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현질 전사
- 6권 8화
"나도 펜리르 부대원들을 선발하면서 관련 자료를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야.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펜리르 부대에 들어오기에 충분하다고만 말해두지."
같이 외인부대에서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정대식은 허미래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디버프라는 능력이 귀한 편이기는 하지만 희소성으로 따지자면 종이 술사나 분신 술사가 더 보기 드물었다.
한데 지난 번 펜리르 부대원들을 선발하면서 허미래에 대해 특이한 점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알고 보니 듀얼 능력자였던 것이다.
트리플리스트였던 정대식이 외인부대로 뽑혀 간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외인부대에는 여러 포지션을 한번에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허미래는 디버프 한 가지 역할만을 도맡았기에, 어찌 보면 외인부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인부대 소속이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듀얼리스트로 조작계와 변화계, 이중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듀얼리스트라는 사실을 같은 부대원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이유인즉 변화계 쪽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탓이었다.
그녀가 주로 쓰는 디버프는 조작계 능력이었고, 변화계 쪽 능력은 보유는 하고 있으되 제대로 쓰지를 못해서 없는 능력인 셈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변화계 능력을 각성시켜 줄 수 있다면,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이 될지도 몰랐다.
"솔직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요."
불평하는 이재우와 마찬가지로 윤현민도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으나 상세히 설명하기도 귀찮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허미래 본인이 듀얼리스트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으니, 그걸 먼저 떠벌리기도 그래서 정대식은 "그냥 그렇다고"라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자연히 화제가 돌아가 다른 대원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사실 뭐, 능력이 별 볼 일 없기로 치면 기철민만 하겠어? 본인이 죽어도 펜리르 부대에 들어오겠다 떼를 써서 어쩌다 같은 부대원이 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우리 수준엔 많이 부족하지."
이재우가 우쭐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 윤현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어요? 전 전부 대식이 형이 뽑은 줄 알았는데. 기철민, 그 형하고는 전부터 알던 사이니까......."
정대식은 잘라 말했다.
"난 내 부대원을 채우는 데 사감을 섞지는 않았어."
"그렇군요. 하지만 뭐, 단순히 특이한 능력을 타고 났다거나, 마력량이 많다고 강한 것만은 아니니까. 그 형은 펜리르 부대원들 중에서 가장 경력이 많더라고요. 타이탄 공격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여러 파티나 막공을 전전했던 모양이던데요?"
"그렇지. 그래서 이재우 이놈 말처럼 그리 쓸 데가 없지는 않아. 부대 분위기도 잘 읽는 편이고."
이재우는 어르고 달랬더니 말을 잘 듣고 있었다.
일단은 정대식을 따르고 있으니 이대로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대원들과 관계를 바로 맺기로 결심한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진짜로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고덕화나 김태희, 이 두 사람이었다.
그나마 김태희는 일전에 와서 경고한 것을 보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그녀가 따를 만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면 순순히 숙이고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고덕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역시, 크툴루 부대에서 겪었던 참사의 영향이 큰 거겠지.'
윤현민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지 고의적인 것처럼 고덕화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있었다.
정대식은 가장 가까워지기 힘든 대원이 바로 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뒷고기 집을 나서면서 정대식은 뜻밖에 윤현민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원들 개개인의 능력이 어떠하고 배경이 어떠한지, 그에 관해서는 그들을 뽑은 정대식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3자의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달랐다.
아마 오늘 윤현민이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부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들도 없는데 그들끼리 왈가왈부하는 것도 그렇고, 부대원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윤현민은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정대식은 대원들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확실히 잡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윤현민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오늘 즐거웠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은 것 같네."
"어어, 아뇨! 저야말로 불러 주셔서 감사했어요. 진짜진짜, 영광이에요!"
두 주먹을 꽉 쥐고 흥분하는 윤현민을 보고 정대식은 설핏 웃었다.
"넌 왜 그렇게 헌터들에게 관심이 많은 거냐? 사실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넌 그냥 일반인인데."
정대식은 그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신경한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윤현민은 곧 얼굴을 펴고 씩씩하게 말했다.
"물론 저도 신의 선택을 받은 각성자였으면 좋았겠죠. 사실 멋지잖아요? 이계의 존재에 맞서 싸우는 초능력자들이라니. 진짜 근사해요. 그렇지만 전 일반인이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헌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게 좋아요.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감사했어요. 마치 제가 펜리르 부대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정대식은 어렴풋하게나마 윤현민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아마 진짜 능력자들보다 더 많은 공상과 궁리를 해 왔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들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정대식은 나중에 공격대를 창설한다면, 그를 영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의 일이니, 그 사실을 입에 담는 대신에 문득 떠오른 바를 질문했다.
