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현질 전사
-8권 20화
기철민이 격양된 어조로 하는 말에 정대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불같이 일갈했다.
"살다살다 이렇게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듣는군! 내가 얼빠진 네놈이나 남들 눈을 의식해서 구색 따위를 신경 쓸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왜......?"
"평소엔 똑똑한 놈이 자격지심으로 머리가 굳었군! 그 이유는 설명해 줄 가치도 못 느끼겠으니까 네가 알아서 찾아봐!"
정대식은 윽박을 지르고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유태훈이 하는 일을 지켜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어차피 오늘은 뜻하지 않게 마력을 다 소비해 버려 곧장 헤르보르를 처치하러 갈 수도 없었다.
유태훈이 서펜트를 언데드로 만드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헤르보르 공략은 어쩌면 내일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달려가 무어라도 때려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리석기는!'
정대식은 욕을 다발로 내뱉었다.
솔직히 기철민만 그런 소릴 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작전을 시작하기 전부터 고덕화가 찾아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은데다가, 일이 다 끝난 후에 기철민까지 불만을 갖고 나서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기철민과 김태희의 연속 공격은 계획된 일이었다.
관측 스킬을 레벨 4로 만들어 서펜트를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미리 놈의 약점 부위를 확인할 수 있게 된 정대식은 삼중으로 공격 계획을 세웠다.
브세슬라브 공략 때 느낀 바와 같이, 8~9성급의 고위험도 초대형종 몬스터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이중, 삼중의 처치가 필요했다.
단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장담이었으므로, 기철민으로 안 되면 김태희로, 김태희로도 안 되면 자신이 직접 나설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태희가 정대식의 지시를 무시하고 호라갈레스를 꺼내 들어 뇌전 능력을 쓴 것이다.
그로 인해 서펜트를 쓰러트리기는 했으나, 엄격하게 따져 보면 명령에 불복종한 셈이었다.
애초에 정대식이 세운 계획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으니까 말이다.
여태껏 펜리르 부대와 행동을 함께할 때는 철저히 김태희로 있어 온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이해가 갔다.
아마도 파도 때문일 것이다.
쓰나미급의 무시무시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으니, 정대식이 그것을 막는 데 집중해야 할 거라 여기고 서펜트는 본인 선에서 처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고 일이 다 잘 끝났으니 굳이 김태희의 그런 행동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철민이 본인의 자존심을 구겼다는 이유로 그 문제를 따지고 드니 김태희의 독단적인 행동에까지 화가 났다.
고덕화도 그렇고, 기철민도 그렇고, 김태희에 이르기까지 부대원들이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거친 발걸음으로 숲을 가로질러 베이스캠프로 향하던 정대식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어느새 옆으로 날아온 엔트로피가 말을 붙여 왔다.
<왜 그러십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내가 바보 같아서."
<무엇이 말입니까?>
정대식은 어울리지 않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엔트로피가 자신의 일부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내 어디가 그렇게 부족한 거지? 난 펜리르 부대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왔다. 한 번도 타인을 책임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펜리르 부대원들에 국한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어. 그래서 최선을 다해 녀석들을 강하게 만들 방법을 찾았고 내 마력과 시간과 노력, 돈,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 힘들게 훈련시켰다. 그런데도 왜 내 판단을 못 믿는 것이지? 내가 너무 오냐오냐 잘해 준 건가?"
<무어라 해 드릴 말이 없군요. 방금 하신 질문은 제 판단 능력 밖의 일입니다. 더 나은 대답을 듣고 싶으시다면 상점을 업그레이드하여.......>
"뻔히 알고 있잖아! 상점을 또 업그레이드하려면 1조원이 필요하다. 지금 나한테 그만한 돈이 어딨어?"
정대식은 일갈을 하고 엔트로피의 실체화를 그냥 해제시켜 버렸다.
엔트로피에게도 짜증 나는 소리만 듣고 나니 울화가 터져서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원래 내 목표는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었나?'
현재 정대식의 잔고는 1,139억 정도였다.
상점을 레벨 7로 만들려면 1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실로 엄청난 금액이라 당분간은 보류해 두자 생각하고 있었다.
대신에 가진 돈으로 6레벨의 상점에서 최대치의 현질을 하는 게 어떨까 고민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별안간 모든 게 다 허무해지려고 들었다.
'1,000억 정도면 충분히 남들 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다. 비록 내가 원하는 것처럼 대재벌 수준에는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해?'
확 다 때려치워 버릴까 생각하는 와중에 엔트로피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최후의 전쟁...... 그게 일어나면 인류가 멸망할 거라고 그랬던가? 하지만 그걸 꼭 내가 나서서 막을 필요가 있나? 세상에 나보다 더 잘난 헌터들이 많은데. 내 랭킹 순위라고 해 봤자 이제 겨우 100위권이잖아? 상위 100명들이 다 알아서 하겠지.'
