈썹을 쓱 들었다.

「조건이라 하심은.」

대령은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문득 물었다.

「반군 우두머리를 왜 듀라한이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글쎄요.」

「놈의 머리에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있는데도 아무도 잡지를 못해서야. 그래서 머리가 없는 게 아니냐고 듀라한이라 부르는 거지.」

「그렇군요.」

그쯤 되니 대령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대식은 잠자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알다시피 이 나라는 현재 내전 중이야. 반군 놈들의 본거지가 몬스터들의 영역에 숨겨져 있어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자네라면 그곳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대령은 근사한 콧수염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내게 듀라한의 머리를 가져다준다면 현상금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사례를 하겠네. 더불어 자네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재화와 인력을 제공하겠어. 어떤가?」

정대식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듀라한은 파워 랭킹 10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는 강자가 아닙니까? 그에 비해 저는 애송이일 뿐. 과연 제가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요?」

대령은 씩 웃었다.

「겸손을 떠는군. 약한 척하는 것은 동양인들의 특징인가?」

대령의 말속에는 인종차별적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정대식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더구나 그는 7성 무구 중 하나인 델라니포스를 갖고 있죠. 그가 듀라한이라 불리는 이유에는 말씀하신 것도 있겠지만 그 마갑을 갖고 있어서 그런 깃을 겁니다. 그것이 실로 신출귀몰하니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무엇보다...... 현재로썬 그 무구를 노리는 자가 있습니다.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테지요.」

「광필두.」

대령이 어색한 발음으로 부르는 이름을 듣고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러시아에 오기 직전 미국에서 그자와 만났었습니다. 그자는 이미 7성 무구 중 네 개의 무구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이능 파괴라는 초유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능 파괴라는 대목에서 대령은 움찔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연신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능 파괴 능력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이능은 신의 영역이니 알 길이 없지요.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실토를 했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기에 7성 무구를 네 개나 모을 수 있었던 것인가?」

「아무래도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어찌 되었든 조만간 그자가 듀라한을 찾아갈 겁니다. 델라니포스를 탈취하려고요.」

대령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됐다.

「그리되면 듀라한이 7성 무구를 빼앗기고 이능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겠군.」

「그렇습니다.」

그때 별안간 대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만약 듀라한이 광필두를 쓰러트리고 자신의 무구를 지켜낸다면? 아니지...... 광필두가 갖고 있던 7성 무구를 모조리 손에 넣게 된다면? 우리 러시아에 있어서는 재앙이 아닌가!」

정대식은 내심 혀를 찼다. 듀라한의 문제는 광필두에게 맡겨두란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작정이었지만 대령은 바보가 아니었다. 정대식은 그를 바보 취급한 것을 반성하며 말했다.

「물론 그 또한 위험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그것은 광필두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광필두를 이용하라고?」

「그는 필시 듀라한에게서 델라니포스를 빼앗기 위하여 입국할 것입니다. 그때 듀라한의 목과 그가 가진 무구를 교환하자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든 듀라한과 광필두의 일전은 이루어질 것이고, 모든 것이 끝나고 났을 때.......」

「나는 사이에서 이점을 얻으면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하이에나나 다를 바 없는 비겁한 작전이었다.

두 사람이 7성 무구를 놓고 겨루는 것을 방조했다가 결판이 났을 때 급습하여, 지친 쪽을 처치하고 7성 무구를 탈취함과 동시에 골치 아픈 반군을 치워버리라는 계략이었다.

그것을 정대식 스스로 입에 올린 것은 내전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심경에서였다.

만약 대령에게 뒷덜미를 잡혀 듀라한 사냥을 떠나게 될 경우 여러 가지로 엮여 곤란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보다는 모스크바로 가서 마기전을 획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거기에 체르노보그가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로, 다른 데 관여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정대식은 듀라한이든 광필두든 러시아 군대든, 7성 무구를 갖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광필두만 해도 7성 무구를 모으고 있다는 이유로 주위 상황에 휘둘려 결국에는 그 힘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지 않았던가?

