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현질 전사
- 6권 6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정대식은 곧장 이유가 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마력 낭비가 엄청나잖아? 이러니까 저런 마력량을 가지고도 모자라단 소리를 하는 거지.'
정대식은 잔소리를 했다.
"마력이 쓸데없이 흘러가 버리잖아. 붓 끝에 정신을 집중해. 그래야지 마력이 낭비되는 걸 막을 수 있을 거 아냐!"
"그건 제 자의로 안 돼요. 특수한 붓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특수한 붓이라고?"
이재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이건 제 짐작인데요. 제 마력을 한 점으로 뽑아낼 수 있는 도구, 그러니까 붓 같은 게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기는 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헌터들이 쓰는 아이템은 무구로 한정된 경향이 강하지."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들어 보려고 이런 거 저런 거 사들이며 연구도 해 봤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집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이 다 그걸 위한 거였나?"
정대식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링크된 엔트로피에게 의식을 전달했다.
'엔트로피, 너 요전번에 그랬지? 마정석뿐만 아닌 일반 아이템도 판매를 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상점에서도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겠네?'
<아직은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상점을 업그레이드해 나가면 가능하겠지?'
<확답은 못해 드리겠습니다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역시 그럼 그 가운데서 이재우가 찾는 아이템도 있을지 모르겠군.'
하다못해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명장을 통해서 이재우를 위한 아이템을 제작할 수도 있었다.
정대식은 의식을 외부로 돌리고 이재우에게 말했다.
"좋아. 네가 벌어들이는 돈을 모아서 적절한 금액이 되면 네가 말한 그 아이템을 얻을 방법을 찾아보자."
"어, 정말요?"
"아니면 하다못해 네 마력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도 찾아보자."
"그게 가능합니까?"
"일단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정도로만 말해 두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해도, 스킬을 통해서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정대식이 점치는 방향대로라면 궁극적으로 현질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상점을 업그레이드해야 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돈 문제니까.'
헌터가 되어서까지 돈 문제로 이렇게나 골머리를 썩을 줄이야.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참는데 이재우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둘 다 좋은데, 전부 장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까?"
"하기 나름이겠지만, 단시간에 끝나지는 않겠지."
이재우는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말했다.
"부대장께서는 타이탄 공격대에 얼마나 계실 겁니까?"
"뭐? 그건 왜 질문하는 거지?"
"사실 펜리르 부대가 창단된다는 말이 있었을 때, 떠도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문?"
"부대장님이 오래지 않아 타이탄 공격대를 나갈 거라고요. 처음부터 자신의 공격대를 창설할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펜리르 부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죠. 펜리르 부대로 갔다가 금세 부대장님이 관둬서 리더가 바뀌거나, 부대가 해체되거나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럼 남겨진 부대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잖아요?"
정대식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공격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애당초 그걸 위해 입대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게 펜리르 부대의 해체와 이어진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벌써부터 끝을 고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건 내가 진즉에 염두에 두고 있었어야 할 문제다. 이재우의 말이 맞아. 내 공격대를 만들려면 펜리르 부대를 신경 쓰지 않고 타이탄 공격대를 떠나야 해.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을 거야. 기껏해야 1, 2년? 헌터의 계약 기간은 짧은 편이니까. 그럼 부대원들이 그 일에 영향을 받겠지.'
정대식은 펜리르 부대를 만들면서도 부대원들의 장래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타이탄 공격대원이고 자신이 없어도 다른 부대장의 지휘를 받으면 될 문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설령 펜리르 부대가 없어지더라도 다른 부대로 배치될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재우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한 번 배치된 부대를 나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소속된 부대에 정과 의리를 갖고 부대장을 부모처럼 따르는 것이다.
정대식의 제안을 걷어찬 박솔지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다른 부대장들도 부대원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부대의 결속력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정대식은 부대원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부대원들과 자신과의 관계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상점 업그레이드를 해 그들의 능력을 키워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전부라고 믿어 버렸어. 하지만 아니었던 거야. 부대원들은 내게 확신이 없었던 거다. 리더를 믿지 못하니 동료들끼리도 신뢰가 생길 리 없지.'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문제였던 것이다.
정대식은 스스로의 멍청함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내가 외인부대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부대장인 김시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커맨드 모드라는 강력한 능력이 있었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모든 면에서 리더다웠어. 하지만 나는 어땠지? 리더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는커녕, 훈련조차 알아서 하라 해 놓고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잖아!'
정대식은 크게 반성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이재우를 쳐다보았다.
이재우는 본인의 일에 신경 써 주는 정대식이 고마우면서도, 짧은 관심이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는 아마 이런 일을 많이 겪어 왔을 것이다.
네 번이나 부대를 바꾸었으니까 말이다.
다른 부대장들도 처음에는 그를 이래저래 신경 써 주었겠지만, 안 되니까 금세 포기해 버렸을 테다.
