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현질 전사
-8권 22화
그가 헤르보르를 막기 위해 다시 언데드 서펜트를 조종하여 파도를 일으켰으나, 그 기세가 아까만 못했다.
그것은 겨우 헤르보르의 무릎을 때리는 정도에 그쳤고, 이미 몸의 불을 꺼트린 헤르보르에게 그것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티르빙을 단단히 움켜잡은 헤르보르는 허리를 있는 힘껏 틀어 다시 한 번 빛을 내쏘았다.
그것이 정확히 유태훈이 탄 헬기로 날아갔으나.......
쩌어어어엉!
불구슬을 막아 냈던 것과 같은 방어막이 한 번 더 생겨났다.
그 방어막을 만들어 낸 사람은 대단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티르빙을 정통으로 맞고도 파쇄되지 않고 그 공격을 버텨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티르빙은 실로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구로 따지자면 마스터급은 충분히 능가하는 수준인 게 분명했다.
놀랍게도 방어막에 박힌 빛줄기가 용수철처럼 빙빙 휘었다.
그러더니 그게 도로 펴지며 다시 한 번 더 방어막에 충격을 가했다.
어찌어찌 한 번의 공격은 막아 냈으나 두 번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방어막이 '파캉!' 하고 거울 깨지는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하지만 이미 헬기가 방향을 꺾은 뒤였으므로, 빛줄기는 아슬아슬하게 헬기를 스쳐 지나가 바다에 떨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티르빙은 이미 헤르보르의 손 안에서 빛을 불사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쏘면 끝이다!'
정대식은 유태훈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이게 한계라고 판단했다.
한 번만 더 헤르보르가 티르빙을 날리면 헬기에 직격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유태훈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헬기를 버리고 탈출해 바다로 뛰어내렸다.
남아 있는 다른 한 대의 헬기도 황급히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고, 헤르보르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추락하는 헬기를 향해 빛줄기를 던지려고 했다.
'지금이다!'
정대식은 직감적으로 지금이 헤르보르를 공격할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헤르보르의 몸이 충분히 식었고, 놈의 정신이 헬기 공격에 팔려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대식은 벼락처럼 튀어나갔다.
<강화.>
"반격권!"
그는 정확히 헤르보르가 빛줄기를 내던진 순간에 그 궤적으로 끼어들었다.
눈앞에 불타는 유성과도 같은 빛이 날아들었고, 정대식은 도리 없이 티르빙에 직격당했다.
"크아-------------."
비명도 끝까지 내지를 수가 없었다.
전신을 강타하는 엄청난 고통!
티르빙은 헤르보르에게나 창인 것이지 인간인 정대식에게는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몇천 도에 다다르는 열기 그 자체에 몸을 내던진 것이다.
제아무리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에 의해 보호받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정대식은 자신의 입과 혀와 목이, 손끝과 발끝이, 전신이 몽땅 녹아 버렸다고 생각했기에 소리를 내지르지 못했다.
그저 정신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이 불타는 통증에 소스라쳤다.
세포 하나까지도 모조리 타 버리는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이었으나, 정대식은 견뎌 낼 수 있다고 자기 세뇌를 했다.
그것은 레벨 4로 업그레이드한 관측 덕분이었다.
레벨 4가 된 관측은 몬스터의 이름만으로도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자신의 스펙과 비교, 분석을 할 수 있었다.
즉, 몬스터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수치로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정대식은 헤르보르 공략에 나서기 전에 이미 놈의 최대 공격력이 얼마인지를 알고 있었다.
헤르보르의 최대 공격력은 정대식이 가진 방어력을 상회했다.
즉, 헤르보르가 전력을 다해 정대식을 공격한다면 정대식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즉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헬기 하나를 격추시키는 데 헤르보르가 그만한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정대식은 놈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있다는 소리였고, 그렇다면 반격권을 쓸 수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정대식은 어느 순간엔가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전부 타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는 그것을 견뎌 내느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는 살아 있었다.
숨통이 멀쩡히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헤르보르의 티르빙이 가한 공격력이 그대로 정대식의 공격력이 되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정대식 본인의 공격력에 티르빙의 공격력까지 더해져, 정대식의 주먹이 새파란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곧 막 태어난 별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었고 티르빙의 빛을 압도했다.
순간적으로 밤이 지워진 가운데, 정대식은 마침내 반격권을 헤르보르의 가슴 한가운데로 때려 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기합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정대식은 온몸을 날렸다.
그의 주먹은 화산석과 같이 새카맣게 변한 헤르보르의 가슴을 깨부수며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정대식의 팔꿈치와 어깨가 모조리 파묻히고, 곧 전신이 주먹에 휘감긴 강력한 힘에 딸려 헤르보르의 몸속으로 쑥 파고들어 갔다.
정대식은 승리의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헤르보르의 몸 한가운데 자리한 심장만 깨부순다면, 이 싸움은 정대식이 이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무언가의 충격이 정대식의 전신을 때렸다.
정대식은 주먹을 내리꽂던 기세 그대로 뒤로 튕겨 허공을 날았다.
정대식의 공격에 헤르보르의 거대한 형체는 산산조각이 나 부서지고 있었다.
잿더미처럼 무너져 내리는 헤르보르의 가슴속에서 한 가닥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사조......?'