투덜거리던 정대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발길을 옮겼다.
'에이, 몰라. 일단 가서 밥이나 먹고 좀 쉬자.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 * *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뒤, 정대식은 유태훈이 서펜트를 언데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펜트가 워낙에 거대해서 언데드 퀸의 심장을 놈의 머리에 박아 매개로 삼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효력이 얼마나 갈 지는 유태훈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시간 낭비를 할 수 없었다.
즉시 헤르보르를 처치하러 나서야 하는 관계로, 아담이 작전을 물으러 왔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 잠기운이 남은 얼굴을 문지르고 정대식은 커피를 마시며 간략하게 말했다.
「작전이랄 것도 없습니다.」
「서펜트만으로 헤르보르를 처치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불가능할 겁니다. 서펜트나 헤르보르나, 둘 다 초대형종이기는 하지만 급수에 있어서는 수준 차이가 다소 나지요. 서펜트가 8성급이라면 헤르보르는 10성급쯤 될 겁니다.」
「그럼 응당 작전을 짜야지만.......」
「작전을 짤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린 것은 저 혼자서 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반문을 했다.
「뭐라고요? 헤르보르를 혼자서 처치하겠단 말입니까?」
「아, 엄밀히 말해서 혼자 가는 건 아니겠네요. 서펜트를 조종할 유태훈이 필요하니까...... 그를 호위할 인원은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만 준비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지요.」
「아니, 아무리 당신이 올인원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헤르보르를 혼자 처치한단 말입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엄밀히 말해서 혼자는 아니죠. 유태훈이 서펜트를 끌고 갈 테니까요. 서펜트를 이용해 놈의 전력을 약화시킨 후에 제가 헤르보르를 쓰러트릴 겁니다. 그 외의 인원은 불필요해요. 헤르보르가 강력한 만큼 어설픈 지원은 방해만 될 겁니다.」
「방해가 될 정도로 저희 피닉스 공격대가 약하진 않습니다. 저희가 정대식 씨를 도울 수 있게끔.......」
말을 잇던 아담은 정대식의 사나운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부대원들이 자신을 못 미더워한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던 정대식은 아담이 하는 말조차 그와 같은 뉘앙스로 느껴졌다.
정대식은 낮은 목소리로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전 피닉스 공격대를 평가 절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피닉스 공격대만 배제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파견대도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저 혼자 이 일을 해치울 겁니다.」
단순히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심정으로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헤르보르는 여태까지 상대한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거대한 초대형종으로, 하와이 섬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빅아일랜드는 용암과 재에 뒤덮여 완전히 황폐화된 상태였다.
뜨거운 용암이 쉴 새 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근해는 산이 뒤범벅된 열탕이나 다름없었고,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우뚝 선 헤르보르가 24시간 눈을 불태우며 상공과 해상을 감시하고 있으니 은밀히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실 헤르보르가 초대형종이다 보니 은밀히 접근해 함정을 판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헤르보르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놈이 계속해서 뿜어내는 열기를 막아 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므로 가능한 작전이라고는 한꺼번에 총공세를 퍼붓는 것뿐인데, 그래 봤자 헤르보르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 정도에 불과할 테다.
겨우 헤르보르의 기운 좀 빼놓는 데 대원들의 목숨을 갖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역할이라면 서펜트로도 충분했다.
아담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이런 일로 당신이 희생당하기라도 한다면 이 일은 한미 양국에...... 아니, 전 세계에 큰 타격이 될 겁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유일한 올인원이지 않습니까?」
정대식은 커피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올인원이면 올인원다운 면모를 보여야겠지요.」
아담은 막사 밖으로 나가는 정대식을 서둘러 쫓았다.
「그래도 장비는 갖추어야 할 게 아닙니까?」
정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비상 탈출용 수중 로켓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담 씨는 부디 유태훈을 호위하는 데 전력을 다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네크로맨서를 지키도록 하지요.」
비장하게 말하는 아담을 뒤로하고 정대식은 해변으로 나갔다.
어둠이 뉘엿뉘엿 내리기 시작하는 백사장에 유태훈이 서 있었고, 그 주위로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머리가 쪼개져 죽었던 서펜트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멀쩡한 모습을 한 채로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쪼개진 머리가 얼기설기 맞붙어 좀 위태로워 보이기는 해도 서펜트로서의 위용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정대식은 서펜트를 집중한 채로 바라보고 있는 유태훈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성공했군."
"아, 대장님."
유태훈은 약간 쑥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대장님 덕분입니다."
"언데드 퀸의 심장을 사용했다고?"
"예. 그게 아니었으면 서펜트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럼 저 언데드는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위력을 낼 수 있는 건가?"
"초대형종이라...... 100%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70%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 정도면 헤르보르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겠지."
헤르보르 이야기가 나오자 유태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