그러니 이재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이템을 구해다 주겠다느니, 능력을 계발시켜 주겠다느니 하는 말은 입에 발린 소리로 여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더욱이 상대가 오래지 않아서 타이탄 공격대를 떠날 인물이라면 말이다.
정대식은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
"약속하지. 타이탄 공격대와의 계약 사항과는 별개로, 내가 펜리르 부대원들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만약에 타이탄 공격대를 떠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 부대원들은 데려갈 거라는 말이다."
"어, 하지만 그게 됩니까? 다들 타이탄 공격대와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씩 장기 계약을 하기도 한다고요!"
"그런 경우는 위약금을 물면 돼. 아니면 여기 계약이 끝나는 대로 내 공격대로 들어와도 되고.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너희들을 책임질 거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 첫 번째 부하들이니까."
이재우는 좀 감동받은 눈치였다.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툭 하니 말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가 볼까?"
"예!"
씩씩하게 대답하는 이재우의 뒤를 따르며 정대식은 문득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강영후의 꾐에 빠진 기분이군. 내가 더 이상 다른 부대장 휘하에 있기가 어렵다는 것도 한 이유였겠지만, 내게 부대를 만들라고 한 건 내게 책임감을 부여해 나를 주저앉히려고 한 거였나? 아니면 지금의 펜리르 부대를 내 공격대의 모태로 만들려고?'
이 모든 게 강영후의 속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든 정대식과 연계되고 싶어 하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겉으로는 최희처럼 정대식이 올인원이 될 거라는 사실에 안달하고 있지는 않아도, 내심으로는 그 가능성과 값어치를 높이 점쳐 두고 있는 것이다.
'강영후는 나와는 달리 사람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아직 내가 공격대를 창설하려면 갈 길이 멀겠군. 일단은 펜리르 부대부터 잘 꾸려 나가야지. 겨우 부대 하나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공격대를 이끄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거야.'
* * *
정대식과 이재우는 그날 성공적으로 던전 공략을 마쳤다.
비록 얻은 것은 옐로 스톤뿐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은 한낱 마정석의 값어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재우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 정대식은 대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정대식은 던전을 나와 이재우에게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말했다.
"가는 김에 가볍게 술도 한잔하지. 어때?"
정대식이 하는 말에 이재우는 눈을 빛내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지요. 사 주시는 겁니까?"
"그럼, 부대장 체면에 얻어먹을까?"
"더치페이해도 되는데요?"
"됐다! 내가 사지."
이재우야 모르겠지만 정대식이 누구에게 먼저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사 주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진짜 가난할 땐 제 입으로 들어가는 밥조차 아까웠기에, 다른 사람에게 밥을 사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돌이켜 보니 형편이 풀린 지 제법 되는데도 그간 돈을 벌기에만 바빠 누군가와 밥 한 끼 못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앞으론 이런 자리도 좀 자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대식은 자신이 알고 있는 뒷고기 집으로 갔다.
거기서 고기와 술을 시키고 앉아 있는데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형, 지금 뭐 하세요?
다름 아닌 윤현민이었다.
정대식은 무시할까 하다가 방금 전에 자신의 얄팍한 인간관계에 대해 반성하던 참이라 생각을 바꿔 답장을 보냈다.
-대원하고 밥 먹고 있는데.
-우와! 설마 펜리르 부대의?
-너, 어떻게 그걸 벌써 알고 있냐?
-저야 그런 소식에 빠삭하죠. 제가 형한테 좀 관심이 많잖아요.
아마도 타이탄 공격대의 홍보용 SNS를 보고 알았던 모양이다.
정대식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윤현민이 자신도 합석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정식 회식이면 당연히 안 될 일이지만, 상대가 이재우 하나뿐이고 사내놈 둘이서 멀뚱히 앉아 있으려니 좀 머쓱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대식은 윤현민이 오는 것을 허락했다.
잠시 후.
윤현민은 총알택시라도 타고 날아왔는지 금세 도착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고깃집에 들어와 손을 흔들었다.
"형! 대식이 형!"
"여기다."
재빠르게 다가와 앉은 윤현민은 이재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이재우는 웬 꼬마인가 하는 눈치였으나 윤현민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형이 이번에 펜리르 부대원이 된 재우 형이죠?"
"어, 어떻게 알았냐?"
"재우 형은 타이탄 공격대에서도 유명 인사잖아요! 워낙에 갖고 있는 능력이 특이해서. 어느 공격대에 있든지 간에 소문났을 걸요?"
"어...... 그, 그래?"
"진짜 멋있어요. 종이로 그린 건 뭐든지 구현해 낼 수 있다니. 구현계 능력으로는 최고 아니에요? 게다가 마력량도 굉장한 것 같던데."
윤현민은 만난 김에 사인도 해 주고 사진도 찍어 달라며 이재우에게 살갑게 굴었다.