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현질 전사
-9권 6화
정대식은 하마터면 광필두에게 그의 신에 관해 물어볼 뻔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범상치 않은 신에게 선택을 받았으니 그런 능력을 가진 게 아니냐고...... 최후의 전쟁을 대비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거의 입 밖에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면 정대식도 데모크리토스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정대식이 일반적이지 않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정대식은 간신히 그 말을 집어삼키고 대신에 다른 것을 물었다.
"강철우는 어째서 네게 그걸 다 모으라고 한 거지?"
"그건 모르겠다. 그저...... 나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거기까지 말한 광필두는 이야기가 길어진다 싶었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여기서 벗어날 뾰족한 수가 있나?"
"......안에서는 결코 깨트릴 수 없는 결계라는데. 일단은 충격을 가해보는 게 낫겠지. 내가 다시 한 번 너를 엔트로피로 강화하겠다. 그럼 티르빙으로 이 공간을 잘라봐."
"알겠다."
정대식은 다시 엔트로피를 광필두에게 보내고 강화를 적용했다. 이번에는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광필두의 의식이 다르게 적용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 티르빙은 아까처럼 칼날이 길어지는 대신 엄청나게 두꺼워졌다. 마치 방망이처럼 마름모꼴로 자라나 둔기와 같은 형상이 되었다. 광필두는 그것으로 바깥세상과 안쪽을 유리시키고 있는 무언가를 후려쳤다.
꾸우-----------우우우웅!
티르빙이 후려친 자리의 공간에 파문이 일어나면서 주위가 일렁거렸다.
그러나 결계는 깨어지지 않았고 파문이 가라앉자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바깥에선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태희가 광영식을 설유란에게 맡기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는 것을 리즈가 만류하고 있었다.
아마도 안에서 이 결계를 깨트리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정대식을 꺼내주기 위해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광필두 너 혼자서는 무리일지 몰라도 나와 김태희가 가세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네 말은, 최희 말인가?"
정대식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최희란 걸 알아봤지?"
광필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누가 봐도 최희잖아."
"......."
그녀가 쓰고 있는 뿔테안경은 그냥 안경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특수한 암시가 걸려있어 안경을 쓰고 있는 동안은 최희를 전혀 다른 사람, 즉 김태희로 인식하게끔 했다. 그런데 그 암시를 단번에 꿰뚫어본 것이다.
"아무튼, 최희라는 걸 알고 있다면 더 이해가 빠르겠지. 그녀가 밖에서 공격을 가하면 우리도 같은 지점에 공격을 가한다."
"알겠다. ......그런데 바깥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는데."
별안간 보물창고의 문이 열리며 각성자로 여겨지는 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남자 둘 여자 하나로 구성된 삼인조로 그 외양이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그들이 나타나자 리즈가 의기양양해 말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펜리르 부대 소속이라 하더라도 이 세 사람을 혼자서 상대할 순 없을 거예요. 이들은 내가 엄선한 자들로만 구성된 이모탈 공격대원들이니까.」
리즈가 그렇게 말하자 김태희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모탈인지 뭔지 내 알 바 아니고. 당신의 목적은 대장님을 영입하는 게 아니었나? 이런 데서 광필두와 공멸시킬 참이야?」
「정대식 한 사람만이라면 꺼낼 방도가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협조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광필두를 죽이고 나면 풀어줄 생각이에요.」
「멋대로군!」
「멋대로인 것은 정대식이지요.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올인원씩이나 되는 사람이 값싼 동정심에 휘말려 잘못된 선택을 하다니.」
「하지도 않은 일을 처단하려 드는 너희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하나?」
「광필두의 위험성은 이미 검증된 바입니다. 끝까지 광필두를 옹호하겠다면 저희로서도 정대식 씨를 꺼내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겠군. 덤벼!」
김태희는 으름장을 놓았고 리즈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비무장 상태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죠?」
「내가 비무장 상태라고 누가 그랬어?」
김태희는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외쳤다.
"호라갈레스!"
번-쩍!
꽈르르르르릉!
그녀가 외치기 무섭게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쳤다.
다음 순간, 김태희, 아니...... 최희의 손에는 번갯불로 만들어진 것 같은 창이 들려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리즈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최, 최희?!」
최희는 그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선공을 가했다. 그녀가 호라갈레스를 한번 휘두르자 천둥 번개가 사방을 휩쓸었다.
파지지지직!
꽈르르르릉!
좁은 공간에 천둥 번개가 치고 있으니 완전히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곳곳에서 기물들이 파손되고 엎어지며 조명이 깨지고 천장이 금이 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자 제이드와 리즈가 기겁해 물러섰고 대신에 이모탈 삼인방이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는 앞으로 나서려다가 주춤했다.
"썬더 스톰 리콜!"
우르르르릉- 꽈과과광!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과 함께 그들 앞에 뇌전의 야수가 나타났다. 금빛 갈기를 하고 전신에 번개를 튀기던 그것이 이모탈 삼인방에게로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어!"
그 틈을 타 최희는 즉시 몸을 돌려 뛰어왔다. 그리고 호라갈레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정대식도 때를 놓치지 않고 광필두를 준비시키고 자신 역시도 강화 강력권으로 무장했다.
