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현질 전사
-9권 13화
정대식은 의도적으로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갔다. 쓰레기가 흩어져 있는 음침한 뒷골목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앞뒤를 험상궂은 사내들이 가로막았다.
고작 이런 놈들을 보내서 자신을 잡으려는 건가 싶어 코웃음을 치려는 찰나, 별안간 머리가 아찔했다.
'아니?'
정대식은 서둘러 스킬을 사용했다.
"각성."
파아아아앗!
마력의 빛이 그의 머리를 휘감아 돌며 순식간에 의식이 맑아졌다. 정대식은 이미 쓰러져 있는 서지원에게도 각성 스킬을 사용하고 낭패한 모습이 된 괴한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 아, 젠장. 러시아였지."
정대식은 별수 없이 엔트로피를 내세웠다.
「너희들은 누구냐.」
사내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경계하는 표정으로 정대식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들 뒷전으로 깡마르고 머리가 붉은 데다가 베레모를 눌러쓴 남자가 나타났다.
「......과연, 올인원이라 이건가. 이 정도 수작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지?」
「나랑 한판 해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용건부터 말해주면 좋겠는데.」
「한판 해보겠다 하니 사양하지 않겠다. 하이 피버!」
붉은 머리 남자가 시동어를 외치자 별안간 온몸이 후끈하게 뜨거워졌다. 순식간에 머리에 열이 치솟으며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뭐지? 감긴가?'
정대식은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눈앞으로 달려드는 괴한에게 엔트로피를 보냈다.
"엔트로피!"
<강력권.>
엔트로피가 내지른 주먹을 맞고 괴한이 헉 소리를 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겉보기론 어린 소녀에 불과한 엔트로피의 괴력에 놀란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는지 곧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석화.」
꾸득, 꾸드드! 꾸드드득!
남자의 피부가 거칠게 일어나며 돌처럼 단단해졌다. 그와 엔트로피가 다시 맞붙고 정대식은 의식으로 경고했다.
'저지만 해!'
그런 뒤 서지원에게로 달려가는 괴한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서지원은 예전의 그 허수아비 같던 마법사가 아니었다.
"공간이동!"
덮쳐드는 사내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그는 뒤로 돌아가 리치 서클렛을 사용했다.
"마력 흡입!"
쏴아아아!
남자의 마력이 단번에 서지원에게로 빨려 들어가며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광경을 본 붉은 머리 남자가 서둘러 서지원에게 공격을 가했다.
「에플렙틱!」
"끄어어......!"
거기에 당한 서지원이 갑자기 벌렁 쓰러지더니 전신을 덜덜 떨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정대식은 서둘러 각성 스킬을 사용했으나 소용없었다. 다급한 맘에 치료 스킬을 사용해봐도 소용이 없자 붉은 머리 남자가 말했다.
「내 능력은 그런 마력 처치로는 소용없어.」
"내 동료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엔트로피는 석화된 사내와 싸우는 중이었기에 붉은 머리 남자와 말할 여유가 없었다. 정대식은 그냥 한국말로 소리쳤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뉘앙스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붉은 머리 남자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나랑 한판 해보겠다고 한 건 네 녀석일 텐데?」
"그래? 진짜 한판 해보자 이거지!"
정대식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붉은 머리 남자에게 마기전을 사용했다.
"마기장!"
슈팟!
구슬 모양을 한 마기장이 붉은 머리 남자에게로 날아갔으나 그는 다른 두 명의 사내들과는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누모니아!"
그의 능력이 발휘되기 무섭게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타오르며 속에서 뭐가 왈칵 치솟아 올랐다. 정대식은 몸을 뒤틀며 허리를 구부렸다.
"커억!"
솟구치는 뭔가를 토해내고 보니 벌건 게 피였다. 각혈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정대식은 자신이 당한 일이 무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격렬한 기침과 함께 숨쉬기가 극히 힘들어진 것을 깨닫고, 붉은 머리 남자가 가진 이능의 정체에 대해 눈치챘다.
"벼...... 병인가."
처음 붉은 머리 남자의 수작에 걸려든 후로 줄곧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눈앞이 몽롱한 것이 마치 열병에 걸린 것과 같은 증상이었는데, 각혈과 기침이 연거푸 나오며 가슴이 타는 듯이 아픈 것을 보니 그자의 능력이 무엇인지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붉은 머리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을 자유자재로 발동시킬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각성이나 치료 같은 스킬도 듣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상에 관련하는 능력으로 질병에 관계하지는 못했다.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은 힐러 중에서도 최상위급의, 극히 일부만이 갖고 있었다.
정대식도 갖고자 한다면 못 가질 능력은 아니었으나 현재로썬 남자의 이능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세상은 넓고 각성자는 다양하다더니...... 별의별 능력이 다 있군.'
하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면목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능력의 발원지는 눈앞의 붉은 머리 남자였다. 그자를 쓰러트리면 끝나는 고로, 정대식은 심장을 토해낼 것처럼 기침을 하며 엔트로피를 불렀다.
"엔트로피......!"