"......아마 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 같군. 하나만 물어보자. 부대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결속하게 되는 건, 뭣 때문이지?"
윤현민은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당연히,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이죠."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
"서로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정대식 또한 그랬으니까.
돌이켜 보면 마음속에서 무언가 끈끈한 정과 같은 감정이 생겨났던 것은 언제나 어려운 순간을 돌파하고 난 후였다.
처음으로 막공에서 케르베로스를 잡았을 때, 부대장이 다친 위기 상황에서 마력량이 바닥난 동료들을 이끌고 던전을 돌파했을 때, 실종된 최선을 포기하지 않고 수색해 결국에는 찾아내었을 때.
성취와 기쁨, 신뢰와 소속감이 가슴속에서 솟아났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타이탄 공격대원으로 인정받았고, 점차 강해져 지금은 한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부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정대식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내가 뻔한 것을 물었어."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윤현민이 마치 소녀 팬처럼 얼굴을 붉혔다.
정대식은 그의 머리를 한 번 쓸어 주고는 "또 보자"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이재우와 함께 사택으로 돌아왔다.
* * *
정대식은 그 후로도 하루에 한 명씩, 펜리르 부대원과 만나 개인 훈련 시간을 가졌다.
말이 개인 훈련이지, 실은 그 핑계로 면담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던전을 골라 다니며 능력 운용에 대한 코치도 해 주고, 끝난 후에는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정대식은 윤현민의 판단에 놀랐다.
'그 녀석, 정확하게 부대원들이 갖고 있는 능력의 장단점을 알고 있었어.'
서지원도 김송근도, 본인 일이다 보니 윤현민이 지적한 부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들도 헌터인지라 어떻게 하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지원은 어김없이 자신의 부족한 마력량에 대해 푸념했고, 김송근은 몇 개의 분신만으로도 좋으니 집중해서 싸우라는 말에 안도했다.
분신들의 크기를 더 키울 수 있으면 좋을 거라는 말에도 적극 동의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였다.
무슨 수로 마력량을 늘리고, 어떻게 분신의 크기를 키우느냐?
이런 부분은 노력으로 메울 수 없었다.
두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대식은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으나 둘은 단순한 위로 차원으로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대식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상점의 업그레이드다.
타인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스킬을 획득하기만 한다면.......
정대식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부대원들의 능력에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킬 획득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1,000억이나 되는 돈을 모으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정대식은 대원들과 각자 시간을 보내느라 충분한 사냥을 하지 못하는 데 조바심을 느꼈다.
그는 엔트로피를 불러 물었다.
"내 잔고가 얼마나 되지?"
<331억 7,800만 원가량입니다.>
"그간 타이탄 공격대에서 받은 정산까지 다 포함한 거지?"
<물론입니다.>
"최근엔 사냥을 못 갔다 하더라도 한동안은 죽어라고 다녔는데도 얼마 되지 않는군."
이래 가지고 언제 1,000억을 다 모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1,000억을 모아서 상점을 Lv6으로 만든다고 해도 원하는 스킬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다음은 1조다.
1조라는 수입은 전 세계에서도 초우량 기업이 벌어들이는 순수익과 맞먹었다.
큰 규모의 국가 사업 예산과도 비등하며, 어지간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볼 일 없는 돈이었다.
1조, 정말로 엄청난 금액이다.
그러나 몇몇 헌터들이 이보다 더한 수입을 벌어들이기는 했다.
최희는 갖고 있는 재산은 여기저기 투자하지는 않아서 세계 최고 랭킹치고 재산은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4, 5순위 랭커들이 그녀보다 가진 게 더 많았다.
그들은 유태훈처럼 사업의 투자에 성공한 헌터들이었다.
순전히 사냥만으로 1조를 벌어들이는 헌터는 없었다.
'내가 과연 1조라는 돈을 모을 수 있을까? 아니, 문제는 과연 1조라는 돈을 상점 업그레이드에 쏟아부을 수 있느냐다.'
정대식이 우려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1조나 되는 돈을 모을 수 있을 정도면 뭐 하러 굳이 스킬 획득에 목을 매겠는가?
공격대 창설 같은 것도 할 필요 없다.
솔직히 1,000억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원하는 만큼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데도 왜 자신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역시, 섣부른 약속이었던 것일까?'
정대식은 이재우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타이탄 공격대에 머물고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격대를 창설할 때까지도 그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을 했던 것이다.
뿐만이랴?
그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도 했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약속을 모르는 체하자니 양심이 따가웠다.
그렇다고 억지로 그런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재우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