최희의 호라갈레스가 끌어내린 낙뢰가 결계를 때린 찰나.
광필두와 정대식도 정확히 같은 자리를 타격했다.
꽈-----------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그들을 단절하고 있는 공간이 휘청했다.
큰 파문이 일어나며 광필두와 정대식이 고립되어 있는 공간 자체가 울렁거렸다. 마치 대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어지럼증 속에서 마침내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결계가 깨어져 나갔다.
쩌저정-!
쇠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어느샌가 둘은 원래 있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주변엔 결계를 만들어내었던 나무 상자 조각이 쪼개진 채 굴러다녔다. 정대식은 그것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리즈! 당신의 계획은 이미 틀렸어, 이제 그만 포기해!」
정대식은 광필두가 강철우의 유지를 따라 7성 무구를 모으는 거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가 그 힘으로 세계 정복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니, 그를 제거할 명분이 없다고 외치려 했다.
물론, 그가 가진 이능 파괴의 능력은 각성자들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위협이 되는 것은 거대한 힘을 갖고 있는 상위 랭크의 헌터들이 전부 해당이 되었다.
단순히 그의 능력이 갖고 있는 특이점으로 인해 그가 배척받아선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에 그가 정대식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런데 그때였다.
모든 것은 찰나에 일어났다.
* * *
"으억!"
정대식은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그의 곁에서 사라진 광필두가 제이드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정대식은 그쪽으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그만둬!"
우두둑!
정대식의 외침도 소용없이 광필두는 제이드의 목을 단번에 꺾었다. 그리고 연거푸 뒷걸음질 치는 리즈에게로 손을 뻗었다. 정대식은 그녀를 밀치고 광필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이게 무슨 짓이야!"
티르빙의 빛이 눈앞에서 번뜩였다.
<변화.>
"강화!"
꽈과광!
티르빙과 방패 형태로 변신한 엔트로피가 서로 맞부딪치며 마력을 피워 올렸다. 파란 불똥이 사방팔방으로 뛰는 가운데 광필두가 팔을 크게 휘둘러 정대식을 밀어내고 뒤로 훌쩍 뛰었다. 그리고 멀거니 선 설유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식이를 데리고 먼저 피해라."
설유란은 찰나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자신을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혼란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따를 것이라는 광필두의 계산은 들어맞았다. 그녀는 혼자 나동그라져 있는 광영식을 데리고 스크롤을 찢었다.
슈팟!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고, 정대식은 엔트로피의 형태를 무기로 다시 변화시키며 말했다.
"어째서 제이드를 살해한 거지? 이러라고 널 도와준 게 아니야!"
광필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난 도와달라고 한 적 없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다만 네 친절을 생각해 경고하겠다."
"경고? 무슨 경고?"
광필두는 기이한 이채가 감도는 눈을 하고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궁금했지. 왜 하필 신은 내게 이런 능력을 준 것일까? 어째서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하등 쓸모없는, 각성자들의 능력을 파괴하는 재주를 갖게 된 것인가? 난 그 대답을 줄곧 찾지 못했다. 심지어는 나를 거두어준 강철우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어."
강철우를 상기하듯 조금 고개를 들어 올린 광필두는 천천히 뇌까렸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지. 내게 7성 무구를 모으라고 말한 강철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거야. 내 능력은 마땅히 쓰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정대식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땅히 쓰여야 한다니...... 지금 그 소린 각성자들의 이능을 파괴하고 다니겠다는 소린가?"
광필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7성 무구를 모으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렇게 할 거다."
"그렇게까지 7성 무구를 다 모아서 뭘 하게?"
"내 경우를 봐도 그렇고, 사실 간단하지. 힘이란 건 쓰라고 있는 거야."
"광필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힘이라는 게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함정을 파서 나를 제거하려고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힘이, 내가 두려우니까 이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거야. 덕분에 확실해졌어. 힘이란 건 그냥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대식은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았다.
"만약 네가 손에 넣은 힘이 몬스터가 아닌 엉뚱한 곳을 향한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광필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전대미문, 유일무이한 올인원의 존재가 나타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나? 어쩌면 그게 날 막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
정대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멍청한...... 아냐! 바보 자식아! 내 힘은 언젠가 닥쳐올지도 모를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다!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거라고!"
"그렇다면 날 세상의 종말로 규정해라."
거기까지 말하고 광필두는 별안간 손에 들고 있던 티르빙을 휙 던졌다. 그가 공격을 가한다 생각한 정대식은 깜짝 놀라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광필두가 스크롤을 꺼내 찢는 걸 막지 못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보지."
슈팟!
순간이동 마법이 광필두를 낚아채 가버렸고 빈 공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정대식은 티르빙을 주워들고 거칠게 기둥을 후려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광필두를 돕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던 리즈가 옳은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이 맞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광필두는 이곳에 사람들을 시험하러 온 것이었다. 만약 그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제거하려 들지 않았더라면, 광필두도 생각을 달리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정대식의 실책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리즈가 아직도 최희와 씨름하고 있는 이모탈에게 소리쳤다.
「그만둬요! 상황 다 끝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