석화된 남자를 때려눕힌 엔트로피는 곧장 부름에 응했다. 붉은 머리 남자는 엔트로피가 덤벼들자 움찔했으나 금방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하이 피버!」
엔트로피가 겉보기론 영락없이 어린 소녀라 방심한 모양이다. 물론, 더 치명적인 질병을 불러왔다 하더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엔트로피는 사람이 아니니까,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엔트로피는 남자의 공격을 무시하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강화.......>
"죽이지 마!"
정대식이 소리치자 엔트로피는 강력권을 사용하는 대신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어억!
그래도 강화된 주먹으로 때렸으니 엄청나게 아팠을 것이다. 붉은 머리 남자는 엔트로피에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지며 나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크아악!」
붉은 머리 남자가 명치를 붙잡고 뒹굴자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몸을 괴롭게 하던 증상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정대식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고 즉시 마기장을 날려 남자를 아예 가둬버렸다. 그러자 포로 신세가 된 붉은 머리 남자가 쿨럭거리고 잔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여자애는.......」
「사람이 아니다. 마력으로 구현화한 서번트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
「서번트라, 과연.」
남자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정대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정말로 올인원이 맞는 모양이군.」
「내가 올인원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날 시험해봤던 건가?」
「아, 그런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한 번쯤 싸워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왜 날 습격했지? 너희들, 정체가 뭐냐?」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붉은 머리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목이 없는 말 그림을 형상화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빛을 내는 것을 보아하니 마력으로 새겨져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해방대의 일원인 사샤라고 한다. 너희들은 무슨 목적으로 러시아에 온 것이냐.」
「개인적인 용건도 있을뿐더러...... 반군의 우두머리인 듀라한에게 전할 말이 있다.」
「반군이 아냐! 해방군이다. 아무튼, 전할 말이라는 게 무엇이지?」
정대식은 잠시 고민했다. 눈앞의 사샤라는 남자에게 할 말을 전해도 될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굳이 비밀스럽게 전할 말도 아니었기에 정대식은 입을 열어 듀라한에게 전갈을 보냈다.
「7성 무구를 모으고 있는 남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겠지.」
「광이라는 남자 말인가.」
「그래. 그자가 곧 듀라한이 갖고 있는 델라니포스를 가지러 올 것이다.」
「그래서, 뻔한 사실을 가지고 경고라도 하겠다는 건가?」
정대식은 코웃음을 치는 사샤에게 당부했다.
「그자, 광필두는 이능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역시, 아직까지 그 사실은 모르고 있었는지 사샤는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성자 연맹은 광필두의 능력을 공표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공적으로 지칭하기는 했으되, 7성 무구를 모으고 있고 그 의도가 불순한 관계로 지극히 위험하다는 사실만을 밝혔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능 파괴 능력이라는 것은 함부로 인정할 만한 게 아니었다.
본인 입으로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말을 하기는 했으나, 100% 확인된 바가 아닐뿐더러, 만약 광필두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만인이 알게 된다면 모든 각성자가 그에게 공포감을 가지게 될 터였다.
즉, 그가 7성 무구를 모으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나서는 최희와 같은 인물도 있겠지만 모든 헌터들이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정대식은 광필두의 능력에 대해 침묵하는 각성자 연맹의 태도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만간 그를 맞닥뜨리게 될 듀라한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사샤는 도무지 안 믿긴다는 표정을 하고 되물었다.
「이능 파괴 능력이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어떻게 인간이 신이 준 능력을 파괴한다는 것이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자이니 듀라한에게 경고해주는 게 좋을 거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알겠다.」
그는 곧 널브러진 동료들에게 포션을 들이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말했다.
「만약 네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는 내게 거짓말을 한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정대식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고 그는 곧 동료들과 함께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날 저녁, 정대식은 혼자서 헌터 협회에 다시 방문했다.
본래는 서지원과 동행할 생각이었으나, 그가 간질 발작을 겪는 바람에 충격이 상당했던 것이다. 호텔에서 좀 쉬게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다른 대원들을 뿌리치고 혼자서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선 이미 정대식을 맞이했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였는데 거구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재킷에 온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그와 다소 나이가 어린 이반이라는 남자와 함께 차에 몸을 싣고 도시 외곽으로 나갔다.
거기에 군부대에 딸린 주택단지가 있었는데, 주택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숲을 지나자 멋들어지게 지어진 저택 한 채가 나타났다.
「저기가 블라디미르 대령의 집이야.」
빅토르가 하는 말에 정대식이 엔트로피를 통해서 '근사하네요'라고 말을 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소 서투르더라도 직접 말하는 편이 좋겠어. 그자는 아주 까다로우니까. 이곳에서는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
빅토르는 대령에게 밉보여 좋을 것이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가 통행증을 써주지 않으면 모스크바까지 가는 일이 가시밭길이 될 거라는 거였다.
목적지에 당도할 때까지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정대식은 알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엔트로피의 도움을 받아서 러시아어 말을 조금 연습했다.
차는 금세 저택 앞에 다다랐다. 차에서 내리자 어두컴컴한 밤하늘에서 내리는 냉기가 느껴졌다.
정대식은 되찾은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를 옷 밑에 껴입고 있었기에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했지만, 옷이 얇은 빅토르나 이반은 허연 입김을 풀풀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가 요란하게 짖는 가운데 곧 저택 입구에서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일행을 손짓했고 빅토르는 이반을 차에 남겨두고 정대식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