듀라한이나 러시아 군대는 가드니스의 힘이 더 절실한 상황이었다. 만약 7성 무구를 온전히 갖추게 된다면 시베리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를 굴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설령 더 이상 7성 무구를 모으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위험요소로 남아있게 될 터였다. 정대식이 보기에 7성 무구는 영영 사라져버리는 편이 낫다. 그 정체를 온전히 지워버리고 뿔뿔이 흩어버리는 것만이 답이었다.

'어느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되든지 나는 관심 없다. 7성 무구가 다 모이기 전에 그것을 탈취해 없애버리겠다.'

7성 무구 중 6개가 모이기 전에 마기전을 먼저 완성하고 1조를 획득하여 상점 업그레이드를 할 수만 있다면, 우위를 점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대식의 계획은 듀라한과 광필두, 러시아 군대가 삼파전을 벌이도록 내버려둔 뒤 그동안 힘을 비축하여 마지막 승자에게서 7성 무구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원만한 해결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블라디미르 대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표를 찔러왔다.

「그동안 당신은 뭘 하려는 것인가?」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오로지 그것을 위해 러시아로 왔다?」

「그렇습니다만.」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반군과 접촉해 놓고.」

정대식은 하마터면 놀라는 기색을 드러낼 뻔했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낮에 만난 그 작자들이 반군이었나 보군요. 제가 올인원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편이라 이런저런 시비를 많이 당합니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자넬 찾아왔지? 듀라한에게 힘을 보태라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급습을 하기에 괴한이라 생각하고 쫓아 보냈습니다.」

「올인원씩이나 되는 능력자가 내전 중인 이 땅에 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자네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판도가 완전히 갈릴 수 있으니까.」

「저는 외국인이고,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블라디미르 대령은 눈을 부릅뜨며 식탁을 꽝 내리쳤다.

「누구의 편도 아니라면 정의의 편에 서라! 듀라한을 처치해! 그러고 나서 광필두에게서 델라니포스를 지키는 것이다.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정대식은 눈썹을 찌푸렸다. 대령 역시도 정대식을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정대식이 듀라한을 처치하고 7성 무구 중 마갑을 손에 넣으면 응당 광필두와 맞붙게 될 것이다.

그럼 블라디미르 대령 역시 마지막 승자를 죽이고 7성 무구를 빼앗을 작정이었다.

파스스스.......

정대식은 대령이 내려친 식탁 일부가 모래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언제 소리쳤느냐는 듯이 온화한 표정으로 되돌아간 대령은 달래는 투로 말했다.

「말했다시피 듀라한을 처치해준다면 그 공은 잊지 않겠다. 자네를 도와 광필두를 막는데 전력을 다하도록 하지. 더불어 자네가 찾고자 하는 물건을 획득하는 데도 도움을 주겠네. 쌍방에 피차 나쁠 것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부디 내 부탁을 받아들여 주면 좋겠군.」

말이 부탁이지 협박이자 강요였다.

물론, 정대식은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실력 행사로 이곳을 벗어난다면 차후의 일이 복잡해질 터였다.

반군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쓸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대의 추격을 받을 테니 모스크바까지 가는 일이 어려워진다.

서지원의 능력으로는 장거리 공간이동이 불가능했다. 모스크바까지 포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대식은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듀라한 대신 다른 것을 드리죠.」

「다른 것이라면......?」

정대식은 눈을 똑바로 들어 대령을 쳐다보고 말했다.

「체르노보그의 목은 어떻습니까?」

* * *

"그래서, 체르노보그를 잡아다 주겠다고 했단 말입니까?"

이재우의 질문에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와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는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는 중이었다.

말로는 펜리르 부대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끔 돕는 거라지만 실제로는 정대식이 뻘짓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어젯밤, 정대식의 제의를 듣고 블라디미르 대령은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만 곧 천둥처럼 쩌렁쩌렁하게 큰소리로 웃어대었다.

「하하하하!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리겠다고?」

「그렇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정대식은 자신을 깔보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에 기분이 좀 상했다. 그는 심상한 것을 숨기지 않고 대령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제가 아니라면 누가 체르노보그를 쓰러트릴 수 있겠습니까?」

「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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