헤르보르의 약점, 심장, 혹은 핵심이라 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불타는 새와 같은 형상을 하고서 밤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정대식은 그것을 놓치면 헤르보르를 끝장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가 던전이라면 저것까지 죽여 없애지 않고서는 공략을 끝마치고 마정석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던전이 아니더라도 저 새를 그냥 보내 버리면 언제든지 헤르보르가 다시금 나타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을 막기 위하여 정대식은 바다 위로 떨어지면서 나직하게 뇌까렸다.
"야마환, 저 새를 잡아먹어라."
쉬잇!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야마환에서 빠져나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곧 흉악한 이빨이 나타나 밤하늘로 승천하는 불사조를 붙잡아 뜯어먹었다.
불타는 날개가 산산조각 찢기고 불꽃이 깃털처럼 사방팔방으로 흩날렸다.
곧 그마저도 재와 불똥이 되어 사라지고 이윽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가운 바닷물이 정대식의 전신을 때려 왔다.
첨벙!
정대식은 검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서둘러 비상 탈출용 수중 로켓을 작동시켰다.
곧 몸이 수면 위로 확 솟구쳤고, 침착함을 되찾아 출력을 줄이자 저쪽에서 모터보트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오래지 않아 정대식은 피닉스 공격대원들에 의해 구조되어 보트 위로 끌어올려졌다.
마침 그 보트에 유태훈이 타고 있었다.
그는 흥분과 피로가 뒤섞인 표정으로 정대식을 붙들고 외쳤다.
"정말 굉장해!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일격에 저런 괴물을...... 아니?"
정대식의 양어깨를 붙잡고 있던 유태훈은 경악해 그의 몸을 더듬거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방어구가 손상된 거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갑자기 왜 이렇게 몸이 말랐죠?"
그 말을 듣고서야 정대식은 자신의 팔다리가 장작개비처럼 말라비틀어진 것을 보았다.
어찌나 몸이 쪼그라들었는지 블랙 드래곤 스킨 아머가 헐렁헐렁할 정도였다.
마기전은 아예 팔에서 벗겨지려고 들었다.
야마환의 부작용인 게 분명한데, 그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카니발 옥토퍼스 수백 마리를 잡아먹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잡아먹은 게 강대한 몬스터라서 그런 것인가?'
정대식은 곧 까무러칠 것 같은 극심한 허기에 신음했다.
그는 누가 칼로 푹푹 쑤시는 듯 쓰리는 위장을 붙잡고 엔트로피를 불렀다.
"에, 엔트로피."
<부르셨습니까, 정대식 님.>
헤르보르와 맞붙었을 때의 충격으로 사라졌던 엔트로피는 다시금 실체화가 되어 나타났다.
정대식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엔트로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걸...... 사겠어."
<무엇을 말입니까?>
"그거 말이야, 그거......."
정대식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배고파서 말할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배를 싸안은 채로 모터보트 바닥에 고꾸라졌다.
"대장님! 대장님!"
유태훈이 요란하게 부르는 소리에도 대꾸를 못하고 그는 끙끙 앓기만 했다.
* * *
정대식은 즉시 방어 기지 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사실 딱히 치료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순전히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라 힐도, 큐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포도당 링거를 투여받았을 뿐이다.
정대식은 링거를 꽂은 채로 허겁지겁 고칼로리 영양 음료를 들이켰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입에 밀어 넣는 그를 보고 의사가 아연한 듯이 말했다.
"그간 수많은 각성자들을 치료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입니다. 단시간에 사람이 기아 상태에 이를 수가 있다니. 몸에 지방은 물론이거니와 근육까지 다 빠져나가 뼈도 약화된 상태입니다. 모든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능력의...... 우걱우걱. 후유증일 뿐입니다. 꿀꺽. 너무 염려하지...... 쩝쩝. 마십시오."
의사는 먹느라고 정신없는 그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정대식은 혼자 남겨지기 무섭게 엔트로피를 다시 불러내 말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안 되겠어. 아무래도 보통의 음식으로는 부족하니까 그걸 사야겠어."
엔트로피는 한숨을 팍 쉬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거 있잖아, 그거...... 요정의 빵!"
야마환을 쓸 때마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정대식은 무식하게 음식을 먹어 치우느니 좀 더 효율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했다.
그 결과 발견해 낸 것이 상점의 아이템 판매 창에서 찾아낸 요정의 빵이었다.
이것은 원래 일종의 비상식량 개념으로 하나만 먹어도 사흘 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깃들어 있었다.
하나에 무려 2억이나 하는 엄청난 가격이었지만 그 간편함과 유용성을 생각해 보면 그리 비싸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요정의 빵을 다섯 개...... 아니다, 열 개 구입해 줘."
<요정의 빵을 열 개 구입하고 20억을 차감합니다.>
곧 정대식의 눈앞에 벽돌처럼 생긴 요정의 빵이 후두둑 떨어졌다.
정대식은 황급히 그걸 하나 집어 우득우득 씹어 먹었다.
솔직히 말해 별맛은 없었지만,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즉시 반응이 왔다.
위장으로 넘어간 요정의 빵이 순식간에 소화가 되면서 몸 곳곳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